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 Ju Kim
1d ·
내 앞니가 부러지던 날.
내가 이 일로 황망하여 시위를 나갔는데 기말고사 앞두고 추웠고 시위대는 적었다. 마침 연세대학교에는 전경들이 무서워하던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있다고 진압경찰은 좀 많았다. 연대 앞 삼거리를 경찰이 다 막고 학생들은 정문앞에 섰는데 본대와 사수대 사이가 겨우 20미터 정도, 전원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사과탄은 사수대를 넘어 본대로 떨어졌고 마침 내 옆에서 팽글팽글 돌았다. 내게 떨어졌다면 앞니만 부러졌을까. 학생들이 앞다투어 교내로 뛰는데 길가 양쪽에 화단이 있었다. 연대 길을 모르는 우리는 더 헤맸다. 나는 정신을 잃고 나무처럼 꽝 넘어졌다. 도망치기 짝이었던 오빠 혼자 힘으로 나를 들 수가 없어 다른 학생에게 부탁하여 내 양 팔을 각자 잡고 끌었다. 몽치를 들고 방패로 찍으며 달려오는 전경들을 피해야했다. 화단에 얼굴이 쓸리며 이가 부러지는 충격에 정신이 들었다. 죽지 않았다. 다행이다. 나는 기분이 좋은데 오빠는 울었다. 울며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물로 피를 닦아주려 했다. 남자화장실. 나가자 했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다. 마침 연대 학생회 임원이던 동생이 다쳤나 걱정되어 두리번거렸다. 경찰은 다친 학생들의 주민번호를 적고 있었다. 과감한 채증. 나가자, 혜화동으로. 겨우 택시를 잡아 선배 언니가 학생으로 근무하던 치과대학병원으로 갔다. 마침 실력자가 야근중이어서 응급수술을 제대로 받았다. 입술을 꿰매고 이를 만들어 붙였다. 한시간 반쯤. 기다리던 동아리 친구들이 걱정하며 기도해주었다. 이제 보니 흉이 안 남았네. 손등에 피부가 떨어져나간 상처는 치료를 못했다. 아직 흉이 있지만 나이들어 생긴 주름이 가려주고 있다. 그날 저녁 걱정해 주던 친구들과 그들을 안심시키던 나, 고맙게도 나를 치료해주고 병원비도 내 주신 선배님들, 키득키득 웃으며 귀가하던 밤 공기가 새삼스레 기억난다.
검정고시를 봤다든가, 공무원 시험을 붙었다든가, 장애인으로 살아가려고 애쓴 분이었는데, 망루에서 물대포를 맞다가 얼어서 내려와 실종되었다. 기다리고 있는데 인천 앞 바다에서 떠올랐고, 시신을 훔쳐가려고 하니 지켜달라는 소식을 듣고 동아리에서 함께 나갔다. 화가 많이 났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찬바람 불어 김장을 담그면 갑자기 더워져 김치가 쉰다는 그런 날씨였다. 물 속에서 해를 넘기리라 기대하고 던졌으리라 추측했다. 부검을 못하게 시신을 뺏으려 하여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지킨다더라.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 긴급한 요청이었다.
괜히 갔지. 나는 별 도움이 안되고 짐만 됐다. 걱정만 끼쳤다. 덕분에 한동안은 매캐한 냄새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반년쯤 집에 내려가지 못했다. 여름에 만난 엄마는 입술에 뭐가 묻었느냐고 자꾸만 닦으라고 하셨다. 동생은 지랄탄이 돌면 발로 밟았어야지, 그걸 쓰읍 들이마셨냐 했다. 몰랐지.. 시험공부하느라 그때 집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공부하고도 학부만 10년을 다니다니 대단한 머리다. 내용 보다는 포장이 멋진 머리를 가졌다고 평가해 본다.
그리고 25년이 지나 더 추운 겨울이 왔다. 요즘은 왜이리 발이 시렵나. 날씨 탓인지 혈액순환이 느려졌는지. 부러졌던 이는 20년 넘게 잘 쓰다가 다시 다쳐서 수리를 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의 사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단다. 행정집행이 뭐라는 건지, 아마 재산권 행사 중 생긴 일이라 민주화 열사가 아니라는 건가. 민주화라는 개념도 역사를 따라 진화하는데 아직은 암모나이트 급인가보다. 하긴 나 자신을 봐도 역사가 바뀔 동력을 뿜어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할 말은 없다. 얼마나 더 타오를 수 있을까. 추운 날 가슴을 활짝 펴고 외치던 젊은 날의 추억이 떠올라서 더 잊기 전에 기록해 둔다.
은석
6d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5주기를 맞아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가 출범했습니다. 아래 출범 [기자회견문]과 지난해 비마이너에 기획연재 되었던 [이덕인의 삶과 죽음]을 꼭 읽어봐 주세요.
기자회견문
장애인 빈민 탄압 속에 사라져간, 열사는 말한다
1995년 7월 이덕인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회원으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장애인 차별과 빈곤의 억압 속에서 장애빈민 생존권을 위해 나선 그에게 곧바로 닥친 것은 단속 위협과 강제 철거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비리와 폭력으로 악명 높은 용역업체 ‘무창’을 철거업체로 선정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 노점철거에 나섰다. 1995년 11월 24일 노점철거를 위해 수천의 군, 경, 소방, 용역업체의 합동 철거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암도 노점상들은 고립된 망루에 올라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농성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튿날 물이 빠진 바닷길로 탈출을 시도한 이덕인이 사라졌다. 장애빈민에 대한 폭력철거과정에서 그는 사라졌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덕인 죽음의 책임을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
사흘 뒤, 이덕인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상의가 벗겨진 채, 양손은 포승줄에 결박된 상태로 눈을 부릅뜬 그의 시신은 폭력의 증거 자체였다. 경찰은 영안실에 난입해 그의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죽음의 진상을 서둘러 덮으려 했다. 당시 철거작전을 지시하고 수행한 인천시와 연수구, 경찰, 군, 용역 그 누구 하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그의 부모는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장례 이후에도, 25년간 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 한 맺힌 세월은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이덕인의 죽음의 책임은 과연 그 누가 지고 있는 것인가.
25년 세월, 이덕인과 그 가족의 한을 풀자
이덕인의 죽음은 문민정부, 민선 1기 인천광역시장이 집권한 당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인천은 세계로 뻗어 나갈 희망으로 선전된 개발이 곳곳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단속과 철거의 대상일 뿐이었다.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의 죽음의 진실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 없다. 2002년 김대중정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배‧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조사개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 해산 이후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다.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라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이 재개될 예정이다. 25년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의 노부모와 가족을 위해서라도, 스물여덟 청년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진상을 이제라도 밝혀야 한다. 또한 장애인, 빈민을 위해 투쟁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반드시 명예회복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25년 전과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의 진실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가난한 사람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권력의 오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우리가 살아갈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
하나,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열사의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
하나,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자는 열사의 가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
하나, 정부는 장애빈민 생존을 위해 희생한 이덕인의 명예회복과 국가배상 실시하라
2020년 11월 26일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5주기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①] 그날의 아암도
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5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②] 지금, 여기, 아암도
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9
[기자회견문] 원문
antipoverty.kr/xe/index.php…
은석
6d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5주기를 맞아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가 출범했습니다. 아래 출범 [기자회견문]과 지난해 비마이너에 기획연재 되었던 [이덕인의 삶과 죽음]을 꼭 읽어봐 주세요.
기자회견문
장애인 빈민 탄압 속에 사라져간, 열사는 말한다
1995년 7월 이덕인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회원으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장애인 차별과 빈곤의 억압 속에서 장애빈민 생존권을 위해 나선 그에게 곧바로 닥친 것은 단속 위협과 강제 철거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비리와 폭력으로 악명 높은 용역업체 ‘무창’을 철거업체로 선정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 노점철거에 나섰다. 1995년 11월 24일 노점철거를 위해 수천의 군, 경, 소방, 용역업체의 합동 철거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암도 노점상들은 고립된 망루에 올라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농성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튿날 물이 빠진 바닷길로 탈출을 시도한 이덕인이 사라졌다. 장애빈민에 대한 폭력철거과정에서 그는 사라졌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덕인 죽음의 책임을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
사흘 뒤, 이덕인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상의가 벗겨진 채, 양손은 포승줄에 결박된 상태로 눈을 부릅뜬 그의 시신은 폭력의 증거 자체였다. 경찰은 영안실에 난입해 그의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죽음의 진상을 서둘러 덮으려 했다. 당시 철거작전을 지시하고 수행한 인천시와 연수구, 경찰, 군, 용역 그 누구 하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그의 부모는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장례 이후에도, 25년간 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 한 맺힌 세월은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이덕인의 죽음의 책임은 과연 그 누가 지고 있는 것인가.
25년 세월, 이덕인과 그 가족의 한을 풀자
이덕인의 죽음은 문민정부, 민선 1기 인천광역시장이 집권한 당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인천은 세계로 뻗어 나갈 희망으로 선전된 개발이 곳곳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단속과 철거의 대상일 뿐이었다.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의 죽음의 진실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 없다. 2002년 김대중정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배‧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조사개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 해산 이후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다.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라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이 재개될 예정이다. 25년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의 노부모와 가족을 위해서라도, 스물여덟 청년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진상을 이제라도 밝혀야 한다. 또한 장애인, 빈민을 위해 투쟁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반드시 명예회복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25년 전과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의 진실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가난한 사람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권력의 오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우리가 살아갈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
하나,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열사의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
하나,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자는 열사의 가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
하나, 정부는 장애빈민 생존을 위해 희생한 이덕인의 명예회복과 국가배상 실시하라
2020년 11월 26일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5주기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①] 그날의 아암도
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5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②] 지금, 여기, 아암도
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9
[기자회견문] 원문
antipoverty.kr/xe/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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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이덕인 ①] 그날의 아암도
기자명 최예륜
입력 2019.10.22 19:13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①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홈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이덕인 ①] 그날의 아암도
기자명 최예륜
입력 2019.10.22 19:13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①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아암도 가주세요”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
...
송도 여기는 없는 데였어요
갯벌이고 바다였지
부모님이 조개 캐던 데였는데
한 이십 오륙 년 전인가
대기업들이 다 사들여서 개발한다고
오십 평 보상받았는데
사천만 원 준다고 얼른 팔아버렸지
안 팔고 갖고 있던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들은 아파트 육십 평짜리 분양받았잖아
팔억쯤 할 거야
상가 개발도 이제서야 한다는데 이십 년 만에
남동공단만 해도 팔팔 올림픽 때는 없었어요
연안부두? 연안부두야 더 오래됐지
여기저기 많이 생겼죠
연안부두를 오가는 화물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변에 택시는 멈춰 섰다. 정말로 아암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를 내면서 훼손된 것인지 차도 방향의 바위는 군데군데 시멘트 바른 가짜 돌로 메워져 있었다. 아암도는 황량했다. 하지만 물 빠진 갯벌에는 무수한 숨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다. 해초들이 자라난 갯벌에 작은 게와 벌레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바다가 육지가 되고 삶터가 갈아엎어진 창해상전(滄海桑田)의 역사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갯벌과 뭇 생명들은 어쩌면 그날의 목격자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날의 일을 물을 길은 없었다.
당시 아암도 망루. 사진제공 장애해방열사 ‘단’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1995년 3월 8일 서초구청 앞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의 이름은 최정환. 방배역 부근에서 노점상을 하던 그는 국가가 공인한 1급 지체장애인이었다. 친자임을 부정하나 호적상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10년 전에 생활보호 신청을 거부당하고 그는 노점상이 되었다. 1994년 6월 구청의 단속으로 심각한 다리 골절을 입은 그는 이듬해 3월 다시 노점 장사에 나섰다가 또 단속을 당했다. 단속 과정에서 압수당한 노점 물품을 찾으러 구청에 갔던 그는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4백만 장애인을 위해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최정환의 죽음을 계기로 장애인운동, 노점상운동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를 구성했다. 장자추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 전국노점상연합회(아래 전노련)가 “돈 없고 힘없는 이 땅의 장애인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생계대책을 마련”하는 것을 취지로 장애인과 도시빈민의 노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당시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률로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있었다. ‘장애인복지법’은 ‘심신장애자복지법’을 1989년 개정하면서 장애인 등록제도를 도입한 것이었으며 ‘장애인고용촉진법’은 1990년에 제정, 당시 장애인의무고용률 2%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4년 세계화 시대를 강조하는 정부여당의 기업활동 규제완화를 위한 움직임 속에 의무고용률을 1%로 하향 조정하려는 시도에 장애계는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1995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전장협은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산재노동자협회와 함께 ‘장애인 고용 촉진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1996년에는 ‘장애인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장애인 고용 촉진 걷기대회’라는 13박 14일간의 전국적 걷기대회를 여는 등 장애인 노동권 실현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개정된 장애인복지법 또한 장애인에 대한 소득지원을 보장하지 않았으며, 생활보호법에 의해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복지 수급의 가능성이었다. 최정환의 사례처럼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생활보호 대상자가 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장애인이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할 권리개념이 미약하던 당시, 장애인이라는 말은 곧 빈민이라는 뜻이었다. 차별과 멸시가 만연한 사회에서 장애인은 먹고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가난한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생계노동 중 하나는 노점이었다. 장자추는 서울 청계천, 강남, 그리고 인천 아암도 등지에서 노점 조직 사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가고 머무는 곳,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갔던 것이다. 스물여덟의 이덕인은 아암도에서 장자추와 함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날의 아암도
1995년 7월 인천지역 아암도지부 장자추가 발족해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하자, 인천시와 연수구는 강제 철거 계획을 추진한다. 9월 인천시의회 2억2천만 원 예산 결의를 바탕으로 연수구청은 용역회사 ‘무창’을 철거업체로 선정했다. 무창은 도시재개발지역 철거에 깡패,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참여한 바 있으며 폭력 철거, 철거민 상대 사기, 유령 인부 명단 제출로 용역비 횡령 등 이미 악명 높은 곳이었다. 연수구청은 인천광역시, 연수구, 남부경찰서, 103여단, 남동공단소방서 등과 대책회의를 개최했고, 용역반의 철거 과정에서 인권침해 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한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1995년 11월 24일 아침 7시 아암도에서 수천의 군, 경, 소방, 용역이 동원된 강제철거가 기습적으로 시작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연수구청 357명, 무창 200명, 경찰관 96명, 기동대 약 600명 등 총 1,253명이 동원되었다. 주변 교통을 통제하고 진입을 원천봉쇄한 경찰력과 포클레인을 동원해 포장마차 노점을 철거하는 용역반원들을 피해 노점상들은 망루에 올랐다. 인천 장자추 아암도 지부 회원들이었다. 포장마차와 노점 물품들은 정오경에 모두 부서졌다. 지붕도 외벽도 없이 아시바 철골로 지어 합판을 올린 망루 위 30여 명의 노점상들은 망루 지지대를 찍어대는 포클레인의 충격과 경찰과 용역반원의 위협, 수차례 거듭된 소방 살수를 맞으며 버텼다. 망루에 오른 노점상들은 화염병과 인분 등을 던지며 저항했지만 이는 금세 소진되었다. 경찰과 용역은 식품은 물론 지병을 앓는 환자의 의약품 반입마저 통제했고 경찰은 망루 농성자들을 향해 ‘모두 구속한다’는 경고를 계속했다. 생필품과 의약품을 전달하고자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진입하려던 노점상과 장애인은 대거 연행되었다.
추위와 공포 속에서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인 25일 저녁 농성자 11명이 망루 아래로 내려가 연행되었다. 직후 밤 8시경 이덕인은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망루 위 동료는 이덕인이 해변의 축대를 따라 걸어가다 5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어통소(경운기 통로)를 통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 시각 바닷물의 수위는 139㎜ 이상이었으나, 방파제의 해발고도를 고려하면 수위는 더 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인이 망루 2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물은 가슴께 높이였다. 이덕인은 걸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던 동료는 아암도 입구 쪽에서 전경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발각되었다는 생각에 탈출을 포기했다. 동료를 향해 먼저 가겠다는 손짓을 하고 이덕인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흘 뒤인 28일 오전, 그는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이덕인은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두 손목이 밧줄에 묶여 있었고 얼굴과 뒷머리, 어깨와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이 있었다. 이덕인의 시신은 인천 세광병원 그리고 거기서 다시 길병원으로 옮겨졌다. 29일 새벽 4시 45분경, 경찰 1500여 명이 길병원 영안실 콘크리트벽과 유리창을 뚫고 난입해 이덕인의 시신을 탈취하고 그의 형을 납치해 강제 입회시킨 가운데 부검을 실시했다. 이후 경찰은 서둘러 사인을 익사로 발표했다.
폭력의 증언
경찰의 시신 탈취 과정에서 노점상 회원과 인천지역 대학생 등 20여 명이 연행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한 명은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덕인의 죽음의 진상은 끝내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등장한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그해 3월 경찰은 최정환의 시신을 탈취한 바 있었다. 24일 장례를 위해 강남병원에서 연세대학교로 장례를 모시려던 최정환의 시신을 탈취한 경찰은 노점상, 장애인의 철야농성 끝에 다음날 오전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결국 장례식으로 가는 길을 끝까지 막아섰다.
95년 12월 16일, 이덕인 열사 장례투쟁. 사진제공 장애해방열사 ‘단’
이덕인의 시신 탈취는 1991년 박창수의 시신 탈취 사건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그는 전국노동자협의회 탈퇴를 종용하는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고문 조사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백골단(경찰)은 영안실 벽을 뚫고 난입,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사인을 단순자살로 발표했다. 2009년 망루농성 당시 사망한 용산참사 철거민에 대한 강제부검,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노조 활동 도중 사망한 염호석의 시신 탈취, 2015년 경찰 물대포를 맞고 이듬해 사망한 백남기 농민 시신 탈취 시도 등 국가폭력 피해자의 죽음의 진상을 가리고 투쟁을 잠재우려는 시도는 정권의 성격을 막론하고 계속되어 왔다.
“세광병원에서 길병원으로 이전을 하려는데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지. 백골단이. 앰뷸런스 차에서 시신을 내리려고 하는데 뺏으려고 하는 거야. 시신을 안고 뛰었대니까. 이덕인 열사 시신을 안고 뛰어 들어간 거지. 안치하니까 고립을 시키고. 비대위 딱 꾸리고 나니까 침탈 소식 들려오고. 그러니까 쭉 빠져나가고 인하대 학생들 한 80명 정도 하고 가족들하고. 뭐 없더라고. 근데 뭐 사방에서 뚫고 들어오고, 전쟁이지 뭐. 피 퍽퍽 날아댕기고. 저쪽에서 벽 뚫고 있고. 안에서는 계속 뭐 던지고, 한 시간 넘게 싸웠을 거야. 전경애들이 앞에서 쓰러지면 얘네들을 막 밀어. 전경 애 하나가 자빠져서 들어오는데 피가 선지처럼 흘렀어.
...
시신을 탈취해갔어. 형까지 두들겨 패서 시체에다 엎어놓고 갔어. 국과수에 가서 하루 만에 와서 새벽에 내던졌어. 내던졌는데 멍 자국들을 다 찢어놨어요. 조직 검사할 데는 다 쪼개놓은 거야. 내장도 다 꺼냈어. 껍데기만 던져놓은 거야. 그 새끼들 정말 인간 아니었어. 그게 무슨 문민정부야, 그게. 말도 안 되는 거지. 이런 정말 악랄한....” (조덕휘, 당시 비대위 활동, 전노련 소속)
“얼마나 무섭게 들어오는지. 벽을 뚫고 저 높은 데서 유리가 깨지면 저기서 사다리 타고 들어오고. 경찰들이. 그리고 들어오면서 막 피가 팍팍 튀겨가지고, 그때 실명된 학생도 있는데 아직까지 연락을 못하고 못 찾어. 피가 막 이렇게 좌아악 솟구치고 쏟아지는데 막 응급실에 데려가고. 영안실의 상주들이 바지에다 막 오줌을 싸고 막... 근데 거기서 집행부 찾는다고 사람들 확 잡아서 얼굴 확인하고. 얼마나 무서웠으면, 남부경찰서인가, 거기 항의하러 가서 거기를 가서 다 누워가지고 시신 내놔라, 이덕인 내놔라. 이러고 누웠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누워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인 거야. 다 도망가고.” (유희, 당시 비대위 활동, 전노련 소속)
1995년 망루가 세워졌던 아암도는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된 가운데, 경찰과 용역의 경계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물품 전달과 연대를 위해 진입을 시도하다 연행되었던 사람들은 조사과정에서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용역들하고도 계속 다툼이 있었지만 우리를 연행한 건 경찰이었어요. 한 20명 정도가 연행됐는데, 복도에 좍 앉혀놓고 한 명씩 한 명씩 불러들여서 조서를 쓰는 거죠.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던 것을 가지고 강압수사를 한 거지. 저 사람이 그러는데 그 말 맞아? 주동자가 누구야? 그러면서. 난 말 못해, 변호사 올 때까지 말 못 해. 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러니까.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다 넘어뜨렸어.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안 나오는 상태로 진짜 옴팡 두들겨 맞고 어마무시하게 발로 밟고. 내가 못 보게 머리채를 잡고 집단폭행을 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얘네들이 하는 말이, 야 이 새끼야 니가 나라 구하는 독립투사야? 말 하나 안 하나 보자 그러면서 막 밟더라고. 진짜 악 소리가 안 나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나는 말을 안 하고.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 그때부터 진짜 입을 닫아버렸어요.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고 그냥 모든 것을 다 거부. 그러니까 바로 유치장 들어갔는데, 나는 진짜 공권력이 이런 식으로 사람 죽일 수도 있겠다...” (조성남, 당시 장자추 활동, 청계천에서 노점)
이덕인의 죽음, 투쟁과 기억
‘장애인 노점상 故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구성되어 5개월여를 싸웠고 이덕인의 장례는 1996년 4월 24일에 치러졌다. 기나긴 싸움의 시간 동안 이덕인의 부모는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물론 인천시, 경찰 관계자 등은 이덕인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 표명조차 하지 않았다. 1996년 4월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139석의 국회의원을 만들었고 1998년 지방선거에서 최기선 인천시장은 재선되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배‧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기각의 사유는 이는 “노점상 행위를 단속한 지방자치단체의 고유 사무에 대한 일반적 법 집행”과정에서 발생한 일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한 것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조사는 일부 미진하므로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조사개시결정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조사는 진행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 아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온 이덕인의 부모는 속이 타들어 간다.
“오죽하면은 이소선 어머니가 나보고 그래. 진짜로 평생 싸운 사람보다 더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람이야 내가. 그런디, 가만히 보니까, 용감하게 싸우든, 용감하게 안 싸우든, 백날 해봤자 정치권들한테는 못 해보겄더라고. 아하, 세상이 이러구나. 정치 허는 놈들은 어느 누구도 못 해보겄구나, 우리 서민들은. 느그들은 해라, 백날 해봤자 소용없다 그러는 거고. 으이씨. 어떤 놈들이 대통령 되면 뭣 허냐. 이런 생각이 들어버려 이제는.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어떤 놈들이 되면 뭣 허냐고. 그렇게 내가 싸움을 하고 댕겼어도 이 모냥인데. 그래서 아, 인자 이것이 자꾸 물 넘어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물 넘어가는 것 같애도 일단은 싸움은 하고 댕겨봐야죠. 그래서 아버지가 싸움을 하고 댕기는데, 나는 인자 지쳐버렸어요. 지쳐버렸어. 자기 일, 자기 집안일 아니기 때문에 느그는 해라, 나는 모른다. 정치권들도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세월을 삐대고 왔어요. 주위에서도 아무리 노력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지금 그런 것을, 국민들을 억울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쳐다본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왔을 거여.” (어머니 김정자)
“이번 정부 들어와서도, 우리 초청해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갔지. 내가 안 가고. 거기서 우리 집사람이 전부 얘기를 다 했대. 그래가지고는, 그것을 해결을 해준다고까지 말을 듣고 나왔어. 그랬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시계도 하나씩 줘서, 나 시계 차고 다니는 게 그거여. 초청해가지고 시계까지 다 줬는데 답이 없어. 근디 그 시계를 끌러서 놔뒀더니 시계가 안 돌아가, 밥을 줘도.” (아버지 이기주)
이덕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늙고 지쳤다. 그들의 아들은 24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죽은 채다.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보상심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1995년 그 시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장애인 노점상의 삶과 저항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지금껏 유보되고 기각되어 왔다. 그 시절에도 추진 중이던 ‘민주화’와 ‘개발’은 현재진행형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땅과 도시는 미래를 향한 진보를 약속하지만 거기서 밀려나는 사람, 그 틈을 비집고 함께 살아보고자 기를 쓰는 가난한 사람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삶과 죽음은 ‘불법’으로 규정되거나 없는 사람인 양 아예 다뤄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빈민의 이리저리 떠밀리는 삶이 불법 혹은 유령처럼 여겨지는 동안,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의 가난한 부모는 거리를 헤매며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에게 이덕인의 죽음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이덕인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그러고라도 싸워서 우리 아들, 그나마 그렇게 훌륭하게 출상 했응게, 어떨 땐 그래, 둘둘 몰아서 나간 것보다 그래도 내가 여기저기 댕기면서 싸워서 이 정도라도 나갈 수 있게 한 게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근디 오죽해서 해결하다 하다 못하면 이렇게 지쳐갖고. 지쳐갖고, 인자는 모르겄다, 이런 생각을 하겠냐고. 내가 그놈 잊어보려고 얼마나 한이 맺힌 사람인데..... 지금도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내가, 마석을 가봐야 되는디 지금 못 가고 명절 쇠고나 갈거나 어쩔 거냐 그러고 있는디. 너무너무 보고 싶고 너무너무 이쁘게 생긴 내 아들을 갖다가 그렇게... 두드려 맞아갖고 얼굴이 그렇게 생겨가지고... 내가 내가 진짜... 내가 죽어야 잊어뿔지. 가슴에 묻고 가지. 안 그러면 묻고 가질 못해.” (어머니 김정자)
2015년 11월 4일 아암도를 찾은 이덕인의 어머니 김정자 씨. 사진제공 최인기
▷ ②부 : 그날의 아암도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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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인 ②] 지금, 여기, 아암도
기자명 최예륜
입력 2019.10.2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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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②
▷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①부 : 그날의 아암도
혁명, 혁명하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는 과거가 있을 수 없다.
_ 이덕인의 일기에서
지난 10월 8일, 1017 빈곤철폐의날 조직위원회가 마석 열사묘역 참배를 했다. 마석에 있는 이덕인 열사 묘역. 사진제공 최인기
1995년의 빈곤 가족. 그리고 인천이라는 욕망의 땅
그의 가족은 1983년에 인천으로 왔다. 이덕인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서 태어난 이덕인은 다섯 남매 중 딱 가운데였다. 이덕인은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는데 그의 맏형 또한 장애인이다. 그의 가족이 연안부두 앞 음식점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출발은 노점이었다. 연안부두 앞 포장마차를 운영하던 노점상들이 단속에 격렬하게 저항하자 인천시는 점용허가를 내주고 풍물의 거리를 조성해 영업을 허용했다. 연안부두 여객, 화물 이용객과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이곳은 하나의 명물이 되었고, 이덕인의 가족은 인천이라는 도시의 일원으로서 분주히 일하며 먹고 살았다. 이덕인의 어머니는 칠순을 훌쩍 넘긴 아픈 몸으로 지금도 가게에 나와 손님을 기다리고 이덕인의 두 동생이 함께 일하고 있다. 미장일을 했던 아버지는 이덕인의 죽음 이후 일을 접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거리 곳곳을 헤맸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인천 땅을 밟은 그의 가족은 조그마한 삶터를 얻기 위해 기를 써야 했고 가족을 잃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신안) 거기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가지고, 우리가 여기가 이렇게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우리 어디로 가야 되겠다 하고는, 이제 정처 없이 인천으로 올라온 거예요. 그때만 해도 내가 좀 젊으니까. 허다 못해 쪼끄만하게 국수장사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이 되었어. 내가 그때는 건강항께 새끼들은 안 굶어죽이겠구나, 그래갖고 무조건 올라왔지. 올라와서도 돈이 없어가지고 굉장히 어려움을 당했어요. 아버지는 일 댕기고 나는 파출로 식당 같은 데 가서 일해주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너무 힘들어가지고.” (어머니 김정자)
곳곳에서 새로운 땅들이 속속 생겨났다. 사람들은 새로 만들어지는 땅 어디쯤 비집고 들어가 살만한 땅 한 뙈기 정도는 허락될 거라 믿었다. ‘민주화’ 이후 정치권들은 저마다 모두를 위한 개발과 진보를 약속했다. 1995년은 전국적으로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어 민선 지자체장이 선출된 해였다. 지역마다 앞 다투어 개발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던 때였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재난참사가 이어졌지만 개발의 신화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인천은 육지를 넘어 바다와 갯벌을 메우며 확장되고 있었다. 1995년 3월 직할시에서 광역시가 된 인천은 “세계화에 부응하고 미래를 향한 광역시의 부푼 꿈을 이루기 위하여” 구시가지는 상업, 업무, 행정, 문화의 중심권으로, 강화군은 통일 거점의 도시 해양사적 관광지로, 검단면은 최첨단 무공해 공단과 전원도시로, 영종도와 옹진군은 공항 및 해양 등의 천혜자원을 이용하는 관광도시로, 송도 신도시는 국제무역, 금융, 정보통신 서비스의 최첨단도시로 만든다는 개발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중소규모 간척사업이 줄을 이었고 영종, 청라, 송도 등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신대륙이 만들어졌다.
인천광역시의 초대 민선시장으로 선출되어 8년간 재임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이 주력한 송도신도시 건설사업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2003년 경제자유구역 지정, 국제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송도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2020년까지 53.45㎢의 육지를 만드는 거대한 개발계획을 여전히 추진 중이다. 송도는 없었던 섬이었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명승지 송도(松島, 마츠시마)라는 이름을 붙인 해안가에 송도유원지가 조성되어 불리던 이름이었다. 아암도는 송도유원지에서 바닷물이 빠지면 건너갈 수 있는 작은 바위섬이었다. 1994년, 아암도 갯벌 바로 앞까지 송도 3공구 매립공사가 완료되면서 아암도는 섬 아닌 섬이 되었다. 해안도로가 뚫리고 군사 철책선이 제거되자 탁 트인 바다의 석양과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거기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 회원들이 마차를 꾸려 노점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덕인은 목숨을 잃었고 그 후 다시 철책선이 쳐졌다.
아암도 앞 갯벌은 인천시의 대대적인 개발과정에서 산란지를 옮겨 다니며 떠밀려온 철새와 텃새들의 먹이활동의 공간이자 수많은 바다생명의 삶터가 되어 왔다. 전 세계적으로 1만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검은머리갈매기도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 갯벌도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현재 인천시는 ‘인천판 사대강’이라고도 불리는 송도 워터프런트 개발사업을 추진 중인데 이 계획에 따르면 아암도갯벌은 아암호수가 될 예정이다. 아암도는 정작 사라졌지만 여기저기 벌어지는 개발사업의 이름으로 활용되고 있다. 뻗어 나갈 수 있는 만큼 뻗어 나가고 갈아엎을 수 있는 만큼 갈아엎는 개발의 역사 속에서 새들이 이리저리 내몰리듯,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도 이리저리 내몰려왔다. 뭇 생명의 신음을 덮어 새로운 땅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한 귀퉁이를 비집고 우리도 좀 함께 살자고 꿈틀대는 가난한 사람들은 다만 단속과 철거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송도국제도시 개발계획안내도. ⓒ인천경제자유구역
1995년,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비록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할지라도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미래의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
지금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
_ 이덕인의 일기에서
이덕인은 사망 전까지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귀금속 세공, 전화음성사서함서비스 영업 등의 일을 하기도 하고, 취업을 위해 광고디자인학원에 다니기도 했다는 그는 가난과 장애로 인한 차별에서 벗어나는 길이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한편, 생계활동의 압박과 현실적 고민을 놓을 수 없었다. 아암도에 대한 단속과 탄압이 심해지면서 망루농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의 갈등과 고민은 깊어졌을 것이다.
“엄마, 엄마 고생 쪼끔만 하라고. 내가 공부해서 출세를 하면, 남들이 그래도, 옛날에는 막 대하고 했던 말도 엄마한테 그렇게 안 할 거라고. 분명히 내가 공부해서 출세해서 엄마 고생 덜 시킬텐께 쪼끔만 더 고생하라고 맨날 그랬어요 걔가.” (어머니 김정자)
“눈이 맑잖아요. 또 그때 당시 서른이 안 됐을 때니까 피도 끓을 거고. 아마, 망루 쌓고 그런 상황에서 도서관에 있을 친구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이 친구는 오로지 살 길이, 공무원이 되거나 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거라 생각했을 수 있어요. 근데 어쨌든 아암도 들어와서 보니,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지 않았을까. 덕인이는 눈이 되게 맑으면서 우수에 차 있었어요. 말수가 적고 고민을 많이 하는 성격. 그 시기가 덕인이한테 굉장히 힘든 시기였을 거예요. 저처럼 운동을 접했던 것도 아니고, 본인은 이제 처음 접하는데, 너무 탄압은 심하고. 그 시절에 장애인들이, 뭐, 학교 들어가서, 학내 서클 같은 것을 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실 일반 장애인들이 운동을 접하기는 굉장히 힘든 때였지만, 활동과정에서 많은 고민이 생겨났겠죠.” (조성남)
이덕인은 장자추 아암도지부 총무역할을 맡으면서, 노점상 생존권 싸움을 시작했다. 당시 노점상의 존재란 곧 단속과 탄압에 대한 저항의 일상이기도 했다. 이덕인은 노점 활동을 계기로 각종 연대집회에 참여하며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다. 그는 부모님의 기억 속에 공부를 열심히 하던 아들로 남아있지만, 그가 참여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 8‧15 범국민대회를 비롯해 각종 연대활동은 청년 이덕인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장애인 차별과 가난한 사람들의 위태로운 삶이 그의 미래에 놓인 조건이라고 했을 때, 그가 접하게 된 저항과 연대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장애인이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장애인들의 치열한 투쟁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싸움과 직결되었다. 차별과 배제 속에서 장애인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으며, 장애인의 권리 실현을 위해서는 빈곤과 불평등을 낳는 사회 구조에 저항해야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싸웠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비극적 여정 속에 1995년의 이덕인의 죽음이 또한 있었다. 장애인도 함께 살자는 목소리에 ‘사회’는 차가운 폭력으로 응답했다. 2000년 들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면서 가난한 장애인들은 생활보호 ‘대상자’가 아니라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되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게 만드는 제도의 한계에 절망했고, 또 한 명의 장애인 노점상이었던 최옥란의 싸움과 죽음이 또한 있었다. 장애인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노동하고 살만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실상 수많은 편견과 장벽이 여전히 존재한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의 권리보다는 보호를 명분으로 한 시설 수용이 우선적이며, 복지급여는 최소한도여야 하며 소득활동을 하거나 법적 부양의무자가 있으면 깎거나 없애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성의 잣대로 장애인의 노동을 통한 사회 참여와 소득활동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 또한 여전하다.
1995년 결성되어 곳곳에서 노점 사업을 추진하던 장자추는 아암도 투쟁 이후 청계천에서 장사하는 회원들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적극적 활동을 벌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노점상 운동에 대한 의견 충돌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장자추는 활동 평가의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는데 이는 장애인운동의 변화 과정과도 맞물린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 전장협은 한국 DPI(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 : 국제장애인연맹)와 통합을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장자추 활동이나 90년대 중반 장애인운동의 대중투쟁의 성과와 과제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단절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이동권 투쟁, 교육권 투쟁, 장애인연금 도입과 기초생활보장제도 현실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와 탈시설 자립생활을 위한 투쟁 등 치열한 투쟁의 과정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만들어졌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관을 바꾸는 과정이 필연적이다. 기존의 사회구조 그대로라면, 이 세계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노동권은 노동에 대한 인식과 관행을 바꿔나가는 과정과 함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장애인일반노조를 준비하고 있는 흐름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6월 12일 장애인일반노조 준비위원회가 발족해 11월 본격적인 출범을 앞두고 있다.
“전장연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 노동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는데, 지금 중증장애인의 노동 문제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하는 거잖아요. 노동의 가치 문제에 있어서, 자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적 가치, 이런 걸 가지고 싸울 때가 아닌가. 그때의 장자추 활동을 돌아본다면, 장애인들이 결국은 노동현장의 경험을 못 하고, 어떻게 보면은, 노점으로 밀려나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자기반성을 못 했던 게 있는 거죠. 사회를 변화시켜야 되는 거지, 기존에 걔네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구조, 틀에 맞추려고 보니까, 그런 대상도 없고, 한계가 있었던 거죠.” (조성남)
장애인일반노조 준비위가 장애인 의무고용 준수를 촉구하며 지난 10월 1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하고 있다. 펼쳐진 노란 우산에는 ‘노동 해방, 장애 해방’이라고 적혀있다. 사진 박승원
24년이 지난, 이덕인 열사의 자리
정권이 다섯 번 바뀌었다. 이덕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죽거나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고인이 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생전의 회고록에서 “가난은 잊거나 피한다고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썼다. 하지만 정작 그가 주도한 인천 개발의 역사는 가난한 사람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경력을 지닌 민선 1기 시장이었다. 휘황찬란한 신도시들이 등장하면서 빈곤과 불평등은 더욱 심화해왔다. 지금, 가난한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덕인의 죽음은 법정에서 다뤄진 바 없다. 겨울 바닷바람 속 살수와 경찰과 용역이 협력한 강제철거는 모두 합법의 영역이었으며, 망루로 내몰렸다 망루에서 탈출해 주검으로 돌아온 이덕인의 죽음의 책임은 그 누구에게도 추궁되지 않았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의 망루에서 죽어서 내려온 다섯 철거민처럼. 법은 경찰관의 사망 책임만을 물었을 뿐, 철거민들의 죽음의 책임을 이 사회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과 죽임이 비극에 휘말려 갈 때 그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면 과연 사회란 무엇일까. 그런 사회 속 가난한 사람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난 10월 8일, 1017 빈곤철폐의날 조직위원회 차원의 장애인빈민 열사 묘역 참배에 동행했다. 스물여덟에, ‘의문사’로 남겨진 죽음을 맞은 이덕인의 무덤가에서 문득 그의 아버지가 식사 도중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해가 안 가. 예수님이 서른셋에 죽었는데 목수 일을 했대. 그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사흘 만에 시신이 어디로 도망갔어. 시신이 어디로 갔어. 긍께 시신이. 신이 부활했지 육체는 부활할 수가 없어. 가을 무를 심어야겠다.” 그에게 아들의 죽음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부재이며 그에게 대통령이 주었다는 시계는 멈춰있었다. “이덕인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은 그 시계가 멈춰 있는 한, 그토록 부질없는 말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소위 ‘86세대’가 ‘작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큰 정의’를 위한 개혁의 주체로 전면에 나설 때, 그들과 동시대를 살다 간 가난한 장애인 청년은 개발과 발전, 진보의 역사 속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이 세계에서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어디인가.
자고 나면 새로운 땅이 생겨나는 때, 비집고 들어가 살 땅 한 뙈기 허락되지 않은 죽음을 돌아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가 없다면 새로운 땅을 상상하고 일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 새로운 땅은 바다와 갯벌을 메우고 뭇 생명을 갈아엎어서 만들어지는 그런 땅은 아마 아닐 것이다. 열사들의 죽음을 붙들고 지금껏 장애인운동이 걸어온 길은 그 치열한 여정 자체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가난한 우리의 땅을 일구고 열사에게 자리를 마련하려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인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
아무리 찢어지게 못사는 마을에도 잘사는 집은
한두 채 있게 마련이지요
이제 그런 집 한 채도 없지요 눈 씻고 봐도 없지요
5‧16인가 뭔가 나고 새마을인가 생기고
5‧17인가 뭔가 나고 새 시대 새 인물인가 나고
아무리 잘사는 부자 마을에도
빚 안 지고 사는 집은 한 채도 없지요
우리 마을에서도 이제 부자라면 제일 가는 부자는
천석이 만석이네 같은 집은 아니지요
논 사서 소작 놓고 자기는 도회지에서 장사하는 사람이지요
면에 가서 면서기라도 하는 사람이지요
조합에 가서 서기라도 하는 사람이지요
손에 흙 안 묻히고 침발라 돈이나 세거나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까딱까딱하는 사람이지요
천석이 만석이네 논도 그런 사람들이 사갔지요
_ 김남주, 「내력」 중
2014년 11월 28일, 강남역에서 열린 이덕인 열사 19주기 추모제
[참고자료]〇장애인 노점상 고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이덕인 열사 투쟁 자료집 : 핏빛 아암도’ 외 당시 자료들
〇최인기,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민플러스』, 2019.05~07 기획연재
〇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한국사회 장애민중 운동의 역사』, 2005
〇민주노점상전국연합,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빈곤철폐를위한사회연대, 인권중심 사람, 인권운동+(더하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공동주최 기자회견, ‘23년 피맺힌 유가족의 한을 풀,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 촉구 청와대 앞 기자회견’ 자료(2018.5.23)
〇대통령소속 의문자진상규명위원회 결정문 진정 제23호, 2002.8.30.
〇인천도시역사관 기획전시,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2019.07.10.~10.06
〇컴팩스마트시티 특별전시, ‘사라진섬, 파묻힌 바다, 태어난 땅’, 2015.08.25.~11.29
〇EBS, ‘하나뿐인 지구 - 생존기록 검은머리갈매기 소금땅에 오다’ 2006. 6. 12
[자문]김종환 _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장애인일반노조(준)
박경석 _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유희 _ 십시일반 밥묵차
조덕휘 _ 전국노점상총연합
조성남 _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최인기 _ 민주노점상전국연합
홍경희 _ 중구 노점상(당시 장자추)
이덕인 열사의 어머니 김정자 님, 아버지 이기주 님과 가족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관련기사
[이덕인 ①] 그날의 아암도
1995년 11월 28일 인천 아암도, 그날의 진실
“25년 전 의문사, 진실 밝혀라” 과거사위 앞두고 이덕인공대위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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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륜 w.yer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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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
빈곤사회연대 2020-11-25 17:05:02
0 119
<기 자 회 견 문>
장애인 빈민 탄압 속에 사라져간, 열사는 말한다
1995년 7월 이덕인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회원으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장애인 차별과 빈곤의 억압 속에서 장애빈민 생존권을 위해 나선 그에게 곧바로 닥친 것은 단속 위협과 강제 철거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비리와 폭력으로 악명 높은 용역업체 ‘무창’을 철거업체로 선정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 노점철거에 나섰다. 1995년 11월 24일 노점철거를 위해 수천의 군, 경, 소방, 용역업체의 합동 철거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암도 노점상들은 고립된 망루에 올라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농성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튿날 물이 빠진 바닷길로 탈출을 시도한 이덕인이 사라졌다. 장애빈민에 대한 폭력철거과정에서 그는 사라졌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덕인 죽음의 책임을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
사흘 뒤, 이덕인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상의가 벗겨진 채, 양손은 포승줄에 결박된 상태로 눈을 부릅뜬 그의 시신은 폭력의 증거 자체였다. 경찰은 영안실에 난입해 그의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죽음의 진상을 서둘러 덮으려 했다. 당시 철거작전을 지시하고 수행한 인천시와 연수구, 경찰, 군, 용역 그 누구 하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그의 부모는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장례 이후에도, 25년간 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 한 맺힌 세월은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이덕인의 죽음의 책임은 과연 그 누가 지고 있는 것인가.
25년 세월, 이덕인과 그 가족의 한을 풀자
이덕인의 죽음은 문민정부, 민선 1기 인천광역시장이 집권한 당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인천은 세계로 뻗어 나갈 희망으로 선전된 개발이 곳곳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단속과 철거의 대상일 뿐이었다.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의 죽음의 진실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 없다. 2002년 김대중정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배‧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조사개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 해산 이후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다.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라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이 재개될 예정이다. 25년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의 노부모와 가족을 위해서라도, 스물여덟 청년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진상을 이제라도 밝혀야 한다. 또한 장애인, 빈민을 위해 투쟁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반드시 명예회복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25년 전과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의 진실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가난한 사람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권력의 오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우리가 살아갈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
하나,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열사의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
하나,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자는 열사의 가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
하나, 정부는 장애빈민 생존을 위해 희생한 이덕인의 명예회복과 국가배상 실시하라
2020년 11월 26일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5주기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첨부 (1)
===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아암도 가주세요”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
...
송도 여기는 없는 데였어요
갯벌이고 바다였지
부모님이 조개 캐던 데였는데
한 이십 오륙 년 전인가
대기업들이 다 사들여서 개발한다고
오십 평 보상받았는데
사천만 원 준다고 얼른 팔아버렸지
안 팔고 갖고 있던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들은 아파트 육십 평짜리 분양받았잖아
팔억쯤 할 거야
상가 개발도 이제서야 한다는데 이십 년 만에
남동공단만 해도 팔팔 올림픽 때는 없었어요
연안부두? 연안부두야 더 오래됐지
여기저기 많이 생겼죠
연안부두를 오가는 화물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변에 택시는 멈춰 섰다. 정말로 아암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를 내면서 훼손된 것인지 차도 방향의 바위는 군데군데 시멘트 바른 가짜 돌로 메워져 있었다. 아암도는 황량했다. 하지만 물 빠진 갯벌에는 무수한 숨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다. 해초들이 자라난 갯벌에 작은 게와 벌레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바다가 육지가 되고 삶터가 갈아엎어진 창해상전(滄海桑田)의 역사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갯벌과 뭇 생명들은 어쩌면 그날의 목격자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날의 일을 물을 길은 없었다.
당시 아암도 망루. 사진제공 장애해방열사 ‘단’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1995년 3월 8일 서초구청 앞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의 이름은 최정환. 방배역 부근에서 노점상을 하던 그는 국가가 공인한 1급 지체장애인이었다. 친자임을 부정하나 호적상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10년 전에 생활보호 신청을 거부당하고 그는 노점상이 되었다. 1994년 6월 구청의 단속으로 심각한 다리 골절을 입은 그는 이듬해 3월 다시 노점 장사에 나섰다가 또 단속을 당했다. 단속 과정에서 압수당한 노점 물품을 찾으러 구청에 갔던 그는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4백만 장애인을 위해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최정환의 죽음을 계기로 장애인운동, 노점상운동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를 구성했다. 장자추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 전국노점상연합회(아래 전노련)가 “돈 없고 힘없는 이 땅의 장애인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생계대책을 마련”하는 것을 취지로 장애인과 도시빈민의 노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당시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률로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있었다. ‘장애인복지법’은 ‘심신장애자복지법’을 1989년 개정하면서 장애인 등록제도를 도입한 것이었으며 ‘장애인고용촉진법’은 1990년에 제정, 당시 장애인의무고용률 2%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4년 세계화 시대를 강조하는 정부여당의 기업활동 규제완화를 위한 움직임 속에 의무고용률을 1%로 하향 조정하려는 시도에 장애계는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1995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전장협은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산재노동자협회와 함께 ‘장애인 고용 촉진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1996년에는 ‘장애인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장애인 고용 촉진 걷기대회’라는 13박 14일간의 전국적 걷기대회를 여는 등 장애인 노동권 실현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개정된 장애인복지법 또한 장애인에 대한 소득지원을 보장하지 않았으며, 생활보호법에 의해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복지 수급의 가능성이었다. 최정환의 사례처럼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생활보호 대상자가 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장애인이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할 권리개념이 미약하던 당시, 장애인이라는 말은 곧 빈민이라는 뜻이었다. 차별과 멸시가 만연한 사회에서 장애인은 먹고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가난한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생계노동 중 하나는 노점이었다. 장자추는 서울 청계천, 강남, 그리고 인천 아암도 등지에서 노점 조직 사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가고 머무는 곳,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갔던 것이다. 스물여덟의 이덕인은 아암도에서 장자추와 함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날의 아암도
1995년 7월 인천지역 아암도지부 장자추가 발족해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하자, 인천시와 연수구는 강제 철거 계획을 추진한다. 9월 인천시의회 2억2천만 원 예산 결의를 바탕으로 연수구청은 용역회사 ‘무창’을 철거업체로 선정했다. 무창은 도시재개발지역 철거에 깡패,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참여한 바 있으며 폭력 철거, 철거민 상대 사기, 유령 인부 명단 제출로 용역비 횡령 등 이미 악명 높은 곳이었다. 연수구청은 인천광역시, 연수구, 남부경찰서, 103여단, 남동공단소방서 등과 대책회의를 개최했고, 용역반의 철거 과정에서 인권침해 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한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1995년 11월 24일 아침 7시 아암도에서 수천의 군, 경, 소방, 용역이 동원된 강제철거가 기습적으로 시작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연수구청 357명, 무창 200명, 경찰관 96명, 기동대 약 600명 등 총 1,253명이 동원되었다. 주변 교통을 통제하고 진입을 원천봉쇄한 경찰력과 포클레인을 동원해 포장마차 노점을 철거하는 용역반원들을 피해 노점상들은 망루에 올랐다. 인천 장자추 아암도 지부 회원들이었다. 포장마차와 노점 물품들은 정오경에 모두 부서졌다. 지붕도 외벽도 없이 아시바 철골로 지어 합판을 올린 망루 위 30여 명의 노점상들은 망루 지지대를 찍어대는 포클레인의 충격과 경찰과 용역반원의 위협, 수차례 거듭된 소방 살수를 맞으며 버텼다. 망루에 오른 노점상들은 화염병과 인분 등을 던지며 저항했지만 이는 금세 소진되었다. 경찰과 용역은 식품은 물론 지병을 앓는 환자의 의약품 반입마저 통제했고 경찰은 망루 농성자들을 향해 ‘모두 구속한다’는 경고를 계속했다. 생필품과 의약품을 전달하고자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진입하려던 노점상과 장애인은 대거 연행되었다.
추위와 공포 속에서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인 25일 저녁 농성자 11명이 망루 아래로 내려가 연행되었다. 직후 밤 8시경 이덕인은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망루 위 동료는 이덕인이 해변의 축대를 따라 걸어가다 5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어통소(경운기 통로)를 통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 시각 바닷물의 수위는 139㎜ 이상이었으나, 방파제의 해발고도를 고려하면 수위는 더 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인이 망루 2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물은 가슴께 높이였다. 이덕인은 걸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던 동료는 아암도 입구 쪽에서 전경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발각되었다는 생각에 탈출을 포기했다. 동료를 향해 먼저 가겠다는 손짓을 하고 이덕인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흘 뒤인 28일 오전, 그는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이덕인은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두 손목이 밧줄에 묶여 있었고 얼굴과 뒷머리, 어깨와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이 있었다. 이덕인의 시신은 인천 세광병원 그리고 거기서 다시 길병원으로 옮겨졌다. 29일 새벽 4시 45분경, 경찰 1500여 명이 길병원 영안실 콘크리트벽과 유리창을 뚫고 난입해 이덕인의 시신을 탈취하고 그의 형을 납치해 강제 입회시킨 가운데 부검을 실시했다. 이후 경찰은 서둘러 사인을 익사로 발표했다.
폭력의 증언
경찰의 시신 탈취 과정에서 노점상 회원과 인천지역 대학생 등 20여 명이 연행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한 명은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덕인의 죽음의 진상은 끝내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등장한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그해 3월 경찰은 최정환의 시신을 탈취한 바 있었다. 24일 장례를 위해 강남병원에서 연세대학교로 장례를 모시려던 최정환의 시신을 탈취한 경찰은 노점상, 장애인의 철야농성 끝에 다음날 오전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결국 장례식으로 가는 길을 끝까지 막아섰다.
95년 12월 16일, 이덕인 열사 장례투쟁. 사진제공 장애해방열사 ‘단’
이덕인의 시신 탈취는 1991년 박창수의 시신 탈취 사건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그는 전국노동자협의회 탈퇴를 종용하는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고문 조사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백골단(경찰)은 영안실 벽을 뚫고 난입,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사인을 단순자살로 발표했다. 2009년 망루농성 당시 사망한 용산참사 철거민에 대한 강제부검,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노조 활동 도중 사망한 염호석의 시신 탈취, 2015년 경찰 물대포를 맞고 이듬해 사망한 백남기 농민 시신 탈취 시도 등 국가폭력 피해자의 죽음의 진상을 가리고 투쟁을 잠재우려는 시도는 정권의 성격을 막론하고 계속되어 왔다.
“세광병원에서 길병원으로 이전을 하려는데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지. 백골단이. 앰뷸런스 차에서 시신을 내리려고 하는데 뺏으려고 하는 거야. 시신을 안고 뛰었대니까. 이덕인 열사 시신을 안고 뛰어 들어간 거지. 안치하니까 고립을 시키고. 비대위 딱 꾸리고 나니까 침탈 소식 들려오고. 그러니까 쭉 빠져나가고 인하대 학생들 한 80명 정도 하고 가족들하고. 뭐 없더라고. 근데 뭐 사방에서 뚫고 들어오고, 전쟁이지 뭐. 피 퍽퍽 날아댕기고. 저쪽에서 벽 뚫고 있고. 안에서는 계속 뭐 던지고, 한 시간 넘게 싸웠을 거야. 전경애들이 앞에서 쓰러지면 얘네들을 막 밀어. 전경 애 하나가 자빠져서 들어오는데 피가 선지처럼 흘렀어.
...
시신을 탈취해갔어. 형까지 두들겨 패서 시체에다 엎어놓고 갔어. 국과수에 가서 하루 만에 와서 새벽에 내던졌어. 내던졌는데 멍 자국들을 다 찢어놨어요. 조직 검사할 데는 다 쪼개놓은 거야. 내장도 다 꺼냈어. 껍데기만 던져놓은 거야. 그 새끼들 정말 인간 아니었어. 그게 무슨 문민정부야, 그게. 말도 안 되는 거지. 이런 정말 악랄한....” (조덕휘, 당시 비대위 활동, 전노련 소속)
“얼마나 무섭게 들어오는지. 벽을 뚫고 저 높은 데서 유리가 깨지면 저기서 사다리 타고 들어오고. 경찰들이. 그리고 들어오면서 막 피가 팍팍 튀겨가지고, 그때 실명된 학생도 있는데 아직까지 연락을 못하고 못 찾어. 피가 막 이렇게 좌아악 솟구치고 쏟아지는데 막 응급실에 데려가고. 영안실의 상주들이 바지에다 막 오줌을 싸고 막... 근데 거기서 집행부 찾는다고 사람들 확 잡아서 얼굴 확인하고. 얼마나 무서웠으면, 남부경찰서인가, 거기 항의하러 가서 거기를 가서 다 누워가지고 시신 내놔라, 이덕인 내놔라. 이러고 누웠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누워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인 거야. 다 도망가고.” (유희, 당시 비대위 활동, 전노련 소속)
1995년 망루가 세워졌던 아암도는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된 가운데, 경찰과 용역의 경계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물품 전달과 연대를 위해 진입을 시도하다 연행되었던 사람들은 조사과정에서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용역들하고도 계속 다툼이 있었지만 우리를 연행한 건 경찰이었어요. 한 20명 정도가 연행됐는데, 복도에 좍 앉혀놓고 한 명씩 한 명씩 불러들여서 조서를 쓰는 거죠.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던 것을 가지고 강압수사를 한 거지. 저 사람이 그러는데 그 말 맞아? 주동자가 누구야? 그러면서. 난 말 못해, 변호사 올 때까지 말 못 해. 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러니까.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다 넘어뜨렸어.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안 나오는 상태로 진짜 옴팡 두들겨 맞고 어마무시하게 발로 밟고. 내가 못 보게 머리채를 잡고 집단폭행을 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얘네들이 하는 말이, 야 이 새끼야 니가 나라 구하는 독립투사야? 말 하나 안 하나 보자 그러면서 막 밟더라고. 진짜 악 소리가 안 나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나는 말을 안 하고.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 그때부터 진짜 입을 닫아버렸어요.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고 그냥 모든 것을 다 거부. 그러니까 바로 유치장 들어갔는데, 나는 진짜 공권력이 이런 식으로 사람 죽일 수도 있겠다...” (조성남, 당시 장자추 활동, 청계천에서 노점)
이덕인의 죽음, 투쟁과 기억
‘장애인 노점상 故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구성되어 5개월여를 싸웠고 이덕인의 장례는 1996년 4월 24일에 치러졌다. 기나긴 싸움의 시간 동안 이덕인의 부모는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물론 인천시, 경찰 관계자 등은 이덕인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 표명조차 하지 않았다. 1996년 4월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139석의 국회의원을 만들었고 1998년 지방선거에서 최기선 인천시장은 재선되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배‧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기각의 사유는 이는 “노점상 행위를 단속한 지방자치단체의 고유 사무에 대한 일반적 법 집행”과정에서 발생한 일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한 것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조사는 일부 미진하므로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조사개시결정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조사는 진행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 아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온 이덕인의 부모는 속이 타들어 간다.
“오죽하면은 이소선 어머니가 나보고 그래. 진짜로 평생 싸운 사람보다 더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람이야 내가. 그런디, 가만히 보니까, 용감하게 싸우든, 용감하게 안 싸우든, 백날 해봤자 정치권들한테는 못 해보겄더라고. 아하, 세상이 이러구나. 정치 허는 놈들은 어느 누구도 못 해보겄구나, 우리 서민들은. 느그들은 해라, 백날 해봤자 소용없다 그러는 거고. 으이씨. 어떤 놈들이 대통령 되면 뭣 허냐. 이런 생각이 들어버려 이제는.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어떤 놈들이 되면 뭣 허냐고. 그렇게 내가 싸움을 하고 댕겼어도 이 모냥인데. 그래서 아, 인자 이것이 자꾸 물 넘어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물 넘어가는 것 같애도 일단은 싸움은 하고 댕겨봐야죠. 그래서 아버지가 싸움을 하고 댕기는데, 나는 인자 지쳐버렸어요. 지쳐버렸어. 자기 일, 자기 집안일 아니기 때문에 느그는 해라, 나는 모른다. 정치권들도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세월을 삐대고 왔어요. 주위에서도 아무리 노력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지금 그런 것을, 국민들을 억울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쳐다본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왔을 거여.” (어머니 김정자)
“이번 정부 들어와서도, 우리 초청해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갔지. 내가 안 가고. 거기서 우리 집사람이 전부 얘기를 다 했대. 그래가지고는, 그것을 해결을 해준다고까지 말을 듣고 나왔어. 그랬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시계도 하나씩 줘서, 나 시계 차고 다니는 게 그거여. 초청해가지고 시계까지 다 줬는데 답이 없어. 근디 그 시계를 끌러서 놔뒀더니 시계가 안 돌아가, 밥을 줘도.” (아버지 이기주)
이덕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늙고 지쳤다. 그들의 아들은 24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죽은 채다.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보상심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1995년 그 시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장애인 노점상의 삶과 저항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지금껏 유보되고 기각되어 왔다. 그 시절에도 추진 중이던 ‘민주화’와 ‘개발’은 현재진행형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땅과 도시는 미래를 향한 진보를 약속하지만 거기서 밀려나는 사람, 그 틈을 비집고 함께 살아보고자 기를 쓰는 가난한 사람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삶과 죽음은 ‘불법’으로 규정되거나 없는 사람인 양 아예 다뤄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빈민의 이리저리 떠밀리는 삶이 불법 혹은 유령처럼 여겨지는 동안,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의 가난한 부모는 거리를 헤매며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에게 이덕인의 죽음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이덕인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그러고라도 싸워서 우리 아들, 그나마 그렇게 훌륭하게 출상 했응게, 어떨 땐 그래, 둘둘 몰아서 나간 것보다 그래도 내가 여기저기 댕기면서 싸워서 이 정도라도 나갈 수 있게 한 게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근디 오죽해서 해결하다 하다 못하면 이렇게 지쳐갖고. 지쳐갖고, 인자는 모르겄다, 이런 생각을 하겠냐고. 내가 그놈 잊어보려고 얼마나 한이 맺힌 사람인데..... 지금도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내가, 마석을 가봐야 되는디 지금 못 가고 명절 쇠고나 갈거나 어쩔 거냐 그러고 있는디. 너무너무 보고 싶고 너무너무 이쁘게 생긴 내 아들을 갖다가 그렇게... 두드려 맞아갖고 얼굴이 그렇게 생겨가지고... 내가 내가 진짜... 내가 죽어야 잊어뿔지. 가슴에 묻고 가지. 안 그러면 묻고 가질 못해.” (어머니 김정자)
2015년 11월 4일 아암도를 찾은 이덕인의 어머니 김정자 씨. 사진제공 최인기
▷ ②부 : 그날의 아암도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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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인 ②] 지금, 여기, 아암도
기자명 최예륜
입력 2019.10.2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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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②
▷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①부 : 그날의 아암도
혁명, 혁명하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는 과거가 있을 수 없다.
_ 이덕인의 일기에서
지난 10월 8일, 1017 빈곤철폐의날 조직위원회가 마석 열사묘역 참배를 했다. 마석에 있는 이덕인 열사 묘역. 사진제공 최인기
1995년의 빈곤 가족. 그리고 인천이라는 욕망의 땅
그의 가족은 1983년에 인천으로 왔다. 이덕인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서 태어난 이덕인은 다섯 남매 중 딱 가운데였다. 이덕인은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는데 그의 맏형 또한 장애인이다. 그의 가족이 연안부두 앞 음식점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출발은 노점이었다. 연안부두 앞 포장마차를 운영하던 노점상들이 단속에 격렬하게 저항하자 인천시는 점용허가를 내주고 풍물의 거리를 조성해 영업을 허용했다. 연안부두 여객, 화물 이용객과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이곳은 하나의 명물이 되었고, 이덕인의 가족은 인천이라는 도시의 일원으로서 분주히 일하며 먹고 살았다. 이덕인의 어머니는 칠순을 훌쩍 넘긴 아픈 몸으로 지금도 가게에 나와 손님을 기다리고 이덕인의 두 동생이 함께 일하고 있다. 미장일을 했던 아버지는 이덕인의 죽음 이후 일을 접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거리 곳곳을 헤맸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인천 땅을 밟은 그의 가족은 조그마한 삶터를 얻기 위해 기를 써야 했고 가족을 잃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신안) 거기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가지고, 우리가 여기가 이렇게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우리 어디로 가야 되겠다 하고는, 이제 정처 없이 인천으로 올라온 거예요. 그때만 해도 내가 좀 젊으니까. 허다 못해 쪼끄만하게 국수장사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이 되었어. 내가 그때는 건강항께 새끼들은 안 굶어죽이겠구나, 그래갖고 무조건 올라왔지. 올라와서도 돈이 없어가지고 굉장히 어려움을 당했어요. 아버지는 일 댕기고 나는 파출로 식당 같은 데 가서 일해주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너무 힘들어가지고.” (어머니 김정자)
곳곳에서 새로운 땅들이 속속 생겨났다. 사람들은 새로 만들어지는 땅 어디쯤 비집고 들어가 살만한 땅 한 뙈기 정도는 허락될 거라 믿었다. ‘민주화’ 이후 정치권들은 저마다 모두를 위한 개발과 진보를 약속했다. 1995년은 전국적으로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어 민선 지자체장이 선출된 해였다. 지역마다 앞 다투어 개발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던 때였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재난참사가 이어졌지만 개발의 신화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인천은 육지를 넘어 바다와 갯벌을 메우며 확장되고 있었다. 1995년 3월 직할시에서 광역시가 된 인천은 “세계화에 부응하고 미래를 향한 광역시의 부푼 꿈을 이루기 위하여” 구시가지는 상업, 업무, 행정, 문화의 중심권으로, 강화군은 통일 거점의 도시 해양사적 관광지로, 검단면은 최첨단 무공해 공단과 전원도시로, 영종도와 옹진군은 공항 및 해양 등의 천혜자원을 이용하는 관광도시로, 송도 신도시는 국제무역, 금융, 정보통신 서비스의 최첨단도시로 만든다는 개발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중소규모 간척사업이 줄을 이었고 영종, 청라, 송도 등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신대륙이 만들어졌다.
인천광역시의 초대 민선시장으로 선출되어 8년간 재임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이 주력한 송도신도시 건설사업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2003년 경제자유구역 지정, 국제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송도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2020년까지 53.45㎢의 육지를 만드는 거대한 개발계획을 여전히 추진 중이다. 송도는 없었던 섬이었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명승지 송도(松島, 마츠시마)라는 이름을 붙인 해안가에 송도유원지가 조성되어 불리던 이름이었다. 아암도는 송도유원지에서 바닷물이 빠지면 건너갈 수 있는 작은 바위섬이었다. 1994년, 아암도 갯벌 바로 앞까지 송도 3공구 매립공사가 완료되면서 아암도는 섬 아닌 섬이 되었다. 해안도로가 뚫리고 군사 철책선이 제거되자 탁 트인 바다의 석양과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거기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 회원들이 마차를 꾸려 노점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덕인은 목숨을 잃었고 그 후 다시 철책선이 쳐졌다.
아암도 앞 갯벌은 인천시의 대대적인 개발과정에서 산란지를 옮겨 다니며 떠밀려온 철새와 텃새들의 먹이활동의 공간이자 수많은 바다생명의 삶터가 되어 왔다. 전 세계적으로 1만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검은머리갈매기도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 갯벌도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현재 인천시는 ‘인천판 사대강’이라고도 불리는 송도 워터프런트 개발사업을 추진 중인데 이 계획에 따르면 아암도갯벌은 아암호수가 될 예정이다. 아암도는 정작 사라졌지만 여기저기 벌어지는 개발사업의 이름으로 활용되고 있다. 뻗어 나갈 수 있는 만큼 뻗어 나가고 갈아엎을 수 있는 만큼 갈아엎는 개발의 역사 속에서 새들이 이리저리 내몰리듯,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도 이리저리 내몰려왔다. 뭇 생명의 신음을 덮어 새로운 땅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한 귀퉁이를 비집고 우리도 좀 함께 살자고 꿈틀대는 가난한 사람들은 다만 단속과 철거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송도국제도시 개발계획안내도. ⓒ인천경제자유구역
1995년,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비록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할지라도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미래의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
지금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
_ 이덕인의 일기에서
이덕인은 사망 전까지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귀금속 세공, 전화음성사서함서비스 영업 등의 일을 하기도 하고, 취업을 위해 광고디자인학원에 다니기도 했다는 그는 가난과 장애로 인한 차별에서 벗어나는 길이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한편, 생계활동의 압박과 현실적 고민을 놓을 수 없었다. 아암도에 대한 단속과 탄압이 심해지면서 망루농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의 갈등과 고민은 깊어졌을 것이다.
“엄마, 엄마 고생 쪼끔만 하라고. 내가 공부해서 출세를 하면, 남들이 그래도, 옛날에는 막 대하고 했던 말도 엄마한테 그렇게 안 할 거라고. 분명히 내가 공부해서 출세해서 엄마 고생 덜 시킬텐께 쪼끔만 더 고생하라고 맨날 그랬어요 걔가.” (어머니 김정자)
“눈이 맑잖아요. 또 그때 당시 서른이 안 됐을 때니까 피도 끓을 거고. 아마, 망루 쌓고 그런 상황에서 도서관에 있을 친구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이 친구는 오로지 살 길이, 공무원이 되거나 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거라 생각했을 수 있어요. 근데 어쨌든 아암도 들어와서 보니,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지 않았을까. 덕인이는 눈이 되게 맑으면서 우수에 차 있었어요. 말수가 적고 고민을 많이 하는 성격. 그 시기가 덕인이한테 굉장히 힘든 시기였을 거예요. 저처럼 운동을 접했던 것도 아니고, 본인은 이제 처음 접하는데, 너무 탄압은 심하고. 그 시절에 장애인들이, 뭐, 학교 들어가서, 학내 서클 같은 것을 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실 일반 장애인들이 운동을 접하기는 굉장히 힘든 때였지만, 활동과정에서 많은 고민이 생겨났겠죠.” (조성남)
이덕인은 장자추 아암도지부 총무역할을 맡으면서, 노점상 생존권 싸움을 시작했다. 당시 노점상의 존재란 곧 단속과 탄압에 대한 저항의 일상이기도 했다. 이덕인은 노점 활동을 계기로 각종 연대집회에 참여하며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다. 그는 부모님의 기억 속에 공부를 열심히 하던 아들로 남아있지만, 그가 참여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 8‧15 범국민대회를 비롯해 각종 연대활동은 청년 이덕인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장애인 차별과 가난한 사람들의 위태로운 삶이 그의 미래에 놓인 조건이라고 했을 때, 그가 접하게 된 저항과 연대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장애인이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장애인들의 치열한 투쟁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싸움과 직결되었다. 차별과 배제 속에서 장애인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으며, 장애인의 권리 실현을 위해서는 빈곤과 불평등을 낳는 사회 구조에 저항해야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싸웠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비극적 여정 속에 1995년의 이덕인의 죽음이 또한 있었다. 장애인도 함께 살자는 목소리에 ‘사회’는 차가운 폭력으로 응답했다. 2000년 들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면서 가난한 장애인들은 생활보호 ‘대상자’가 아니라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되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게 만드는 제도의 한계에 절망했고, 또 한 명의 장애인 노점상이었던 최옥란의 싸움과 죽음이 또한 있었다. 장애인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노동하고 살만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실상 수많은 편견과 장벽이 여전히 존재한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의 권리보다는 보호를 명분으로 한 시설 수용이 우선적이며, 복지급여는 최소한도여야 하며 소득활동을 하거나 법적 부양의무자가 있으면 깎거나 없애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성의 잣대로 장애인의 노동을 통한 사회 참여와 소득활동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 또한 여전하다.
1995년 결성되어 곳곳에서 노점 사업을 추진하던 장자추는 아암도 투쟁 이후 청계천에서 장사하는 회원들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적극적 활동을 벌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노점상 운동에 대한 의견 충돌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장자추는 활동 평가의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는데 이는 장애인운동의 변화 과정과도 맞물린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 전장협은 한국 DPI(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 : 국제장애인연맹)와 통합을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장자추 활동이나 90년대 중반 장애인운동의 대중투쟁의 성과와 과제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단절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이동권 투쟁, 교육권 투쟁, 장애인연금 도입과 기초생활보장제도 현실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와 탈시설 자립생활을 위한 투쟁 등 치열한 투쟁의 과정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만들어졌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관을 바꾸는 과정이 필연적이다. 기존의 사회구조 그대로라면, 이 세계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노동권은 노동에 대한 인식과 관행을 바꿔나가는 과정과 함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장애인일반노조를 준비하고 있는 흐름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6월 12일 장애인일반노조 준비위원회가 발족해 11월 본격적인 출범을 앞두고 있다.
“전장연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 노동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는데, 지금 중증장애인의 노동 문제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하는 거잖아요. 노동의 가치 문제에 있어서, 자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적 가치, 이런 걸 가지고 싸울 때가 아닌가. 그때의 장자추 활동을 돌아본다면, 장애인들이 결국은 노동현장의 경험을 못 하고, 어떻게 보면은, 노점으로 밀려나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자기반성을 못 했던 게 있는 거죠. 사회를 변화시켜야 되는 거지, 기존에 걔네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구조, 틀에 맞추려고 보니까, 그런 대상도 없고, 한계가 있었던 거죠.” (조성남)
장애인일반노조 준비위가 장애인 의무고용 준수를 촉구하며 지난 10월 1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하고 있다. 펼쳐진 노란 우산에는 ‘노동 해방, 장애 해방’이라고 적혀있다. 사진 박승원
24년이 지난, 이덕인 열사의 자리
정권이 다섯 번 바뀌었다. 이덕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죽거나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고인이 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생전의 회고록에서 “가난은 잊거나 피한다고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썼다. 하지만 정작 그가 주도한 인천 개발의 역사는 가난한 사람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경력을 지닌 민선 1기 시장이었다. 휘황찬란한 신도시들이 등장하면서 빈곤과 불평등은 더욱 심화해왔다. 지금, 가난한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덕인의 죽음은 법정에서 다뤄진 바 없다. 겨울 바닷바람 속 살수와 경찰과 용역이 협력한 강제철거는 모두 합법의 영역이었으며, 망루로 내몰렸다 망루에서 탈출해 주검으로 돌아온 이덕인의 죽음의 책임은 그 누구에게도 추궁되지 않았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의 망루에서 죽어서 내려온 다섯 철거민처럼. 법은 경찰관의 사망 책임만을 물었을 뿐, 철거민들의 죽음의 책임을 이 사회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과 죽임이 비극에 휘말려 갈 때 그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면 과연 사회란 무엇일까. 그런 사회 속 가난한 사람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난 10월 8일, 1017 빈곤철폐의날 조직위원회 차원의 장애인빈민 열사 묘역 참배에 동행했다. 스물여덟에, ‘의문사’로 남겨진 죽음을 맞은 이덕인의 무덤가에서 문득 그의 아버지가 식사 도중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해가 안 가. 예수님이 서른셋에 죽었는데 목수 일을 했대. 그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사흘 만에 시신이 어디로 도망갔어. 시신이 어디로 갔어. 긍께 시신이. 신이 부활했지 육체는 부활할 수가 없어. 가을 무를 심어야겠다.” 그에게 아들의 죽음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부재이며 그에게 대통령이 주었다는 시계는 멈춰있었다. “이덕인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은 그 시계가 멈춰 있는 한, 그토록 부질없는 말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소위 ‘86세대’가 ‘작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큰 정의’를 위한 개혁의 주체로 전면에 나설 때, 그들과 동시대를 살다 간 가난한 장애인 청년은 개발과 발전, 진보의 역사 속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이 세계에서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어디인가.
자고 나면 새로운 땅이 생겨나는 때, 비집고 들어가 살 땅 한 뙈기 허락되지 않은 죽음을 돌아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가 없다면 새로운 땅을 상상하고 일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 새로운 땅은 바다와 갯벌을 메우고 뭇 생명을 갈아엎어서 만들어지는 그런 땅은 아마 아닐 것이다. 열사들의 죽음을 붙들고 지금껏 장애인운동이 걸어온 길은 그 치열한 여정 자체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가난한 우리의 땅을 일구고 열사에게 자리를 마련하려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인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
아무리 찢어지게 못사는 마을에도 잘사는 집은
한두 채 있게 마련이지요
이제 그런 집 한 채도 없지요 눈 씻고 봐도 없지요
5‧16인가 뭔가 나고 새마을인가 생기고
5‧17인가 뭔가 나고 새 시대 새 인물인가 나고
아무리 잘사는 부자 마을에도
빚 안 지고 사는 집은 한 채도 없지요
우리 마을에서도 이제 부자라면 제일 가는 부자는
천석이 만석이네 같은 집은 아니지요
논 사서 소작 놓고 자기는 도회지에서 장사하는 사람이지요
면에 가서 면서기라도 하는 사람이지요
조합에 가서 서기라도 하는 사람이지요
손에 흙 안 묻히고 침발라 돈이나 세거나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까딱까딱하는 사람이지요
천석이 만석이네 논도 그런 사람들이 사갔지요
_ 김남주, 「내력」 중
2014년 11월 28일, 강남역에서 열린 이덕인 열사 19주기 추모제
[참고자료]〇장애인 노점상 고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이덕인 열사 투쟁 자료집 : 핏빛 아암도’ 외 당시 자료들
〇최인기,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민플러스』, 2019.05~07 기획연재
〇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한국사회 장애민중 운동의 역사』, 2005
〇민주노점상전국연합,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빈곤철폐를위한사회연대, 인권중심 사람, 인권운동+(더하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공동주최 기자회견, ‘23년 피맺힌 유가족의 한을 풀,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 촉구 청와대 앞 기자회견’ 자료(2018.5.23)
〇대통령소속 의문자진상규명위원회 결정문 진정 제23호, 2002.8.30.
〇인천도시역사관 기획전시,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2019.07.10.~10.06
〇컴팩스마트시티 특별전시, ‘사라진섬, 파묻힌 바다, 태어난 땅’, 2015.08.25.~11.29
〇EBS, ‘하나뿐인 지구 - 생존기록 검은머리갈매기 소금땅에 오다’ 2006. 6. 12
[자문]김종환 _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장애인일반노조(준)
박경석 _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유희 _ 십시일반 밥묵차
조덕휘 _ 전국노점상총연합
조성남 _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최인기 _ 민주노점상전국연합
홍경희 _ 중구 노점상(당시 장자추)
이덕인 열사의 어머니 김정자 님, 아버지 이기주 님과 가족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관련기사
[이덕인 ①] 그날의 아암도
1995년 11월 28일 인천 아암도, 그날의 진실
“25년 전 의문사, 진실 밝혀라” 과거사위 앞두고 이덕인공대위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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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륜 w.yer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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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
빈곤사회연대 2020-11-25 1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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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자 회 견 문>
장애인 빈민 탄압 속에 사라져간, 열사는 말한다
1995년 7월 이덕인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회원으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장애인 차별과 빈곤의 억압 속에서 장애빈민 생존권을 위해 나선 그에게 곧바로 닥친 것은 단속 위협과 강제 철거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비리와 폭력으로 악명 높은 용역업체 ‘무창’을 철거업체로 선정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 노점철거에 나섰다. 1995년 11월 24일 노점철거를 위해 수천의 군, 경, 소방, 용역업체의 합동 철거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암도 노점상들은 고립된 망루에 올라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농성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튿날 물이 빠진 바닷길로 탈출을 시도한 이덕인이 사라졌다. 장애빈민에 대한 폭력철거과정에서 그는 사라졌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덕인 죽음의 책임을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
사흘 뒤, 이덕인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상의가 벗겨진 채, 양손은 포승줄에 결박된 상태로 눈을 부릅뜬 그의 시신은 폭력의 증거 자체였다. 경찰은 영안실에 난입해 그의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죽음의 진상을 서둘러 덮으려 했다. 당시 철거작전을 지시하고 수행한 인천시와 연수구, 경찰, 군, 용역 그 누구 하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그의 부모는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장례 이후에도, 25년간 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 한 맺힌 세월은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이덕인의 죽음의 책임은 과연 그 누가 지고 있는 것인가.
25년 세월, 이덕인과 그 가족의 한을 풀자
이덕인의 죽음은 문민정부, 민선 1기 인천광역시장이 집권한 당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인천은 세계로 뻗어 나갈 희망으로 선전된 개발이 곳곳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단속과 철거의 대상일 뿐이었다.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의 죽음의 진실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 없다. 2002년 김대중정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배‧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조사개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 해산 이후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다.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라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이 재개될 예정이다. 25년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의 노부모와 가족을 위해서라도, 스물여덟 청년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진상을 이제라도 밝혀야 한다. 또한 장애인, 빈민을 위해 투쟁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반드시 명예회복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25년 전과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의 진실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가난한 사람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권력의 오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우리가 살아갈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
하나,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열사의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
하나,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자는 열사의 가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
하나, 정부는 장애빈민 생존을 위해 희생한 이덕인의 명예회복과 국가배상 실시하라
2020년 11월 26일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5주기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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