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가 남긴 것은 - 주간경향
2016.09.2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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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의 도요토미는 쾌활함과 냉혹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3화 초기의 다카마쓰 성 공략전이나 규슈 정복전에서 히데요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법을 아는 전략가로도 묘사된다.
53주년 방송의 날을 맞아 특별편성된 KBS의 5부작 역사 드라마 <임진왜란 1592>가 막을 내렸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3화가 세간의 화제가 됐다. 도요토미 역의 배우 김응수의 연기도 연기였지만, 일본의 시각에서 본 도요토미의 모습이 상당히 반영됐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1592>의 김한솔 PD는 “우리가 임진왜란의 피해자라고 해서 자국사에만 갇혀서는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가 없다. 일본은 왜관을 통해 조선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포르투갈 등 해외랑 교역을 했다. 그에 비해 조선은 144년 동안이나 일본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조상들이 어떤 실책을 저질렀는지 반면교사를 삼아야 지금 우리는 현재의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반성할 수 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임진왜란 1592>는 애초 다큐멘터리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김 PD도 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다. 하지만 중간에 드라마로 계획이 변경되면서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혼합물 성격을 띤 ‘팩추얼 드라마’로 제작됐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 교수, 노영구 국방대 군사전략학과 교수 등 임진왜란 전문가 5명이 자문을 했다.
<임진왜란 1592>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분) / KBS 제공
<임진왜란 1592>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분) / KBS 제공
도요토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시도
이 드라마는 도요토미에 대한 입체적인 묘사가 시도됐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과거 <조선왕조 500년>이나 <불멸의 이순신>도 일본 국내 사정을 다루기는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및 일본 측의 묘사는 지나치게 단편적이었다는 지적이 많았다. 2004년부터 1년간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 도요토미는 전쟁광으로 묘사됐다. 99화에서 도요토미는 이순신 트라우마를 겪다 못해 부하들에게 칼을 휘두르다가 하극상을 당하고, 그 분에 못 이겨서 결국 숨을 거둔다. 한국인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역사왜곡이 지나치다는 평가가 있었다. 반면 <임진왜란 1592>의 도요토미는 쾌활함과 냉혹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런 묘사는 드라마의 자문을 맡은 김시덕 교수의 영향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저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에도 시대 일본의 임진왜란 문헌을 검토했다. 그리고 그는 도요토미에게서 ‘의도된 광기’가 보인다고 평가했다. 인자함과 잔인함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카리스마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명나라를 치겠다는 히데요시의 생각은 앞뒤 재지 않은 망상이 아니라 나름 치밀한 계산 하에서 이뤄진 결정이었다. 3화 초기의 다카마쓰 성 공략전이나 규슈 정복전에서 도요토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법을 아는 전략가로도 묘사된다.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앞에서는 칼끝에 꽂아주는 떡을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나는 떡을 싫어한다”며 야망을 비추기도 한다. 이런 도요토미의 모습은 일본 대하드라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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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지 못한 인물 비중있게 다뤄
김시덕 교수는 드라마에서 한국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이시다 미츠나리의 비중이 높았던 것도 의미있게 봤다. 그는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최신 연구 주제는 이시다 미츠나리다. 그는 야전 장수가 아니었기에 크게 드러나는 인물은 아니지만, 히데요시와 긴밀하게 연락하며 임진왜란 전체 그림을 읽고, 명나라와의 협상을 주도한 것 역시 그가 아니겠느냐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이번 드라마는 이런 최신 연구성과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작품이 기존의 임진왜란 소재 드라마의 틀을 근본적으로 넘어서진 못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주로 다루는 ‘할미의 야망’ 블로그 운영자 박광주씨는 “역덕(역사 마니아) 사이에서는
<임진왜란 1592>에 대한 부정 평가가 압도적이다. 결국 도요토미를 북한 김정은처럼 묘사한 반공주의 스토리의 재판이 아닌가”라고 봤다. 이번 드라마가 일본 드라마와 영화의 연출 방식을 상당히 받아들인 건 사실이지만, 이야기 전개에 대해서는 큰 발전이 없었다는 시각이다. 박씨는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는 영주들에게 조선에서 난폭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는데, 드라마에선 도요토미가 병사들에게 약탈이나 포로사냥을 허용한 것처럼 묘사한다. 또한 일본 장수들이 임진왜란에 열광적으로 찬성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 역시 팩추얼 드라마와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다. 오히려 전쟁통에 고통을 당한 일본의 평범한 남녀의 모습이 좀 더 입체적인 인물 묘사가 아닌가”라며 “과거 임진왜란 소재 사극의 왜곡이 심각한 수준이라서 상대적으로 낫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임진왜란에 반대 목소리를 낸 대표적인 일본의 인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를 들었다. 박씨는 “5부작 특집이 아니라 좀 더 긴 회차의 대하드라마를 만든다면 일본 내에서도 임진왜란에 부정적인 여론이 있었다는 점도 묘사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시덕 교수는 이번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은 일본의 주요 인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들었다. 그는 원래 도요토미의 적이었으나 임진왜란에서는 혈기왕성한 일본 장수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했다. 김 교수는 “일본의 주도적 인물이 대부분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에 고바야카와처럼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중장년 무장들은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번 드라마를 계기로 한국인들이 일본을 자세히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40대 일본인 남성 ㄱ씨는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인데도 서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지식을 잘 배우지 않고, 막연한 이미지만 가지고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며 “상대방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아는 과정 속에서 양국의 친근감도 싹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소년기의 상당 기간을 한국에서 보낸 그는 어릴 적 임진왜란에 대한 한·일 양국의 시각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는 도요토미가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영웅적인 면을 강조하는 반면, 한국에선 그를 전쟁을 일으킨 부정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며 “침략전쟁이라는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시에 한국과 일본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일본인들은 도요토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1996년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히데요시>는 도요토미를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드라마이자, 일본인이 생각하는 도요토미의 긍정적인 측면이 담긴 작품이다. 김문자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의 2013년 논문에 따르면, <히데요시>에서 그(다케나카 나오토 분)는 끝까지 주군(오다 노부나가)에게 의리를 다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낮은 신분일 때는 다이묘를 꿈꾸고, 다이묘가 된 이후에는 전국 통일을 꿈꾸는 모습에서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서 임진왜란은 간략하게 언급한 게 전부다. 18년 뒤인 2014년 제작된 <군사 칸베에>에서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해외 원정을 준비는 등 도요토미의 어두운 면도 잘 담아냈다. 여기서도 임진왜란에는 긴 분량이 할애되지 않고 있다. 김 교수는 “외교적 문제 등이 걸려 있어서 임진왜란 장면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상식적인 일본인의 대부분이 과거 침략을 미화하기보다는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예의에 맞다고 생각하는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연출자가 숨겨놓은 재미있는 장면들
한편, 몇몇 마니아들은 드라마 3화의 도입부인 도요토미의 빗추 다카마쓰성 공략전이 일본의 2012년 작 영화 <노보우의 성>을 베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한솔 PD도 “다카마쓰성 장면은 <노보우의 성>과 아에 똑같이 연출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역덕이나 일본인들에게 ‘같은 장면을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자신의 연출을 알아봐준 것을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김 PD는 다카마쓰성 장면의 대본을 쓰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참고했다. <노보우의 성>의 다카마쓰 공성전 묘사를 보고 좌절을 느꼈다고 한다. 김 PD는 “겉모습은 일본 영화보다 잘 만들 수 없겠지만 나는 같은 장면에서 다른 대사를 넣어 스토리를 부여했다.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던 시절의 굴욕을 참고 그를 넘어서겠다는 도요토미의 의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김 PD는 그 외에도 <임진왜란 1592> 전반에 꼼꼼한 시청자들은 알아봐줄 만한 장면들이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의 성에서 연회를 베풀기 전 카메라가 살짝 거북선을 상징하는 거북이를 비춘다. 그의 야심은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다. 도요토미가 최후의 정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굴복시킨 이후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 무사가 할복을 한다. 3화에서 농부로 등장하는 일본 남성은 이후 전쟁 과정에서 도요토미의 ‘전쟁은 기회다’라는 말 한마디에 감화된 듯 농민이 아닌 병사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도요토미와 눈을 마주친 무사가 감명을 받는 장면에서는 김 PD가 “초등학생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분”인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 대사를 오마주하기도 했다. 김 PD는 “매회마다 눈썰미 좋은 시청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오마주 등을 넣었다. 본방은 다 끝났지만 다시보기를 통해 연출자가 숨겨놓은 오마주나 재밌는 장면들을 찾아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진왜란과 관련한 토막 상식
‘임진왜란’을 일본과 중국에서는 뭐라 부를까.
두 나라는 전쟁이 벌어진 시기를 딴 ‘분로쿠-게이초의 전쟁’, ‘만력조선전쟁’이라는 표현을 쓴다. 영어로는 ‘Imjin War’(임진전쟁)이란 표현이 많이 쓰인다. 김시덕 교수는 “한·중·일 3국이 12간지를 공유하기 때문에 임진이라는 표현을 쓰고 발음은 피해 국가인 조선의 것을 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임진왜란보다 중립적인 ‘임진전쟁’이나 ‘7년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자는 움직임도 있다. 김 교수는 “국제적으로는 ‘왜란’이라는 표현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한국 학자 중에서도 임진전쟁이라 쓰는 이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용어를 고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왕 또는 쇼군이었나.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을 대신해 정무를 보는 관백직에 오른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실권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오다가 죽은 이후에도 직함은 유지하고 있었기에 도요토미는 쇼군이 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전쟁 1년 전 조카에게 관백직을 넘겨주고 태합으로 불린다. 태합은 관백 등 고위직에 올랐던 이를 부르는 호칭으로 조선으로 치면 상왕과 비슷한 개념이다. 조선 태종처럼 실권자가 상왕이 되면 왕보다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도요토미는 실권이 있었기 때문에 관직과 무관하게 영주들을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 교수는 “이미 확립된 권위는 건드리지 말자는 게 당시 일본 정치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이런 섬세한 면에 대해 조선과 명에서는 어렴풋이밖에 모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왜 조선에 가지 않았나.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에서 승리하려면 수하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출진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이미 조선이 자신에게 항복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가장 최근에 세력권으로 편입된 서일본 장수들 위주로 임진왜란을 진행했다. 그의 전쟁 방침은 <임진왜란 1592>에 묘사된 것처럼 나중에 정벌한 이들을 선봉에 세워서 영토를 넓히는 방식이었다. 동일본의 도쿠가와를 서일본으로 옮겨온 대신, 서일본 세력을 조선으로 보낸 것이다. 만약 조선이 완전히 정복당했다면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조선으로 보내고, 조선에 진출한 장수들과 조선군을 명나라로 보냈을 것이다. 도요토미 본인이 일본에 남아서 전쟁을 지휘한 끝에 도요토미와 일선 장수들 사이에는 약 한 달간의 시차가 발생한 것 역시 일본의 임진왜란 패퇴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드라마처럼 도요토미는 조선을 크게 의식했나.
드라마에서 도요토미는 조선의 왕을 뜻하는 ‘샹가무’(상감)라는 말을 즐겨 쓴다. 5화에서는 아예 조선왕 복장을 입어보기도 한다. 김 교수는 “도요토미 입장에서는 전쟁 시작 때부터 조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이후에 명나라와 교섭하면서 명나라 관복을 입은 적은 있다. 한국 시청자를 위해 도요토미가 조선을 상당히 의식한 것처럼 연출한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에도 시대 일본인들은 이순신을 어떻게 생각했나.
<징비록>이 일본에 수입된 이후인 1705년 간행된 <조선군기대전>은 이순신을 영웅으로 묘사한 근세 최초의 일본 문헌이다. <징비록>이 일본에 들어온 이후 신립, 곽재우 등의 조선 장수들도 영웅으로 묘사되는 책이 나오기 시작한다. 김 교수는 “이런 조선의 영웅들을 이긴 일본의 영웅들이 더욱 위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근대 일본의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기사에 나온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접하기가 쉽지 않은데.
일본의 대하드라마는 디씨인사이드 일본드라마 갤러리, 여기서 파생된 네이버 카페 ‘일드갤러리 버스정류장’을 통해 구할 수 있다.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자막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케이블TV 채널J에서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를 방송하기도 한다. 저서로는 일본인 학자 기타지마 만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 비교적 한·일 양국의 입장을 균형있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대 일본인들의 생각을 읽기 위해서는 한국어로 번역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참고하면 좋다. 일본어가 가능하다면 도요토미의 일대기를 다룬 <태합기>나 임진왜란 전반을 다룬 <조선정벌기> 등 에도 시대의 저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609271338221&code=116#csidx48a9d05e1ba35268defd2f9e69cea80
2016.09.2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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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의 도요토미는 쾌활함과 냉혹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3화 초기의 다카마쓰 성 공략전이나 규슈 정복전에서 히데요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법을 아는 전략가로도 묘사된다.
53주년 방송의 날을 맞아 특별편성된 KBS의 5부작 역사 드라마 <임진왜란 1592>가 막을 내렸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3화가 세간의 화제가 됐다. 도요토미 역의 배우 김응수의 연기도 연기였지만, 일본의 시각에서 본 도요토미의 모습이 상당히 반영됐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1592>의 김한솔 PD는 “우리가 임진왜란의 피해자라고 해서 자국사에만 갇혀서는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가 없다. 일본은 왜관을 통해 조선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포르투갈 등 해외랑 교역을 했다. 그에 비해 조선은 144년 동안이나 일본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조상들이 어떤 실책을 저질렀는지 반면교사를 삼아야 지금 우리는 현재의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반성할 수 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임진왜란 1592>는 애초 다큐멘터리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김 PD도 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다. 하지만 중간에 드라마로 계획이 변경되면서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혼합물 성격을 띤 ‘팩추얼 드라마’로 제작됐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 교수, 노영구 국방대 군사전략학과 교수 등 임진왜란 전문가 5명이 자문을 했다.
<임진왜란 1592>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분) / KBS 제공
<임진왜란 1592>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분) / KBS 제공
도요토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시도
이 드라마는 도요토미에 대한 입체적인 묘사가 시도됐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과거 <조선왕조 500년>이나 <불멸의 이순신>도 일본 국내 사정을 다루기는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및 일본 측의 묘사는 지나치게 단편적이었다는 지적이 많았다. 2004년부터 1년간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 도요토미는 전쟁광으로 묘사됐다. 99화에서 도요토미는 이순신 트라우마를 겪다 못해 부하들에게 칼을 휘두르다가 하극상을 당하고, 그 분에 못 이겨서 결국 숨을 거둔다. 한국인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역사왜곡이 지나치다는 평가가 있었다. 반면 <임진왜란 1592>의 도요토미는 쾌활함과 냉혹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런 묘사는 드라마의 자문을 맡은 김시덕 교수의 영향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저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에도 시대 일본의 임진왜란 문헌을 검토했다. 그리고 그는 도요토미에게서 ‘의도된 광기’가 보인다고 평가했다. 인자함과 잔인함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카리스마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명나라를 치겠다는 히데요시의 생각은 앞뒤 재지 않은 망상이 아니라 나름 치밀한 계산 하에서 이뤄진 결정이었다. 3화 초기의 다카마쓰 성 공략전이나 규슈 정복전에서 도요토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법을 아는 전략가로도 묘사된다.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앞에서는 칼끝에 꽂아주는 떡을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나는 떡을 싫어한다”며 야망을 비추기도 한다. 이런 도요토미의 모습은 일본 대하드라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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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지 못한 인물 비중있게 다뤄
김시덕 교수는 드라마에서 한국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이시다 미츠나리의 비중이 높았던 것도 의미있게 봤다. 그는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최신 연구 주제는 이시다 미츠나리다. 그는 야전 장수가 아니었기에 크게 드러나는 인물은 아니지만, 히데요시와 긴밀하게 연락하며 임진왜란 전체 그림을 읽고, 명나라와의 협상을 주도한 것 역시 그가 아니겠느냐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이번 드라마는 이런 최신 연구성과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작품이 기존의 임진왜란 소재 드라마의 틀을 근본적으로 넘어서진 못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주로 다루는 ‘할미의 야망’ 블로그 운영자 박광주씨는 “역덕(역사 마니아) 사이에서는
<임진왜란 1592>에 대한 부정 평가가 압도적이다. 결국 도요토미를 북한 김정은처럼 묘사한 반공주의 스토리의 재판이 아닌가”라고 봤다. 이번 드라마가 일본 드라마와 영화의 연출 방식을 상당히 받아들인 건 사실이지만, 이야기 전개에 대해서는 큰 발전이 없었다는 시각이다. 박씨는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는 영주들에게 조선에서 난폭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는데, 드라마에선 도요토미가 병사들에게 약탈이나 포로사냥을 허용한 것처럼 묘사한다. 또한 일본 장수들이 임진왜란에 열광적으로 찬성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 역시 팩추얼 드라마와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다. 오히려 전쟁통에 고통을 당한 일본의 평범한 남녀의 모습이 좀 더 입체적인 인물 묘사가 아닌가”라며 “과거 임진왜란 소재 사극의 왜곡이 심각한 수준이라서 상대적으로 낫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임진왜란에 반대 목소리를 낸 대표적인 일본의 인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를 들었다. 박씨는 “5부작 특집이 아니라 좀 더 긴 회차의 대하드라마를 만든다면 일본 내에서도 임진왜란에 부정적인 여론이 있었다는 점도 묘사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시덕 교수는 이번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은 일본의 주요 인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들었다. 그는 원래 도요토미의 적이었으나 임진왜란에서는 혈기왕성한 일본 장수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했다. 김 교수는 “일본의 주도적 인물이 대부분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에 고바야카와처럼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중장년 무장들은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번 드라마를 계기로 한국인들이 일본을 자세히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40대 일본인 남성 ㄱ씨는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인데도 서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지식을 잘 배우지 않고, 막연한 이미지만 가지고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며 “상대방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아는 과정 속에서 양국의 친근감도 싹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소년기의 상당 기간을 한국에서 보낸 그는 어릴 적 임진왜란에 대한 한·일 양국의 시각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는 도요토미가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영웅적인 면을 강조하는 반면, 한국에선 그를 전쟁을 일으킨 부정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며 “침략전쟁이라는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시에 한국과 일본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일본인들은 도요토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1996년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히데요시>는 도요토미를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드라마이자, 일본인이 생각하는 도요토미의 긍정적인 측면이 담긴 작품이다. 김문자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의 2013년 논문에 따르면, <히데요시>에서 그(다케나카 나오토 분)는 끝까지 주군(오다 노부나가)에게 의리를 다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낮은 신분일 때는 다이묘를 꿈꾸고, 다이묘가 된 이후에는 전국 통일을 꿈꾸는 모습에서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서 임진왜란은 간략하게 언급한 게 전부다. 18년 뒤인 2014년 제작된 <군사 칸베에>에서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해외 원정을 준비는 등 도요토미의 어두운 면도 잘 담아냈다. 여기서도 임진왜란에는 긴 분량이 할애되지 않고 있다. 김 교수는 “외교적 문제 등이 걸려 있어서 임진왜란 장면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상식적인 일본인의 대부분이 과거 침략을 미화하기보다는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예의에 맞다고 생각하는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연출자가 숨겨놓은 재미있는 장면들
한편, 몇몇 마니아들은 드라마 3화의 도입부인 도요토미의 빗추 다카마쓰성 공략전이 일본의 2012년 작 영화 <노보우의 성>을 베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한솔 PD도 “다카마쓰성 장면은 <노보우의 성>과 아에 똑같이 연출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역덕이나 일본인들에게 ‘같은 장면을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자신의 연출을 알아봐준 것을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김 PD는 다카마쓰성 장면의 대본을 쓰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참고했다. <노보우의 성>의 다카마쓰 공성전 묘사를 보고 좌절을 느꼈다고 한다. 김 PD는 “겉모습은 일본 영화보다 잘 만들 수 없겠지만 나는 같은 장면에서 다른 대사를 넣어 스토리를 부여했다.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던 시절의 굴욕을 참고 그를 넘어서겠다는 도요토미의 의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김 PD는 그 외에도 <임진왜란 1592> 전반에 꼼꼼한 시청자들은 알아봐줄 만한 장면들이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의 성에서 연회를 베풀기 전 카메라가 살짝 거북선을 상징하는 거북이를 비춘다. 그의 야심은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다. 도요토미가 최후의 정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굴복시킨 이후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 무사가 할복을 한다. 3화에서 농부로 등장하는 일본 남성은 이후 전쟁 과정에서 도요토미의 ‘전쟁은 기회다’라는 말 한마디에 감화된 듯 농민이 아닌 병사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도요토미와 눈을 마주친 무사가 감명을 받는 장면에서는 김 PD가 “초등학생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분”인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 대사를 오마주하기도 했다. 김 PD는 “매회마다 눈썰미 좋은 시청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오마주 등을 넣었다. 본방은 다 끝났지만 다시보기를 통해 연출자가 숨겨놓은 오마주나 재밌는 장면들을 찾아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진왜란과 관련한 토막 상식
‘임진왜란’을 일본과 중국에서는 뭐라 부를까.
두 나라는 전쟁이 벌어진 시기를 딴 ‘분로쿠-게이초의 전쟁’, ‘만력조선전쟁’이라는 표현을 쓴다. 영어로는 ‘Imjin War’(임진전쟁)이란 표현이 많이 쓰인다. 김시덕 교수는 “한·중·일 3국이 12간지를 공유하기 때문에 임진이라는 표현을 쓰고 발음은 피해 국가인 조선의 것을 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임진왜란보다 중립적인 ‘임진전쟁’이나 ‘7년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자는 움직임도 있다. 김 교수는 “국제적으로는 ‘왜란’이라는 표현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한국 학자 중에서도 임진전쟁이라 쓰는 이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용어를 고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왕 또는 쇼군이었나.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을 대신해 정무를 보는 관백직에 오른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실권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오다가 죽은 이후에도 직함은 유지하고 있었기에 도요토미는 쇼군이 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전쟁 1년 전 조카에게 관백직을 넘겨주고 태합으로 불린다. 태합은 관백 등 고위직에 올랐던 이를 부르는 호칭으로 조선으로 치면 상왕과 비슷한 개념이다. 조선 태종처럼 실권자가 상왕이 되면 왕보다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도요토미는 실권이 있었기 때문에 관직과 무관하게 영주들을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 교수는 “이미 확립된 권위는 건드리지 말자는 게 당시 일본 정치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이런 섬세한 면에 대해 조선과 명에서는 어렴풋이밖에 모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왜 조선에 가지 않았나.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에서 승리하려면 수하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출진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이미 조선이 자신에게 항복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가장 최근에 세력권으로 편입된 서일본 장수들 위주로 임진왜란을 진행했다. 그의 전쟁 방침은 <임진왜란 1592>에 묘사된 것처럼 나중에 정벌한 이들을 선봉에 세워서 영토를 넓히는 방식이었다. 동일본의 도쿠가와를 서일본으로 옮겨온 대신, 서일본 세력을 조선으로 보낸 것이다. 만약 조선이 완전히 정복당했다면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조선으로 보내고, 조선에 진출한 장수들과 조선군을 명나라로 보냈을 것이다. 도요토미 본인이 일본에 남아서 전쟁을 지휘한 끝에 도요토미와 일선 장수들 사이에는 약 한 달간의 시차가 발생한 것 역시 일본의 임진왜란 패퇴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드라마처럼 도요토미는 조선을 크게 의식했나.
드라마에서 도요토미는 조선의 왕을 뜻하는 ‘샹가무’(상감)라는 말을 즐겨 쓴다. 5화에서는 아예 조선왕 복장을 입어보기도 한다. 김 교수는 “도요토미 입장에서는 전쟁 시작 때부터 조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이후에 명나라와 교섭하면서 명나라 관복을 입은 적은 있다. 한국 시청자를 위해 도요토미가 조선을 상당히 의식한 것처럼 연출한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에도 시대 일본인들은 이순신을 어떻게 생각했나.
<징비록>이 일본에 수입된 이후인 1705년 간행된 <조선군기대전>은 이순신을 영웅으로 묘사한 근세 최초의 일본 문헌이다. <징비록>이 일본에 들어온 이후 신립, 곽재우 등의 조선 장수들도 영웅으로 묘사되는 책이 나오기 시작한다. 김 교수는 “이런 조선의 영웅들을 이긴 일본의 영웅들이 더욱 위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근대 일본의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기사에 나온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접하기가 쉽지 않은데.
일본의 대하드라마는 디씨인사이드 일본드라마 갤러리, 여기서 파생된 네이버 카페 ‘일드갤러리 버스정류장’을 통해 구할 수 있다.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자막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케이블TV 채널J에서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를 방송하기도 한다. 저서로는 일본인 학자 기타지마 만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 비교적 한·일 양국의 입장을 균형있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대 일본인들의 생각을 읽기 위해서는 한국어로 번역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참고하면 좋다. 일본어가 가능하다면 도요토미의 일대기를 다룬 <태합기>나 임진왜란 전반을 다룬 <조선정벌기> 등 에도 시대의 저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609271338221&code=116#csidx48a9d05e1ba35268defd2f9e69cea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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