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작성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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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이자 동지였던 정해진
정해진의 어린 시절
정해룡의 두 살 터울 동생 정해진(1915년 생)은
단순한 동생이 아니라 동지이며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정각수는 지조 높은 선비였으나
개화도, 일본도 못마땅했다. 당시 옛 선비들 중에는 신학문을
일본 것이라고 배척하는 경향이 강했다. 정각수는 큰 손자 해룡이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원치 않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정각수는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작은 손자 해진이 신학문을 익히는 것은 허락했다. 특히 정해룡, 정해진 형제의 어머니 윤초평이 자식들 중 하나만이라도
학교에 보내자고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여덟살까지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던 정해진은 아홉 살 때 고향으로부터 50리 정도 떨어져있는 장흥군 장흥읍에 있는 장흥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1] 정해진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곳에서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회천면에 있는 학교가 부실한데다 정씨 집안의 몇몇이 장흥에서 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탓도 있다. 정해룡은
집안과 오랜 인연이 있는 집에 하숙을 정했다. 하숙집 주인은 어린 정해진을 무척 귀여워 해주었으나 생활이
어려워 방에 전기를 켜지 못하여 낮에만 공부해야 했고 때로는 바다풀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장흥에는
이런 처지의 친구들이 많았다. 시골의 지주집 도련님이던 정해진은 장흥에서 이런 친구들과 사귀던 과정에서
도시 서민들의 생활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순박하고 근면하고 서로 돕는 생활태도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그들 속에 많은 친구를 가지게 되었다.
정해진은 장흥보통학교 시절 제주도 출신의 송희팔 선생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송희팔
선생은 도화(미술)시간이면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조국산천을 그리게 하였으며 체조시간에는 편을 갈라 씨름을 시키고는 1주 동안의 학습생활에 관한 평가를
해주었다. 그는 정해진 등 어린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공부를 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나라 없는 백성의 운명을 면할 수 없다”며 애국의 얼을 심어주었다.
1929년 장흥보통학교를 마친 정해진은 그 해 4월
전남 광주의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조선인 학생들 중에는 민족의 장래를 짊어지고 가야할
의무를 지닌 선각자로 자처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정해진의 급우들 중에는 일제가 ‘황국정신’ 주입을 목적으로 한 ‘수신’ 과목시간이나 ‘국사(일본역사)’ 시간에는 책상 위에 교과서를 내놓지도 않고 당돌하게 선생에게 질문부터 하면서 “선생님, <수신> 교과서에는 니모미야 손도쿠(二宮尊德)는 부지런히 일하여서 잘살게 되었다고 쓰여져 있는데 왜 우리
옆집아저씨는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득바득 일하는데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수신>교과서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까?” 라든가 “국사(일본역사) 책에는 막부통치
시기에는 무사들이 정권을 틀어쥐고 전국을 통치하였다고 쓰여져 있는데 만세일계를 자랑한다는 천황은 무인통치시대에는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등 일제교육의 허위 날조성을 낱낱이 폭로하는 질문을 들이대곤 했다. 음악 시간에는 일본인 교사가 일본 노래를 가르치는데 뒷줄 학생들은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학생들은 방과 후에 서로 친구들의 하숙방에 몰려다니며 일제 식민 통치를 비판하는 선동 연설을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연습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체육시간에 유도나 축구를 할 때도 일반
학생들이 싸움을 걸어올 경우에 그들을 혼내주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운동을 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해진이 광주고보에 입학한 해 가을, 유명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발했다. 정해진 역시 학우들과 스크럼을 짜고, 일본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면서 전남도청으로 진출하고, 광주시내 곳곳에서 전단을 살포하고 반일선동연설을 했다. 학생들은 “삼천리에 빛나는 우리 군들아,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 왔구나. 종횡무궁 너의 기능 모두 뽐내여 상쾌히 적군을 물리치여라”라는 노래를 목청껏 불렀고
군중들은 이에 열렬히 호응했다.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벌어져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 구금되었다는 소식에
놀란 정해진의 할아버지는 손주를 학교에 보냈다가 감옥살이를 시키게 되겠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불러들여 한문 공부를 하게 했다. 두 달간 고향에서 한문공부를 하던 정해진은 어머니와 형의 도움을 받아 할아버지가 외지에 나간 틈을 타서 광주로
돌아와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정해진이 1930년 1월 학교에 돌아와 보니 100명 정원의 1학년생은 60명밖에 남지 않았고,
450여명의 전교생은 250명으로 줄어 들었다. 정해진의 6촌 형으로 광주공립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정해두는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적발된 ‘광주공립농업학교
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고, 1931년 6월 13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최종 선고받았다.[2]
경성제대 학생 정해진
정해진은 1934년 3월에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3] 정해진은 같은 달에 실시된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고,[4]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를 수료했다.[5] 그는 철학과에서 3년을
마치고, 1940년에 경성제국대학 학사시험을 합격했다.[6] 당시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문과와 의과를 합하여 120명을 모집하였는데, 조선인 학생이 40명 일본인 학생이 80명으로서 조선인 학생은 일본인 학생의 1/2에 불과하였다. 조선인 학생 입학 정원이 1년에 40명 정도이다 보니 경성제국대학 입학은 지금의 명문대학 입시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입학이 어려웠다. 정해진의 모교 광주고보에서도 5년
만에 경성제대 합격생을 배출했다. 광주고보는 호남의 명문이었지만 광주학생사건 이후 사상이 불온한 학교라고
하여 성대에서는 광주고보 졸업생은 받아주지 않았는데, 이제 정해진이 입학하게 된 것이다. 정해진은 자서전에서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여 멋없이 우쭐대기도 하고 있을 때의 2학년 선배들은
신입생환영회에서 재학 시기에 민족적 얼을 잊지 말아야 하며 조선청년 학도로서 옳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부푼 꿈을 안고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지만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직후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매우 우울했다. 교과 과정은 빈틈없이 짜여있었다. 아래의 표는 정해진이 입학한 1934년도의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본과에 진학한 193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학과별 전공강좌이다.[7]
정해진은 당시 경성제대 안에서 학교 당국이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을 심하게 차별하여 민족적 분노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자치 활동인 체육부 예산 할당에서부터 심한 차별을 했다.
일본인 학생이 많이 참가하는 유술부(유도부)와
격검부(검도부)에는 많은 예산을 배당하고 조선인 학생들이
주로 참가하는 축구부와 농구부에는 예산을 적게 책정했다. 심지어 학교당국은 학과성적을 평가할 때도 민족차별을
했다. 정해진에 따르면 평상시에 나타나는 실력을 보면 조선인 학생들이 단연 우수한데 학기말에 발표되는
성적의 순위를 보면 일본인 학생들이 앞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런 좀스러운 차별을 보면서 정해진은
조선인 개인의 ‘영달과 장래 운명’은 조선민족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으며,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개인의
푸른 꿈도 해결될 수 없고, 장래운명도 절대로 개척될 수 없다는 것을 폐부로 절감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해진은 “그리면 조선민족문제는 어떻게 채결해야 하는가? 민족 문제해결의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은 이 길을 찾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며 모대기기 시작”했다.
정해진은 예과 2학년이 되면서 예과 내의 학생 조직인 ‘조선인회’의 8인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인회’는 경성제대
예과내의 조선인 학생들의 친선단결을 도모하는 것을 위주로 하면서 조선민족의 얼을 심어주며 학교 내에서 조선인 학생들의 행동의 통일을 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조선인회는 신입생환영회, 졸업생환송회를 조직하고
조선내의 조선인 고등보통학교들의 연례적인 축구시합을 조직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했고, 또 비합법잡지 <금성>과 <잘써>를 발간하였다. 이들 잡지는 조선인 학생들이 투고한 기사, 기행문, 시, 단편소설
등을 실었는데 이것들은 거의 다 조국애와 민족적 울분을 토로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심어주는데 일정하게 기여했다. 조선인회는 또 문과생 20여 명으로 ‘등산대’를 조직하여
월 2회 정도 세검정, 우이동, 북한산 등 산천과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치욕의 삼전도 등지를 찾아가는 모임도 조직했다. 이 등산놀이는 처음에는 야유회 등 순수한 친선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되었으나 점차 경성제대 예과 당국의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폭로 규탄하는 모임으로, 나라 잃은 민족의 비운을 통탄하는 장소로, 조선민족해방의 길을 찾기 위한 열혈 넘치는 토론의 마당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정해진에 따르면 학생들은 종종 경성제대 예과가 자리잡고 있는 청량리의 늙은 소나무 숲 옆 모래밭에서 불고기 추렴도 하였는데 밤 깊어
한잔씩 마시고 거나해지면 “아 조선아! 나의 조선아. 당신의
아들들인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볼을 비비면서 웨치고 흐느껴 울었는데 이런 일이 한두 번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해진은 1935년 가을부터 민족문제 해결의 길을 찾으려는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인
김석형, 김득중, 이종원 등 급우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론’이나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회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 민족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들려줄 명사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들 넷이 찾아간 사람은 안재홍, 백남운, 안창호 등이 있었으며 심지어 이광수를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 명사들로부터 특별히 시원한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정해진은
“자신들의
‘방문행각’에서 소득이
있었다면 1937년 1월
15명 정도의 많은 학우들이 조선어학회를 찾아가서 조선말 강습을 받은 것”이라고 꼽았다. 1937년 1월이면 정해진이 예과를 수료하기 직전이었다. 이때는 한글 학자들이 오랜 논의 끝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지 얼마 안
된 때라서 새로운 철자법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경성제대 예과
12회에서 화동의 조선어학회 사무실에 몰려가 한글맞춤법을 배운 사람들로는 정해진 외에 뒷날 북한 최고의 언어학자가 된 김수경, 최고의 사학자가 된 김석형, 그리고 김홍길, 신구현, 이명선, 차락훈
등이 있었다. 새로 제정한 맞춤법을 이들에게 강의해 준 사람은 독일에서 유학한 이극로였는데, 그는 한글대사전 편찬으로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도 한 달 넘게 밤늦도록 이들 수재들을 가르쳤다고 한다.[8] 정해진은 “추운겨울에 난방장치도
없는 마루바닥에서 이윤재, 이극로 선생들이 일제의 조선말 말살정책을 반대하여 선조들의 슬기가 깃들어있는
조선말의 문법과 철자법으로부터 시작하여 비교연구론에 이르기까지 2주일 동안 밤을 지새워가면서 가르쳐주던
그들의 조선말에 대한 사랑과 강의한 기상은 젊은 우리들을 크게 감동”시켰다고 회고했다.
명사들을 방문하는 데에서 민족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정해진은 친구들과 함께 “서울의 근교뿐만 아니라
전국적 판도에서 조국의 아름다운 강산과 역사유적들을 탐승하면서 민족적 울분을 풀어보려고도”하였다. 1935년 여름방학에는 김석형과 함께 금강산을 찾아 유점사에서 노승의 목탁 소리에 잠을 못 이루며 “옛날에 남이장군은 20세에 나라를 찾을 큰 뜻을 품고 전장 마당에 나왔다는데 우리가 어찌 녹록히 일생을 보낼 수 있겠는가? 우리도 나라 찾는 길에 한목숨 바치세나, 그리하여 30년 후에 광복된 조국에서 세계의 명산으로 활짝 꽃펴날 금강산에 다시 찾아와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노래하세나”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1936년 여름방학에는 김석형, 김수경, 이종원 등 친구들이 멀리 보성의 정해진 집으로 찾아와 해수욕으로 한철을 보낸 뒤 백제의 옛 서울인 부여를 방문하기도
했다. 1936년 겨울에는 독일어 단편소설 <철 늦게
핀 장미꽃>을 읽다가 “보잘 것 없을 빨찌크해안의 풍경을 자기조국의 강산이라고 하여 세계
제일인 듯이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필자의 애국의 마음에 내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자책감을 느낀 나머지 홀연히 배를 타고 고향 앞 항구를 떠나 남해의
다도해를 지나 한려수도”를 찾아 선열의 애국의 얼을 새겨본 뒤 신라의 고도 경주에 들려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 오랜 세월에 폐허로 된 고적들 속에 깃들어있는 선조들의 슬기를 찾아보고 대구에 있는 김석형의 집을
방문하여 정담을 나누었다. 이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민족적
울분을 풀어보려 부대끼던 청춘의 방황이었다.
1934년 정해진과 함께 경성제대 예과 11회에
입학한 사람들 중에는 인물이 많았다. 정해진의 입학 동기생들 중에서 남쪽에서 활약한 인물들로는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내고, 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홍진기, 대한변협회장과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지낸 전봉덕, 대법원판사를 지낸 계창업, 고려대
총장을 지낸 차락훈, 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녕, 문교장관과
부산대 총장을 지낸 문홍주, 대한의학협회회장을 지낸 한격부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입학 동기 중에는 정해진처럼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택한 사람들도 대단히 많았다. 북에서
최고의 역사학자로 이름을 떨친 김석형과 박시형(박시형은 예과를 거치지 않고 학부로 입학), 정해진과 동경제대 대학원에서 같이 유학한 언어학자 김수경,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있다가 북으로 간 국문학자 이명선, 정해진과 같이 지하항일 조직의 성원으로 활동하다가
북으로 간 김득중, 신구현, 김홍길, 이종원, 그리고 경락의 비밀을 밝혀낸 것으로 유명한 의학자 김봉한
등이 바로 그들이다. 백범 암살의 배후가 된 친일 경찰 출신이나 4월혁명
당시 발포 책임자이자 한국정재계 혼맥의 중심에 있는 인물과 북쪽에서 남조선 혁명의 실무 책임자 격을 맡아 두 차례나 고향으로 ‘잠입’한 정해진이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었다. 분단은 이런 것이었다.
정해진에 따르면 예과 3학년 말이 되자 학부에 올라가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를 놓고, 예과 문과생들의 사상 동향은 확연히 둘로 나눠져 있었다고 한다. 한쪽은
일제의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판검사나 군수 등으로 일제의 복무함으로서 일신의 영달을 누려보겠다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쪽은 개인의 안락과 영달을 뒤로 미루고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아직 옳은 길을 찾지 못하여 부대끼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과를 마친 정해진은 1937년 경성제대 철학과
12회, 그 중에서도 흔히 ‘순철’(순수철학)이라 불리던 철학 전공이었다. 1937년 철학과에 진입한 사람은 정해진과 김수경 그리고 보통 법학과로 진학하는 예과 문과을류로 입학했지만
철학과로 진입한 김홍길 등이 있었다. 철학과에는 순철 이외에도 윤리학 전공, 심리학 전공, 종교학, 미학
미술사 전공, 교육학 전공, 지나(支那=일본이 중국을 낮춰 부르던 말)철학
전공 등이 있었다. 미술사가로 유명한 고유섭은 철학과에서 미학 미술사를 전공한 10년 선배였다. 순철 선배로는 1회의
김계숙, 3회의 신남철(서울대 교수), 5회의 박치우와 고형곤(전북대 총장, 전 총리 고건의 부친), 박종홍,
8회의 노대규와 최규현, 10회의 최재희 등이 있다. 정해진의
입학동기 3명 모두 월북했고, 선배 중에는 신남철, 박치우, 노대규, 최규현
등도 월북했다. 제국의 엘리트를 키워내는 경성제대의 설립 목적이나 그에 순응했던 상당수 학생들의 분위기와
달리 철학이나 사학 전공 중에는 대학시절부터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성제대 철학과에서 철학 전공 교수는 “법문학부장을 맡고 있던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와 그의 사위 미야모토 와키치(宮本和吉) 등이었다. 모두 칸트 연구로 알려진 철학 연구자로 경성제대에서는
주로 아베가 철학사, 미야모토가 최신 후설(Edmund G. A.
Husserl)의 현상학을 포함한 철학개론을 강의했다”고 한다.[9] 언어학에 뜻을 두었으나 경성제대의 언어학 전공이 없어 철학과로
진학한 김수경과 달리 정해진이나 법학과 대신 철학과를 선택한 김용길은 전공인 철학에 좀 더 관심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철학 전공으로 졸업을 하려면 “철학과의 공통과목(철학, 윤리학, 심리학, 미학ㆍ미술사, 교육학, 중국철학, 사회학, 사학개론∙문학개론), 전공과목(철학, 윤리학인식론, 철학특수강의 및 연습, 그리스어,
라틴어, 그 외 철학과∙사학과∙문학과에 관한 과목), 외국어(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배운 후 졸업논문을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순철의 “입학 당시 교원은 교수 2명(아베, 미야모토), 조교수 1명(다나베 주조〔田邊重三〕), 조수 1명(고형곤) 총 1명이고 학생은 1937년도 입학생 4명(김수경, 정해진, 김홍길〔金洪吉〕, 곤도
토키오〔近藤時雄), 1938년 입학생 1명 (마스나카 겐키〔枡中健毅〕) 등 총
5명”이었다고 한다.[10]
정해진은 경성제대 학부 철학과에 진학한 뒤 낮에는 학교에서 철학 강의를 받고, 밤에는
사회주의 서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서적을 통해 정해진은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의 내막을 깨닫게 되었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궁핍한 이유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이 무렵 그가 특히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호소가와 가로쿠(細川嘉六)의 <소련의 아세아민족정책론>이었다. 약소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소련의 진보적인 민족 정책은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너무나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이끌고 보천보를 들이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은 거의 대부분 독립운동을 포기했고,
만주에서도 민족주의 계열은 본토로 투쟁 무대를 옮기고, 공산주의 계열은 중국공산당의 일국일당
원칙에 묶여 조선독립을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 승승장구하는 일본 제국주의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독립의 꿈을 잃어가던 시기에 벌어진 꿈같은 사건이었다. 정해진은 “김득중 동무의 집에 모인 우리들 뜻 맞는 학우들은 밤새워 이야기 꽃을 피웠으며 장군님에 대한 가지가지의 전설적 이야기로 새날을 맞이하였다”고 회고했다.
정해진은 조선독립의 새로운 가능성에 힘입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반듀링론>, <독일이데올로기>, <신성가족> 등 마르크스ㆍ레닌주의 고전들을 읽어나갔다. 당시 경성제대 법문학부에는 비밀독서회가 구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법과생으로 고광학, 최학선 등이 속해 있었는데, 문과생으로
정해진과 이명선이 선발되어 1938년 1월부터 1939년 9월까지 활동하였다. 정해진은
이 비밀독서회에서 <제국주의론>, <공산당선언>, <고타강령비관>, <자본론> 등을 같이 읽었다. 이 무렵 정해진은 종로구 명륜동 하숙집
뒷 창문에 검정 천을 쳐놓고 밤새워 공부했다. 정해진은 당시를 “3시부터 7시까지 온 장안이 고요히 잠들었을 때 책상 위의 자명시계와
나의 심장만이 움직이며 고동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혁명의 진리를 탐구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정해진은 비밀독서회의 지시를 받아 문과생들 사이에 새로운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는 사학과의 김석형, 박시형, 철학과의 김수경, 김홍길, 문학 쪽의 신구현, 이명선
등이 매달 2회 정도 모여 조선의 역사, 문학, 철학 등 제반 문제들을 변증법과 사적 유물론의 원칙에 입각하여 연구 발표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의 관점을 세워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정해진에 따르면 당시 이들이 토론한 주제는 “세계관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연구에서 과학적 역사관을 가질데 대하여”, “이조실록을 통해서 본 한양수도결정의 정치 경제적 배경”, “조선어의
비교연구학적 고찰”, “조선의 여류시가에 대하여” 등등 이었다고 한다. 정해진은 두 개의 독서 모임에 참여한 것인데
하나는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이었고, 또 다른 모임은 그 지도 아래 진보적인 관점에서 문사철
등 인문학 전반을 탐구하였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일제는 후방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조선 내에서도 파쑈적 폭압정책을 더욱 발악적으로 실시하였으며 따라서 대학 내에서도
대학생들에 대한 삭발 강요, 학교 내에서의 조선말 사용 금지, 창씨개명의
강요 등”이 시행되었다. 정해진 등은 이에 저항하는 투쟁을 벌였으며, 정해진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1939년 5월에는 김일성이 무산지구 전투를 감행하여 또 다시 정해진 등 조선청년들을 격동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인 6월 경성제대 내에 검거선풍이 불어 고광학, 최학선 등이 원산경찰서에 체포되어 함흥검찰국으로 송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정해진이
몸담고 있던 비밀독서회의 핵심 성원들이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기 때문에 정해진도 독서회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은 사건의 파장이 어떻게 될지 예의주시 하였지만 “체포된 동지들을 믿으면서
정상적인 학창생활을 해나갔다”고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비판해보려고 시도했던 졸업논문을 일찌감치 마무리한 정해진은 1939년 10월 김석형, 박시형, 김수경 등 친구들과 넷이서 고구려의 유적지를 볼 목적으로 평양과 만주 답사길에 나섰다. 이들은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보면서 선조들의 장엄한 기개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집안(輯安)에 머물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여러 발 들렸다. 여인숙의
중국인 종업원의 말로는 항일유격대가 나타난 모양이라고 하더니 저녁 무렵 일본군 하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달구지에 실려오는 꼴을 직접 목격하고 흥분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성제대 졸업을 얼마 앞둔 1940년 3월(그 당시는 4월이
신학기였다) 정해진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취조를 받게 되었다. 경성제대의
비밀독서회가 적발된 것인데 다행히도 정해진은 이틀 만에 불기소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뒤에 들은 바로는
경성제대 철학과 교수인 아베 요시시게와 미야모토 와키치가 졸업이 임박한 학생이니 졸업은 시키자고 부탁하여 검사 당국에서 관대히 처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정해진의 도쿄 유학
정해진은 1940년 3월 25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전부 85명이 졸업했는데 그 중 조선인은 29명이었다. 철학과에서는 정해진, 김홍길, 김수경
이외에 곤도 토키오(近藤時雄)와 하야시(林三雄)라는 일본인 2명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 졸업했다.[11] 당시 경성제대 졸업생들 중에는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정해진은 일제에 복무할 수는 없었다. 고향으로
간 정해진은 형 정해룡과 진로를 모색했다. 정해진은 자기는 최고 학부를 졸업했으나 형은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한데 대한 민망감”으로 형에게 “내가 당분간 집안살림을 돌볼 테니 중국북경등지에 유학을 하도록 권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형은 정해진에게 “너는 이왕 학교를 다녔으니 공부를 계속 하라”고 강권하여 정해진이 도쿄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12] 정해진은 경성제대 순철의 동기생 김수경과 함께 일본 도쿄
유학길에 올라 1940년 4월 30일자로 동경제대 문학부 대학원에 입학했다.
정해진은 경성제대를 졸업할 무렵 김석형과 그 약혼녀의 소개로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졸업생 전예준(평안북도 강계 출신)과 약혼을 하고,
그해 9월 서울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조선어학회에서 정해진 등 경성제대 학생들에게 열심히 한글을 가르쳐 주었던 이극로가 맡았다. 정해룡은
신혼인 동생 부부를 배려했다. 정해진이 동경제대에서 공부해야 하는데 북쪽 출신인 신부 전예준이 풍습도
전혀 다른 남쪽에서 남편 없이 시집살이를 할 것이 아니라 신혼생활기간만이라도 도쿄에서 남편과 함께 지내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정해진 부부는 일본에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민족차별을 받아야 했다. 일본
최고의 엘리트 교육 기관인 동경제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민족적
멸시를 받았던 것이다. 당시 도쿄에는 정해진의 김석형의 매부 하진명이 일본 중앙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의 주선으로 도쿄 나가노에 하숙집을 얻었다. 그러나 아파트 여주인은 정해진 내외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조선 사람은 마늘을 먹고, 소 내장국을 끓여 악취가 나고, 빈대가
많다는 등 터무니없는 이유로 정해진 부부의 입주를 거부했다. 정해진 부부는 조선사람이라고 넓은 도쿄
땅에서 의지할 방 한 간 얻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간신히 다른 곳에 아파트를 얻었으나 이번에는
아파트에 도난 사고가 나자 도둑으로 몰리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민족적 멸시와 나라 없는 설움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던 전예준은 반 년 간의 도쿄 생활을 마치고 보성으로 가 8ㆍ15 해방까지 양정원에서 인근의 농민 자제들에게 민족의 얼을 심어주기 위하여 교편을 잡았다.
동경제대 대학원에서 정해진은 ‘독일관념론 연구’를 연구 주제로 선택했다. 정해진과 같이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경제대 대학원에 입학한 김수경은 당시 초기 조선어학연구에서 중요한 업적을 쌓은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를 지도교수로 하여 원래부터 원했던 언어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조선어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를 주제로 삼았다. “1940년도 동경제대의 대학원생은 총 406명, 그 중 조선에서 온 유학생은 10명”이었다고
한다. 경성제대 철학과 1회 졸업생인 대선배 김계숙도 독일관념론을
연구하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이화여전 교수로 있던 이희승(경성제대 2회)도 안식년을 맞아 “1940년도 한 해 동안 ‘조선어의 음운적 연구’라는 연구 과제로 오구라 신페이 밑에서” 연구 중이었다.[13] 이희승에 따르면 그 당시 동경제대 학부에서는 김상협(국무총리, 고려대총장), 유기천(서울대총장), 황수영(동국대총장), 신도성(통일원장관) 등이
공부하고 있었다.[14]
정해진이 도쿄 유학길에 오른 것은 독일관념론을 연구하여 철학교수가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정해진은
자신이 유학 목적이 “맑스레닌주의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혁명동지들을 구하자는데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막상 동경제대에 와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정해진은 자신이
동경제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느낀 것은 동경제대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모두 수재였음에 틀림없지만 고등문관시험을 쳐 영달을 누려보겠다는 말을 신입생 환영회 같은데서 공공연하게
하여 정해진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경성제대에도 고등문관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지만 학생들의
공식 회합에서 이런 말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동경제대에서 혁명동지를 얻는 것이 여의치 않자 정해진은 사립대학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침 1934년경부터 면식이 있던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김원현이 호세이(法政)대학교 정경학부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정해진은 김원현을 통해 역시 호세이대학에 재학중인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임상준을 소개받게 되었다. 이들 3인은 1941년 1월부터 비밀독서회 모임을 갖고, 사회주의 이론과 국내외 정세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간도 출신으로 호세이대학에 유학중인 학생을 통해 연길에 가서 2주일 정도만 머물면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계를 맺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한껏 고무되기도 했다. 이들은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속에서도
동지를 획득할 것을 모색하여 가와사키 중공업 지대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경상남도 거창 태생의 우한용과도 연계를 맺었다. 1941년 하반기에 들어가면 정해진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히틀러의
독일이 본격적으로 소련침공을 시작했고, 일제의 강제징용과 공출로 조선사람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져 “조선사람은
기아선상에 나앉게 되였으며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아낙네와 할머니의 비탄은 구천에 사무치게” 되었다. “과연 이러한 때에 뜻있는
조선 청년이 상아탑 속에 들어앉아 책갈피나 뒤지고 있어야 하겠는가? 인민들의 피타는 호소에 외면하는
것이 조선 청년으로서의 조국 앞에 지니고 있는 민족적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도 시대의 요구와 조국의 부름에 따라 일제의 목통을 졸라매는 실천투쟁의 불길 속에 뛰어들자. 이것이 당시의 우리들의 심장의 외침이었으며 실천을 이론의 우위에 놓는 사회주의 철학원리의 귀결”이었다. 1941년 여름방학에 고향집에 돌아온 정해진은 형 정해룡과 상의한 끝에 간도 출신 유학생의 말대로 연길에 가
상당 기간 머물며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계를 가져볼 생각으로 만주행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전시의 삼엄한
경계와 수색으로 정해진은 청진역에서 내려 주을까지 갔다가 그만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정해진은 이를
“혁명을 위하여
한 목숨 바치려는 혁명적 각오와 초지관철을 위한 강의한 의지가 아직 부족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라고 반성했다.
금광왕 이종만과의 만남
도쿄로 돌아와 학교에 적을 둔 채 투쟁의 길을 모색하던 정해진은 우연한 기회에 김원현을 통해 경성에서 온 사업가 이종만을 1941년 10월 경 만나게 되었다.
영화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종만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광산왕으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1885년 울산에서 태어난 이종만은 1923년부터 서울파 사회주의자인
이준열과 더불어 노동야학인 경성고학당을 운영했다. 경성고학당 등 여러 야학의 운영을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던 이종만은 번번이 실패하였지만 450원에 매입한 영평금광에서 금맥을 발견하여 연 생산액 40만원의 알짜 금광으로 키워냈고, 이후 장진금광 등을 사들이면서
사업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가 키운 자본금 300만원의 대동공업주식회사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독점자본과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일제 말기 조선인 광업회사로는 가장 큰 것이었다.
그는 경성고학당을 같이 운영하던 이준열, 인권변호사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허헌, 농업문제전문가 이훈구, 천도교 계열의 농민운동 이론가
이성환, 신간회 간부였던 언론인 이관구 등 제제다사를 모아 대동사업체를 운영했다. 대동사업체는 대동광업이 금광에서 벌어들이는 이윤을 기반으로 대동농촌사나 광산조합같은 경제자립운동과 대동학원, 대동출판사 등 문화산업을 병행하는 기업조직인 동시에 사회사업 기관이었다. ‘대동’이란 동양의
고전 <예기>가 꿈꾼 “권력을 독점하는
자 없이 평등하며, 재화는 공유되고 생활이 보장되며, 각
개인이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상사회였다. 이종만은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불평과 불행의 근원은 사심에서 시작된다. 사심을 버리고 대자아의 활연한
심경에 이르면, 세상 만물 어느 것이나 차이나 구분이 없이 다 같은 본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노동과 자본의 조화로운 협조 속에서 공존공영의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이것이 대동사상의 핵심이다.”
대동사업체 설립 이후 이종만이 벌인 사업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대동공업전문학교의 설립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가 강화되자 숭실전문학교를 폐교하기로 결정했다. 고등교육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숭실전문학교의 폐교는 민족적으로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종만은 120만 원의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숭실전문의
구교사 등을 인수하여 이공계 전문 고등교육기관으로 대동공업전문학교를 개설했다. 그 당시까지 이공계 전문고등교육기관으로는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유일했는데 이 학교는 주로 일본인들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종만이 심혈을 기울인 대동공업전문학교는
광산전문가 등 기술 인력을 많이 배출했으며, 해방 후 북한 최고의 공과대학인 김책공과대학의 토대가 되었다.
이종만은 민족문제연구소 간행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배우 강동원은 외증조부의 생애를 ‘예술’이라고 언급했다가
친일파를 옹호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위문품대로 1000원을 내고, 1938년 10월
정주경찰서에 황군위문금 냈다. … 1939년 7월엔 일본군 위문대 대금으로 1000원 냈으며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맡았다. … 1940년 7월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을 격려하는 글을 게재했으며, 1941년 10월 출범한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참여했다”는 것이 이종만의 주요 친일 행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황군’ 위문금을 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점은 정해룡도 마찬가지다. <매일신보> 1941년 5월 5일자를
보면 정해룡이 병기헌납금 4백 원, 회천면 신사봉찬회(神社奉贊會)기금 4백 원
등 총 1,300원을 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친일
행위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거액의 ‘국방헌금’ 등을 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사실만으로 그들의 생을 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엄존하는 일제의 현실 파쇼권력 앞에서 큰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또는 대지주로서 합법공간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굴종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종만의 대동사업체 구상은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자본가도 행해 본적이 없는 통큰 구상이었다. 진보적인 생각을 품었던 사람들 중에서 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적지 않지만 이종만 같은 사람은 다시없었다. 재벌들이 수천억을 출연하여 문화재단이나 장학재단을 만들었던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는 대개 범법행위가 적발되었을 때 형을 경감 받거나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거나, 상속세를 면탈하려는 수단이었다. 이종만의 대동사업체는 달랐다. 사학자 방기중이 평가한대로 대동광업의 금광경영은 자본축적이 목적이 아니라 경제자립운동과 교육문화 사업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15] 이종만이 교육문화사업이나 경제공동체 건립을 위해 내놓은
것은 사실상 그의 전재산이었다. 당대 최고의 부호이고, 대동사업체가
흔히 대동콘체른이라 불린 것을 보면 그는 지금으로 치면 손꼽히는 재벌이었던 것이다. 이종만은 영평금광을
매각하고 받은 155만원 중 50만원을 자작농에 기반한 이상적인
농촌 건설을 목표로 한 대동농촌사 설립을 위해 내놓았다. 그의 대동농촌사 등의 구상은 사실상 독립운동기지를
꿈꿨었던 초기 독립운동가들이 이상촌 건설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진보적인 생각을
품었다 할지라도 나이 들어 사업에 성공한 뒤에 초심을 실천에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종만은 그
점에서 전무후무했다. 그는 매각대금 중 10만원은 영평금광의
광부와 직원 1천여 명에게 나눠 주었고, 금광 인근 마을의
빈민구제를 위해 1만원을 희사했다. 그가 영평금광을 매수자에게
인계하고, 왕장역을 떠날 때 1천여 명의 광부와 주민들이
모여 이종만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는 해방 후 남쪽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 역시 벽에 부딪히자
월북하여 조국전선 의장을 지냈고, 사후에는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친일파
문제에 남쪽보다 훨씬 민감하고 엄격했던 북쪽에서 이종만은 최고의 애국자로 우대하고, 사후에는 자본가로서는
유일하게 애국열사릉에 모신 것은 그의 생을 종합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 이종만을 정해진이 뜻밖에도 1941년 10월
도쿄에서 만나게 되었다. 1941년 10월이라면 태평양 전쟁
발발 두 달 전으로,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되어 이종만이 이사로 선임되었을 때였다. 정해진에 따르면 이 무렵 이종만은 사업상 대단히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종만은 정해진에게 자신이 도쿄에 온 이유를 “1940년경부터 일본총독부와 결탁한 배신적인 회사중역진의 모략책동에 의하여
광산권과 기타 이권이 일본총독부와 그 앞잡이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일본의 언론계에 호소하여 정치적으로 풀어볼 길이 없겠는가” 하고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일제의 조선민족자본말살정책과
그 앞잡이들의 매국적 배신행위를 격분에 넘쳐 폭로규탄”한 이종만은 정해진과 김원현 등에게 “성실한 젊은 조선청년들에게 크게 기대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서울에서
제일 큰 인쇄시설인 대동인쇄주식회사가 자기의 소유이니 그것을 맡아서 해보라고 권고”했다는 것이었다. 이종만의
대동사업체에 위기가 닥친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숭실전문학교가 갑자기 폐교되면서 이종만은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대동공업전문학교 개교를 서둘러 실천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커다란 재정적 부담이
되었다. 이종만이 도쿄에 오기 직전인 1941년 9월에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발간한 대동사업체의 양대 기관지였던 <광업조선>과 <농업조선>이
폐간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 온 이종만은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진보적 청년 지식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정해진과 김원현은 일제의 약탈 행위와 그 앞잡이들의 매국적인 소행에 민족적 격분을 느끼면서,
만약에 인쇄시설을 맡아서 운영하게 되면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각성시키고 묶어세울 수 있을 것이며 혁명적 대사변이 도래할 경우 아주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종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러던 중에 1941년 12월 7일 오전 8시(미국시간)에 일본 전투기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정해진 등은 일본이 전쟁의 불길 속에서 패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일제의 타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길을 모색하려고 고향 보성으로 돌아와 정해룡과 이종만의 제안에 대하여 상의했다. 다시 도쿄로 돌아온 정해진은 형에게서 받아온 돈으로 이종만의 호텔 비용 약
5천원을 청산해주었다. 식민지 조선 최고의 금광왕이었던 이종만이 시골지주의 도움으로 호텔비를
청산해야할 정도로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정해진은 큰 결단을 내려 동경제대 대학원을 중퇴하고 1942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김원현과 함께 큰 뜻을 품고, 조선으로 돌아온 정해진은 먼저 서울의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상황을 점검해보았다. 상황은 이종만이 전해준 것보다 더 좋지 않았다.
인쇄소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역진은 정해진의 눈에는 거의 친일분자들이었으며, 이종만은
이미 대동인쇄에 관한 발언권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해진과 김원현 등이 대동인쇄를
통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항일의 뜻을 펼치기는커녕, 대동인쇄주식회사에 입사하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울산철광
정해룡의 경력에서 유족들도 내막을 잘 알지 못하던 것이 일제 말기에 정해룡이 왜 멀리 떨어진 울산에서 철광을 경영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국지사 봉강 정해룡 선생 추모비 건립 취지문>에서는
정해룡이 철광석 광산업에 진출한 이유를 “의용군 편성에 필요한 자금 조달과 무기제작”이 목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유족들도
막연히 독립군의 자금을 대금을 대기 위해 사업을 벌였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의용군이나
독립군이 어떤 부대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발굴된 정해진의 수기에는 정해룡
형제가 울산탄광을 경영하게 되었던 사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정해진은 대동인쇄주식회사를 맡아서 경영해보라는 이종만의 권유에 따라 동경제대 대학원에서의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했지만, 대동인쇄주식회사의 내부 사정상 회사에 입사할 형편이 못되자 다시 이종만과 상의했다. 그러자 이종만은 자신의 고향에서 멀지 않아 경상남도 울산구 호계면 달천리에 자기가 개발하다가 놔둔 철광산이
있는데 매장량도 많고 품질도 좋으니 그것을 개발해보지 않겠는가고 권고했다. 지식인이었던 정해진은 인쇄출판일은
어느 정도 해볼 자신이 있었지만 철광산업은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해진은 곧 생각을 바꿨다. 형 정해룡이 멀지 않아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 확신하고, 1941년
가을에 여수선(전주~여수)가까이에
있는 전라남도 광양군에 금광 폐광을 구입하여 개발하는 척하면서 일제 패망의 결정적 시기에 후방교란에 사용할 폭발물들을 저장하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울산 철광산은 중앙선(서울~충주~경주~부산)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점에 있어 일제의 전쟁 수행과정에서
후방을 교란하는데도 아주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정해진이 정해룡을 찾아가 이종만과 합작하여
철광산업을 개발 운영해 보면 어떻겠느냐 말하자 정해룡은 철광산의 위치가 아주 좋다면서 한번 통 크게 해보자고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런데 정해룡이 막상 울산철광산에 합작투자 하려고 알아보니 이 철광산이 이정만의 소유가 아니라 이종만의 아들 이영조(李永兆, 강동원의 외할아버지)가
광권의 80%, 나머지 20%는 일본인 소유였다. 정해룡은 일본인 소유의 광권을 당시의 돈 2만원으로 구입하였다. 이종만은 어찌된 이유인지 이 광산을 이영조 단독 소유인 것으로 등기하자고 제의하였고, 정해룡, 정해진 형제는 이종만의 인격과 큰 뜻을 믿고 철광의 명의를
이영조의 단독 소유로 하는데 흔쾌히 동의했다. 정해진은 1942년 4월부터 정해룡의 대리인으로 울산철광 개발 운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해룡, 정해진 형제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하여 가까운 사람들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해룡이 2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철광의 명의를 이영조 단독으로 등기하는 대담한 조취를
취한 것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동경제대에 유학한 최고의 학벌을 가진 정해진이 갑자기 학업을 포기하고, 철광경영에 뛰어든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정해룡, 정해진 형제는 울산철광에서 노동자들을 각성시키고 묶어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의
후방을 교란시키거나 일제가 패주할 때 그 퇴로를 차단할 뜻을 갖고 있었기에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런 저런 잡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정해진은 이 시기 친구들과의 서신교환도 끊고, 광산 일에 몰두하여
낮에는 광산 갱내에서, 밤에는 노동자 합숙에서 살았으며 또 때로는 경상남도청의 광산관계 관리들 및 울산군
호계면 주재소 순사들에게 술 대접을 하는 일까지 맡아했다. 울산철광의 운영비를 댄 것은 정해룡이었고, 기술적인 측면은 이종만의 사위 등 광산 운영 경험이 풍부한 이종만의 측근들이 맡아서 했다. 광석의 판로는 서울에서 매일신문사 기자로 일하게 된 김원현이 책임지고 개척하기로 하였다. 울산철광에는 정해룡과 양정원의 교장 윤윤기(윤승원)도 자주 와 있었다. 광산의 노동자는 모두 40~50명이었는데 양정원 출신들도 4~5명이 가 있었다고 한다.
정해룡은 1942년 여름 보성에서 울산광산으로 가는 도중 경상남도 진주에 들러 촉석루를
구경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진주가 함락되자 왜장을 끌어안고 촉석루 아래 남강에 몸을 던져 원수를 갚았다는
논개의 충절을 노래한 한시를 지었다. 정해룡은 울산으로 와 이 시를 아우에게 읊어 주었는데, 정해진은 수십 년이 흘러 자서전을 쓸 때도 이 시를 외우고 있었다.
남강은 예나 제나 무심히 흐르는데
촉석루의 산유화(山有花) 노래 은은히
들리는 듯
충절은 의암(義岩)에 푸르게 덮혔으니
죽어서도 영생하노나 여기 불사주(不死洲)에
정해진은 “그 당시 ‘死而永生(죽어서도 영생한다)’는 나의
형과 그리고 나 자신의 소원이었으며 인생관이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정해룡 형제가 인생관으로 삼은 ‘사이영생(死而永生)’은 형제의 선조 정경달이
모셨던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즉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다”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렇게 큰 뜻을 품고, 철광경영에 뛰어들었지만 정해룡 형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움에
봉착했다. 캐놓은 철광석이 예견한대로 빨리 팔리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운영비로 2만원을 댄 정해룡이 무한정 자금을 대기에는 재력이 모자랐다.
이러한 때에 설상가상으로 사고가 발생했다. 정해룡 형제가 울산철광 사업에 손을 댄지 채 6개월이 안된 1942년 9월
초에 광산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다. 무더운 날씨에 환기시설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갱내에서 발생한 가스에
광부들이 질식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가스를 마신 노동자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지만, 정해진이 점검해 보니 고향 보성에서 온 양정원 출신의 21세 청년
김달용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정해진은 보성 출신의 다른 청년 한 명과 함께 앞뒤 가리지 않고, 갱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쓰러져있던 김달용을 발견한 정해진은 허겁지겁
그를 업고 나오는데 갱도 안에 가스만 차고 산소가 부족하다보니 칸델라 불도 꺼져 깜깜한 가운데 발을 헛디뎌 30미터
정도나 동발(광산이나 탄광, 토목 공사를 위하여 땅속에 뚫어
놓은 길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는 기둥)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수직 갱도에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다른 광부들이 구출작업에 나서 모두 데리고 나왔지만 정해진과 그와 함께 구조에 나선 청년만 소생했을
뿐 처음 사고를 당한 김달용은 끝내 살려내지를 못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사고가 날 당시에는 정해룡과 양정원의 윤승원 교장도 마침
울산철광에 와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큰 뜻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시작했던 일인데 성사는커녕
고향사람까지 희생시켰으니 분통하기 짝이 없었다. 희생된 청년 김달용은 양정원을 졸업한 뒤 양정원 설립자
정해룡 등의 사업을 돕기 위해 멀리 울산까지 와서 숨 막히는 갱도에서 끝까지 남아 일을 하다가 희생된 것이다. 정해룡
형제와 윤승원 교장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눈물을 뿌리며 그를 광산마을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이런
사고에 재정난이 겹치면서 정해룡 형제는 안타깝지만 울산광산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정해진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실천투쟁의 불길 속으로 나왔던 첫 걸음에서 고배를 마시였다. 이것은
뜻만 크고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고 특히 자기가 하고 있는 사업부문의 실정에 너무도 어두운데 기인하였다고 생각한다.”
정해진은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왔다. 철광사업을 통해 혁명의 동지를 묶어세우려
했으나 고향 후배만 잃고 말았다. 모두들 부러워했던 도쿄유학을 때려치고, 실업자가 되어 돌아온 그를 보는 주변의 눈길도 곱지 않았다. 형에게
큰 재정적 손실을 안긴 것도 동생으로서 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항상 정해진을 이해하고, 고무해준 것은 정해룡이었다. 정해룡은 낙담해있는 아우에게 큰일을
하려면 일시적 실패도 있는 법이라고 하면서 우선 은행부채나 청산한 다음 더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오히려 그를 격려했다. 정해룡은 고향인 회천면에 있는 토지 5만 평만 남기고, 인근 면에 있는 모든 토지를 팔아 은행 부채를 청산했다. 정해룡은
그 당시 보성인쇄주식회사의 사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말이 주식회사이지 노동자 15명 정도에 구식 인쇄기 몇 대를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인쇄소였다. 정해룡은
이 인쇄소에 전주 자리를 만들어 정해진이 사업을 맡아 하도록 배려했다. 정해진은 몇 안 되는 노동자들이었지만
이들을 민족적, 계급적으로 각성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1943년 9월 정해진은 인쇄소의 자재 구입 차 부산에 갔다가 울산을 찾았다. 광산
사고로 고향 후배 김달용이 세상을 떠난지 1년이 되어 그의 묘소에 술이라도 한잔 올리려 간 것이다. 광산 마을에 가보니 1년 사이에 광산의 형편이 달라져있었다. 광산이 최근 모 기관에 20만원에 팔려 대대적인 개발이 곧 시작된다는
것이다. 정해진은 이 소식을 듣자 바로 서울로 올라가 이영조를 만나 형이 일본인으로부터 광권을 사들일
때 썼던 2만원과 그동안 운영비로 댄 2만원 등 도합 4만원을 받았다. 일제의 산금정책이 변화함에 따라 대동광업주식회사가
문을 닫게 되고, 대동콘체른도 해체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영조도 정해진을 만나자 선뜻 정해룡의 투자금을
보전해 준 것이다. 정해룡은 집으로 돌아와 형에게 이 돈을 전하여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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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길을 찾아서
1943년 하반기에 들어서자 2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기를 잡고,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소련
깊숙이 쳐들어갔던 독일군이 패주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중국 본토에서는 팔로군과 신사군의 저항에 막혀
고전하고 있었고, 태평양 전선에서도 패전을 거듭했다. 이탈리아는 1943년 9월 항복해버렸다. 이와
같은 정세는 뜻있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1940년대는 흔히 독립운동도 별로 진행되지 못한
암흑기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표면만을 보았을 때의 인상일 뿐, 잔잔한
표면 밑으로는 독립운동의 격류가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와 독립운동 세력의
치열한 투쟁 사이에 일반 대중들이 숨 쉴 공간이 조금은 있었다. 전쟁 말기에 일제가 부엌과 안방까지
뒤져 놋그릇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가 상징하는 것처럼 일본제국주의의 국가권력은 이제 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공간까지 침투하고 위협했던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대중들도 각성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강제징용이 본격화되면서 수백만의 젊은이들이 생활의 현장을 떠나 전쟁 체제에 편입되었는데 일제 통계에 의하면 이들 중 3할 정도가 도망쳐버렸다고 한다. 도망친 사람들은 ‘성전’ 수행에서 일익을 담당하라는 ‘천황폐하’의 명을 어긴 반역자가 되었다. 이제 이들은 일본이 망해야만 살 길이 생기는
중범죄자가 된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강화된 것은 대중의 의식을 일깨웠다. 1943년 말 경부터는 일제의 특별고등경찰 자료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이 진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은
‘독립운동가’들만이, 선수들만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도, 특히 수많은 젊은이가 징용으로 끌려갔던 일본 땅에서 사회주의자나 항일의식이 강한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전혀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즉 선수들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가운데 일반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생적인 항일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결정적인 시기가 왔을 때 우리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며
다이너마이트라도 훔쳐 사업장을 폭파하거나 방화하자는 모의를 하다가 잡혀 들어오는 사건이 줄을 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자생적인 움직임에 꼭 등장하는 이야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동을
개시해야 할 시점을 김일성 장군이 조국에 개선할 때로 잡고 있었던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40년대 김일성은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 영내로 피신했다가 소련의 압력에 의해 만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즉, 1940년대 전반 김일성은 이렇다 할 군사활동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존재 자체가 대중들에게 일제의 패망을 약속하고,
자신들이 조국의 해방에 무임승차 할 수 없다는 결의를 끌어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런
시기를 정해룡과 정해진 형제는 어떻게 보냈을까.
정해진은 1943년 7월 경성으로 가
도쿄에서 비밀독서회를 같이했던 김원현과 임상준을 찾았다. 이들은 그동안 ‘보성육영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표면상으로는 고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주는 자선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대사변의 결정적 시기에 인민봉기를 일으키는데서 선봉대의 역할을
할 청년들을 양성 규합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장학금을 주고 있는 대상 학생들은 경성제대, 보성전문학교, 경성법률전문학교의 고학생으로서 사상적 경향이 좋은
학생 약 30명에 달하고 있었다. 보성육영회의 이사장은 장학금을
댄 신영식(1950년 2월에 남로당 중앙선전부사건으로 수도경찰청
분실에 체포되어 전향 후 정해진에게도 변절을 권유, 다시 월북하여 평양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일하다 숙청)이 맡았고, 실제 일은 임상준이 상무이사로서 처리했으며, 매일신문기자인 김원현은 이사로 있었다. 그들은 정해진을 반갑게 맞으며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여 정해진도 보성육영회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정해진의 고향인 보성 인근, 김원현의 고향으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노령산맥 줄기 근처의 장성군 삼계면, 임상준의 고향인 충북 진천 등에서 혁명의 비밀거점을 물색했고, 학도병
징집에 걸린 친척과 후배들, 그리고 징용과 징병을 피해 다니는 의식있는 젊은이들의 도피처를 물색했다.
정해진은 1944년 9월 경성제대 시절의
벗들인 이종원, 김석형, 박시형, 김득중 등과 2년 반만에 만나게 되었다. 1942년 초 동경제대 대학원을 그만두고, 울산철광산 노동계급 속으로
들어가면서 뜻을 이루기 전에는 친구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뒤늦게 그들을 찾은 것이다. 민족문제해결의
길을 찾기 위하여 함께 고민하던 오랜 학우들이며 혁명동지들이였던 그들은 정해진을 무척 반가와 하였으며 또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 노동자들도 김일성의 조국진군에 맞추어 무언가 해야 한다고 계획할 때, 경성제대를
졸업한 이들 지식청년들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 일제는 중학교나 고등보통학교 상급반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정해진의 친구들 중 김석형, 박시형, 김득중 세 사람은 사립중학교 교원들이었는데, 이들은 장차 도래할
유사시에 무기를 탈취하여 중학교 상급생들을 동원할 계획 밑에 우선 경성 시내 각 중학교 교원 중에서 동지를 획득하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이종원은 서울에서 40리 떨어져 있는 능곡에서 한양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이 목장은 동지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종원은
또 라디오 한 대를 구하여 소련 블라디보스톡에서 발신하는 방송을 정기적으로 들으며 전쟁의 추이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종원은 지리적 조건이 좋은 산간지대 등을 선정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근거지를 창설해야 한다며, 자기는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숲이 깊고 주민 구성이 좋으며 서울과도 50~60리
정도 떨어져있는 릉곡과 양주의 광릉을 후보지로 정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해진 역시 전라남도를
기본으로 하여 동지들도 규합하며 노령산맥 줄거리와 전라남도 월출산 밑 등지에 혁명의 비밀거점을 설정하고 그 주변 농촌지대를 민주화 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 특히 전라남도 보성군, 장흥군, 나주군에 걸쳐있는 장장 120리의 골뱅이 속 같은 야산지대는 일제의
폭압세력이 미치기 힘든 지대로서 앞으로 무장투쟁 근거지로 만들 수 있는 지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견을 교환했다.
정해룡의 중국행
고향으로 돌아온 정해진이 무장투쟁을 위한 근거지 창설준비와 동지규합을 다그치고 있을 때인
1945년 2월 중순 정해룡은 중국동북지방에 가야겠다는 결의를 아우에게 표했다. 지난 4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폐간되고 김일성도 소련에 머물러 활동을 중단했던 터라 김일성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김일성에 대한 관심은 더욱 깊어져가고 있었다. 멀리 한반도의 남쪽 끝 보성에 있던 정해룡도 김일성의
동정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정해진도 형의 뜻을 마음 속 깊이 환영했지만, 1941년 여름 김일성 부대와 연계를 가져보려고 간도로 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국경의 경계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일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정해진은 형에게 만약 김일성 부대와 연결을 맺게
된다면 어떻게 할 계획인가를 물었다. 정해룡은 아우에게 “조국광복의 대사변이 다가오는
이때 우리민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김일성 부대와 연결을 맺고, 투쟁하는 것”이라며 “만약에 연계가
맺어지면 가산을 전부 정리해가지고 들어가겠다. 설마 남아있는 가족들의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느냐”고 굳은
결의를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정해룡의 집안에는 그가 만주개척단으로 만주 이민을 모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그 실상은 정해룡이 1910년 나라가 망할 무렵
이회영 일가나 안동 유림들이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간 것과 같은 길을 모색한 것이다. 정해진은 형에게
자신의 광주고보 동창으로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에 만주 장춘에서 한글로 발간되는 <만선일보>의 기자로 있던 고재기(高在騏,
전라남도 담양군 태생으로 전남대 상대학장 역임)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써 주었다. 정해룡은 이 편지를 품에 안고, 장도에 올랐다. 정해룡은 길에서 6촌동생 정해균을 만났다. 정해룡은 자신의 상징과도 같이 늘 입고 다니던 두루마기를 벗어서 정해균에게 주고, 그가 입고 있던 남루한 방한복을 바꿔 입었다. 정해룡은 집안에는
만주 이민을 알아보기 위해 만주개척단에 합류하여 만주로 가는 것처럼 얘기해 놓았다. 장차 일이 잘 풀리면
만주로 옮겨가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설 결심을 한 것이다.
정해룡은 장춘에 가서 만선일보사로 고재기를 찾아갔다. 고재기는 동생의 믿음직한 친구였지만, 친일신문인 <만선일보>에
근무하는 그가 김일성 부대의 행방을 알 수는 없었다. 정해룡은 괴뢰 만주국의 수도가 되어 신경(新京)으로 이름을 바꾼 장춘에서 김일성 부대와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고 한때 김일성 부대의 활동무대였던 연길로 가 보았으나 여기서도 김일성 부대의 행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낙담한 정해룡은 어쩔 수 없이 귀국길에 올랐다. 경성에 온 정해룡은
동생의 경성제대 동창인 이종원이 경영하는 한양 목장을 찾았다. 이종원은 1936년 여름방학 때 보성에 내려와 한 철을 보낸바 있어 정해룡과도 친숙한 사이였다. 정해룡이 한양목장을 찾은 이유는 이종원만을 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동생
해진으로부터 한양목장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정해룡은 이종원의 한양목장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한 달 기약으로 2월 중순에 만주로 떠난 정해룡이
3월이 다가도록 돌아오지 않자 집안에서는 종손인 정해룡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고, 특히
일찍이 청상이 되어 홀몸으로 정해룡을 키운 노모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형의 만주행
목적을 솔직히 얘기할 수도 없었던 정해진은 형에게 무슨 사고가 생긴 것은 아닌가 몸이 달았다. 불안해진
정해진은 장춘의 고재기와 서울의 김원현에게 각각 전보를 보냈다. 고재기로 부터는 정해룡이 진즉 떠났다는
답전이 왔고, 김원현은 정해진에게 빨리 서울로 오라는 전보를 보냈다.
사고가 생긴 것을 예감한 정해진은 만약의 경우에 자신도 피신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어 가지고 1945년 3월 31일
서울로 올라갔다. 매일신보 기자로 있는 김원현이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정해룡은 이미 석방되어 보성으로
내려갔지만, 정해진의 비밀조직 성원인 이종원, 김석형, 박시형, 김득중 등 4인이
모두 검거되어 정해진이 경성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3월 30일
함경남도 고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는 것이다.
정해룡은 동생의 친구들과는 잘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같이 활동을 하지는 않았었기에 악독한 일본 경찰도 정해룡을 엮어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 달이 안 되는 기간이지만 정해룡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훗날 아주 큰 도움을 입게 되는
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신간회 통영지회 집행위원장이자 신간회 본부 중앙집행위원으로 1948년 말 여순사건 이후 순천지구 토벌대장으로 부임한 최천[16]이라는 인물이다. 정해룡이
여순사건이 험난한 시기를 별 탈 없이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일제 말 가장 험한 시기에 최천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동고동락한 사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을
얼마나 어떻게 쓸 것인지 생각해 두어야: 가족들이 가진 사진이면 상관없지만 이런 자료 사진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정해룡이 가족들에게 남긴 얘기에 따르면 최천은 봉강과 함께 잡혀 들어왔는데, 취조를
받으러 갈 때면 피범벅이 돼서 나올 정도로 일경에게 당했지만 끝까지 정해룡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었다고 한다. 정해룡은
최천의 왼쪽 뺨에 난 흉터가 그 때 자신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은 대가로 얻은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한 최천은 인천경찰서장으로 있을 당시에는 봉강의 동생 정해진을 봉강의 부탁으로 석방시켜 주기도 했다고 한다. 뒷날 한국전쟁 당시 전남도당 위원장이자 전남 빨치산 대장으로 이름을 떨친 김선우도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출신으로
정해진과 어려서부터 친한 사이였다. 정해진과 김선우는 미군정 당시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검거 되었는데 마침 최천이 인천경찰서장으로 있었다.(<한국경찰사>에
따르면 최천은 1947년 11월부터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48년 4월 17일자로 제주경찰감찰청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인천경찰서장으로
재임했다.) 동생 정해진이 파업을 주도하다 구속되었다는 소식에 봉강이 한 걸음에 인천에 가보니 마침
서장이 최천이었다. 최천은 봉강이 왔다는 소식에 버선발로 뛰어 나와 봉강을 맞으며 정동지가 어쩐 일이냐고
반색했고, 정해진과 김선우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제주 4.3사건 발발 직후인 1948년
4월 말, 무장대와 군 당국 간에 평화적 해결 방안이 모색될 때 5월 1일 발생한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평화적 해결이 무산되고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는데, 이 때 오라리 사건을 조작하여 평화협상을 깬 것은 미 군정 경찰당국이었고, 최천은 현지 경찰 책임자였다. 여순 사건 당시에도 토벌 과정에서
잔혹한 학살이 많이 발생했는데, 최천은 토벌대의 주요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다. 최천은 민간인 학살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은 우파 정치인이었지만, 13살
아래 옛 동지였던 정해룡과 그의 동생에 대해서는 이념을 넘어 인간적인 의리를 지켰다고 할 수 있다.
정해룡은 다행히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정해진이 잡혀갔다. 정해진은 가까운 친구이자 비밀조직의 동지였던 사람들이 잡혀간 것을 알았지만,
아직 먼 고향 보성까지 자신이 수배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바삐 형을 만나
만주에 갔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알고 싶은 마음이 급하다 보니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정해진은
만약의 상황을 고려하여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 보성인쇄주식회사에 장거리 전화로 보성의 상황을 물어보기는 했다. 별
이상이 없다는 말에 막차를 타고 보성역에 도착한 정해진은 그만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성역두에서 체포되어 보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고원경찰서로 압송되기에 앞서 정해진은 어머니와 면회할 기회를 가졌다. 혁명가들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이었다. 자식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글썽여질 때 어머니는 의연하게
“네가 원하던
장한 길을 가다가 이렇게 되었는데 무슨 여한이 있느냐? 에미 걱정은 하지마라!”고 작은 아들을 격려해 주었다.
고원경찰서로 압송된 정해진은 악질 고등계형사주임인 조선인 형사 야스다의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불면 죽고 안 불면 사는 치열한 고문투쟁이 벌어졌다. 정해진은 전신을 두들겨 맞아 운신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얼굴까지 부어서 눈도 뜨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물고문도 며칠째 계속되었다. 정해진은 죽을 각오를 하고 형의 만주행에
대해서도, 비밀조직 성원들과 함께 근거지 창설과 후방교란을 모색했던 일에 대해서도, 보성육영회의 활동에 대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잡혀온 다른
동지들, 특히 후방교란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눈 이종원은 혁명전우의 입장에서 정해진의 활동에 대한
비밀을 고수하였다. 정해진에게 죄를 씌울 수 없었던 일제는 결국 정해진을 기소유예로 석방했다.
정해진이 기소유예로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정해진의 아내 전예준과 형 정해룡의 구명운동이 일정하게 먹혀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예준이 옥바라지를 하는 동안 조선인 순사 중 그나마 정해진에게 동정적인 오야마를 통해 고등계형사주임
야스다가 함흥고보 출신이며 물욕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정해진의 경성제대 철학과 대선배이면서
동경제대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했던 김계숙이 함흥고보 출신이었다. 정해룡은 정해진의 친한 친구 김수경과
함께 김계숙을 찾아가 야스다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고, 김계숙은 괘히 응낙했다. 함흥고보 출신 중에서 이름이 높았던 김계숙의 편지와 전라도 특산물의 효과를 본 것인지, 비밀조직 성원 5명 중 정해진만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34년 경성제대 입학 이래 같은 뜻을 품고, 한 길에서 싸워온
동지들을 감옥에 두고 풀려나는 정해진의 마음은 찢어질 듯 했지만 동지들은 정해진 하나 만이라도 석방될 수 있는 것을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정해룡은 집으로 돌아온 정해진을 만나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형제는 각각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며 일제의 패망을 기다리고 있었다.
[1] 정해진은
북에서 은퇴한 뒤 자서전을 썼다고 하는데, 필자는 그 일부를 미국에 있는 정해룡의 친척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다. 정해진의 자서전 전부가 있었으면 봉강 정해룡의 전기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의
친척에게는 극히 일부분만 전해졌다고 한다. 이하 정해진에 관한 서술 중 특별히 출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 자서전에 의거한 것이다.
[2]
<동아일보>, 1930년 10월 19일. 1910년생인 정해두는 남로당 보성군당위원장, 전남도당 농민부장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기간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전사했다.
[3]
1934년 3월 6일자 동아일보는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제10회 졸업식에서 졸업생 48명 중 최일영, 정해진, 안상영 등 3인이
우등생이라고 보도했다. 우등생 정해진의 사진은 다음날짜 신문에 실렸다.
[4] 「조선총독부
관보」 1934년 3월
30일 제2164호 8면
[5]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4월 7일
제3066호 5~6면. 일본과 달리 조선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2년제의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했다. 이 예과는 1934년 이후부터 3년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정해진이 예과가 3년제로 바뀐 첫 해의 입학생인 것이다. 정해진이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은 본과에 진학한 것을 의미한다.
예과 졸업 후 본과 진학은 커다란 문제가 없는 한 순조로웠다. 경성제국대학은 경성중학교(현 서울고), 용산중학교(현
용산고), 경성일고보(현 경기고), 경성이고보(현 경복고) 등의
졸업생들이 주로 진학했으며, 그 외 지방 도시의 중학교나 고등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입학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정해진은 보성에서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전체에서
이름을 떨친 수재였다고 할 수 있다.
[6] 「조선총독부
관보」 1940년 4월 9일
제3963호 7면.
[7]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김수경의 조선어 연구와 일본 - 식민지, 해방, 월북”, <社會科學>(同志社大學 人文科學硏究所 紀要) 제44권 제1호, 67~68쪽.
[8] 이충우, <경성제국대학>, 1980, 다락원, 228~229쪽.
[9]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김수경의 조선어 연구와 일본 - 식민지, 해방, 월북”, <社會科學>(同志社大學 人文科學硏究所 紀要) 제44권 제1호, 68쪽.
[10]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김수경의 조선어 연구와 일본 - 식민지, 해방, 월북”, 68~69쪽
[11] “경성제대 졸업식, 젊은 학사 85명”, <동아일보> 1940년
3월 26일.
[12]
<정해진 자서전> 81쪽. 정해진은
북에서 은퇴한 뒤 자서전을 썼다고 하는데, 필자는 그 일부를 미국에 있는 정해룡의 친척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다. 정해진의 자서전 전부가 있었으면 봉강 정해룡의 전기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의
친척에게는 극히 일부분만 전해졌다고 한다.
[13]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김수경의 조선어 연구와 일본 - 식민지, 해방, 월북”, 69~70쪽
[14] 이희승,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일석 이희승 자서전>, 2001, 선영사, 135쪽
[15] 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과 이념”, <한국사연구> 95,
1996, 145쪽
[16] 최천은 1900년 8월 16일에 경상남도 통영시 정양(定梁)
1280번지에서 출생했고, 이후 주소지는 항남동 270번지에
두었다. 최학기(崔學鶀)로
불리었던 그는 1967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그는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된 바 있다. 이후 그는 사회활동과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1927년 4월에 그는 재판을 받았는데, 사건의 발단은 그해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이었던 김기정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인에 대한 교육의 불필요와 한국어 통역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에 최천을 비롯하여 박봉삼, 박태근, 박중한 등이 주축이 된 ‘김기정 징토시민대회’를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했다. 징토대회는
김기정의 친일발언 사실을 규탄하고, 고동절교를 선언하며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경찰에 체포되어 1927년 10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 상소하여 1928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1929년 신간회에 가입하여 통영지회를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폈으며, 1931년 5월 16일 신간회 제2회
전체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동회의 해소를 주관했다. 그리고 최천은 동아일보 통영지국 부국장과 지국장(1928년), 신간회 통영지부장 등으로 활동했고, 1930년에는 통영협동조합운동을
했다. 1941년에는 통영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냈고, 그 즈음에
玉山天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1942년 2월에는 박영근 등 8명과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피체되어
징역 4월형을 언도받았다고 한다.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하여 인천경찰서 서장, 제주도
경찰국장(1948. 4. 17~6. 17), 전라남도 경찰부청장(여순사건 시기), 경상북도 경찰국 경무과장(1949. 4. 14~1950. 5. 4), 경상남도 경찰국장(1950. 7. 27~11.)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한민당 발기인, 경상남도반탁투위 위원장, 민주국민당 중앙위원, 민주당 충무시당 위원장, 3, 4, 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4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제35회 국회임시회)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이상 김득중, 2010: 13-16; 국가보훈처
관리 인물 자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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