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7

손민석 박찬승 마치 한국 진보 역사학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려고 임정 정통설을 주장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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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선생님 정도면 아실만한 분인데 왜 이런 글을 적는지 모르겠다. 마치 한국 진보 역사학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려고 임정 정통설을 주장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가지무라 히데키의 외인론은 1960년대 이래 일본 근대화를 두고 벌어진 메이지유신 관련 "30년 논쟁"이 한국사 연구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1960년대에 도야마 시게키(遠山茂樹)는 중국 및 조선과 달리 일본은 영국, 미국 등의 서구 제국주의의 외압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까닭에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30대의 패기 넘치는 소장학자 시바하라 다쿠지(芝原拓自)가 그것을 비판하면서 일본 민족의 역량을 강조하는 내인론을 내세웠다. 민족역량와 외압 중 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정할 객관적 근거가 없기에 '30년 논쟁' 운운하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당대의 일본 근대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등의 리버럴, 좌파 학자들의 입장이 미국의 로스토우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론'과 충돌하며 그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맥락도 얽혀 있었기에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인데 한국에서는 반대로 식민지'근대화론'을 내세우는 쪽이 민족역량이 부족했다는 내인론의 입자에 서고 그걸 비판하는 박찬승 등의 진보 진영이 외압론을 내세우며 면피하기 바쁘다.
일본의 '30년 논쟁'은 '세계사의 기본법칙 논쟁'과 얽히면서 도야마 시게키(遠山茂樹)의 <메이지 유신과 현대>(1968), 이시이 다카시의 <메이지 유신의 무대 뒤>(1960), 시바하라 다쿠지(芝原拓自)의 <세계사 속의 메이지유신>(1977), <소유와 생산양식의 역사이론>(1972),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메이지유신의 기초구조>(1968) 등의 명저들을 낳았지만 의외로 간단하게 끝나버렸는데 이는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여 도무지 일본의 근대화를 부정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화가 몰아낸 것처럼 일본의 선진국화가 일본 리버럴과 좌파들의 입지를 좁혀버렸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외압론이 자리를 차지할 공간은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된다. 논리적으로도 외압의 크기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도야마도 비교사를 주창했던 것이다. 박찬승의 주장도 대부분 그대로 갔으면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역량이 그렇게 적지 않다는 민족주의적 전제가 없으면 성립하기 어렵다. 이는 현재의 한국의 상황을 기준으로 과거에 투영하여 가정을 하는 것인데, 설득력이 약하다.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한미동맹이 이뤄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미국이 대규모 지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한미일 삼각무역구조가 성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정하자면 끝도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도 외압의 크기와 강도는 민족역량이라는 내인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 민족역량이 그것을 넘어설 수 있으면 외압은 약했던 것이 되고, 넘어서지 못했으면 외압이 강했던 것이 된다. 동일한 10의 강도의 외압이라 해도 조선왕조에게는 강대한 것일 수 있고, 일본에게는 약한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결국 결정하는 요인은 내인, 민족역량이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준은 전근대 조선왕조의 역사적 전개가 얼마나 근대로의 이행에 적합한 것이였는지 여부가 된다.
홍성화의 최근의 중국경제사 연구(근간)도 그렇고 최근의 많은 연구들은 중국조차도 개항 이전의 발전수준이 도무지 근대화에 적합한 제도와 생산력 기반을 갖추지 못했으며 심지어 19세기 들어서서 생산성이 하락하는 추세까지 보인다고 한다. 스미스적 성장에서 맬서스 트랩으로 후퇴했다는 홍성화의 주장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상품경제가 그리도 발전한 중국조차도 이러한 상황인데 조선왕조가 외압만 없었다면 근대화에 성공할 역량이 있었다니!! 무슨 근거인가? 조선왕조가 스미스적 성장 단계인가? 매뉴팩처 단계인가? 박찬승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영훈의 19세기 위기론은 그것이 상정하는 것만큼 심각한 생산력 후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개항 이전에 조선왕조의 내적 역량이 소멸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경제사학계에서 이런 주장은 안병태 때부터 계속해서 반복되어온 것이다. 이영훈보다 훨씬 더 근대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넓게 보는 안병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적인 입장에서 '조선 부르주아지'인 중인 계층이 조선왕조 관료제 내부에서 어떻게 자본을 축적하며 성장하는지를 분석한 뒤에 그 중인 계층에 기반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왕조의 내적 역량이 완전히 소진된다고 본다. 역사발전의 주체로서의 하급 양반 및 중인 계층이 권력 장악에 실패했기에 갑신정변 이후의 개항기는 멸망으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안병태의 주장은 여전히 곱씹어볼 지점이 많다. 가지무라가 안병태의 책에 서평을 쓴 것이 있으시 관심 있는 이들은 참고하기를 바란다. 억압받는 재일조선인 경제사학자의 처절한 자기반성에 가지무라는 옷깃을 여미고 서평을 쓴다.
이 문제는 아시아에서의 근대로의 이행을 역사발전단계론에 입각해 파악해서 내적 역량의 기준을 세우고, 외압의 정도 또한 비교사를 통해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비로소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두 기준 간의 관련성과 관계에 대해서도 논증할 지점이 많다. 이런 문제를 정진석 비판을 위해 이렇게 쉽게 가지무라 히데키를 소환해 해소하려 한다면 동의하기 어렵겠다..
갑자기 '조선망국론'(정확히는 朝鮮自亡論)이 돌출하여 세상이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조선은 이미 스스로 망하고 있었고, 일본은 이를 주워먹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른 한쪽에서는 조선이 비록 망하고 있기는 했지만, 일본이 이를 이용하여 군사적으로 침략하여 강제병합한 것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주장에는 '조선(대한제국)은 이미 스스로 망하고 있었다'는 것이 공통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당시 조선(한국)은 이미 망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망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근대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식으로 나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일본의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선생이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그는 일본의 개항은 1854년인 반면, 조선의 개항은 1876년으로 20여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가지무라 선생은 또 개항 이후에 일본은 외세의 특별한 간섭이 없어서 명치유신과 그 이후의 개혁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해 나갈 수 있었지만, 조선은 청국과 일본에 의해 사사건건 간섭과 방해를 받아(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봉기, 갑오개혁 등) 개혁 사업을 제대로 진행해 나갈 수 없었다고 보았다. 즉 '외세의 간섭'(外壓)의 유무가 일본과 조선의 향후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본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가지무라 선생의 논리에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조선이 문명개화의 길로 본격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의 일이었다. 개화파들은 갑오개혁을 통해 문명개화의 개혁사업을 본격화했다. 또 재야의 유생들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국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급진적인 갑오, 을미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고종의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수립, 독립협회 해산 등이 있었고 개혁의 속도가 다소 조정되기는 했지만, 고종도 갑오개혁에서 제시한 문명개화의 길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시기에도 각종 관제 개혁이 이루어졌고, 징세제도, 경찰제도, 군사제도 개혁 등이 진행되었다. 특히 군사비에 많은 재원이 투자되었다. 그러나 의욕에 비해 실제 개혁은 의도한 만큼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혁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재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왕실의 조세 수입은 이전보다는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개혁 사업을 위해서는 크게 부족했다. 개혁을 담당할, 신교육을 받은 인재도 크게 부족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30년 정도 늦게 개혁을 시작했고, 그만큼 일본에 비해 국력이 크게 뒤져 있었다. 1900년 일본과 한국의 조세 수입은 거의 100배의 차이가 났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은 1890년대에 산업혁명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이 본격적인 개화의 길로 나아가기 전에, 아직은 국력이 취약할 때, 양국간의 격차가 심대할 때 서둘러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 같다. 일본은 한국 침략을 서둘러서 러일전쟁을 도발했고, 결국 1905년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5년 뒤에는 한국을 완전히 강제병합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조선(한국)에 개혁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1894년부터 1904년까지 10년에 불과했다.
정리하면, '한국은 스스로 망하고 있었다'는 논리는 사실에 맞지 않는다. 한국은 나름대로 문명개화를 위한 개혁의 길을 가고 있었고, 다만 일본에 비해 30년 정도 뒤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격차'가 그만큼 컸을 뿐이다. 1960, 70년대에도 일본과 한국은 약 30년 정도의 격차가 난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그 격차가 거의 좁혀졌다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격차'는 얼마든지 좁혀질 수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이는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1905년 이후 이미 한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입헌군주제를 모색하고 있었다. 또 1905년 이후 6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자비로 일본에 건너 갔고, 그들이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의 주역이 된다. 대한제국이 그대로 존재했다면, 1919년 즈음에는 한국에 공화제 혁명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대한제국이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바뀌었다면, 개혁 사업은 훨씬 더 속도를 낼 수 있었을 것이고, 한일간의 격차는 더욱 좁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이 쇠망한 원인은 부패한 왕조와 양반 때문이라는 주장은 일찍이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조선왕국>(1896)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도 <한반도>(1901)에서 '양반망국론'을 주장했다. 시데하라 타이라(幣原坦)가 쓴 <한국정쟁지>(1907)는 '당쟁사'를 연구한 것인데, 이후 아오야기 쓰네타로(靑柳綱太郞)의 <조선4천년사>(1917)에서 '당쟁망국론'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왕조, 양반의 부패와 무능을 강조하고, 당쟁을 망국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 조선망국론은 바로 일본의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였다(최혜주 교수의 책 참조). 그리고 이러한 망국론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어,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저널리스트들도 이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고,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런 논리는 한국 사회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은 이미 스스로 망하고 있었다'는 논리는 식민주의자들이 만든 것이기도 하고, 또 앞서 본 것처럼 역사적 사실과도 거리가 먼 것이라는 점을 결론적으로 지적해 둔다.

<참고문헌>
<梶村秀樹저작집> 제2권. "조선사의 방법", 明石書店, 1993
한영우 외,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 푸른역사, 2006
최혜주, <근대 재조선 일본인의 한국사왜곡과 식민통치론>, 경인문화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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