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전 ‘한류 원조’…일본서 발견된 귀걸이 한 가야인 얼굴
등록 2023-06-20 08:00수정 2023-06-20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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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 기획전 ‘바다를 건넌 가야인들’
6세기께 일본열도에 건너간 가야계 이주민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하는 일본 고대 무덤 출토 조형물. 원래 죽은 이의 넋을 기리기 위해 넣은 상징물로 현지어로 ‘하니와’라고 불린다. 지바현 야마쿠로 1호분에서 나온 것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서 살아간 가야인의 모습을 당대 형상화한 유일한 유물로 꼽히고 있다. 노형석 기자
1600년 전 가야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4~6세기 영호남 지방에서 작은 나라들을 꾸려 일본 열도와 활발한 교역을 펼치며 오늘날 한류의 유력한 원조로 꼽히는 그들의 실제 모습을 오늘날 한국인들이 떠올리기란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일본에는 당대 가야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생생한 조형물이 남아서 전하고 있다.
지난 4월말부터 경남 김해시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바다를 건넌 가야인’의 전시장 들머리에서 바로 그 가야인의 상을 만날 수 있다. 6세기께 일본열도에 건너간 한반도의 가야계 이주민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하는 현지 고대 무덤 출토품. 원래 죽은 이의 넋을 기리기 위해 넣은 상징물로 현지어로 ‘하니와’라고 불리는 일종의 토제 인형이다. 일본 도쿄 근교의 지바현 야마쿠로 1호분에서 나온 것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서 살아간 가야인의 모습을 당대 형상화한 유일한 유물로 꼽힌다. 삼각형 모양의 뾰적한 고깔형 모자를 쓰고 목에는 구슬형 목걸이를 두르고 귀걸이를 한 인물상으로, 윗옷의 오른쪽 부분을 먼저 맞춘 뒤 왼쪽 부분을 여민 고대 한반도인 특유의 복식을 하고 있어서 당대 일본인의 모습과 다르다.
일본 규슈국립박물관, 후쿠오카현과 함께 공동주최한 이번 전시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의미가 특별하다. 철기와 기마술 등의 선진문물을 일본열도에 전파한 고대 한류의 주역 가야인들이 남긴 교류의 흔적들을 되돌아보는 최초의 전시 마당인 까닭이다. 일본에 남긴 가야인들의 자취를 낯선 현지 출토품으로 처음 국내에 보여줄 뿐 아니라 국내 가야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함께 비교하면서 살펴볼 수 있다. 색다른 느낌과 분위기로 다가오는 일본 현지의 가야계 토기와 조형물, 철기, 무기 등 259점의 유물들이 나왔다.
가야 이주민의 형상을 본뜬 토제품 하니와와 더불어 눈길을 끌어당기는 핵심 유물은 말과 소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5~6세기께의 하니와 무덤 조형물이다. 4~5세기 일본에 이주한 가야인들은 소와 말을 함께 가져가 현지에서 방목하면서 목축생활문화의 토대를 닦았다. 가축을 키우는 가야인의 목축문화가 당대 일본인의 실생활은 물론 장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말과 소 모양의 하니와를 통해 짐작하게 된다. 온갖 장식을 하거나 장식하지 않고 몸체만을 강조한 것, 새끼 망아지의 모습을 조형한 것 등 다양한 기형과 일본 특유의 깔끔한 매무새가 특징인 이 가축 하니와들은 가야, 일본의 끈끈한 고대 교류를 보여주는 단적인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전은 이외에도 가야인들이 탔던 것으로 추정되는 배가 새김된 하니와 토기, 가야의 특산품인 철덩이와 갑옷, 소용돌이 장식 달린 칼, 시루 얹은 이동식 부뚜막 등 일본 각지의 34개 유적에서 출토된 가야 관련 유물 260여점을 세 영역으로 나눠 소개했다. 현해탄을 건너간 가야 이주민이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나가면서 고대 일본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자취들을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25일까지.
r김해/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국립김해박물관 전시에 출품된 말을 소재로 한 5~6세기께의 무덤 조형물(하니와). 4~6세기 일본에 이주한 가야인들은 소와 말을 함께 가져가 현지에서 방목하면서 목축생활문화의 토대를 닦았다. 가축을 키우는 가야인의 목축문화가 당대 일본인의 실생활은 물론 장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이 말 모양 하니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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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2 h ·
한반도 계열의 인물이나 물건을 형상화한 하니와 (埴輪)들은 이것 말고도 몇 개 더 있습니다. 관서, 관동, 북구주 지방 등에서 발굴되고요. 그만큼 한반도 남쪽, 특히 가야 지방으로부터 고분 시대의 일본열도로의 이주나 쌍방 물물 거래들이 많았던 거죠. 한데 이주는 쌍방향이었습니다. 마한 지방 (나주 등)이나 변한/가야 지방의 고분에서도 왜계 토기 (하니와 포함)나 갑옷, 무기류, 장식품 등이 종종 나옵니다. 아무래도 반도에서는 신라, 그리고 열도에서는 大和 정권의 영토적 장악력이 각각 강해지는 7세기 초중반까지는 한반도의 남쪽 연안과 반대쪽의 일본열도의 연안 등 여러 지방들은 하나의 생활권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다스리고 식민화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국"과 "일본"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라고 보면 됩니다. 이 상황은 신라의 백제 및 대동강 이남 고구려 영토 장악, 그리고 일본에서의 중앙집권적 국가 건설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바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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