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의사, 방북 경험 담은 자서전 출간
기자 장양희
2015.1.30 2:00 오전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한국계 미국인 의사 황기선 박사가 펴낸 자서전 '볼 꼴 못 볼 꼴 다시 보고싶지 않은 꼴' 책표지.
매주 화요일 화제성 뉴스를 전해 드리는 ‘뉴스 투데이 풍경’입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한국계 미국인 의사가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북한을 제대로 알자는 이유에서 책을 썼다는데요. 장양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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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풍경 오디오 듣기] 한국계 미국인 의사, 방북 경험 담은 자서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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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북부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 거주하는 한인 황기선 박사는 지난 1982년부터 2012년까지 수 차례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한국에서 카톨릭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후 평생을 의사로 살아 온 황 박사는 10여 년 전 은퇴한 이후 미국 의료선교단체를 통해 매년 두 차례 북중 국경지역 `강변’으로 진료여행도 떠나고 있습니다.
[녹취: 황기선] “강변이라면 우리가 북한하고 한국의 경계를 두만강 압록강. 강변에 탈북자들이 숨어서 살아요. 우리는 그래서 강변 진료 다니면서 숨어서 사는 사람을 일일이 다니면서 탈북자들이 그때 우리가 진료를 나가면 찾아 나와요. 선교사들이 그런 때까지 다 들어가 있고..”
황 박사가 자비를 들여 탈북자 진료여행을 시작한 건 고향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입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는 북한이 625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고 말하는데요 황 박사는 한국전쟁으로 네 명의 형제는 북녘 땅에 그리고 남한으로 따로 넘어온 아버지와 우여곡절 끝에 만나 한국에서 의사가 될 때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네 명의 자식을 그리워하던 아버지는 아비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아픔을 유언으로 남겼고 황 박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머지 북에 있는 형제들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지난 1982년부터 북한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녹취: 황기선] “형제들을 다 놔두고 나 혼자 내려왔어요. 처음에는 우리 아버지하고 내려오다가 사형장에 끌려가고.. 너까지 죽이겠다 해서 그래서 내가 나중에 아버지를 찾아서 인천으로 가서.. 구두닦이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30년 동안 7차례 북한에 들어 형제를 만나는 동안 두 형제는 먼저 떠나 보냈고 80노인이 되가는 자신도 인생의 황혼녘에서 지난 2012년을 마지막으로 남은 두 명의 형제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올해 80살인 황 박사는 당시 두 형제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이게 마지막 북한 방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황기선] “면역이 됐어요. 밤낮 헤어지고 밤낮 만나고 하니까..또 올께 하고 왔죠. 하하하 근데 속으론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했죠.”
그렇게 마음으로 이별하고 돌아온 황기선 박사는 이런 이야기들과 자신이 경험한 북한을 자서전 ‘볼꼴, 못 볼꼴 다시보고 싶지 않은 꼴’에 담았습니다.
수 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가족의 안전 때문에 침묵을 지켜왔지만 이제는 70살을 넘긴 두 명의 형제와 자신이 살만큼 살지 않았냐며 더 늦기 전에 책을 썼다는 건데요, 책을 낸 목적은 이렇습니다.
[녹취: 황기선] “제목이 북한의 속 이야기였어요. 북한에 많이들 다녀왔잖아요. 그 사람들이 항상.. 북한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관광지를 얘기하는 거예요. 평양에 다녀와서 북한에 다녀왔다고 하지 말라, 말을 합니다.. "
황 박사는 최근 한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강제출국 당한 한국계 미국인 신은미 씨와, 평양과기대에서 6개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책으로 펴낸 작가 수키 김 씨를 비교하며 북한을 제대로 알기란 쉬운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황 박사는 신 씨의 경우 북한에서 좋은 대접을 받은 모습만 다뤘을 뿐 제대로 북한을 보지 못했다며, 자신은 수키 김 씨가 책에서 지적한 평양과기대 학생들의 진실하지 못한 면 등에 공감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신 씨가 돌아본 북한 지역들을 자신도 다 둘러봤다며, 같은 장소를 가도 북한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 가지 사례로 북한의 탁아소를 본 신 씨는 북한 아이들이 평화롭게 노는 모습을 강조했지만 자신은 1주일 동안 탁아소에서 먹고 자면서 아이들이 받는 사상교육에 소름이 끼쳤다고 황 박사는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마음을 터놓지 못할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황 박사는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제대로 알려면 평양이 아닌 지방에 가봐야 한다며, 북한 사람들도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도록 여행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경험과 이산가족의 아픔, 의사로서의 삶과 북한 방문기를 담은 책 ‘볼꼴 못 볼꼴 다시 보지 못할 꼴’ 에 대해 황 박사는 자신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자서전이라며, 책을 펴낸 이유도 북한에 대한 자신의 바람도 바로 ‘소통’이라고 말했습니다.
황 박사는 자서전을 통해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황기선] “인민군이 13년 형을 받은 노예이다. 인민군 다 강력한 부대 아니예요. 정말 형편없이 고생해요. 아버지가 죽어도 몰라요. 제대로 알자는 거예요, 방법은 육로를 열어서 소통을 하자는 거예요. (북한에 사는) 동생들도 (서로) 몇 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예요. 우선 소통이 되야 겠다고 생각해요”
북한 주민들이 서로 오가며 소통하고 남북한 주민들도 육로로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는 겁니다.
VOA 뉴스 장양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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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꼴, 못 볼 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
황기선 (지은이)나무와숲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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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쪽152*223mm (A5신)521gISBN : 9788993632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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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재미교포 의사 황기선 박사가 전후세대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인생역정과 북한 이야기를 담은 책.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갖은 고생 끝에 의사가 되기까지가 전반부 그의 삶이라면, 미국으로 건너가 32년 만에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고 이후 인도적 활동을 한 시기를 후반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황 박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별꼴 다 보았다. 볼 꼴, 못 볼 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들을 다 보고 살았다. 험한 일들을 많이 보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고달프고 길어서 다시 젊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면서 "그래도 살다 보니 그냥 넘기기에는 아쉬운 점들이 많아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다 보니 책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공부하는 길밖에 없었다며,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했다고 하기보다 돈이 없어 공부하기가 힘들었다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자신은 일천만 이산가족 중 행운아라고 말한다. 비록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못 만났지만 가족들을 다 만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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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나의 가족, 나의 고향
할아버지 황성필 | 독립운동가 큰아버지 | 나의 아버지 | 해방의 날
2장 운명의 시간들
“퉁탕만 해봐라” | 운명의 날 | 아버지와의 이별 | “내레 빤쯔도 안 입고 내려왔쒜다” | 거리의 구두닦이 | 부산 달동네 판잣집 | 잊지 못할 해병대 은인들
3장 건빵 먹고 물 마시며
주경야독 | 의과대학 입학 | 아버지와의 재회 | 건빵 세 개 먹고 물 마시고 | 배우는 것이 힘이다 | 뜻밖의 제안 |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 “이러다 젊은 놈 하나 죽이겠다” | 앉은뱅이를 걷게 한 의사
4장 후회 없는 삶
육군 대위가 간첩? | 백골부대 의무중대장 | 야전의무시험소 미생물과장 | 월남전 파병 | 아버지의 투병 생활 | 대학으로 돌아가다 | 미생물병 연구소의 꿈 | 미국에서의 의사 생활
5장 32년만의 귀향
북한에서 온 편지 | 가짜 매형 | 32년 만의 모국 방문 | 아! 어머니 | 평양에서 해주로 | 우리 6남매 | 금강산 관광 | 돌아오는 길 | 북한 방문 후유증
6장 북한 이야기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가면? | 외화벌이꾼과 외화 상점 | 북한의 환율과 생활 | 고난의 행군 | 입과 발의 자유 | 북한 군대는 13년형의 강제노동수용소 | 북한의 대중교통 | 자전거 도둑 | 도로 확장 공사와 땅굴파기 | 북한의 토사 치우기 | 인력 낭비 | 자기 감정을 나타낼 수 없는 북한 사람들 | 북한 사회계급 | 북한의 수해 과장 보도 | 전쟁과 평화 | 연평도 포격 사건 | 중국과 북한의 우호협력조약 |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 북한을 제대로 알자 | 북한의 핵 개발
에필로그
열면 살고 닫으면 죽는다 | 마지막 북한 방문 | 때로는 소설만 한 역사도 없다 |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으로 둔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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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황기선 박사는 미국 서부의 아름다운 도시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에서 수십 년간 의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은퇴하고 봉사활동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언뜻 보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한 한국인 스토리의 하나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현실에 비추어 황 박사의 이야기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그의 치열한 삶을 통해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김영석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황 박사님의 이 책에는 그의 외롭고 추웠던 유년 시절과 성장 과정, 조국에 헌신했던 선조들, 그리고 미국 이민과 분단된 땅에서 볼 수 없었던 가족과의 상봉, 북한 고향 땅에 들어가서 생각해 본 통일에 대한 소망들이 너무나 감동스럽게 엮어져 있습니다. 조국을 떠나 살면서도 통일을 갈구하는 사람들, 휴전선 바로 아래에서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 혹 사는 일이 바빠서 통일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그 모두에게 그의 이야기는 좋은 교훈과 정보가 될 것입니다. - 박상원 (기드온동족선교회 대표)
저자 및 역자소개
황기선 (지은이)
황기선 박사는 1935년 북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는 그리 가난하지는 않았어도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이 그를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가난했던 것은 그의 탓은 아니겠지요.
너무 가난하여 고등학교 과정을 야간학교를 나와 가톨릭대학에서 의사가 되고 미생물과 면역학을 전공하며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가 되었습니다. 서울 성모병원에서 진단의학 전문의가 되고 마산 결핵병원에서 결핵균을 연구하고 흉곽외과에서 폐 절제 수술을 하고 결핵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가톨릭대학에서 후진을 가르쳤고 병리 시험관을 거쳐 다시 가톨릭대학에 돌아가 미생물과 면역학을 가르쳤습니다.
한국 최초로 임상병리 시험실을 운영하다 미국에 와서 다시 가정의학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가정의학 전문의가 되고 노인학을 전공하여 노인성 우울증과 치매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1982년 이래 북한과 중국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고 기드온 동족선교회와 함께 강변선교와 북한 탈북자 진료를 돕는 일을 하면서 그동안의 살아온 글을 모아 <볼 꼴 못 볼 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을 펴내 기드온 동족선교회와 같이 강연과 강의를 하며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인색하지 말라’, ‘작아도 나누면서 살아라’, ‘네 몸 움직여 부지런히 살아라’를 몸소 실천하면서 노후에도 건강히 봉사하는 생활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접기
최근작 : <의사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볼 꼴, 못 볼 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 … 총 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황기선 박사가 전후세대에게 들려주는 인생역정과 북한 이야기
문학작품보다도 더 다이내믹한 여정을 걸어온, 소설 같은 삶
재미교포 의사인 황기선 박사가 전후세대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인생역정과 북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다. 『볼 꼴, 못 볼 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이 그것.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갖은 고생 끝에 의사가 되기까지가 전반부 그의 삶이라면, 미국으로 건너가 32년 만에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고 이후 인도적 활동을 한 시기를 후반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황 박사는“그동안 살아오면서 별꼴 다 보았다. 볼 꼴, 못 볼 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들을 다 보고 살았다. 험한 일들을 많이 보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고달프고 길어서 다시 젊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면서 “그래도 살다 보니 그냥 넘기기에는 아쉬운 점들이 많아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다 보니 책이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은“문학작품보다도 더 다이내믹한 여정을 걸어온, 소설 같은 인생 역정”이었다는 것.
그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공부하는 길밖에 없었다며,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했다고 하기보다 돈이 없어 공부하기가 힘들었다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자신은 일천만 이산가족 중 행운아라고 말한다. 비록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못 만났지만 가족들을 다 만났기 때문이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일곱 차례 방북, 인도적 지원 활동
그는 1982년 북한을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일곱 차례 방북했다.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 첫 번째와 마지막을 빼고는 서북미의료국제선교회 팀장 등으로 북한에 들어가 인도적 지원 사업을 했다. 또한 기드온동족선교회를 통해 거의 매년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중국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 흩어져 있는 탈북자들이나 조선족 동포들을 치료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 뒷부분에 나오는 ‘북한 이야기’는 바로 그 과정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적은 것이다.
박상원 목사가 추천의 글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조국을 떠나 살면서도 통일을 갈구하는 사람들, 휴전선 바로 아래에서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 혹 사는 일이 바빠서 통일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그 모두에게 좋은 교훈과 정보가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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