それでも、日本人は「戦争」を選んだ
加藤陽子
그래도 일본인은 '전쟁'을 선택했다
카토 요코
935 엔 (부가세 포함)
4 pt
4.4
32건
한때 보통의 좋은 일본인이 '이제 전쟁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부끄러움’이라고 결단했다.
세계를 절망의 연극으로 쫓아가면서, 전쟁은 굉장히라고 할 만한 상모를 칭찬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논리를 직시할 수 없다면, 형태를 바꾸어 전쟁은 계속 일어난다.
그래서 지금,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전쟁사 강좌.
닛신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까지. 강의 속에서 전쟁을 살아간다.
학생에게는, 자신이 작전 계획의 입안자였다면,
자신이 만주 이민으로서 송출되는 입장이었다면
등과 수업 속에서 생각해 주었습니다.
강의 중에만 전쟁을 살아주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전쟁의 근원적인 특징,
때때로 전쟁이 지역질서나 국가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변화를
간결하게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생깁니다. 그 성과가 이 책입니다.
……본서 「처음에」보다
◆일본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말을 따르면서, 자세하게 선명하게 견해해 갑니다.
종횡무진하게 '전쟁'을 생각해 본다. 역사의 재미·박력에 압도되는 5일간의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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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전쟁"을 선택한 사용자 리뷰
4.4
Rated 4.4 stars out of 5
\ 리뷰 투고로 포인트 선물 /※구입이 끝난 작품이 대상이 됩니다리뷰 쓰기
감정 태그 BEST3
#깊은#모으기#공감하다
Posted by 부쿠로그
닛신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이 어떤 경위로 '전쟁'을 향해 갔는지 많은 데이터를 보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각국의 생각이나 판단의 이유등을 알기 쉽게 설명되고 있어, 만약 당시의 이 입장에 자신이 서 있으면… , 라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80 ~ 120 년 전의 실제 사건이라는 것에다시 충격이 달립니다. 굉장히 공부가 되는 한 권이었습니다.
세계사도 일본사도 고등학교 이후이므로 다시 복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포로에 대한 생각에 조금 했습니다. "바다와 독약"을 기억했습니다.
02025년 07월 11일
Posted by 부쿠로그
【감상】
본서 「그래도, 일본인은 「전쟁」을 선택했다」는, 필자의 카토 요코씨가 사립영광학원 중고생 17명에 간 5일간의 일본사 강의를 서적으로 한 한권이다. 강의라고 해도 단순한 시계열 공부가 아니라 닛신 전쟁과 태평양 전쟁 사이의 정부·군부의 이데올로기, 국민의 감정, 열강 각국의 전략, 만주·조선 지역의 질서 등의 요소를 포괄적으로 분석한 「연구」이다. 당시 일본의 국가체제와 세계 안에서의 입장 위치를 총체적으로 파악해 왜 일본 최고의 두뇌들이 '전쟁 부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는지――이런 고찰을 반복함으로써 마치 전쟁으로의 길을 추체험해 나갈 것 같은 내용으로 완성되고 있다.
타이틀이기도 하고 있는 '일본인이 전쟁을 택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이지만, 전쟁 수행에 대한 길은 다방면에 걸쳐 이런 명확한 요인을 유형화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 가운데 내가 치열하면서 느낀 이유 중 하나는 당시 국민이 곤궁하고 있어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군부가 내거는 정책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전중 국민의 대부분은 농가였지만, 1929년 세계대공황을 받아 농업수입이 절반까지 하락했다. 그때 '농산어촌의 구제'를 매뉴페스트로 내세우고 있던 것은 군부였다. 의무교육비의 국고부담과 농작물 가격 유지 등 농가의 생계 안정을 주안으로 한 항목이 내걸렸다. 실제로는 그 후 낮·태평양 전쟁으로 돌입했기 때문에 이 정책은 반고로 되는 것이지만, 압박하는 가계를 앞에 두고 「군부에 걸리지 말라」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앞두면 후세 사람들이 말하는 '왜 전쟁이란 시작했다'는 비난은 어디까지나 현대의 가치관 때문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전쟁 결정에는 군부뿐만 아니라 국민의 의사도 개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뿐만 아니라 엘리트에서도 전쟁을 바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만주사변 2개월 전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에서 열린 앙케이트에서는 '만몽을 위한 무력행사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가 88%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최고의 지능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전쟁 부득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만주가 몇 안 되는 일본의 자원 생산지였던 것, 닛신·일러 전쟁을 승리로 마쳤지만, 당시의 열강 각국에 노려져 충분한 보상을 얻지 못하고 있는 사정도 있다. 물론 일본 측에도 만주를 발판으로 식민지를 확대하고 싶다는 독선적인 생각(이것도 현대의 가치관이지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그러한 요인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지정학적 인자나 국제관계의 역학에 의해 흔들리는 불안정한 것이고, 현대의 상식이나 감성으로는 측정할 수 없다.
일본인의 감각에서는 태평양전쟁은 어디까지나 군부에 '말려들었다' 싸움이며, '우리(국민)는 희생자였다'는 생각도 남아 있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풀어내는 것으로, 전중의 공기감을 알 수 있고, 전쟁은 '말려들었다'가 아니라 '선택했다'는 요소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30년대의 교훈이란 무엇인가라고 듣고 곧바로 대답할 수 있습니까.하나는, 1937년의 일중 전쟁의 무렵까지, 당시의 국민은, 어디까지나 정당 정치를 통한 국내의 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 두 가지는 민의가 정당하게 반영됨으로써 정권교체가 가능해지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의 창출을 당시의 국민도 강하게 대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이전 정치시스템 하에서 국민의 생활을 풍요롭게 할 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에 대한 요구가 기성정당, 귀족원, 추밀원 등 많은 벽에 막혀 실현되지 못한 것은 모두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 결과 어떠한 사태가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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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를 읽은 감상이지만, 「역사는 이렇게 재미있었는가」라고 감탄했다. 중고생 상대의 강의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덕분이지만, 설명이 명쾌하고 또한 독자에게도 생각하게 하는 문제 제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매우 즐겁다. 또 당시 살아있는 사람들의 감각을 잡으면서 논의를 거듭한다는 행위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기뻤다.
볼륨은 상당히 많지만 내용은 조밀하고 상당히 진한 독서 체험을 할 수 있다. 매우 추천하는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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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1 전쟁 수행을 위한 이데올로기
1930년대, 당시의 일본 국민은 정부에 대해서 무엇을 소망하고 있었는가. 첫째는, 1937년의 일중 전쟁의 무렵까지, 당시의 국민은, 어디까지나 정당 정치를 통한 국내의 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 두 번째는 민의가 정당하게 반영됨으로써 정권교체가 가능해지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의 창출을 당시 국민들도 강하게 대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전 정치시스템 하에서 국민의 생활을 풍요롭게 할 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에 대한 요구가 기성정당, 귀족원, 추밀원 등 많은 벽에 막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 결과 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 요구는 기존의 정치시스템 하에서는 무리라고 하여 의사적인 개혁추진자로서의 군부에 대한 인기가 높아져 갔다.
일본국헌법을 생각할 경우 태평양전쟁에 있어서 일본측의 희생자 수가 많음, 일본사회가 짊어진 상처의 깊이를 고려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일본국 헌법이라고 하면 GHQ가 만든 것이다. 여기서 봐야 할 구조는 거대한 수의 사람이 죽은 후에는 국가에는 새로운 사회계약, 즉 넓은 의미에서의 헌법――국가를 이루게 하는 기본적인 질서나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진리이다.
죽은 자가 그만큼 많다, 즉 '총력전'을 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계약 하에서 국가목표가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성년에 이르지 않는 청소년을 징병이 아니라 지원시키기 위해 교육 분야에 국가의 리크루트(병원 조달) 구조가 휘말리는 싸움을 국가가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고를 겪는 국민들에게 숭고한 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민주주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라는 것처럼 장래에 대한 희망이나 보상을 어필하지 않는 데는 국민을 동원할 수 없다.
한편, 전쟁이 상대국에 미치는 작용은 무엇인가. 루소는 이에 대해 “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 주권과 사회계약에 대한 공격, 즉 적대하는 국가의 헌법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태를 취한다”는 답을 내고 있다.
미국은 전쟁에 승리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는 일본의 헌법――천황제를 바꾸었다.
2 닛신 전쟁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러시아의 남하를 영국 제국 전체로서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영국은, 일본에 대해서는, 어쨌든 열국간의 대립이나 분쟁에 말려들지 않을 만큼의 능력을 갖도록, 신속하게 법전 편찬을 실시해 준다는 스탠스로 임했다. 사실 대일본제국헌법은 1889(메이지 22)년에 완성된다.
한편 사회제도에 대해 일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나라가 있었다. 그것이 중국이다. 중국은 화이질서(=주변국과의 사이에서 조공체제를 맺음으로써 중국을 대가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관계를 이루는 제도)라는 열강에 있어서는 매우 편리한 제도를 가진 나라였다.
1880년대 러시아, 프랑스, 일본이라는 나라들이 청국의 화이질서=조공체제에 도전하는 분쟁을 일으켰을 때 청국이 제대로 하나 하나 대응을 하게 되었다. 또, 그렇게 할 만큼의 힘을 붙여 왔다. 그 때문에 1980년대 중반 시점에서는 청국은 일본형의 발전(법전에 따라 상법이나 민법 등의 권리가 보장되어 열강간의 권리를 동등하게 관리할 수 있는 독립형 국가)의 방향성, 중국형의 발전 방향성, 어느 가능성도 충분했다.
당시의 일본인은 동아시아 정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탈아론’을 쓴 후쿠자와 사키요시는 ‘일본 국민의 정신은 유럽화하고 있지만 중국과 조선은 유럽에서 멀어지고 있다. 또 야마현 아리모토는 중국에서 조선을 떼어 독립시켜 일본이 조선의 중립을 보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닛신 전쟁이 일어난 것은 조선이 '자주방'인지 그렇지 않은지 등을 청국이 정하는 입장에 있는 상태 그 자체를 무력으로 무너뜨리자는 결단을 일본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영국이 탄다. 러시아가 남하해 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대해 “관세 자주권과 치외법권을 개정하기 때문에 일본이 청국(이라고 뒤에 붙는 러시아)과 하고 있어줘”라는 입장에서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닛신 전쟁 이후 일본에는 보통선거가 도입됐다. 이는 전쟁을 이긴데도 삼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국민이 “전쟁에는 강해도 외교가 약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약한 탓에 국민이 피를 흘려 얻은 것을 마음대로 돌려버렸다. 정부가 그런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국민에게 선거
3일러 전쟁
닛신 전쟁의 승리로 조선 국내에 일본의 압도적인 우위가 확립됐는지 보인 것은 순식간에, 그 뒤를 이은 사태, 한국의 근대국가에 대한 모색과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을 놓고 균형을 이룬 상태였다.
러시아는 만주를 횡단하는 중동 철도의 지선 부설권을 중국에서 획득하고 여순·대련의 25년간 조차권도 빼앗아 버린다. 1902년 만주에서 철병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것도 하지 않는다. 이를 무겁게 본 영국이 일본에 동맹을 제안하고, 1902년에 일영동맹이 조인된다. 러시아에 대해 자제를 요구하는 동맹이었다.
러일전쟁 전 협상에서 일본 측은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요구했다. 그 대신 확실히 러시아의 만주 점령은 좋지 않지만 만주철도의 연선은 러시아가 세력권으로서 좋고, 중동철도와 그 남지선 등은 러시아가 '특수한 이익'을 가지고 있다고 일본측은 인정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반대로 러시아 측은 만주에도 한국에도 일본의 우월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해협을 러시아가 자유항행할 권리를 인정한다면 일본의 '우월하는 권리'를 인정해도 좋다고 밝혔다. 만주의 권익을 둘러싼 엇갈림이 러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러일전쟁도 지금까지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대리전쟁이었다. 러시아의 원조는 독일·프랑스로부터, 일본의 원조는 영미로부터 받은 것이다. 영미는 콩이라는 세계적인 수출품을 낳는 만주를 러시아가 점령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지역의 문호 개방'이라는 선전을 형성해 전쟁을 뒷받침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은 일본에 식민지화되는 것이 규정의 노선이 되어 다른 제국주의 국가가 평등하게 만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전쟁을 위한 증세로 선거권자 조건이 15엔→10엔으로 개정되어 선거권자 수가 전전의 2배가 된다. 지금까지 정치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지주 등의 풍부한 농민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상공업자나 사업가 오르는 정치가가 단번에 늘어나갔다. 정치인의 질이 갈라리로 바뀐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 전사자는 84,000명, 전상자는 143,000명. 이만큼의 전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에, 러일전쟁 앞에서 만주사변에 걸쳐 "일본은 20억의 자재와 20만의 생령에 의해 획득된 만주의 권익을 지켜라"는 의식이 싹트리게 되었다.
4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안보상의 이익을 제1 목적으로 식민지를 획득했다. 일본은 1914년에 남양제도(독일령)의 섬들을 점령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위임통치하고 경영하라며 남양제도를 맡겼다. 동시에 중국의 청도와 교제철도를 취해 중국을 육지와 바다에서 공격받는 루트를 얻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제국주의 시대에는 당연했던 식민지라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태어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연합국의 전쟁 목적을 다시 이상화하지 않으면 세계 사람들을 환멸시켜 버리거나 볼리셰비키의 이상에 져 버린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그 결과가, 1918년 1월의 연두의 미국 의회에서 발표된, 전후 세계는 이렇게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상, 이른바, 윌슨의 「14조」였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민족자결주의이다.
다만, 민족자결의 염두에 있던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이 침해된 동유럽 국가들뿐이었고, 영국불 등이 제1차 세계대전 전에 획득한 식민지 등에 대해서는 원칙을 적용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일본 국내에서는 많은 '국가 개조론'이 등장해, '어쨌든 일본은 변하지 않으면 나라가 죽는다'는 위기감을 호소하는 집단이 많이 태어났다.
5 만주사변과 일중전쟁
만주사변 2개월 전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에서 열린 앙케이트에서는 '만몽을 위한 무력행사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가 88%를 차지했다. 일본 최고의 지능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전쟁 부득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주사변은 당시 일본인에게는 전쟁이 아니라 '혁명'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마츠오카 요우는 “만몽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생명선”이라고 말했다. 만몽에 대한 투자 중 85%가 국락이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주안은 와야 할 대서전쟁에 대비하는 기지로 만몽을 중국 국민정부의 지배하에서 분리시키는 것, 그리고 대소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예상되는 미국의 간섭에 대항하기 위해 대미전쟁에도 지속될 수 있는 자원기지로 만몽을 획득한다는 점에 있었다. 국제법이나 조약에 지켜져야 할 일본의 권익을 중국이 없으려고 하고 있는지 여부는 사실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
그런 국민에게 불을 붙인 것이, 1929년 10월의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에 끝을 발한 세계 공황이다. 농가의 연평균 소득은, 29년에 1326엔 있었던 것이, 31년에는 무려 650엔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 버리고 있었다.
관동군은 조선(일본의 주권하)에서 중국의 주권하인 동삼성으로 조선군을 독단월경시켰다. 이것은 사령부 조례에 들어 있지 않은 행동이며, 본래는 각의의 양해를 받아야 하지만, 강인하게 기성 사실을 만들어 버렸다.
이에 따라 장개석은 국제연맹에 사건 해결을 호소하고 리튼조사단이 파견됐다.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에서는, 일본에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이 쓰여 있었지만, 일본의 행동이 연맹 규약 위반이거나, 혹은 부전 조약 위반이다, 등이라고는 쓰지 않았다. 다만 일본군의 군사행동은 합법적인 자위 조치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또 '만주국'이라는 국가는 민족자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 관동군의 힘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국가라고도 쓰여졌다. 그리고 일본은 만주지역에서 '중국적 특성'을 용인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은 만주가 중국의 주권하에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요시노 작조는, 세계 속에서의 일본의 위치 혹은 일본 국민의 사고방식이, 한층 더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요시노는 '중앙공론'의 1932년 1월호에 '민족과 계급과 전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고 있다. 그래서 요시노는 지금 일본의 상황이 이상하다고 쓰고 있다. 자신은 한때 러일전쟁을 보았다. 정당도 대신문도 전쟁 개시 전에는 반드시 전쟁을 진행하려는 정부에 대한 비난을 많이 썼다. 그러나, 왜 이것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지, 그것이 신기하지 않다고.
요시노는, 토지도 좁고,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일본이, 「토지 및 자원의 국제적 균분」을 주장하는 것은 이굴로서 옳다고 우선 말한다. 그러나 토지와 자원의 과부족 조정은 '강력한 국제조직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왜 정당이 전쟁 반대 목소리를 들 수 없었는가? 그 중 하나는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간섭에 가장 일찍 반대했던 공산당원과 전쟁 반대 세력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모두 감옥에 넣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연맹 탈퇴 전에도 국내에서는 '연맹 탈퇴를 외치면 안 된다', '타협안을 찾아라'는 목소리가 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깨뜨린 것이 육군이었다. 육군은 만주국의 남부, 중국의 열하성에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군대를 진행시켰다. 이는 육군의 독단이 아니라 천황 자신이 승인을 준 작전이었는데, 이것이 국제연맹 규약 제16조 “연맹이 해결을 위해 노력할 때 새로운 전쟁에 호소한 국가는 모든 연맹국의 적으로 간주된다”에 해당해 버렸다. 국제연맹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에서 보면 중국 토지 침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이토 총리는 당황하고 천황에게 갇혀 승인을 취소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천황이 한 번 내놓은 허가를 철회했다면 천황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잃게 된다. 또 육군 등의 세력은 천황에 대해 공연히 반항하기 시작할 우려가 있다. 그러한 가능성에서 철회는 각하되어 부득이 연맹으로부터 권고를 받았을 때는 스스로 탈퇴한다는 방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대중은 육군의 슬로건에 매료됐다. 1930년은 국민의 절반이 농민이었지만, 그 농민이 원했던 정책은 보통선거를 통해서도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게다가 29년부터 시작된 세계공황의 영향을 가장 가혹하게 받은 것은 농민이었다. 그런 가운데 “농산어촌의 피폐구제는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고 단언해주는 집단이 군부였던 것이다. 의무교육비 국고부담, 비료판매 국영, 농작물 가격 유지, 경작권 등의 차지권 보호를 목표로 하는 등의 항목이 내걸려 거기에 기대하는 국민의 시선이 있었다.
6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국력차는 국민도 자각하고 있었다. 다만, 전력차를 통감하면서도, 태평양 전쟁은 강한 영미를 상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약한 것 왕따의 일중 전쟁과 달리 밝은 전쟁이다, 라고 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일본은 유럽의 전쟁에 계속 불개입으로 있으면 좋았지만, 독일군의 쾌진격을 앞두고 일본 측에 욕심이 나온다. 동남아시아에는 유럽의 식민지가 어려워져 있으며, 식민지의 모국이 독일에 항복한 이상 일본의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은 독일에 양해받을 수 있다. 또, 독일류의, 일국 일당의 나치당에 의한 전체주의적인 국가 지배에 대한 동경이 일본에도 태어난다. 중의원에서는 여전히 정우회나 민정당 등 기성정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귀족원에서는 태어난 가문이 좋을 뿐인 무능한 귀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로는 안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국내 기운을 배경으로 일중전쟁 발발시 총리였던 근위문면이 신체제운동에 착수해 40년 7월 22일 다시 총리 자리에 앉는다. 이 2개월 후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군사 동맹이 체결되었다.
일본군이 중국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고 나서 미국은 일본에 대해 항공기와 그 부품의 대일 수출을 금지하고, 미·미통 상항해조약의 폐기를 통고한다. 영국도 중국에 차관을 하고 중국 원조를 늘려 간다. 특히 장개석은 미국에 대해 “공산당 세력이 중국에 퍼질 것”이라고 위협을 걸어 1억 달러의 차관 및 미국제 비행기 100대와 조종사를 받고 있다.
꾸준히 태평양 전쟁의 길이 포장되어 가는 뒤에서는, 미국과의 협상에 의한 회피책도 검토되고 있었지만, 41년 7월 2일의 어전 회의에서 남부 불인 진주가 결정되어, 협상은 막힘을 보인다.
왜 남부 불인 진주에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았는가. 원래 6월 22일에 독소전이 개전하고 있었지만, 올해 4월 13일 일본은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었다. 히토쿠 이소의 이른바 시코쿠 동맹에 가까운 것이 생겨, 이것으로 영미 등의 자본주의국과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독소전의 발발로 무너져 버렸고, 일본도 소련 뒤에서 독일과 함께 되어 공격한다고 방침을 전환했다.
외무성과 참모본부가 북진론을 제창, 그에 대해 미·일 협상을 모색하는 육군성과 해군이 북방전쟁론을 견제하도록 움직여 결과 '남부불인에 진주'라는 방안에 속한다. 이때 육군성과 해군의 생각으로는 남부 불인 진주를 했다고 해서 미국이 강한 보복 조치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칭찬했지만 미국은 바로 석유의 전면 금수에 착수했다.
41년과 45년, 즉 전쟁을 시작한 해와 끝난 해의 일미 비행기의 생산기수의 변화를 보자. 일본의 41년 당시의 생산기수를 100으로 하면, 최초의 해, 미국은 기껏해야 107정도밖에 안 된다. 차이는 작다. 그러나 45년 7월에는 일본을 100으로 했을 때 미국의 힘은 1509가 되었다. 이 '잠재력'이 미국을 최강한 능력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속전 즉결의 승리'에 내기했다.
국토와 식민지와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한 소련, 미국, 영국과 달리 일본도 독일도 지구전을 할 수 없다. 미즈노 히로토쿠는 일본을 가리키며 “국가의 중요물자의 80%를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생명은 통상관계 유지에 있으며 일본은 전쟁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7 패전의 결과
태평양 전쟁이, 왜 일본에서 수신의 형태로 말해지는 것이 많은 것인가. 「피해자」라는 말을 국민이 선택해 온 것은 어째서인가.
그 중 하나는 전쟁에 동원된 사람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44년부터 패전까지의 1년 반의 사이에 전체의 9할의 전사자를 내고, 그 전사자는 먼 전장에서 사망하고 있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렇게 죽어간 병사의 가족에게 그가 어디서 언제 죽었는지 가르칠 수 없었던 나라였다. 일본군은 전사자의 정보를 국민에게 덮고 있어 국민 전체가 패전을 깨닫지 않게 전사자의 정보 전체를 합계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인은 라디오에서 정보를 얻고 있었지만, 이것도 정확한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피해'로 국민에게 말할 수 있는 배경의 두 번째는 만주에 얽히는 국민적 기억을 들 필요가 있다.
45년 8월 8일, 그때까지 일본과 소련은 중립조약을 체결하고 있었지만, 독일이 항복하고 나서 3개월 후에 대일 참전한다고 하는 약속대로, 일본에 참전, 침공을 개시한다.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전은 시간의 문제였다. 거기에 소련으로부터의 침공이 있고, 만주에 개척단 이민으로서 다수 입식하고 있던 사람들이, 소련군의 침공의 화살에 세워진 적도 있어, 소련에 대한 증오의 감정은 전후의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
만주라는 지역에는 패전 당시 150만 명의 민간인이 있었다. 게다가 50만명의 관동군 병사가 있었다. 침공해 온 소련군에 의해, 소련의 시베리아 지역이나 몽골 등의 지역에 억류된 일본인은 약 63만명(1990년 발표의 러시아측 사료에 의한다). 약 30%가 끌려간 것이다. 물론 소련 측에도 사정은 있었다. 독일과의 사이에 이어져 온 치열한 전쟁으로 소련 국내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철도건설이나 임업 등에 일본인 포로를 근로시켰다. 억류된 사람들 약 63만명 중 가혹한 환경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6만6400명에 이른다. 200만명 가운데 소련 침공 이후 사망한 사람의 총수는 24만5400명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일본군의 포로의 취급은 심했다. 한 미국의 단체가 포로가 된 미국병의 명부로부터 포로가 되어 사망한 미국병의 비율을 지역별로 산출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된 미국병의 사망률은 1.2%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국병의 사망률은 37.3%에 달했다.
일본군의 포로 취급의 심각함은 돌출하고 있었다. 물론 포로가 되는 문화가 없었던 일본 병사 자신의 기분이 투하해 오는 적국군인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분을 일으킨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자국의 군인조차 소중히 하지 않는 일본군의 성격이 아무래도 그대로 포로에 대한 학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본군의 체질은 국민의 생활에도 통저하고 있었다. 전시중의 일본은 국민의 식량을 가장 경시한 나라의 하나이다. 패전 가까이 무렵의 국민 섭취 칼로리는 1933년 시점의 60%로 떨어졌다. 40년 단계에서 농민이 41%나 있었던 일본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일본의 농업은 노동집약형이다. 그런 나라인데 농민들에게는 징집유예가 거의 없었다. 공장의 숙련노동자들에게는 유예가 있었지만 비료 사용법이나 해충 예방 등 농업생산을 뒷받침하는 노하우를 가진 농학교 출신 사람들도 국가는 전부 병대로 만들었다. 그러자 기술도 지식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농업이 담당되기 때문에 44, 45년으로 농업생산은 급락해 버렸다.
02024년 06월 25일
Posted by 부쿠로그
읽고 엄청 즐거웠던 책.
일본인이라면 인생에서 한 번은 읽어 주었으면 한다! 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러 사람에게 추천.
초중학생의 무렵은 학교의 과목 중에서 역사를 제일 좋아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진로의 관계 상리계를 선택한 이래 역사에는 노터치.
하지만 역시,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말도 좀하지만 그래도 전혀 즐겨 읽을 수 있었다.
엄청 영양이 있는 책.
여러 번 읽고 싶어지는 책.
02023년 08월 05일
Posted by 부쿠로그
닛신, 러일부터 제2차 대전 종결까지. 고교생에 대한 강의로서 평이한 말로 해설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과거를 되돌아 보는” 역사가 아니라, 그 시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하는 역사가의 시점이 명확하고, 읽을 수 있다. 19세기 말~20세기의 전쟁과 정치, 경제를 둘러싼 세계의 중층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입문서로서, 고교생의 부독본(교과서에서도)으로 해 주었으면 한다.
02023년 01월 28일
Posted by 부쿠로그
학술회의 멤버로부터 제외되어 버렸습니다만, 결코 왼쪽에 들르는 것도 아닙니다. 중립이고 객관성이 있는 양서라고 생각합니다.
02021년 12월 29일
Posted by 부쿠로그
몇 년에 한 번 읽고 싶어지는 한 권. 중고생을 위한 강의의 서적화이지만, 어른이라도 읽을 수 있게 듬뿍. 오히려 어른이야말로 읽고 메이지~쇼와사를 다시 공부해야 할까.
02021년 10월 02일
Posted by 부쿠로그
동대에서 일본 근현대사를 연구, 가르치는 저자가 어느 사립 중고 일관교의 20명 정도에 강의한 며칠간을 바탕으로 한 책. 알기 쉬울 뿐만 아니라 흥미를 가지고 생각하기 위한 팁이 가득. 이런 역사의 견해, 고찰 방법이 있다고 처음 알았다. 이런 책을 중고생 정도로 읽고 있으면 더 흥미를 가지고 역사를 공부할 수 있었을지도.
02021년 02월 13일
Posted by 부쿠로그
「중학생, 고교생」에 제대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물론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사람에게도.
다양한 자료로부터 전쟁을, 전쟁에 이른 경위를 알기 쉽게 전하고 있다. 카토 교수의 말투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강의를 듣고 있는 것 같고 어려운 곳도 이해하기 쉽다.
02020년 12월 06일
Posted by 부쿠로그
동대 교수의 카토 요코가 사카에 광학원에서 말하는 근현대사의 특별 강의. 틀림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이런 책을 읽은 적은 없었다고 하는 것. 역사가의 깊은 것의 견해에 눈을 바라본다. 한편, 우수한 중고생의 부드러운 머리가 아니고, 조금, 싫은 뾰족한 중고년의 머리에는 헹구고 들어오지 않는 부분도 있다(그만큼 내용이 충실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다시 읽고 차분히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어른의 교과서.
02020년 05월 17일
Posted by 부쿠로그
태평양 전쟁을 '비참한 전쟁이었다.
학생의 사고력이 훌륭합니다.
이것이 역사학이고 사회학
02020년 03월 26일
모든 리뷰 보기 (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전쟁"을 선택했습니다.
카테고리:비즈니스・실용
장르:학술·어학 / 교육
출판사:아사히 출판사
전자판 발매일:2015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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