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4

'분단과 통일' 화두 삼은 역사학자 강만길 별세 - 손민석, Daham Chong

손민석

'분단과 통일' 화두 삼은 역사학자 강만길 명예교수 별세
중고등학생 시절에 읽은 강만길 선생의 <고쳐쓴 한국근현대사> 시리즈는 나의 세계관을 규정하는 책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고쳐쓴 한국근대사>에서 영정조기의 농민이 생산물의 얼마만큼을 수탈당했는지 꼼꼼하게 계산하는 부분이었다. 민중의 입장에서 조선후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그렇게 실감나게 알려주는 글을 처음 읽었었다. 내가 농민의 입장이라면 나의 생산물 중 이만큼을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수탈당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까. 그런 민중의 불만과 압력이 조선후기 체제개혁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는가를 수탈되는 부분에 대한 계산을 통해 제시하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어서 수험생활에 바쁜 그때에도 틈틈이 그의 저작들을 찾아 읽으며 밤을 지새웠다. 민족주의 [?] 로 불타던 나의 학창시절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대학교에 가서도 강만길 선생을 신봉하여 그 제자 분들을 쫓아다녔고 하나의 세계관으로 강만길의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자본주의 맹아론에서부터 조선혁명당과 통일전선, 일제시기 빈민생활사 연구, 좌우합작운동, 여운형에 대한 관심 등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연구들을 추적하며 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김용섭 선생의 저작들도 그덕분에 알게 되었고 강만길의 오래된 연구물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등을 헌책방에서 찾아 읽기도 했다.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와 좌우합작운동, 통일전선론 등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있어서는 꽤나 강점을 보이지만 오히려 그 본령이 되는 경제사 영역에서는 학부생인데도 불구하고 미진한 부분이 많다 느꼈다. 애당초 제대로 된 이론서가 없는 상태에서 <자본주의 이행논쟁> 등의 입장을 조선사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맹아"를 다룰 때는 결국 우리가 맹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개념적인 분석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자면 자본주의적 "이윤"의 맹아적 형태를 우리가 무엇이라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윤의 발생 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려면 확실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야 했다. 개인적으로 강만길, 김용섭 등이 그 부분으로 논의를 확장하지 못하고 레닌식의 '두 갈래의 길' 등을 논거로 삼은 게 많이 아쉽게 느껴졌다. 나중에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레닌의 '두 갈래의 길'도 <자본론> 3권에 나와 있는 이행론을 자기 나름대로 전유한 것이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길'과 '전前생산관계의 잔재를 제거하지 못한채로 이행한 타협적인 길'이라는 두 갈래의 경로를 레닌은 각각 "아메리카형 경로"와 "프로이센형 경로"로 규정한 것인데, 김용섭과 강만길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이 인식이 빠져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후기 사회구성체에 대한 규정을 전제로 그것을 아래로부터 제거해나가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경로와 지배계급과의 타협적인 경로 간의 차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분석이 빠져 있다.
자본주의 맹아의 형성과 그것의 전개과정(맹아→우클라드→지배적 우클라드→사회구성체)에 대한 분석에 이르지 못하였다. 지주제가 지배적이라 하더라도 다른 다양한 우클라드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존속하며 재생산 조건을 확보하고 있는지, 시전 중심의 독점자본이 무너지고 자유경쟁적인 난전이 활성화되었다면 그것이 전체 우클라드의 전개 속에서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이 이뤄져야만 했다. 이러한 해명이 부족한 결과 이병천의 후속 연구에 따라 강만길의 연구는 그 빛을 많이 잃게 되었다. 독점체제에서 경쟁체제으로의 이행이 아닌, 하나의 독점체제에서 또다른 독점체제로의 이행이 이뤄졌다는 이병천의 객주 연구 결론은 30여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주의 맹아론이 '부조적 수법'을 썼다 비판받는 것도 결국 이론의 부재로 총체적인 분석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주의를 좀 잘 공부해서 비판적으로 계승해보고 싶었다. 자본주의 맹아가 무엇인지 더 엄밀하게 규정함으로써 자본주의 이행의 문제를 이론화하고 강만길과 김용섭의 문제의식을 그를 통해 확장할 수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두 분의 입장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민족주의로부터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하다. 마르크스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계속해서 민족문제를 염두에 두고 체계화를 하는 걸 보면 그렇다. 계급과 민족이라는 두 주체를 어떻게 통합적으로 사고할 것인가? 강만길 선생께서 제 정신세계에 새겨놓은 화두는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내게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길은 곧 내 몸에 새겨진 강만길 선생의 흔적들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든다.
선생께서 영면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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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선생 ... 남은 자의 소회

갈등이 증폭되고 사회가 양분된 데는 이 어른의 영향이 컸다.
당신은 확신으로 추구했을 국가사업, 그 과정과 성과에 분노한다. 오래 전, 상속재산으로 후진 사학자를 위한 시상금을 만들었다는 미담도 있다. 그 후진양성 사업의 방향이 어떠하든.
대학 때 이 어른 수업도 듣고, 꽤 읽었다. 세월이 흘러서 읽으니 인식의 얄팍함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 치기에서 평생 벗어나지 않았구나, 그 유치함이 파괴력이 되었구나 ... 그런 생각.
2005년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김일성의 백두혁명사 수준으로 희화화했다. 그 악행을 정돈하려면 엄청난 공력이 소모되어야 한다. 그 점이 슬프다.
‘분단시대’ 화두 던진 역사학자 강만길 별세…향년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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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 화두 던진 역사학자 강만길 별세…향년 90
역사학의 눈으로 ‘분단과 통일’ 문제에 길을 내고자 했던 진보 역사학계의 거목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0. 고인은 193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959년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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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ham C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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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黎史) 강만길(姜萬吉) 선생님을 추모하며,

내가 강만길 선생님의 한국현대사 과목을 처음 수강했던 것은 1993년이었다. 복학한 이후로 다시 선생님의 한국현대사 과목을 재수강하고 한국근대사 과목을 수강한 것은 아마 199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학 연구의 사회적 역할과 그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인식하고 평가해 주던 마지막 시기가 그 때가 아니었나 싶다. 전공 수업임에도 교양 수업만큼 많은 타과학생들이 수강하고, 인기가 있던 역사 또는 사회과학 관련 교양수업들은 강의실의 수용인원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해서, 강의실 계단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그런 시절이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한국사를 공부해야 하는 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던 때였던 데다가, 선생님 과목들에서 학점도 잘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랬을지언정, 곧 정년을 앞두고 계시던 그 연세에, 학부 수업에서도 학과의 모든 선생님들 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매우 강렬한 여운으로 남았다. 그런 시대의 끄트머리에, 학부에서 선생님의 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였다는 것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강만길 선생님에 대한 그런 내 기억이 그 이후로 계속 유지되었던 데에는, 해방 이후의 한국사연구라는 분과학문 상의 지형도 상에서, 강 선생님과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위치했다고도 할 수 있는 내 지도교수님께서, 평소 강만길 선생님의 학문을 자주 높이 평가하셨던 것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후, 과거 강만길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한국현대사나 한국근대사 수업으로부터의 기억이나 내 지도교수님의 강선생님에 대한 높은 평가에서 벗어나, 나 스스로 조선시대사에 대해 강만길 선생님이 쓰신 논문들을 찾아 읽으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06년 무렵이었다. 

나는 당시 내 박사학위논문을 구성하는 한 챕터로 세종대 훈민정음 제정이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행된 것인지에 대해 서술하려고 했기 때문에, 세종대 훈민정음 제정을 다룬 기존의 선행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그 즈음, 일본에서 가나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해석이나, Sakai Naoki(酒井直樹)의 󰡔번역과 주체󰡕나, 고등학교 동창이며 지우이자 외우인 황호덕 선생의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과 같은 연구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으며, post-colonial studies의 관점에서 15세기 훈민정음의 제정과 그것을 연구한 근대국민국가의 국어학 연구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때 내가 읽은 강만길 선생님의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은, 유교적 통치권력의 문제와 그것이 표방하는 소위 “교화”의 문제와 그 교화의 대상으로 범주화되는 “백성”의 문제와 그리고 훈민정음의 제정 사이의 관계에 대해, 내가 특히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데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더욱 구체화하여 2008년 7월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의 한 챕터에서 다루었고, 이를 더욱 비판적인 관점과 새로운 사료들로 보완하여 2008년 11월 모교의 민족문화연구원에서 한국사연구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의 발표와 토론을 거쳐, 이듬해 이를 「麗末鮮初의 동아시아 질서와 朝鮮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라는 논문으로 게재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는 강만길 선생님의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에 대해, “그가 訓民正音을 ‘民本(민본)’이라는 신유학 정치이념의 실현으로 파악한 보수적 연구자들과는 달리, 정치권력이 통치를 위해 만든 수단이라 지적하고 世宗을 영웅시하는 인식을 비판한 것은 동시대의 다른 연구자들과는 구별되는 공로이다”라고 분명히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러나 訓民正音의 출현이 고려후기 이후에 나타나는 민 의식의 성장에 의해 추동된 것이라고 선험적으로 추측한 그의 인식은, 내발론적 시각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시 한국 근대역사학의 민족주의적 도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내 논문이 당시 학술회의에서 발표되고 이후로 논문으로 심사받고 게재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던 학과나 학교 안팎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히 네가 강만길 선생님의 논문을 비판하느냐는 식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내가 강만길 선생님의 연구를 높이 평가한 것은 쏙 빼고 비판만 한 것처럼 몰아간 비난의 배후에는, 학사부터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까지 모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나온 녀석이 하필 서울대 출신의 교수를 지도교수로 해서 이런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여기는 대책없는 사람들의 같잖은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강만길 선생님의 그 논문에서 배운 것을 특별하게 여기게 된 것에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이런 내 문제의식을, 나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강만길 선생님께서는 충분히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2008년 졸업 이후로, 기회가 되면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면서, 내가 당신의 논문에서 받은 영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먹고 사는 것이 바쁘다는 이유로 늘 생각에만 그쳤다. 양양으로 내려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그 후로 내가 각별하게 생각하는 허태용 선생님으로부터도 양양까지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결국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께서 요양원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만길 선생님의 논문을 통해 배운 문제의식을 그 이후로도 심화시킨 덕분에, 나는 이제, 訓民正音의 출현이 고려후기 이후에 나타나는 민 의식의 성장에 의해 추동된 것이라고 보았던 선생님의 문제의식이, 내가 10여 년 전 논문에서 제기했던 바, 구체적인 논증이 없이 “내발론적 시각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시 한국 근대역사학의 민족주의적 도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 해소되어야 마땅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만길 선생님께서 그러한 문제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약본 󰡔용비어천가󰡕에 대한 박병채 선생님의 해석을 인용한 것은 여전히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그런 박병채 선생님의 해석 자체가 매우 탈맥락화된 것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선생님께서 “그러나 한글은 지배권력의 처지에서 보면 통치수단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게 한 백성의 처지에서 보면 값높은 전리품이었다”고 굳이 쓰시면서 견지하고자 했던 문제의식만은, 매우 중요하게 다시 보게 되었다.

올해 2월 역사비평 142호에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에 대한 국어사 연구의 서사와 그 문제점들-이기문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의 마지막 단락은, 바로 그런 강만길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다시 보게 된 결과로 쓰인 것이다.

 “통설이 훈민정음을 통해 언어와 문자의 차원에서 민주주의라는 근대성이 어떤 주체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해 온 서사야말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그 민이라는 존재가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오히려 가로막는 해로운 서사이다. 통설의 서사대로라면, 민은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통치자가 만든 문자를 통해 계몽되고 교화되는 방식으로만 그 스스로의 정치적 역할과 권리를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통설의 서사가 설정한 민의 성격과 정치적 의지는 얼마나 수동적이고 박약한가. 그런 통설의 서사와 관점이 보여주는 역사적 상상력은 얼마나 빈곤한가. 민은 통치권력이 만들어낸 언어와 문자에 의해 단순히 교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언어와 문자를 전유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치적 의지와 역할을 드러내려 하였으며,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달성된다는 서사가, 오히려 지금껏 우리에게 더 필요한 서사 아니었을까”

라고, 나는 이 논문의 마지막 단락을 썼다.

나는 강만길 선생님께서 학교에서 강의를 담당하셨던 한국근현대사 연구자도 아니고, 또한 선생님의 학통이라는 것을 따르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내가 선생님의 논문에서 배운 것들을 떠 올리면서 쓴 이 논문의 마지막 단락을, 선생님 생전에 전해드리지 못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헌사로 삼아, 선생님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시길.






Park Yuha and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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