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와 민주당을 두고 양반, 사대부 운운하는 이들은 역사학을 잘 모르거나 책 한 권만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이 ‘편견’을 부정하는 관련 도서는 없는 듯하다. 읽다가 피식했다. 세대론도 내가 이미 말했듯이 성립할 수가 없는 주장인데 세대론 그렇게 팔아먹고 인간들 정말 얄팍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한두 푼 땡기면 되는건가?
조선후기 혹은 양반 사대부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조국사태'와 386세대를 엮어서 사대부니 양반의 부활이니 같은 소리 못한다. 이런 비슷한 주장이라도 펼치는 역사학 전공자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지금을 "후後조선"이라 칭하는 이영훈 류의 반일종족주의론자들조차도 386세대를 양반 사대부에 비유하지 않는다. 그러는 걸 본 적이 없다. 말이 안되니까. 그러니 다들 기존의 국사학계가 진보, 민족주의 등등에 포섭돼서 현실을 제대로 못 본다는 식으로 "주류" 역사학계 비판하고 그러는데 이 책도 그 루트를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
첫 문단부터 간단하게 다뤄보자. 수레처럼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이유는 경제적으로 별로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거의 대부분 육상수송이 해상수송에 비해 가격이 많이 든다. 운반하는 과정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말, 소 등의 짐승을 먹이는 비용도 수송비용에 포함되고, 수송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약탈 등의 위협에도 대비해야 한다. 중세 유럽에서 상인이 거의 도적 집단으로 취급받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상인 자체가 무장한 집단으로 여의치 않으면 강도로 돌변하였다. 게다가 한반도는 지리적 조건이 특히나 육상수송에 불리해서, 예컨대 국토의 7~8할이 산지이다. 대규모의 육상도로를 건설하기에는 비용도 많이 들거니와 무엇보다도 나라가 생각보다 작다. 나라가 작은데 굳이 산을 뚫어 도로를 내는 방식으로 큰 비용을 들여 교통수단을 갖추기보다도 차라리 해상수송을 활용하는 게 훨씬 이득이다. 심지어 이것조차도 비용이 많이 들어 나중에는 동전을 활용하여 대납하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18세기 조선왕조의 상황을 보면 조선왕조를 두고 상공업발전이 미진했다 비난하는 게 얼마나 웃긴지 알 수 있다. 애당초 한반도에 다른 나라가 와서 통상을 요구할 정도로 특산품이 있었을까? 있지도 않다. 남성들한테 좋다고 소문나서 불티나게 팔린 인삼/홍삼 정도나 있을까. 어차피 그걸로 육상 무역 잘 했다. 그 외에는 올 이유가 없다. 그러면 통상을 해서 제조업을 키워야 하는데 나라의 동쪽에는 중화제국이라는 세계 최대의 물산을 지닌 나라가 있었지만 이들은 쇄국정책을 펼쳐 바다를 통한 자유로운 무역을 금지하고 있었다. 서쪽에는 일본이라는 세계 최대의 은 산출국이자 금보유국이 있었지만 이들도 쇄국 정책을 펼치며 무역로를 닫고 있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나라의 크기가 작아 환경의 상태에 따른 풍흉작의 정도가 비슷비슷해서 환곡제도와 같은 형태의 곡물저장이 안정적인 경제적 상황을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됐다. 당신이 국왕이라 생각해보라. 전국의 풍흉작 정도가 비슷비슷한데 "시장경제 제도 만들어놨으니 알아서 시장에서 사먹으삼~" 이러겠나 아니면 풍년 때 곡물 비축해놓고 흉년 때 푸는 방식으로 대비하겠나? 어떤 제도가 적합할까? 뇌가 보수우파의 이데올로기에 절어버린 인간들만 "시장경제"라 할 것이다.
아래 문단에 나온 상업도시가 발달했다는데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이해가 안된다. 상업도시의 발전과 상하수도시설의 미비가 무슨 관련성이 있을까? 프랑스 등의 유럽국가들이 왜 향수 뿌리고 그랬는지 몰라서 그러나보다. 근대에 접어들어서도 현대와 같은 수준의 수도시설을 갖춘 사회는 많지 않다. 그리고 구한말 외국인의 기록을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걸 지적하는 내용은 이사벨라 비숍의 기록일 가능성이 높은데 비숍이 대한제국 때 이 문제를 두고 다시 언급한 건 왜 빼먹을까? 몰라서 그렇겠지. 비숍은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서울이 몰라볼 정도로 깨끗해졌다고 칭찬한다. 이태진은 이것을 두고 또 대한제국의 근대화 업적이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걸 받아들일건가? 둘다 동의하기 어려운 논지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는 조선왕조 하에서의 농업의 시비법 발전 수준을 갖고 논해야 한다. 전근대 사회에는 근대 사회와 달리 비료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다. 사람 똥을 잘 활용해서 거름으로 농사에 사용했어야 했는데 조선후기 농업발전 수준이 아직 동시대 일본, 중국 등에 비해 시비법 발전이 뒤쳐져 있고 그래서 딱히 똥, 오줌 등을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했다면 흔쾌히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 일본 등에 비해 사회경제적 발전의 수준이 낮다는 건 아마 대부분의 연구자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한국사 전공자들이,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발전의 수준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단순히 몇가지 지표만을 놓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토지제도의 변천, 농업구조의 변천, 농민의 가계경영의 변천 등의 복합적인 문제들이 겹쳐 있으며 이 책이 주구장창 인용하며 논지의 근거로 삼고 있는 송준호의 '신분제' 연구도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사회변동을 어떻게 독해할 것인가? 조선왕조 사회구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와 연관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전근대적 "신분"이라 함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츠카다 타카시의 정의대로 근대 사회에서는 헤겔 - 마르크스 테제에 맞춰 근대인이 "이중적 존재"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시작해야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다. 헤겔 - 마르크스의 테제란 근대인이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경제적 존재로서의 "시민(=부르주아지)"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민 개개인의 여러 차이는 모두 사적인 것으로 '시민사회'의 영역 내부로 제한되는 반면 정치사회(=근대국가)에서는 추상적인 형태로나마 참여자가 보편적인 '인간'으로 규정되고 그에 따라 만인의 "평등"이 보장된다. 근대인은 시민사회에서의 차별성과 정치사회에서의 공통성이라는 이중적 지위로 "분열"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헤겔 이래의 독일철학의 주요한 문제였다. 전근대 신분제란 이러한 분열 "이전"의 "통일적 상태"를 표현하는 형식이다. 여기서는 특수한 이해를 가진 인간이 그 특수성에 따라 "공적인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데 이러한 국가 - 사회 간의 관계를 신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전근대 신분제는 이런 맥락에서 국가/정치적 집단이 특정한 '인간집단'에게 "직역"의 형태를 강요하여 고정시킨 것으로, 신분제란 다시 말하자면 "시장경제의 미발달"에 따른 분업체계의 강제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의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가 확장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 책의 저자가 자주 인용하는 또다른 논자인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이라는 책은 이러한 신분제 개념을 전제로 저술되어 있다. 이영훈의 저작도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본다면 조선왕조의 상황이 보인다. 중국처럼 시장경제가 발전하지도 못했고, 일본처럼 직역에 따라 확고하게 신분제적 질서가 잡힌 봉건제도 아니다. 중국은 전근대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비非신분제 사회로서 송나라 시절에 이미 근대와 거의 비슷한 형태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분열이 나타났다. 정치사회에서는 황제를 정점으로 한 관료제 국가가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시민사회에서는 개별화되고 원자화된 개인들이 종법 등의 혈연적 질서 속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나이토 고난은 이러한 중국 송왕조의 특질을 '당송변혁' 등의 여러 개념으로 설명하며 중세도, 근대도 아닌 시기로 "근세"라는 규정을 새롭게 만들어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이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국가기구를 조직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잘 맞지가 않는다. 분명히 신분제가 없는 국가여야 하는데 시장경제가 미발달하여 현실에서는 신분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편에서는 관료층의 충원에 있어 과거 제도의 비중 증대, 고려시대 읍공동체의 해체, 무과의 실시와 군사권의 국가로의 집중 등이 나타났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사대부에 의한 왕권의 제약, 과거 제도의 폐쇄적인 운영,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까들이 그리 주구장창 말하는 "노비제의 발달"이 한국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중국은 송대, 특히 명나라 이후에는 천민신분이 거의 범죄자로 제한되지만 한국은 그렇지가 않다. 주호 - 협호 관계에서 노비 등의 대규모 등장은 중국화의 한계라는 측면에서 음미되어야 할 역사적 현상이다.
조선왕조의 인신지배 - 토지지배는 이러한 한계로 인해서 상당히 특이하게도 직역을 고정된 '특정한 집단'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인간을 집단으로 묶어서 파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토지를 면적대로 제대로 파악한 것도 아니었다. 결부제라는 한국적 제도로 인해서 조선왕조는 인간 노동력에 대해서도, 토지의 면적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개화기 때 효율적인 대응을 어렵게 만든 한 요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은 중국과 같은 비인격적/비신분제적 편재로 인해 사회적 공공업무를 특수한 인간집단이 수행하도록 고정시켜놓지도 않았다. 사무라이와 같은 통치집단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업무를 아예 방기할 수도 없다. 중국처럼 시장경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적 분업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매 3년마다 편적을 실시해서 호적대장을 작성했다. 끊임없이 호적을 작성해서 인간 노동력을 파악해두지 않으면 필요할 때마다 직역을 국가가 활용하도록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명대 이후에 사실상 편적을 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끝까지 인간 노동력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앞서 말했듯이 노비제의 문제도 이것과 연결해서 파악해야 한다. 양반 사대부들이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기 위한 노동력을 활용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공적 업무의 수행이라는 사회적 분업의 수행을 위한 신분적/정치적 기반으로 노비제를 볼 수 있다. 송준호가 지적하듯이 신분 아닌 신분으로서의 양반을 이해하는 건 이런 맥락을 이해해야 가능하다. 중국은 노비와 같은 천민을 앞서 말했듯이 범죄자 등에 한정시키며 당대로 제한한다. 조선왕조는 그러지 않는다. 양반 - 노비제가 오히려 체제를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볼 정도로 중요시한다. 사회적 편재는 분명 왕과 그 일족 - 양반 등의 상급 지배계층 - 향리, 중인 등의 하급 지배계층 - 양민 - 천민(=노비)로 "신분제적 질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속에서 특권을 주장할 수가 없다. 양반 사회 내부에서도 상호경쟁이 심하며 탈락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향리나 중인 계층 내부에서도 경쟁이 격렬하다. 양민이나 노비도 비슷하다. 노비 자체가 몰락한 양민 계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신분이동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다. 당연히 모두가 위를 향해 질주하며 자신의 신분적 지위를 누리려는 집착이 강하다. 이 문화적 특질은 중국화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는 죽어서도 양반, 너는 죽어서도 노비"라는 어떤 책 제목처럼 살아서 천국을 누리지 못하면 죽어서도 노비로 살 수밖에 없다는 이 실존적 공포가 중앙을 향한 대질주를 낳았던 것이다. 이영훈은 이것을 선풍 사회, 소용돌이의 한국사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래의 3개의 이미지는 미야지마가 한국 - 중국 - 일본의 사회구조를 묘사한 것이다. 참고하시라.
시장경제의 발전을 어렵게 하는 조건 속에서 중국식 비非신분제 사회로의 재편을 꾀한 조선왕조의 한계를 고려한다면 386세대의 '기득권(?)'과 양반 사대부를 등치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나이브하고 몇몇 현상에 집중한 인상비평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분제적으로 편재된 사회 내에서의 경쟁을 계급 사회에서의 기득권의 추구와 비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런 분들이 매번 내세우는 게 민주화 세력이 도덕주의 세력이라는거다. 반反지성주의라고 들어보셨는지? PC가 제대로 정착하지도 않은 사회에서 PC 비판이 성행하는 게 매번 황당하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PC주의자인가? 저 집단이? 물론 좋게 보자면 계급화의 진전에 따라 계급적 질서가 거의 신분제적 질서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미리 견제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간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성립하는 사회와 그것을 추상적이나마 부정하고 시작하는 사회 간의 차이를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내가 과거제를 능력주의와 연결시키는 것도 부정하는 건 이런 맥락이다. 이런 책들 보고 헛소리 하지 않았으면 한다. 17~19세기의 조선후기의 역사적 경험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 것인가? 조선왕조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이해가 낮다보니 반복되는 추문정도로 생각한다.
이런 책이 10년을 가겠나, 5년을 가겠나. 나같은 호사가를 제외하면 이미 아무도 보지 않겠지만 몇달 뒤에는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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