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집단적 확증편향의 퇴행적 편가름 속에서, 담론(談論)과 도덕(道德)이 함께 무너지는 굉음(轟音)이 여기 저기서 요란하다.
피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면 비전과 도덕이 없는 정치 집단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도 들지만, 역사 속에서 수많이 반복되어온 낡은 것들의 상쇄(相殺)과정이라는 면을 생각하면 ‘갈 데까지 가보자’하는 마음도 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을 기대하는 것이지만, 상쇄(相殺) 과정으로만 끝나면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
낡은 것의 해체 과정과 새로운 것의 창조 과정이 맞물려 진행되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압축적 진행으로 사회의 성격이 달라졌고 나라의 위상도 달라졌다.
모순의 성격도 달라졌고, 지향해야할 목표도 달라졌다.
진보나 보수, 좌나 우의 담론(談論)도 달라져야 한다. 낡은 담론과 정서가 신구(新舊) 기득권과 복잡하고 기이하게 어울려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퇴행을 나타내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도덕(道德)은 과학적 이성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필터를 거친 것으로 사실 자체와는 별개라는 자각이다.
즉 ‘내 견해가 틀릴 수 있다’라는 여백이야 말로 새로운 담론과 도덕의 출발점이다.
집단적 확증편향과 팬덤 현상 그리고 자기 입맛에 맞는 정보를 무한 제공하는 알고리즘 등이 이런 분열과 대립, 분노와 미움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른바 리더 격인 지식인이나 종교인이 그 앞장을 서는 현실이 기괴하지 않은가?
나는 우리 시대의 과제를 사회통합과 연합정치라고 말해왔는데, 사회통합은 전체주의와 가깝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사회적 합의(계약)’나 ‘사회적 타협’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은 국민의 수준이다.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인이 되는 제도이며 문화다.
그 민(民)이 윗물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과거 수직적 신분이나 계급사회를 상정한 군주정 시대의 관념이 제대로 역전되어야 한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질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중앙정치의 난맥상에 영혼이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이웃과 함께 하는 일상의 정치, 지역의 정치가 발전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나 ‘연합 정치’가 우리의 일상이나 이웃과 멀리 떨어진 국가 단위의 ‘지도적 정치집단’의 과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민(民)이 주인이 되는 길이다.
자기 생각과 같은 사람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서울의 집회에 참가해서 확증편향을 더욱 심화시키는 대신에, 내 주변과 내 일상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대립하고 싸우면서 미움과 불신을 키우지 않고, 서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서 이 시점에서 무엇이 옳을까하는 것에 대해 잠정적 합의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어떤가?
‘잠정적’이란 뭔가 미진하고 임시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진정한 개혁이나 변화는 언제나 ‘잠정적’이어야 한다.
결코 고정되지 않고. 항상 열려 있는 합의라는 뜻이다.
그것이 스스로 주인 되는 길이 아닌가?
그것이 윗물을 맑히는 길이 아닌가?
새로운 창조와 각성의 움직임들이 도처에서 움트고 있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들이 도도한 물결을 이룰 수 있다는 신심이 있을 때, ‘갈 데까지 가보자’는 여유(?)도 부릴 수 있는 것 같다.
그래, 갈 데까지 한번 가보자.
2 comments
황민영
갈때까지 가봐야하지만!
그것 또한 말로하기에는
부끄러운 구석도 있어서
애간장을 졸임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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