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은이)복복서가2025

















Sales Point : 173,499

200쪽
편집장의 선택
"김영하가 당신에게 건네는 어떤 삶의 진실"
<여행의 이유> 6년 만의 신작 에세이, 이전의 그 어떤 책보다도 김영하 작가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단 한 번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 그 불확실한 여정을 두려움보다 가능성으로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유료 이메일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 2024년 연재되었던 글을 대폭 수정하고 다듬어 묶어낸 이번 에세이는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 작가의 이전 도서들과는 색다른 느낌으로 우리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게 한다.
김영하 작가는 이번 에세이를 통해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기억과 선택, 그리고 글쓰기의 의미를 차분히 탐색한다. 삶의 모호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담백한 기록에 가까운 책이다. 마치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에 선명한 여운이 남는 문장들로 가득한 이번 신간은 바쁜 일상의 틈에서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순간, 곁에 두고 오래 음미할 만한 멋진 책이다.
- 에세이 MD 도란 (2025.04.04)
출판사 제공 카드리뷰









책소개
김영하가 산문 『단 한 번의 삶』을 출간했다. 6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산문집으로, 유료 이메일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 2024년 연재되었던 글을 대폭 수정하고 다듬어 묶었다. '영하의 날씨'는 초기 구독자의 초대로만 가입이 가능한 서비스로 화제를 모으며 연재 당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단 한 번의 삶』은 작가의 지난 산문들보다 더 사적이고 한층 내밀하다. 김영하는 '작가 김영하'에서 벗어나,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가만히 말을 건넨다. 열네 편의 이야기에 담긴 진솔한 가족사와 직접 경험한 인생의 순간을 아우르는 깊은 사유는 우리를 멈춰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는가. 생각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내 앞에 놓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책은 독자들에게 쉬운 위로나 뻔한 조언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담담히 풀어낸 솔직한 경험과 고민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단 한 번의 삶』과 함께, 두고 온 시절에서 발견한 자기 삶의 장면들을 기록해보길 권한다.
"원래 나는 '인생 사용법'이라는 호기로운 제목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내가 인생에 대해서 자신 있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내게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뿐."
목차
일회용 인생
엄마의 비밀
아이와 로봇
야로의 희망
우물 정 자 천 개
기대와 실망의 왈츠
테세우스의 배
모른다
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
이탈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무용의 용
인생의 그래프
도덕적 운
어떤 위안
후기와 감사 그리고 '인생 사용법'
책속에서
P. 21 그날의 빈소는 마치 소설의 반전과도 같았다. 반전은 독자의 선입견과 자만심을 통렬히 일깨우면서 이야기 전체와 인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극적 장치로, 그날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엄마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별로 알고 있는 게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문 채 이 세상을 떠났고, 그럼으로써 내게는 제한된 정보만으로 독자가 적극적으로 상상해내야 하는, 소설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접기
P. 197 원래 나는 '인생 사용법'이라는 호기로운 제목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내가 인생에 대해서 자신 있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내게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뿐, 그리고 소로의 단언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이 '단 한 번의 삶'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적기로 했다. 일단 적어놓으면 그 안에서 눈이 밝은 이들은 무엇이든 찾아내리라. 그런 마음으로 써나갔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때로 어떤 예감을 받을 때가 있다. 아, 이건 이 작가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로구나. 내겐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그런 책을 너무 일찍 쓴 것은 아닌가 두렵기도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세상으로 내보내고, 나는 또 미래의 운을 기다려야 한다. 접기
P. 21 인생은 중간에 보개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접기
P. 31 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동료들이 주는 이런 의례마저 없다면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우울한 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접기
P. 20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런 상태로 우리는 닥쳐오는 인생의 무수한 이벤트를 겪어나가야 하고 그리하여 삶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부조리로 남아 있게 된다. 이 부조리에다 끝내 밝혀지지 않은 어떤 비밀들, 생각지도 않은 계기에 누설되고야 마는,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비밀들까지 더해진다. 접기
P. 29 그러나 영어반 시절에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장면은 역시 유인물을 넘겨주며 내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던, 전교 학생회장의 ‘부드러운 적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접기
P. 31 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동료들이 주는 이런 의례마저 없다면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시 작된 사건이라는 우울한 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접기
그날의 빈소는 마치 소설의 반전과도 같았다. 반전은 독자의선입견과 자만심을 통렬히 일깨우면서 이야기 전체와 인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극적 장치로, 그날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엄마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별로 알고 있는 게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문채 이 세상을 떠났고, 그럼으로써 내게는 제한된 정보만으로 독자가 적극적으로 상상해내야 하는, 소설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접기
원래 나는 ‘인생 사용법‘이라는 호기로운 제목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내가 인생에 대해서 자신 있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내게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뿐, 그리고 소로의 단언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이 ‘단 한 번의 삶‘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적기로 했다. 일단 적어놓으면 그 안에서눈이 밝은 이들은 무엇이든 찾아내리라. 그런 마음으로 써나갔다. 접기
P. 11 인생이 일회용인 것도 힘든데, 그 인생은 애초에 공평치않게, 아니 최소한의 공평의 시늉조차 없이 주어졌다. 생이그렇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어떻게든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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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영하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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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편소설로 『작별인사』 『살인자의 기억법』 『검은 꽃』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빛의 제국』 『아랑은 왜』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소설집으로 『오직 두 사람』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호출』이 있고, 산문 『단 한 번의 삶』 『여행의 이유』 『오래 준비해온 대답』 『다다다』 등을 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살며 여행, 요리, 그림 그리기와 정원 일을 좋아한다.
수상 : 2018년 오영수문학상, 2015년 김유정문학상, 2012년 이상문학상, 2007년 만해문학상, 2004년 동인문학상, 2004년 이산문학상, 2004년 황순원문학상, 1999년 현대문학상, 1996년 문학동네 작가상
최근작 : <단 한 번의 삶>,<여행의 이유 (개정증보판)>,<[북토크] <여행의 이유 (개정증보판) > 김영하 작가 북토크> … 총 136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영원히 쓰고 싶은 소설, <검은 꽃> - 2003.08.19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내 의지와 무관하게 시작된 삶이라는 사건
예측 불가하고 불공평하고 질서 없는 진짜 인생을 사유하다
"때로 어떤 예감을 받을 때가 있다.
아, 이건 이 작가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로구나.
내겐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의 신작 산문
-오직 한 번만 쓸 수 있는, 나의 삶에 대하여
김영하가 신작 산문 『단 한 번의 삶』을 출간했다. 6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산문집으로, 유료 이메일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 2024년 연재되었던 글을 대폭 수정하고 다듬어 묶었다. '영하의 날씨'는 초기 구독자의 초대로만 가입이 가능한 서비스로 화제를 모으며 연재 당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단 한 번의 삶』은 작가의 지난 산문들보다 더 사적이고 한층 내밀하다. 김영하는 '작가 김영하'에서 벗어나,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가만히 말을 건넨다. 열네 편의 이야기에 담긴 진솔한 가족사와 직접 경험한 인생의 순간을 아우르는 깊은 사유는 우리를 멈춰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는가. 생각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내 앞에 놓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책은 독자들에게 쉬운 위로나 뻔한 조언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담담히 풀어낸 솔직한 경험과 고민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단 한 번의 삶』과 함께, 두고 온 시절에서 발견한 자기 삶의 장면들을 기록해보길 권한다.
"원래 나는 '인생 사용법'이라는 호기로운 제목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내가 인생에 대해서 자신 있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내게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뿐."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나에게는 이 삶을 잘 완성할 책임이 있다"
그동안 김영하의 산문은 현재에 충실했다. 다녀온 모든 여행을 담은 『여행의 이유』, 시칠리아에서의 인문학적 여정을 그린 『오래 준비해온 대답』, 틀을 깨는 사유와 심층을 꿰뚫는 예리한 시선이 돋보이는 『다다다』까지. 김영하는 자신이 보고 겪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나누며 독자와 소통해왔다. 부지런히 쌓은 경험을 중심으로 사유를 펼쳐나갈 때 살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종종 자연스레 드러나기는 했으나, 자신의 인생을 직접 꺼내어 내놓은 적은 드물었다. 이번 산문에서는 '삶'이 전면에 등장한다.
모두에게 한 번씩만 주어진 기회라고 여긴다면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은 각자의 것뿐이다. 뉴스레터 연재 당시 '인생 사용법'이었던 제목은 삶에 대해 자신 있게 단언하기 어렵다는 작가의 통찰을 바탕으로 지금의 제목으로 수정되었다. 제목뿐 아니라 내용과 구성도 '평생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이야기'라는 무게감에 걸맞게 작년 8월 연재 종료 후 시간을 들여 다듬고 고쳤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빈소에서 시작된다. 알츠하이머를 앓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 숨겨온 비밀이 밝혀진다. 아버지에게 품었던 첫 기대와 실망도 돌이켜본다. 마음 한편에 그저 쌓아두었던 기억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작가는 자신의 지난 삶을 긴 호흡으로 차근차근 톺아본다. 부모와의 관계, 유년기의 기억, 학창시절의 따뜻한 적대와 평범한 환대, 성인이 된 뒤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 김영하는 특유의 담백하고 직관적인 문체로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일상적 순간들을 공유하면서, 인생이 '일회용'이라는 사실이 주는 불안과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인생의 반환점을 막 돈 1968년생 '인간 김영하'는 그럼으로써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나'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구해나간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제를 돌아보며 내일로 향하는 오늘의 기록
이야기는 자연스레 독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김영하가 자신의 기억을 정리하며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본 것처럼, 독자도 이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단 한 번의 삶'을 되새기게 된다. 그는 살아가면서 마주한 관계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 속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차분히 회고한다. 그러나 이 회고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저마다가 품고 있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길을 찾는가. 우리는 왜 어떤 선택을 했고, 하지 못했으며,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책 속 이야기는 독자가 자신의 삶을 투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어머니의 노화와 죽음을 겪으며 느꼈던 감정은 우리 각자가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이별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사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시기별 기억은 무심코 지나쳤던 지난날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하여 한때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순간들이 나의 삶을 형성해온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인생의 단 하나뿐인 선택지를 매일 만들어가며, 때로 후회하고, 가끔은 안도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단 한 번의 삶』 은 한 소설가의 회고담에 머무르지 않는다. 조언을 주거나 삶의 정답을 말해주는 대신 생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독자에게도 전한다.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한 편의 자전소설처럼 읽히기도 하는 『단 한 번의 삶』 은 이렇듯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의 고유한 삶의 에피소드를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서사적 경험을 제공한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되었는가?' 그리고 '이 단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김영하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답을 적어보았다. 이제 독자 차례다. 책장을 덮고 난 후, 자신만의 기록을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에게는 기억을 더듬고, 감정을 정리하며,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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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좀 쓰잘데기 없는 신조가 하나 있었다.
소설가, 시인의 산문집을 멀리했다.
그 소설이나 시를 그 소설이나 시로만 읽고 싶었다.
작가에 관해 알게 되는 게 싫었다.
그 작가가 그걸 '창조했고'
그 창조된 세상을 원래 있는 사실로 '그런 척'하고 싶었다.
작가가 그 세상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어떤 마음으로 창조했는지, 그걸 아는 게 그닥 달갑지가 않았다.
사실은 궁금했지만.
그러다 바뀌었다.
소설 같은 허구의 문학은 '허구'이기에 의미있다는 걸 배우고 나서다.
허구를 인정하고 허구라서 더 좋아하게 되고
드디어 소설을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감히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는 소설가의 산문집을 찾아다니며 읽는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가 데뷔에 관해 지면에서 본 적이 있다.
듣보잡 문예지에 낸 소설이 당선되지 않았는데
지금의 문학동네(그때는 우유배달소 윗층에 세들어 살던)에서 눈여겨 보았고
미팅했고 그렇게 책이 나와서 지금까지 죽 문학동네와 동고동락한다는.
그렇게 '같이 컸다'는 말이 그득하게 다가와서 떠나질 않았다.
이분은 참 의리 있구나...
중증의 치매 어머니가 젊었을 때 여군이셨단다.
그 '반전'은 그 사실을 가족에게 숨겼다는 고백에서 더 도드라졌다.
엄마는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문 채 이 세상을 떠났고
21p)
나는 이런 문장에서 울컥한다.
이전 다른 리뷰에도 썼지만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문장에서.
우린 우리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엔 도통 관심이 없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의미있다'고 떠드는 시간들에 관해서는
'공부'까지 하면서 정작 더 의미 있을 지도 모르는 '엄마의 시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엄마가 무슨 일을 했는지.
가을 바람 끝에 하늘을 쳐다보느라 우뚝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래서 엄마들은 그 시절에 관해 입을 다무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들의 이야기는 대개, '느네 아버지한테 시집와서~'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하소연.
그래서 우리는 엄마들의 그 이전이 많이들, 없는 줄 알지.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자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입을 다문 채 세상을 떠나신 작가의 어머니께 뒤늦게 명복을 빈다. 상주나 문상객은 아니지만 목울대가 아파오니 명복을 빌어드릴 감히, 조그만 자격은 받은 것 같다.
그 뒤 문장은 거짓말 안 보태고 열 번 더 읽었다.
그럼으로써 내게는 제한된 정보만으로 독자가 적극적으로 상상해내야 하는
소설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은 더욱 희미해지고 상상과 뒤섞일 것이다.
무엇이, 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했는가는 모호해질 것이다.
기억에도 반감기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일까.
그날의 빈소에서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22p)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 나는
어쩔 수 없이,
언젠가의 내 어머니 빈소를 떠올린다.
그 곳에서 할 생각 하나를 챙겼다.
젤소민아 2025-06-14 공감 (18) 댓글 (0)

대책 없이 물에서 나와 여기저기로 팔딱팔딱 뛰는 생선 같던 젊은 날의 김영하 소설을 젊은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건 작가와 내가 거의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한 세상이 약간 고개를 내밀 때, 아직은 촌스러운 낭만과 전근대적 성향이 남아 있었을 때의 김영하 소설은 다른 작가의 글과는 많이 달랐다. 한마디로 신박했다. 민족이나 모든 사람을 위한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그냥 개인이 주인공인 그의 소설이 재미있었고, 공감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김영하 글쓰기는 변화되어 갔으며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어갔다. 치열하게 살아낸 결과로 쌓인 궤적이 많지만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니 그것은 넘쳐날 수밖에 없다. 들인 공과 노력이 아깝지만 과감히 쳐내야만 한다. 특히 노년이라는 확실한 길이 보일 때, 급하게 불을 줄이고 필요 없는 것은 걷어내야 한다. 남겨야 할 것은 순수한 관조뿐이다.
김영하의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에서 그것을 보았다. 작가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많이 비워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에피소드와 다른 책의 인용이 조화로웠고, 작가다운 성실한 깊은 성찰이 있었다. 한 번씩 방송매체를 통해 본 작가가 워낙 달변이라 그가 쓴 에세이도 잘 읽힐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부모의 부재는 항상 실감되지 않는다. 평소 잊고 있다가 엉뚱한 곳에서 부모의 부재를 인식하게 되면 그때마다 슬픔을 느낀다. 이 책은 작가의 어머니의 빈소에서 시작된다. 나의 엄마와 비슷한 증상으로,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작가의 어머니 얘기에 그만 처음부터 울고 말았다.
자식은 부모의 제한된 정보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내가 인식하고 판단하는 부모는 실제와 많이 다를 것이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영정사진을 보며 내가 엄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작가 역시 어머니의 빈소에서 인생을 중간에 보게 된 영화 같다고 느낀다. 빈소에서 알게 된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소설에서의 반전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보았던 부모님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실망할 때도 있다. 특히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권위적이었고 다정하지 않았다. 작가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의 희망과 기대대로 자식은 잘 움직여주지 않는다. ‘기대와 실망의 왈츠(p.51)’가 계속 엇갈리며 반복된다. 그것이 어느 순간 서로에 의해 이해되기도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각인되고 쌓인 감정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남들이 가는 길을 절대 그대로 가지 않을 것 같은 작가 인생의 이야기에 재미있는 부분도 많다. 뭔가를 저지르고 실패하고, 다시 재도전해 성과를 내는 작가의 고집도 좋았다. 많이 읽고 많이 쓴 사람답게 평범한 것에서, 느끼고 다듬어 깊은 울림을 주는 작가의 내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내가 사는 방식, 늙음, 앞으로 가야할 방향에 대한 편안함과 용기를 얻었다. 대놓고 자기계발서라 이름 붙인 책보다 작가들의 에세이가 훨씬 더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 한번뿐인 삶에서의 ‘인생 사용법(P.194)’을 오랜만에 유쾌하게 읽고 배웠다.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십 년이 여럿 쌓였다. 할 줄 아는 것만 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도 변했다.]
-p.72
페넬로페 2025-06-06 공감 (43) 댓글 (10)

✒️ 먼저 다른 세계로 떠나신 부모님에 대한 추억과 내밀한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오래 머문다. 작가가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 아버지‘로 호칭하듯, 나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엄마와 아버지라 부른다. 그만큼 아버지와는 가까워지지 못한 채 성장했다. 돌이켜보면 엄마와도 많은 얘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젊은 시절 부모님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 등에 대해 할머니나 이모를 통해 조각처럼 들은 것이 전부다. 오랜 후에 나에 대해서도 내 아이들은 이 정도로만 기억할 것이다. 아니, 친척과의 교류가 없는 시대이기에 나의 과거에 대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얘기도 못듣게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쉬웠다. 이 글은 보게 될까.
📖 이 세상으로 나를 초대하고 먼저 다른 세계로 떠난 두 분에게
📖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동료들이 주는 이런 의례마저 없다면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우울한 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어렸을 때 나의 꿈은 어떤 직업이 아니었다. 나는 두 가지의 ‘상태‘에 이르고 싶었다. 유능과 교양. 무엇이든 잘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그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몰랐고, 알아도 줄 수 없었다. 사공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 어릴 적 나는 인생을 선불제로 생각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죽어라 공부만 하며 현재를 ‘지불‘하면 그만큼의 괜찮은 미래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내 인생은 후불제인 것 같다. 어린 날이 오히려 ‘공짜‘였고 지금은 계산을 치르는 중이고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만 같다.
📖 지금은 고전이 된 두편의 논문에서 토머스 네이글과 버나드 윌리엄스는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것이 일종의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른바 도덕적 운, Moral Luck이다. 이들은 도덕적 평가는 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과 무관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반박한다. 거칠게 말해 1930년대 독일에 살게 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치의 악행을 방관하거나 그에 가담하게 되는데, 이는 도덕이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다른 사람에게 베풀 게 많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고귀한 행위를 하기가 쉽다. 이런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흔히 ‘행복‘이라 번역되는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행복은 완전한 삶을 통해 덕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인데, 덕을 갖춘 사람이 되려면 올바른 양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행위자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니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은 운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범죄자가 되지 않고, 선량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칸트적 ‘선한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내 삶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이며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단한번의삶 #김영하 #산문 #복복서가 #일회용_인생 #인생사용법 #필멸자 #야로 #전업_독자 #사바사나 #무용 #도덕적_운 #MoralLuck #에우다이모니아 #선한_운명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머리쓰기 #글쓰기 #주말자유인
머리쓰기&글쓰기 2025-06-01 공감 (12) 댓글 (0)
평점
분포
9.0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나는 매일 나를 만들어낸다.
얼이 2025-03-27 공감 (3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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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산문을 읽는 것은 과연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왼쪽맞춤 편집에 반대합니다.
초록비 2025-05-09 공감 (24)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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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 년 넘게 좋아하는 단 두 명의 작가 중 한 명.
오월의시 2025-04-01 공감 (2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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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입니다. 이 정도의 분량의 얄팍한 책을, 그것도 이미 공개된 글들을 손보고 이 가격에 판다는 것은 출판사의 상술과 작가의 변심 (또는 변질)이 자아낸 졸작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글의 힘이 빼진 것이라면 오랜 팬(전작주의) 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건 정말 아닙니다.
닥터지바고 2025-05-05 공감 (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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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무심한듯 시크(chic)한 그가 돌연 선을 넘어 성큼 내 곁에 앉았다. 가까운 이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현재 진행형일 거친 날 것의 그 감정들을 세월이 흘러 다시금 차분히 관조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문득 이 모든게 그가 전하는 삶에 대한 위로임을 알았다.
오디션 2025-04-06 공감 (16) 댓글 (0)
마이리뷰
앞으로도 내가 좋을 예정
나는 내가 좋다.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다른 내가 될 수 없기에 나를 좋아한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음일까, 아니면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SF 소설처럼 어딘가 다른 내가 존재해 다른 삶을 산다고 상상해도 그 삶은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나는 그 삶을 좋아할 수 없다. 여기 있는 나의 삶만이 내가 아는 나의 삶이니까.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나의 삶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나의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더 좋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내 삶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뿌듯함이라고 할까. 김영하 작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인생은 일회용이다. 알고 있다. 주어진 생은 한 번뿐이고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근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런 깨달음을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에도 곧 수긍하게 된다. 내 삶이니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내 삶은 소중하니까.
고백하지만 김영하의 에세이를 기다렸다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게 좋았다. 작가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부모님의 죽음, 작가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 시간이 지나고 돌아본 20대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이 책이 아니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몰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엄마의 처녀 시절이 궁금해졌고 그 시절을 아는 이(엄마의 형제)가 단 한 분(이모) 남았다는 사실이 슬펐다. 이모와 나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인생, 알고 싶다고 느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것. 그러니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
그 모든 걸 미리 알았다고 해서, 나의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행복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알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고 알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러니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은 그의 선택은 현명하다. 혹자는 당신이 가능성을 언급했더라면 누군가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고 외부의 영향은 아주 미세하게 작용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61쪽)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건 쉽게 흥분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과거의 나보다 훨씬 수월하다. 내가 변한 것처럼 나와 연결된 이들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매번 나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던 조카가 그때 이모의 말을 이제 알겠다고 말하는 조카도. 어디 그뿐인가. 이제 내게 단 한 사람의 사랑만이 전부이고 그게 없다면 끝날 것 같은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은 소중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은 너무 많다는 걸 안다. 김영하 작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요가를 하고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고 이십 년 넘게 수동 커피 분쇄기가 있는 줄 영영 몰랐을 것이다. 대단하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가 솔직하게 들려주는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은 꽤 감동적이다. 아마도 내가 젊지 않고 늙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들이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와 있는지 속속들이 알 도리가 없다. (151쪽)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간다. 어제를 후회하고 오늘을 반성하며 내일을 기대한다. 놓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안달복달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아직 5월인데 봄은 사라진 것 같다. 아차 하는 순간, 모든 게 지나간다. 한 번뿐인 인생이 그러하듯. 내 인생만 그러하지 않다는 게 큰 위안이다. 모든 걸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시 채워 넣고 싶은 삶일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다. 그 모든 게 나의 삶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좋고 앞으로도 내가 좋을 예정이다. 단 한 번의 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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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5-05-27 공감(48)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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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으로 얻어진 순수한 관조
대책 없이 물에서 나와 여기저기로 팔딱팔딱 뛰는 생선 같던 젊은 날의 김영하 소설을 젊은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건 작가와 내가 거의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한 세상이 약간 고개를 내밀 때, 아직은 촌스러운 낭만과 전근대적 성향이 남아 있었을 때의 김영하 소설은 다른 작가의 글과는 많이 달랐다. 한마디로 신박했다. 민족이나 모든 사람을 위한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그냥 개인이 주인공인 그의 소설이 재미있었고, 공감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김영하 글쓰기는 변화되어 갔으며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어갔다. 치열하게 살아낸 결과로 쌓인 궤적이 많지만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니 그것은 넘쳐날 수밖에 없다. 들인 공과 노력이 아깝지만 과감히 쳐내야만 한다. 특히 노년이라는 확실한 길이 보일 때, 급하게 불을 줄이고 필요 없는 것은 걷어내야 한다. 남겨야 할 것은 순수한 관조뿐이다.
김영하의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에서 그것을 보았다. 작가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많이 비워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에피소드와 다른 책의 인용이 조화로웠고, 작가다운 성실한 깊은 성찰이 있었다. 한 번씩 방송매체를 통해 본 작가가 워낙 달변이라 그가 쓴 에세이도 잘 읽힐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부모의 부재는 항상 실감되지 않는다. 평소 잊고 있다가 엉뚱한 곳에서 부모의 부재를 인식하게 되면 그때마다 슬픔을 느낀다. 이 책은 작가의 어머니의 빈소에서 시작된다. 나의 엄마와 비슷한 증상으로,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작가의 어머니 얘기에 그만 처음부터 울고 말았다.
자식은 부모의 제한된 정보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내가 인식하고 판단하는 부모는 실제와 많이 다를 것이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영정사진을 보며 내가 엄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작가 역시 어머니의 빈소에서 인생을 중간에 보게 된 영화 같다고 느낀다. 빈소에서 알게 된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소설에서의 반전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보았던 부모님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실망할 때도 있다. 특히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권위적이었고 다정하지 않았다. 작가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의 희망과 기대대로 자식은 잘 움직여주지 않는다. ‘기대와 실망의 왈츠(p.51)’가 계속 엇갈리며 반복된다. 그것이 어느 순간 서로에 의해 이해되기도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각인되고 쌓인 감정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남들이 가는 길을 절대 그대로 가지 않을 것 같은 작가 인생의 이야기에 재미있는 부분도 많다. 뭔가를 저지르고 실패하고, 다시 재도전해 성과를 내는 작가의 고집도 좋았다. 많이 읽고 많이 쓴 사람답게 평범한 것에서, 느끼고 다듬어 깊은 울림을 주는 작가의 내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내가 사는 방식, 늙음, 앞으로 가야할 방향에 대한 편안함과 용기를 얻었다. 대놓고 자기계발서라 이름 붙인 책보다 작가들의 에세이가 훨씬 더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 한번뿐인 삶에서의 ‘인생 사용법(P.194)’을 오랜만에 유쾌하게 읽고 배웠다.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십 년이 여럿 쌓였다. 할 줄 아는 것만 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도 변했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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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6-06 공감(43) 댓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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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에세이를 읽는 이유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를 읽는 마음은 뭔가 좀 특별하다. 원래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싶다는 것이고 가까워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돌 사생 팬도 아닌데 작가 집 앞에 가서 무작정 커피나 한 잔 하자는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으니 그냥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하던 에세이가 나오면 우아하게 커피를 내려놓고, 그 다음은 전혀 우아하지 않게 커피를 홀짝이다가 어느 순간 소파에 드러누워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한 줄 한 줄 새겨듣듯 읽어나가는 것이다. 가장 편한 친구와 어딘가 놀러가서 맘껏 수다를 떠는 느낌이랄까? 심지어 이 수다는 일방적이다. 굳이 내가 뭔가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 작가가 알아서 일방적으로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나 그에게 궁금했던 생각을 일방적으로 이야기해준다. 나는 그저 듣기만, 아니 읽기만 하면 된다. 이 편안함을 어쩔 것이냐? 좋아하는 작가 앞에서 나는 소리내어 커피를 홀짝여도 되고 드러누워도 되고 비염에 시달리는 코도 팽팽 풀어가면서 가장 편한 포즈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니.... 심지어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는 보통 나의 생각과 코드가 잘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나의 읽기는 더욱 편해지는 것이다.몸도 마음도 모두 다.....
보통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책 읽기가 마냥 편한 것 만은 아니다. 어떤 책은 책상에 각 잡고 앉아 밑줄 긋고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읽다가 나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는 회의론에 빠져들거나, 책의 내용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울부짖거나 뭐 그런 책들이 훨씬 많다. 얼마 전에 너무 재밌게 읽었던 <삼체>도 너무 너무 좋았지만 편한 책 읽기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를 읽는 건 뭔가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는 놓치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 102쪽
작가의 말처럼 나는 어쩌면 내가 아는 나를 확인하거나,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어 에세이를 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이나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를 읽으면 그렇지 사는게 그런거야라는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 그리고 내가 그렇게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는 느낌이다. 나와 생각이 달라도 그 결이 완전히 적대적이지만 않다면-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는 그럴 일이 거의 없다- 아 나는 그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됐을텐데 왜 그랬을까라며 뭔가 더 나은 그런걸 발견한 느낌으로 내가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글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가 아는 나를 좀 더 낫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생각에 그친다 하더라도 그런 순간들이 모여 좀 더 나은 내가 언젠가는 만들어질 테니 그도 괜찮다.
어머니의 빈소에서 시작하는 이번 에세이의 글들은 이제 연로하신 부모님을 둔 내게는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사랑하지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내 부모와 나의 관계가 글을 읽는 내내 투영되었고, 나의 아이들 역시 그러하리라는,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는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책은 심각한 이야기도 사소한 이야기도, 그리고 과거도 미래도 역시 나의 일상에 닿는다.
누구든 일회용 삶을 살고 있어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간다. 그 단 한번의 삶에 좋아하는 작가가 있고, 그의 책을 읽을 수 있고, 심지어 그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에세이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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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4-28 공감(26) 댓글(0)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단 한 번의 삶』by 김영하
읽은 날 : 2025.4.6.
의도하지 않게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영원한 천국』정유정, 은행나무, 2024)를 읽고 연달아 단 한 번의 삶에 대한 글을 읽게 됐다. 정유정의 글은 읽을 책을 차례대로 줄을 세워놓았던 라인에 놓여있었고, 김영하는 김영하였기에 배송받자마자 읽은 건데 일이 참 공교롭게 그리 되었다. 삶의 이런 우연성이 나는 좋다. 일부러 그런거라면 그건 좀, 너무, 도식적이잖아.
김영하는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1995년에 등단했다. 첫 번째 산문집은 2000년 『굴비낚시』로, 영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다. 두 번째 산문집이 2002년 『포스트 잇』이다. 그 즈음부터 나는 책을 모으기 시작했기에 김영하의 에세이집이 나오는 족족 실시간으로 따라 읽었다. 나보다 9살이나 많은 작가를 나와 동시대 작가로(9살 정도면 동시대 맞나.), 나와 함께 나이 먹어가는 작가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다.
주제를 정하지 않은 진짜 산문집으론 첫 번째 권이 될 『포스트 잇』에서 김영하는 소설과 산문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평범한 인간들의 내면에 괴물이 한두 마리쯤은 숨어 있다고 늘 생각한다. 수효가 문제일 뿐, 없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괴물이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선다. 우리는 뚜벅뚜벅 지상으로 향한다. 마침내 땅 위로 올라오면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소설이라 부른다. ……
그런데 한 번 지상으로 올라온 그 괴물들은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 양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시정의 잡사에 참견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들은 그들을, 잡문 혹은 산문이라 부른다. …… 개중에는 괴물로서의 특성을 완전히 망각한 말랑말랑한 글도 있지만 아직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괴물의 축축한 글도 있다.
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4-5
25년여 전의 영하씨의 산문은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괴물의 축축한 글’이 꽤 된다. “평생 지나간 것이나 그리워하도록 되어먹은 것이 인간이라는 흉물”(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71) 이라거나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은 낭비이며 사치이며 한가한 감정놀음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나 자기는 전혀 사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잔인한 자들은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다. ‘그냥……’ 으로 시작하는 대답을 기어이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말하는 자를 한심하게 만드는 놀음을, 그들은 즐긴다.”(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123) 이라거나 “왜 문학인가? 좋다. 말해주마.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쩌자고 문학이냐, 아니면 왜 하필 문학이냐, 혹은 미쳤다고 문학이냐는 뜻이지 않은가.”(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229) 이런식이다. 시니컬하고 사납다. 소설속 정제된 언어들과 달랐다. 물론 영하씨의 초기 작품들도 이렇게 폭력적이긴 하지만. 나는 이 에세이를 읽고 “똘똘한 ‘아이’의 세상 인상기” 라는 제목을 달아 준 적이 있다. 갓 서른이 된 남자라기 보다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랬던 영하씨의 산문은 나이를 먹어가며 달라진다. 입고 있는 양복에 익숙해지고, 사회적 언어를 사용하는데 더 노련해지며 날것의 감정을 토해내는 대신 순화하고 돌려서 말하는 법도 익혔다. 갓 서른이 되었던 사람이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환갑이 멀지 않게 되는 나이까지 성장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스마트하고, 여전히 예민하지만 이제는 사용하는 언어의 질이 달라져 간다.
이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복복서가, 2025, p.77
김영하는 지금까지 산문을 통해 자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직업군인 아버지가 있고, 전업주부 어머니가 있고, 남동생이 하나 있고, 연세대를 나왔고, 부산 출신 아내와 결혼을 했고, 이걸 좋아하고 저걸 취미로 가지고 있고 블라블라블라. 아버지의 직업 덕에 매년 전학을 해야했던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첫사랑 이야기며, 대학 시절의 이야기며. 김영하에 대한 정보는 어느 글에서나 넘쳐나서 이쯤 되면 이 사람을 친근하게 느끼는 것도 인지상정일 것 같은데, 묘하게 거리를 두는 느낌이 있었다. 하긴 공인이니까, 자신의 정보를 각색하는 것도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아니, 전혀 각색되지 않은 날것의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는데도 묘하게,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사실은 하나도 듣지 않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박완서나 박경리의 글이나 인터뷰는 자신의 ‘모친’에 대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판단으로 넘쳐난다. 그것이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는지 선명하게 선이 그어질 정도로. 그런 인터뷰와 산문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김영하의 “우리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어요. 끝.” 이라는 정보는, 정보를 받았으나 받지 않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하긴,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해야할 의무는 없잖아? 그 기묘한 거리감을 나는 김영하의 세련된 처세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다 이 책을 읽고 드디어 생각했다. 음, 그랬군. 그동안 ‘정보’는 주었는데 ‘감정’은 주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 김영하의 작품과 연관 지을 선이 그어지지 않았던 거지. 이번 산문집에서 김영하는 자신의 아버지에 관하여, 그리고 어머니에 관하여 꽤나 자세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자신이 그분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마도 두 분 모두 돌아가신 뒤이기에 가능했던 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평생 쓸 일이 없겠구나. 하하하.) 어쩌면 그렇게까지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나이를 먹어가며 모서리가 좀 둥글어지는 모습일 수도 있겠고.
김영하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느끼는 김영하는 초기작을 쓸 때부터 이미 완성형의 작가였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한편 글을 쓸 때마다 나아지는 작가란, 발전하는 모습이니까 좋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음, 그건 그거대로 또 좀 별로이지 않나. 어쨌든 소설이 나아진다는 느낌보다는 소재와 주제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수는 있는 정도지 처음부터 글 진짜 잘 쓰는 작가이긴 했다. 타고난. 그래서 소설의 발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에세이를 따라가면서는 할 말이 좀 생긴다. 작가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고. 좋아하는 작가와 동시대에 함께 나이먹고 있다는 축복을 맘껏 누리는 중이다.
2025.4.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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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마 2025-04-06 공감(2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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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의 삶>˝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
평론가 앤드루 H. 밀러는 『우연한 생』에서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말을 인용한다. "누구나 수천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그중 단 한 개의 삶만 살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때 만약 그 길로 갔더라면/가지 않았더라면'으로 시작하는 상상을 통해 자주 후회에 도달한다. 진화심리학 쪽에서는 인간이 이런 후회를 자꾸 하도록 진화한 이유가 과거의 실수를 반성함으로써 미래에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그런 개체가 더 잘 살아남았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런 실용적인 설명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살아보지 않은 삶'을 상상하는 데는 더 근원적인 동기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187~188쪽)
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레에 나쁜
결과와 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은 그 어떤 전략적 고려보다 우선하고, 살지 않은
삶에 대한 고찰은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찾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앤드루 H. 밀러, 『우연한 생』, 방진이 옮김,지식의편집,2021,29쪽
김영하 작가의 내밀하고 진솔한 가족의 이야기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인생의 순간들은 동년배로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나의 이야기인가 싶어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혹은 그 때 그 순간에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가 살아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삶들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지나간 삶은 이미 내가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영역 밖의 일이므로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임을 이미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전혀 애달파 하지도 않는다.
앤드루 H. 밀러의 문장을 읽으면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만 나라는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고 그래서 "더는 단 한번의 삶이 두렵지 않"음에 감사하게 된다. 작가의 마지막 문장에서 나도 위안을 받는다.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몰랐기에 전혀 애통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죽었음을 모를 것이고, 저 우주의 다른 시공간 어디엔가는 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위안이다."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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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5-04-06 공감(2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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