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4

'일본의 근대'란 기형적 신화에 불과하다

'일본의 근대'란 기형적 신화에 불과하다

'일본의 근대'란 기형적 신화에 불과하다
입력2019.08.12. 오후 5:21

[민교협의 시선] 일본의 근대, 한국의 근대
 [하상복 목포대학교 교수]
 
1910년 8월 22일, 조선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하고 조인했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같은 해 8월 29일 소위 '대일본제국헌법'에 기초해 발동된 천황칙령 319조와 354조로 조선총독부 설치를 위한 제도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설립된 조선총독부는 남산의 통감부 건물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통감부와 총독부는 그 업무의 규모와 인력 면에서 비교가 될 수 없었다. 단적인 사실을 보자. 1905년 12월 현재 통감부는 3개 부서에 총 73명의 직원이 근무했던 반면, 1911년 3월 현재 총독부는 총독관방과 5부, 그리고 그 산하에 7국 25과로 조직되었고 약 840명이 일하고 있었다. 통감부 건물이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광화문 육조대로의 대한제국 내각 청사를 이용하거나 총독부 외곽에 임시 가건물을 세웠다. 그렇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서의 공간적 분리로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새로운 총독부 청사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경북궁을 새로운 청사 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건축 프로젝트는 비용과 기능적 차원에서 어떠한 타당성도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의 전각은 대단히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신청사를 세울 대규모의 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은 곧 경복궁의 전과 각과 다리를 부수고 없애는 것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었다. 1912년에 청사 설계가, 4년 뒤인 1916년 7월에 기공식이, 그리고 1926년 1월에 준공식이 열렸다. 경복궁의 정전(正殿) 근정전 앞에는 거대한 석조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대가로 조선의 정궁은 처참하게 훼손되어야 했다. 
이것이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이 해체를 시작한 '중앙청'(미군정청 청사, 대한민국 입법부, 행정부 청사, 국립박물관으로서의 이력을 지닌)으로 불린 건물이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돔의 첨탑 일부는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외관은 그야말로 서구적이다. 네오 르네상스(neo-renaissance) 양식으로 알려져 있는 근대적 공공건축물이다. 일본은 이 청사의 기본 설계를 독일의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에게 맡겼다. 그리고 기사를 미국과 유럽으로 보내 서양의 관청건축을 연구해오게 했다. 총독부 신청사를 서구적 외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관찰 위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제도적 거점으로서의 총독부 청사를 왜 자국의 고유한 전통양식이 아니라 서구적 양식으로 건립했을까? 일본의 전통 건축미학을 구현하고 있는 외관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문명적 우월감을 드러내줄 감각적 연출이 아닐까?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사상가 사이드(Edward Said)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란 개념을 창안했다. 사이드는 그 개념을 통해 동양에 대한 근대 서구의 제국주의 지배가 단순히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필요와 동기와 논리에 입각한 것이 아님을 밝히려 했다. 근대 서구의 식민지배는 동양에 대한 서구의 독특한 관점과 해석체계 위에서 성립하고 작동했다고 사이드는 주장했다. 그는 그것을 오리엔탈리즘으로 명명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시각은 대단히 오랜 역사적 기원을 지니고 있고, 다양한 지식들의 결합과 협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 점에서 진리와 등치될 만한 것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은 모든 면에서 서양에 열등하다는 생각 위에 서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없는 동양은 자치 능력을 지닌 서양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고를 유포해왔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은 퇴행적이고 미개한 야만의 장소이고 서양은 진보적이고 개화한 문명이라는 우열의 이분법이 진리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서구가 동양을 집어삼켜 착취하는 식민경영의 근원으로 숭배한 오리엔탈리즘을 깊이 받아들여 믿음으로 내면화했다. 일본 근대 지식인의 표상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창한, 일본 제국주의의 명제인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서구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국가 근대화를 이룩했다, 빠른 속도로 서구화를 진행했고 결국 후발 제국주의로 성장해나갔다, 이제 일본 제국주의는 더 이상 아시아가 아니다, 서구 열강의 대열로 진입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아시아를 벗어나 근대 서구 제국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 이 욕망은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웅대한 석조건물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우리는 해석한다. 서구 근대의 이념을 차용해 아시아의 '미개한 나라'를 통치하려는 의지와 열망, 우리는 이것을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으로 부르고자 한다. 이 파생적 이념과 사고체계는 그러므로 대단히 기형적이다. 불행의식 자체라고 해야 한다. 근대 제국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기 바깥의 정치적 주체들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문명적 권위에 편승해 아시아의 식민통치를 실천하는 타율적 이념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구 근대의 물질문명과 제국주의를 모방했으면서도 그 제국의 양태에서는 전혀 스스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근대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구 근대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라는 악을 낳았다. 그렇지만 하버마스(J. Habermas)가 말하고 있듯이 서구의 근대는 악만을 잉태한 것은 아니다, 근대는 모름지기 보편적 해방과 진보의 시간이었다. 인권과 자유와 평등은 모두가 누려야 할 보편적 가치의 모태였다. 근대는 피치자가 정치적 주권자가 되는 혁명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제도라고 선포한 무대였다. 
일본은 근대의 이름으로 아시아에서 군사적 패권을 확보해나갔지만, 근대의 보편적 규범과 가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게 행동해왔다. 식민지배가 저지른, 심각한 반인권과 반인륜의 역사를 철저히 부정하고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를 통해 반문명적 행위를 자행한 서구국가가 자기 내부의 근대성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고 반성해온 역사의 경로를 일본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의 근대가 얼마나 미성숙한 상태와 왜곡된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국의 우익은 그러한 일본에 의해 한국의 근대화가 이룩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행 수준으로 부유해 온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근대, 불균형적인 근대, 모순적인 근대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일본이 어떻게 식민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실천하고 싶었던 근대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근대를 단순히 물질성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진보를 향한 규범과 이념과 가치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한국의 근대는 대단히 자생적으로 태동해왔고 발전해왔다. 한국의 근대는 인권과 인간존엄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정신을 탄생시키고 성장시켜나가는 과정에서 개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민주화라고 부른다. 

그러한 관점에서 대통령이 최근 수석보좌관 회의를 통해 한 발언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대통령은 “우리는 경제 강국으로 가기 위한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도 민주인권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자유롭고 공정한 경제, 평화와 협력의 질서를 일관되게 추구할 것”,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인류보편의 가치와 국제규범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근대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양식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역설해주고 있다. 

한국의 극우집단과 보수정당은 한국이 일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식민지배 이래 지금까지 일본이 한국에 대해 보여 온 시각의 반영이다. 일본은 근대 서구에 기대어 아시아와 조선의 열등함을 정당화했고, 한국의 극우 보수는 일본에 기대어 한국의 열등함을 내면화하고 있다. 

정치적 근대 탄생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우리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만난다. 권력자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다면 '살부'(殺父)의 대사건이다. 프랑스는 이 사건으로 만인 평등과 수평적 형제애로 직조되는 사회를 상상했다. 한국 또한 수  차례에 걸쳐 아버지를 살해했고 그 위에서 더 나은 공화국을 디자인해왔다. 일본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와 같은 살부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지 우리는 묻는다. 여전히 일본은 아버지를 찬미하고 숭배하는 나라로 머물고 있지 않은가. 


하상복 목포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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