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달궁 비트 -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강동원 (엮은이),최정범한울(한울아카데미)20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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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지리산 달궁 비트>.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고 거친 단어 '빨치산'. 한국 현대사에서 이 단어는 왠지 그 발음처럼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책 제목의 '비트'는 비밀아지트의 줄임말이다. 당시 빨치산 대원들이 흔히 썼던 은어다. 이 달궁 비트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수기의 주인공 최정범은 한때 '빨치산대장'으로 불리며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혁명은 몇 년 뒤 허무하게 중단되었다. 군경에 붙잡힌 그가 택한 길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격렬하게 싸웠던 세상과 타협해 자신을 지우며 그 세상의 일부가 되는 일. 이제 그들은 산이 아닌 세상에 스며들어 갔다.
수기는 전북도당 남원군당 유격대가 몰락하기 전 2년 남짓의 짧은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왜 산에 들어갔고 어떻게 세상에 끌려 나왔는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이 기록이 그 질문에 답해 줄 것이다.
목차
구술자의 글: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
엮은이의 글: 왜 지금 최정범인가
1. 일제 강점기, 난 이렇게 살았다
소작인의 아들, 세상을 간평하다 / 열네 살, 징용, 평안도 / 징용영장, 이번에는 홋카이도로
2. 어지러운 해방정국
내가 꿈꿨던 세상 / 포고령 위반, 소년원에 수감되다 / 좌익인 줄 모르고 속아서 시집왔다?
3. 6·25 전쟁, 그 격랑 속으로
나는 인공기를 들었다 / 인민재판에 선 사람들을 구명하다 / 9·28 후퇴, 결국 빨치산의 길로
4. 우리의 아지트 지리산 달궁
회문산에서 지리산으로 /보급투쟁, 정령치를 넘고 넘어 / 아무도 우리에게 빨치산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5.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수력발전용 제너레이터를 확보하라 / 산내 해방투쟁 / 토벌군의 추격을 피해 운장산으로 / 돌고 돌아 다시 지리산으로
6. 필사의 도주
가족 상봉, 그러나 다시 산으로 / 치명적인 부상을 입다 / 피체(被逮): 안녕, 지리산!
7. 좌절, 그러나 세상 속으로 당당히
나는 전쟁포로였다 / 4년 만에 신행길에 오른 아내 / 세상과 타협하다
부록: 최정범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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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50 “워떠케 뺏겼는지도 모름서 멀 되찾았다고 좋아한다냐?”
안평오 선생의 그 말이 가슴을 때렸다. 그는 이내 우리에게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어떻게 빼앗았는지, 우리는 그때 왜 제국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국권을 빼앗겼는지 등을 막힘없이 설명해줬다. 그가 나를 따로 불렀다.
“최정범, 니는 더 알고 싶냐?”
“예, 참말로 궁금혀 죽겠구만이라우.”
“그러믄 서당 공부 끝나고 우리 집으로 오니라.” _ 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접기
P. 58~59 교육은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워낙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연찬(硏鑽)해 앎을 쌓아온 선각자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히 내 가슴속에 똬리를 틀었다. 교관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기본 모순을 알려주면서,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계급이 임금노동자와 농민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폐단을 설파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어렸을 적에 품었던 ‘지주와 소작인’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꾸 떠올랐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나라는 적어도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슴속에 새겼다. _ 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접기
P. 59 ‘공산주의를 제대로 실천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서로 많이 갖겠다고 탐욕을 부리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자리를 잡으면 지금처럼 뼈 빠지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적당히 일하고 평등하게 즐기면서 살 수 있을 것이며 지주도 소작인도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세상이 아니겠는가!’ _ 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접기
P. 168~169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가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여기 남겠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의용경찰도 아니고 명색이 군인이 빨치산 쪽에 남겠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럼 우리하고 같이 빨치산 투쟁을 하겠다는 것이오?”
“지금 이대로 돌아가 봤자 총까지 빼앗겼으니 문책당할 게 뻔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받아주십시오.”
알고 보니 그들은 말이 군인이지, 경상도에서 징발당해 총 쏘는 요령만 속성으로 배워 군대에 편입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빨치산 부대에 들어와 최후까지 따라다닌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_ 제5장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접기
P. 170 중간점검을 할 때마다 대원의 수가 줄었다. 기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도중에 낙오했다. 중화기를 들고 행군하던 대원 중 일부는 몰래 무기를 갖고 군경에 자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토벌군의 공세가 나날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사상무장이 덜 된 대원들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탈을 이해했다. _ 제5장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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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강동원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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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전북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602번지에서 출생했다. 덕과초등학교, 남원용성중학교, 전주상업고등학교(현 전주제일고)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김대중 공동의장 비서, 1987년 평화민주당 재정국장, 1991년 전북도의회 의원,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후원회 사무총장,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조직특보 겸 전북본부장, 2003년 개혁당 전북도당 상임대표, 2010년 국민참여당 종로지역위원장을 지냈다. 2007년 농수산물유통공사 상임감사 시절 ‘전자감사시스템’을 개발하고 발명특허를 출원해 참여정부의 공공기관 혁신을 주도했다. 2008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한국의 인탑스(주)가 투자한 ‘아로-프리모리에’ 초대 사장으로 2년간 해외농업에 종사했다. 2011년 통일부 신진학자, 상지대학교 북방농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통일한국의 식량문제를 연구했다.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전북 남원·순창).
논문으로 「남북이 상생하는 농업협력 방안 연구」(2007),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농업협력 방안 연구」(2011) 등 다수가 있다. 지은 책으로 <제가 바로 무능한 낙하산입니다>(2007), <통일농업 해법 찾기>(2008, 공저), <공기업 판도라의 상자 1·2>(2009), <철밥통 공기업>(2011), <연해주 농업 진출의 전략적 접근>(2015)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지리산 달궁 비트>,<연해주 농업 진출의 전략적 접근 (반양장)>,<지리산 달궁 비트 (양장)> … 총 8종 (모두보기)
최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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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일제에 의해 두 차례 징용지로 끌려갔다. 징용을 마치고 돌아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뒤 조선노동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했으며,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군 장교 이상윤 등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남원군당 작전부장, 1사단 참모장 등의 직책을 맡아 빨치산 유격대원을 통솔해 ‘빨치산대장’이라고 불렸다. 1953년 봄, 경찰 토벌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때 체포되어 전범 등급 ‘을’을 받았으나 얼마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2016년 현재는 남원군 고향 마을에서 아내와 농사를 짓고 있다. 접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나는 세상과 타협한 빨치산입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기록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고 거친 단어 ‘빨치산’. 한국 현대사에서 이 단어는 왠지 그 발음처럼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책 제목의 ‘비트’는 비밀아지트의 줄임말이다. 당시 빨치산 대원들이 흔히 썼던 은어다. 이 달궁 비트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수기의 주인공 최정범은 한때 ‘빨치산대장’으로 불리며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혁명은 몇 년 뒤 허무하게 중단되었다. 군경에 붙잡힌 그가 택한 길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격렬하게 싸웠던 세상과 타협해 자신을 지우며 그 세상의 일부가 되는 일. 이제 그들은 산이 아닌 세상에 스며들어 갔다.
수기는 전북도당 남원군당 유격대가 몰락하기 전 2년 남짓의 짧은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왜 산에 들어갔고 어떻게 세상에 끌려 나왔는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이 기록이 그 질문에 답해 줄 것이다.
자신을 지워가는 노병들
“최정범 씨, 세상이 달라진 것 몰라요?” 1961년 5월의 어느 날, 일단의 사복경찰이 들이닥쳐 최정범을 잡아갔다. 일개 제방공사 현장감독으로 있던 그는 영문을 모른 채 묵묵히 경찰의 뒤를 따라나섰다.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혹시 모를 내란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주요 인물들을 위험인물로 재분류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내란 초기 며칠 동안 구치소에 유폐시켰다. 이른바 ‘예비검속’이었다. 예비검속 대상자 명단에는 최정범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의 이름 비고란에는 ‘전직 빨치산 간부’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한때 빨치산은 호시탐탐 국가 전복을 시도하던 위협적인 존재였다. 쿠데타 당시 빨치산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지만 이제 막 권력을 손에 쥔 군부에게 과거 빨치산 활동을 한 ‘불순분자’들은 여전히 두려운 ‘적’이었다. 그가 밤중에 끌려간 구치소 라디오에서는 박정희 군부의 ‘혁명공약’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본격적인 반공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제 다시 한 번 빨치산 전사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군부에 의해 핍박을 당해야 했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최정범을 비롯한 수많은 빨치산 노병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여당 후보의 선거를 돕거나 삐라를 돌려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 녹아 들어가 그토록 타도하려고 했던 그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에 동원되어 삐라를 돌리던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최정범의 술회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전선에서 총성이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된 직후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그동안 내가 인정하기 싫어 투쟁했던 질서 속으로 온전하게 유입되었다. _ 230쪽
흥미롭게도 당시 내가 선거운동을 하고 돌아다녀야 했던 곳은 주천, 산내, 아영, 운봉, 동면, 이백, 산동, 보절 등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절에 보급투쟁을 다녔던 지역들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타도하려고 투쟁했던 남쪽 정가의 보수 정치인에게 표를 달라고 떠들면서 그런 지역들을 누비고 다녔으니 완전한 자기모순이었다. _ 245쪽
그래도 그때는 죽창이라도 있었다
최정범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자화상이다. 간평일이 되면 마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굽실거리던 부모의 표정이 그가 만난 세상의 첫 얼굴이었다. 그 시절 열에 아홉은 굶주리고 헐벗은 소작농이었다.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고 눈치가 빠른 이들은 재빨리 지주에게 붙어 중간에서 착취자 구실을 하며 지주의 손발이 되었다. 가진 것도 없고 눈치도 없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1년간의 소출이 결정되는 간평일이 되면 손발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어린 최정범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엉망이었다.
이런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조선 반도 천지에 널린 수많은 어린 ‘최정범들’의 일상 세계를 지배했던 사회경제적 조건이었다면, 친일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인정하며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최정범이 속한 정치 세계의 본질이었다.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러 가지 정략적인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오히려 친일파를 우대했다. 일제의 경시서는 경찰서라는 이름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곳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하고 구타했던 경찰관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그들의 곤봉과 수갑은 가난한 평민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될 터였다. 친일을 했던 이들은 다시 기용되어 경찰이 되었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백면에도 경찰지서가 생겼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빌붙어 경찰 노릇을 하던 자들을 대부분 그대로 다시 기용해 각 지서에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인민위원회가 지하로 숨어들자 대한독촉을 포함한 우익단체의 행동대원들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거침없이 활보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찰에서도 인민위원회에 가담해 활동했던 사람들을 포고령 위반 명목으로 잡으러 다니느라 혈안이었다. _ 61쪽
최정범에게, 아니 그 시절 빨치산으로 입산한 수많은 공산주의자에게 그 모습은 견딜 수 없이 역겹고 슬픈 현실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을 피해, 자유당을 피해, 제국주의를 피해 지리산에 들어갔다. 지리산의 거대한 생태계 안에서 그들은 자율적인 질서를 구축해 수년간 연명했다. 춥고 배고팠지만 그들에겐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엔 누가 쥐어준 것이 아닌, 스스로 깎아 만든 죽창이 들려 있었다.
입산: 지리산 달궁 비트
그러나 최정범은 공산주의 이론가는 아니었다. 단단한 사상 무장과 바위 같은 이론이 그에겐 없었다. 남들보다 좀 더 오래 걷고 빠르게 숲을 오갈 수 있는 튼튼한 심장과 두 다리를 지녔을 뿐이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그 소득을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갖는 사회. 이 단순한 명제를 실현할 사상은 사회주의 말고는 없었다. 당시 평범한 절대다수의 생각과 동일했다. 최정범이 산에 들어간 이유도 평범했다.
이런 그가 지리산에 입산해 활동한 시기는 6·25 전쟁 직후 몇 년간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거의 모든 빨치산이 그 시기에 처음 등장했고 사라졌다. 한때 우파 정권의 존립을 위협했던 가장 불온한 세력이었던 빨치산은 그들의 치명성만큼이나 빠르고 신속하게 소멸했다. 남원과 하동군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아 있는 지리산은 그 격렬한 몇 년 동안 빨치산들의 든든한 보금자리였다. 최정범은 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유격대를 이끌고 2년 남짓 ‘보투’를 지휘했다.
“갑시다.” “어디로요?” “어디든 일단 왔던 길로 다시 갑시다!” 우리는 다시 뱀사골 쪽으로 향했다. 또다시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의미도 목표도 희망도 찾을 수 없이, 그저 떠밀려 가는 행군이었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_180쪽
그는 그 투쟁 동안 세 번의 총상을 입었으며 그중 한 발은 그의 발목 복숭아뼈를 산산조각냈다. 그들의 혁명 역시 조각난 복숭아뼈처럼 흔적도 없이 뭉개졌다. 빨치산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역사가 되었다.
하찮고 쓸모없는 수기
전후 미소양국의 대립 속에서 한반도에는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통일보다는 두 세력이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긴장감이 강요되었다. 그렇게 남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청산하지 못한 채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요란스럽게 출범했다. 빨치산들은 스스로를 세상에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삶을 이어갔다. 우리에게 빨치산의 역사는 극렬하고 광신적이었던 이교도의 모습을 한 박물관의 전시물이거나 그런 것이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거리는 ‘없는 존재’일 뿐이다.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고 거친 ‘빨치산’이라는 단어처럼 그들의 역사는 왠지 한국 현대사에서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 촌스럽고 빛바랜 두 단어가 이 책의 주제다. 우리에게 이 두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식상하다. 첫째는 우리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제 어느 누구도 평등과 자유라는 가치가 현실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 익명의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차별 없이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하지만 2016년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야권의 주요 정치인이 종북 프레임에 걸려 출마권을 박탈당하거나 시민단체의 건실한 청년이 빨갱이라는 별명을 얻고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일상이다.
‘오른쪽’의 세상에서 최정범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빨치산 노병의 삶을 복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백해무익한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최정범의 수기를 읽음으로써 갈무리되지 않은 한국사의 민낯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가 과거에 비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아니 오히려 더 평등하지 못한 세상으로 차갑게 얼어붙었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것이 독자에게 이 하찮고 쓸모없는 수기를 권하는 이유다.
※ 지리산 달궁 비트
지리산은 6·25 전쟁을 전후로 해 전라도 지역의 빨치산들이 머무르며 투쟁을 벌였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달궁은 김지회(金智會)와 홍순석(洪淳錫)이 토벌군에 쫓겨 숨어든 은신처였고, 전후에는 지리산빨치산 남원군당이 은거한 아지트였다. 지리산 달궁 비트에서 ‘비트’는 비밀아지트를 줄인 말이다. 당시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지명 뒤에 ‘트’ 자를 붙여 ‘뱀사골트’, ‘달궁트’라고 불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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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달궁 비트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저자최정범 (구술) , 강동원 (엮음)출판한울 | 2016.5.15
책소개
빨치산대장 최정범의 일대기 [지리산 달궁 비트]. 전북도당 남원군당 유격대가 몰락하기 전 2년 남짓의 짧은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왜 산에 들어갔고 어떻게 세상에 끌려 나왔는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이 기록이 그 질문에 답해 줄 것이다.
저자 : 최정범 (구술)
구술자 최정범(崔正範)은 1928년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일제에 의해 두 차례 징용지로 끌려갔다. 징용을 마치고 돌아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뒤 조선노동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했으며, 이듬해 6ㆍ25 전쟁이 터지자 북한군 장교 이상윤 등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남원군당 작전부장, 1사단 참모장 등의 직책을 맡아 빨치산 유격대원을 통솔해 ‘빨치산대장’이라고 불렸다. 1953년 봄, 경찰 토벌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때 체포되어 전범 등급 ‘을’을 받았으나 얼마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현재는 남원군 고향 마을에서 아내와 농사를 짓고 있다.
저자 : 강동원 (엮음)
엮은이 강동원(姜東遠)은 1953년 전북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602번지에서 출생했다.
덕과초등학교, 남원용성중학교, 전주상업고등학교(현 전주제일고)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김대중 공동의장 비서, 1987년 평화민주당 재정국장, 1991년 전북도의회 의원,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후원회 사무총장,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조직특보 겸 전북본부장, 2003년 개혁당 전북도당 상임대표, 2010년 국민참여당 종로지역위원장을 지냈다. 2007년 농수산물유통공사 상임감사 시절 ‘전자감사시스템’을 개발하고 발명특허를 출원해 참여정부의 공공기관 혁신을 주도했다.
2008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한국의 인탑스(주)가 투자한 ‘아로-프리모리에’ 초대 사장으로 2년간 해외농업에 종사했다. 2011년 통일부 신진학자, 상지대학교 북방농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통일한국의 식량문제를 연구했다.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전북 남원ㆍ순창).
논문으로 「남북이 상생하는 농업협력 방안 연구」(2007),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남ㆍ북ㆍ러 농업협력 방안 연구」(2011) 등 다수가 있다. 지은 책으로 『제가 바로 무능한 낙하산입니다』(2007), 『통일농업 해법 찾기』(2008, 공저), 『공기업 판도라의 상자 1ㆍ2』(2009), 『철밥통 공기업』(2011), 『연해주 농업 진출의 전략적 접근』(2015)이 있다.
목차
구술자의 글: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
엮은이의 글: 왜 지금 최정범인가
1. 일제 강점기, 난 이렇게 살았다
소작인의 아들, 세상을 간평하다 / 열네 살, 징용, 평안도 / 징용영장, 이번에는 홋카이도로
2. 어지러운 해방정국
내가 꿈꿨던 세상 / 포고령 위반, 소년원에 수감되다 / 좌익인 줄 모르고 속아서 시집왔다?
3. 6ㆍ25 전쟁, 그 격랑 속으로
나는 인공기를 들었다 / 인민재판에 선 사람들을 구명하다 / 9ㆍ28 후퇴, 결국 빨치산의 길로
4. 우리의 아지트 지리산 달궁
회문산에서 지리산으로 /보급투쟁, 정령치를 넘고 넘어 / 아무도 우리에게 빨치산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5.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수력발전용 제너레이터를 확보하라 / 산내 해방투쟁 / 토벌군의 추격을 피해 운장산으로 / 돌고 돌아 다시 지리산으로
6. 필사의 도주
가족 상봉, 그러나 다시 산으로 / 치명적인 부상을 입다 / 피체(被逮): 안녕, 지리산!
7. 좌절, 그러나 세상 속으로 당당히
나는 전쟁포로였다 / 4년 만에 신행길에 오른 아내 / 세상과 타협하다
부록: 최정범 연보
책 속으로
“워떠케 뺏겼는지도 모름서 멀 되찾았다고 좋아한다냐?”
안평오 선생의 그 말이 가슴을 때렸다. 그는 이내 우리에게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어떻게 빼앗았는지, 우리는 그때 왜 제국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국권을 빼앗겼는지 등을 막힘없이 설명해줬다. 그가 나를 따로 불렀다.
“최정범, 니는 더 알고 싶냐?”
“예, 참말로 궁금혀 죽겠구만이라우.”
“그러믄 서당 공부 끝나고 우리 집으로 오니라.” _50쪽, 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교육은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워낙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연찬(硏鑽)해 앎을 쌓아온 선각자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히 내 가슴속에 똬리를 틀었다. 교관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기본 모순을 알려주면서,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계급이 임금노동자와 농민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폐단을 설파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어렸을 적에 품었던 ‘지주와 소작인’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꾸 떠올랐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나라는 적어도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슴속에 새겼다. _58~9쪽, 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공산주의를 제대로 실천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서로 많이 갖겠다고 탐욕을 부리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자리를 잡으면 지금처럼 뼈 빠지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적당히 일하고 평등하게 즐기면서 살 수 있을 것이며 지주도 소작인도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세상이 아니겠는가!’ _59쪽, 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가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여기 남겠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의용경찰도 아니고 명색이 군인이 빨치산 쪽에 남겠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럼 우리하고 같이 빨치산 투쟁을 하겠다는 것이오?”
“지금 이대로 돌아가 봤자 총까지 빼앗겼으니 문책당할 게 뻔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받아주십시오.”
알고 보니 그들은 말이 군인이지, 경상도에서 징발당해 총 쏘는 요령만 속성으로 배워 군대에 편입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빨치산 부대에 들어와 최후까지 따라다닌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_168~9쪽, 제5장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중간점검을 할 때마다 대원의 수가 줄었다. 기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도중에 낙오했다. 중화기를 들고 행군하던 대원 중 일부는 몰래 무기를 갖고 군경에 자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토벌군의 공세가 나날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사상무장이 덜 된 대원들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탈을 이해했다. _170쪽, 제5장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한쪽에서 소동이 일었다. 대원 한 사람이 급한 마음에 녹인 홍시 두 개를 허겁지겁 먹다가
그만 기도가 막혀 쓰러진 것이었다.
“엎드리게 해서 등을 두드려!”
“간호원 동무들, 어떻게 좀 해봐!”
그러나 홍시에 막혀버린 기도를 뚫을 방도가 달리 없었다. 결국 그 대원은 두어 시간 만에 맥이 끊겼다. 이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출신 전사였다.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 가족은 어찌 되는지, 어떤 경로로 인민군 전사가 되었고 낙동강전투에서는 어떻게 싸웠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가 왜 후퇴하는 행렬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지 않고 빨치산 부대에 남아 지리산의 험곡(險谷)을 전전했는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_177~8쪽, 제5장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갑시다.”
“어디로요?”
“어디든 일단 왔던 길로 다시 갑시다!”
우리는 다시 뱀사골 쪽으로 향했다. 또다시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의미도 목표도 희망도 찾을 수 없이, 그저 떠밀려 가는 행군이었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_180쪽, 제5장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우리는 정신없이 달려서 재를 넘은 다음, 눈 쌓인 갈대밭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곳에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우리가 엉덩이로 갈대를 눕히면서 내려왔기 때문에 가속도가 붙어서 기가 막히게 잘 미끄러졌다. 내 생애 그렇게 신나는 썰매를 타본 적은 없었다. 토벌대의 초소로부터 한참이나 아래쪽의 평지에 나란히 도착한 우리는 한동안 그대로 누워서 그 기묘한 썰매 타기의 여운을 느꼈다.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고서 쿡쿡거리며 웃었다. _183쪽, 제5장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출판사서평
“나는 세상과 타협한 빨치산입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기록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고 거친 단어 ‘빨치산’. 한국 현대사에서 이 단어는 왠지 그 발음처럼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책 제목의 ‘비트’는 비밀아지트의 줄임말이다. 당시 빨치산 대원들이 흔히 썼던 은어다. 이 달궁 비트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수기의 주인공 최정범은 한때 ‘빨치산대장’으로 불리며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혁명은 몇 년 뒤 허무하게 중단되었다. 군경에 붙잡힌 그가 택한 길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격렬하게 싸웠던 세상과 타협해 자신을 지우며 그 세상의 일부가 되는 일. 이제 그들은 산이 아닌 세상에 스며들어 갔다.
수기는 전북도당 남원군당 유격대가 몰락하기 전 2년 남짓의 짧은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왜 산에 들어갔고 어떻게 세상에 끌려 나왔는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이 기록이 그 질문에 답해 줄 것이다.
자신을 지워가는 노병들
“최정범 씨, 세상이 달라진 것 몰라요?” 1961년 5월의 어느 날, 일단의 사복경찰이 들이닥쳐 최정범을 잡아갔다. 일개 제방공사 현장감독으로 있던 그는 영문을 모른 채 묵묵히 경찰의 뒤를 따라나섰다.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혹시 모를 내란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주요 인물들을 위험인물로 재분류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내란 초기 며칠 동안 구치소에 유폐시켰다. 이른바 ‘예비검속’이었다. 예비검속 대상자 명단에는 최정범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의 이름 비고란에는 ‘전직 빨치산 간부’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한때 빨치산은 호시탐탐 국가 전복을 시도하던 위협적인 존재였다. 쿠데타 당시 빨치산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지만 이제 막 권력을 손에 쥔 군부에게 과거 빨치산 활동을 한 ‘불순분자’들은 여전히 두려운 ‘적’이었다. 그가 밤중에 끌려간 구치소 라디오에서는 박정희 군부의 ‘혁명공약’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본격적인 반공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제 다시 한 번 빨치산 전사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군부에 의해 핍박을 당해야 했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최정범을 비롯한 수많은 빨치산 노병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여당 후보의 선거를 돕거나 삐라를 돌려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 녹아 들어가 그토록 타도하려고 했던 그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에 동원되어 삐라를 돌리던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최정범의 술회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전선에서 총성이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된 직후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그동안 내가 인정하기 싫어 투쟁했던 질서 속으로 온전하게 유입되었다. _ 230쪽
흥미롭게도 당시 내가 선거운동을 하고 돌아다녀야 했던 곳은 주천, 산내, 아영, 운봉, 동면, 이백, 산동, 보절 등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절에 보급투쟁을 다녔던 지역들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타도하려고 투쟁했던 남쪽 정가의 보수 정치인에게 표를 달라고 떠들면서 그런 지역들을 누비고 다녔으니 완전한 자기모순이었다. _ 245쪽
그래도 그때는 죽창이라도 있었다
최정범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자화상이다. 간평일이 되면 마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굽실거리던 부모의 표정이 그가 만난 세상의 첫 얼굴이었다. 그 시절 열에 아홉은 굶주리고 헐벗은 소작농이었다.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고 눈치가 빠른 이들은 재빨리 지주에게 붙어 중간에서 착취자 구실을 하며 지주의 손발이 되었다. 가진 것도 없고 눈치도 없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1년간의 소출이 결정되는 간평일이 되면 손발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어린 최정범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엉망이었다.
이런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조선 반도 천지에 널린 수많은 어린 ‘최정범들’의 일상 세계를 지배했던 사회경제적 조건이었다면, 친일파의 경제적ㆍ사회적ㆍ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인정하며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최정범이 속한 정치 세계의 본질이었다.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러 가지 정략적인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오히려 친일파를 우대했다. 일제의 경시서는 경찰서라는 이름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곳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하고 구타했던 경찰관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그들의 곤봉과 수갑은 가난한 평민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될 터였다. 친일을 했던 이들은 다시 기용되어 경찰이 되었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백면에도 경찰지서가 생겼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빌붙어 경찰 노릇을 하던 자들을 대부분 그대로 다시 기용해 각 지서에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인민위원회가 지하로 숨어들자 대한독촉을 포함한 우익단체의 행동대원들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거침없이 활보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찰에서도 인민위원회에 가담해 활동했던 사람들을 포고령 위반 명목으로 잡으러 다니느라 혈안이었다. _ 61쪽
최정범에게, 아니 그 시절 빨치산으로 입산한 수많은 공산주의자에게 그 모습은 견딜 수 없이 역겹고 슬픈 현실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을 피해, 자유당을 피해, 제국주의를 피해 지리산에 들어갔다. 지리산의 거대한 생태계 안에서 그들은 자율적인 질서를 구축해 수년간 연명했다. 춥고 배고팠지만 그들에겐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엔 누가 쥐어준 것이 아닌, 스스로 깎아 만든 죽창이 들려 있었다.
입산: 지리산 달궁 비트
그러나 최정범은 공산주의 이론가는 아니었다. 단단한 사상 무장과 바위 같은 이론이 그에겐 없었다. 남들보다 좀 더 오래 걷고 빠르게 숲을 오갈 수 있는 튼튼한 심장과 두 다리를 지녔을 뿐이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그 소득을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갖는 사회. 이 단순한 명제를 실현할 사상은 사회주의 말고는 없었다. 당시 평범한 절대다수의 생각과 동일했다. 최정범이 산에 들어간 이유도 평범했다.
이런 그가 지리산에 입산해 활동한 시기는 6ㆍ25 전쟁 직후 몇 년간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거의 모든 빨치산이 그 시기에 처음 등장했고 사라졌다. 한때 우파 정권의 존립을 위협했던 가장 불온한 세력이었던 빨치산은 그들의 치명성만큼이나 빠르고 신속하게 소멸했다. 남원과 하동군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아 있는 지리산은 그 격렬한 몇 년 동안 빨치산들의 든든한 보금자리였다. 최정범은 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유격대를 이끌고 2년 남짓 ‘보투’를 지휘했다.
“갑시다.” “어디로요?” “어디든 일단 왔던 길로 다시 갑시다!” 우리는 다시 뱀사골 쪽으로 향했다. 또다시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의미도 목표도 희망도 찾을 수 없이, 그저 떠밀려 가는 행군이었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_180쪽
그는 그 투쟁 동안 세 번의 총상을 입었으며 그중 한 발은 그의 발목 복숭아뼈를 산산조각냈다.
그들의 혁명 역시 조각난 복숭아뼈처럼 흔적도 없이 뭉개졌다.
빨치산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역사가 되었다.
하찮고 쓸모없는 수기
전후 미소양국의 대립 속에서 한반도에는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통일보다는 두 세력이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긴장감이 강요되었다. 그렇게 남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청산하지 못한 채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요란스럽게 출범했다. 빨치산들은 스스로를 세상에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삶을 이어갔다.
우리에게 빨치산의 역사는 극렬하고 광신적이었던 이교도의 모습을 한 박물관의 전시물이거나 그런 것이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거리는 ‘없는 존재’일 뿐이다.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고 거친 ‘빨치산’이라는 단어처럼 그들의 역사는 왠지 한국 현대사에서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 촌스럽고 빛바랜 두 단어가 이 책의 주제다. 우리에게 이 두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식상하다. 첫째는 우리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제 어느 누구도 평등과 자유라는 가치가 현실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 익명의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차별 없이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하지만 2016년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야권의 주요 정치인이 종북 프레임에 걸려 출마권을 박탈당하거나 시민단체의 건실한 청년이 빨갱이라는 별명을 얻고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일상이다.
‘오른쪽’의 세상에서 최정범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빨치산 노병의 삶을 복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백해무익한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최정범의 수기를 읽음으로써 갈무리되지 않은 한국사의 민낯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가 과거에 비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아니 오히려 더 평등하지 못한 세상으로 차갑게 얼어붙었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것이 독자에게 이 하찮고 쓸모없는 수기를 권하는 이유다.
※ 지리산 달궁 비트
지리산은 6ㆍ25 전쟁을 전후로 해 전라도 지역의 빨치산들이 머무르며 투쟁을 벌였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달궁은 김지회(金智會)와 홍순석(洪淳錫)이 토벌군에 쫓겨 숨어든 은신처였고, 전후에는 지리산빨치산 남원군당이 은거한 아지트였다. 지리산 달궁 비트에서 ‘비트’는 비밀아지트를 줄인 말이다. 당시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지명 뒤에 ‘트’ 자를 붙여 ‘뱀사골트’, ‘달궁트’라고 불렀다.
책속으로 추가
나와 관련한 서류 일체가 검찰로 넘어가자마자 바로 결과가 날아왔다. 기소유예 결정 통보였다. 자유의 몸으로 방면된 것이다. 1953년 초가을로 기억한다. 그해 7월 말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전선에서 총성이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된 직후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그동안 내가 인정하기 싫어 투쟁했던 질서 속으로 온전하게 유입되었다. _230쪽, 제7장 좌절, 그러나 세상 속으로 당당히
그동안 조선노동당 전북도당과 남원군당의 전사들을 위해서 보급투쟁을 해왔다면 이제부터는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예쁜 눈망울을 가진 아이의 생존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어색하고 생소했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소.”
“…….”
나는 그날 밤 아내를 향해 어렵사리 겨우 그 한마디를 뱉어냈다.
_241쪽, 제7장 좌절, 그러나 세상 속으로 당당히
한때 평등세상을 만들자고 목숨을 내걸고 투쟁했던 내가 정작 가장 평등하게 대해야 할 아내에게 남편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사실을 통렬하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_243쪽, 제7장 좌절, 그러나 세상 속으로 당당히
“자넨 왜 고단하게 야당에만 발을 담그고 있는 겐가? 우리 쪽으로 당적을 바꾸면 사회적 신분도 인정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좋아질 텐데. 자네처럼 좌익 활동 전력이 있는 사람은 일평생, 아니 자네 자식들까지 불리한 일을 겪게 된다는 걸 자네도 잘 알잖나? 보수 쪽에 붙어야 안전한 법일세!”
나는 그 정치인을 향해서 간단하게 대답해줬다. 실제로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그냥 체질이 그래서요!” _255쪽, 제7장 좌절, 그러나 세상 속으로 당당히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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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 의원, 저서 ‘지리산 달궁 비트’ 발간
남원넷조회 수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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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민주연합 강동원 의원.jpg
▲무소속 강동원 의원
현역 국회의원이 임기 말 지금은 전향해서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젊은 시절 지리산 빨치산 대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저서를 발간해 화제다.
무소속 강동원 의원(남원·임실·순창)이 19대 국회 임기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지역구인 남원에서 있었던 6.25 전쟁 당시 분단과 이념에 의해 격동의 시대의 향토사를 기록한 「지리산 달궁 비트 –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한울출판)」라는 제목의 저서를 발간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강제징용을 당하고 해방정국을 맞아 좌·우익 충돌을 겪으며 쓰라린 아픔을 경험한 한 인물에 대한 기록서다. 분단과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젊은이가 어떻게 아픈 삶을 살았는지를 기록한 내용이다.
책속의 주인공은 6·25 전쟁 당시 조선노동당 남원군당 소속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지리산 달궁을 무대로 활동했던 빨치산 대장 최정범씨다.
이 책은 철저히 최정범씨의 기억과 구술에 의존해 당시 상황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사료적 검토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고 저자 강동원 의원은 밝히고 있다.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에 관한 검증된 기초자료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이런 한계점은 안타깝게 여겨지고, 따라서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는 부문은 기술하지 않았다고 한계를 밝혔다.
저자 강동원 의원은 서문에서 “향토사 기록물을 남긴다는 차원에서 6·25 전쟁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시대상 안에서 전개된 ‘조선노동당 남원군당 유격대원들의 지리산빨치산 활동’의 특수성을 밝히려고 시도했다.
이 책은 기존의 향토사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최정범씨 개인보다는 당내를 살았던 남원사람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분단된 현실에서 빨치산은 금기의 영역이자, 그저 ‘빨갱이’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재조명할 때가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언제까지 조국 분단의 아픔이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져야 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강의원은 해방 이후 전환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치논리에 주목한다. 좌·우익 진영논리에서 전라북도 남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원은 당시 비교적 좌익 인사의 활동이 많았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남원에 소재하는 교룡산 선국사의 덕밀암에서 은거하던 수은 최제우 선생의 영향을 받았던 김개남, 장관운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최초의 농민전투를 했던 곳이 남원인데도 그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듯이 역사적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반공을 국시로 삼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빨치산과 좌익을 다루는 것은 금기의 영역이었지만 빨치산 활동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향토사 차원의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작가 이태의 ‘남부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같은 소설에서 대중에게 읽히기 시작하며 빨치산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으나 여전히 터부시해온 영역이지만 향토사차원에서 당시 기록물을 남긴다고 저서 발간배경을 밝혔다.
지리산 달궁 비트는 빨치산들의 아지트를 일컫는 말이다. 지리산은 6·25 전쟁을 전후로 해 전라도 지역의 빨치산들이 머무르며 투쟁을 벌였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 중에서도 달궁은 당시 어느 빨치산이 토벌군에 쫓겨 숨어든 은신처였고, 전후에는 지리산 빨치산 남원군당이 은거한 아지트였다.
지리산 빨치산대장이었던 최정범씨는 1928년생 전북 남원시 이백면의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일제의 의해 두 차례 징용지로 끌려갔다.
징용을 마치고 돌아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뒤 조선노동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했으며,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군 장교 이상윤 등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나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남원군당 작전부장, 1사단 참모장 등의 직책을 맡아 빨치산 유격대원을 통솔해 ‘빨치산 대장’이라고 불렸다.
1953년 봄, 경찰 토벌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때 체포되어 전범 등급 ‘을’을 받았으나 얼마 안 되어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현재는 남원시 고향마을에서 아내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최정범씨는 풀려난 후에 겪었던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과정에서 겪었던 소회도 밝히고 있다.
강동원 의원은 책 서문에서 “정치인의 기본 소양은 역사인식이다. 동·서양사는 물론이고 한국사에도 정통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태어난 향토의 역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향토사를 모르면서 무슨 비전을 제시할 수 있고 무슨 일을 추진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정치인은 스스로 향토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지리산 빨치산 대장이었던 최정범씨는 “자신이 목숨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세상과 지금의 북한 체제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전 세계의 현대국가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습체제, 다른 무엇보다 인민을 억압과 굶주림과 도탄에 빠트린 북한의 현재의 모습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잘못된 현실임이 분명하다.”라고 자신이 젊은 시절 꿈꾸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현실임을 인식했다.
젊은 시절 한때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도 오늘의 북한체제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저자 강동원 의원은 “황산대첩과 이성계, 만인의총과 정유재란, 동학농민군과 김개남, 6·25 전쟁과 빨치산, 4·19 혁명과 김주열, 춘향전·흥부전·변강쇠전·만복사저포기·김삼의당전·혼불 등이 남원의 상징이다.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판소리 등 전통문화예술의 고장 남원에서 있었던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했던 실존인물의 구술을 바탕으로 왜 이념에 휩쓸렸는지 파악하고, 역사 속에서 형성된 남원은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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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달궁 비트: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최정범 구술, 강동원 엮음)
한울엠플러스
2016. 5. 19. 15:54
이웃추가
9 한울엠플러스(주)
25. 9. 25. 오전 12:37 지리산 달궁 비트: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최정범 구술, 강동원 엮음)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hanulnew/220713931459 1/9
"나는 세상과 타협한 빨치산입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기록
“갑시다.”
“어디로요?”
“어디든 일단 왔던 길로 다시 갑시다!”
우리는 다시 뱀사골 쪽으로 향했다. 또다시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9 의미도 목표도 희망도 찾을한울엠플러스(주) 수 없이, 그저 떠밀려 가는 행군이었다.
25. 9. 25. 오전 12:37 지리산 달궁 비트: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최정범 구술, 강동원 엮음)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hanulnew/220713931459 2/9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_제5장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책소개
“나는 세상과 타협한 빨치산입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기록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고 거친 단어 ‘빨치산’. 한국 현대사에서 이 단어는 왠지 그 발음처
럼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
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책 제목의 ‘비트’는 비밀아지트의 줄임말이다. 당시 빨치산 대원들이 흔히 썼던 은어다. 이 달궁 비트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수기의 주인공 최정범은 한때 ‘빨치산대장’으로 불리며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벌였
다. 그러나 혁명은 몇 년 뒤 허무하게 중단되었다. 군경에 붙잡힌 그가 택한 길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
았다. 격렬하게 싸웠던 세상과 타협해 자신을 지우며 그 세상의 일부가 되는 일. 이제 그들은 산이 아닌
세상에 스며들어 갔다.
수기는 전북도당 남원군당 유격대가 몰락하기 전 2년 남짓의 짧은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왜 산
에 들어갔고 어떻게 세상에 끌려 나왔는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이 기록이 그
질문에 답해 줄 것이다.
_자신을 지워가는 노병들
“최정범 씨, 세상이 달라진 것 몰라요?” 1961년 5월의 어느 날, 일단의 사복경찰이 들이닥쳐 최정범을
잡아갔다. 일개 제방공사 현장감독으로 있던 그는 영문을 모른 채 묵묵히 경찰의 뒤를 따라나섰다. 쿠데
타에 성공한 군부는 혹시 모를 내란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주요 인물들을 위험인물로 재분류했
다.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내란 초기 며칠 동안 구치소에 유폐시켰다. 이른바 ‘예비검속’이었
다. 예비검속 대상자 명단에는 최정범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의 이름 비고란에는 ‘전직 빨치산 간부’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한때 빨치산은 호시탐탐 국가 전복을 시도하던 위협적인 존재였다. 쿠데타 당시 빨치산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지만 이제 막 권력을 손에 쥔 군부에게 과거 빨치산 활동을 한 ‘불순분자’들은 여전히 두려운
‘적’이었다. 그가 밤중에 끌려간 구치소 라디오에서는 박정희 군부의 ‘혁명공약’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
다. 본격적인 반공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제 다시 한 번 빨치산 전사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군부에 의해
핍박을 당해야 했다.
9 한울엠플러스(주)
25. 9. 25. 오전 12:37 지리산 달궁 비트: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최정범 구술, 강동원 엮음)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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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최정범을 비롯한 수많은 빨치산 노병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여당
후보의 선거를 돕거나 삐라를 돌려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 녹아 들어가 그토록 타도하려고 했던
그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에 동원되어 삐라를 돌리던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
었을까. 최정범의 술회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전선에서 총성이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된 직후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그동안 내가 인정하
기 싫어 투쟁했던 질서 속으로 온전하게 유입되었다. _ 230쪽
흥미롭게도 당시 내가 선거운동을 하고 돌아다녀야 했던 곳은 주천, 산내, 아영, 운봉, 동면, 이백, 산동,
보절 등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절에 보급투쟁을 다녔던 지역들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타도하려고 투쟁했
던 남쪽 정가의 보수 정치인에게 표를 달라고 떠들면서 그런 지역들을 누비고 다녔으니 완전한 자기모순
이었다. _ 245쪽
_그래도 그때는 죽창이라도 있었다
최정범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자화상이다. 간평일이 되면 마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굽실거리던 부모의 표정이 그가 만난 세상의 첫 얼굴이었다. 그 시절 열에 아홉은 굶주리고 헐벗은
소작농이었다.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고 눈치가 빠른 이들은 재빨리 지주에게 붙어 중간에서 착취자
구실을 하며 지주의 손발이 되었다. 가진 것도 없고 눈치도 없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1년간의 소출이
결정되는 간평일이 되면 손발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어린 최정범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
는 엉망이었다.
이런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조선 반도 천지에 널린 수많은 어린 ‘최정범들’의 일상 세계를 지배했던 사회경
제적 조건이었다면, 친일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인정하며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최정
범이 속한 정치 세계의 본질이었다.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러 가지 정략적인 이유로 독립운동가들
을 탄압하고 오히려 친일파를 우대했다. 일제의 경시서는 경찰서라는 이름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
곳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하고 구타했던 경찰관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그들의 곤
봉과 수갑은 가난한 평민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될 터였다. 친일을 했던 이들은 다시 기
용되어 경찰이 되었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백면에도 경찰지서가 생겼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빌붙어 경찰 노릇을
하던 자들을 대부분 그대로 다시 기용해 각 지서에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인민위원회가 지하로 숨어들자
대한독촉을 포함한 우익단체의 행동대원들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거침없이 활보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찰에서도 인민위원회에 가담해 활동했던 사람들을 포고령 위반 명목으로 잡으러 다니느라
혈안이었다. _ 61쪽
최정범에게, 아니 그 시절 빨치산으로 입산한 수많은 공산주의자에게 그 모습은 견딜 수 없이 역겹고 슬
픈 현실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을 피해, 자유당을 피해, 제국주의를 피해 지리산에 들어갔다. 지리산의 거
대한 생태계 안에서 그들은 자율적인 질서를 구축해 수년간 연명했다. 춥고 배고팠지만 그들에겐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엔 누가 쥐어준 것이 아닌,
스스로 깎아 만든 죽창이 들려 있었다.
_입산: 지리산 달궁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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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정범은 공산주의 이론가는 아니었다. 단단한 사상 무장과 바위 같은 이론이 그에겐 없었다. 남
들보다 좀 더 오래 걷고 빠르게 숲을 오갈 수 있는 튼튼한 심장과 두 다리를 지녔을 뿐이다. 그에게 사회
주의는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그 소득을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갖는 사회. 이 단순한 명제를 실현할 사상은 사회주의 말고는 없었다. 당시 평범한 절대다수의 생각과 동
일했다. 최정범이 산에 들어간 이유도 평범했다.
이런 그가 지리산에 입산해 활동한 시기는 6·25 전쟁 직후 몇 년간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거의 모든 빨치
산이 그 시기에 처음 등장했고 사라졌다. 한때 우파 정권의 존립을 위협했던 가장 불온한 세력이었던 빨
치산은 그들의 치명성만큼이나 빠르고 신속하게 소멸했다. 남원과 하동군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아 있는
지리산은 그 격렬한 몇 년 동안 빨치산들의 든든한 보금자리였다. 최정범은 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유격
대를 이끌고 2년 남짓 ‘보투’를 지휘했다.
“갑시다.” “어디로요?” “어디든 일단 왔던 길로 다시 갑시다!” 우리는 다시 뱀사골 쪽으로 향했다. 또다
시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의미도 목표도 희망도 찾을 수 없이, 그저 떠밀려 가는 행군이었다. 우리
가 당면한 과제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_180쪽
그는 그 투쟁 동안 세 번의 총상을 입었으며 그중 한 발은 그의 발목 복숭아뼈를 산산조각냈다. 그들의
혁명 역시 조각난 복숭아뼈처럼 흔적도 없이 뭉개졌다. 빨치산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역사가 되었다.
_하찮고 쓸모없는 수기
전후 미소양국의 대립 속에서 한반도에는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통일보다는 두 세력이 힘
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긴장감이 강요되었다. 그렇게 남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청산하지 못
한 채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요란스럽게 출범했다. 빨치산들은 스스로를 세상에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삶을
이어갔다. 우리에게 빨치산의 역사는 극렬하고 광신적이었던 이교도의 모습을 한 박물관의 전시물이거
나 그런 것이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거리는 ‘없는 존재’일 뿐이다.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
고 거친 ‘빨치산’이라는 단어처럼 그들의 역사는 왠지 한국 현대사에서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 촌스럽고 빛바랜 두 단어가 이 책의 주제다. 우리에게 이 두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식상하
다. 첫째는 우리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제
어느 누구도 평등과 자유라는 가치가 현실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 익명의 빨
치산 유격대원들은 ‘차별 없이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하지만 2016년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
도 없다. 야권의 주요 정치인이 종북 프레임에 걸려 출마권을 박탈당하거나 시민단체의 건실한 청년이
빨갱이라는 별명을 얻고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일상이다.
‘오른쪽’의 세상에서 최정범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빨치산 노병의 삶을 복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백해무
익한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최정범의 수기를 읽음으로써 갈무리되지 않은 한국사의
민낯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가 과거에 비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아니 오히려 더 평등하지 못한 세상으로 차갑게 얼어붙었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것이 독자에
게 이 하찮고 쓸모없는 수기를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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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달궁 비트
지리산은 6·25 전쟁을 전후로 해 전라도 지역의 빨치산들이 머무르며 투쟁을 벌였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달궁은 김지회(金智會)와 홍순석(洪淳錫)이 토벌군에 쫓겨 숨어든 은신처였고, 전후에는 지
리산빨치산 남원군당이 은거한 아지트였다. 지리산 달궁 비트에서 ‘비트’는 비밀아지트를 줄인 말이다.
당시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지명 뒤에 ‘트’ 자를 붙여 ‘뱀사골트’, ‘달궁트’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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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구술자의 글: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
엮은이의 글: 왜 지금 최정범인가
1. 일제 강점기, 난 이렇게 살았다
소작인의 아들, 세상을 간평하다 / 열네 살, 징용, 평안도 / 징용영장, 이번에는 홋카이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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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9. 25. 오전 12:37 지리산 달궁 비트: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최정범 구술, 강동원 엮음)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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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출판
발매
2. 어지러운 해방정국
내가 꿈꿨던 세상 / 포고령 위반, 소년원에 수감되다 / 좌익인 줄 모르고 속아서 시집왔다?
3. 6·25 전쟁, 그 격랑 속으로
나는 인공기를 들었다 / 인민재판에 선 사람들을 구명하다 / 9·28 후퇴, 결국 빨치산의 길로
4. 우리의 아지트 지리산 달궁
회문산에서 지리산으로 /보급투쟁, 정령치를 넘고 넘어 / 아무도 우리에게 빨치산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
다
5.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수력발전용 제너레이터를 확보하라 / 산내 해방투쟁 / 토벌군의 추격을 피해 운장산으로 / 돌고 돌아 다
시 지리산으로
6. 필사의 도주
가족 상봉, 그러나 다시 산으로 / 치명적인 부상을 입다 / 피체(被逮): 안녕, 지리산!
7. 좌절, 그러나 세상 속으로 당당히
나는 전쟁포로였다 / 4년 만에 신행길에 오른 아내 / 세상과 타협하다
부록: 최정범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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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달궁 비트
최정범
한울
2016.05.15.
지은이
최정범
1928년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일제에 의해 두 차례 징용지
로 끌려갔다. 징용을 마치고 돌아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뒤 조선노동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했으며, 이
듬해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군 장교 이상윤 등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남원
군당 작전부장, 1사단 참모장 등의 직책을 맡아 빨치산 유격대원을 통솔해 ‘빨치산대장’이라고 불렸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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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3년 봄, 경찰 토벌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때 체포되어 전범 등급 ‘을’을 받았으나 얼마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현재는 남원군 고향 마을에서 아내와 농사를 짓고 있다.
엮은이
강동원
1953년 전북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602번지에서 출생했다. 덕과초등학교, 남원용성중학교, 전주상업고
등학교(현 전주제일고)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
회 김대중 공동의장 비서, 1987년 평화민주당 재정국장, 1991년 전북도의회 의원, 1998년 새정치국민
회의 후원회 사무총장,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조직특보 겸 전북본부장, 2003년 개혁당 전북도당 상
임대표, 2010년 국민참여당 종로지역위원장을 지냈다.
2007년 농수산물유통공사 상임감사 시절 ‘전자감사시스템’을 개발하고 발명특허를 출원해 참여정부의
공공기관 혁신을 주도했다. 2008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한국의 인탑스(주)가 투자한 ‘아로-프리모리
에’ 초대 사장으로 2년간 해외농업에 종사했다. 2011년 통일부 신진학자, 상지대학교 북방농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통일한국의 식량문제를 연구했다.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전북 남원·순창).
논문으로 「남북이 상생하는 농업협력 방안 연구」(2007),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농업협력 방안
연구」(2011) 등 다수가 있다. 지은 책으로 『제가 바로 무능한 낙하산입니다』(2007), 『통일농업 해법
찾기』(2008, 공저), 『공기업 판도라의 상자 1·2』(2009), 『철밥통 공기업』(2011), 『연해주 농업
진출의 전략적 접근』(2015)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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