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韓 산업 다 잡은 中 굴기 주역은 기업 아닌 유능한 공산당
조선일보
입력 2025.09.22.
[중국 쓰나미 어떻게 넘을 것인가] [1]
트럼프 관세 폭탄과 보호무역주의, 신냉전 부활로 한국의 자강(自强)이 절실해지고 있다. 자강의 핵심은 글로벌 강자 한국 산업이다. 그러나 석유화학 사태에서 보듯 우리 핵심 산업은 모두 쓰나미 앞에 서 있다. 쓰나미 진앙은 중국이다. 이 위기를 어떻게 넘어 자강으로 나갈 수 있을까.

지난 2023년 중국 장쑤성 소주 타이창항(太倉港) 국제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BYD 전기차들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세계는 코로나 팬데믹 때 중국이 미증유의 위기라고 생각했다. 중국이 국경을 봉쇄하고, 외부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끝난 뒤 중국을 방문한 사람들은 경악했다. 경쟁력 측면에서 차원이 다른 나라가 돼 있었다. 국내 철강업계 전문가 한 사람은 “코로나 2년 뒤 중국은 도로조차 차원이 달라져 있었다”며 “중국 연구원들이 ’우리도 이렇게 혁신할 게 많은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 했다. 중국 공산당은 코로나 3년 동안 또 다른 나라를 만들었다.
우리를 포함한 서구 진영은 오랫동안 ‘중국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 기대했다. 소련처럼 중국 공산당 독재도 자유 시장경제의 효율과 창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 전망은 틀렸다. 중국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국가 개입을 오히려 더 강화했다. 2015년 ‘중국제조 2025’를 통해 전기차·배터리·AI 등 첨단 신흥 산업을 집중 육성했다. 10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한국을 추월하고 미국의 패권을 넘보고 있다.
이 놀라운 변화의 본질을 봐야 한다. 중국은 소련과 무엇이 결정적으로 달랐나. 삼성·현대차의 경쟁 상대는 화웨이·샤오미·BYD가 아니다. 이 기업들 뒤에서 인재를 키우고, 없는 시장을 만들고, 돈을 대고, 기술을 개발시키고, 다른 나라 경쟁자를 강압으로 제거해주는 거대한 시스템, 중국 공산당이 바로 한국 산업의 경쟁자다. 소련과 다른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 현실적, 실용적 태도가 코로나조차 전화위복으로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한국 같은 서방식 정치인들이 아니다. 과학과 공학의 소양을 갖춘 엔지니어들의 정부다. 당 최고 지도부 자체가 ‘엔지니어 위원회’이고, 그 아래의 엔지니어들이 일선에서 다스리는 나라가 중국이다. 2000년대 초반 후진타오 체제에선 수뇌부인 상무위원 9명 중 8명이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중국의 국가 프로젝트가 곧 상무위원들의 전공 실습’이란 말이 나왔다. 칭화대에서 수력발전을 전공한 후진타오에 이은 시진핑도 같은 대학 화공과 출신이며, 리창 총리는 저장농대에서 농기계학을 공부했다. 시진핑 체제 이후 경제·재무 쪽도 늘었지만 기술 관료라는 본질은 같다. 전공의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국가 현장에서 중국의 강점과 약점을 철저히 체득한 사람들이다. 그 바탕에서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장기 국가 전략을 수립한다. 현실적,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기존 자동차 산업에서 미국·일본·독일·한국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도 중국 공산당 지도부다. 그들은 전기차로 눈을 돌리고 한국 배터리 업체부터 시장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이 전략 앞에 한때 무적 같았던 한국 배터리도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3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개막된 제14기 전국인민대표대회(NPC) 제2차 회의에서 시진핑, 리창, 왕후닝, 차이치, 딩쉐샹, 리시, 한정 등이 참석했다./신화 연합뉴스
정권 교체가 없는 중국 공산당의 국가 전략도 바뀌지 않는다. 새로 등장하는 차세대 리더들은 더 유능해지고 있다. 선진국 엘리트 코스를 밟은 환경공학자, WHO 집행위원 출신 보건 전문가 등이 지금 베이징, 상하이 등의 중국 핵심 지역을 이끌고 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짜는 ‘5년 계획’을 보면 큰 공장의 생산 계획과 다를 것이 없다. 시장도 설계의 대상이다.
중국 공산당은 ‘정부 주도 시장 경제’라는 세계사에 없던 시스템을 창조했다. 첨단 산업에 천문학적인 ‘정부 인도 기금’을 쏟아붓는다. 2024년 기준 2126개의 펀드가 조성됐고, 약정액은 GDP의 10%에 달하는 1조8000억달러다. 정부가 리스크를 떠안고 돈을 대주니, 기업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미래 기술에 과감히 뛰어든다.
이 방식으로 중국 공산당은 소련식 계획 경제의 최대 문제인 과잉 투자를 줄였고, 약점을 무기로 만들었다. 정부가 돈을 풀어 수백 개의 기업을 난립시킨 뒤, 보조금을 끊고 규제를 강화해 ‘죽음의 계곡’으로 밀어 넣는다. 거기서 살아남은 소수의 승자는 거인이 된다. 정부는 그 거인에게 다시 힘을 실어준다. 철강의 ‘바오우그룹’, 태양광의 진코솔라 등 압도적 지배자들이 그렇게 태어났다. 지금 중국 전기차와 배터리 시장에서 벌어지는 지옥 같은 가격 전쟁도 그 과정일 뿐이다. 그 끝에는 세계 시장을 지배할 또 다른 거인이 서 있을 것이다. 이것이 ‘팀 차이나’의 방식이다. 공산당이 두뇌, 기업은 손발이다. 정보를 공유하고, 역할을 분담한다. 하나의 유기체다.
이런 중국 공산당 앞에서 우리 8대 주력 산업이 모두 위태롭다. 최대 수출 시장이던 중국이 넘사벽 경쟁자가 돼버린 석유화학, 이미 압도당한 전기차, 기술은 버티지만 물량에선 뒤처진 조선, LCD에 이어 OLED마저 추격당한 디스플레이, 범용재는 경쟁이 안 되는 철강, 갈수록 압박이 거세지는 스마트폰 등 피해 갈 곳이 없다.
우리 산업계엔 ‘팀 차이나’를 막아낼 방법이 없다는 패배감이 팽배하다. 반도체 전문가는 “결국 중국 공산당과 싸우는 셈이며, 중국 전체가 하나의 반도체 회사”라고 했다. 철강 전문가는 “쓰나미가 오는 것 같다. 우리도 정부와 함께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제 선택과 결단의 시간이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이 국가 총력전으로 나오고, 미국은 동맹을 버리고 있다. 정치는 갈등하더라도 산업만큼은 ‘팀 코리아’가 돼야 한다. 여야 없는 ‘팀 코리아’가 신 국가 성장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정치 싸움에서 자유로운 ‘공업 차르’를 선임해 장기적이고 일관된 기술 전략을 밀고 가야 한다. 산업 관련 부처만이라도 규제 관료 아닌 기술 전문가로 재편해야 한다. 지금의 정치엔 답이 없다. 이제 한국 경제의 생존은 개별 기업의 손을 떠났고, 국가의 전략과 의지에 달렸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사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