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한평consensus - [피스앤피플 12] 깡촌 아이, 남북제일 논객이 되기까지
사기업에서, 대학에서, 정부에서 다양한 경험과 연구를 했던 김연철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를 만났다. 이론의 탄탄함과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접목해 대중들과도 쉽게 호흡하는, 북한 및 국제정치 전문가인 김 교수의 삶을 들여다봤다.
높이뛰기 저렇게 하는 거였어?
김연철 교수는 강원도 삼척에서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까지 삼척을 벗어나 보지 못한 그는 소위 '깡촌'에서 유년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삼척군 대표로 강원도 전체 육상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어요. 대회 장소가 춘천이었죠. 가서 다른 선수들이 워밍업을 하는 걸 봤는데 어린 나이에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높이뛰기를 하는데 다른 선수들이 모두 등을 아래로 하고 뒤로 넘더라구요. 우리는 그런걸 배운 적이 없었거든요"
당시 높이뛰기의 '트렌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김 교수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수영 대표를 뽑는 날에는 실내 수영장이 없어서 선생님들이 강에 들어가 줄을 잡아 레인을 만들 정도였다.
가정 형편이 유복한 편도 아니었다. 몸이 불편하셨던 아버지 대신 생계는 작은 텃밭을 일구던 어머니의 몫이었다. 책이 읽고 싶어도 가지고 있는 책이 별로 없어서 읍내에 사는 친구에게 빌려 읽어야 했고 땔감을 구하러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풍요로운 환경은 아니었지만 김 교수는 활발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여름이 되면 자연이 준 선물인 강과 바다를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장래희망으로 '대통령'을 쓸 정도로 당찬 아이였다.
하지만 김 교수는 대학을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을 정도로 바깥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강원도에서 흔히 공부를 좀 한다는 학생은 강릉이나 춘천, 원주 등에 위치한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가난한 집의 막내 아들이었던 김 교수는 다른 지역으로 진학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위에 강릉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었어요. 보통은 그냥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죠. 바깥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별로 없던 시기였어요"
대학도 실력과 가정 형편에 맞춰 결정해야 했다. 어느 학교가 얼마나 좋은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4년 장학금을 주는 대학이 몇 군데 있었어요. 그런데 어디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는 거에요.지금처럼 인터넷이 퍼져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보를 접하기도 어려웠구요. 고등학교 때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요. 그분이 이 학교를 가는게 좋겠다고 하셔서 진학했죠"
그렇게 찾아간 대학, 그리고 서울은 김 교수에게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그곳에서 김 교수는 처음으로 독재 정권의 민낯을 목격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김 교수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0년대 초반은 전두환 독재 정권에 반발하는 학생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였다. 그는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목도했다.
"학교 안에서 시위를 하는데 학생들이 건물에 밧줄을 타고 매달려서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어요.그런데 경찰이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폭력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학생을 진압하더라구요. 서울에 처음 올라온 저한테는 굉장한 충격이었죠. 그 충격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서울 시내를 하루 종일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김 교수는 이후 학교 선배들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제 시위도 하면서 점차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학 입학 후에 고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학교 앞에 있는 사회과학 책을 파는 서점에 들어갔어요. 헌법 책을 사려구요. 책을 집어서 계산하려고 하는데 서점 주인이 무슨 과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정치외교학과라고 했더니 나중에 책을 바꾸러 오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당시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고시 공부하겠다고 헌법 책을 사갔다가 다른 사회과학 책으로 바꾸러 오는 정외과 학생들이 많았더라구요. 저도 결국 그 헌법 책을 러시아 혁명사 책으로 바꿨었죠"
그렇게 사회에 눈을 뜨고 세상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됐지만 본격적인 학생운동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김 교수는 대학 4년 장학금을 받아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는데, 그 장학금을 받으려면 일정한 성적을 유지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운동에 매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학교에 다니는 생활 자체가 워낙 힘들어서 2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어요. 요즘이야 군대를 일찍 가는 게 일반적이고 2학년 마치고 가는 것도 늦게 가는 거라는 인식이 있지만, 당시에는 2학년 마치고 가는 건 일찍 가는 편이었거든요.
대학 학비가 공짜라고 하더라도 서울에 거주하는데 드는 생활비는 필요했기 때문에 힘들게 학교를 다녔죠. 먹고 자는 문제가 불안정하다 보니까 학교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1학년 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을 겨우 넘겼어요. 불안해지기 시작했죠. 이 성적을 넘지 못하면 저는 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으니까요. 선배들은 저를 참여시키려고 했는데 제가 생존의 불안감 때문에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고민을 했던 시기였죠"
이후 군대를 다녀온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의 길을 택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얼른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학문을 하고 싶었다.
"일단 어렸을 때부터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회사원이 되는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자존심이 좀 세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고,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과도하게 부딪힌 경우도 있었어요.
대학교 1학년 때 수업시간에 한 교수님이 베트남 전쟁 때문에 한국 경제가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수업 시간에 그걸 참지 못하고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그 교수님이 본인 연구실로 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분이 저한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랬는데 별로 감흥이 없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교수님은 저한테 세상을 볼 때 너무 정치적인 것보다는 사랑이나 그런 부분들도 함께 보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는 그런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였죠"
김 교수는 여러 학문 중에서도 정치, 특히 그중에서도 북한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개인적인 관심도 있었겠지만, 외국 유학을 가지 않아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정치 연구회 북한 분과에서 활동을 했고 그 때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고 서동만 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김근식 경남대학교 교수 등을 만났다.
삼성에서 통일부로, 대학으로
그는 공부를 마친 이후 삼성경제연구소에 들어갔다. 만 5년째 되는 날 사표를 썼다. 이곳을 계속 다니면 정말 회사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장님한테 공부를 하고 싶어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공부를 하는 곳에 있으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 그만두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웃음) 그랬더니 당시 최우석 소장님이 왜 그만두고 싶은지 자신을 합리적으로 설득해보라고 했어요. 여기서 하면 되지 왜 굳이 다른 곳을 가려고 하냐는 거였죠.
그런데 저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장님이 6개월 정도 있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오라고 했어요. 그분이 출장 갔다 오면 책도 사다 주시고, 저한테는 참 고마운 분이었죠"
이후 고려대학교에서 연구생활을 하던 그는 정부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 때부터 정책 보좌관 제도가 생겼는데 그 자리에 북한 전문가를 임명했고, 그 주인공이 바로 김 교수가 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정동영 장관이 몇 사람한테 북한 전문가로 임명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냐고 물어봤대요. 3명 정도에게 말했는데 전부 제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이후 정 장관이 본인이 통일부 장관에 취임하고 바로 다음날인 토요일에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월요일에 국회에 가야 하는데 와서 도와줄 수 있냐는 거였죠. 그래서 일요일에 평소처럼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 통일부 장관실에 갔어요. 그때부터 정책 보좌관의 시작이었죠"
정책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2005년 6월 17일 정동영 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을 만난 일을 꼽았다.
"당시는 남북 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2004년 10월부터 북한에 '2005년이 광복 60주년 인데 그냥 이렇게 보낼 거냐'고 여러 번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없었어요. 여러 통을 보냈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더라구요. 그 다음해인 2005년 대화가 재개됐을 때 북한 측에서는 남한의 여러 통의 편지로 대화할 의지를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2005년에 남북 대화의 숨통이 열리긴 했지만 장관급 회담은 계속 안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해 6.15 행사에 통일부 장관이 참석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죠. 굳이 가야 하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고 결국 평양에 방문했습니다.
당시 북한이 거부할 수 없는 중대 제안을 만들었고, 자문단에 임동원 전 장관을 모시고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려웠던 남북관계를 풀었습니다. 또 당시 6자회담도 교착상태에 있었는데요. 6월 17일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나서 6자회담과 관련한 협조를 구했죠. 그래서 키신저가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과 딕 체니 당시 부통령에게 한국의 통일부 장관 이야기를 잘 들어보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미국도 6자회담에 참여하게 됐고 결국 9.19 공동성명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죠.
이 과정에서 제일 보람있었던 것은 우리 힘으로 문제를 풀고 환경을 조성했던 겁니다. 남이 해준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했다는 것에 정말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김 교수는 정책 보좌관 시절이 정책이 계획되고 집행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대학에 있는 현재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현장이 경험을 이야기하곤 한다. "학기 초와 학기 말에 학생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는 김 교수는 최근 20세기 세계를 바꾼 20가지의 협상 장면을 모아 새로운 책을 내기도 하면서 활발한 연구 저술 활동을 벌이고 있다.
김 교수는 10년 동안 준비한 신간 <협상의 전략>을 통해 20세기를 대표하는 굵직한 사건들을 소개하고 이 사건 속에서 어떤 협상이 오갔는지를 상세히 소개했다. 이를 통해 협상의 방법과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굵직한 세계사의 흐름도 함께 짚어 나갔다.
"어떤 사례를 넣는 것이 좋을지 여러 가지를 염두에 뒀습니다. 아무래도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교훈을 줄 수 있는 사례를 우선적으로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휴전협상과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을 위한 한일협상 과정 등 국내에서 이뤄진 협상뿐만 아니라 예멘의 통일 협상,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협상 등 타국에서 벌어진 협상도 책에 함께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많이 알려진 협상, 예를 들면 쿠바 미사일 위기 사례의 경우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있는 사례이기 때문에 특정한 분야에 맞춰서 서술했습니다. 기존에 부각되지 않은 리더십과 관련한 내용을 주로 다뤘습니다. '무능한 지도자는 위기를 만들고, 유능한 지도자는 위기를 해결한다'는 명제는 지금도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 같아요"
그는 이 책 3부에 '양보의 역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협상을 한다고 하면 상대에게 지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특히 북한과 협상을 하는 것 자체가 북한의 의도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재 한미일의 분위기 속에서 그가 던지는 '양보의 역설'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협상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협상이 이뤄지려면, 관계를 지속해야 합니다. 관계가 꾸준히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길게 보면 지금 양보하는 게 나중에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당장은 손해 보더라도, 이게 무작정 손해는 아니니까요"
2016년 한반도에서 협상은 설 자리를 잃고 증오와 반목이 가득하다. 언제든 충돌이 벌어진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일 정도다. 이 위기를 가중시킨 남북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지도자들이 한 번쯤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 이 책은, 김 교수의 말대로 "엄청 재밌다". 김 교수가 제시하는 '협상의 전략'이 남북 대화에도 제대로 쓰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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