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에도 입증 못한 온갖 설(說), 또다시 부정되다!
한 번역가의 취재로 드러난 '美 군사정보관' 김용장씨의 실체... 1995년 검찰 조사에서도 김씨의 '전두환 광주 방문설·기총소사설' 입증 못해
글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글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김용장씨가 언급한 이재우씨(당시 광주 505보안부대장)를 비롯해 허문도씨(당시 중정부장 비서실장), '전두환 신군부' 측에 불리한 진술을 했던 한용원씨(당시 보안사 과장), 이구호씨(당시 육군 기갑학교장)도 검찰 조사에서 전두환의 광주 방문 및 기총소사설을 부정하는 진술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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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JTBC에 출연해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광주를 방문해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을 한 김용장씨가 501 군사정보단의 군사정보관으로 근무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 육군 방첩부대 501 정보여단 광주파견대 군사정보관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용장씨는 지난달 1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오후 12시를 전후로 K57(광주광역시 제1전투비행단)에 왔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전(全) 사령관은 헬기를 타고 왔고,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 보안대장 등과 함께 회의를 했다"며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김씨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쯤 광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김씨는 "전 전 대통령이 도착한 당일과 27일 두 차례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했다. 즉, 전두환 사령관이 발포와 헬기 사격을 지시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한 번역가의 취재를 통해 드러난 김용장씨의 실체

설갑수씨의 글이 실린 <경향신문>. 사진=경향신문 인터넷판 캡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영문판 번역자인 설갑수씨는 2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5.18의 ‘꿈 같은 증인’ 김용장은 ‘미 육군 군사정보관’이 아니었다>는 제하의 글에서 김용장씨는 단순 통역관에 불과했으며, 그 같은 정보를 알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설갑수씨에 따르면, 김용장씨는 9급 통역으로 501 정보단에 1974년 입단(入團)했고, 1990년대 중반 통역관(Language Specialist)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설씨는 “이 기간 그는 비공식 정보원으로서 광주 주변의 첩보를 수집해 보고할 수도 있었으나 그가 속했다던 501 정보단의 524 임시대대-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국방정보국(DIA) 계통을 거치는 공식 보고서를 직접 작성할 위치나 권한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설씨는, 김용장씨가 501 정보단 직책을 맡았다는 것을 입증할 물증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요지의 주장도 했다. 20년 동안 501 정보단에서 일했다는 근속표창만을 제시했을 뿐 어떠한 직책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부대 표창 중 하나에는 그가 ‘민간인 통역관’이었다는 설명도 담겨 있다.
INSCOM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어”
INSCOM 공보국은 이와 관련한 설갑수씨의 질문에,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은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다”며 “그들은 정보전문가로서 훈련받거나 고용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용장씨 퇴직 직전 501 부대장이었던 퇴역 장성 H씨 역시 김용장씨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H 장군은 ‘민간인 통역이 군사정보직으로 갈아타거나 겸직할 수 있느냐’는 설갑수씨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자고 했다고 한다.
설갑수씨는 ▲김용장씨가 5월 21일 전두환이 탑승한 헬기가 공주에 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장황한 설명만 내놓고 물증을 내지 못한 점 ▲5월 18일 사나흘 전 미국 국방성 명령으로 광주에서 미국인을 철수시켰다는 주장을 번복한 점 등 김씨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설씨는 “석달간 김씨의 거짓 주장과 거짓 신분이 한국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받아쓰기만 열중한 언론 때문이었다. 특히 지난 3월 김씨를 최초 인터뷰한 JTBC ‘스포트라이트’의 5월 16일 방송분은 김씨에게 없는 알리바이라도 만들어 줄 듯한 기세였다”고 지적했다.

5.18 당시 기총소사가 이뤄졌다는 광주 전일빌딩. 사진=월간조선
親신군부·反신군부 인사도 일관되게 ‘전두환 광주 방문설’ ‘기총소사설’ 부정
김용장씨가 주장한 ‘전두환 광주 방문설’ ‘기총소사(機銃掃射·헬기에서 총을 쏨)설’은 1995년 12·12와 5·18 관련 검찰 조사에서도 입증되지 않았다. 당시 5.18 특별법(소급입법) 제정에 따라 12.12와 5.18을 대대적으로 재조사하던 시기였다. 이때에도 두 가지 설을 부정하는 증언이 많이 나왔다.
김용장씨가 언급한 이재우씨(당시 광주 505보안부대장)를 비롯해 허문도씨(당시 중정부장 비서실장), '전두환 신군부' 측에 불리한 진술을 했던 한용원씨(당시 보안사 과장), 이구호씨(당시 육군 기갑학교장)도 검찰 조사에서 전두환의 광주 방문 및 기총소사설을 부정하는 진술을 했다.
먼저 이재우씨의 검찰 진술 일부다.
<문: 5월 2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에서 사태 진행 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헬기로 광주 일원을 둘러보고 간 바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작전부대 위문이고, 또 하나는 비밀 지시사항 시달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전교사 사령관을 만났어야 하고 저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윤흥정 장군(당시 전교사령관)도 국회 청문회(1988년)에서 전 장군을 만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고, 저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점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꾸며댄 거짓말로 생각됩니다.> (1995년 12월 20일 서울지방검찰청)
허문도씨가 검찰에서 한 진술의 일부다.
<문: 광주사태가 발생한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주로 어디서 근무했는가요.
답: 그 기간 동안에는 중앙정보부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이 진행되었으므로, 거의 매일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장실로 나오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1996년 1월 11일 서울지방검찰청)
한용원씨는 ‘기총소사설’을 부정하는 진술을 했다. 그의 말이다.
<문: 최근 들어 미국 국적의 피터슨 목사라는 사람이 1980년 5월 20일 계엄군들이 헬기를 타고 시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여 100여 명을 사상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는데 당시 그런 보고를 받은 일이 있는가요.
답: 기총소사에 대해 보안사에 상황이 전파된 적이 없습니다. 외국 목사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제기하는지 모르지만 적과의 교전 상태도 아닌데 자국 민간인을 상대로 기총소사를 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1995년 12월 21일 서울지방검찰청)
'1980년 5월 21~22일' 권부 실력자 전두환이 서울 비울 수 없는 상황
한용원씨와 마찬가지로 신군부에 불리한 진술을 했던 이구호씨도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 등이 광주에 오지 않았냐”는 검찰 측 질문에 “그들이 광주에 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전두환 광주 방문설’ ‘헬기사격설’은 親신군부·反신군부 인사들에 의해 부정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전두환 사령관이 광주에 왔다고 주장하는 1980년 5월 21일엔 일부 개각(改閣)이 있었고, 이튿날인 5월 22일엔 합동수사본부(합수부)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중간 수사 발표가 있었다. 국군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이자 사실상 권부(權府) 최고 실권자였던 전두환 입장에선 당시 서울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최예섭 준장(보안사 기획조정처장), 홍성률 대령(1군단 보안부대장) 등 보안사 소속 간부 두 명을 광주 현장에 급파(急派)한 상황이었기에, 전두환 스스로 광주에 갈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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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방첩부대 501 정보여단 광주파견대 군사정보관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용장씨는 지난달 1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오후 12시를 전후로 K57(광주광역시 제1전투비행단)에 왔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전(全) 사령관은 헬기를 타고 왔고,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 보안대장 등과 함께 회의를 했다"며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김씨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쯤 광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김씨는 "전 전 대통령이 도착한 당일과 27일 두 차례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했다. 즉, 전두환 사령관이 발포와 헬기 사격을 지시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한 번역가의 취재를 통해 드러난 김용장씨의 실체

설갑수씨의 글이 실린 <경향신문>. 사진=경향신문 인터넷판 캡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영문판 번역자인 설갑수씨는 2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5.18의 ‘꿈 같은 증인’ 김용장은 ‘미 육군 군사정보관’이 아니었다>는 제하의 글에서 김용장씨는 단순 통역관에 불과했으며, 그 같은 정보를 알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설갑수씨에 따르면, 김용장씨는 9급 통역으로 501 정보단에 1974년 입단(入團)했고, 1990년대 중반 통역관(Language Specialist)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설씨는 “이 기간 그는 비공식 정보원으로서 광주 주변의 첩보를 수집해 보고할 수도 있었으나 그가 속했다던 501 정보단의 524 임시대대-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국방정보국(DIA) 계통을 거치는 공식 보고서를 직접 작성할 위치나 권한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설씨는, 김용장씨가 501 정보단 직책을 맡았다는 것을 입증할 물증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요지의 주장도 했다. 20년 동안 501 정보단에서 일했다는 근속표창만을 제시했을 뿐 어떠한 직책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부대 표창 중 하나에는 그가 ‘민간인 통역관’이었다는 설명도 담겨 있다.
INSCOM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어”
INSCOM 공보국은 이와 관련한 설갑수씨의 질문에,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은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다”며 “그들은 정보전문가로서 훈련받거나 고용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용장씨 퇴직 직전 501 부대장이었던 퇴역 장성 H씨 역시 김용장씨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H 장군은 ‘민간인 통역이 군사정보직으로 갈아타거나 겸직할 수 있느냐’는 설갑수씨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자고 했다고 한다.
설갑수씨는 ▲김용장씨가 5월 21일 전두환이 탑승한 헬기가 공주에 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장황한 설명만 내놓고 물증을 내지 못한 점 ▲5월 18일 사나흘 전 미국 국방성 명령으로 광주에서 미국인을 철수시켰다는 주장을 번복한 점 등 김씨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설씨는 “석달간 김씨의 거짓 주장과 거짓 신분이 한국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받아쓰기만 열중한 언론 때문이었다. 특히 지난 3월 김씨를 최초 인터뷰한 JTBC ‘스포트라이트’의 5월 16일 방송분은 김씨에게 없는 알리바이라도 만들어 줄 듯한 기세였다”고 지적했다.

5.18 당시 기총소사가 이뤄졌다는 광주 전일빌딩. 사진=월간조선
親신군부·反신군부 인사도 일관되게 ‘전두환 광주 방문설’ ‘기총소사설’ 부정
김용장씨가 주장한 ‘전두환 광주 방문설’ ‘기총소사(機銃掃射·헬기에서 총을 쏨)설’은 1995년 12·12와 5·18 관련 검찰 조사에서도 입증되지 않았다. 당시 5.18 특별법(소급입법) 제정에 따라 12.12와 5.18을 대대적으로 재조사하던 시기였다. 이때에도 두 가지 설을 부정하는 증언이 많이 나왔다.
김용장씨가 언급한 이재우씨(당시 광주 505보안부대장)를 비롯해 허문도씨(당시 중정부장 비서실장), '전두환 신군부' 측에 불리한 진술을 했던 한용원씨(당시 보안사 과장), 이구호씨(당시 육군 기갑학교장)도 검찰 조사에서 전두환의 광주 방문 및 기총소사설을 부정하는 진술을 했다.
먼저 이재우씨의 검찰 진술 일부다.
<문: 5월 2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에서 사태 진행 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헬기로 광주 일원을 둘러보고 간 바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작전부대 위문이고, 또 하나는 비밀 지시사항 시달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전교사 사령관을 만났어야 하고 저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윤흥정 장군(당시 전교사령관)도 국회 청문회(1988년)에서 전 장군을 만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고, 저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점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꾸며댄 거짓말로 생각됩니다.> (1995년 12월 20일 서울지방검찰청)
허문도씨가 검찰에서 한 진술의 일부다.
<문: 광주사태가 발생한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주로 어디서 근무했는가요.
답: 그 기간 동안에는 중앙정보부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이 진행되었으므로, 거의 매일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장실로 나오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1996년 1월 11일 서울지방검찰청)
한용원씨는 ‘기총소사설’을 부정하는 진술을 했다. 그의 말이다.
<문: 최근 들어 미국 국적의 피터슨 목사라는 사람이 1980년 5월 20일 계엄군들이 헬기를 타고 시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여 100여 명을 사상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는데 당시 그런 보고를 받은 일이 있는가요.
답: 기총소사에 대해 보안사에 상황이 전파된 적이 없습니다. 외국 목사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제기하는지 모르지만 적과의 교전 상태도 아닌데 자국 민간인을 상대로 기총소사를 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1995년 12월 21일 서울지방검찰청)
'1980년 5월 21~22일' 권부 실력자 전두환이 서울 비울 수 없는 상황
한용원씨와 마찬가지로 신군부에 불리한 진술을 했던 이구호씨도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 등이 광주에 오지 않았냐”는 검찰 측 질문에 “그들이 광주에 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전두환 광주 방문설’ ‘헬기사격설’은 親신군부·反신군부 인사들에 의해 부정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전두환 사령관이 광주에 왔다고 주장하는 1980년 5월 21일엔 일부 개각(改閣)이 있었고, 이튿날인 5월 22일엔 합동수사본부(합수부)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중간 수사 발표가 있었다. 국군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이자 사실상 권부(權府) 최고 실권자였던 전두환 입장에선 당시 서울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최예섭 준장(보안사 기획조정처장), 홍성률 대령(1군단 보안부대장) 등 보안사 소속 간부 두 명을 광주 현장에 급파(急派)한 상황이었기에, 전두환 스스로 광주에 갈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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