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우리 호남 제일 미인이라고 소문이 장히 높지요”—백년전 시각도 그랬다.
춘향이에 대한 방자의 시각.
조신하게 집에나 있을 것이지..하는 시각이 역력하지만 아무튼 춘향이를 옛사람들이 어떻게 봤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
“
"오냐, 네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연유를 들어보아라! 과년된 계집애가 행실이 바를 양이면 동넷집 수코양이 눈에라도 띄울세라, 네집 안마당으로 다니더라도 고개를 고부슴하고, 네 집 후원으로 거닐더라도 행여 재채기 소리라도 밖에 들릴세라 조심을 할 것이지 그렇지 않아도 예쁘장한 계집애가 새 옷 입고 단장하고 백주 대로변에 네 활개 활짝 뻗고 치맛자락, 속옷자락까지 펄렁거리며 굼틀굼틀거리니 길가던 행객 까지 발이 길바닥에 딱 붙고 입이 헤벌어져서 정신을 잃어 버리게 하니, 그래 이러고도 네 행실이 바른다 할 것이냐.
네가 얌전스럽게 처녀답게 가만히 네 방안에 들어앉아서 글이나 읽든지 바느질 수놓기나 하든지 심심하거던 징동 당동 거문고 가야금이나 울리든지. 설마 고양이가 고양이를 낳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장구나 둘러 메고 얼씬얼씬 엉덩춤을 춘다기로 네집 방안에서만 하량이면, 아무리 책방 도련님이 잘 아는 데는 중방 밑 귀뚜라미라 하기로 네집 담벽까지 뚫고 너라는 계집애가 있는지 없는지 들여다볼 리는 만무하지 아니하냐—그런데 제 허물을 모르고 애꿎은 날더러—주리를 할 녀석이니 서방을 삼을 녀석이니 하니 내가 그렇게 만만 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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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일설 춘향전 (一說 春香傳) ◈
◇ 연분(緣分) ◇
《해설》 목차 (총 : 7권) 처음◀ 1권 ▶다음
1925년
이광수
목 차 | 접기 | |
1 권. 연분(緣分) | ||
2 권. 사랑 | ||
3 권. 이별(離別) | ||
4 권. 상사(相思) | ||
5 권. 수절(守節) | ||
6 권. 어사(御史) | ||
7 권. 출또 |
1
일설 춘향전 (一說 春香傳)
2
1. 緣分(연분)
3
"여바라 방자야!"
4
하고 책상 위에 펴놓은 책도 보는 듯 마는 듯 우두커니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던 몽룡(夢龍)은 소리를 치었다.
5
"여이."
6
하고 익살덩어리로 생긴 방자가 어깨짓을 하고 뛰어 들어와 책방 층계 앞에 읍하고 선다.
7
몽룡은 책상 위에 들어오는 볕을 막노라고 반쯤 닫히었던 영창을 성가신 듯이 와락 밀며,
8
"얘, 너의 남원 고을에 어디 볼 만한 것이 없느냐?"
9
방자는 의외에 말을 듣는 듯이 고개를 숙인 대로 눈을 치떠서 물끄러미 몽룡을 치어다보더니,
10
"소인의 골엔들 어찌 볼 만한 곳이 없을 리가 있읍니까.
11
산으로 가오면 나물 캐는 것도 볼 만하옵고, 들로 가오면 농사짓는 것도 볼 만하옵고, 우물로 나가오면 여편네들 물 길어 놓고 밥솥에 밥 눗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수다 늘어 놓는 것도 볼 만하옵고, 또 행길로 나가오면 술주정군이 술 주정하는 것, 술취한 남편 붙들고 내외 싸움하는 것도 볼 만하옵고......"
12
"에라 이놈아!"
13
하고 몽룡은 괘씸한 듯이 책상을 딱 치며, 누가 그런 소리 너더러 줏어대라드냐. 어디 경치 볼만한 곳이 있느냐 말이다—어 그놈.
14
"네? 그렇거든 애시에 그렇게 말씀하실 께지 소인인들 힘들여 번 밥 먹은 기운을 헛소리에 다 써버리고 싶을 리가 있겠읍니까...... 소인의 골에 경치 볼 만한 곳으로 말씀하오면 북문 밖에 조종산성 좋다 하옵고 서문 밖에 관왕묘도 그럴 듯하다 하오나 제일 이름이 높기로는 남문 밖 나서서 광한루와 오작교온데 경개 절승하옵니다. 과시 삼남에 제일 명승지라 할 만하옵지요."
15
"광한루라 광한루, 오작교 오작교."
16
하고 몽룡은 혼자 입속으로 불러 보더니,
17
"얘, 광한루 오작교 이름이 좋다—광한루로 나가자. 나귀 안장 지어라."
18
이 말에 크게 놀라는 듯이 방자가 껑충 뛰며,
19
"도련님, 큰일날 말씀 마시오—뉘 밥줄을 끊고 다리 마댕 이를 분지르실 양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사또게서 들으 시면 마른 하늘에 벼락이 내릴 것이요...... 또 공부하시는 도련님이 공부나 하실 게지 좋은 경치는 찾아 무엇하시려요."
20
하고 바로 몽룡을 경계하는 어조다. 서로 상하의 구별을 잊고 그만큼 친해진 것이다.
21
"공부하는 사람은 경치 구경도 못 간다드냐. 좋은 경치를 대하여야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다—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22
사또 분부는 내 수쇄하마. 어서 나귀 안장 짓고 공방 주모 관청빗 불러서 자리와 술과 안주 준비하라고 일러라."
23
하고 몽룡은 벌써 일어나서 옷을 입는다.
24
몽룡은 생명주 겹바지에 당베 중의 받쳐 입고 옥색 항라 겹저고리 옷고름에 약랑을 차고 남갑사 수향배자에 옥단추를 달아 입고 당모시 중추막에 생초 긴 옷을 받쳐 입고 송금단 허리띠에 모초단 두리낭자 주황당사 벌매듭 끈을 달아차고 널찍한 자주갑사 띠를 느슨히 매었는데 나귀가 걸음을 빨리 걸을 때마다 띠끝이 석웅황 박은 숙갑사 토막 댕기와 어울려서 펄펄 날린다.
25
"사또 자제 사또 자제."
26
하고 나귀가 지나가면 길가 사람들이 모두 부러운 듯이 우러러본다. 오늘이 오월 단오라 울긋불긋 새옷 입은 아이들은 떼를 모아 몽룡의 나귀를 따라온다. '사또자제 이 도령이 얼굴 잘생기고 재주 있다' 하는 것은 남원 부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희고 넓은 이마, 광채 있는 눈, 높은 코하며, 후리후리한 키하며, 아직 나이는 열 여섯 살이라 애티는 있지마는 과연 호남자의 풍격이 있었다.
27
사람들이 자기를 모두 우러러볼 때에 몽룡도 기뻤다. '잘 났다' '재주 있다' 하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온 몽룡은 조선 팔도에 자기가 으뜸인 것같이 생각하였고 장차 자기는 글 잘하고 벼슬 높은 사람이 되어 이름이 크게 떨칠 것을 스스로 믿었다.
28
몽룡은 의기 양양하여 일부러 나귀를 천천히 천천히 몰고 분홍당지 숭두선을 헌거로이 부치면서 광한루로 향하였다.
29
광한루는 처음에는 잘 지었던 모양이나 매우 퇴락하여서 단청도 다 벗겨지고 기왓고랑에 묵은 풀이 우거지었으며 마루청 널조차 여기저기 떨어져 버렸다.
30
몽룡은 방자가 자리를 까는 동안에 마루로 이리저리 거닐며 사방의 경치도 바라보고 들어와 벽에 붙인 글귀와 지나 간 사람들의 성명 새겨 붙인 것도 보더니 매우 볼 만한 듯이,
31
"여봐라 방자야!"
32
하고 방자를 부른다
33
"여이."
34
광한루라고 이름만 좋았지 어디 좋은 것 있느냐. 네가 이것을 삼남 제일 승지라 하니 과연 상놈의 눈이다.
35
방자는 몽룡의 얼굴에 볼만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수심된 듯이 두 어깨를 축 늘이고,
36
"그러길래 소인이 여쭈었지요—공부하시는 도련님이 가만히 글이나 읽고 계실 것이지 승지 찾으시기 당치 않다고......
37
아직 도련님께서 경치 보시는 눈이 열리지를 못하셨으니까 .."
38
하고 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혀를 끌끌 찬다.
39
몽룡은 기감 막혀 웃으며,
40
"어디 경치 잘 보는 네 이야기 좀 들어 보자—네 눈에는 광한루가 그렇게 좋으냐."
41
"좋다 뿐이겠소?"
42
하고 방자는 혹은 왼편 팔을 들어 왼쪽을 가리키고 혹은 오른편 팔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키고 혹은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혹은 손가락을 빳빳이 해가지고 땅을 가리키면서 노랫가락으로 광한루의 좋은 연유를 설명한다—
43
"가까운 산은 초록이요 먼 산은 퍼렁이요 훨쩍 더 먼 산은 회색이라. 가까운 산에 아지랑이요 먼 산에 안개오니 동남서 삼방으로 둘러선 첩첩 산이 그 아니 좋사오며, 일망 무제 넓은 들에 물 있으면 논이 되고 물 없으면 밭이 되어 도련님네 같으신 양반님네 진지 짓는 벼며 소인네 같은 상놈들이 먹는 밥이 되는 조와 피와 보리, 밀 파릇파릇 자라 나니 그 아니 좋은 경치오며, 꽃 피는 산을랑 등에 지고 붕어 메에기 송사리떼 노는 개천을랑 앞에 두고 무거운 기와도 말고 끌어 오기 어려운 돌도 말고 가볍고 아무 데나 있는 풀과 흙으로만 지은 농가가 둘씩 셋씩 셋씩 둘씩 조는 듯이 꿈꾸는 듯이 배부른 송아지들처럼 풀 속에 누웠느니 그 아니 절묘한 경치오며, 눈을 들어 우러러보오면 연옥색 하늘에 양떼 같은 구름 점이 오락가락 널려 있고 이따금 이렇게 서늘한 바람이 슬슬 불어와 소인의 등에 맺힌 향기로운 땀을 씻어 가니 그 아니 상쾌한 경치요? 게다가 이름조차 광한루에 좋은 술과 안주까지 있으니 이런 좋은 경치가 또 있겠소? 어깨춤이 절로 나네, 좋을 좋을 좋을씨고."
44
하고 얼씬얼씬 춤을 춘다.
45
"허, 그놈!"
46
하고 말없이 듣던 몽룡은 방자의 어깨를 툭 치며,
47
"얘, 너 그런 재담을 다 어디서 배웠니?"
48
방자 춤추기를 그치고 시치미를 뚝 떼며,
49
"말씀이야 바로 소인의 고을에 무슨 그리 좋은 경치가 있겠읍니까. 그러하오나 다 보는 눈에 있사옵지요—소인같이 천줄 곰보 만줄 곰보로 빡빡 얽어맨 주제도 소인의 계집의 눈에는 선풍 도골로 보이는 모양으로 이만한 경치도 보시는 눈을 따라 과히 안 좋지는 아니하옵지요."
50
"과연 네 말이 유리하다—네 말과 같이 광한루를 천하 제일 승경으로 치고 술이나 먹고 놀자."
51
하고 몽룡이 먼저 자리에 앉아,
52
"여바라, 너희들도 다들 올라 앉아라. 우리 오늘은 상하의 별 다 걷어 치우고 모두 친구가 되어서 특고 놀자. 자 다들 올라 앉아라."
53
이 말에 방자가 먼저 몽룡이 맞은편에 펄썩 앉으며,
54
"도련님이 오르라시니 오르려무나."
55
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56
"아니다!"
57
하고 몽룡은 손을 들어 자기에게 권하는 술잔을 막으며,
58
"향당에는 막여치라니 좌중에 누가 제일 나이가 많으냐— 우리 나이 차례로 순배를 하자."
59
방자가 좌중을 휘둘러 보더니,
60
"아마, 이 후배놈이 제일 연장자일 듯하오. 보기에는 요렇게 땅딸보라도 정녕 마흔 살은 넘었을 것이요."
61
"어 그러면 내게 존장은 넉넉하구나. 첫잔은 후배에게로 돌려라."
62
하고 몽룡이 손수 술잔을 들어 후배를 권한다. 본래 용렬한 후배는 도련님의 손에서 술잔을 받는 것이 너무도 송구하여 잔 잡는 손이 벌벌 떨린다.
63
"이놈아, 이것은 강신을 하느냐 술은 왜 엎질러?"
64
하고 방자가 자기 옷에 떨어진 술방울을 떨어 버린다.
65
한 순배 두 순배 쉴 새 없이 돌아서 병에 술도 거의 다 하고 안주 그릇도 하나씩 둘씩 비었다.
66
안주라야 과일포, 암치, 문어 따위에 불과하건마는 그런 것 을 좀체는 얻어 먹어 보지 못하던 판이라 모두 접시굽을 핥을 지경이었다. 몽룡의 얼굴에 홍훈이 돌고 숨결이 빨라진 다. 용렬한 후배도 술잔이나 들어가니 몽룡이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줄고 제법 고갯짓을 하며 떠든다. 제비 한 쌍이 처마 밑으로 들었다 나왔다 하는 것을 보고 후배는 흥에 못 이겨하는 듯이,
67
"강남 갔던 구 제비야 옛집 찾아 예 왔느냐 옛집은 예 있건만 옛사람은 간 곳 없네 압다 너도 술이나 한 잔 먹어라."
68
하고 제 잔에 먹다 남은 술을 제비를 향하여 뿌린다.
69
"좋다!"
70
하고 방자가 젓가락으로 장단을 친다.
71
몽룡은 슬며시 자리를 떠나 난간에 지혀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네 사람은 여전히 술병을 기울이고 웃고 떠든다.
72
몽룡은 심신이 상쾌하여 이리저리 경치를 바라볼 적에 오작교 저편 큰길 건너 늙은 수양버들 밑에서 녹의 홍상으로 차린 처녀 삼사인이 그네를 뛰는 양을 보았다. 치맛자락이 펄렁 댕기 끝이 너훌 앞으로 굴러 뒷가지를 차고 뒤로 굴러 앞가질르 찰 때에 흐느적 흐느적 흔들리는 수양버들 잎사귀가 햇빛에 번뜻번뜻한다.
73
처녀들이 그네 뛰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언마는 오늘 따라 몽룡은 심사가 산란함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네 뛰는 처녀들 중에 분홍 치마 노랑 저고리 입은 한 처녀가 이상하게 몽룡의 맘을 끌었다. 동안이 뜨므로 그 얼굴까지는 볼 수가 없으나 그네 위에서 몸 가지는 태가 다른 처녀와는 유별하게 아름답다.
74
『그네를 뛰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는 것이로구나.』 —몽룡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담배도 잊어버리고 몽룡은 그 처녀만 뚫어지게 바라보노라니 가슴은 두근거리고 눈은 아뜩아뜩하였다.
75
견디다 못하여,
76
"여봐라!"
77
하고 몽룡은 방자를 불렀다.
78
"도련님, 담뱃불에 중추막 타오."
79
하고 방자가 몽룡의 중추막 자락을 걷어 치운다.
80
"얘 저게 누군지 아느냐?"
81
하고 몽룡은 중추막 자락 타는 것은 본 체도 아니하고 부채로 그네 맨 수양버들을 가리킨다.
82
눈치 빠른 방자는 얼른 몽룡의 뜻을 알아차렸다—허기는 그럴 나이가 되었는데 하고 빙끗 웃었으나 일부러 시치미 뚝 떼고,
83
"그것은 보따리를 지고 가는 것을 보니 아마 먼길 가는 행인인가 보오."
84
"아니! 그것 말고 저것 말이다—저기 저것 말이어!"
85
"네 그것은 아마 엿장산가 보오."
86
"에익 그놈!"
87
하고 몽룡은 화를 내어 벌떡 일어나서 부채는 걷어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88
"저기 저 지금 그네에서 내리는 저 처녀 말이다."
89
"어허 도련님! 공부하시는 도련님이 남의 여자만 바라보 시고 담뱃불에 옷 타는 줄도 모르니 참 딱한 일이요."
90
하고 방자가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며,
91
"오늘이 오월 단오날이오니 여염집 계집아이들이 그네 뛰는 것이옵지요."
92
"아니다. 네가 모른다. 닭의 떼에 학처럼 뛰어나는 저 계집아이가 예사 계집아일리 만무하다."
93
"도련님도 취하셨소. 여기서 이렇게 보고 학인지 따옥인지 어떻게 아신단 말이요. 당년한 계집애들은 먼발치서 보면 다 미인같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 보면 다 그렇고 그렇지요."
94
"아니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 네 눈에는 저 네 계집아이가 다 같이 보인단 말이냐?"
95
하고 몽룡은 화증을 낸다.
96
"소인 보기에는 다 같은 걸요."
97
하고 방자가 고개를 돌려대고 픽 웃는다.
98
몽룡은 물끄러미 그네터를 바라보며,
99
"어허, 눈에도 상목 반목이 있어서 상놈은 눈도 양반만 못하단 말이냐—네 한 번 더 자세히 보아라. 저기 저 분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 입고 지금 막 그네를 뛸 양으로 줄을 갈라 쥐고 한 발을 올려 놓는 저 아가씨를 보아!"
100
방자도 몽룡이가 가리키는 곳을 이윽히 보는 체하더니 이제야 알아본 듯이 손벽을 딱 치며,
101
"네. 저애 말씀이시오?"
102
"그래 네가 그 애를 아느냐?"
103
"네 그애 말씀이야요? 나는 누구라고...... 그애 같으면 안다 뿐이겠소. 소인이 길러내다시피 한 계집앤 걸요...... 아이 똑똑하지요. 매우 얌전할 걸요."
104
"이놈아, 길러내기는 네가 나이가 몇 살인데 길러내어?"
105
"네. 소인의 나이가 지금 갓서른이요. 남과 같이 돈냥이나 있어서 일찍 장가만 들었더면 저만한 딸을 둘은 두었겠소."
106
몽룡은 다시 난간에 지혀앉고 방자의 소매를 끌어 곁에 가까이 앉히며 나직한 어조로,
107
"얘, 아무리 보아도 그 아가씨가 범상한 여자가 아니다.
108
네가 길러냈다 하니 너는 그를 잘 알리라—대관절 그가 누구냐?"
109
하고 은근히 묻는다.
110
"미상불 도련님 눈도 어지간 하시오. 그 애는 본읍 퇴기 월매의 딸 춘향이라 하옵는데, 절대 가인은 마치 모르겠소 마는 우리 호남 제일 미인이라고 소문이 장히 높지요—어지 간하지요."
111
"오, 그러면 기생이로구나."
112
"아니요, 기생은 아니지요. 대비 바치고 속량하여 기안에 이름을 어였으니 기생은 아니요."
113
기생 아니란 말에 몽룡은 잠깐 머쓱하더니,
114
"얘."
115
"네."
116
"그 어찌 좀 불러 올 수 없을까."
117
"누구를요?"
118
"춘향이 말이다."
119
"춘향이를 이리로 부르셔요?"
120
하고 방자는 펄쩍 뛰며,
121
"어림도 없소. 그 계집아이가 양반의 씨라고 도고하기가 백두산 꼭대기 같아서 앉아서 도련님을 부를 지경인데 그 계집애를 불러 와요? 어림도 없는 일은 생념도 마시오."
122
몽룡은 더욱 숨결이 높으며,
123
"그렇게 도고하냐?"
124
"두 말하면 헛말되지요. 관속 건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남에 누구누구하는 양반님네 선비님네도 수없이 얼러본 모양입니다마는, 그 애가 거들떠 보기는 커녕 대문 안에 들여를 놓아야 정하 배라도 하지요—나들 대문에 붙인 입춘만 바라보고는 뒤통수 치고들 돌아갔나 봅디다."
125
하고 진저리가 나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126
분홍 치마는 여전히 오르락 내리락, 버들가지는 흐느적 흐느적 몽룡의 가슴은 갈수록 설렌다.
127
"얘, 네가 내 맘을 졸이노라고 거짓말을 하나 보다. 아무러기로 그대도록 도고하랴."
128
하고 몽룡은 눈치를 보려고 곁눈으로 방자의 얼굴을 보았다.
129
방자는 성난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130
"소인이 거짓말 아니하는 줄은 도련님도 아시겠소 그려.
131
소인은 거짓말을 하면은 듣는 사람이 거짓말인 줄 알 리 만치 하옵지 듣는 사람이 속을 거짓말은 일생에 한 일이 없소. 그러니 아예 춘향이 불러 오실 일은 생념도 마시고 그만치 노시었으면 들어가십시다—또 사또께서 걱정하시리다."
132
하고 하인들을 돌아보며,
133
"얘들아 도련님 들어갑신다. 나귀 내고 자리 치워라."
134
하고 제 맘대로 분부를 한다.
135
몽룡은 짐짓 성을 내어 담뱃대로 마룻바닥을 두드리며,
136
"이놈아, 내가 불러오라면 불러 올게지 웬 잔말이냐."
137
하고 소리를 높인다.
138
방자는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시무룩하여 그네터를 향하고 건너간다. 버들가지 하나를 심술궂게 뚝 꺾어서 잔가지를 우지끈 우지끈 다 다듬어서 거꾸로 집고 군노사령의 걸음 본으로 충충충 걸어간다. 오작교 큰길 건너 잠깐 집모퉁이에 들어 안 보이더니 그네터에 썩 나서며 바로 그네에서 내려오는 춘향의 뒤로 발자국 소리 없이 사뿐사뿐 뛰어가서 목을 쑥 빼며,
139
"춘향아!"
140
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141
춘향이 깜짝 놀라 그넷줄을 탁 놓고 떨어지는 듯이 땅에 내려 서서 후유하고 한숨을 지며,
142
"이 주릴할 녀석이 왜 그다지 소리를 질러? 하마터면 낙상할 뻔했군나."
143
하고 방자를 흘겨 본다.
144
방자 능청스럽게 놀라는 모양을 보이며,
145
"거 안 되었구나—네가 요새 서방 만나서 거드럭거리고 잘 논단 말은 들었지마는 아직 젖내 나는 계집애가 어느 새 아기를 밴 줄은 몰랐구나—거 가엾구나."
146
하고 고개를 기웃거린다.
147
"예끼 망할 녀석! 누가 애기 뱄다니?"
148
하고 춘향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돌아선다. 방자는 춘향의 앞으로 따라가며, 지금 낙태할 뻔했다고 안했니? 그러면 배지 아니한 아기를 낙태부터 한단 말이냐—아무려나, 내 딸이 낙태나 아니하면 다행이다.
149
"듣기 싫어! 이 망할 녀석이 왜 오늘은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 나를 못 견디게 굴어?"
150
하고 춘향은 방자를 피하여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나 방자는 허리를 구붓하고 이리 왔다가 저리 갔다가 춘향의 가는 길을 막는다. 춘향의 불그레한 얼굴에 이슬땀이 맺히었다.
151
"춘향아!"
152
하고 방자는 갑자기 점잔을 빼고 불렀다.
153
"왜야?"
154
하고 춘향의 대답에는 여전히 독살이 있다.
155
"얘야 춘향아, 그것은 다 웃는 말이고...... 내가 할 말이 있다."
156
하고 방자가 춘향의 곁으로 가까이 간다. 춘향은 방자가 가까이 오니만치 뒤로 물러서며,
157
"할 말일 있거든 저만치 서서 하려무나. 내가 귀를 먹었단 말이냐. 왜 바싹바싹 대들어?"
158
"큰일났다."
159
하고 방자는 과연 무슨 큰일이나 생긴 듯이 고개를 끄덕뜨덕 한다.
160
"무슨 큰일?"
161
하고 춘향도 방자의 말에 주의를 한다.
162
"오늘이 오월 단오가 아니냐."
163
"그래."
164
"오늘이 오월 단오라고 책방 도련님이 광한루 구경을 나오시어 지금 저기 앉아 계신데, 네가 그네 뛰는 것을 보시고 그만 눈동자가 곤두박이를 치어서 날더러 너를 불러오라고 야단이시니 이를 어찌하느냐. 어느 명이라고 거역할 수는 없고 부득불 잠깐 네가 가서 보아야겠다."
165
몽룡이가 자기를 부른다는 말에 춘향은 못마땅한 듯이 눈초리를 샐쭉 끌어 올리며,
166
"얘, 그 말 같지 아니한 소리 말아라. 책방 도련님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오너라 말아라 한단 말이냐."
167
하고 잘 믿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168
방자 한 손을 이마에 대어 볕을 가리우고 한 손을 넌짓 들어 광한루를 가리키면서,
169
"얘 내가 언제 거짓말 하더냐. 네 저기를 바라보아라. 저기서 남쭉 끝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부채질하는 이가 책방 도련님이 아니시냐."
170
춘향도 방자의 가리키는 편을 바라보았다. 서편으로 기울어진 볕에 눈이 부시어 자세히는 분간할 수 없어도 방자의 말대로 어떤 소년 하나가 비스듬히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그 차림 차림이 귀한 집 공자일시 분명하고 이곳에 귀공자 라면 책방 도련님일시 분명하다. 책방 도련님이 풍채 좋고 재주 있단 말은 춘향도 들었던 터이라 한 번 보았으면 하는 맘도 없지 아니하건마는 그렇게 부른다고 수월히 갈리야 있으랴.
171
"글쎄 그이가 책방 도련님인지는 모르겠다마는 그이가 나를 누군 줄 알고 부르신단 말이야. 공연히 말 많고 일 많은 네가 묻지 않는 말을 춘향이니 난향이니 하고 일러바친 게지."
172
"말이야 바로 하지. 네가 춘향이란 말은 내 입으로 나왔다마는 네 이름도 알기 전에 네 모양만 보고 벌써 혼이 반은 빠지어 달아나서, 날더러 네가 누군가 알아 올리라 하시니, 내가 먹을 것이 있어서 내일부터라도 삼문안 구실을 안 다니면 몰라도 어찌 도련님을 그일 수가 있느냐. 그래서 말이야, 바로 내 입으로 바른 대로 일러 바쳤다."
173
하고 방자는 춘향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한층 말소리를 낮추어,
174
"얘야, 말이야 바로 책방 도련님이 과연 네 배필이 될만한 양반이다. 풍채 좋고 마음 착하고 그러고도 시원시원하고, 글이야 내가 아느냐마는 글도 잘 하신다더라—밤낮 글만 읽으니 그만치 읽으면 우리 집 도야지놈도 글을 잘못하고는 못 견딜 것이다. 나도 너를 친동생같이 아니 말이지 도련님 말을 잘 들어 보아라—해롭지 아니할라."
175
"응. 너 나를 호려내려 드는구나."
176
하고 춘향이 방그레 웃더니 다시 정색하고 방자더러,
177
"가서 이렇게 도련님께 여쭈어라. 불러 주시는 뜻은 감격하오나 규중 처자로서 모르는 남자의 전갈 듣고 따라가옵기는 옛 성현의 훈계에 어그러지니 못 갑니다...... 또 공부하시는 도련님이 소창을 나오시면 소창이나 하실 것이지 남의 집 처자더러 오너라 말어라 하시는 것이 점잖으신 체면에 어그러지지 않습니까 고—그렇게 가서 여쭈어라. 나는 갈 수 없다."
178
하고 칼로 똑 끊는 듯이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새침 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179
방자는 하도 어이없어서 춘향이가 대문으로 들어가 안보이도록 얼빠진 듯이 섰다가,
180
"허, 그년 참 맵다—사뭇 호초알이로구나."
181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두 어깨를 축 처뜨리고 기운없이 오던 길을 도로 광한루로 건너간다.
182
이때에 몽룡은 껄떡껄떡 침만 삼키고 춘향이가 오기만 기다리다가 춘향은 어디로 가버리고 방자만 어슬렁 어슬렁 기운없이 돌아옴을 보고 분함을 못 이기어 발로 광한루 마루를 탕탕 구르며,
183
"글쎄, 이 못생긴 놈아! 널더러 춘향이 불러오라고 했지 들여쫓고 올라고 하더냐—저런 못생긴 놈이 어디 또 있담!"
184
방자는 무안한 듯이 처분만 기다리는 듯이 허리를 굽히고 비하에 읍하고 서며,
185
"소인이 별소리를 다해도 고개 하나 까딱 아니하옵고 욕만 톡톡히 얻어 먹었읍니다. 도련님께서 진실로 춘향이를 보시려거든 군노 사령을 내보내시어서 붙들어나 오셔야지 여간 전갈로 부르시기나 해가지고는 명년 이때까지 부르시 더라도 춘향이는커녕 난향이도 못 보시리다.—오늘 보니까 그 애의 매서운 양이 사뭇 칼이요 칼."
186
하고 실심한 듯이 먼 산을 바라본다.
187
방자만 책망하여도 쓸데 없는 줄을 알고 몽룡은 다시 은근한 어조로,
188
"얘, 이리 올라오너라...... 그래 내가 부른다고 했니?"
189
"네."
190
"무어라든?"
191
"가서 이렇게 도련님께 여쭈라고요—."
192
"무어라고? 그런데 왜 내게 말을 아니했어?"
193
"말씀도 다 안 들으시고 벼락이 나리시니 언제 말씀할 새가 있소?"
194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래 무에라든?"
195
"불러 주시는 뜻은 감격하오나."
196
"응, 그래."
197
"규중 처자로서 모르는 남자의 전갈 듣고 따라가옵기는......"
198
하고 방자는 말 구절을 잊어버린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고 머리를 긁는다. 몽룡은 방자가 전하는 춘향의 말을 한 번 입 속으로 외어 보고,
199
"응, 그렇지......그리고 또."
200
"옛 성현의 훈계에 어그러지니 못갑니다고."
201
"흥, 옳은 말이다...... 그러면 춘향이가 글도 읽었느냐?"
202
"아마 도련님만치는 읽었지요."
203
몽룡은 고개를 끄덕하며,
204
"그래, 그 밖에는 다른 말은 없더냐?"
205
방자가 말하기 어려운 듯이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206
"고 계집애가 버릇없이 도련님 노여실 말을 하여요."
207
"내가 노여할 말? 옳은 말에 노열 내가 아니다. 바로 말해라."
208
"그러면 바로 아뢰오—또 공부하시는 도련님이 소창을 나오시면 소창이나 하실 것이지 남의 집 처자더러 오라 말어라 하시는 것이 점잖으신 체면에 어그러지지 않습니까라고."
209
말을 마치고 방자는 몽룡의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몽룡은 잠깐 머쓱해지더니 다시 얼굴에 화기가 돌고 뜻에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210
"과연 절절히 옳은 말이다! 내가 부끄럽다."
211
하고 이윽히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더니 오늘 글짓 는다고 가지고 나왔던 황모 무심필에 부용당 먹을 흠뻑 묻혀서 빛 좋은 태문지에 서너 줄을 휘휘 둘러 쓰더니 봉투에 넣어 꼭 봉하여 방자를 불러,
212
"얘, 너 춘향 아씨 집에 다시 가서 아까 전갈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사죄하는 말하고 이 편지 드리고 답장 받아오너라."
213
방자 그 편지를 받아 들고,
214
"또 욕이나 얻어 먹으러 가요?"
215
하고 주저하는 것을,
216
"네 곧 다녀오너라!"
217
하고 몽룡이가 호령 소리를 높이므로 방자 다시 마지 못하여 어슬렁 어슬렁 아까 돌아올 때보다도 더 느린 걸음으로 길가에 버들잎 풀잎 뜯어 피리 불어가며 춘향의 집을 향하고 걸어간다.
218
방자는 춘향의 집 대문을 들어서자 기운을 내어서 중문으로 통통통통 발을 구르고 뛰어 들어가며 목을 길게 뽑아,
219
"춘향아!"
220
하고 불렀다.
221
춘향은 마침 산란한 심서를 풀 양으로 거문고 줄을 고르고 앉았다가 방자의 소리에 깜짝 놀라 거문고를 무릎에서 떨어 뜨리고 영창으로 아까 그네 뛸 때에 상기했던 것이 식지 아니하여 아직도 불그레한 대로 있는 얼굴을 내밀며,
222
"이 주릴할 녀석이 왜 또 와서 지랄이야. 춘향아 춘향아 하고 온 동네가 떠나가게 부르니 춘향이가 네집 종의 자식의 이름이드냐."
223
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224
방자도 골을 내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우뚝 층계 앞에 서면서,
225
"이년에 계집애, 나를 보면 언필칭 주릴할 녀석이니 내가 네집 종의 자식이란 말이냐 네 집에 밥을 얻어 먹으러 왔단 말이냐. 팔자 기박하여 삼문안 구실을 다녀 밤낮 아이 어른 한테 이놈아 저놈아 소리를 식은 죽 먹듯하고 살아는 간다 마는 너한테까지 이녀석 저녀석 소리를 들을 까닭이야 있느냐."
226
하고 마당에 가래침을 탁 뱉는다.
227
방자가 하도 야단을 하니 춘향이 좀 누그러지며,
228
"네가 행세를 잘 해도 그래?"
229
하고 방자를 힐끗 본다.
230
방자는 여전히 성이 안 풀리는 듯이 춘향을 위 아래로 훑어보며,
231
"얘야, 내 행세가 잘못 간 것이 무에냐. 네가 남없이 낯바 닥이 예쁘장하게 생겨 먹고 행실이 바르지를 못하여서 남을 걸음을 걸리지 그려 낸들 좋아서 너한테 욕이나 얻어 먹으러 다니는 줄 아느냐—어 참 아니꼬운 일 다보겠네."
232
하고 또 한 번 퇴하고 침을 뱉는다.
233
행실이 바르지 못하단 말에 풀리려던 춘향의 두 눈초리가 다시 쫑깃하고 올라가며,
234
"이녀석, 내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니 무엇이 바르지 못하냐—네 집에 가서 무엇을 훔치어를 왔느냐 남의 집에 불을 놓았느냐—내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니 어디 바르지 못한 연유를 일러 보아라—혓바닥을 잘라 버릴라."
235
방자 창 앞으로 한 걸음 바싹 다가 서며,
236
"오냐, 네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연유를 들어보아라! 과년된 계집애가 행실이 바를 양이면 동넷집 수코양이 눈에라도 띄울세라, 네집 안마당으로 다니더라도 고개를 고부슴하고, 네 집 후원으로 거닐더라도 행여 재채기 소리라도 밖에 들릴세라 조심을 할 것이지 그렇지 않아도 예쁘장한 계집애가 새 옷 입고 단장하고 백주 대로변에 네 활개 활짝 뻗고 치맛자락, 속옷자락까지 펄렁거리며 굼틀굼틀거리니 길가던 행객 까지 발이 길바닥에 딱 붙고 입이 헤벌어져서 정신을 잃어 버리게 하니, 그래 이러고도 네 행실이 바른다 할 것이냐.
237
네가 얌전스럽게 처녀답게 가만히 네 방안에 들어앉아서 글이나 읽든지 바느질 수놓기나 하든지 심심하거던 징동 당동 거문고 가야금이나 울리든지. 설마 고양이가 고양이를 낳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장구나 둘러 메고 얼씬얼씬 엉덩춤을 춘다기로 네집 방안에서만 하량이면, 아무리 책방 도련님이 잘 아는 데는 중방 밑 귀뚜라미라 하기로 네집 담벽까지 뚫고 너라는 계집애가 있는지 없는지 들여다볼 리는 만무하지 아니하냐—그런데 제 허물을 모르고 애꿎은 날더러—주리를 할 녀석이니 서방을 삼을 녀석이니 하니 내가 그렇게 만만 하더냐."
238
춘향이 방자의 말을 한참 우두커니 듣고 앉았더니 기가 막히는 듯이 웃으며,
239
"어쨌든 입심은 좋다—방자 노릇하기는 아깝다."
240
춘향모 월매가 안방에서 옛 친구 이삼인을 청하여 가지고 오늘이 오월 단오라고 술 먹고 있던 차에 춘향이 방에서 떠드는 소리 나는 것을 보고,
241
"이얘, 누구하고 이렇게 언쟁을 하니?"
242
하며 신을 찔찔 끌고 나온다. 나이는 육십이 가까왔으나 아직도 옛날 남원 명기로 들날리던 빛이 남았다.
243
"아가 누가 왔니?
244
하다가 방자가 굽실하고 절하는 것을 보고,
245
"오, 네드냐. 구실이나 잘 다니고 어머니도 무고하시냐."
246
"네 처도 잘 있고 어린것도 잘 자라느냐?"
247
네. 앓지나 않지요. 아주머니는 점점 젊어 가시는구려.
248
하고 방자는 춘향을 돌아보며 웃는다.
249
젊어간다는 말에 월매는 생긋 웃으며,
250
"죽을 날이 가까와 오는 년이 젊어 가는게 다 무엇이냐, 호호호. 이년석 너도 인제는 어른 다 되었고나. 이년석 그새 한번도 아니 오더니 오늘 어째 왔느냐."
251
"좁쌀 여덟 섬에 모가지를 매달고 어른 심부름 아이 심부 름하기에 나올 새가 있소?"
252
"그래 무엇을 그렇게 떠들었니?"
253
하고 귀여운 듯이 춘향을 바라보며,
254
"나는 네가 누구하고 말다툼이나 하는 줄 알았구나."
255
춘향은 새침하고 고개를 방안으로 돌리며,
256
"저녀석이 책방 도련님보고 춘향이니 난향이니 하고 종지리 새 열쇠 까듯, 경신년 글강 외듯 외어 바치어서 도련님이 나를 불러 오란다고 벌써 이 바보녀석이 두 번째나 와서 지랄이라오."
257
"인제는 또 바보야? 하고 싶은 대로 다해라."
258
하고 방자는 기막힌 듯이 웃고 돌아선다.
259
월매는 책방 도련님이 춘향을 부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솔깃하여 빙그레 웃으면서,
260
"아가 그러지 말아라. 이 애가 일러바치지 않으면 도련님이 네 이름 모르랴."
261
하고 방자를 향하여,
262
"그래 아기가 무에라든?"
263
"아까 하도 도련님이 발광을 하시길래 이 애 그네 뛰는데 와서 도련님 말씀을 전하였더니 이 애가 세길 네길 뛰며, 주릴할 녀석 오랄질 녀석 하고 욕을 닷섬이나 얻어 먹고, 닭 좇아 가던 개 모양으로 뒤통수 툭툭 치고 도련님한테 돌아가서 익애 하던 말을 여쭈었지요, 했더니 도련님 골이 댕기 끝까지 흘러 내려가서 또 이놈 저놈 하고 어르지요. 어쩌면 이놈의 팔자는 나이로 말하면 내아들 딸이라고도 할 만한 어린것들에게 이놈 저놈 이녀석 저녀석 소리만 듣고 살게 되니 참으로 기가 막히외다."
264
"그래서 도련님이 또 가보라고 하시어서 네가 왔니?"
265
하고 월매는 부드러운 소리로 방자를 달랜다.
266
"아까는 입으로 전갈을 하여서 황송 황송합니다고 가서 아가씨께 간절히 사죄하는 말씀 사뢰고 이 편지 드리고 답장 받아 오너라 해서 왔다오."
267
월매는 춘향을 보고,
268
"아가, 그 편지 보았니?"
269
춘향은 말없이 고개만 짤래짤래 흔든다.
270
이번에는 방자를 보고 월매가,
271
"도련님 편지 어쨌니?"
272
"어째요, 여기 있지요."
273
하고 방자는 허리춤을 가리킨다.
274
"왜 춘향이 안 주었니?"
275
"정신을 차려야 주지요. 오는 길로 벼락이 내리니 정신이 들었다 났다 하오."
276
하고 방자가 견딜 수 없이 불쾌한 듯이 연해 입맛을 쩍쩍 다시고 눈을 껌벅껌벅하더니만 휘끈 발을 돌려 중문간 밖으로 뛰어 나가며,
277
"에라 빌어먹을—차라리 논게 강경이를 가서 모군을 서먹 든지 그도 못하면 지리산에 들어가서 중놈의 밥을 지어주고 얻어 먹는 것이 낫지, 이놈의 구실은 아니꼬와서 못해먹을 내라."
278
하고 중얼거리며 달아난다.
279
춘향이 깜짝 놀라 버선발로 뛰어 나오며,
280
"얘야 방자야, 편지나 두고 가거라."
281
월매는 허겁지겁하는 춘향의 뒷모양을 보고 고개를 끄덕끄 덕하며 빙그레 웃는다.
282
"얘야 방자야!"
283
춘향은 한 번 더 높이 부른다.
284
방자 뛰어 들어오며,
285
"왜 불러? 강경이 갈 노자나 주련?"
286
"얘야, 그 편지가 노자 되느냐. 네게는 쓸데 없는 것이니 편지나 두고 가거라."
287
하고 춘향은 수삽한 듯이 고개를 숙인다.
288
방자 물끄러미 춘향을 바라보다가 껄껄 웃으며 월매더러,
289
"요새 계집애는 다 저렇단 말이야. 아주 겉으로는 맵기가 호초알 같고 매섭기가 피장이 칼날 같으면서 속으로 딴전 치것다."
290
하고 편지를 꺼내어 춘향에게 주며,
291
"옛다. 만지고 쓰다듬고 뺨에 대고 혀로 핥고 가슴에 품고 한자 영낙없이 잘 보아라. 그리고 답장이나 얼른 써라.
292
또 거행 더디다고 알경이나 치우게 말아라."
293
춘향은 편지를 떼어 본다. 월매와 방자는 편지 보는 춘향의 얼굴만 보고 있다.
294
춘향이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하더니 또 한번 그 편지를 보고 또 생각하는 듯하더니 또 한번 본다.
295
월매 참다 못하여 담뱃대를 놓고 툇마루로 올라가면서,
296
"어디 무에라고 하시었니—좀 읽어 보려무나—나도 듣게."
297
방자도,
298
"옳다 나도 좀 듣기나 하자."
299
"싫소...... 그것은 무얼."
300
"어서 읽어라. 좀 듣자."
301
"편지를 읽으면 네까짓 녀석이 알아 듣니?"
302
하고 춘향이 웃으며 방자를 본다.
303
"왜 몰라야. 진서로 썼거든 좀 새겨 보렴."
304
"진서는 아니다. 시조다. 글씨 참 잘 썼다."
305
하고 춘향은 무슨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모양 으로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306
"어머니 답장 써?"
307
하고 월매를 보고 묻는다.
308
월매는 담배가 다 타버리고 연기도 아니 나는 담뱃대를 집어 빨면서,
309
"책방 도련님이 네 맘에 드는 게로구나."
310
하고 생긋 웃는다.
311
"에그, 어머니도...... 그러면 어떻게 해요. 편지까지 하시 었으니 답장은 해야지."
312
하고 춘향은 귀찮은 듯이 몽룡의 편지를 문갑 위에 한번 던지어 본다.
313
"대관절 무에라고 편지가 왔는데 너는 무에라고 답장을 할래?"
314
하고 월매가 문갑 위에 던진 몽룡의 편지를 집어 본다.
315
춘향은 그것을 빼앗으려다가 지는 체하고 월매가 읽는대로 내버려 둔다.
316
월매는 편지를 한참이나 보더니 한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평조로 몽룡의 노래를 읊는다.
317
"어지어 내 일이어 인연도 기이할사 언뜻 뵈온 님이 그 님일시 분명하이 광한루 예 보던 벗이 찾아온다 일너라."
318
다 부르고 나서 월매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319
"아가, 광한루 예 보던 벗이라 하였으니 이전에도 네가 광한루에서 도련님을 본 일이 있느냐?"
320
하고 춘향을 본다.
321
춘향은 수줍은 듯이 몸을 비비 꼬다가 월매의 손에서 그 편지를 빼앗으며,
322
"그 광한루가 어디 이 광한루요?"
323
"그럼 광한루가 또 어디 있니?"
324
"옥경 광한루요—하늘에 있는 광한루 말이요—하늘에 선관 선녀로 있을 때에 서로 보던 벗이라고 해서 예 보던 벗이라고 했지요."
325
월매가 이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326
"참 그렇고나. 내야 무식해서 광한루라면 남원 남문 밖 광한루 밖에 아니?"
327
하고 이윽히 무엇을 생각하다가,
328
"아가, 네 말을 들으니까 도련님 글이 참으로 이상도하다.
329
내가 너를 밸 때에 꿈에 한 손에는 이화를 들고 또 한 손에는 도화를 들고 선녀 한 분이 내려와서 도화가지를 내게 주고 잘 가꾸어 두라. 후일에 앞날이 있으리라. 이화 가지를 전하러 갈 길이 바쁘다 하더니 이제 생각하니 너는 분명 도화 가지고 도련님은 분명 이화 가지로고나—도련님 성씨가 이씨가 아니시냐. 광한루 예보던 벗이란 말씀이 과연 허사가 아니로다."
330
하고 참인 듯이 말한다.
331
"어머니도 용하게도 꾸며대시우."
332
하고 춘향은 픽 웃는다.
333
"제길 꿈타령은 있다가 하고 어서 답장이나 써다오."
334
하고 방자가 재촉한다.
335
"아차, 어 술이나 한잔 줄걸 그랬고나. 늙으면 잔망해서 걱정이야—아가, 답장 써라. 오늘 저녁에라도 누옥이나마 찾아 오시라고 그러려무나. 네가 말 부족하고 글 부족해 못 쓰겠니."
336
하고 담뱃대를 들고 일어나 마당에 내려서며 방자더러,
337
"너는 이리 들어와서 술이나 한잔 먹어라, 좋은 편지 가지고 온 애를 맨 입으로 보내 쓰겠니?"
338
이때에 안으로서,
339
"성님! 성님! 월매 성님 무엇하오?
340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341
월매는 신을 찔찔 끌고 걸음을 빨리 하며,
342
"응 들어가우,...... 어서 이리 들어오너라."
343
하고 방자를 부른다.
344
"술을 주시려거든 한 사발 내보내시오, 들어가서 마나님 들한테 허리 구부리기도 싫고 수다 듣기도 싫수."
345
월매는 더 방자를 재촉도 아니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무슨 이야기통이 터지었는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다.
346
춘향은 문갑 속에 꼭꼭 싸두었던 간지 한 축을 꺼내어 그 중에 가장 살 좋고 윤 있는 것 한 장을 골라 놓고 벼루에 먼지를 입으로 혹혹 불고 연적에 물도 알맞추 떨어뜨려서 향기 좋은 해주먹을 갈고 또 갈고 진케 간 후에 순황모 무심필을 끝을 입으로 잠깐 씹어 풀어 가지고 궁체 한글 글씨로 똑똑하게 정하게 노래 한 머리를 쓴다—
347
"이몸의 정렬함이 삼생에 뻗었으니 천상 천하에 날 안달 님 없으련만 그처로 찾으시는 님을 막을 줄이 있으랴."
348
이렇게 노래를 다 써놓고는 몽룡의 편지를 다시 한 번 들어 보고 그 끝에 이름 쓴 것을 모본하여,
349
『단향일에 성 춘향.』
350
이라 하고 이름을 써서 혹 말일 잘못된 데나 없나 글자나 빠지지 아니하였나, 글씨나 잘못된 데나 없나 하고 두서너 번을 내려보더니 맘에 맞는 듯이 방그레 웃고는 종이를 착착 접어 봉투에 넣고 상단이 불러 밥풀 가지어오라 하여 꼭꼭 봉하고 겉봉에 진서로,
351
『이 수재 몽룡씨전』전
352
이라고 쓴 후에 봉투 왼편 밑에 좀 적은 글씨로,
353
『성생은 근함이라』
354
하고 써서 봉투도 두세 번 살펴보고 붓을 던지며 지금 막 상단이가 갖다 준 술 한 사발을 먹고 나서 수염을 빠는 방자더러,
355
"옜다, 답장 가지고 가거라."
356
하며 편지를 내어 준다.
357
방자는 접시에 놓인 문어 조각을 한입에 틀어 넣고 우물우물 씹어가며,
358
"얘, 무어라고 답장 했니? 오늘 저녁에 오시라고 했니! 또 내가 사초롱 들고 네 집 걸음을 하게 되었고나. 그때에는 술값이나 조히 주어야 된다."
359
"술은 눈에 비지가 꾸역꾸역 나오면서도 그래도 아직도 술이 나쁘냐. 그저 술독에 빠지었으면 좋겠고나."
360
하고 춘향이가'오냐. 네 말대로 하마.'하는 웃음을 웃어 주는 것을 보고, 방자도 좋아라고,
361
"얘야, 그 말 마라. 너 같은 아이에게는 도련님 같으신 서방님이 있고 도련님 같으신 서방님께는 너같은 어여쁜 아가씨가 있어서 다 그렇고 그렇고한 좋은 일도 많지마는 나같은 놈이야 술이나 먹어야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술이나 취해서 엄벙덤벙하는 때가 내 세상이다."
362
하고 얼씬얼씬 춤을 추며,
363
"얼씨고나 절씨고...... 얘 너 도련님 수청들어 귀이 되거든 이 불쌍한 오라범 술이나 잘 먹여다오...... 잘 있거라 저녁에 또 보자."
364
하고 편지를 허리춤에 감추면서 중문 밖으로 뛰어 나간다.
365
춘향이 무엇을 잊어버린 듯이 툇마루에 뛰어나서며,
366
"방자야 아까는 잘못하였으니 용서합소사고."
367
하고 소리를 친다.
368
"오냐, 염려 마라."
369
하는 소리가 대문 밖으로서 들어온다.
370
이때에 몽룡은 취하였던 술도 다 깨어 버리고 방자가 가던 길만 먼히 바라보고 섰더니 그리로서 사람 하나만 번뜻 보이면,
371
"여봐라, 저것이 방자가 아니냐?"
372
하고 곁에 있는 하인더러 묻는다.
373
"아니올씨다. 방자놈은 키가 큽니다."
374
또 사람 하나가 번뜻 보이면,
375
"여봐라, 저것은 분명 방자다."
376
"아니올씨다. 그것은 이리로 오는 사람이 아니라 저리로 가는 사람이 올씨다."
377
"이놈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정녕 길을 잃어버렸나 보다."
378
하고 몽룡은 애를 부덩부덩 쓴다.
379
"방자놈이 술버릇이 좋지 못하오니 아마 어디서 술을 처먹고 주정을 하고 있나 보오."
380
하고 몽룡의 애를 태우는 대답만 한다.
381
이때에 방자의 충충거리고 오작교로 건너오는 양이 보인다.
382
방자가 오작교를 건너 오는 것을 보고 몽룡이 벌떡 일어나며,
383
"여봐라 저것은 분명 방자냐?"
384
한 사령 일부러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385
"네. 저것은 분명 방자인 듯하오."
386
몽룡이 안심한 듯이 다시 난간에 지혀앉아, 휘유 길게 한숨지며,
387
"허, 그놈 남의 애를 다 태는구나."
388
하고 얼마 있다가,
389
"여봐라, 저놈의 걸음거리가 기운이 있는 모양이냐 기운이 빠진 모양이냐?"
390
"하 그리 기운이 빠진 모양은 아닌가 보오."
391
"기운이 빠지면 저놈의 걸음이 어떠하냐?"
392
"두 어깨가 축 처지고 대가리가 앞으로 숙읍니다."
393
몽룡이 안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394
"어깨는 처지었는지 들렸는지 모르겠다마는 대가리는 분명히 뒤로 잦혀지었다."
395
방자가 광한루 가까이 와서는 더욱 활개를 치고 몸을 우쭐 거리고 껑충껑충 뛰어오더니 몽룡이가 앉은 난간 밑에 와서 허리를 굽실하고 옷소매로 이마에 땀을 씻으며 씨근벌떡하는 소리로,
396
"도련님! 또 욕을 한 섬이나 얻어 먹고 왔소."
397
몽룡은 조급한 듯이 난간 위로 허리를 굽혀 방자의 술냄새 나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398
"욕만 먹고 왔어?"
399
하고 소리를 지른다.
400
"또 술도 한사발 얻어 먹었는데 아주 맛이 썩 좋읍디다.
401
그놈을 한사발 들이켰더니 지금 하늘이 돈잎만 하오——어 더워! 훠."
402
하고 옷고름을 끌러 옷자락으로 부채질을 하며 짖궂게,
403
"참 술맛 좋읍디다."
404
"그래 술 얻어 먹고 그리고는 어쨌어?"
405
하고 몽룡은 심히 맘이 조급하였다.
406
"술 먹고는 안주 먹었지요. 문어발 먹었지요. 그놈 질깁디다."
407
몽룡이 견디다 못하여,
408
"이놈아, 술 먹고 안주 먹고 그것뿐이야? 편지는 어찌했단 말이냐?"
409
방자 능청스럽게 놀라는 듯이 한번 껑충 뛰고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410
"아차, 술맛이 하도 좋킬래 길 오면서 술 생각만 하노라고 도련님 편지는 미처 생각도 못하였소...... 편지는 갖다 주었지요."
411
"그래서?"
412
하고 몽룡의 기색이 좀 풀린다.
413
"춘향이가 읽어요."
414
"그리고는?"
415
"또 한번 읽어요."
416
"그리고는?"
417
"또 읽던가 보든 걸요."
418
"이놈아, 춘향 아씨가 편지를 읽고는 어떻게 하더냐 말이야...... 허 그놈 사람의 애를 식은 재가 되도록 다 태워버리 고야 말려는구나."
419
"소인의 애는 얼마나 탔는 데요?"
420
"그래 편지를 읽고는?"
421
"자세히 말씀해요?"
422
"그래 자세히 말해라."
423
방자 잊었던 것을 생각한느 모양으로 한참이나 고개를 기웃기웃하더니,
424
"춘향이가 도련님 편지를 읽고는—아마 열 일곱 번은 읽나 봅디다. 한참은 몇 번이나 읽나 보자 하고 세이다가 열 댓까지 세이고는 구찮아서 말았소."
425
"압다, 이놈아 그래 편지를 읽고는 어찌하더냐 말이야?"
426
하고 몽룡이 갑갑증이 나서 발로 마루를 한번 구른다.
427
방자는 놀라는 듯 두려워하는 듯 또 한번 껑충 뛰며,
428
"네 바로 아뢰오리다—춘향이가 그 편지를 읽더니마는—아마 열 일곱 번이나 읽더니마는 두 빰은 발그레 두 입술은 오물오물 두 눈은 사르르 숨소리는 쌔근쌔근하더니만 제 어미 월매를 보고 '답장 써요?'하옵디다."
429
하고는 방자가 코웃음을 씩 웃는다. 몽룡이도 참을 수 없이 빙그레 웃는다.
430
몽룡은 춘향이가 그 어미더러,'답장 써요?'하고 묻더란 말이 맘에 흡족하여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431
"그래 춘향 아가씨 어머니께서 무에라고 하시더냐?"
432
'무에라고 하시더냐?'하고 경대를 하는 것이 하도 우스워서 방자 허허 웃으며,
433
"허허 도련님, 어느 새에 춘향 어미 월매를 장모 대접을 하시오? 참 지레짐작도 유분수요. 콩밭에 가서 비지 찾고 밥짓기 전에 숭늉 찾고, 장가드시기 전에 아기 낳으시겠소."
434
몽룡도 어이없어 웃으며,
435
"이놈아, 재담 그만하고 어서 할 말만 하여라. 잎사귀, 가지 다 내어버리고 줄거리로만 어서 아뢰어라."
436
"압다 도련님도, 무척 성급하시오. 아무리 빨리빨리 성화 같이 아뢰기로 첫말이 나오고야 다음 말이 나오지요. 이런 때에는 소인의 입이 여남은 구녕은 되었으면 쓰겠소. 한꺼 번에 여남은 마디씩 아뢸께 도련님도 정신차려서 귀떨어진 말 한마디 빼놓지 말고 들으시오."
437
하고 방자는 광대가 갖은 타령 주워대듯 입을 나불나불 무슨 소린지 알지 못하게 지껄인다. 그 중에서 몽룡이가 알아 들은 것은, 월매가 몽룡의 시조를 한 번 불렀다는 것 뿐이다.
438
방자는 한참이나 제비놀이하듯 지껄이더니 숨이 찬 듯이 길게 한 번 한숨을 쉬고 나서 알아들을 수 있게,
439
"그리고는 이 편지를 써 주시며, 아까는 잘못했읍니다고, 용서하십시사고—."
440
하고 춘향의 소리를 흉내내고는 허리춤에 넣었던 편지를 몽룡에게 준다.
441
몽룡은 편지를 받아 위선 필봉에 쓴 글씨를 보더니,
442
"여봐라, 편지는 왜 네 배때기에 넣고 오라드냐. 피봉에 땀이 묻었구나."
443
하고는 피봉을 뗀다.
444
몽룡이 이윽고 춘향의 답장을 보더니, 탄복한느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무릎을 툭툭치며,
445
"과연 내 배필이다!"
446
하고 좋아한다.
447
방자 고개를 번쩍 들고 몽룡이가 보는 편지를 치어다보며,
448
"그게 무에라고 썼는데 그렇게 좋아하시오? 오늘 저녁에 오시라고 하였소. 어디 소인도 좀 들어봅시다 그려."
449
"네까짓 놈이 들으면 알겠느냐? 그래도 한 번 들려주랴?"
450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451
"그래라. 네가 내 중매가 아니냐. 내 부를께 네 들어 보아라."
452
하고 손으로 무릎을 치어 장단을 맞추며 찌름으로 부른다—.
453
"이 몸이 정렬함이 삼생에 뻗었으니 천상 천하에 날 안달 님 없으련만 거처로 찾으시는 님을 막을 줄이 있으랴."
454
부르기를 마치고 또 한 번 무릎을 치며, 몽룡은 방자를 보고,
455
"어떠냐? 알아듣겠느냐?"
456
"알아듣기는 하였는데 도련님 무릎 너무 따리지 마시오.
457
오늘 저녁에 또 다리 아파서 춘향의 집에 못가시리다."
458
몽룡은 한 번 더 춘향의 답장을 읽어 보고 소매에 넣고 춘향이그네 뛰던 터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459
"여바라."
460
"여이."
461
"나귀 내어라. 인제는 광한루에 일이 없으니 들어가리라."
462
방자 나귀를 끌어다가 몽룡이 앞에 세우며,
463
"여기서 볼 일은 다 보시었소?"
464
하고 빈정거린다.
465
광한루에서 돌아와서 몽룡은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 파루 소리 나기만 기다렸다.
466
상방에 아버지를 뵈오러 갔으나 아버지도 눈에 잘 보이지 아니하고, 내아에 어머니를 뵈오려 갔으나 어머니도 있는둥 없은둥, 밥상을 받아도 밥과 국을 분간할 수가 없고, 글을 읽으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글자 한 자가 두 자 되고 두 자가 한 자가 되며, 대학을 읽노라 하는 것이 맹자—경양혜왕도 쑥 나오고 맹자를 읽노라고 하는 것이'관관저구 재하지 주로다'하고 시전에 것이 나오기도 한다.
467
"내가 이게 웬 일이야?"
468
하고 몽룡은 마음을 진정하려 하나 풍랑 일어나는 바다 모양으로 가슴 속은 설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네를 늘어 오르락 내리락하는 춘향의 모양뿐이었다.
【원문】연분(緣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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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의견 5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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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버* (172.224.***.**) 2022-11-13 01:34:36
왠지 좀 모에하다 싶었더니 비교적 최근에 재편집된 작품이구만ㅋㅋㅋ 그저 씹덕 라노벨
* (115.94.***.***) 2022-07-03 08:46:16
ㅇ
필아저* (49.166.***.**) 2021-04-07 17:03:22
『일설 춘향전』은 『춘향전』의 여러 계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여러 『춘향전』의 계보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가장 최종의 『춘향전』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그리고 이는 식민사회에서 조선적 전통을 기획하겠다는 포부에 맞닿은 것이며, 그러한 전통을 기획하는 절대적인 지위에 작가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교보문고(해설)
필아저* (49.166.***.**) 2021-04-07 17:02:30
『일설 춘향전(一說春香傳)』은 ‘춘향’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1925년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총 96회 분량으로 연재되었다. 1925년 『동아일보』는 『춘향전』을 “조선 사람의 전통적 정신”을 계승하는 작품으로 설정하고 이를 다시 씀으로써 “참된 국민문학”을 만들어낼 것을 이광수에게 요청하고, 이러한 개작의 방향은 계몽주의적 태도를 전제로 하는 이광수의 창작의 방식과 교호하면서 근대적인 문학의 체제를 갖춘 새로운 『춘향전』을 탄생시킨다. 『일설 춘향전』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기본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하되, 식민사회에서 요청되었던 조선적 전통을 기획하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일설 춘향전』의 창작은 적층적이고 서민적인 형태로 유통되었던 『춘향전』에 작가적 주체의 자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근대적인 소설의 형태로 확정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 교보문고(해설)
필아저* (106.240.***.***) 2021-03-11 12:23:29
춘향전 중에 최고의 작품인 것 같습니다. 고전 소설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한 작품 중에는 이광수의 '허생전 (이광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광수 허생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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