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1

인문학 데이트 : 한겨레 김동춘 박정미

인문학 데이트 : 문화/생활 : 인터넷한겨레

[인문학데이트] ④ 김동춘

인문학 데이트' 네 번째 초청자는 김동춘(41ㆍ 사진 오른쪽) 성공회대 교수다. 김 교수는 해외파 박사에 권위를 부여하는 한국의 학계 풍토에서는 이례적으로 순수 국내파 박사로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의 활동은 대학의 강단에 멈추지 않고 시민운동에까지 깊숙이 뻗어 있다. 외국의 이론을 수입하기보다는 한국 현실을 파고들어 새로운 이론을 산출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그는 말한다.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인 박정미(24ㆍ사진 왼쪽)씨가 그와 만나 김 교수의 최근 저작 <근대의 그늘>을 놓고 장시간 이야기했다. 편집자



"우리는 아직 근대를 완성못해"

박정미=사회학을 공부하다보니 선생님의 저서를 많이 읽은 편입니다. 이번에 나온 <근대의 그늘>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 <한국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과 같은 책들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김동춘=제 책을 열심히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박=선생님의 연구를 따라가면서 느낀 것이 관심사의 다양함인데요, 지식인 문제, 사회운동, 노동운동, 민족주의, 가족 문제에 이르기까지 참 넓습니다.

김=제 연구 영역들은 서로 연관돼 있고,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의 폭이 넓어진 거죠. 저의 주된 연구 영역은 사회운동인데, 사회운동의 잠재적 주체가 어떻게 현실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어떤 조건 때문에 그 잠재적 주체가 현실적 주체가 되지 못하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그 동안의 연구 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말씀하신 대로 선생님의 근본 관심사는 노동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현실에서는 시민운동을 하시잖습니까?

김=노동계급을 연구한다는 것이 노동계급의 처지를 그대로 대변해야 한다거나 노동자들의 당면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계급이 정치적·사회적 주체로 등장하는 지름길이 무엇이냐를 놓고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에둘러 가는 길이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유한 모순이 그대로 노동계급에 투영되는데, 이 시민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노동계급의 주체형성이 어렵다고 보는 거죠. 예를 들어 남북한 군사적 대치가 존재하는 한 계급정당 등장은 불가능합니다. 예산의 30%가 넘는 군사비가 복지비·교육비로 옮겨가지 않는 한 노동자투쟁이 기업 중심의 경제투쟁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요.

박=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성격을 좀더 분명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우리나라 시민운동은 정치적 성격이 강합니다. 미완의 부르주아 혁명을 완성하는 운동이지요. 이번 4·13 총선을 앞두고 전개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4·19혁명,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동시에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21세기 엔지오 운동의 싹이기도 합니다.

박=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구실을 나눠가질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김=그 동안 시민운동이 담당했던 과제를 노동자가 스스로 떠안아야 합니다. 일례로, 대우 자동차 해외매각문제나 `국부 해외유출 문제'는 노동자들이 제기했어야 합니다. 사회복지나 재벌개혁 문제도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노동자들이 단위 기업 중심으로 임금·고용 같은 낮은 수위의 투쟁만 하다보니까, 재벌개혁에 반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해고되면 갈 곳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박=현 정부 들어 시민운동은 급성장하고 노동운동은 여전히 제약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 지배계급의 계산과 맞물린 측면도 있다고 보이는데요.

김=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엔지오를 키우는 것이 노동운동을 `왕따'시키는 결과를 빚는 것이죠. 그러나 여전히 시민운동은 노동계급과 대립하기보다는 우리사회의 핵심적 지배세력과 대립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조선일보>를 대표로 하는 극우반공세력, 곧, 과거의 군부와 3~5공 세력, 재벌 등 인구구성비로는 얼마 안 되지만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과 시민운동은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부분적으로도 개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근대의 그늘>로 이야기를 옮겨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사회가 아직 근대를 완성 못했다고 보는 것 같은데, 탈근대론자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근대의 과잉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김=국민국가 건설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 근대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조건을 놓고 본다면 국민국가의 완성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그 과제를 마무리지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이나 환경문제 같은 탈근대적 문제 제기가 보편화하기 어려운 것이 근대의 완성이 안 된 것과 관련 있습니다. 호주제도가 철폐 안 되는 것은 남성이 반대해서가 아니라 독재권력과 그것을 뒷받침한 군사주의적 억압에서 우리가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박=그건 투쟁의 선차성을 따지는 문제라고 보는데요. 반독재투쟁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내부의 차이를 억압하는 것과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김=저는 탈근대 운동들이 근대의 미완성이 낳은 문제들과 연결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 환경운동을 독자적으로 풀기보다는 이 문제들이 국가나 자본의 문제와 어떻게 접합돼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박=저는 여성운동을 탈근대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은 근대와 함께 출발한 운동입니다.

김=저도 그렇게 봅니다. 다만 지금 페미니즘 운동이 너무 서구적이어서 반감을 느끼는 것이죠.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대중적 여성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운동은 무엇보다 먼저 한국의 억압적 가족제도를 뒷받침해온 식민지 억압구조, 분단, 군사독재 문제를 함께 봐야 합니다.

박=화제를 바꾸어서, 선생님이 계속 관심을 보이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왜 민족주의가 중요합니까?

김=서구의 사회과학 담론만 연구해서는 한국 민족주의의 내적 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해관계를 중심 주제로 하는 서구 사회과학에는 민족주의 담론이 없으니까요. 우리의 민족주의는 종교사회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후발자본주의국가이면서도 가족주의적 관계가 강하고 개인주의가 저발전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어디엔가 소속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한 거죠. 오늘의 지역주의 과잉, 종교 팽창도 이런 감정과 관련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놔두고 한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박=선생님의 홈페이지 프로필을 보니까, “남의 이론을 우리 문제에 단순 대입하는 학계의 풍토에 불만을 느끼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과학을 세우기 위해 고민해왔다”고 하셨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김=우리 학문의 종속성은 학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종속성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지식의 소비국가였어요. 우리사회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면 그쪽을 빨리 알아야 했어요. 이건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입니다. 외국 이론 들여와 소비하고 폐기하는 것을 반복해 왔는데, 그렇게 해서는 이론 발전이 안 됩니다. 외국에 내놓을 수 있는 이론을 생산하려면 외국의 보편 이론으로 설명 안 되는 우리 현실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죠. 저는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이라는 특수를 통해 보편으로 나아감으로써 일류 학자가 돼보고 싶어요. 가령, 지역주의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가면 거기서 인간의 의미·행동·정치와 같은 보편적 주제로도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김동춘이 말하는 김동춘

옛날에 운동권의 어떤 후배가 나를 보고 `가장 늦게 사고 칠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내가 그만큼 신중하다는 말이 되겠지만, 별로 좋은 평가는 아니다. 그의 말대로 수많은 후배들이 계속 사고를 치고 고생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동안, 그들을 사고치게 만든 데 상당한 `역할'(?)을 한 나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그들보다 편한 자리에 앉아서 지금껏 살아왔다. 연구사를 보면 무리하고 모난 주장이 이론의 발전에 기여한 경우가 더욱 많지만, 나는 어떤 현상을 분석할 때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정황들을 살피는 편이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이론적으로도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논문만 양산한 셈이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는 좋아하나 기독교인은 싫어한다”는 말을 한 것이 기억나지만, 나는 학문은 좋아하나 학자들과 만나는 것은 싫어하며, 학자연하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학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로서 대개는 인생에서 궁지에 몰려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나도 크게 봐서는 그러한 부류에 속하기는 하지만, 동료 학자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했고, 농촌 출신에다 강한 유교문화의 세례, 학생운동, 교사 생활, 기독청년 활동, 군 복무, 연구자 운동, 시민운동 등 직업적 학자가 되기 전에 비교적 많은 일들을 겪었다. 이런 것들이 나를 고생시켰지만, 이제는 자산이 됐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들을 대신하여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며, 오직 학문활동에만 매진하는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더 잘 볼 수 있는 처지에 서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행운이자, 큰 부담이다.



김동춘은 누구?
△경북 영주출생

△서울대 사범대 졸업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1993)

△구로고등학교 교사(1984-1988)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연구원(1994-1996)

△미국 UCLA대학 방문연구원(1996)

△<역사비평> 편집위원(1989-현재)

△<경제와사회>편집위원장(1997-2000)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및 엔지오학과 교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저서 <1960년대의 사회운동>(공저)(1991)

<한국사회노동자연구>(1995)

<한국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1997)

<분단과 한국사회>(1997)

<근대의 그늘>(2000)

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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