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esoon Park
4h ·
애국가의 작사자와 뜻을 밝힌다
박 재 순
우리는 100년이 넘도록 애국가를 부르면서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모를 뿐 아니라 애국가의 가치와 뜻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애국가 작사자 연구를 하면서 애국가 가사의 뜻을 해설한 글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나치 협력을 밝히는 책이 나오면서 애국가 폐지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무궁화는 일본 꽃인데 일제가 우리 민족의 꽃으로 만들었다는 황당한 주장이 담긴 책이 나왔고 광복회 회장이 이 책에 추천사를 쓰고 애국가 폐지에 앞장서고 있다. 애국가는 친일의 노래이며 애국가 가사에 나오는 ‘남산 위의 소나무’는 일본나무이고 ‘일편단심’은 일본천황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런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난무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당혹스럽고 한심하고 민망하다.
이렇게 된 것은 국가가 애국가를 부르라고만 하고 애국가의 작사자도 밝혀내지 못하고 애국가의 가치와 뜻을 연구하여 널리 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뿐 아니라 이 나라의 학자들, 교사들도 애국가의 작사자 연구를 하지 못하고 애국가의 의미를 탐구하여 그 깊고 아름다운 뜻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 나라의 국민도 애국가를 부르기만 했지 애국가의 작사자를 밝히고 그 뜻을 되새기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애국가는 나라를 잃었을 때 잃은 나라를 우리 가슴과 정신 속에서 지키고 되찾게 한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다. 나라를 위한 독립 운동가들과 우리 겨레의 애국심과 열정, 강인한 독립의지와 신념, 헌신과 희생이 애국가에 오롯이 담겨 있다. 한민족의 민주적 주체성과 정체성을 밝히고 세워주는 애국가는 우리 겨레가 근현대사에서 남긴 가장 아름답고 고결하고 소중한 보물이다.
1 왜 우리는 애국가 작사자를 모르게 되었을까?
1896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창립되고 애국가요 짓기 운동을 벌였고 그 때 지은 10여개 애국가요들의 가사와 작사자들이 모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학우회를 만들어 독립교육운동을 벌이고 전국에서 애국계몽강연을 하면서 안창호가 대성학교에서 그리고 전국에서 국민들과 함께 불렀던 애국가만은 작사자를 모르게 되었다. 3·1운동 때는 온 민족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사무치게 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안창호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아침 조회 때마다 직원들과 애국가를 간절하고 열렬하게 불렀다.
애국가를 부르고 보급하는 운동의 중심에 안창호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알았을 터인데,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가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왜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않았을까? 안창호 자신이 바로 애국가 작사자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자신이 부르고 보급하면 오해와 반감을 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안창호는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숨겼던 것이다.
당시 안창호는 나이 30의 청년이었으나 미국과 한국에서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과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당하던 평안도에서 가난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관직에 오른 일도 없고 학벌도 문벌도 없는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정치와 문화를 주도한 기호세력은 명문귀족과 높은 관직, 학문전통을 자랑하였고 안창호가 속한 서북세력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애국가가 안창호의 작품임을 알면 애국가를 거부하는 세력이 있을 것을 안창호는 염려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과 기호세력은 시종일관 안창호를 ‘지방열을 조장하는 야심가’로 음해하고 비난하였다. 안창호는 애국가가 작사자를 모르는 민요처럼 민중 사이에 스며들어 널리 받아들여지고 불러지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안창호는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한사코 숨기려 했던 것이다.
애국가의 기원 자체가 복잡한 인간적 역사적 문학적 관계 속에 얽혀 있다. 애국가는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무궁화가’와 글자 수가 똑 같을 뿐 아니라 후렴이 같고 곡조도 ‘올드랭 사인’으로 같다. 애국가는 당시 널리 알려진 무궁화가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노래다. 무궁화가는 독립협회 시절에 황제와 황실을 찬양하는 노래로 윤치호가 지은 것이다. 애국가는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강령으로 내세운 신민회의 정신에 맞게 한국인의 민주적 주체성과 정체성을 밝힌 노래다. 안창호는 독립협회 시절에 윤치호와 서재필을 따라 배웠으며, 독립협회의 청소년 회원들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안창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 명망가이며 기호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윤치호를 앞세울 필요가 있었다. 한국 민중과 조선왕조를 불신하고 멸시했으며 일본의 한국지배를 필연적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윤치호는 교육운동에는 열심이었으나 독립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안창호는 윤치호를 비밀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에 가입시키지는 않았으나 그가 세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으로 앞세웠다. 안창호는 윤치호를 존중하는 맘으로 그가 지은 무궁화가를 저본으로 하여 1~4절을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바꾸어 애국가를 지었다.
안창호가 윤치호의 무궁화가를 개조하여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은 안창호의 최측근 안태국,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 그리고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안창호를 가까이 모셨고 『안도산전서』를 지은 주요한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안창호는 새로운 애국가 가사를 윤치호에게 제시하면서 애국가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하자고 말하였다. 1910년대에 강원도에서 발행한 창가집에 애국가가 ‘이상준 작 윤치호 후렴작’으로 기록된 사실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후렴만 지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이 윤치호가 애국가의 후렴만을 짓고 1~4절 가사는 윤치호와 형제처럼 가까이 지낸 최병헌이 지었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윤치영도 윤치호가 애국가의 후렴만을 지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안창호가 무궁화가의 글자 수에 맞추고 무궁화가의 후렴을 가져다가 애국가를 지었지만, 애국가의 창작자는 분명히 안창호였다. 윤치호가 후렴의 저자이지만 그 후렴을 가져다가 새 노래를 지은 것은 안창호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던 안창호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윤치호도 애국가 작사자에 대하여 깊은 침묵을 지켰다. 안창호와 윤치호는 해방이 될 때까지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애국가는 한민족 사이에 널리 불러졌고 안창호 측근의 사람들은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생각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무궁화가와 애국가의 연속성을 보고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안창호와 긴밀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이심전심으로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확신하고 증언하였다.
1955년에 미국 출판사와 미국대사관에서 한국정부에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물어왔다. 처음에 문교부는 ‘안창호 작 안익태 곡’으로 통지하려고 했으나 윤치호의 가족이 문제를 제기함으로 애국가 작사자 조사 위원회를 조직하여 논의하게 하였다. 서울 대 역사학과 이병도, 국사편찬위, 국학과 인문학의 권위자 최남선, 서지학의 권위자 황의돈으로 4자위원회를 조직하여 논의케 하였으나 최남선 황의돈의 안창호설과 이병도 국사편찬위의 최병헌·윤치호 합작설로 완강하게 맞섰다. 최남선은 안창호가 조직한 청년학우회 총무로서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를 불렀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안창호설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국사편찬위와 이병도가 내세운 최병헌·윤치호 합작설은 아무런 역사문헌적 증거도 증언도 없는 허구적인 주장이었다. 이것은 안창호설을 배척하기 위해 갑자기 날조된 주장으로 여겨진다. 실증적 자료와 증거에 의존하고 집착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자인 이병도와 국사편찬위가 이런 허구적 주장을 갑자기 내세워 안창호설을 배척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4자 위원회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문교부는 국사편찬위 중심으로 백낙준, 서정주 등 친일파를 대거 끌어들여서 19인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2차 조사위원회에서 이병도와 국사편찬위는 허구적인 최병헌·윤치호 합작설을 포기하고 문헌적 근거가 있는 윤치호설을 강력히 내세웠다. 당시 생존해 있던 김인식은 자기가 애국가 작사자라고 주장했으므로 윤치호설과 김인식설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안창호설은 한 번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결국 최남선, 황의돈은 빠진 자리에서 윤치호가 유력하지만 미상으로 한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리고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논의는 끝이 났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미궁에 빠트렸지만 안창호 작사설을 배척했다는 점에서는 이승만과 그의 사주를 받은 국사편찬위에게는 성공한 결과였다.
이처럼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논의가 파국으로 흐른 것은 당시 대통령의 의중과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평생 안창호를 정치적 경쟁자와 적으로 여기고 ‘야심가이며 지방열을 조장하는 자’로 음해하고 공격하였다. 그와 그의 추중세력은 안창호가 소련과 협력하려고 했다고 미국정부에 음해하여 안창호를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하였고 들어온 다음에도 계속 음해하여 미국에서 추방되게 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한인독립운동조직을 파괴하고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었던 임시정부와 갈등과 대립을 일으켜 결국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했다. 이승만은 1954년 11월에는 불법적으로 사사오입개헌을 하여 1955년 무렵에는 영구집권을 획책하였다. 같은 시기에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서 유림에 큰 영향을 미쳤던 김창숙이 민주와 통일을 내세우며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자 이승만은 친일세력을 앞세워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교 총장의 자리서 강제로 끌어내렸다. 민주와 통일의 화신이며 겨레의 참 스승이었던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로 확립되는 것은 독재자 이승만에게는 치명적인 도전과 위협이었다. 이승만 전기를 썼던 서정주에 따르면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 분명하지만 친일의 험이 있으므로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으로 하라”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조사위원회는 ‘윤치호가 유력하지만 미상으로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애국가 작사자를 우리가 모르게 된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이병도와 국사편찬위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실증주의적 연구방법에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개별적 사실과 문헌자료에만 의존하는 실증주의적 연구방법으로는 애국가 작사자의 역사적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애국가 작사자가 잠가놓은 진실의 문은 당시 역사 사회의 전체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안창호와 윤치호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고 두 사람의 심리, 철학, 정치적 신념을 비교해보고 두 사람의 다른 애국가요들과 애국가를 비교해보면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역사가들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함석헌은 역사적 사실과 문헌증거를 넘어서 역사사회의 전체 상황을 보고 정신과 의미에 비추어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이들이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연구했다면 이들은 확실하게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증명하고 확인했을 것이다. 이들이 한국의 학문세계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같은 무리들이 학문, 교육, 문화를 지배했기 때문에 애국가 작사자의 진실을 밝히는 길이 차단되었던 것이다.
2 애국가 작사자의 증명
애국가 작사자의 진실에 이르는 문은 작사자로 알려진 안창호와 윤치호 두 사람에 의해서 굳게 잠가졌다. 안창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안태국,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김동원 등 안창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이심전심으로 암묵적으로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임을 알고 있었다. 평양에서 안창호, 윤치호와 함께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일을 했던 안태국은 윤치호의 무궁화가를 개조하여 안창호가 현행 애국가를 지었음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애국가와 무궁화가의 형식적 연속성 때문에 그리고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에 애국가가 실려 있기 때문에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고 넘겨짚은 사람들도 있었다.
현대문헌비평학은 문헌자료들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에 비로소 문헌자료들의 증거능력을 인정한다.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표기한 이러한 2~3차의 문헌자료들은 현대 문헌비평학의 엄격한 검토와 비판적 평가를 통과할 수 없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모든 증언들과 문서들을 종합적으로 비교하고 판단하면 안창호가 윤치호의 무궁화가를 개조하여 애국가를 지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애국가를 짓고 부르던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면 윤치호가 아니라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윤치호는 일본과 미국에서 오래 유학한 지식인 명망가였고 부유한 명문집안 출신으로 고위관료를 지낸 엘리트였다. 그는 문명부강을 최고의 가치로 보고 문명개화를 이루지 못한 조선민족과 민중을 불신하고 멸시했다. 무능하고 게으른 조선민중과 정부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필연과 운명으로 받아들였으며 미개한 독립국이 되는 것보다 문명국인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는 문명 부강한 국가의 국력 ‘칼’이 지배하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다. 그는 언제나 현실 상황에 순응할 뿐 현실 상황에 맞서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민중교육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일제의 힘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1905년 이후에는 애국가요를 한 편도 짓지 않았다. 그가 지은 애국가요 ‘한국’, ‘무궁화가’는 그가 독립협회 운동을 주도했던 1897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1905년 이후 윤치호는 독립운동을 할 생각과 의지가 없었다. 따라서 한국민중(한국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어떤 어려운 상황과 조건에서도 나라를 지키고 바로 세울 결의를 다지고 되새기는 애국가를 윤치호가 지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안창호는 평안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독립협회에서 서재필, 윤치호에게 배웠지만 그는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미국에서 한인동포들을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해서 유학을 중단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을 깨워 일으켜서 공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 민중을 깨워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비밀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나라를 구하고 독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언제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어떤 강한 세력과도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윤치호가 주어진 자연과 상황에 순응하는 자연주의, 상황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면, 안창호는 자연 조건과 사회 상황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초자연적 정신주의, 초월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윤치호의 애국가요 ‘한국’, ‘무궁화가’는 황제와 황실을 찬양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자연주의에 머물러 있다면 애국가 1~4절은 자연과 현실상황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정신주의를 견지하고 있다. 애국가의 이러한 정신적 초월주의는 윤치호에게는 전적으로 없는 것이지만 안창호는 한결같이 간직하고 지켜간 것이다.
안창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민중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면 애국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 도쿄에 들렀을 때 안창호는 존경하던 유길준을 만나서 애국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노래를 짓는 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런데 애국가는 유길준이 1895년에 지은 ‘독립경절가’ 6~8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애국가와 독립경절가의 형식과 운율은 전혀 다르지만 용어, 내용, 정신은 거의 일치한다. 독립경절가 6~8절에 나오는 ‘장백산(백두산)과 동해물’, ‘우리 국민의 기염(氣焰)’, ‘우리 국민의 진심(眞心)’, ‘이 기염 이 진심(의 강한 힘)으로 우리임금을 지키세’는 각각 현행애국가 1절의 ‘동해물과 백두산’ 2절의 ‘우리 기상’, 3절의 ‘우리가슴 일편단심’, 4절의 ‘이 기상과 이맘으로 님군을 섬기며’와 상통한다. 애국가와 독립경절가의 이런 일치와 상통은 애국가 작사자가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에서 자극과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윤치호는 유길준을 정치적 학문적 경쟁자와 적으로 여기고 유길준에 대한 깊은 불신과 미움을 그의 일기에서 거듭 밝혔다. 유길준은 윤치호와는 달리 민족 주체적인 문명개화를 추구했고 국민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군주와 민이 함께 다스리는 군민공치(君民共治)를 주장하였다. 안창호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큰 영향을 받고 유길준을 한국근현대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존경하였다.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의 이름을 가져다가 안창호는 미국에서 수양과 독립운동의 단체로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안창호는 윤치호의 ‘무궁화가’를 형식적으로 계승하고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를 내용적으로 계승하여 애국가를 지었던 것이다.
3 애국가의 가치와 의미
애국가는 안창호의 삶과 정신에서 태어난 것이다. 애국가에는 안창호의 정신과 사상이 아로새겨 있다.
애국가에 담긴 안창호의 사상 ‘무실역행 충의용감’
애국가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청년학우회와 흥사단의 이념과 정신 ‘무실역행 충의용감’이 담겨 있다. ‘무실(務實)’은 진실에 충실하자는 말이다. 생명의 진실은 생명의 속알이 알차게 차오르는 것, ‘알 참’이다. 참은 생명의 속알, 정신에 충실한 것이다. 생명의 거짓(거즛, 거죽)은 거죽 껍질, 물질에 매인 것이다. 진실에 충실하자는 것은 삶의 껍질인 물질에 매이지 않고 삶의 속알인 정신과 뜻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1절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삶의 껍질인 물질, 환경에 매이지 않고 삶의 알맹이인 정신과 뜻에 충실하자는 무실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몸과 맘이 마르고 닳도록 지극 정성을 다해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자는 것이다.
2절 바람서리에도 변함없는, 철갑을 두른 소나무의 기상은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와 도전에도 꿋꿋하게 자기를 지키고 나아가는 용감을 나타낸다. 용감한 사람은 철갑을 두른 소나무처럼 환경과 조건의 변화와 도전을 꿋꿋하게 이겨내며 기운차게 나아간다. 2절은 용감한 도산의 기개와 정신, 삶과 행동을 보여준다. 3절 가을하늘, 밝은 달, 일편단심은 어떤 유혹과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충의를 나타낸다. 정몽주는 고려의 임금에게 일편단심의 충의를 보였지만, 안창호는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국민에게 그리고 민중과 국민의 한 사람인 안창호 자신의 ‘나’에게 일편단심의 충의를 보였다. 그는 가을하늘, 밝은 달처럼 일편단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민중, 나라와 민족에게 충성하였다.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는 힘써 일하고 행동하는 역행(力行)을 나타낸다. 진실과 정직, 사랑과 정성으로 무실정신에 사무쳤던 안창호는 어떤 조건과 경우에도 용감한 기상과 일편단심의 충의로운 맘으로 힘써 일하고 행동하였다. 그는 쉽게 단념하고 포기하거나 절충하고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결같이 꾸준하게 그러면서도 용감하고 단호하게 정성과 힘을 다해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는 그의 역행정신과 실천을 보여준다. 언제나 현실의 권력에 굴복하고 타협했던 윤치호의 정신과 삶은 애국가의 정신과 사상과 일치하기는커녕 상반된다. 그러나 안창호의 삶과 정신은 애국가의 정신 사상과 닮은꼴이다. 안창호의 삶과 정신을 보면 애국가의 정신과 사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애국가에는 근현대 한민족의 주체적인 민주정신과 공동체적 의지가 가장 깊고 높은 형태로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애국가는 굳은 독립의지와 강인한 생명력, 강고한 저항의지와 고결한 신념, 나라와 민족에 대한 공동체적 사랑과 헌신, 고난과 시련을 뚫고 나가는 굳센 실천력의 불꽃을 한민족의 가슴에 피워내는 풀무였다. 애국가 1~4절에 새로운 정신과 활력을 불어넣고, 애국가의 정신과 뜻을 실천하고 온 민족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한국근현대의 가장 어두운 역사의 험난한 고개를 넘어 온 안창호는 애국가의 진정한 저자이고 주인이다. 안창호와 애국가에 관해 더 공부하고 싶은 이들은 ‘애국가 작사자 도산 안창호’(종문화사 2020)를 읽기 바란다. (2020년 11-12월호 게재)
21서보혁 and 2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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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걸
유인걸 잘 읽었읍나다.도산의 무실역행과함께 그의 무궁화 사랑과 애국가 작사에 동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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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soo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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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종
이승종 박사님의 논증과 간명한 글에 깊히 감사를 드리며 많은분들이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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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soo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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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혁
서보혁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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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정중규 좋은글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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