남의 돈으로 치루는 전쟁이다 보니 병력과 물자를 아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월급을 미군에게서 받다가 보니 인원도 채울 대로 채워졌다. 그래서 필요 없는 인원도 파병을 해서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사단 본부에 인원이 2 명밖에 없는 참모부에도 상사 급의 선임하사가 있었다. 내가 생각할 때 제일 어색한 일은 한국에서는 연대급에서도 제일 할 일이 없는(파월 전에 연대 정훈과에 있어 본 내 경험으로) 정훈장교가 대대급까지 배치되었던 일이었다. 그것도 한국처럼 대대 병력이 한 곳에 주둔하지 않고 중대가 몇 KM 씩 떨어져 있고 헬기로나 이동이 가능해서 일반 병사들을 만날 수도 없는 곳에서 정훈장교가 할 일이 있을 수가 없어서 실제로 나중에 내가 만난 대대 정훈장교 출신에 의하면 파월 기간 1년 내내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이기가 고역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전투를 하다가 전사자가 생겨도 사망 보상금을 미국이 지불했다. 오늘날 화폐가치로는 얼마가 될지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67년도 내 대학입학금이 3 만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적은 돈이라고 할 수없는 48 만원이었다.
72년 4월에 벌어진 악명 높은 안캐패스 전투는 과거와 달리 월맹 정규군과의 전투였기 때문에 포격을 당하여 아군의 피해가 심했다. 이전의 전투처럼 총알이나 적이 설치한 지뢰 때문에 전사를 해도 비교적 신체가 온전히 보존된 채로 전사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조각이 나서 전사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전사자 숫자를 부풀릴 우려가 있다가 보고 훼손 되지 않은 시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지옥 같은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조립하기 위해서 미미 날라 가버린 팔 다리, 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월남군의 시신을 야전삽으로 찍어서 숫자를 맞추는 곱빼기 지옥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나는 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산처럼 쌓여 있는 군수물자들을 보고 미국의 군수물자 조달 능력에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책에서 보니 한국전쟁 당시 소모한 총알 대비 죽은 병사의 숫자를 보면 병사 한 명당 총알 한 가마니 정도를 소모한 셈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월남전에서는 베트콩 한 명 사살 하는데 한 트럭분의 총알은 소모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생겨난 새로운 군사용어가 ‘초토화 작전’이었다면 베트남전에서는 ‘융단폭격’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융단을 깔듯이 폭격을 했다는 의미인데 사실상 비용은 많이 들고 효율은 낮았다. 위험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융단폭격을 한 것은 분명 고의적인 학살인 것이다.
미국이 월남에서 1965년부터 사용한 폭탄 양은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총 폭탄 양을 합한 것의 1.5배를 사용하였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7,200억 달러 (당시 한국의 1년 예산은 10억 달러 정도)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뿌려댔다.
월남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남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다. 전쟁배상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베트남은 거인 미국을 이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즉 미국의 자존심을 마구 구긴 대가로 이때부터 베트남은 27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철저하게 경제적 보복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한 미국 역시 1971년 달러를 평가절하하고 그때까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태환 중지 조치를 취하자, 국제통화체계가 크게 동요하고 국제 금융 혼란이 닥쳤으며,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월남전의 피해는 월남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이웃에 있는 캄보디아에게도 혹독했다. 우리가 흔히 '킬링필드'로 알고 있는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은 69 년~73년간 벌어진 미국에 의한 폭격으로 인한 제 1 학살과 크메르 루주 집권기간인 75년~79년까지 벌어진 제 2학살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제로 한국국방연구원의 세계 분쟁 데이터베이스에는 캄보디아 땅에 단지 베트콩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4 년간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자가 60 만 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자신이 불리할 때면 미국의 학살책임을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미국을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조하고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캄보디아 폭격을 거부하다 군사법정에 기소됐던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은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라고 증언을 한 바가 있는 정도다.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 만 9129t 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아메리카가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 만 t의 3 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 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은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 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출처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이 쓴 "킬링필드의 진실")
궁핍한 처지에서 정신력 하나로 버틴 베트콩 쪽에서는 힘든 전쟁이었겠지만 미군 쪽에서는 남아도는 전쟁 물자를 때려 붙는 전쟁이었고 그 편에 붙었던 한국군은 덕분에 호강을 할 수 있었다. 모든 무기와 보급품을 미국에서 지원 받았었기 때문에 고국의 가난한 군대 사정과는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물건이 남아돌아 낭비하는 것을 넘어 가능한 한 하나라도 더 빼돌려서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애국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월남에서 수송 업무를 맡고 있었던 한진에서 대규모 작전이 없자 수송물동량이 감소되어 수송능력이 남아돌아 수송물동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을 주월 사령관에게 부탁했었다. 그런데 사령관이 지시한 방법이란 것이 기가 막힌 것이다. 전방부대에 야간 요란사격을 최대로 많이 하라는 지시를 내려 포탄의 수송량과 탄피의 반송량을 증가시켜 수송물동량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미군과 수송용역을 맡은 한진이 더 많은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포탄을 많이 쏘아 없애는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이 귀국할 때 사방 1m 되는 나무상자에 자기가 사용하던 사물이나 구입한 물품을 담아 갈 수 있는 귀국 Box라는 것이 있었다. 월남에서 보내온 귀국박스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율화 이전에 한국인들이 단체로 외국의 문물과 대중소비문화를 받아들였던 역사적 사건에 해당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한다. 사병들은 월급이 적고 PX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품도 한정되다 보니 사실상 자기에게 할당된 Box에 물건을 채워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몫의 박스를 월급을 많이 받는 장교나 하사관들에게 주기도 하고 수단 좋은 사병들은 휴대식량으로 나오는 C-Ration이나 하다못해 한국에 가서 고물로 팔 수 있는 신주로 된 포탄의 탄피를 넣어 오기도 했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 해야지 물건에 욕심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 같은 소수의 결벽증환자들을 제외하고 월남전에 참전한 모든 군인들은 장교 사병 할 것 없이 하나라도 더 챙겨가려는 정신무장 하나는 투철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베트콩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말단 소총중대의 경우에는 중대장이라도 돈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사병들이 귀국 박스에 담아 올 수 있는 건 탄피와 맥주 캔뿐이었다. 그러나 적과 싸우러 다니는 일반사병의 경우 탄피를 주울 수도 만들 시간도 없으며 탄피 모은다고 할 일없이 실탄사격을 할 수도 없었다. 손으로 실탄을 분해해서 화약을 쏟아버리고 탄피를 모으기도 했으나 뇌관을 처리 못해 귀국선이 항해할 때 파도에 흔들려 귀국 박스 속의 탄피 뇌관이 터지는 일이 생겨 나중에는 탄피를 귀국선에 싣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탄피 말고 일반 병사들이 모을 수 있는 건 알루미늄 맥주 캔이었다. 병사들은 부대내외 심지어 그 나라 1번 국도변에 도로정찰 나가서도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맥주 캔을 줍기도 했었으니 본질적으로 보면 요즘 독거노인들이 폐박스나 헌 병을 주워 모으는 모습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것은 노인들이 폐품 줍는 것은 개인들의 고단한 삶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전쟁하러 온 군인들이 폐품 줍는 것은 나라의 가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월남전 막차를 탄 우리들에게는 박스를 꾸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대의 짐을 꾸리는 것이 최우선이라서 개인의 짐을 염두에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수를 앞둔 우리들은 몇 개월 동안 각 참모부의 필수요원만 남기고 전체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호 속에 들어가서 경계근무를 서고 반은 컨테이너에 짐을 채우는 데 동원되었다. 하루 종일 짐을 싸다가 교대시간이 되어 호 속으로 들어가서 근무를 서면 그대로 총을 든 채 잠이 든 적도 있었다.
1971년 이후 한 때 월남에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은 잘 모르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한국군이 미군 보다 철수가 늦었던 것은 아마도 돈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어려운 국가의 처지에서는 월남에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돈을 버는 셈인 것이었다. 실제로 73년 3월에 철수 하는데 72년 9월까지 새로운 병력이 충원되었다.
1973년 1월 27일 자정(현지시간 1월 28일 08시)을 기해 휴전이 공표되었다.
전쟁터에서는 후퇴 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무시했다가 피해를 보는 일이 월남전에서도 역시 벌어졌었다. 1맹호사단에서는 19 번 도로 안케패스 전투의 치욕을 들 수 있고 백마 사단은 1번 도로 붕로만 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붕로만 고개에 대한 경계책임은 제29연대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휴전을 하루 앞둔 1973년 1 월 27일 밤 23시경 붕로만 고개의 목교가 베트콩에 의해 폭파되고 베트콩기가 초소에 걸렸다. 베트콩은 '현상 동결의 휴전협정'에 따라 그들의 지배지역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트콩기를 휴전 전날 밤 전국적으로 게양하라는 월맹의 비밀지령에 의해 휴전 발효와 함께 베트콩기를 게양한 것이다.
사단장과 연대장의 질책을 받은 제1대대장 유재민 중령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날이 밝아지자 자신이 직접 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3중대에서 1개 분대를 차출하여 함께 장갑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 도착시간은 휴전 발효 불과 1시간 5분을 남겨놓은 06시 55분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대대장 일행은 베트콩을 우습게 알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장갑차에서 내려서 "웃기는 놈들..."하고 코웃음을 치며 교량에 다가갔다. 맨 앞에서 심재철 중사가 문제의 베트콩기를 뽑아가지고 장갑차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부근에 잠복하고 있던 베트콩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B-30적탄통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대대장 유재문 중령과 심재철 중사 등 6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6명이 부상했다.
배원식 연대장은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 일대에 포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베트콩은 암석지대의 천연동굴에 몸을 숨겨 아군의 포병화력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제 연대가 당면한 문제는 적의 제압이 아니라 숨진 시체의 회수에 있었다. 특공조까지 투입하며 시체 회수 작전에 돌입했으나 적의 저항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세호 주월한국군사령관은 소탕작전을 명령했지만 막상 저녁 무렵 작전이 개시되고자 하는 시점에 중지하라는 다시 명령이 내려졌다. 사연은 이세호 사령관이 흥분해서 작전을 승인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가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깨닫고 취소시킨 것이다. 한 마디로 최고 사령관부터 일선 지휘관까지 갈팡지팡이었다.
연대장은 닌호와 군청에 파견했던 연락장교 이형관 대위에게 확성기가 달린 장갑차를 빌려오도록 하여 백기를 달고 현장에 보냈다.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적측에 방송을 했다.
"우리는 휴전협정을 지켜 공격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숨진 장병의 시체를 찾아야 되고 그래야만 철수를 할수 있다. 시체를 돌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아마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자세로 베트콩에게 사정사정한 예는 이 경우가 유일할 것이다. 이렇게 확성기를 통해 2일간에 걸쳐 그들을 설득시켜 겨우 시체를 회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굴욕적인 과정을 겪어가며 백마사단 제29연대는 1번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고 미군 수송기를 이용하여 도망치듯 빠져 나올 수 있었다.제29연대는 2월 3일부터 6일 사이에 C-130송기로 3.900명의 병력을 39회, 화물 3,080톤을 77회로 나트랑 공항으로의 철수를 완료하였다.
나중에 영현을 수습할 때 대대장의 손목에 있어야할 로렉스 손목 시계가 대대장을 경호해야할 중사의 손목에 차여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마 전사한 중사는 자기가 전사할 줄 모르고 대대장 보다는 명품을 사수(?)해야 할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던 같다.
당연히 한국은 미군이 제공했던 장비를 최대한 보유한 상태에서 철군을 원했지만 미국의 계획은 남베트남에게 이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했던 장비의 소유권과 철수비용, 국내에서의 운용방안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은 71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1973년 2월 6일 십자성 부대 산하 수송부대는 물건 하나도 베트콩에게 넘어 가지 못하도록 땅에 묻을 것을 묻고 태울 것은 태우라는 지시와 함께 모든 차량의 부속품을 신품으로 갈아서 완전히 새 차를 만들어서 고국으로 보냈다. 정 병장은 철수 차량 대열의 마지막 후미 5 톤 견인 트럭을 탔다. 나트랑으로 향하는 다리가 이미 베트콩이 파괴를 해서 월남군이 엉성하게 설치한 부교 위를 차량 한 대씩 조심해서 건너갔다. 마지막으로 견인트럭이 통과하려고 하자 월남군 공병 장교가 다가오더니 견인차가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자기들이 제공하는 지프차를 타고 견인차는 놓고 가라고 했다.
이미 선두의 모든 차량들은 다리를 건너가 버렸고 무전기도 없어서 누구에게 보고를 하거나 지시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월맹군 장교의 말대로 견인차를 두고 가거나 끌고 가거나 독자적으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 운전병이 정 병장에게 "저 새끼 쏘아 버려!"라고 해서 M16으로 월남군 장교의 발밑에 발사를 했다. 월남군 장교가 놀라서 뒤로 물러선 틈에 전진을 해서 월남군 장교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걸고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다리를 숨도 못 쉬고 건너서 무사히 견인차를 한국으로 가져 올 수 있었다. 견인차를 탐내는 월남군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안전만을 위해서 지프차로 갈아 탈 수는 없는 일이고 차 한 대라도 고국으로 가져가려는 마음에 생명을 걸고 감행한 것이었다. 단지 정 병장 일행뿐이 아니라 당시 파월 장병 모두는 가난한 나라 살림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했었다.
우리는 가난한 나라 군대답게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는 원칙으로 짐을 꾸렸다.
심지어는 베갯속은 버리고 베갯잇까지, 깔판으로 쓴다고 탄약상자를 분해해서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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