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논란 및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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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란[편집]
1.1. 식민지 근대화론[편집]
자세한 내용은 식민지 근대화론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조선말기 자본주의 맹아론과 일제강점기 일방적인 수탈론이 근거가 부실하며, 민족주의 역사관에 의한 확대과장이라는 비판은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오던 것이었다. 현재는 김용섭 연세대 교수, 강만길 고려대 교수, 신용하 서울대 교수 등으로 대표되는 일방적인 수탈론은 수많은 연구에 의해서 무너진 상태이다. 이 과정에서 통계분석, 실증자료를 강조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상당히 탄탄한 논리를 구축했고[1], 이들은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고 나오게 된다. 이후 학계에선 허수열 충남대 교수처럼 수탈론도 과장이지만, 식근론도 문제라는 반박이나 아예 근대화의 의미가 뭐냐는 문제제기까지 나오고 있다. # #
경제학자들이 대부분인 저자들에게서 전문성이 담보되는 부분이 수탈론 부분이다. 교과서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수탈이란 용어나 각정 정책설명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지만 10여 년 전 제기되어 다른 학자들과 논의를 거쳐 받아들여질 부분은 받아들여졌다. 반박될 부분은 다 반박된 터라 학계 입장에서는 새로울 게 거의 없다. 쉽게 말해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있는데 그에 반해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제기되었던 반박들은 모호하게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책 앞부분에 나오는 토지 조사 사업 비판의 경우, 신용하[2]가 주장하던 '한손에 측량기, 한손에 권총 든 토지수탈' 주장에 반대되는 연구가 국사학계에서 나온지도 30년도 넘은[3] 상황이다. 아울러 김제 벽골제에 관한 조정래 비판과 벽골제를 둘러싼 충남대 허수열 교수와의 논쟁도 2000년대 후반의 일로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에 대해 그동안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계속 반박해온 허수열 교수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대한 이영훈의 비판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라고 이영훈의 주장을 역으로 비판하였다.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허수열 "이영훈 경제통계 모두 엉터리"
실제로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76화에 나온 허수열 교수는 조정래와 이영훈의 주장 중에서 조정래 쪽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수열 교수는 이영훈의 주장도 무슨 사료나 문헌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일본인들이 개간을 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라고 했으며, 이영훈은 뉴라이트 인사들이 만드는 잡지인 시대정신에 1921년에 만들어진 지도를 엉뚱하게 1917년에 만들어진 지도라고 잘못 주장한 바 있으며, 이영훈의 주장처럼 일본인들이 개간을 열심히 해서 조선의 토지 면적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기존에 있던 토지들을 세금 많이 걷으려 측량하다보니 조선 왕조 시대에 토지 대장에 넣지 않았던 토지들이 통계에 들어간 것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허수열 교수는 자신이 국가기록원에서 맡은 방대한 기록들을 근거로 분석을 하여 뉴라이트 인사들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거의 평생을 바치고 있는데, 허수열 교수가 자료들을 토대로 이영훈의 이론을 반박하면 이영훈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답을 안 하고 전혀 다른 이론을 가져와서 여기에 대해 반박해 보라고 말하고 그래서 허수열 교수가 그 이론에 대해 자신이 가진 자료들을 토대로 반박하면 이영훈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다른 이론을 가져와서 반박해 보라는 식으로 두더지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허수열 교수의 이영훈 이론 반박 내용들
심지어 최근에는 방조제였다는 이영훈의 주장과 달리 벽골제에서 담수 식물의 흔적이 나오거나[4] 이곳이 수리시설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 상황이다. 물론 해당 학설이 정설은 아닌 만큼 학계에서 흔히 보이는 서로 반대되는 여러 논문들이 발표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나 여기서 이영훈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불리한 근거에 대해 적절한 반론을 제시하지 않고 그냥 퉁치려 한다는 점이다.
쌀 수탈 프레임 비판의 경우 일제 공권력이 직접적으로 시행하는 수탈이 아니라 수출(또는 이출)이며 외견상 자본주의 제 관계의 성립이라는 것은 한참전에 인정받고 결론났다.[5] 하지만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의 농촌구조가 완전한 부익부 빈익빈으로 변화, 조선의 자작농이 대거 몰락하여 소작농이 되었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산미증식계획은 농업잉여의 증대와 농업잉여의 자본 전화로 인한 공업화 토대 마련 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조선 농업구조의 완전한 변화로 인한 소작농 증가와 고액의 소작료 부담과 강제적 수리조합 가입 및 고액의 조합세 부담에 따른 부익부 빈익빈 심화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농촌의 빈부격차 확대와 자작농의 몰락 현상 자체는 자본주의의 시작이었던 영국부터 모든 나라들이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겪었던 일[6]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자영농의 몰락은 단순히 부농이 토지 소유를 확대했고 정부가 이를 장려/묵인하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대지주 위주의 총독부 지원을 배경으로 해서 대지주들이 강제로 조합원에 편입시킨 뒤 고액의 이용료를 부담시켜서 촉진된 면도 크다. 또한 당시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농업에 종사하였고 그 중 많은 경우가 빈익빈에 해당되었으며[7] 이후 식민지 시기 동안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혜택과 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모든 과정에서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일부 부정적 효과가 있었다.'로 축소하고 있다 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산미증식계획 파트의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의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의 글을 참조하길 바람.
그런데 학계의 논의와는 별개로 오랜 기간 일방적인 수탈론만이 국사교과서에 실리면서 상당수 일반인들이 이렇게만 알고 있는 현실[8]에서, 이영훈 교수는 이런 대중들의 무지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학계에서 수십 년도 전에 참으로 결론이 났거나 더는 학계의 주 관심사가 아닌 학설들을 끌고 와서 학계가 아직 반일 프레임에 매몰되어 있으며 자신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반박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가 이런 내용의 책을 처음 쓴 것도 아니다. 단독 저작만 쳐도 대한민국 이야기(2007)와[9] 대한민국 역사(2013)가 있고 공저작으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2006)이 있는데 밀도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쪽이 훨씬 낫다.
사실 뉴라이트의 대부이자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조차 "식민지기의 지주-소작관계는 법률적으로는 평등한 계약관계였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소작농들에게 농노적 예속을 강요하는 불평등 관계였습니다." (안병직·이영훈, 2007, p.156)라고 이미 주장했음을 생각해보면 강제성의 개입을 애써 부정하려는 일부의 시도는 이장폐천(以掌蔽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다)의 느낌이 강하다.
1.2. 독도의 역사적 영유권에 대한 논란[편집]
저자들은 독도가 현재 대한민국의 고유영토임을 부정하지 않으나, 그동안 한국 사회의 통념이던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고, 신라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이래로 한민족의 고유영토'라는 통념은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며, 오히려 사료에 나온 '우산도'와 대한제국 칙령의 '석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관음도와 죽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일본 측의 주장이 타당성이 높다고 본다.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확정한 것은 이사부나 대한제국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1952년 평화선 선포를 통한 것으로,[10] 독도 영유 또한 결국 이승만의 업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도 타당성이 있음을 이해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하게 내세울 필요 없이 low key로 실효지배만 하면 되었는데, 노무현 정부 이래로 대통령들이 정치적으로 반일을 이용하면서 독도 영유권 주장이 강화되고 일본의 반격도 더 거세지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의 노무현 운운하는 주장은 오히려 이영훈이 칭송해 마지않는 이승만에게 해당되는 소리다. 가장 강경하게 정치적으로 반일을 이용하면서 무력까지 동원해서 위태롭던 독도영유권을 확실하게 실효지배한 것이 이승만이고 이에 대한 일본의 반응도 가장 격렬했던게 이승만 정부 시절이다.[11] 그리고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운운도 독도 연구자에겐 그저 황당한 주장일 뿐이다. 왜냐하면 국내 역사학자들이나 독도 연구자들도 국제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에서 우산국 정벌 건을 입 밖에 내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을 독도영유권의 증거로 내세운 서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모두 독도와는 관계없는 비전문가들의 어린이 위인전이나 대중 서적 또는 정부의 국내용 선전 메시지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이는 '논문을 쓰고' 때로는 '학술 논쟁을 벌여야 하는' 독도 '연구자'들이야말로 그런 소리를 국제적으로 했다간 망신만 당할 파탄된 논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즉 이영훈의 우산국 정벌 주장은 그들에겐 허수아비 공격일 뿐인 것.
구체적으로는 우산도 명칭 논란, 이승만 라인설 등 일본 우익들의 대표적인 주장만을 실어 놓고,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대한제국 영토임을 공표한 ‘석도’가 독도라는 것을 부정했다. 저자는 오히려 대한제국이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에 반박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행정권은 남아있었지 않느냐며...[12] 하지만 사실 이영훈이 시마네현 고시에 대해 대한제국이 왜 반박하지 않았냐고 비난하는 건 뒷북에 가깝다. 왜냐면 수십년 전 일본 학자들의 주장인데다 이미 논파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무주지 선점론에 근거해서 독도를 자국령으로 편입했는데 새로운 영토의 획득처럼 중요한 국가적 행정처리를 <관보(官報)>나 <공보(公報)> <현보(縣報)> 어디에도 싣지 않았다. 그러나 신 영토 획득을 어떤 형식으로든 공포하지 않으면 국제법상 문제가 되기에 기껏해야 지방 신문인 <산인(山陰)신문> '잡보(雜報)'에 조그맣게 실어 도망칠 구멍을 파낸 것이다. 그것도, 그 새로운 영토가 '竹島'라고 명기하지도 않았다. 호사카 유지 교수에 따르면 1876년 미국과 오가사와라 군도의 영유권을 놓고 분쟁이 일었을 때, 일본은 미국, 영국에 철저히 오가사와라 영토를 일본령으로 편입할 것을 공표하고 당연히 관보에도 당당히 실었다. 그런데 왜 독도에 대해선 저런 모순된 행보를 보인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대한제국이 이를 알면 분명 항의와 함께 국제분쟁이 될 게 뻔하니까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한 것이다. 1년 후 후인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이 이를 알고 항의한 것이야말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 자체를 몰랐다는 증거이다. 정확히 말하면 무능해서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일본이 철저히 숨긴 것이었다. 즉, 이영훈은 도둑이 아니라 도둑맞은 것도 몰랐던 피해자를 비난하고 있는 것.
무엇보다 대한제국 칙령의 '석도' 비정에 있어서도 그의 문제점이 심각한데, 우산도=독도를 부정할 때 그는 나고야대학 교수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의 연구를 적극 인용하면서 그를 '존경'하며 '우리나라에도 그런 학자가 있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본인의 유튜브 채널 '이승만학당' 및 주간조선에서 이선민 기자에의 반박문에서 했다. 이케우치 교수는 독도 영유권 분쟁에서 한일 양국에서 영향력과 인지도가 큰 학자인데, 그도 처음에는 석도 비정에 대해서는 석도->돌섬->독섬->독도로의 발음변화는 발음의 유사성에 의한 가능성일 뿐이며 문헌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석도=독도 라는 주장은 유론(謬論,그릇된 논리)이라고 주장한 학자이다. 그러나 이케우치도 석도가 관음도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석도에 대해선 '알 수 없다'는 식으로 회피하다 재일교포 출신 독도연구가 박병섭[13]에 의해 그 '문헌적 증거'가 2010년대 이후 조금씩 밝혀지자, '석도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독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라고 기존의 주장을 수정함으로써(2017) 오히려 이영훈의 주장을 부정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반일 종족주의의 출판년도는 2019년인데, 이영훈이 이케우치의 견해가 바뀌었음을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영훈이 과거 허수열과의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에서 일본 육군이 발행한 <옥구도엽>이라는 지도의 연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릇되게 표시하는가 하면, 1921년에 만들어진 지도를 엉뚱하게 1917년에 만들어진 지도라고 고의성이 의심스러운 잘못된 주장을 한 전력을 생각하면, 독도 영유권에 대한 그의 주장도 학문적 엄밀성 이전에 정직성부터 의심스럽다.
게다가 서문에는 객관성과 공정성의 추구가 지식인의 사명이라 주장한 반면, 정작 독도 문제에 관하여는 태정관 지령이나 SCAPIN 제677호처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불리한 사안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 태정관 지령에 대해선 왜 이를 언급안하냐는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의 주장에 '태정관 지령은 한국의 독도고유영토설을 증명하지 못한다.'며 이영훈이 반박했고 이에 이선민 기자가 재반박하였다. 자세한건 태정관 지령 항목 참조.
또한 일본은 한국과 국교를 맺기 직전인 1965년 4월 한국 정부에 "다케시마(독도)의 불법 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라는 문서를 보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도 결코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으며[14], 한일국교정상화 때 한국이 '을'이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한다'는 문구를 집어넣으려다 박정희가 '한일회담이 취소되어도 좋다. 결코 독도에 대해 양보하지 말 것'을 외무부장관 이동원에게 지시, 끝내 막았던 적이 있다. 국내 반대를 억누르면서까지 한일회담을 추진하던 박정희조차 '차라리 때려치워라'고 할 정도로 일본의 독도 도발은 심각했다.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고 박정희 정부 집권기인 1977년에 200해리법을 제정하여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가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일본 속셈 꿰뚫을 독도정책 다시 세워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케시마는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4글자 단어가 이 후쿠다가 처음 한 소리라는 것. 즉, 일본의 독도 도발은 더 심하면 심했지 이영훈의 주장처럼 노무현 정부 이전이라 해서 결코 일본이 소극적으로 가만히 있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때문에 한국이 조용히 있는다고 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조용해 질 것이라는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이야말로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 오히려 조용히 있을수록 '한국이 일본의 논리에 반박 못하고 있다.', '일본의 다케시마 주권행사에 한국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라는 식으로 일본의 영유권 주장 및 국제 여론전에 이용해 먹을 것이 뻔하다. 당장 독도는 한국이 실효지배 하고 있는 이상, 일본이 가만히 있는데 한국이 먼저 독도 영유권을 호소한 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15] 오히려 독도를 빼앗고 싶어 먼저 한국에 싸움을 걸고 국제적으로 동네방네 떠드는 게 일본이고 한국이 그에 방어 또는 반응하는 메카니즘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계속되어 왔을 뿐이다. 이정도면 이영훈은 선후관계도 왜곡한 것이다.
이영훈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영훈은 독도 한국영토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한국영토설의 근거를 한국정부가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는 걸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영훈은 한국 정부의 핵심적 주장인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문헌에서의 우산도=독도, 대한제국 칙령 41호의 석도=독도 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무인도인 독도가 오래 전부터 한국영토였다는 증거를 대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이영훈 자신이 독도 한국 영토론을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은 것도 아니다. 이걸 가지고 이영훈이 독도 한국영토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증거는 없지만 독도는 한국영토가 맞다' 라는 게 실증주의자 이영훈의 생각 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게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을까?
이영훈은 과도하게[16] 이승만을 찬양하는 성향을 보이는데, 그러므로 그에겐 한국의 독도 고유영토설의 근거가 부족할수록 이승만의 평화선 공표로 인한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의 공적이 더더욱 돋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영훈은 이 부분에서 심각한 자가당착을 드러내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대로 평화선 이전의 독도에 대해서, 우산도=독도, 석도=독도가 모두 부정될 경우, 게다가 독도는 무인도이므로 한국의 독도 고유영토론은 그 근거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오로지 실증주의만으로 세상의 모든 비난을 버텨왔다'[17]는 그는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가 아니며, 1904년 대한제국 칙령에서도 독도를 영토로서 선포하지 않았으니[18] 이 '무주지 선점론'으로 독도를 일본령으로 선포한 시마네현 고시를 인정, 즉 독도가 일본령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일본은 물론 미국의 의견 (러스크 서한)[19]도 씹고 무력으로 점령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즉 남의 나라를 영토를 무력으로 빼앗았으니 바로 침략이고, 그 사상적 기반이 이영훈 본인이 한국인의 고질적 국민성이라고 매도한 '반일 종족주의' 이며, 그런 사상으로 남의 나라 영토까지 빼앗을 정도라면 역대 가장 극단적이고 질 나쁜 '반일 종족주의'를 이승만이 저지른 셈이 된다. 즉 이승만이야말로 그의 저서 '반일 종족주의'로 가장 비난해야 할 대상임에도 오히려 평화선 덕분에 한국의 독도 영유를 확정했다고 칭송하고 있다. 모순이 느껴지지 않는가? 실제로 주간조선 이선민 기자도 이영훈과의 논쟁에서 이 모순을 무겁게 지적하고 있다. 물론 그에 대한 이영훈은 답변은 없는 상태. 이영훈의 ‘독도’에 대한 세 번째 비판
마지막으로, 이영훈은 전공이 경제학, 경제사학이지 역사학도 아닐 뿐더러 독도에 대한 주장도 위의 이선민 기자의 반박처럼, 연구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추측'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지난 50여 년간 축적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연구성과는 그 분야에는 연구경력도 없는 이영훈이 갑자기 나타나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도 않을 뿐더러 일본이 얕볼 수 있는 수준도 아니고 오히려 겐로쿠 각서(2005년에 발견)나 이케우치 교수의 예(2017년)처럼 갈수록 일본에 불리한 학술적 증거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가 학계도 '반일 종족주의'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해서 독도 학계를 얕잡아 봤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영훈은 전공이 경제학, 경제사학이지 역사학도 아닐 뿐더러 독도에 대한 주장도 위의 이선민 기자의 반박처럼, 연구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추측'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지난 50여 년간 축적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연구성과는 그 분야에는 연구경력도 없는 이영훈이 갑자기 나타나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도 않을 뿐더러 일본이 얕볼 수 있는 수준도 아니고 오히려 겐로쿠 각서(2005년에 발견)나 이케우치 교수의 예(2017년)처럼 갈수록 일본에 불리한 학술적 증거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가 학계도 '반일 종족주의'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해서 독도 학계를 얕잡아 봤다고 할 수밖에 없다.
1.3. 과거사 청산 관련 논란[편집]
공동저자인 주익종은 '1부 10.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 파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했으며 그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이 포괄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치열한 상황이며, 한일 양국의 과거사 갈등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쌍방 과실이지 결코 한국에 일방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과거사 인식과 관련된 자세한 논변은 본문에 서술하기엔 너무 길어지니, 한일기본조약과 그 법적 해석, 한일관계 문서의 한국의 입장•일본의 입장•갈등 원인 단락, 일본의 역사왜곡 등 관련 주제들을 참고하자.
1.4. 도요타재단 연구조성금 수령 논란[편집]
https://toyotafound.secure.force.com/psearch/Search[20]
반일종족주의 집필자들이 일본기업 도요타가 만든 도요타재단의 연구조성금을 받았기 때문에 '친일적 논조'로 반일종족주의를 저술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좌파 또는 리버럴 성향의 연구자들 다수도 도요타재단의 연구조성금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요타 재단이 지원한 이들의 연구내역을 봐도 이른바 “친일적 논조”와는 거리가 먼 연구들이다.
실제로 도요타재단의 연구조성금을 받은 한국인 학자들의 정치·이념적 성향과 그들이 도요타재단의 돈으로 수행한 연구내역 실사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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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향의 한홍구 씨가 도요타 재단의 연구조성금을 받아서 수행한 연구 내역이다. 도요타 재단 홈페이지에서 검색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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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과 군사주의의 해체에 관한 예비 연구 韓国における民主主義体制への移行と軍事主義の解体に関する予備研究 (2002)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탈군사화 전략에 관한 연구 韓国社会の民主主義への移行と脱軍事化の戦略に関する研究 (2003) 만주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의 역사적 기원 満州に於ける金日成の抗日武装闘争―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成立の歴史的起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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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씨가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받은 돈은 총 1천 142만 엔이다. 그런데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반일종족주의 저자들 중 일부가 받은 돈은 400만엔에 불과하며, 이것도 15명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3년간 수령한 금액이라고 한다.# 한홍구 씨가 연구조성금을 수령한 2000년대, 1990년대와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이 연구조성금을 수령한 1980년대 후반기 사이에 물가 차이가 있겠지만, 단순 비교로 3배 차이면 상당한 금액 차이로 보인다. 아무튼, 한홍구 씨는 “전범기업”이라고 비판 받는 도요타#가 만든 재단의 지원금을 훨씬 많이 받은 셈이다 반일종족주의 연구자들 보다 더.
위안부 지원 단체[22]의 대표#[23]를 역임한 정진성 교수도 도요타재단의 돈을 받았다. 그녀가 동경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외국인연구원#으로 재직했던 1989년에 도요타 재단의 연구조성금 180만엔을 받고 아래 연구과제를 수행했다.
재일한국·조선인의 의식과 운동: 3세의 문화운동을 중심으로 在日韓国・朝鮮人の意識と運動:三世の文化運動を中心として#
재일한국인 교수이자 대표적인 리버럴 인사#로 알려진 강상중 씨도 도요타재단의 돈을 받았다. 이 돈으로 강 교수가 수행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20세기 동아시아 월경적 네트워크 형성 - 사람, 문화, 그리고 미디어 20世紀東アジアにおける越境的ネットワークの形成 -ヒト、文化、そしてメディア 400만엔 (2000) # 동아시아에서의 월경적 네트워크 형성 - 그 과거와 현재 東アジアにおける越境的ネットワークの形成――その過去と現在 400만엔 (2001)# 한반도의 공존과 동북아의 협력 - 김대중 선생님 기념강연 심포지엄 朝鮮半島の共存と東北アジアの協力――金大中先生記念講演シンポジウム 800만엔 (2004) # 중국·한국·일본 간의 '커뮤니케이션 파실리테이터'를 목표로 -삼국을 연결하는 연구자·언론인·시민언론인의 네트워크 구축 中国・韓国・日本の間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ファシリテーター」を目指して――三国を結ぶ研究者・ジャーナリスト・市民ジャーナリストのネットワーク構築 350만엔 (2006) #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前 서울시장 박원순 씨도 본인이 상임이사로 재직했던 2곳의 재단, 희망제작소와 아름다운재단이 도요타재단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희망제작소 일본지부#가 도요타재단으로부터 350만엔(약 5200만원)을, 아름다운재단이 7920만원을 후원받았다고 한다. #
박원순 씨, 정진정 교수, 한홍구 교수, 강상중 교수, 그리고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영훈 교수 및 기타 반일종족주의 집필자들 사이의 정치 이념적, 사상적 공통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요타재단이 이들 모두에게 연구비와 후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도요타재단의 연구조성금이 특정한 정치이념·사상의 확대 재생산을 그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의 방증이다.#[24]
일본 붓쿄대학의 한국인 교수인 이승엽 교수#가 본인의 페이스북에 도요타재단 연구조성금 관련 내용을 쓰기도 했다. 이승엽 교수는 도요타재단 연구조성금을 이른바 “친일적 주장”을 생산 및 유통하기 위한 어둠의 자금이라는 식의 음모론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 그리고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인 연구자들이 저런 음모론에 대해 제대로 반론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스럽다고 언급했다.그리고 이승엽 교수는 위에서 열거한 한국인 학자들 이외에도 수많은 한국인 연구자들이 도요타 재단의 지원금을 수령해왔다고 하면서 일부지만 그 리스트를 사진으로 첨부하여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다. #
만약 일본의 어떤 재단의 돈을 지원받아서 어떤 연구를 수행했다는 것을 “친일파 양성 음모론”의 근거로 삼는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안보특보였던 문정인 씨의 경우에는 A급 전범이 창립한 일본재단과 연세대가 합작해서 만든 아시아연구재단의 이사장을 역임한 경력도 있기 때문에, 졸지에 문재인 정권도 “친일파”를 중용한 토착왜구 정권이 되어버린다. “도요타재단 연구조성금 논란”의 논리대로면 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만큼 도요타 재단 연구조성금을 문제 삼아 “토착왜구 양성”을 따지는 것이 비합리적인 주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이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주장을 하는 건 일본기업 재단의 돈이 원인이 아니라, 본인들의 사상이나 신조가 그렇게 변화하여 정립됐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옳다. 이와 관련해 이영훈 교수와 안병직 교수가 본인들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파에서 →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어떻게 “전향”을 하게 됐는지 직접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 #, #
2. 반응[편집]
2.1. 긍정적 반응[편집]
2.1.1. 정치인[편집]
2.1.2. 언론인[편집]
2.1.3. 학계[편집]
- 조셉 이(Joseph Yi)교수는 반일종족주의는 한국 사학자들이 민족주의에 기반하여 조작’해 내었고 진짜 현실이 아닌 합의된 현실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다‘라며 인용하였다.#
2.2. 부정적 반응[편집]
2.2.1. 학계[편집]
- 과거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을 담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판하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이 책의 저자들과 함께 저술한 이철우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다. 긍정적인 평가라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인터뷰 내용이다. #
- 전강수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당신들이 유포하는 건 '혐한 종족주의'라며 비판하였다. #
-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책에서 저자는 식민지근대화론자의 학술적 주장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독선적 표현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고 비판하였다. #
-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평화를 바라는 합리적인 양국 시민들의 소리는 묻히고, 이런 책들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두 극단적 관점의 충돌을 견인하며 커다란 소음을 유도한다고 비판했다. #
-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저자들이 책에서 반일 종족주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으며 "거짓말에 관대한 문화가 반일 종족주의 때문이라는 주장, 물질주의가 반일 종족주의의 원천이라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
-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의 저자 도리우미 유타카는 일제는 조선을 구조적으로 수탈했다면서 비판했다.[25][26]
-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전국 농경지의 약 5.8%, 임야의 59.1%를 빼앗았다"고 지적하고 "토지조사 분쟁 사례와 저항 행태를 봐도 이 사업의 목적은 약탈이었음이 입증된다"고 전하면서 "이들의 후예들이 펼치는 거짓 주장을 그대로 '주워 먹은' 사람들이 학문·통계·사료의 허위 탈을 쓰고 매국적으로 활동한다면 동포들의 정신건강을 해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영훈과 이러한 주장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를 전면으로 비판한 '일제 종족주의'를 출판하였다. 뒤이어 황태연을 비롯한 일제 종족주의 저자 6인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을 부왜노로 지칭하면서 그들이 근거 없이 대한민국의 정당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일제종족주의와 동일시해 ‘반일종족주의’로 폄하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기를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일제 종족주의 저자들은 그들을 단순히 학술적 논박만 하는 것이 아닌 법적으로 고발을 하였으며 일제 식민통치 옹호 행위 및 일본의 역사부정에 대한 내응 행위 처벌 특별법’을 제정해 이들을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9] #
-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뉴라이트들이 일본 우익을 답습하는 방법으로 한국 사회를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고,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이미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인데, <반일 종족주의>를 들고나온 것은 학문적 패배를 정치적으로 만회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 이영채 게이센여학원대 교수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를 전면 비판한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 정복>책을 출판하였다. 이영채 교수는 "한국의 역사 전문가라는 집단이 스스로 일본 식민지 시기의 역사 인식을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와 동일한 맥락ㆍ입장에서 설명한다”며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식민 지배에 대한 거짓과 과장에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은 사실 일본 식민 지배의 실상을 은폐하고 미화해 온 결과”라고 비판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저자는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새롭게 나온 주장은 별로 없지만 훨씬 더 선동적, 공세적인 어조로 서술됐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아울러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 시민세력과 연대를 맺는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한 <반대를 론하다: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을 출판하였다. 정혜경 위원은 <반일종족주의>에 대해 “역사학 연구자, 그리고 전쟁피해와 인권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이 책은 불편함을 넘어 고역스러운 책”이라고 평가하였다.#
- 호사카 유지 교수도 <신친일파>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영훈의 확증편향적인 통계자료 활용과 거짓 정보를 활용한 선동, 이중잣대적인 사료 해석 등을 비판했다.
2.2.2. 정치인[편집]
2.2.3. 언론인[편집]
[1] 다만 통계의 신뢰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당장 이 책에서 강제동원 파트를 저술한 이우연의 경우 동일 주제에 대하여 데이터를 왜곡해서 강제동원 문제를 왜곡했다는 비판 글도 있어서 첨부한다. 낙성대 연구소의 논문에 대한 비판 글[2] 이 사람은 이제 학자라고 할 수도 없는 완전히 갈 때까지 간 사람이다. 역사 전공이 아니라 사회학 전공하다 넘어온 사람이라 역사학적 방법론에 충실하다고 보기도 힘든 사람이었는데, 2010년대까지 독립신문 같은 거 가져다 청산리 '대첩'을 밀고, 아예 전공도 아닌 고조선까지 건드려서 고조선이 황하 문명보다 앞선 인류 3번째 문명이라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 그냥 환빠와 차이가 없으며 사학과에선 연구사 언급할 때 아니면 논문인용도 안 한다.[3] 이영훈이 최초로 반박했다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배영순, 「韓末·日帝初期의 土地調査와 地稅改正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88 ;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있어서 김해군의 토지신고와 소유권 사정에 대한 실증적 검토」, 『인문연구』 8권2호,1987 등을 본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하기 전인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학계 내에서도 신용하와 반대되는 의견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4] 담수 식물이 나온다는 말은 민물이 차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해수가 밀려오는 방조제로 보기는 어려워진다.[5] 단, '수탈'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장이 아닌 생산관계에서 수탈이 존재했다는 의견들이다. 다음의 한양대 박찬승 교수의 의견들을 참조 바람 # #[6] 당장 세계사 교과서를 펴서 인클로저 운동 파트를 보면 공업화의 토대가 되는 자본 축적과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와 동일한 평가를 하고 있다[7] 앞서 다른 국가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발생했다 지적하였으나 조선인은 구분되는 존재로 어디까지나 일본제국 2등신민 처지였다.[8] 즉 역사학계에선 이미 업데이트가 끝났는데, 언론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선 아직도 문제가 많은 옛날 버전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언론에서 한일역사 문제,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강만길, 신용하 교수 같은 이미 학계에서는 박살난 수탈론자들을 내세워서 자극적인 보도를 계속 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업데이트가 안 된 것이다.[9] 이 책에서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리켜 국제법이 금지한 노예제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가, 2019년에 낸 반일종족주의에서는 위안부가 직업적 매춘부였다며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여기에 대해 유투버 헬마우스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07년 이영훈의 책인 대한민국 이야기에 실린 일본군 위안부에 관련된 내용도 사실 이영훈 본인이 직접 연구한 게 아니라 일본인 연구자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이야기는 풀어쓴 일반인 대상 교양 역사서다. 교수라도 모든 분야를 전공할수 없으니 일반인 대상 교양서나 학부생 레벨 강의에서 전공외 분야를 설명할 때 다른 이의 연구성과를 인용하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00년대까지는 위안부 강제성을 부정하지 않았던 이교수가 2010년대 들어 일본 극우학자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문제지 단순히 다른 연구자의 자료를 인용한 자체가 문제라고 하긴 어렵다.[10] 물론 이것이 이승만의 업적이라는 건 좌우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시기 미국은 일본 주장에 동조하면서 이승만에게 러스크 서한을 통해 스스로 독도를 포기하도록 요구할 정도로 한국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11] 구체적으로 이 시기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 노래를 부른 것은 물론이고 미국으로 하여금 독도에 미군 공군 폭격 훈련을 실시하도록 제안했으며, 미국은 그 제안을 승낙, 그런데 이를 알아챈 이승만이 분노하여 미국에 항의, 끝내 취소시켰다. 그 조그만 바위섬에 폭격 훈련을 실시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일본계인 호사카 유지조차 그의 저서 '대한민국 독도'에서 일본의 이런 수작을 '야비하다'라고 비난하고 있다.[12] 1905년부터 1909년 기유각서를 쓰기까지 대한제국은 외교권, 주한 외국인 관할권, 감옥사무권, 경찰권, 사법권, 군권을 순차적으로 박탈당한다. 1905년에 외교권만 잃은 상태로 멍하니 있다가 1910년에 바로 주권을 잃은 게 아니다. 저자의 논조에는 전대미문의 망조가 든 대한제국이 어디에 무게를 둘 수 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행정력이 기능할 수 있는 상태였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다.[13] 박병섭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원래 도쿄교육대학(현 츠쿠바대학) 물리학과 학사 출신의, 30년간 샐러리맨을 하다 은퇴한 인물이었으나 그 후 독도 연구에 매진, 현재 한일 양국에서 독도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은, 이례적인 경력의 학자이다. 이는 그가 재일교포라서 한국어, 일본어, 일본 고어 모두 능통한데다 한국과 일본측 사료를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을 살린 덕분이다.[14]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29쪽[15] 뭐가 찔리는 게 있어 도둑 제 발 저리듯이 그렇게 괜히 분쟁 지역임을 자인하는 짓을 하겠는가? 단 한가지 예외라면, 이명박의 독도방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6] 이영훈의 이승만 찬양이 얼마나 과도한지 진중권은 "이영훈은 이승만 빙의했고, 조정래는 아직도 지리산 해방투쟁"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17] 그의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해 주간조선에서 박현모와의 논쟁에서 했던 말이다.[18] (이영훈에겐) 영토로 선포한 '석도'가 독도가 아니니까.[19] 물론 러스크 서한은 미국의 잔머리이지 결코 공식의견이 아니다.[20] 도요타재단 연구조성금 수령자 검색 홈페이지[21] 한홍구 관련 보도, 허위보도 아니다 법원 판결 - 재판부는 한 교수가 '박근혜가 태어나기 전에 박정희를 죽였어야 했다'고 발언했다는 부분에 대해선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 재판부는 "한 교수는 강연 중 1분 사이에 네 번이나 '죽여도 될 사람' '죽여도 여러 번 죽였어야 할 자' '그때 죽여버렸으면' 등의 발언을 반복했다"며 "역사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가정이 아니라 의사나 의도가 개입된 표현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 한 교수가 김일성을 민족영웅으로 지칭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칼럼에선 김일성에 대해 '민족의 태양, 형제들의 수령,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영웅' 등의 어휘를 사용했다"며 "중립적 용어 선택이라고 보긴 어렵기에 보도가 내용을 심하게 왜곡한 건 아니다"고 판단했다. - 다만 TV조선의 한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출연한 권 기자가 한 교수의 강연에 대해 "김일성이 얼마나 훌륭한 독립운동가인가에 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선 "김일성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강의했다고 허위로 보도했다"며 한 교수의 손을 들어줬다.[22] 前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 現 정의기억연대[23] 기사발췌 - 이에 따라 협의회는 김윤옥(상임), 정진성, 이경숙씨 등 3인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된다.[24] 기사발췌 - 원칙적으로 어떤 국가,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도요타 재단에 연구자금 지원을 신청하면 심사를 거쳐 재정후원을 해준다. 재단측은 연구결과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으며, 연구 결과물이 아무리 뛰어나도 훗날 도요타 직원으로 특채하는 식의 특혜도 없다.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후원을 하는 셈. 특히 최근들어서는 서남 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원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금 당장은 자동차 시장으로서의 가치는 적으나 장기적으로 기업 이미지를 제고해 놓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25] 다만 도리우미 유타카의 주장은 식민지 시대 경제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실은 전부 일본인에게로 돌아갔다는 논리이기에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식민지근대화론을 부분적으로 강화해주는 측면도 있다. 중앙일보는 이런 관점에서 우려된다는 서평을 실었다. 전향적 일본학자의 식민지 조선 수탈사[26] 실제 일본의 진보세력들은 대체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일제의 투자로 식민지 조선의 인프라가 대폭 확충되고, 보건의료 수준이 상승하고, 교육이 발전했지만 그 혜택이 식민지조선인에게는 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식으로 과거사를 서술한다.[27] 이영훈과 함께 뉴라이트의 정신적 대부인 안병직 교수 밑에서 공부를 했지만, 자료 조사를 하다보니 오히려 식민지 근대화론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승이자 동창인 안병직과 이영훈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인물이다.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76회에도 출연해서 이영훈의 이론에 대해 반박하는 강연을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허수열 교수의 이영훈 이론 반박 내용들[28] 허수열 교수는 1970년대까지 국사학계의 주류였던 신용하의 수탈론과 1980년대 이후 수탈론의 부실함을 등장한 이영훈의 식민지근대화론 양쪽 모두 근거가 부실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쪽이다. 자세한 내용은 식민지근대화론, 산미증식계획 항목 참조.[29] 이는 단순히 일제종족주의를 전파하는 학술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학당 유튜브 방송활동, 방송내용의 출판(반일종족주의), 유엔기구를 통한 부왜·반한(反韓)활동, '징용자상' 및 '평화의 소녀상' 건립 반대운동 등 정치활동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30] 이승만의 독도 평화선 선포만 봐도 이승만이 얼마나 반일 성향이 강했는지에 대해 훤히 드러나는데, 정작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저자들이 이승만의 반일 정책과 성향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31] 정작 이 발언에 대해 이영훈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라며 불쾌한 입장을 드러냈다.꼰대적인 말투가 눈에 띈다.[32] 이에 윤서인이 댓글로 "명확한 근거와 논리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반문하자, 홍준표는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적었는데 달려드는 것을 보니 좌파들보다 더 하네요."라는 본인이 유지해온 주장에 대한 입장에서는 굉장히 강경한 태도로 반박했다. 참고로 홍준표는 2015년의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2017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독일 나치의 유대인 제노사이드(집단학살)에 비견되는 반인륜 범죄.”이며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는 외교가 아니라 "뒷거래”라고 비판하며 “합의해서도 안 되고 합의의 대상도 아닌 우리가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역사의 아픔” 이라고 했으며 자신의 이 발언에 대해서 비판하자 “일본이 독일처럼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느냐. 전혀 그런 태도가 없는데 왜 합의를 해야하냐?”라고 반박했다. 홍준표는 친박들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이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일제에 의해 강제노역에 끌려갔다가 겨우 돌아온 경험이 있기에 당연히 이 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입장에 대해 친민주당·좌파 성향 네티즌들은 하루에 두 번은 맞는 고장난 시계라며 예찬하고 있다(...).[33] 독일에서는 나치 옹호발언 뿐만 아니라 나치식 경례도 처벌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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