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1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The Representation of Nuclear Power and the Memory of Exposure in Post-War Japan




일본학보

2014, vol., no.99, pp. 433-448 (16 pages)

UCI : G704-000247.2014..99.032


발행기관 : 한국일본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서동주 /Seo Dong-ju 1


1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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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후 일본이 피폭체험에도 불구하고 원전대국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을 대중인식의 차원에서 살펴보고 있다. 피폭의 집합적 기억에 의해 지탱되는 핵=원자력에 대한 전후 일본인들의 뿌리 깊은 부정적 인식과 감정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기를 통해 ‘국책’의 차원에서 추진된 원자력 개발은 어떤 결정적인 도전에도 직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핵=원자력의 ‘군사적 이용’과 구분되는 ‘평화적 이용’의 가능성은 고도성장기를 통해 광범위하게 지지받았다. 즉, 많은 경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문명의 필연’이고, 군사적 목적과 분리된 원자력은 ‘생활과 산업 상의 혁신’을 가져다줄 새로운 에너지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 원자력에 대한 전후 일본인들의 인식에서 특징적인 것은 ‘평화이용(원전)’과 ‘군사이용(폭탄)’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두 가지를 완전히 별도의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즉, 1950-60년대의 원자력 군사이용과 구분되는 평화이용은 그 원천(기원) 아니라 원자력의 목적과 용도의 수준에서 구분되는 수준에서 인식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은 원자력의 군사이용이 가져오는 폐해와 위험을 잘 알고 있기에 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실현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담론이 형성되면서 원자력 개발을 위한 대중적 동의의 심리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This article focuses on the way in which the government’s nuclear power policy became institutionalized as a result of public consent in post-war Japan. The investigation was based on the following preconditions: the memory of prior exposure to the effects of nuclear energy was not a valid restriction factor when it came to accepting the peaceful uses of nuclear energy, acceptance of which is viewed by Japanese people to depend on the personal opinion of the subject. Most of all, the Japanese were found to be convinced that nuclear power would not be misused for military purposes because of the experience of exposure. The research established that the memory of prior exposure contributed to the discourse relating to the peaceful uses of nuclear energy and that it enabled subjects to accept the peaceful uses of atomic ener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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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발전,
전후일본,
원자력의 평화이용,
피폭기억

nuclear power plant, post-war Japan, Peaceful Uses of Atomic Energy, memory of expo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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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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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https://www.kci.go.kr/.../sereArtic.../ciSereArtiView.kci...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이 관동대학살과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주장이 지난 정부 시절에 횡행한 적이 있다. 이런 담론들은 관동대지진 이후에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과 원자력,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을 연결시키는 키워드로 요미우리의 사주였던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郎)를 꼽았다. 재밌는 연결고리라 생각해서 따로 자료를 찾아보고 했지만 별로 믿을만한 근거는 없는 주장이었다. 일단 이 서사는 관동대학살 당시의 유언비어가 쇼리키 마쓰타로 개인에 의해서 전파된 걸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일본 민중의 사상에는 그 이전부터 이미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주입되며 정착되어 있었다. 야마다 쇼지의 지적처럼 "독립을 위해 음모를 꾀하는 '불평선인'"이라는 관념이 무의식적으로 경찰 등의 국가권력을 매개로 일본 민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곧바로 조선인에 대한 공격성이 표출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일본 민중이 바보도 아닌데 일개 경찰관의 말 하나에 움직였다 보기 힘들지 않나 한다.
또한 이 문제는 일본 민중이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해 갖는 어떤 '신앙적 믿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오마가리 구손이라는 사람은 "언제나 관료라면 뭔 말만 나오면 헐뜯던 민중이, 이렇게 무슨 일이라도 나면 손바닥 뒤집듯이 속마음을 싹 바꿔 아무 말이나 내뱉는가 하고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하다."라고 일갈하였다.(야마다 쇼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이진희, 논형, p.99에서 재인용) 이후의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이 발전하게 된 데에는 민중의 국가관료제에 대한 지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가의 '권위'를 숭상하며 조선인을 학살한 관동대학살이 일본의 파시즘화 과정에서 지니는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야마다 쇼지의 지적처럼 일본은 재일조선인 노동계급의 운동에 주목하고 있었으며, 재일조선인들의 '사회주의적 성격'과 반체제 운동과의 친화성 등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인에 대한 학살을 일본 천황제 파시즘과 결부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이 점을 포인트로 잡고 일본 근대사상사를 비판적으로 재전유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서동주의 논문은 이 문제를 검토하다가 요미우리 신문과 원자력 간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어 재밌게 읽었다. 쇼리키 마쓰타로가 조선인 학살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면 관동대지진과 동일본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후쿠시마 난민 간의 관련성을 엮어서 깊게 탐구해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기는 하다만.. 아무튼 서동주 선생의 논문도 한번 읽어보시라고 링크 걸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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