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8

조선적 특색을 가진 마르크스주의: Vladimir Tikhonov | Facebook

남만춘과 박진순, 발렌틴 킴-세레브랴코브 등 디아스포라 혁명가들이 "식민지... - Vladimir Tikhonov | Facebook

Vladimir Tikhonov
29 m  · 
남만춘과 박진순, 발렌틴 킴-세레브랴코브 등 디아스포라 혁명가들이 "식민지 수탈론"에 선구적으로 기여한 점을 입중한 영문 졸고를, 김미경 선생님께서 국역하시어 드디어 출판에 이른 것입니다. 국문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 장은 한반도에서의 수탈론 (식민지 시대 수탈경제론)의 지적인 계보를 추적하면서 주로 고려인 혁명가들이 1920-30년대에서 수탈론의 형성에 기여한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수탈론의 기원은 바로 레닌의 1916년 제국주의론이다. 기존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비판론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전유하여 계승·발전한 레닌은, 제국주의 식민지배란 원자재 공급 기지와 완제품 포획 시장 확보, 제국주의 국가 금융자본의 식민지지배 차원의 현상이라고 진단하여 나아가서는 식민지 초과이윤이 식민 모국 ‘노동 귀족층’ 매수에 이용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에 재소 고려인 혁명가인 박진순이나 남만춘은 이와 같은 제국주의론을 조선의 현실에 선구적으로 적용해 봤다. 그들이 일제의 조선 지배의 목적으로 값싼 조선미(朝鮮米)의 일본 수출과 농지 매수, 조선의 매장 자원의 독점과 조선의 저가(低價) 노동력에 대한 초과 착취를 통한 초과 이윤의 창출이라고 진단했다. 1930년대에 특히 북선(北鮮)지역에서 전력 생산의 증가와 중화학 공업의 발달이 가시화되자 유명 고려인 혁명가 김만겸의 아들인 발렌틴 김-세레브랴코프는 ‘전시 병참기지 건설’이라는 차원에서 이를 이론화하여 나아가서 조선에서의 일본 금융 및 독점 산업 자본의 지배가 가일층 심화되어 간다고 못을 박았다. 1920년대에 조선 공산당의 당원인 배성룡, 1930년대에 모스크바에서 교육을 받은 김세용과 이여성, 그리고 인정식 등에 의해서 이 식민지 수탈경제론이 본격적으로 조선 공론의 장에서 정착됐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물론, 남한에서도 비록 이 이론의 레닌주의적 기원에 대한 언급은 불가능했지만 수탈론은 대체로 학계의 ‘정설’로 1990년대 초반까지 거의 도전을 받지 않고 있었다. 단, 수탈론의 발전에서의 초기 재소 고려인들의 기여는 남북 한 양쪽에서 완전히 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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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조선적 특색을 가진 마르크스주의: 
1920-30년대 소련의 조선인 디아스포라 혁명가들의 조선에서의 일본 식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다시 읽기 
박노자(블라디미르 티코노프)
1.  서론
이 글의 목표는 식민지화된 조선(1910-45)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화의 역사를 논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발전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소련에 거주하거나 머물렀던 코 민테른 계열의 조선 혁명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일본 제국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타당성의 검증이 주로 이루어 질 것이다. 이 글은 따라서 식민착취와 관련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발전을 위해 지금 까지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자료를 검토할 것이다. 이런 이론화 작업은 아래에서 알 수 있듯이 1930년대에 이미 조선 내부의 선구적인 마르크 스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지 수탈과 부의 유출에 관한 다소 정교한 논의
의 발전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1948년(Kraft, 2006)에 대한민국에서 엄격한 반공법이 도입된 이후 탄압을 받아왔다. 하지만 식민지 부의 유 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화는 북한의 역사학 전통에서 식민지 역 사의 형상을 결정지웠고, 남한의 역사적 서사에서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이 장은 1920-30년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글과 동시기 소련에서 러시아어로 출판된 방대한 분량의 소련계 조선인들의 출판물
(1990년대 이후 재인쇄되기도 함. 예를 들어 2007년 Vanin을 참조)을 모두 활용 할 것이다. 또한 현재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기록원 (RGASPI)에 보관되어 있는 코민테른의 기록물도 활용한다.
지금까지 소련 내 한반도출신 디아스포라 혁명가에 대한 연구는 주 로 한국과 러시아 학계에 국한되어 왔다. 이 장에서 다루는 주요인물 중
의 한 명인 박진순(1897~1938)에 대한 최초의 논문은 1987~88년 한국의 민주화를 계기로 이런 연구가 허용된 직후인 1989년에 발표되었다(권
희영, 1989).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회의 기간과 그 이후의 박진순의 활 동에 대한 선구적인 분석은 전명혁(2006)에 의해 이루어졌고, 본고에서 도 분석될 것이다. 1920년대 중반의 조선의 정기간행물에 대한 박진순 의 공헌, 미래 조선의 혁명에서 농민들의 중요한 역할, 그리고 그의 경쟁 자인 남만춘(1892-1938)을 상대로 벌인 박진순의 논쟁 등에 관해서는 조 선공산주의역사의 전문가인 임경석(2016)이 분석한 바가 있다. 조선 내 에서 조선어로 출판을 한 적이 없는 남만춘은 한국학계의 주목을 덜 받 았으나 1921년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서 조선 농민들의 빈곤과 저임금 노동착취로 인한 식민지 특수이익에 관한 그의 연설은 한국어로 번역되 어 1989년 한국 학술지에 실린 적이 있다(박재만 1989). 1920-30년대 소 련 내 조선인들의 상황과 스탈린 대숙청(1936-1938) 시대의 조선인 혁명 가들의 운명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현대 러시아의 고려인 학자들에 의 해 수행되었는데(Son 2013 참조), 중요한 것은 남만춘의 학술적 업적에 관한 논평과 함께 그의 상세한 전기와 글 모음집이 최근에 출판되었다
는 것이다(Pak 2017). 이 책은 최근 출간된 소련 내 조선 혁명가들의 문집 (Pak 2007)과 마찬가지로 이 장의 주요 분석 자료이다. 한국과 러시아의 학 자들은 소련 내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레닌주의적 식민지 이론을 조선의 현 실에 적용한 방법론과 이론화 작업이 조선에서의 초기 마르크스주의에 미 친 영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이에 이 장은 식민지 부의 유 출, 엄청난 ‘초과이윤’, 제국 자본의 재정 침투가 1920-30년대 조선 내 제 국주의와 식민주의 이론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하여 기 존 연구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의 보완을 그 목적으로 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코민테른 계열의 조선 혁명가들이 조선의 경우 에 적용하려고 시도했던 식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 이론은, 주로 존 홉
슨(John Hobson, 1858-1940)의 자유주의적 반제국주의 비판에 기초를 두 었던 레닌(1870-1924)에 의해서 애당초 정리된 것이있다. 1916년에 출판 된 레닌의 저작,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는 ‘선진’ 자본주 의 국가들의 잉여이익을 풍부한 자원, 더 저렴한 노동력, 노동 착취에 대 한 법적 제약이 없는 식민지에 재투자를 하면 더 큰 수익이 발생한다는 것을 그 주요 논지로 했다. 식민지는 주로 원자재 공급지의 역할과 식민 종주국의 공산품 판매를 위한 시장의 역할을 강제로 강요 받았다는 논 리이었다. 동시에, 식민지 착취의 메커니즘을 통해 발생한 ‘초과이윤’은 ‘선진국’에서 고임금 노동자 계층(‘노동귀족’)이 혁명 대신에 개혁을 지향 하도록 매수하기 위해 그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하는데 사용되었다 (Lenin 1963 [1916]).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은 식민주의를 주변부의 자원 과 시장에 대한 통제와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결속과 연관시켰고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에 레닌이 공헌한 매우 큰 부분이다. 레닌의 
이런 이론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월러스타인(Wallerstein)이 세계체제론 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실제로 ‘세계체제’라는 용어는 레닌의 주요 논문들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다(Baylis 2020, 121). 또한 이는 식민지 주변부를 국제적 억압과 착취 체제의 ‘약한 고리’로 규정한 1919 년 이후 코민테른 전략의 토대가 되었다.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의 과 잉 착취는 식민지 원주민 부르주아 계급에게서 ‘선진국’의 패턴을 따라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어떠한 싹도 잘라버렸기 때문에, 코민테른은 식민지 내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조차도 반제국주의 투쟁의 잠재적 동 지로 간주했다. 그리고 ‘세계혁명’의 과정과 병행한 민족해방의 희망과 성취를 위한 투쟁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해 나갔다. 물론 코민테른은 결코 단일 조직이 아니었고(그 소속의 여러 정당들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전략 과 전술을 지지했으며, 그 정당들의 궤도 또한 소련이라는 국가의 희망사항과 꼭 일 치하지는 않았다), 그 전략은 소련 지도부 내부의 권력 투쟁의 역학에 영향 을 받아 변화했다. 코민테른은 1927년 이전과 1935년 이후에 반식민지 지역 민족주의자들과 일시적인 연합(“통일전선”)을 강조한 경향이 있은 반 면, 1927년과 1935년 사이에는 중국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반공산주의 쿠데타와 소비에트 정책 결정권자들 사이에서 높아진 전쟁에 대한 공포 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와 종속국에서 발생한 반제국주의 운동의 급진화 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동시에 강조했다(1920년대 코민테른 전략의 
변화와 소련의 국가 이익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는 Jacobson 1994, 51-272을 참조;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에 관여에 관하여는 Weiner 1996 참 조; 코민테른 정책의 부침에 관하여는 Haithcox 1959; 1971를 참조). 1929년 이후
의 세계 공황과 1931년 이후의 일본의 만주침략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의 붕괴에 대한 코민테른의 예측과 급진적 투쟁에 대한 호소에 힘을 실 어주게 된다(세계 불황의 결과에 대한 초급진적 코민테른 분석의 조선어 번역은 마 누일쓰끼 1934, 9-30 참조). 그러나 상당히 잦은 정책 변화에도 불구하고 근 본적인 이론적 근거는 일반적으로 동일했는데 물품의 시장, 자원 공급 원, 값싼 노동력의 창고로서의 악착같은 식민지 ‘착취’는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핵심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 장은 1920-30년대 소련에 거주했던 조선의 혁명가들이 이 이론을 조선의 상황에 적용한 사례를 분석하려고 하며 북한, 특히 남한의 식민지 착취 이론의 후기 발전에 비추어 식민지 주의, 식민지 자본주의, 반식민지 혁명에 관한 그들의 마르크스주의 이 론에 대한 선구적 기여의 중요성을 평가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2.  일제 치하의 조선: ‘저발전의 발전’? 러시아 극동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아들인 박진순(1897~1938)은 1919년 코민테른에서 조선인 대표가 됐다. 그는 1920년 코민테른 집행위원으 로 선출되었으며 코민테른의 지도기구의 멤버가 된 유일한 조선인이었 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그의 발언은 그의 모국의 토착 부 르주아 계급에 대한 그의 입장을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시골 지주들뿐 만 아니라 조선의 부르주아 계급도 매우 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을 통해 조선의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조선에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했다. 그것이 조 선 부르주아 계급이 일본에 적대적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 한 이유들 때문에 조선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 대중들과 연합하여 
저항했고 지난 2, 3년 동안 우리는 그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경제적 상황이 두 집단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 그에 관해서 우리가 할 수 있을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 당은 계 급 차별화를 실행하고 조선에서 농민 운동을 그 전위로 하는 혁명운 동을 이끌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조선의 모든 지주와 소작농들은 이 제 조선의 민족 해방 운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일본 제국 주의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주로 대지주들로 구성된 그들 자신의 부 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는 운동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이 국가적 멍에 를 벗을 때가 오면, 아마도 2, 3년 내에 부르주아 계급이 독립된 조선 이 기대했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르 주아 계급은 독립된 조선에서 그들의 모든 물질적 이익이 사라진다 는 것을 알기에 조선 혁명에 반대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할 것이
다(Archer 1977, 142)
박진순의 경쟁자인 러시아 태생의 이민 혁명가 남만춘(1892-1938) 은 조선 부르주아 계급이 자본주의 발전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는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1923년에 치타(Chita)에 본부를 둔 공산당 기관지에 조선 상황을 분석한 그의 첫 긴 글이 실렸다. 이 분석에서 남 만춘은 조선의 부르주아 계급이 일본 부르주아 계급과의 불평등한 경 쟁에서 ‘눌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남만춘이 보기에는 구조적으로 불평 등한 일본 부르주아들과의 경쟁은 조선 ‘민족 부르주아’의 일부가 1922 년에 조선 생산 운동(물산장려운동)을 일으킨 이유였다. 남만춘은 조선의 유산자 계급이 동포들에게 ‘자국산 물건을 사도록’ 설득한 동기에 대해 서 환상을 갖지 않았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의 유산자 계급은 조선 의 국내 시장을 장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유산자 계급이 경제적으로 ‘혁명분자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믿었으며, ‘통일전선’에 대 한 당시 코민테른 테제를 적절하게 옹호했다. 조선의 혁명가들도 부르주 아 계급과 전략적 동맹을 맺되 조직의 독립성을 희생하지 않고 코민테른 의 통일전선론을 지지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흥미롭게도 남만춘은 조선 부르주아 계급의 가장 권위 있는 대변자인 《동아일보》가 식민지 정부로 부터 비밀리에 보조금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 신문이 사실 상 식민지 당국의 많은 정책을 추진하고 지원하였다고 본 것이다.(Nam, 2017[1923]). 그러나 《동아일보》가 아니라 《조선일보》의 대주주들과 편집 진들이 일본 당국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었고 1920년대 초 일본 총독부 가 비밀리에 지원한 언론사는 사실상 《조선일보》였다(박용규 2018). 당시 의 코민테른의 원칙을 엄격하게 받아들인 남만춘의 논리에 따르면, 조선 의 부르주아 계급이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의존을 하고 있었지만 식민지 의 사회에 불평등한 위치에 있었던 한 여전히 코민테른의 동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상황에 대한 현실적인 관찰자였던 남만 춘은 조선의 부르주아 계급이 분열되어 있고 그 충성심이 모호하다는 것 을 간파하고 있었다. 1925년에 그는 조선의 상황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분 석을 책으로 출판했다. 모스크바 혁명운동희생자구원회(MOPR) 출판사 에서 나온 그의 러시아어 저서 『우그네테나야 코레야』(Ugnetennaya Koreya, 『압박받는 고려』)’는 이듬해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선어로 번역·출판 되었다. 이 책은 1920년대 코민테른의 조선 상황에 관한 이해와 분석을 담고 있다. 남만춘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은 급속하게 팽창하는 일 본 자본이 조선에서 생산되는 원자재와 식료품(철광석, 석탄, 금, 광물, 쌀) 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일본은 또한 조선을 공산품, 특히 섬유 의 독과점 시장으로 활용하기를 원했는데, 남만춘에 따르면 1924년 당 시, 식민지 소재 1,358개의 공장 중 대다수는 기껏해야 조선산 면화 가 공, 쌀의 정미(精米), 가죽의 가공, 맥주 생산 등처럼 조선 현지의 1차 생 산물을 가공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수입된 도자기, 담배, 소금과 경쟁할 수 있는 조선의 산업은 인위적으로 억제되었다고 남만춘은 분석했다. 일 본 자본은 주로 1차 산업(농업과 광업)에 투자되었고, 일본 금융 기관들은 조선의 채무자들의 담보로 잡혀진 조선의 농지를 최대한 많이 전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조선인이 소유한 산업자본의 비율이 15%정 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선 부르주아 계급은 일본인 식민주의자들의 하 위 파트너가 되었고, 부유한 조선인들은 지방 선거에 참여할 수도 있었 고 지방 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 이에 남만춘은 일본 제국 주의가 조선이 독자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할 수 없도록 방해를 하면서 지역 기업가와 토지 소유 엘리트를 포섭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
을 알아챘다(Nam 2017[1925]). 실제로 1920년 11월에 23,838명의 조선 인 지주(간혹은 기업가와 지식인들)들이 ‘지역 여론’을 대변하는 각종 지방 평의회나 협의회 등에서의 선출직이나(대부분의 경우) 정부 임명직에 발 탁되었다. 일본 당국은 기꺼이 협력하는 국내 엘리트들로 구성된 대표자 들과 최소한의 지역차원의 의사결정권을 공유함으로써 조선에서의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김동명 2006, 79).
1920년대 후반 들어 러시아 태생의 소련 내 조선혁명가들은 점차 곁으로 밀려났다. 당시 급진적인 단계(1927-1935)에 접어든 코민테른은 조선 내부의 혁명역량을 발전시키는 데 일차적인 강조를 했다. 국내 혁 명가들은 공부나 코민테른에서의 업무 종사, 또는 둘 다를 위해 모스크 바에 와서 장기 체류하는 경향이 있었고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 멤 버 중 한 명인 박헌영(1900~1955)도 당시 다소 허술했던 조-소 국경을 불 법적으로 넘은 후 1928년 정치적 망명자로 소련에 왔다. 러시아 사회정 치사 국가기록원의 코민테른 아카이브에는 박헌영이 ‘세계 프롤레타리 아들의 조국’에 도착했을 때 기고한 신문 기사의 사본이 들어 있다 “우리 의 길은 혁명, 아니면 죽음”라는 제목이 충분히 극적으로 들리지만, 1925 년부터 1927년까지 일제 강점기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박헌영이 일시 적으로 심각한 정신건강문제를 겪고 몇 번의 자살시도를 했다는 점을 고 려할 때, 그 극적인 어투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조선일보, 1927). 그의 첫 소련 신문 기고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와 경제 문제에 대한 조선공산주의자들 사이의 “통념”을 보여준다. 박헌영은 소 련 독자들에게 조선에 있는 ‘사실상 모든’ 산업 기업과 조선 농민 토지의 20%가 일본인에 의해 점령되었고 일본 금융 자본이 조선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알리고 있다. 혁명은 결국 식민지 주민들이 겪게 될 ‘파 산과 죽음’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었다(Pak 1928). 국제 레닌 학교에 입학한 박헌영은 1929년 12월 13일부터 19일까 지 1주일동안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서 열린 조선 상황에 대한 주 요 토론회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에 관해 코민테른 지도부의 정통파와 접촉을 가졌다. 이 행사에는 재소련 교포들과 조선에서 온 유 학생들 40명이 참석했고 이들은 코민테른 산하 여러 기관에서 일하거나 유학 중이었다. 주요 발표자는 당시 코민테른 집행부 동방사무국 부국장 이자 코민테른의 중국 사회와 경제 전문가인 라조스 마자르(Lajos Magyar, 1891~1937)였는데, 그에 따르면 조선은 제국주의자들이 산업경제의 대부 분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식민지 형태를 보이고 있었는데 경공 업(가장 중요하게는 섬유산업)조차 일본인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배당하고 있었고, 중공업에서는 이미 완전하게 통제당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은 일본에 종속된 ‘하인’에 지나지 않았지만, 중소 부르주 아 계급은(예를 들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학생들이 학교 파업을 조직했듯이), 어 느 정도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러한 ‘쁘띠 부르주아 민족 개혁주의자들’조차도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조선에서의 혁명은 무산계급이 토지가 없고 가난한 농민들 과 연합하여 이끌어야 했고, 부르주아 계급은 농촌의 ‘반(半)봉건적’ 토 지 소유관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급진적인 토지 재분배를 통 해 소작농민의 고충을 해결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결국 라조스 마자르 가 보기에 조선은 1905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혁명’의 패턴 을 따를 운명이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주도하에 프롤레타리아와 농 민의 동맹에 의한 ‘반(反)봉건적 토지 개혁’을 강조하였다. 박헌영은 마 자르의 말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며, 조선공산당의 과제를 ‘반(反)봉건 반(反)제국주의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킬 잠재 력을 갖추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대자본가들의 계층을 완전한 ‘반(反) 혁명’세력으로 치부하는 동시에, 마자르는 조선의 소자산계급을 잠재적 인 혁명 세력의 우군으로 간주했다. 물론, 이 논의의 전제는 조선이 ‘프 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기꺼이 따른다는 것이었다(1929년(《Stenogram-
maSoveshchaniya Koreiskoi i Yaponskoi Sektsii KUTV》 1929; 한국어 번역본
은 박헌영 2004, 176-382을 참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남만춘의 1925년 의 발언에 의하면 조선의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지만, 레닌과 코민테른이 원래 전 세 계 프롤레타리아의 잠재적 동지로 본 ‘식민지 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와 ‘식민지 부르주아’에 대해 1920년대말에 강경한 입장이 뚜렷이 강화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식민주의를 자원과 시장의 착취로 보는 레닌의 논리에 따라, 마자르도 박헌영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정상적인’ 산업자 본주의가 발전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그들은 코민테른 의 1927-1935년 동안의 초급진적인 ‘제3기’ 이론의 새로운 정통성을 고 수하고 있었는데 이 초좌파적 이론에 따르면 세계공황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그 날이 다가오면서 그 식민지적 아류를 포함한 전 세계 부르주 아계급은 ‘반(反)혁명 진영’에 완전히 편입돼 있었다고 믿었다(Poulantzas 2018, 44-48).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이 이론은 특히 설득력을 가 진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는데 만약 최종적인 체제 붕괴와 혁명의 성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면, ‘구세계’의 세력, 심지어 식민주의자들에게 민족 적 차별을 받았던 ‘민족적’ 세력이라 해도, 과연 그들과의 동맹이 필요했 을까?
논의에 참여한 소련계 조선인 인사들은 마자르나 박헌영보다 조선 
부르주아 계급 전체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 으며 훗날 코민테른의 핵심 간부가 된 최성우(1898~1937)는 조선 부르주 아 계급을 최대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동아일보》와 《조선 일보》는 ‘반(反)소련 신문’으로 장제스와 그의 ‘반혁명 정권’을 ‘찬양’하 는 동시에 무산자를 포함한 ‘모든 중국인’과 화교 노동자들에게 만주에 서 발생한 장쉐량(張學良)의 조선인 이주자 박해의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이간, 대립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비난을 받아야 만 하는 쪽은 오직 일본 제국주의자들로, 그들이 조선인들을 전쟁 준비 를 위해 이용하기 위해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이주시킨 당사자들이기 때
문이다(박헌영 2004, 228-239에서 인용). 최성우의 비판은 사실 부분적으로 만 정당하다. 《동아일보》는 ‘중국의 만주 동포 탄압’을 비난하면서도 만 주거주 동포들의 중국 국적 선택이(일본 영사경찰에 ‘보호’를 호소하기보다는) 
그들의 문제해결에 최선책이 될 수 있음을 동시에 시사하고 있었다(주
효뢰 2020, 161-188). 이 논의에 참여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소련계 조선 인 박애(1896-1937)는 조선에서 공산주의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코민테른 의 멤버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디아스포라 지식인이었다(박애, ca 1930년). 코민테른의 아카이브에 보존된 토론의 속기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박애 는 참석자들에게 그들이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 위기의 ‘제3기’를 살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조선은 미래의 격변에서 중요 한 역할을 할 것인데 그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가 증가하는 인구를 위해 조선산 쌀을 더 싸게 조달하고 식민지로의 이주를 장려함으로써 인구과 잉의 위기를 부분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 았다. 그러나 박애는 또한 질적으로도 다른 새로운 발전에 대해서도 언 급했는데, 조선에서 화학공장이 설립되었으며 KUTV의 학생 한 명도 그 화학 공장의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더불어 전기도 빠르게 보급되고 있었 고, 새로운 항만 시설도 빠른 속도로 건설되고 있다며 박애는 일본 제국 주의가 조선에서 일정 수준의 산업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표면적으로 는 식민지가 오로지 자원 공급자이자 시장이라는 레닌과 코민테른의 믿 음과는 모순될 수 있는 식민지 산업화가 일본의 군사적인 계획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박헌영 2004, 301-308).
3.  KUTV대학의 반식민주의 비평
KUTV대학은 1930년대와 1938년 스탈린주의 당국에 의해 폐쇄될 때까 지 식민지 문제에 대한 교육 기관과 주요 연구 센터의 역할을 계속했다. 그 교수들 중 일부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관한 레닌의 이론을 근현대 아시아에 적용하기 위해 진심어린 노력을 기울인 진정한 학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KUTV 교수 중에 소련의 동남아시아 연구의 창시자인 알렉산
더 구베르(Alexander Guber, 1902-1971)를 들 수 있겠다(Levinson 1973). 몇 몇 러시아 태생의 조선인들도 KUTV 대학원(aspirantura)을 졸업하고 그
곳에서 교수직을 받았는데 위에서 언급한 최성우도 그들 중 한 명이었 다. 또 한 분 손꼽을 수 있는 훌륭한 학자로는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
치 황동륙(Konstantin Alexandrovich Hwang Tong’yuk, 黃東六, 1903-1938)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대숙청 당시 스탈린이 직접 서명한 처형자 명단 에 최성우, 박진순과 같이 올랐다. 이들과 함께 KUTV 대학원에는 김만
겸-세레브랴코프(Kim Man’gyŏm-Serebryakov, 1886~1938)의 아들 발렌틴 킴-세레브랴코프(Valentin Kim-Serebryakov, 1905~1986)가 다녔다. 1917 년 이전에 이미 다작의 조선계 러시아 언론인으로 알려진 김만겸은 특히 
1920-21년에 그리고리 보이틴스키(Grigory Voitinsky, 1893-1953)와 함께 상하이를 여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활동은 상하이에 근거 지를 둔 조선 망명혁명주의자들의 공산주의 전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
고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Pak 2007, 19-20). 아버지는 조 선 공산주의의 선구자들 중 한 명이었고, 그 아들은 레닌주의적 식민주 의 이론의 관점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던 산업변화에 대한 일관 된 분석을 시도한 1930년대 최초의 조선계 소련인 연구자가 되었다. 불 행히도 발렌틴 킴-세레브랴코프는 1935년 스탈린 시대의 정치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의 아버지도 결국 처형되었다. 발렌틴은 20년이 넘는 시베 리아 수용소 노동과 유배 생활을 견뎌내고 결국 모스크바로 돌아왔지만, 
조선에 관한 연구는 다시는 하지 않았다(Kim 2004, 115-9).
발렌틴 킴-세레브랴코프가 1934년 KUTV 학술집에 발표한 글은 
소련계 조선인 연구자의 시각으로 식민지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 한 최고 수준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한 것이다. 킴-세레브랴코프 에 의하면, 조선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값싼 쌀의 생산지 기능을 하고 있 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쌀 생산에서(대일)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23년 10%에서 1932년 50%로 증가했고, 이로 인해 조선 농촌의 쌀 소 비 자체가 희생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30년대 초 일본 정부가 쌀 경작 지를 희생하여 면화 재배를 장려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으나 식민지 자원 이용의 기본적 성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킴-세레브랴코프 의 견해로는 철광석, 알루미늄, 마그네사이트, 텅스텐, 납과 같은 광물들 이 가장 활발한 식민지형 자원 개발과 경제적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일 본의 ‘독점적 재벌’ 가운데 미쓰비시는 조선의 광물 채취 산업에 공격적 으로 침투하고 있었고, 미쓰이는 조선의 고무신 공장에 대한 고무 공급 을 장악하면서 그 시장 영향력을 이용해 조선인 소유의 중소기업들을 파 산시켰다. 킴-세레브랴코프에 의하면, 1930년대 초 조선의 공업화는 매 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조선에서 일본의 산업정책 대부분이 군사 주도적이었고 만주 점령과 중국 그리고 아마도 소련과의 더 큰 전 쟁 계획과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조선의 북부지역에는 군수 공장이 건설되었고, 조선질소비료 회사의 함흥 공장은 일본 제국의 황산 암모늄 총생산량의 28%를 생산하고 있었다. 킴-세레브랴코프에 따르면, 군사·전략적 공업화 드라이브는 조선 자본가 계층의 정치적 태도의 양 극화를 결과시켰다. 대자본가들의 경우 부유한 조선인도 종종 진출한 지 방의회의 권한 강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식민지주의에 포섭되고 있었다. 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소자산가 계층은 비록 ‘민족개량 주의자’의 부류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저항행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Serebryakov 1934).
킴-세레브랴코프의 분석은 조선공산당 안팎의 환경을 지배했던 식 민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코민테른 등의 전형적인 이해와 매우 비슷했다 고 볼 수 있다. 코민테른은 1930년대 초의 세계 자본주의가 점점 더 ‘기 생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았고(조선어로 번역된 이 이론은 꾸시넨 1933, 55-58쪽을 참조), 식민지에 대한 착취의 심화는 주변부에서 반(反)식민 봉 기를 촉발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에 ‘기생성’은 특별한 연구가 필요 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1931~32년 조선공산당에 소속된 다작으로 잘 알려진 분석가·이론가인 양명(일명 Li Kang, 1902~?)은 조선공산당을 코 민테른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보다 더 동질적인 조직으로 만들고자 했 던 정통파 당 간부들로 구성된 이른바 ‘ML(마르크스-레닌주의) 파’와 관련 된 조선 출신 공산주의 운동가였다. 이 그룹은 코민테른의 1927~1935 년간의 초급진주의 노선에 따라 독립을 찬성한 조선 부르주아지와의 ‘통 일 전선’ 형성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1930년 모스크바에 도착한 양명은 1935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에 앞서 ‘트로츠 키주의’의 혐의를 받았지만 그 당시에는 관련 혐의를 반박하기 위해 최
선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GASPI 1933). 1930년에서 1935년 사이 에 양명은 조선과 일본의 정기간행물에 나온 경제 통계와 인용문으로 가 득 찬 조선의 각종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해 다소 학술적인 장문의 글 을 여러 편 썼다. 조선 부르주아지의 ‘민족개량주의’가 점점 ‘반혁명적’으 로 변해가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양명은 대일 수출이 조선 전체 수출 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조선 경제 전체 투자 중 조선인의 소유는 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주로 일본 자본이 소유하고 있다는 통계를 인 용했다. 이처럼 식민지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전적인 의존’과 농업 투자와 산업 투자의 미발달(조선의 산업 자본가들은 농촌의 대지주 출신였던 경향이 있 었다) 상황에서, 양명이 보기에 조선의 부르주아지는 농업 부문의 ‘봉건 적 잔재’(소작인이 경작하는 대토지)와 식민주의를 모두 지지하는 ‘객관적인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조선의 유산자 계급은 산업발전에 새 로운 시장을 제공할 수도 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 정책을 열렬
히 환영한 것도 양명의 분석에 영향을 끼쳤다(Li 2007[1933]). 1년 후, 양 명은 일본의 조선 경제정책의 군사전략적인 측면을 강조한 새로운 논문 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일본제국이 중국에서의 대규모 침략 전 쟁과 소련 원동 침략을 준비하면서 철광석, 무연탄, 마그네슘, 알루미늄, 수력 발전 등 전쟁과 군수 산업에 잠재적으로 유용한 조선자원의 개발을 강화하고 있었다는 관찰이었다. 동시에 자원 추출과 값싼 노동력 착취에 초점을 맞춘 식민자본주의의 영역은 점점 더 국가주도로 바뀌어가고 관 료적으로 관리되는 상호 연결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재창조되고 있었다 는 것이다. 은행, 운송 회사, 발전소의 강제적인 ‘통합’과 그에 따른 국가 통제 강화는 양명이 보기에 전시 국가주도 자본주의 경제로의 전환을 의 미했으며,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조선 경제의 중추 산업의 장악을 위한 일본의 독점을 강화해 나갔다(Li 2007[1934]). 양명은 식민지 자원 추출과 식민지 ‘초과이윤’의 논리에 대한 레닌주의적 분석을 적용하여(주로 북부) 조선에서 성급하게 진행된 산업화가 전쟁 준비를 위해 주도된 것처럼 보 이는 것을 지정학적 관찰과 융합하여 상당히 설득력있는 분석을 내놓았
다(Chung 2006, 242-245). 1934년 출간된 양명의 논문은 병참기지 조성 본위의 조선 산업화를 러시아어라는 유럽의 언어로 분석한 선구적인 논 문으로, 1930년대 중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구 성과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코민테른의 정책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가 주장한 것처
럼 ‘과학적’이어야 했고, 정치 강령은 종종 통계와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이에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강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이 레닌주의 식민주의 이론에 매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는 1934년 익명의 ‘이니셔티브 그룹’이 작성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정 치 강령이다. 당시 코민테른의 조선 관련 주요 전문가였던 최성우가 이 그룹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단체는 김-세레브랴코프와 양명이 발표한 것과 비슷한 내용으로 조선 상황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를 발표했고 서문에서 식민지 산업 경제의 ‘완전한 일본 지배’를 전제하고, 조선 민족 기업은 기껏해야 원자재를 가공하는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 으며 생산품의 대부분은 일본 수출을 목적으로 한다고 언급했다. 이 논 리대로라면, 조선의 부르주아지는 국내 시장에서 독자적 지배력을 확립 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잠재적으로는 반(反)식민지적’이었지만, 동시에 일본 자본과 너무 밀접하게 얽혀 있고 식민지 법률 체계의 보호 를 받는 토지 재산의 수입, 즉 소작료에 너무 의존적이어서 민족 해방 운 동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스크바의 한인 공산 주의자들에 따르면 조선 부르주아지의 반식민지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919년경이었는데 1919년 3.1운동 이후 그 궤도는 하향곡선을 그리며 제국주의와 협력하는 양상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반면 도시의 쁘띠 부르주아지는 잠재적인 동맹세력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첫 단계의 혁명인 민족민주 혁명이 성공하여 조선이 독립한 후 국제 경 쟁력이 없는 자국 농산물을 파멸적인 글로벌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
해 관세 장벽을 약속하기도 했다(Initsiativnaya Gruppa Koreiskikh Kommu-
nistov 1934).
4.  식민지 조선 내부의 식민지 수탈론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설의 ‘반혁명적’ 논조 를 비난했지만, 사실 두 신문은 1920년대 초부터 독자적인 반(反)식민지 비평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두 신문의 비판적 논조를 조선의 많은 독자 들이 요구하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적 논조의 강조점은 식민 지 지배의 틀 안에서 진정한 발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보다는 식민 지적 조건 하에서 겪게 되는 차별적 경제 발전의 성격에 있었다. 예를 들 어,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의 창간 주역 중의 한 명 인 김동성(1890-1969)은 1922년 조선에서 일본인 기업가와 조선인 기업 가의 지위를 비교한 영향력 있는 논문을 신문에 발표했는데 그는 일본인 들이 은행업과 근대 산업 부문 모두에서 특혜를 누리고 있음을 통계적
으로 증명했다(김동성 1922; 김윤희 2018, 43-45 참조). 《동아일보》의 편집자 들은 ‘조선인 경제’를 위해 민족을 기반으로 한 계급 간 동맹에서 조선인 의 경제적 곤경을 타파할 해법을 찾았고, 조선인 소비자는 조선인이 생 산한 제품을 구매하고 조선인 자본가는 이윤보다는 공익을 기준으로 투
자를 배분하는 “민족 경제”의 비전을 구상했다(김윤희 2018, 56-59). 그러 나 1920년대와(부분적으로) 1930년대에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식 민지가 겪던 경제적 부정의에 대해 박진순, 남만춘, 최성우, 양명 또는 김-세레브랴코프와 매우 유사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비전을 담 은 기고도 환영했다. 그러한 기고자의 예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
자 1925-1928년 공산당원이었던 배성룡(1896-1964)이 있는데, 그는 박 헌영과 같은 화요파의 멤버로 활동을 했다. 배성룡은 1926년 5월부터 6 월까지 《동아일보》에 영향력 있는 경제 정책 관련 에세이를 연재하며 식 민지 조선이 실제로 일본 제조업의 덤핑장이 되었다는 레닌주의적 관점 을 피력했는데 일본의 조선에서의 경제적 지배는 일본 산업 및 은행 자 본의 우월성(조선 자본에 비해)과 식민지 정책이 일본 기업의 조선 산업· 시장 독점의 확대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조선의 빈곤은 산업화를 통해서 만 완화될 수 있었지만, 배성룡은 식민지 당국이 경제정책의 의사결정을 장악하고 있는 한 조선인 소유의 산업 자본이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
다고 보았다(배성룡 1926; 김윤희 2018, 200-204). 박진순, 남만춘 등이 주도 한 식민지 조선 경제에 대한 코민테른의 비판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 배성룡은 조선 내 경제비평 분야에서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러나 1928년 ‘공산주의 활동’으로 잠시 투옥된 이후 배성룡은 급진주 의적 성향을 일부 상실했고, 1930년대에 나온 그의 경제관련 저술은 구 체적인 사안에 대한 정책 비판의 형식을 취했다(예를 들어,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시장가격이하로 ‘과도하게 수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배성룡 1931 참조).
1930년대에는 KUTV 출신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경제적 수탈 비 판의 영역에 진입했다. 한 가지 좋은 예로 1926년 모스크바 KUTV대학 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것으로 알려진 의사 김세용(1907-1966)이 있 다. 현재 러시아 기록보관소에는 김세용이 KUTV에 머물렀음을 증명하 는 문서가 없지만, 모스크바에서의 경험을 직접 기록한 그 회상의 내용
에 의하면 그가 KUTV출신이었다(김세용 1932), 1930년부터 김세용은 점 차 체제 옹호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던 《조선일보》의 기자로 일했고 처남 인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이여성(1901-?)과 함께 일제 식민 통치하 에서 조선의 저(低)발전 참상에 관한 통계 자료인 『숫자 조선연구』(19311935)를 5권으로 발표하면서 유명해졌다. 총독부 자체 통계를 바탕으로 한 이 연구는 1920년대 초부터 박진순, 남만춘 그리고 모스크바에 기반 을 둔 다른 한인 레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 었다. 식민지 통치 하에서의 “근대화”는 본질적으로 조선을 일본 상품의 시장과 일본 기업의 ‘투자처’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요약된다(이여성, 김 세용 1992[1931-1935]). 최근 이 책의 요약본과 영인본이 서울에서 출간되 어 80년이 지난 지금도 통계 자료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았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이계형, 전병무 2014; 이여성, 김세용 1992[1931-1935]). 통계자 료를 바탕으로 김세용과 이여성은 1934년 조선의 초기 산업은 식료품 가공업(전체 생산량의 46%)이 주를 이루었고, 화학공업과 같은 기술 및 자 본 집약적인 공업 부문은 전체 산업 생산량의 16%에 불과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600만 가구 이상이 여전히 가내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 으며, 이는 산업 낙후도가 놀라울 정도로 심각하고 빈곤한 농촌의 유효 수요가 매우 낮다는 것을 반증했다. 산업 경제 구조의 이중구조가 분명 해진 것이다. 조선의 산업 부문은 일본 대기업과 조선인 소유의 중소 내 지 영세업체 등 두 가지 서로 이질적인 부분의 집합체였는데 1931년 통 계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조선 내 조선인 소유 공장의 생산량은 일본에 위치한 일본인 소유 공장의 평균 생산량의 절반에 불과했다. 일본 대기 업은 조선 산업 경제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기술, 자본, 에너지 집약적 인 부문일수록 일본의 과점적 지배 패턴이 더 강했다. 예를 들어 시멘트 생산에서 오노다의 삼척 공장은 1934년까지 일본 내지로부터의 시멘트 수입의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계형, 전병무 2014, 288-328). 근대 식민주의를 금융 자본 확장의 정치적 
형태로 이해한 레닌의 관점과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금융 자 본은 조선의 자본 시장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이계형, 전병무 2014, 91-
92). 
김세용과 이여성, 두 사람은 꼼꼼한 통계 연구를 바탕으로 상인 자
본의 점진적 축적과 근대 산업으로의 투자 전환을 통해 조선 자본주의 발전의 ‘정상적’ 경로가 1910년에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시장으로 강 제 통합되면서 좌절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원시적 축적 과정에서 상인 자
본의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에 관하여는 Kay 1982, 96-104 참조). 값싸 고 질 좋은 일본 상품의 유입으로부터 조선의 초기 산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관세 장벽의 결여, 자본의 부족(부분적으로는 재조선 일본 은행의 극도 로 엄격한 신용 정책 때문), 기술 및 경영 노하우의 부족 등으로 인해서 조선 의 초기 산업 부르주아지는 막강한 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조선인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의 산업을 발전 시키지 못한 것은 ‘기형적인 산업혁명’을 초래했고, 이는 식민지의 소외 된 현지민들을 더욱더 곤궁하게 만들 뿐이었다(이계형, 전병무 2014, 331340). 이것은 종주국과 식민지 지역의 자원 수급 및 시장 간의 불평등한 교역 패턴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1930년대 중반의 조선에 적용한 매우 훌륭한 연구이다. 김세용과 이여성은 박진순, 남만춘, 김-세레브랴코프 등 소련계 조선인 혁명가들과 레닌주의 분석의 기본 구도를 공유했지만, 김세용과 이여성의 비판은 통계적 근거가 더 탄탄했고 소련계 조선인 마 르크스주의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식민지 현실의 이면까지를 포함한 보다 다면적인 분석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계 소련인 관찰자들은 농업 경제에서 지대 징수에 비해 조선의 세금 징수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김세용과 이여성이 식민지 정부의 조세 재 정 구조를 파헤친 결과, 1911~1930년 기간 동안 부유층과 도시 중상류 층을 대상으로 한 소득세는 전체 조세의 1.9%에 불과한 반면, 생필품 소 비에 대한 간접세는 전체 조세 부담의 무려 45퍼센트에 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재산세에는 누진세율이 적용되지 않아 소규모 소유주에게는 부담이 컸기 때문에 이들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대규모 대도시 부
호들의 토지 및 기타 재산 축적이 가속화되었다(이여성, 김세용, 1992[1931-
1935], 3권, 40-52쪽). 통계자료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고 응용경제분석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던 조선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련계 조선인들 의 레닌주의 식민지경제론 선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통계분 석의 분야에서도 레닌주의적 반제국주의의 비판적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초부터 모스크바에 기반을 둔 조선 혁명가들에 의해 개 척된 식민지 시대 경제 발전에 대한 레닌주의적 분석 방법은 1930년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반적으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어 느 정도 정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를 포기한 후에도 조선 농업 문제에 계속 천착한 인정식(1907-?)은(김경 일 2011, 267) 조선을 여전히 전기 발전(發電)과 같은 가장 기술적으로 진 보되고 자본 집약적인 부문에 대해 일본이 사실상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
하는 이중 식민지 경제로 묘사했다(인정식 1940). 인정식은 1930년대 일 련의 저술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조선 농업 관계의 본질을 ‘봉건적’(전근 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저자이기도 하다. 이 봉건 적인 생산관계는 식민 종주국의 대도시로 쌀을 수출한다는 근대적 방식 의 성장(교환관계 영역에서의 자본주의)과 농산물 생산 영역에서의 전(前)자 본주의적 관계의 지속적 지배(화폐가 아닌 현물로 지급되는 높은 소작료, 독립 적 시장 접근성이 낮은 소작인과 반소작인의 소규모 경작)의 공존으로 특징지어 진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식민지 자본주의는 조선의 자원(쌀 등)을 싼값에 수탈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기보다는 전근대적인 사회경제적 형 태들의 영속화를 꾀하였다(印貞植 1937). 전시 검열 상황에서 레닌의 글 을 인용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그 논리는 분명 레닌의 『제국주 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의 논리임에 틀림없었다. 해방 후 1945년 8 월 전시 검열이 사라진 후 조선의 진보 진영이 식민지 경험을 역사적으 로 서술하는 작업에 착수했을 때, 그 시도의 기본 분석 틀을 제공한 것 도 레닌주의 이론이었다. 예를 들어,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전
석담(1916-?)이 1948년에 쓴 조선사 교과서 『조선사교정』(1989년 『민중조 선사』 로 재출간, 전석담 1989[1948] 참조)는 식민지 시대의 조선을 일본의 식 량 생산 기지로 규정했고, 동시에 조선은 자원 가용성과 저임금, 보호받 지 못하는 노동력이라는 추가적인 이점을 가진 일본 기업 자본의 특권적 인 투자처라고 기술했다. 전석담은 1939년 일본의 조선 섬유 산업에 대 한 투자 수익률이 42%에 육박했다고 계산하고, ‘식민지 초과이윤’이 일 본 자체의 자본 축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반면 조선은 자원 추출 과 값싼 노동력 착취에 기반한 불균형 경제를 남겼다고 결론지었다(전석
담 1989[1948], 94-103).
5.  결론: 탈식민지 시대의 식민지 수탈론과 소련계 조선인 연구자들의 공헌 에 관하여
전석담이 월북한 후 북한학계에 합류한 뒤 북한의 학계도 그의 레닌주의 적 견해에 동의했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남한에서도 식민 지 수탈론이 결국 레닌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을 뺀 채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1950-70년대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제 사학자였던 최호진(1914-2010)은 1973년 한국 근대 경제사 개론에서 다 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조선이 일본의 원자재 공급원이자 공산품 시장 이었다는 것을 사실로 언급했다(최호진 1973, 106). 물론 최호진은 레닌에 대한 언급없이 이런 주장을 했다. 한데 이 주장은, 반공주의가 팽배한 한 국에서도 추가적인 증명이 필요 없는 통념적인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근 대 경제사의 또 다른 권위자인 조기준(1917~2001)은 식민지 시대 조선인 지주와 상인이 ‘민족 자본가’로 변모하는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조기준 역시 레닌이나 식민지 시대의 조선 마 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 없이 식민지 초기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의 쌀 생산 기지’로 정의했다. 또한 일본 금융자본의 식 민지 자본시장 지배의 주요 패턴을 설명하고, 1910년대 후반부터 진행 된 ‘일본 독점자본’의 조선 침투가 점차 확대되고 있었음을 주목했다. 그 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일본 독점자본의 조선 투자’가 과잉 자본과 값싼 전기, 광물, 식민지의 인적 자원을 모두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고 설명했으며, 결국 일본 자체의 대규모 독점자본 형성 과정에서 조선
이 수탈을 당했다고 결론지었다(조기준 1977, 351-404). 1930년대 인정식 이 정립한 논리에 따라, 전근대적 뿌리를 가진 기성 엘리트들의 대규모 토지 소유의 지속성, 높은 소작료 수탈을 통한 착취의 양상, 일본 시장이 나 일본 제국주의의 수요에 대부분 묶여 있던 근대 자본주의 부문의 ‘이 질성’ 등을 들어 식민지 시대 조선 사회를 ‘반(半)봉건적’으로 규정하는 것도 일반적이었다(홍종욱 2014에서의 ‘반봉건주의’ 관련 논의의 개요 참조). 식 민지 수탈론은 레닌주의적 기원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까지 반공주 의 한국의 경제사 분야를 대체로 지배했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기적적인’ 부상을 보고 우파로 돌아선 일군(一群) 의 과거의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이 식민지 경험을 보다 긍정적으로 재 평가하는 관점을 지지하며 수탈론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수탈’ 의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소유 기업의 지속적인 성 장과 가치 사슬을 따라 상향 이동하는 것이 이전의 연구보다 훨씬 더 강 하게 강조되었다. 이 연구자들은 ‘식민지 산업화’를 한국의 외부 지향적 산업경제의 선구적 경험으로 정의하게 되었고(예컨대, 이 견해의 초기 버전
은 안병직, 中村哲. 1993, 135-138 참조), 2004년에 이르러 이러한 수정주의 
경제사학자 중 일부는 명백히 친기업적인 보수적 의제를 가진 ‘뉴라이 트’라는 정치화된 지식인 집단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 었다. 그 시점부터 식민시대 조선에서의 ‘수탈’와 ‘개발’의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강력하게 정치화되어 주기적으로 널리 읽히는 대중 매체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Yoon 2020).
박진순, 남만춘, 박애, 발렌틴 킴-세레브랴코프가 레닌주의 제국주
의 이론을 조선에 적용하려고 시도한 방식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평가하 면 다소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일 수 있다. 물론 식민주의 자체가 그 본 래의 성질상 식민지 주변부에서 종주국의 대도시로의 부의 유출을 의도 하고 이에 기여한 점이나, 일제 법률과 경찰에 의해 보호받는 식민지 시 대의 농촌 엘리트들이 실제로 전근대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고, 소작인들 에 대해 어느 정도 경제 외적인 영역에서도 지배적 지위를 누렸으며, 일 본 시장에서의 이윤창출을 위해 조선의 농업 자원을 수탈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축적은 기본적으로 불균등하고 결합적으로 이루어지는데(트로츠키의 불균
등결합 발전 이론과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van der Linden 2007 참조), 자본과 기술의 식민지로의 확산은 세계 각지에서 다른 역학 관계를 가지며, 다른 속도로 진행되고, 구체적인 사례마다 다양한 결과 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조선의 경우 비경제적 요인, 주로 지정학적 요 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일본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일본 내수 시장 의 확장으로 간주되기 쉬웠지만, 동시에 낮은 임금, 낮은 토지 임대료 및 전기 가격, 많은 자원매장량으로 인해 차별화되었다. 이는 특히 1920년 대 이후 식민지 수탈의 형태가 수출 지향적인 쌀 생산, 광물 채굴, 일본 산 공산품 덤핑을 위한 단순한 조선 시장 이용에서 대규모 식민지 산업 투자라는 보다 정교하고 실제로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패턴으로 전환되 고 있음을 의미했다. 자원 채취에서 산업 투자로의 전환은 1930년대에 가속화되었는데, 조선이 처음에는 만주에서의 일제 침략의 주요 산업 기 지가 되었고, 이후 중국 관내 지방에 대한 본격적 침략의 주된 병참기지 가 됐다. 1938년까지 일본의 대(對)조선 1인당 투자액은 37.8달러(당대 미국 통화 기준)로 추정되는데, 이는 식민지로서는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 는 수치였다(이헌창 1999, 330). 1918년 조선에서 생산된 총 부가가치에 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8%였지만 1940년에는 26.4%에 달했는데, 이는 식민지화된 곳으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발전이었다(김낙년 2003, 
248-25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원 추출보다는 ‘투자 기회’에 초점을 맞춘 식 민지 지배와 식민 종주국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식민지 포획 시장 의 사용은 넓은 의미에서 여전히 착취, 수탈적이었다. 산업 성장에도 불 구하고 식민지 조선에서 가구당 농가 소득, 농업 실질 임금, 개개인이 섭
취하는 1인당 칼로리의 양은 오히려 감소했다(Kimura 1993). 또 다른 저 명한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농업 경제학자 박문규(1906-?)가 말했듯 이, 1910년대의 토지 조사와 지주의 독점적 토지 소유권 공식화 등의 일 제 정책은 농민들을 전통적인 농촌 엘리트들의 억압적인 일상적 통제에 서 부분적으로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농민들의 상당수가 토지로부터 “해 방”되어 대규모의 농지에서 수출 지향적인 쌀 생산을 극대화하려는 일제 의 전략에 필수적인 소작인이나 고용노동자로 전환되었다(朴文圭 1933). 이런 점에서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의 조선에서의 대규모 식 민지 산업화의 시작, 1920년대의 쌀 수출 장려 정책, 조선에서의 산업화 의 정치적 맥락과 의의 등을 논의한 박진순, 남만춘, 박애, 김-세레브랴 코프 등 소련계 한인 활동가 및 연구자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그들 은 트로츠키의 불균등 결합 발전의 이론도 아마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상황상 그것들을 개진할 입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련 계 조선인 디아스포라 혁명가들의 선구적인 노력은 조선의 식민지 경제 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를 시도한 최초의 노력이었고 궁극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1930년대 중반까지 국내 마르크 스주의 연구자들이 조선 현실에 적용한 식민지 수탈론은, 독립 이후 남 북한 학계에서 계승되었으나 이 이론에 대한 소련계 조선인의 기여는 남 북한 모두에서 거의 완전하게 잊혀졌다. 이 장이 그동안 잊혀진 소련계 조선인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에서의 식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 주의적 이해의 기원을 보다 온전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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