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221026 ‘10.26’
아침에 ‘중구삭금’을 떠올린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10월 26일은 매우 극적인 날로 기억한다.
1909년 이 날은 중국 흑룡강성 하르빈 역두에서 일본의 거물 정치인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의 의병중장 안중근 의사에 의해 포살당했다. 이에 앞서 이토오는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으로 강탈하는 만행을 저지른 ‘을사늑약’의 원흉이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당한 대한제국에서 그는 통감으로 재직하며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에 선봉역할을 감행했던 인물이다.
1979년 10월 26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휘하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날이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테타를 주동하여 그 전 해 일어났던 ‘4.19민주혁명’을 뒤엎어버린 장본인이다. 박정희는 1963년 민정이양과 동시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7년 재선되었다. 1969년 10월 17일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3선 출마를 가능하도록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 개헌안에 따라 1971년 4.27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634만표)는 김대중(539만표)을 누르고 연임했다.
세 번의 선거를 통해 박정희에게는 민주적 선거가 거추장스러웠다.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자 박정희는 19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10월유신’을 단행했다. 이어서 11월에는 국민의 직접 선거를 아예 없애버리는 개헌국민투표를 강행했다. 그 다음달(12월)에는 유신헌법에 따라 ‘통반장급’에 해당하는 6천여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을 장충체육관에 모아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체육관 선거에서 거의 99% 투표율에, 99% 찬성으로 박정희가 제 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체육관 선거로 무소불위의 유신대통령을 거머쥔 것이다.
유신시대는 기억하는 것조차 무섭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한을 행사했다. 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임명하다시피했고, 나머지 2/3는 한 선거구에 두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을 통해 아무리 선거의식이 높은 곳에서도 야당 후보가 두 사람이 선출되는 경우는 없도록 했다. 유신시대에는 ‘대통령긴급조치’라는 게 있어서 거의 헌법을 능가하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9호까지 발동된 ‘대통령긴급조치’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희생되었다.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도 그 하나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유신의 횡포가 극에 다달았을 때 ‘10.26’이 일어나 박정희는 사살되었고 유신은 종말을 고했다.
70년 간극을 두고 일어난 ‘10.26’의 두 사건은 우리에게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많은 교훈을 준다. 어떤 재치있는 네티즌은 이 두 사건이 일어난 날을 두고 ‘탕탕절’로 하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적이 있다. 두 사건을 겹쳐보면 이런 저런 조합들이 얽히고 설키며, 여러가지 상념들이 모이고 흩어진다. 일본은 이토오 히로부미의 그 망상을 포기했다는 확신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얼마 전에 피살당한 아베에게서 보였듯이, 한반도에 대한 그들의 망상은 다음 세대를 향해서도 한일양국의 친선을 가로막고 있다. 왜 이 때 이런 것을 상기해야 하는가. 작금의 집권층의 대일인식을 되돌아보면서 이 정도의 걱정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어떤 형태의 ‘10.26’이라도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10.26’을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10.26’을 역사의식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10.26’을 다시 떠올리면서 그런 상황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는 단어도 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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