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먼저 낸 졸고를, 김미경 선생님께서 국역하시여 이제는 <동아시아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이라는 제목의 신간에서 수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졸고에서는, 영국의 산업 혁명 - 아편전쟁 시기까지 동아시아, 그 중에서 특히 중국이 유라시아 전체를 경제 등의 부문에서 리드해온 배경을 고찰해 본 것인데, 그 비결 중의 하나가 바로 능력주의적인 관료 선발 시스템의 작동이란 가설을 입증해볼까 싶었습니다. 그 시스템은 국가 행정력의 제고에 크게 기여해, 결국 국가 감독 하의 시장 경제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입니다. 졸고의 국문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전(前) 자본주의적 세계사 이해의 차원에서 한나라 말기부터 청나라까지 즉 세기 말부터 세기까지의 동아시아에서의 중세 관료제 국가의 형성사(形成史)를 고찰한다.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 초부터 소련을 비롯한 세계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학자들은 전자본주의적 세계사의 이해를 노예제 와 봉건제 내지 일부의 경우에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과 같은 개념 틀에 의거해 구축했다. 문제는 스탈린주의 시기 초기의 소련 학자들이 구축한 노예제 와 봉건제 단계를 포함한 세계사 발전의 5단계론 은 노예 소유나 봉건제를 세계사도 아닌 유럽사만의 특징으로 보려 했던 마르크스 본인의 의도와 위배되는 심각하게 유럽중심주의적 사관 (史觀) 이라는 점이다 이 사관은 노예 , 노비 의 노동이나 봉건 제후와의 관계가 결정적이지 않았던 동아시아 역사의 사실(史實)과도 잘 맞지 않는다. 일면 아시아 내지 다른 비서구 지역까지 포함해서 유럽의 타자 들의 역사를 특수화 타자화시키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의 논리도 탈 (脫) 서구중심주의 시대의 사학과 전혀 맞지 않고 동아시아 역사에 내재된 보편성의 파악에 오히려 방해되기도 한다 . 그래서 이 글은 봉건제 등과 같은 개념 틀을 완전히 버려서 중세 초기와 중기의 동아시아 역사를 일차적으로 관료 국가 발전 이라는 궤도의 차원에서 고찰해 본다. 이 글이 취한 고찰의 방식은 한나라부터 청나라까지의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료 기구 그리고 특히 능력주의적 관료 선발 및 고과(考課) 제도의 변천 등을 유라시아의 다른 국가체들과 대조·비교하면서 그 세계사적 의미를 비교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 송나라 시대의 중국을 사미르 아민(1931~2018)이 이야기한 '공납제 사회' 의 최고(最高)의 발전 단계로 정의한다. 동시에 이와 같은 발전의 단계에 고려 (高麗)를 비롯한 이웃 귀족 관료 국가들이 도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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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동아시아 관료국가의 형성과 그 특성 한나라 시기부터 청나라 시기까지:
중국 관료국가, 관료적 능력주의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경제적 체제 형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
박노자(블라디미르 티코노프,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교수) 1.
서론: 스탈린주의와 유럽중심주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의 소유자였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역 사와 이론이 주요 연구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등장 이전의 사 회경제적 체제에 관한 관심 또한 많았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자본 론』의 제3권(36장, 47장)에서 노예사회와 봉건제를 주제로 다루면서 고리 대금업이 초기 자본주의의 등장에 미친 영향과 자본주의적 토지소유권 이 소농 공동체에 어떠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왔는지에 관해서도 분석을
하고 있다(Marx, 1959[1894]).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집필한 『자본론』을 포 함한 어떤 저작에도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가 추후 자본주의가 발전한 서유럽 사회들 이외의 다른 지역들을 지칭했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에 릭 울프(Eric Wolf)가 간파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사회적 노동을 할당 하고 생산관계를 매개로 생성되는 인간들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관해 논 하면서도 때로는 다양한 단계의 생산양식들을 민족적 영토 집단과 연결 시키기도 하였다. 마르크스는 ‘게르만적 [생산]양식’ 이후에 ‘봉건적 [생 산]양식’으로의 진화, 또는 이들과는 뚜렷하게 다른 양상을 보였던 ‘슬라 브적 [생산]양식’를 언급했다(이는 초기 슬라브 사회들에 내재된 형태였던 것으 로 추정됨. Wolf, 1982: 75-77 참조). 마르크스는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럽의 고대, 중세와 같은 생산 양식(노예제 사회와 봉건주의)이 유럽 이외 의 사회들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
겔스(Marx, 1976[1858]: 473; Engels, 1959[1878]: 243)는 여러 저술에서 ‘아
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이 표현은 당시에도 논란 을 불러일으켰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문제를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이의 특징으로 사유 재산보다는 공동 재산에 기반을 둔 현상을 꼽았다. 마르크스는 이 와 같은 경우에는 국가를 생산(관개 灌漑 등의 제공자로서)과 잉여(세금을 통 해)의 관리를 통해 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능동적 행위자로 인
식했다(Sawer, 1974: 49-104). 이러한 인식은 절대주의 시대 이전의 유럽 국가들에 비해 중동이나 동아시아의 관료주의 국가들이 경제 행위자로 서 훨씬 더 발전된 상태였던 경험적 현실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관찰이 다(아래 참조). 그러나 마르크스의 독특한 ‘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관한 인 식의 상당 부분은 정보부족과 함께 19세기 유럽중심주의(‘전제주의적 동
양’ 등의 개념, Sawer,1974: 36-49 참조)의 산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사유지의 소유권은 진나라의 상앙(商鞅, 기원전 390년경-338년경)의 개혁 이후부터 있어왔으며 진나라(기원전 221년-206년)와 한나라(기원전 202년-기원후 220년)의 시기 동안 제도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Deng, 1999
년: 48년-72년).
소련의 초기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자본주 의체제 도래 이전의 인류사의 분류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논의가 있었 지만(Fogel, 1988) 특히 후자에 대한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채 택하는 것은 1930년대 스탈린식의 통치에 불리한 정치적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기에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러시아 의 전제 정권조차도 아시아적 생산 양식 특유의 “일반화된 노예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던 ‘모스크바화된 아시아적 통치방식”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제국은 서유럽과 일부 유사점들을 공유하고, 거기 에다 서구와의 군사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근대적 개혁을 도입하려고 했던 점에서 ‘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르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서 구적 개혁이 결국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져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에 크게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믿었다(Sawer, 1974: 156-164). 물론 이런 마르크스 의 이론은 러시아 제국의 경계 안에서의 ‘일국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믿 었던 스탈린의 생각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더욱이 라조스 마자르(Lajos
Magyar, 1891-1937)와 같은 코민테른 내부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이론 가들도 ‘아시아적’인 중국에서 봉건제의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중국 혁 명의 주요 방해요소는 ‘아시아적’ 패턴의 근대적 해체에서 탄생한 관료 및 자본가 계층일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에서 단순히 ‘반 봉건, 반제국주의’ 혁명이 아닌 반자본주의(사회주의)의 태동을 주창한 트 로츠키의 견해에 위태로울 정도로 가까웠다. 이는 혁명의 마지막 단계인 사회주의 단계 이전의 “부르주아 혁명”의 “필요성”을 믿은 스탈린의 “2단 계 혁명론”과 “반봉건적” 민족주의적 정치인(국민당 등)들과의 동맹을 맺 고자 한 그의 성향과도 배치되는 내용이었다(Brook, 2016). 스탈린은 전 세계가 원시성에서 출발하여 노예제와 봉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거쳐 “5단계”를 통한 발전을 한다는 그 역사 이론을 1938년에 최종적으
로 발표하였다(Stalin, 1952 [1938]). 소련, 동유럽, 중국대륙 등 “현실 사 회주의권” 학자들은 스탈린의 ‘5단계 이론’에 근거해서, 고대 지중해 지 역과 중동, 인도 그리고 여타 왕국과 제국의 역사에서 노예제와 봉건제 를 구성한 주요 요소들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이 역사상이 1940-80년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하여는
Dirlik, 1996: 244-254 참조).
그러나 서유럽의 중세 봉건주의의 중심지 이외의 지역에서 ‘봉건적
관계’를 발견한다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당나라, 비잔틴 제 국, 이란의 사산 제국, 또는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테스 를 포함한 기원전 1천년 시기의 유라시아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제국에 는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 또는 몇 세대에 걸쳐 세워진 강력한 가문들로 이뤄진 귀족들이 주도하는 관료제도가 있었다. 이런 고대 관료 제도의 어디에서도 봉건적 관계의 기반인 영주들의 전장 봉사와 그 대가 로 영지가 할당되는 계약관계로 이뤄진 사회적 질서를 증명할 만한 증거
들은 발견되지 않았다(Le Goff, 1988: 90-95). 인류가 역사발전의 단계에 서 동일한 과정을 겪게 된다는 보편주의적 사상이 내재된 마르크스주의 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서유럽의 경험에서 추론된 봉건제 개 념을 다른 중세 사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유럽중심주의의 인지적 폭력이 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그가 주창한 “5단계 이론”을 좀 더 자유 로운 분위기에서 덜 교조주의적인 소련 학자들이 은근히 대폭 수정한 것 은 어쩌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전후 소련역사 연구에서 독보적인 한국
전통시대사 전문가인 미하일 박(Mikhail Pak, 1918-2009)은 전근대 한국 의 ‘봉건제’를 3-4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 봉건제’로 정의 했다(Pak, 1979: 144-198; 한국의 초기 국가의 진화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의를 참 조). 한국의 전근대사에서 ‘사적인’ 봉건적 관계가 부재했기 때문에 봉건 제를 둘러싼 이념적 “순수성”을 견지하기 위해 ‘국가 봉건제’라는 수정 된 대안이 절충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소련의 저명한 중국사 전
문가인 바실리 일리우셰치킨(Vasily Ilyushechkin, 1915-1996)은 더 나아가 1960년대 후반부터 경제외적(강제적) 수단에 의해 강제되는 지대(地代) 납부에 기반한 전지구적인 전근대적 생산 양식의 존재를 거론하기도했
다(Ilyushechkin, 1970). 이런 맥락에서, 이 장(章)은 2세기 후반부터 19세 기동안 중국을 여타의 동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한 다른 유라시아 사회와 비교하려고 한다. 비교의 초점은(화폐가 사용된 시장에서의 교환의 중요성에도 불구하도) 주로 농업생산에 기반한 사회의 상부 구조의 형태, 즉 관료화의 정도와 합리적이고 능력주의적인 원칙에 따라 관료 제도를 운영한 능력 이다. 이 장은 10세기까지 중앙집권세력이 약하고 통합되지 않은 왕국들 이 봉건화를 겪은 중세 초기 유럽과는 달리 중국 송나라(960-1276)시기 에 세계 최초로 역동적인 생산성을 바탕으로 탈(脫)귀족화와 관료적 통 치를 완성한 중국의 경험을 추적, 분석하려고 한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 에서 송의 인근 국가 중 어느 나라도 유사한 종류의 관료적 합리화를 완 전히 달성하지 못했고, 비잔틴 제국과 같은 전근대 유라시아의 다른 선 진 관료 국가들도 동일한 종류의 능력주의 체제를 가동시켜 인재의 등 용, 고과평가, 승진 등의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은 인류의 전근대 역사 전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와 그 의미를 논의할 것이다. 마르크스나 엥겔스(예를 들어 막스 베버 와는 달리)는 중국의 관료적 제국주의의 발전에 대해 명시적으로 논한 적 이 없지만, 전근대 범유라시아적 교역체계에서의 관료 제국으로서의 중
국의 중심성(Frank, 1998: 108-116)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 이전의 생산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논의는 의미가 없 을 것이다.
2. 2세기와 3세기: 주요 변곡점
기원후 2-3세기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친 위기의 시기로, 기원전 12 세기 후기 청동기 시대의 문명 붕괴 이후 두 번째의 큰 시련을 맞닥뜨린 시대였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동, 서양을 막론하고 대륙의 구석구석까지
기존의 문명들이 쓰러져버렸다. (de Crespigny, 2007: 514-516; Harper, 2017:
115) 활발해진 장거리 무역을 통해 퍼져나간 질병 외에도, 3세기 유라시 아 대륙 전체에서 발생한 한랭기후에 의한 일련의 흉작 등은 제국 내부 의 반란과 외부 부족들의 국경침략의 증가로 이어졌다(Zhang, 2010). 이 로 인해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한나라에서 제국은 붕괴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395년에 분열된 뒤, 476년에는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220 년에 한나라가 멸망한 뒤 북쪽의 위(魏), 남서쪽의 촉(蜀), 동남쪽의 오 (吳)와 같은 3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나라(266420)는 4세기 초에 남쪽으로 이동하여 다양한 이민족 왕국이 북중국의 평야를 통치하게 되었다. 중국 북부는 최소한 16개의 경쟁 왕조에 의해 1세기 반 동안 통치되었고, 5세기 중반에 몽골의 시조인 선비(鮮卑)족의 씨족이었던 탁발씨(拓跋氏)에 의해 설립된 북위(386-534)에 의해서 재통 합되었다. 그러나 통일된 제국에 대한 염원은 분열과 왕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위나라의 후계국인 북쪽의 수나라
(581-618)는 진나라(557-589)를 정복했고 중국의 분열은 4세기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중국의 위, 진, 남북조 시대의 분열에 관하여는 Lewis, 2009 참조).
고대 동, 서양의 거대한 두 제국이 3세기에 겪은 문제들은 유사하고
밀접하게 연관된 일련의 자연적, 사회적 현상에 기인한 것이지만, 장기 적인 결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심지어 철기 시대 동양과 유라시아 역사에서의 ‘동서양의 큰 격차’의 예로도 볼 수 있겠다. 로마의 붕괴 이후, 유럽은 무엇보다도 매우 높은 수준의 분권화로 인해 소위 ‘암 흑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에 프랑스로의 점진 적 통합의 선례로서 메로빙거 왕국(5세기 중반-751년) 또는 카롤링거 제국 (800-888년)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두 왕조 국가들 중 어느 것도 16 세기 이후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까지 그 영토와 인구에 대한 완벽한 통 제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중앙집권군주제의 원시적 형
태의 과세 제도(Aid royale, 문자 그대로 ‘왕에 대한 원조’, 초기에는 자발적인 기 부로 추정되는 시스템)가 13-14세기에 프랑스에서 생겨났고, 토지세(taille) 는 1439년부터 정기적으로 부과되었지만, 획일적이지도 국가의 모든 지 역에 공평하게 적용되지도 않았다(Bloch, 1940). 귀족들 사이의 사적인 싸움이던 영유권 분쟁은 14세기에도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이 시기 이
후부터만 계속 감소하기 시작했다(Firnhaber-Baker, 2010). 체계적인 과세 를 통해 사회로부터 정기적으로 잉여를 수취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과 대규모의 합법적 폭력의 독점으로 특징지어지는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 능은 로마 제국의 쇠퇴와 붕괴 이후 1천 년 이상이 경과하여 절대주의가 시작될 때까지는 유럽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에서 의 분열은 훨씬 짧은 기간 동안이었고, 하지만 한나라가 해체된 지 4세 기도 안 되어 수나라는 한나라의 영토 대부분에 대한 중앙집권적 지배를 할 수 있었다. 후기 로마는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년-305년)
시기와 그 이후에 고도의 관료제를 발전시켰다. 한나라와는 달리 로마인 들은 능력에 의한 공식적인 채용과 고과, 승진에 관한 통일된 범국가적 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았고, 고전문헌지식의 확인을 위한 시험제도도 만들지 않았다. 후기 로마시대의 관리들은 매우 다양한 사회문화적 배경 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종 에퀴테스(하위 귀족) 출신들이 고위직에 등용이 되었으며 특히 황궁의 많은 관리들과 서기관들은 다양한 민족의 황실노 예나 속량(贖良)노예 출신들이었다. 승진은 일반적으로 고위 관리의 지명 또는 경우에 따라 금전 상납 등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연공서열에 의해 서도 가능했으나, 궁정이나 공무원들과의 사적인 연줄을 통해서도 가능
했다(Jones, 1964: 563-606). 로마의 공직사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구의 군주제 국가들의 관료제에 대한 중요한 선례였다. 그러나 후기 로마시 대 관료제의 관리하기 힘들고, 번거롭고, 형편없는 구조들은 로마 이후 의 군주제들에 의해 복제될 수도 없었고, 복제되지도 않았다. 결국 후자
는 봉건제의 길을 걸었고(서유럽 봉건제에 대해서는 Strayer, 1965: 4 참조), 권 력은 중앙집권화되는 대신에 각각 지방에서 세습적 영주들에게 위임했 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은 본질적으로 경쟁적 정치체들의 공동체 형 성, 그리고 복수의 권력 중심지의 분권 과정에서 탄생했다.
3. 수나라와 당나라: 귀족 군주제의 능력주의
동아시아는 서유럽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사실 6세기 로마제국 이후의 유럽의 ‘야만족’ 왕국들이 유라시아 오지의 후진국에 불과했던 만큼, 동 아시아의 길은 그 당시로서 “최선”으로 보일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한제 국 영토의 대부분이 수나라에 의해 재통일되자마자 더욱 개선된 능력중
심의 관료 등용 제도가 다시 만들어졌다. 이미 587년에 310개의 현(縣) 은 3명의 관직 등용 후보자의 명단을 수도에 제출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추천은 고전 독해를 포함한 여러 분야(수재 秀才, 명경 明經 등)를 아울렀 다. 7세기 초에는 진사(進士)와 준사(俊士)라는 두 개의 새로운 범주가 추 가되었는데 관료 등용 시험은 현지에서의 구두시험과 해당 중앙정부기 관에서 필기시험의 통과가 주요 항목이었다. 임명권은 고위 관료들의 경 우 황제와 재상(宰相), 중하위 관료들의 경우 이부(吏部)에 부여되었는데 지원자들 대부분은 국영 학교의 졸업생들이었다(Xiong, 2006: 123-126). 수나라가 멸망한 후에 기록된 왕조사는 국학이 원래 2명의 박사(博士)와
10명의 조교(助教), 그리고 더 하급의 교원인 전학(典學)과 직강(直講) 등 을 고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수나라가 통치하기도 전에 양나라 의 무제 황제(재위 502-541)는 비천한 집안 출신의 학생들도 입학을 허용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수서 제21권; 魏徵, 1987[636]: 724). 수나라의 국자감 (國子監)은 72명, 태학(太學)은 200명, 사문소학(四門小學)은 300명의 학생 을 교육했는데 물론 그와 같은 교육과 시험제도의 발달이 귀족지배의 종 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수나라의 핵심영토이던 산시(陕西) 와 간쑤(甘肅)출신의 귀족들인 ‘관롱(關龍)’ 파벌 구성원들은 관료제도의
상위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陈寅恪, 1982; Ng, 2017; Xiong, 2006: 116-122). 그러나, 통일되지 않은 중국에서도 두드러졌던 귀족제적인 특색에도 불 구하고, 능력 중심의 채용과 승진은 공직 사회의 운영에 이상적인 모델 로 남아 있었다.
수 세기동안 다양하고도 광대한 영역에 사용되었던 통치의 기술은
수나라 시대에 들어서자 빠르고도 균질하게 발전했다. 수나라가 시행했 던 정책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현 등 지방 관리들이 출신지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한 것(소위 ‘회피의 규칙’)을 포함한다. 이런 금지령은 몇 세기 후 카롤링거 왕국에서 진행된 것 같은 종류의 봉건화를 막기 위해 실시한 정책였다. 이와 유사한 목적으로 주요 지방 공무원의 재직 기간 을 3-4년으로 정하고, 가족 동반을 금지하였다. 연말 고과평가는 성과에 기반한 승진이나 강등의 근거가 되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순회 감사관들
은 중앙 집중식 통제의 또 다른 방법이었다(Wright, 1976: 85; Xiong, 2006: 113-115). 공직사회의 모든 단위를 통제하던 막강한 어사대(御史臺) 또한 강력한 감독의 기능을 맡고 있었다. 관료제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의 강화와 특히 587년(高明士, 1999: 55)부터 실시된 시험을 통한 채용 시스 템의 도입이라는 획기적인 변화는 과거와의 혁명적인 단절을 의미했다.
귀족이 지배하던 사회에 합리적인 관료주의적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위에 서술된 관료화의 과정이 단선적일 수는 없었다. 수나라는 단 명했고, 그 원인은 통치기반 건설의 중앙 집권적 계획과 영토 확장을 위
한 과도한 자원의 동원에 있었다(Wright, 1976: 133-149).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618-907)는 수나라의 미완의 사업 중 일부를 성공적으로 완 수했는데 예를 들자면, 동투르크(돌궐 突厥) 제국(599년-630년)에 이어 서 투르크 정권(603년-658년)까지 무너뜨리고 북부 초원지역에서의 침범 위 협을 일시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 정복에 실패했지만, 당나라는 668년에 신라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수나 라 몰락의 교훈을 염두에 둔 당나라는 과도한 정부의 개입과 사회적 개 혁에 매달리기보다는 이미 정착된 통치패턴을 수용함으로써 연착륙을 하는 방식을 택했다. 7세기 중반에 인구가 5천만 명에 달했던 당시의 대 국이었던 당나라 전체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관료들은 극히 소수집단이 었다. 당나라 말기에는 4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고종 재위 시대에는 고 위 관료 13,465명만이 있었다. 이를 인구비례로 환산해보면 대략 천 명
당 중앙 관료가 한 명이 있던 셈이다(金觀濤, 劉青峰, 1984: 62).
효과적인 관료적 통치는 현 단위까지 도달했지만, 딱 그 정도까지
였다. 마을자원의 수취에 있어, 마을사람들의 일상이 지역의 주요 문중 등 재향 엘리트들의 강력한 통제 하에 있었기에 관료들도 이런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Twitchett, 1976: 13). 이에, 당나라의 평민들은 국 역(國役)의 과중한 부담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군 대는 직업군인을 제외하고는 지역 농민들로 민병대를 만들었고, 특정 작 전의 수행이 필요할 때만 농민 징집병들이 배치되었다. 742년, 궁중 관 리들의 계산에 의하면 변경 부대원들의 숫자는 전체 48,909,800명의 인 구와 8,525,763개의 가구 중에서 476,900명에 불과했다(구당서 제9권; 天
寶 원년, 음력 8월: 劉昫 1987[945], 권1, 216, Graff, 2017). 이 계산에 따르면 약
100명 중 1명이 군사의무를 수행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18세기 초 프랑 스의 50명 중 약 1명, 프로이센의 27명 중 약 1명이라는 통계와 좋은 비 교가 된다(Graff, 2017). 군사 및 국가 기반 시설 사업의 유지비는 정부가 각 납세 가구에게 경작지를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징수한 곡물의 세수에
의해 조달되었다(Twitchett, 1970: 25). 국가를 위한 연간 20일 간의 무급 부역(賦役)노동도 종종 세금 납부로 대체되었는데(Li and Lewis, 2009: 56), 한마디로 당나라의 정치·사회 질서의 중심에는 고도로 전문화된 관료 집단이 있었고 그들의 주요 목표는 잉여 수취의 단기적 극대화보다는 장 기적인 안정적 수급이었다.
특히 관료의 채용과 승진을 위한 능력중심의 제도는 관료들의 최 소한의 전문성을 보장했다. 수도에서 치러진 과거 시험은 621년에 재개 되었고, 수나라의 수도에 있던 3개의 학교도 다시 문을 열었다. 626년에 는 342명이던 학생 수가 807년에는 650명으로 늘어났다(王溥,1989[961]: 1157-1161). 7세기 중반까지 당나라 제도의 정착화가 진행되면서 졸업생 의 수도 증가하였다(시험합격 그 자체가 임용보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수재(秀才)과 급제자들이 많았지만, 7세기 후반에는 명경(明經) 및 진사(進士)과 중에서 후자가 더 권위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681 년부터 명경과와 진사과는 확연하게 구별되기 시작하였는데, 전자는 유 교와 도교의 고전에 대한 문헌 지식의 통달에 초점을 맞춘 반면, 후자 는 정치적, 전략적 문제에 관한 주장을 펼치는 능력을 포함한 논술 능력 을 중시했다. 7세기말부터 전시(殿試)와 같은 최종의 과거시험은 황궁에
서 거행됐다(杜佑, 1988[801], Vol. 1: 354; Twitchett and Wechsler, 1976: 276-
277). 여기서 주지할 바는 ‘능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전문성이나 문헌적 지식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후세들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은 당 태종 (재위 626-649)은 632년에 그의 측근들에게 ‘우직한’ 사람들을 등용시키 고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성공적인 통치의 열쇠라고 언급을 한 내 용이 오긍(吳兢, 670-749)이 편찬한 유명한 정치개요인 『정관정요』(貞觀政要)에 기록되어 있다. 태종의 신하였던 위징(魏徵, 580-643)은 이런 사상 을 더욱 발전시켜, 관료의 등용은 고전과 관료적 지식과 더불어 인품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吳競, 1600, 3권: 60) 이는 부패나 반역을 막기 위한 고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제도들은 귀족 관료제의 기본적인 특성을 바꾸지 않았다. 귀족 관료라고 함은 공직에 있지 않더라도 지배계급으로서 사회적 지위 를 계승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당나라 고위 관료의 대부분은 국가에서 위임하여 만들어진 족보에 상세하게 기록된 “명문가” 씨족 출신들이었
다(Ebrey, 2010: 34-49, 87-115; Ng, 2020). 귀족출신 공직자들은 적어도 아 들 중 한 명은 음서제를 통해 관료로 등용될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들의 지위는 사실상 세습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매년 실시되는 진 사과 시험은 기껏해야 20~25명 정도의 급제자만 배출했고, 그들 대부분
은 엘리트 또는 적어도 반(半)엘리트 계층 출신이었다(Twitchett, 1973: 78-
82. 대체로, 당나라 시대 내내, 과거제를 통해 배출된 관료들은 전체의 10 퍼센트에
도 이르지 못했다. Twitchett, 1976: 21). 또한 진사과 등의 평가 방식은 반드 시 객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명(名)재상 위징(魏徵)은, 640 년에 황제의 상벌 관행에서의 족벌주의를 폭로한 것으로 유명하다(吳競, 1600, 권3: 74-88). 관료제는 황실의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감찰 기관인 어사대(御史臺, Twitchett, 1970: 106-108 참조)를 통해 견 제되었고, 지방 관리들의 정기적인 월말 보고서와 연간 세금기록 등의 제도를 통해서도 통제되었다(Ikeda, 1973). 이러한 기제들을 통해 결속된 관료조직이더라도 755년부터 763년 사이에 발생한 안록산(安祿山)의 반 란(Pulleyblank, 1955) 이후에 현저하게 분열되기 시작한 당제국의 정치적 권위의 하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능력위주의 등용 과 세밀한 통제 수단의 결합은 당나라를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방대한 영 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한 근간이 되었다.
4. 비잔틴 제국, 이란 제국, 아랍 제국: 능력주의의 미발달
당나라 관료제에서 충분히 발견되는 능력주의의 기초조차도 당대의 동 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란의 사산 제국 (224-651)은 초기부터 소위 ‘명문가’(vuzurgan)라고 불리던 귀족계급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그들은 명성이 자자한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던 사 산 기병들을 모집하고 지휘했다. 이 귀족의 사병들은 사산군의 핵심이었 고, 사산군에는 변경 지역에서 모집된 왕실 경호원과 보조병력 등을 제 외하고는 상비군이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산 왕조의 황제들은 통치를 제도화하고 관료화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들을 보좌했던 관료의 대부분은 귀족과 조로아스터교 사제직에서 발탁되었으며, 능력 위주의 등용을 위한 공식적인 루트는 없었다. 결국 견제받지 않은 귀족 명문가들의 권력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끝없는 경쟁으로 내몰리고 아랍
공격에 직면한 왕조의 약점으로 작용했다(McDonough, 2011). 비잔티움 제국은 당나라 통치자들도 잘 알고 있던 유라시아 대국이
었다(Hirth, 1975[1885]; Kordossis, 1994). 비잔티움 제국은 동아시아 지역 을 제외하고 7세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관료제를 가지고 있었다.
8세기 초에 약 700만 명이 되는(Treadgold, 1997: 570) 인구는 제국의 수도 인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약 500명의 고위직 관료들에 의해 지배됐다. 고 위직들은 500명에 달하던 군사 및 재정담당 관리자들과 수천 명의 하급 직 관리들의 보좌를 받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비잔티움 제국의 관료화 의 수준은 당나라보다는 낮았지만 아주 큰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 다. 7-9세기의 당나라와 비잔티움 제국은 ‘국가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 던 전형적인 ‘관(官) 본위의 사회’였다. 이 ‘국가 엘리트’들은 좋은 교육을 잘 받은 귀족들로 촘촘한 그물망과 같은 인맥을 가진 집단으로서 공무원 이나 군 복무 경력을 통해 국가의 행정 자원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으며 이들의 성과는 정기적으로 재평가를 받아야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통 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들은 지방 행정관들이 어느 한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고심을 했
다. 그들이 결국 고안한 제도상으로는 예를 들자면, 지방에 파견된 고위 관리자들은 정기적으로 교대근무를 했으며, 그들의 평균 한 지방에서의 재직기간은 약 6년이었다. 무관과 문관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경력트랙 이 운용되었다. 그러나 채용, 임용, 승진에서 제도화된 능력주의의 요소 를 찾기는 어렵다. 학습능력에 대한 채용시의 고려는 명백한 장점이었지 만 대체로 인맥, 특히 황실의 인맥은 채용과 승진에 결정적인 변수였다
(Brubaker and Haldon, 2011: 601-616).
페르시아인과 비잔티움인(다수가 시리아인)과 함께 아랍인들은 당 나라의 고도로 국제화된 문화에서 중요한 관심대상이었다. ‘아라비아’
는 ‘대식’(大食)으로 불렸고, 우마이야 왕조(661-750)와 아바스 왕조(7501258)는 각각 ‘백의대식’(白衣大食)과 ‘흑의대식’(黑衣大食)으로 불렸다(Leslie, 1986: 16-31). 절정기를 이뤘던 850년경의 아바스 왕조의 인구는 5천 만 명으로 당나라의 인구규모와 거의 비슷했다. 아바스 왕조의 통치는 8 세기 중반에 점점 더 관료화되었고, 비서들(kuttāb)의 역할이 점차 중요 해졌다. 그러나 비서직은 지식이나 능력에 기반한 채용 및 승진을 통해 충원됐다기보다는 몇몇 명문가 구성원들이 거의 독점했다. 예를 들어 바 르마키즈(Barmakids) 가문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발치 출신으로, 아
스 사파(750–754), 알 만수르(754–775), 알 마흐디(775–785)를 거쳐 유 명한 하룬 알 라시드(786–809) 하에서 803년 몰락할 때까지 관료제를 조직하고 통솔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바스 왕조는 문무관의 관료체계 를 매우 정교하게 나누어 통치하였다. 10세기에 중앙 행정 기관은 13개 의 부서(dīvan)와 그 하위 부서(majlis)로 운영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
기능 중에서도 토지세의 징수는 국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었 다. 낮은 직급의 서기관들도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위직은 아랍계가 아닌 이민족 명문가 집안들이
세세대대로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van Berkel, 2013: 87-99). 비잔티움 제 국과 오랜 숙적관계였던 아바스 왕조의 통치자들은 고도로 발달한 기록 문화에 그 뿌리를 내리는 정교한 관료 기구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 두 대 제국 모두 인맥과 가문의 지체 등이 아닌 개인의 능력에 기반한 합리적 인 채용과 승진 체계를 개발할 수 없었다.
‘능력’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관해서 당나라 궁중에서 끝없는 논쟁이 벌어졌으며, 당나라 제도사의 총서인 『통전』(通典, 801)에 부분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648년 당시 과거 시험 책임자, 즉 지공거(知貢舉)가 두 명의 진사 수험생의 글을 “천박하고” 부적절한 미 사여구로 가득한 문장이라 혹평하여, 만약 그들이 관료로 임용되면 국정 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통전』에 수 록된 몇몇 문장들(예를 들어 674년에 작성된 고종에게 보낸 주소 奏疏)의 경우 도 화려한 미사여구에 대한 집착을 한탄하면서 황제가 공직 후보자를 선 택할 때 문학적 능력보다는 ‘덕행’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측천 무후(則天武后, 690-705) 시대의 한 지공거가 황제에게 제출한 주소(奏疏) 에는 수험생들이 내는 잡문(雜文)이나 경계문(箴), 명(銘), 내지 논(論)과 상소문(表)의 표현력뿐만 아니라 글쓴이의 덕성도 중시할 필요성과, 무 능력한 귀족의 세습권력의 부당성에 관한 언급도 있었다(杜佑, 1988[801], Vol. 1: 402-412). 의심할 여지없이 당나라 시대 인물들은 정부의 관료 채 용, 평가, 승진 제도에 만족하지 않았고, 관계(官界)가 주로 귀족에 의해 사실상 장악돼 있었다고 보는 경향이 강했다. 한데 확고히 뿌리내린 귀 족들의 특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의 체제는 귀족들로 하여금 고전에 관 한 규범적 지식의 습득과 규범적인 행동 등을 강요하기도 했다. 당나라 의 이런 관료 제도를, 7세기 중후반에 이미 이 모델을 선택적으로 도입 하기 시작한 인근국가들은 매우 이상적인 모델로 여겼다.
5. 초기 한국과 일본: 귀족 통치의 도구로서의 관료주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가장 먼저 정규화된 중국식 관료제의 효율성을 이 해한 나라들은 한반도의 초기 국가들이었다. 그들과 이후 일본열도의 발 전을 살펴보면, 진나라 치하에서의 급진적인 탈(脫)귀족화의 경험을 공 유하지 않았던 후발 인근국에서 관료화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될 수 있는 지를 가늠할 수가 있다. 오웬 밀러(Owen Miller)가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에서의 국가 형성이 중국 문명의 변방에서 시작되어,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 현지에서의 사회적 계층화와 지배구조 확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Miller, 2016: 60).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후 313 년 사이에 한반도 북부와 오늘날 중국 북동부에 위치한 상당부분의 영
토는 한사군(漢四郡)에 의해 통치되었고(Pai, 2000: 127-139) 군관들을 포 함한 재지(在地) 중국계 주민들은 기원전 1세기경 압록강의 남쪽과 북쪽 에 살던 현지민 족장들이 세운 고구려의 행정체제로 궁극적으로 편입되 었다(안정준, 2014). 그러나 4세기 중반까지 초기의 고구려는 귀족 정치체 였으며, 원래는 여러 개의 지역사회인 ‘나’(那: 나라, 특징 씨족이 지배하는 지 역)가 연방으로 진화한 결과였다. 이러한 정치체제에서는 대부족장 출신 의 대가(大加)나 나(那)의 유력자 출신인 패자(沛者) 등의 귀족들, 특히 왕 족인 고추가(古雛加)들은 각자가 그들의 토지, 농민 가구 및 사병들을 가 지고 있었고, 그들의 지위는 당연히 세습되었다(이준성, 2016). 고구려는 373년에 성문법인 율령(김부식, 1996년[1145년] 1권: 508)을 반포하였고, 그
1년 전에는 수도에 태학(太學: 김부식, 1996년[1145년] 1권: 508)을 열어 귀족 출신의 관료 양성소 역할을 하게 하였다. 668년 당나라의 공격으로 멸망 할 때까지 고구려 후기에는 14개의 관등이 존재했지만, 중국의 사료에 의하면 귀족들끼리 사병을 동원하여 최고 관등인 대대로(大對盧, 일명 토
졸 吐捽)를 놓고 내전을 벌이곤 했다는 기록이 있다(임기환, 2004: 201-258 참조). 고구려의 관료적 구조는 명확히 세습 귀족에 의해 독점, 관리되고 있었으며, 이들은 관료적 구조를 이용하여 예속 신민들로부터 잉여 추출 을 체계화하고 영토 통제를 유지했다. 한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백제
(전통적인 연대로는 기원전 18년에서 기원후 660년, 현대의 연구자들은 서기 4세기
중반에 영토국가로서의 백제의 형성을 추정한다. Best 2006: 63)는 6세기 초중반 에 정교화된 관료주의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훨씬 더 강력한 고 구려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백제의 22개 전문 관서(부: 部)는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일본에서 온 외국 출신들도 영입하여 충원되었다. 영입 외국인 들은 최고 관료 계급을 지배했던 8개의 강력한 귀족 가문(소위 대성8족: 大姓八族)에 종속되지 않고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정동준, 2006). 그 시기 백제에서 관료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교육이 필수적이었 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규화된 능력주의 채용 패턴에 관한 증거는 없다.
백제와 고구려와의 끊임없는 경쟁구도 속에서 승리한 국가는 한국 의 남동쪽에 위치했고 경쟁 국가들과 비교적 지리적으로 떨어진 곳에 있 던 신라였다. 673년에 이르러서는 대동강 남쪽의 영토의 전부를 지배했 고, 경쟁자들은 이미 나당 연합공격의 공격으로 멸망한 뒤였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서기 1세기에 소위 ‘부(部)’라고 불리는 귀족 들이 주도하던 느슨한 집단으로 시작되었다. 간지(干支) 또는 이벌찬(伊尺湌, 일명 이찬 伊湌: 이 귀족 칭호들이 나중에 공식적인 관등이 되었다)으로 알 려진 이들 부의 지배자들은 초기 신라의 왕인 매금(寐錦)과 동류로 인식 되었고,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물리력으로 그들만의 사병을 가지고 있
었다. 신라가 율령(520년, 김부식, 1996년[1145년] 1권: 150 참조)을 채택하
고, 곧 중국에서 왕(王)이라는 칭호로 알려진 군주 아래 17관등제(김부식,
1996년[1145년] 2권: 484-486)로 지배의 위계구조를 정비하면서 상황은 변 화하기 시작했다. 대등(大等, ‘권력자’라는 의미)으로 알려진 기존의 귀족들 이 새로운 관료 계층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하일식, 2006: 45-121). 이 러한 위계질서는 격동의 7세기에 걸쳐 더욱 확대되고 확립된 질서로 발 전했는데, 신라는 경쟁자인 이웃 국가들과의 사활을 건 싸움에서 승리하 기 위해 중앙집권화와 관료화가 필요했다. 651년부터 신라에는 전쟁, 세 금, 법 집행 관련을 포함한 44개의 전문성을 가진 행정 부서들 사이의 위 계를 관장하기 위한 왕실 사무국(집사부 執事部, 김부식, 1996년[1145년] 제2 권: 488-506)이 있었다. 중앙 행정 기관들에 1,260명의 전임 관료들이 임 용되어 있었고, 군대와 지방 공무원들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약 5,700명 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왕실의 필요에 대응하는 행정 부서
는 115 개 정도로(김부식, 1996[1145], 제2권: 506-516), 신라 행정관의 주요 업무 목표는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국가’보다는 주로 왕실과 궁정을
섬기는 일이었을 것이다(하일식, 2006: 292-296; 신형식, 1990: 162-167). 옛
‘부’ 귀족 계급의 후손인 세습 진골 귀족들이 5등 이상의 관직들을 독점 했는데 다른 세습 집단에게는 허용되지 않던 의복, 이동수단 및 거주지
의 특혜를 부여받았다(김부식, 1996[1145], 제2권: 370-386). 이 제도는 영향 력 있는 귀족들이 여러 주요 요직의 겸임을 허락하여 국정에 대한 그들
의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하일식, 2006: 298; 신형식, 1990: 170-172; 이문기,
1984). 신라의 왕족들의 관료주의적 합리화와 귀족 가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는 7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그 러나 이런 노력들은 세습의 원칙이 가장 우선시되던 신라 사회제도의 본
질적 특성으로 인해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Palais, 1984: 436;
Miller, 2016: 62. 신라의 관료주의 위에 군림한 세습귀족에 관하여 참조). 예를 들 어, 국학(國學)이라 불리던 국립대학은 682년에 개교했지만 진골과 그 아 래의 높은 두 세습 계층인 육두품과 오두품만이 수학할 수 있었다(김부식,
1996[1145], 2권: 500). 788년(김부식, 1996[1145], 제1권: 326)에 4과(상중하푸 및 특품)로 구성된 국가고시격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수립되었으나,
중간급 관료를 배출한 경우가 대부분(하일식, 2006: 324-331; 김희만, 2019: 276-279)이었다. 9세기 말 할거(割據)의 과정이 시작된 신라 말기까지 관 료제는 기본적으로 귀족의 특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한 관료제 의 기능 때문에 신라처럼 세습을 기준으로 계층화된 귀족적 사회에서 관 료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습 특권과 관료적 규칙성 사이의 일종의 타협은 귀족주의 전통에
젖어 있던 다른 사회들의 관점에서는 매력적인 해결책이었다. 일본도 그 러했다. 고분기시대의 원시 일본에서 추장들의 거대한 봉분(250개에서 약 600개 정도)을 보아도 그 시대의 사회가 일관성을 가진 중앙집권적인 국 가라기보다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정치연합체의 형태였고 이는 초기 고
구려, 백제 또는 신라사회와 매우 유사했다. 중부(카츠라끼 葛城, 와니 和珥, 그 이후의 소가 蘇我 등)와 지방(키비 등)의 강력한 씨족(氏)들은 농민이나 장 인집단을 세습적으로 통제했고, 그들 중 일부는 이민자 출신이었으며, 자신들만의 영토와 군사 기반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平野邦雄, 1962). 아스카 시대(552년-645년)의 가장 강력한 씨족 중 하나인 소가는 권력의 극대화를 위해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다. 603년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귀족들이 독점하는 관위12계(冠位十二階)가 성립되고
(Inoue, 1993: 176-180), 645년에 공포된 ‘대화개혁’(大化の改新) 이후 훨씬 강력하고 결정적인 중앙집권화 운동이 일어났다. 7세기 후반에 이르러 일본은 태정대신(太政大臣)이 주도하는 국무원격인 태정관(太政官), 그리 고 인사·행정·법무·군사 등의 8개의 주요 부처(省)으로 구성된 중앙집 권적인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중앙 관료제는 60개 이상의 지방(쿠니: 国) 에서 임기 6년으로 고정된 주지사(코쿠시: 国司)들로만 대표되었는데 대 부분의 지역 행정관들은 기본적으로 재지 권력자들이었고, 그들의 임기 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중앙에는 총 331개의 직이 있으며, 하급 관료를 포함하여 6,487명의 중앙 관료들에 의해 나라 전체가 통치되었다(Naoki,
1993: 231-236). 이 수치는 동시대 신라의 추정치(약 5,700여 명, 위 참조)에 상응하고 있다. 만약 7세기 초 일본 인구 규모를 600만 명(澤田吾一, 1927: 182) 정도로 예상한다면, 인구 920명당 중앙 관료 1명의 비율로 결론지 을 수 있다. 이는 당시 당나라의 추정치(위의 인구 1,000명 중앙 관료 1명)보 다 약간 높은 밀도의 관료화이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중앙집권적 관료제에서도 황족과 귀족 이 5위 이상의 주요 관직들을 사실상 세습적으로 독점했다. 신라와 마찬 가지로 주로 귀족의 자녀들이 다녔던 국립대학(다이가쿠료: 大學寮))이 자 체적인 시험제도(타이사쿠: 對策)를 운영하였으나, 시험의 합격으로 초위 (初位)나 8위에만 해당하는 직급의 임명이 가능했기에 합격자 중 그 이
상으로 진급한 경우는 그다지 없었다(Naoki, 1993: 236; Spaulding, 1967:
6-16). 예외적으로 중국 고전에 정통했던 유명한 시인 이사야마 후미츠 구(勇山文繼, 773-828)는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지만 국립대학을 수 료한 후 관료로서 훌륭한 경력을 쌓아 종4위하(従四位下)까지 획득한 경 우이다(渡辺三男, 1993). 이사야마의 경력은 물론 예외적이었다.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동아시아 국가들 중 어느 나라에서도 관리 의 등용과정이 시험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나라와 비교 했을 때도 신라와 일본에서의 관료적 위계체제 안에서 시험제도가 가지 던 상징적 가치는 낮았다. 진나라와 한나라로부터 계승한 관료적 노하우 가 당나라에서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 하면 신라와 일본의 낮은 관료화는 그리 놀랄 현상은 아니다. 신라도 일 본도 진나라가 겪은 급진적인 ‘탈(脫)귀족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신라 와 일본 모두 7세기 동안 권력 집중을 심화시킨 매우 중요한 사건들을 겪게 되었는데, 670년대 후반까지 한반도는 거의 끊임없는 전쟁 상황이 었고, 660년부터 663년까지는 백제의 동맹국인 일본이 패망한 백제에 원군을 파견하는 등 한반도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던 격동의 시대 였다(서영교, 2016). 전쟁과 대륙으로부터의 잠재적인 침략 위협에 대비 하기 위해 일본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속도감있게 진행되었다. 한데 8세 기와 9세기는 국외 전쟁에 영향을 받지 않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로 인해 귀족 본위의 관료적 군주국들은 더 이상의 급진적이고 고통을 동반하는 개혁의 필요성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구조를 통합할 수 있었다. 8세기 일본이 귀족지배 하에서 달성한 관료주의적 정교함의 정도만으 로도, 장차관(長·次官) 등 품관들이 부하들의 승진과 강등에 영향을 주는 업무 적합성과 성과를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것을 포함한 주요 관리 체제
를 운영할 수 있었다(de Bary, 2001: 91-94. 그런 보고에 관한 법령의 번역 참조). 9세기 신라에서는 경문왕(재위 861~875)과 헌강왕(재위 875~886)이 진골 출신자보다는 당나라의 시험에 합격한 오·육두품들을 궁내 한림원의 학 자(한림) 또는 궁내서기로 임용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고, 그 직후 신라의 붕괴가 시작되었다(전덕재, 2011). 하지만 그런 시도가 가 능했다는 것 자체가 신라의 귀족 사회가 문학적 소양을 높게 평가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신라의 패망 이후 지배층 구성원의 사회화와 사회 문화적 자본 축적에서 시험제도의 중요성이 매우 성공적으로 수용, 각인 된 것도 이런 배경이 있어서였다.
6. 9세기 위기와 중국의 비(非)귀족관료제국의 탄생
홍수와 가뭄을 포함한 일련의 자연 재해는 9세기 말 당나라와 신라 모 두에서 민중의 반란(874~884년 중국에서 일어난 황소 黃巢의 반란이 가장 대표 적)을 일으켰다. 중앙 통제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국가의 과도한 잉여 수 취(특히 간접세, 예를 들어 염세 鹽稅)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농민들은 지역 과 중앙 권력에 저항한 하위 엘리트들(예: 부유한 소금 장수이었던 황소, Levy, 1955: 8 참조)이 이끄는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영토 통제권의 균열과 군벌 정권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이 당과 신라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신라는 889년 부터 반란의 여파로 영토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종주국인 당도 붕
괴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전덕재, 2021; Lorge, 2018). 그 시점을 주요 분기 점으로 하여 대륙의 국가들은, 지배력 상실과 분권화가 더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선회한 일본과는 다 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일본의 중앙집권적인 ‘왕실국가’는 10세기 내내 여 전히 건재한 지배력을 행사했지만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면 서 개인에 대한 과세에서 토지에 대한 과세로 전환해야만 했다. 완전한 분열은 12세기 말 군사 정권인 막부(幕府) 체제가 확립되면서 발생했는 데(坂本賞三, 1985),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군사적 위협 때문에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중앙집권을 필요로 했던 대륙 국가들에 비해 일본의 막부체 제는 훨씬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중국과 한국 모두에서, 중앙집권체 제는 10세기 후반 경에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로 복구되었다.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907-960년)의 혼란기를 수습하여 태어난 송 나라(960-1276)는 아마도 진나라(221-206 BC)의 단명한 급진적인 사회 실험 이후에 “관료 제국”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적용된 세계 최초의 사회 였을 것이다. 송나라는 중국과 세계 역사상 최초의 지속가능한 탈(脫)귀 족 사회였다. 11세기 말까지 지속적인 인구의 증가를 기록한 송나라는
1,100년까지 1억 2천만 명의 인구를 다스렸는데(Banister, 1987: 4), 당시 북송의 인구는 그 시대의 전체 세계 인구의 33%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
되며, 이는 500년 이후 청나라(1644년-1911년)가 세계 총인구에서 차지했 던 비율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Scheidel, 2021년: 103). 송나라는 지방관리 를 제외한 34,000명의 문·무관에 의해 통치되었고(Chaffee, 1995: 27), 이 거대한 행정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던 삼성(三省: 門下省·中書省·尚書省) 의 수장인 재상(宰相)에게 부여된 거대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은 삼사(三司: 戶部司·度支司·鹽鐵司)의 견제를 받으며 균형을 이루었다. 세금과 정부 의 전매 품목(예: 소금, 철 등)을 관리하던 삼사는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장 받고 있었다. 또 다른 중요한 통치 기관으로서 자율권을 가지고 있던 기관인 감 사원, 즉 어사대(御史臺)는 공직사회를 통제하고 공직자들의 부패를 막
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중앙 정부에는 6부(六部: 吏部, 戶部, 禮部, 兵部, 刑部, 工部 -인사, 세입, 의례와 외교, 전쟁, 사법, 공공사업 각각 담당)가 있었고, 감 사원에도 6개의 조사담당 부서(六案)가 있어 6부를 각각 통제했다. 그러 나 송나라의 황제들은 과도한 권력을 가진 감사원의 수장이 감사의 기능 을 넘어서는 권한으로 황제의 통치행위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 문에 감사원장(어사대부: 御史大夫)의 자리는 공석으로 비워두었다(신채식, 1981: 113). 세계 최초의 관료 제국인 송나라에서 문관 관료제의 중앙집 권화는 주요 제도적 원칙의 골간이었다.
중앙집권화는 능력주의적 임용과 승진의 전면적인 도입과 병행해 서 진행되었는데, 이는 업적에 의해 임용된 사람들이 황실지배를 위협 할 수 있는 강력한 귀족 혈통출신들보다는 더 유용하다는 판단에서 기 인하였다. 그러나 능력 위주의 시험만이 관료 채용의 유일한 통로는 아 니었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송나라의 왕조사인 『송사』(宋史)에는 아버지, 할아버지 또는 다른 친척들의 ‘공로’, 즉 음서제, 그리고 추천을 받아 임명된 최소한 290명의 관리들이 기록되어 있다(신채식, 1981: 309). 973년부터 시행된 과거 시험(Kuhn, 2009: 39)은 현단위, 수도, 그리고 황 궁 등의 세 단계(해시 解試, 성시省試 그리고 전시 殿試)의 시스템으로, 11세 기에 송나라에서 고위직으로 채용된 관료의 90% 이상이 과거 급제자
이었고, 이는 12세기에 들어와서 72%의 비율로 떨어졌다(Chaffee, 1995: 29). 답안을 봉밀원(封彌院)에서 익명화하고, 본문을 등록원(謄錄院)에서 필사하여 시험관이 응시자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만전을 기했다. 시험을 밀폐된 공관(鎖院)에서 보게 하는 등 “객관성 극대화”를 위한 시 험 방법은 놀랍도록 현대적인 고려였음을 알 수 있다(荒木敏一, 1969: 2223; Chaffee, 1995: 51). 시험은 원칙상 모든 양민들에게 개방되었고(비록 이 서 吏胥 등의 자녀를 위한 별도의 시험이 있었는가 하면, 장인 匠人 등에게 과거를 보 지 못하는 일부 시기들이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문해력의 확산으로 수험 생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남중국 지역 의 복건성에서 남성 인구의 6-10%가 일생에 한 번 이상 시험을 본 것으 로 나타났고 그 지역의 시험 경쟁률은 1090년에 75대 1, 1207년에 놀랍 게도 333대 1이었다(Chaffee, 1982). 시험 결과로 일단 공무원 임용이 결 정되고(신채식, 1981: 176-177), 승진 또는 강등은 고과심사를 거쳐 결정되 었다. 예를 들어, 지방 행정가들의 경우, 범죄율이나 과세 인구의 증감이 중요한 고과 기준이었다.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발각되면 추천인이 있으
면 추천인과 함께 그 연대 책임을 지게 하였다(신채식, 1981: 258-263). 송 나라 시대에 “능력”은 여전히 고전의 지식을 의미했지만, 송 왕조에서 가 장 위대한 개혁가로 꼽히는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1058년 그의 유 명한 상소인 『만언서』(萬言書)에서 공무원들의 고전에 관한 일반적인 지 식보다는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Williamson, 1935: 61). 이 제안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왕안석 제안의 적 절한 이행은 송나라 공무원의 업무를 현대 공무원의 복무 기준에 상당히 가깝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송나라 관료제의 발전은 서유럽
의 중세 전사(戰士: 벨라토르: bellatores)인 기사들이 봉건계층의 왕자들과 귀족들 바로 아래의 세습특권층으로 점차 진화했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중세 초기에는 양민 남성들이 필요한 장비와 훈련만 갖추고 있 었다면(보통 하급) 기사까지의 신분 상승이 가능했지만 봉건제가 성숙해
지면서 그런 기회마저 고갈되었다(Cardini, 1990: 103).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송나라의 ‘능력 중심주의‘의 도
약이 가능해졌다. 거란의 요나라(遼, 916-1125), 여진의 금나라(金, 11151234), 탕구트족의 서하 왕조(西夏, 1038-1227)(Kuhn, 2009: 71-98)와 같은 당대의 어마어마한 경쟁자들에 대항해야만 했던 송나라 통치자들은 대 규모의 군대가 필요했던 동시에 지방 군 지휘관들에 의한 권력의 분열 과 군대의 사병화를 막아야만 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당나라 때 일어 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Kuhn, 2009: 20-34). 송나라의 입장에서는 유 교적 이념과 유가·법가의 통치 모델(Kuhn, 2009: 99-119)을 고수하며 능 력주의로 운영되는 관료제의 수직적 구조가 경쟁관계에 있던 중앙집권 제국과의 대결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해법이었다. 송나라는 고도로 생산적인 농업경제를 가지고 있었고, 그 생산성의 기반 위에서 인구대비 경작지의 부족을 고려할 때 필연적으로 연중 휴경기가 없는 경작체계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비료·관개의 광범위한 사용을 권장하였다(Chao, 1986: 199). 오늘날의 베트남지역에서 일찍 익는 쌀의 도입으로 수확량 을 증가시킬 수가 있었다(Ho, 1956). 능력에 기반을 둔 고도로 정규화된 방식으로 원활하게 운영되는 관료주의적 통치와 상부 지배구조의 안정 성은 현금작물의 원활한 거래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개 사업의 효율적인
실행을 가능케 했고(Maddison, 1998: 30-33), 동시에 경제의 상업화가 증 대되면서 자녀들을 적절히 교육시킬 충분한 경제적 자원을 가진 가족들 의 공직사회로의 합류도 증가했다. 이 가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최소 한 한 명의 관료를 배출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보유하 면서, 농장과 노예의 소유보다는 문화적 자원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
사(紳士), 독서인(讀書人)의 상류층을 형성하였다(Elman, 2000: 134). 상업 화의 정도가 낮은 당대의 인접한 사회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시험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고학력 신사(紳士)층을 형성시킬 정도의 기반은 없 었다. 송나라와 비슷한 사례로 958년부터 과거제를 운영해온 고려(918-
1392)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고려사』에 등재된 650명의 주요 신료(臣僚) 중 절반은 급제자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음서제 등을 통해 입문한 경우 였다. 한데 사실상 모든 수험생들은 귀족가문 출신들로 볼 수 있다. 평민 들은 고려에서 과거를 치를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험은 소 수의 귀족 엘리트 계층에서 신분분배의 도구로써 기능했다(이남희, 2013). 송나라의 신사층은 고려의 귀족층보다 훨씬 더 포용적인 사회 계층이었
다. 그러나, 그런 송에서조차 학업 성적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험들은 공직자 사회 안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를 잡는데 필요한 고전읽기와 쓰기의 능력을 향상시킬 자원이 없는 대부
분의 빈곤층을 효과적으로 배제했다(Elman, 2000: 1)33-134). 중국사 전 공자인 저명한 일본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가 주장했듯이 송나라는 전대의 당나라와 달리 소작농들에게도 개별적으 로 자유로운 평민의 지위를 보장하며 소작계약제를 실시했지만(宮崎市定, 1970-71) 농민들은 송나라 사회에서 한 몫을 가졌던 공민이었다기보다는 엘리트 지배의 대상자에 불과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었다.
송나라 과거제의 “능력주의”는 몇 가지 중요한 한계들이 있었다. 대 부분의 가난한 서민들이 시험 준비에 필요한 오랜 시간과 자원의 부족으 로 배제된 것 외에도, 시험 제도는 그들만의 특권 계층을 형성했다. 고위 관직에 있는 부모나 친척들이 어린 자손이나 같은 문중 사람들을 음서제 로 밀어주거나, 시험관의 친척들이 특별한 시험 종류로서 훨씬 덜 경쟁
적인 특수 고시제도를 이용한 등의 경우(Chaffee, 1995: 101-102)는 일반 적으로 훨씬 더 경쟁적인 경로로 관료가 된 사람들보다 더 쉽게 또 운이 좋게 관료직에 앉을 수가 있었다. 100~300명 대 1이라는 경쟁률을 고려 할 때,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합격할 가능성이 거 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쯤 근대적이고 최대한 객관화된 시험 을 통한 출세 경로의 도입은 고전 문헌의 학습이라는 공유된 문화적 자 본과 함께 다소 동질적인 독서인들의 지배계층을 형성하면서 엄청난 역
할을 했다. 송나라의 치하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Chaffee, 1995: 166169) 이후 거의 천년 동안 중국 사회의 중요한 특성으로 남아 있는 “고시 문화”는 특정 유형의 엘리트 문인 남성의 출현을 촉진시켰다. 그런 남성 들은 학문적 소양과 그에 수반되는 자기 수양뿐만 아니라 관료 시스템이 요구하는 일정한 행동양식에 익숙했고, 매우 경쟁적이었으며, 복잡한 행 정 업무의 수행이라는 결정적 경험을 공유했다(송나라의 관료적 아비투스에
대하여, Ebrey, 2016: 43 참조). 수행평가가 승진과 좌천의 주요기준이던 송 나라의 관료문화는 국정의 성공적 경영과 발을 맞추어 발전하였다. 요약 하자면, 관료중심적 송나라 제국은 문학적 재능을 가진 국가 관료의 모 습이 이상화된 지배 계급을 탄생시켰다. 송나라와 비교하면 세습귀족의 특권이 특히 강한 요소를 유지했던 15세기 이후의 조선(1392-1910) 사회
(강응천, 권소현, 송웅섭, 염정섭, 오상학, 정재훈, 한명기, 한필원, 문사철, 2013: 32-
38; Palias, 1984: 457-463)에서도 송과 비슷한 유형의 학자관료들이 지배를 하게 되었다. 혁신보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경향의 학자관료계급은 지속 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와 세금 수입, 그리고 범죄와 소송의 부재 등으로 좋은 인사고과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중국과 한국에서 근대 화가 시작되고 관주도형 산업근대화의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 과정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7. 정복 왕조, 비(非)한족국가 및 능력주의적 질서
과거 시험 문화의 영향은 비록 세습귀족 특권의 패턴을 타파할 만큼 강 하지는 않았지만 송나라와 경쟁하거나 송나라의 제도를 계승한 비(非)한 족 왕조의 통치 체제에 미친 영향력은 충분히 강력했다. 광범위하게 중 국의 모델을 받아들여 시험제도를 만든 최초의 정복 왕조는 거란의 요나
라(916-1125)였다. 977년에 과거제를 실시하여 남쪽의 수도인 오늘날의 베이징에 당나라 시대의 시험장을 복원하였다(Twichett, 1994: 92). 988년 부터 매년 시험이 실시되었고, 11세기 후반까지 매년 100명 이상의 급제 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소수만이 공식적인 임용을 받을 수 있었다. 거란 귀족들은 고위 관료직으로의 등용자격을 포함한 기존의 세 습 특권을 유지했지만, 한족 공직자들 사이에서도 대다수는 입증된 개인 의 학문적 성과보다는 음서제를 통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Wittfogel, 1947). 여진의 금나라(1115-1234)는 오늘날 중국 북부의 광대한 옛 요나 라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요나라의 과거 시험 절차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금나라에서 과거 시험은 이미 1123년에 시작되었고 1129 년부터 정규화되었다. 특히, 1173년부터 여진족 지원자들의 편의를 위 해 여진어로 시험을 병행하였다. 송과 마찬가지로, 노비를 포함한 이들 의 자손들이 시험에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고, 시험은 또한 여진 족 귀족의 세습 특권을 공유하지 않는 야심찬 여진족 평민들(물론 주로 부 유한 가정 출신)에게 중요한 신분의 수직상승 경로였다. 1205년에서 1234 년 사이에, 37%의 여진족 관리들이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되었고, 이들 관리들 중 다수는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1167년에서 1234년 사이 에 금나라에서 관직 등용된 진사(進士)급 인재들의 수는 연평균 약 200 명으로, 1020년에서 1057년 사이의 북송(224명)과 견줄 만하다. 여진족 귀족들이 금 왕조 정부에서 대부분의 요직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능 력주의를 실시한 송나라 체제의 방향으로 많은 중요한 단계를 거쳐 이동
해 갔는데, 이는 경쟁국인 남송의 압박 때문이었다(Tao, 1974; Xin, 2015). 몽골이 지배하던 원나라(1271-1368)는 10세기 이후 송나라와 그 경
쟁국인 요나라, 금나라 등에 의해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정복자들의 지배와 남송의 몰락, 그리고 1313년까지 어떠한 시험도 행 해지지 않은 공백에도 불구하고, 신사(紳士)계층은 문화적 자본에 의해 형성된 강한 자의식을 가진 하나의 대자적 계층으로서 스스로를 보존해
나갔다(Elman, 2000: 32-33). 그러나 여진족의 지배계층들과는 달리 몽골 의 정복자들은 그들의 광대하고 이질적이며 국제화된 제국에서 피정복 자들의 엘리트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몽골 황제들 은 결국 왕운(王惲, 1227-1304)과 같은 한족 학자관리들의 설득에 의해 과 거 시험의 재설치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가문 지체와 인맥, 기존 신료들의 추천 등을 통해 임용된 관료들의 효율이 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명백했기 때문이다(Lam, 2008: 300-306). 그러나 시험이 실 시되었던 반세기도 안 되는 기간인 1368년까지 1,136개의 진사만이 급 제되었고, 연평균 21개의 학위가 수여되었는데 이는 여진족보다 10배나 낮았다. 게다가 몽골인들과 비(非)한족인(대부분 중앙아시아 출신)인 색목인 (色目人) 등이 등록된 모든 호구의 3%만을 차지했지만, 동시에 모든 학위 에 대한 50%의 할당 혜택을 누렸고, 모든 공식적인 직위의 30%를 차지 했다. 결국, 진사 시험 합격자들은 고위 공직사회의 2%(Elman, 2000: 3336)를 차지하는데 그쳐, 당나라 초기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한 족 신사층을 왕조의 통치 메커니즘에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능력 중심 주의에 기반한 수직적인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한한 정책은 원나라의 단 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답안을 익명화하고 응시자를 보안이 철저한 분리된 공간으로 수용 한 북송의 시험 규정이 몽골 통치하에서 여전히 지켜졌다는 점이다(Lam,
2008: 328-332). 이렇게 “시험 문화”는 그 당대에 국가 행정 절차와 문인 들의 문화 습관을 구성하는 오래된 요소로 이미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원나라의 후계 국가인 한족의 명나라는 어떤 면에서 원나라와 송나 라의 전통을 동시에 두루 다 이어받았다. 명나라의 핵심 과거 시험 항목 들은 원나라의 전례를 따랐고, 사서(四書)의 해석 이외에는 논문(論), 판 단을 담은 문장(判), 각종의 조칙(詔와 誥) 그리고 상소문(表) 작문은 그 주요 내용이었다(Elman, 2000: 41-46). 동시에, 진사 학위의 취득은 송나 라의 유산을 물려받은 명나라에서도 공직사회 진입의 주요한 관문이
었다. 명나라 276년 동안 24,874개의 진사 학위가 수여되었고(Hucker, 1958: 14), 15세기 중반부터는 모든 진사 학위 소지자의 절반가량은 공무 를 맡은 기록이 없는, 즉 평민으로 판단되는 가문 출신이었다(Ho, 1959: 343-344). 이 제도가 야심만만한 평민계층 자녀들에게 지배 엘리트의 반 열에 진입할 길을 터주었고, 명나라 통치 동안 더욱 공고해진 송나라식 의 관직등용제도는 능력주의였다고 볼 수 있다. 행정가로서의 자격은, 세습보다 능력주의적 “관문”의 통과를 통해 획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제도를 통해 부유한 문중들의 경제적 자본은 행정적, 정치적 참여의 기회로 전환되었다. 시험 준비의 일환으로 외워야 할 문헌의 분량은 약
40만 자에 달했고, 과거 시험 준비는 약 6년이 걸렸다(Miyazaki, 1981: 1617). 이런 시험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도 전에 일상 언어와는 다른 고어 인 고전 한문을 어린 나이부터 배워야 했다. 전체적으로 약 10년에서 15 년에 이르는 학습 기간이 필요했으며, 또한 상당한 자원이 필요한 과정 이었다. 따라서 평민계급의 대다수인 빈곤층은 처음부터 이와 같은 신분 수직상승 경로에서 제외되었다. 전형적으로 평민 출신 관료는 부농이나 상인 등의 가정에서 태어나 학문적으로 재능이 있어 경제적 네트워크와 자원을 정치적 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었다(Elman, 1991:
16-17).
시험제도에서 다수의 가난한 평민들이 배제되었지만, 이 제도는 경 제적 자본, 행정 참여, 문화적 명성의 결합을 통한 안정적이고 통합된 상 류 엘리트 계층을 만들어 내는 기제로 작동했다. 청나라(1636-1911)의 경 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족이 아닌 정복 왕조라도 시험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고 통합된 엘리트들을 적절하게 수용하면 거의 3세기 동안 통치 를 할 수가 있었다. 17, 18세기동안 만주족이 전체 인구의 3% 정도였음 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최고 행정직(총독 및 순무 巡撫)의 절반을 독점하면 서 특권을 누리면서 청나라는 건재함을 과시했다(陳文石, 1977: 593-594).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만주족의 청나라는 부유한 한족에게도 시험을 통한 사회적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상당히 허용하였다. 명나라와 비교했을 때 부유한 평민의 자손들이 관리의 반열로 올라가고 가족이 귀족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명나라 시대에 비해 아주 조금만 적게 제공되었 을 뿐 시험제도 운영에서의 융통성은 담보되어 있었다. 청나라의 26,747 명의 진사 학위 소지자들 중 37.2%는 비관료 가문출신이었다(Ho, 1959:
353; Ho, 1962: 114-116). 원하던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부유한 서민들은 가족의 경제적 자본을 공직 보유와 관련된 문화적, 사회적 자본으로 전 환시킬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직에서의 순수한 경제적 보상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19세기 중국 상류층 총 소득의 19%만이 공직의 봉록(俸祿, 즉 월급)에서 발생한 반면, 토지 소유에서 발생한 소득은 34% 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Chang, 1962: 197). 흥미롭게도 조선조차도 귀족 특권의 상대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Palais, 1984: 457-463) 야망 이 있는 서민들에게도 신분상승의 상당한 여지가 있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4,615명에 관한 상세 자료에 따르면, 15세기 문과 급제자의 30~50%가 비관료 출신이었다. 이는 광해군(1608~23) 때 이르러서 14% 로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는데 임진왜란(1592-98)이후 조선의 지배 계층들이 그들의 권력기반의 강화를 위해 더욱 강하게 결속했기 때문이 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제의 상업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경 제 분야에서 부유한 서민들의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관료 경력 없 는 집안 출신의 급제자들이 차지한 비율이 전체의 절반으로 다시 반등하
게 되었다(한영우, 2013-2014).
8. 결론: 조공사회질서의 완성과 시사점
위에서 언급한 일리우셰치킨(Ilyushechkin)과 같은 논리 선상에서, 전후 의 가장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인 사미르 아민(Samir
Amin, 1931-2018)은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 양식을 ‘공납(貢納)제’로 개념 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민은 고대 지중해 사회(노예를 소유한 사회),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유럽의 봉건화되고 분열된 사회, 그리고 조직적이고 고 도로 관료화된 이슬람, 인도,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잉여 수취의 방법상 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잉여가 노예, 농노, 또는 개별적으로 양민 신분의 소규모 생산자로부터 추출되는지의 여부에 관 계없이, 모든 공납제 사회는 비(非)경제적 강제를 피지배층에 적용함으 로써 잉여물을 추출한다(이는 생산자가 시장원리에 따라 노동력을 판매하는 자
본주의 생산양식과는 본질상 다르다: Amin, 1989: 1-11; 이론의 초기 개념화에 관해 서는 Amin, 1976: 13-16을 참조). 아민의 개념을 수용하여 공납제 생산양식 을 정의한 에릭 울프(Eric Wolf)는 권력의 행사와 지배를 통해 공납제 체 제가 작동한다는 주장, 즉 사회적 노동이 동원되는 조건으로서의 정치
과정을 논한 것으로 유명하다(Wolf, 1982: 80). 그러나 생산양식이 동일하 다고 하더라도, 모든 공납제 사회들이 다 비슷하지는 않다는 것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납제 사회들에서는 국가 간 경쟁, 사회 질서 유지, 잉여 수취에 필요한 점점 더 정교한 국가 메커니즘이 개 발됐다. 발달된 관료주의 전통을 자랑하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 하더라도 중국의 경우는 이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아민은 전근대 중국 을 경제적 생산성과 그에 상응하는 국가기구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자 본주의 이전의 발전의 정점인 ‘완전히 성숙한 공납제 사회’로 정의하고
있다(Amin, 1989: 60-67). 울프가 관찰한 바와 같이, 중국형(型) 공납제 질 서의 약화는 반복적으로 지리적 분열의 상태를 야기했으며, 때로는 표면 적으로는 봉건제와 유사한 군벌 통치형태도 출현케 했다(Wolf, 1982: 82; 이 관찰에 관하여는 위의 3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남북조 시대와 당나라에서 송나라 로의 과도기인 오대십국 五代十國 시대에 대한 설명을 참조). 그러나, 오랜 관료 주의적 질서의 근본적인 힘은 능력을 바탕으로 한 임용관행과 함께 제국 의 질서 회복에 기여하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탈(脫)귀족주의와 능력중심적 관직 임용 은 중세 중국 역사의 진화에 매우 중심적인 요소들이었다. 대체로, 국가 기관은 넓은 의미의 신사(紳士) 계층에게 개방되었으나, 적어도 원칙적 으로는 그 외의 대부분의 계층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 객관적인 등 용, 고과의 기준은 공공성·공익 같은 관념들을 공고화시키고 공적인 기 관으로서의 정부의 위상을 정립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당 대 유럽에서 정부의 권력이 특정 귀족 가문의 사적 소유로 인식되던 것 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좀 더 긴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국가의 이미지는 “공적인 영역”이라는 현대적 개념의 전조였다. 단지 여기서 유 념해야하는 부분은 국가는 여전히 왕조의 상태였고, 능력 중심의 평가기 준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들에겐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민초 단위 에서의 가부장적 가정과 유사하게, 왕조 국가의 상부 구조도 주로 부계 중심의 가문을 핵으로 구성된 사회였다.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일부 관 료들이 옹호한 보편적 원칙들과 세습 황권(皇權), 황제의 총애를 받던 심 복들 또는 지방 토호들의 평민에 대한 인적 지배 사이의 긴장관계는 실 제로 중국 제국의 통치 특징 중 하나였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다른 공납 제 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현상, 즉 자신들의 생계가 국가의 세금 추출 능 력에 달려있는 관료들과 그들만의 권력기반을 가진 세습 엘리트들 사이 의 ‘잉여를 위한 투쟁’이라는 패턴의 한 변종으로 설명될 수 있다(Holdon
1993: 203-265). 모든 세습 기득권 집단의 완전한 제거에 성공한 국가는 자본주의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급진적인 탈(脫) 귀족화를 시도한 진나라(기원전 221년-206년)는 겨우 15년 동안만 존재했 다. 하지만, 잉여를 위한 투쟁에서 국가 관료제의 성공은 국가가 영토 기 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原자본주의(proto-capitalist) 형태의 상 업적 교환과 매뉴팩처 생산을 비롯한 생산력 발전을 위해 필요한 내부 안 정을 유지하는 데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송나라 시대의 고도로 발달된 시 장 경제에 관하여는 Liu, 2015: 57-76를 참조). 관료제의 힘이 절대적으로 강하 고 관료들이 추출한 잉여의 몫이 컸다는 것은 물론 전근대 중국이나 조선 에서 상인 공동체로서의 자치 도시의 성장을 방해하는 등 자본주의적 생
산관계의 선구적 발생에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Wolf, 1982: 85). 하지만, 이 나라들이 서구발(發) 자본주의 세계 체제 안에 일단 들어가자, 관료제에 의한 잉여의 추출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형태의 능 력주의를 포함한 관료제도에 기반한 국가경영의 장기적인 지속성은 서구 가 보다 일찍 달성한 자본주의의 축적을 상대적으로 빠르게 따라잡는 일 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예를 들어, 한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응집력 있고 능력위주로 모집된 관료제에 관하여는 Evans, 1995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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