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민감한 헤아림으로 한 삶을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3.06.13
한남대 명예교수
함께 살거나 홀로 살거나 일단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모든 생명은 다 예민하고 민감한 헤아림으로 살 것이라고 나는 본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서 제일 연세가 많았던 내 증조할머니가 계셨다. 그분은 우리 집안으로 시집을 오신 이후 아마도 그 마을 어느 집에도 나들이를 해보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집저집 마실을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일종의 금기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분만 아니라 모든 규모있게 살고 법도를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산 그 양반이 나에게 참 놀라운 것이 있었다. 나중에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지만, 그분은 참 특이하게 우리마을에 사는 사람들 집집마다 일어나는 일을 기억하고 관심을 가지셨단다. ‘오늘이 저 아랫말 아무개네 집 셋째 아이 생일인데 미역국 끓이고 쌀밥 한 그릇 차려먹는지?’ ‘저 건너 강서방네 둘째가 군대에 간 날인데 이 추운 날 얼지 않고 잘 지내는지!?’ ‘저 샘갓집 이씨네 할애비가 낙상하여 몸져누운 지 두 달 됐는데, 이제 기운 좀 차리고 나다닐 수 있게나 됐는지!’ 이런 걱정을 끊임없이 하셨단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에게 쌀 한 되나, 미역 한 꾸리 또는 약 한제를 사서 보낼 형편이 되지 못했기에 무엇무엇을 어느 집으로 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끊임없이 마을에 사는 집집마다, 사람사람마다 당신의 간절한 맘을 보내셨다. 그는 그렇게 민감하게 헤아리는 삶을 사셨다.
히틀러 나치가 독일을 강압으로 통치할 때, 유럽의 다른 나라를 끊임없이 침략하여 자기 세력을 확장할 때, 독일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미쳐서 돌아갔다. 거의 99% 이상이라고 할 만큼 모두가 다 나치에 동조하거나 그들과 함께 했다. 가톨릭도 개신교도 언론도 대학도 모두 나치와 함께했다. 이 때 한 줌도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수의 보수신앙을 지키려는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특히 마틴 니묄러나 디트리히 본회퍼를 중심으로 나치에 동조하지 않거나 저항하는 ‘고백교회’를 결성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수는 나치에 의하여 심한 고난을 당하였고, 어떤 분들은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처형되기도 하였다. 나치에 물들지 않은 이들 소수의 ‘고백교회’ 신자들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독일기독교 양심이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 중 한 사람 마틴 니묄러 목사는 나치 통치가 끝난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써서 당신도 반성하고 양심 있는 모든 사람을 반성하고 성찰하게 만들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치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체포할 때 나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치가 노동조합원들을 데려갈 때, 나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치가 유대인들을 잡아다 집단수용소에 가두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다 어느날 나치가 나를 잡아갈 때 나를 위해 저항할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니묄러 목사가 이렇게 무겁고 심각한 시를 썼을 때, 사람들은 머리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정화수로 말끔히 씻기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뉘우침 반성 회개와 함께 아, 저런 양심이 살아 있었구나 하고 깊은 고마움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이것은 예민한 헤아림만이 개인 사람과 사회의 양심을 깨운다는 것을 말해준다.
민주사회에서는 결코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검사나 판사나 언론인이나 교수나 어떤 종교지도자가 책임지고 사회를 이끌어나가지 않는다. 투표를 통하여 내 대신 일을 하여 줄 사람을 뽑는 것으로 민주시민이 할 일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그 투표행위는 지극히 작은 책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내 표를 던지는 순간 그 내 표가 도적맞지 않게 지키는 일이다. 그 일은 예민한 헤아림으로 우리 삶,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살피고 오지랖 넓게 관여하는 일이다.
나는 어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생선을 먹지 않기 때문에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바닷물에 버리는 것에 침묵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농부가 아니기 때문에 농산물값이 떨어져 힘들여 지은 농산물을 트랙터로 갈아엎는 것에 침묵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고, 힘들게 몸을 움직여 중노동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당한 노동자의 대우를 받고자 외치는 말을 귀막고 듣지 않을 일이 아니다. 나는 학교에 다닐 어린 아이를 집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험이나 수학능력시험이나 입학시험 따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수수방관할 일이 아니다. 나는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장관이나 정당원, 또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정책결정이나 외교행위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니다. 물론 지금은 전문화로 분화된 사회지만, 어느 특정 전문가만이 모든 책임을 지고 갈 수가 없는 복잡하게 얽힌 사회다. 나는 그가 아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이미 나는 굉장히 심각한 파멸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세심히 살피고 판단한 것을 적절한 말로 떠들어야 한다. 때로는 태극기로, 때로는 촛불로, 때로는 붓으로, 때로는 조곤조곤하는 말로, 그러나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적대감과 분노와 험상궂은 모습이 아니라, 안타깝고 깊은 맘으로 예민하게 헤아리면서 사는 사람이 많을 때 우리 사회는 건전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말, 장관의 말, 의원의 말을 믿지 말고, 내가 민감하게 헤아린 그 말을 내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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