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하야오, 동아시아세계로의 귀환
먼저 집을 나간 놈이 일찍 집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못견디고 집을 먼저 뛰쳐나간 놈이 집의 가치를 알고 제일 먼저 집으로 돌아와 집을 새롭게 할지도 모른다. 미야자키하야오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든 생각이다.
굳이 성경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삶과 여행의 본질이 그거 아닌가. 집을 나가 온갖 풍상을 다 겪고 깨져봐야 옛집이 소중한 것을 알게 되고 집 밖 낯선 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여 귀환할 수 있다는 것.
그런 면에서 동아시아세계에서 ‘탈아입구’를 외치며 가장 먼저 서구의 과학기술과 정치제제를 받아들인 나라, 미야자키의 일본을 다시 보게 되었다.
미야자키는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반전 평화의 휴머니즘적 사회주의사상을 가지고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990년대 사회주의의 멸망과 특히 인종청소와 집단강간으로 귀결된 유고슬라비아 내전상황을 지켜보며 서구의 사상체계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이상주의는 역설적으로 파괴와 절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거기에 미나마타병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환경위기를 겪으며 생태주의에 기울어지게 되는데, 그 즈음 일본의 원류를 조몬시대, 활엽수림으로 이루어진 더 큰 아시아문화의 일부로 본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예술적 반전을 이루게 된다. 그는 조몬시대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시대로 봤다.
이러한 사상의 변화는 영화에서 만화로 이어지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제작과정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그는 1982년 마흔한살에 만화로 시작한 <나우시카>를 1984년에는 영화로 완성했고 이후에도 만화연재를 지속해서 만화가 완결됐을 때는 쉰셋의 중년이 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서구적 사상에서 탈피하여 동아시아적세계관으로 귀환하게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어둡고 고난에 찬 십여년의 나우시카 창작시간을 두고 그는 “어느 순간 나자신을 이해하게 됐다. 만화를 시작했을 때와 전혀 다른 자아가 됐다”고 말했다.
미야자키하야오연구자로 이름높은 수잔네이피어교수의 미야자키 연구서, <미야자키 월드>를 읽어보면 그가 나우시카와 함께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 자기발견의 과정을 거쳐서 동아시아적세계관으로 귀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네이피어에 따르면 "동아시아세계관은 모든 종이 공생하고 어떤 종도 다른 종들보다 우수하지 않은 애니미즘적 관점을 의미한다.”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영화속 초기 나우시카는 기독교적 메시아의 형상을 취했지만, 10여년의 고뇌 끝에 만화의 세계에서 성장한 나우시카는 인류중심의 메시아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연, 초자연, 인간을 중재하는 샤먼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진다.
네이피어에 따르면 “나우시카는 인간을 도덕과 환경의 유일한 수호자로 보는 기독교시각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미야자키의 동아시아적 세계관은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기독교사상과 달리 빛과 어둠 모두 인간의 내면속에서 상호작용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어둠과 오염과 황혼을 인정하지 않고 아침과 빛과 청정함에 대해 무모하게 집착하는 일차원적 이상주의의 위험성을 미야자키는 간파해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생명은 빛”이라는 성경적 확언에 대해 “아니야, 생명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야!”라고 반박하는 나우시카의 외침이 나오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동아시아적세계관은 나우시카 이후 <이웃집토토로>, <모노노케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서도 또렷하게 나타난다.
미야자키하야오의 세계는 일차원적 시각으로 보면 상호 모순되는 것들이 같은 평면에서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동아시아적 세계관에서 현실과 환상, 자연과 초자연의세계는 중심을 함께하는 여러층위의 동심원처럼 포개져있다. 초자연은 자연을 품고, 자연은 인간을 품고, 인간은 도구인 과학기술을 품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야자키의 세계는 다면적 다층적으로 깊어지며 그속에서 매혹적인 공존이 이루어진다. 도시와 자연, 기술과 초자연적 힘이 함께 살고 인간 내면의 자유와 역동성이 강렬한 도덕의식과 배치되지 않고 상승을 이룬다.
한 때 이병한의 <반전의 시대>를 읽고 그가 웅혼하게 그려낸 대서사시에 흔들린 적이 있다. 이변한은 서구의 황혼과 동아시아의 부상을 지적하며 중화세계로의 귀환을 예견한다.
하지만 지난 십여년간 주변국에 대한 중국의 대응과 일국양제, 일대일로의 변질, 집단지도체제가 시진핑독재로 귀착되는 것들을 지켜보며 동아시아세계로의 귀환은 결코 중화세계로의 귀환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그 이전에 전근대적 유교적질서를 새로운 세계질서의 대안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변화하는 인간본성에 부합하지 않은 상상력의 부족에 기인한 건 아닐까 여겨진다.
민주주의의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성을 인간 개인간에서 나라와 나라사이, 인간과 자연사이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화세계의 조공질서로 다시 가두려하다니.
동아시아세계로의 귀환은 중국과 북한같은 전근대적 사회주의벨트내에서 나올 수가 없다. 서세동점시대의 끝과 진정한 반전은 서구화, 세계화를 거친 후에야 열리는 길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평등에 기반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공동체적 질서로 체화한 후에야 반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 이전에는 과거로의 회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세계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한국과 일본의 집을 나간 탕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한 번도 집을 나가본 적이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 개인화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 전근대적 공동체주의를 고수하는 것으로는 결코 집을 새롭게 할 수 없다.
그런면에서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정치체제를 가지고 애니미즘에 기반한 정서적 지반을 공유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했으면 좋겠다.
세상이 불안하다. 종말론적 불안이 휩쓸고 있다. 환경론적 종말론뿐만이 아니라 현실화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우려되는 중국의 대만침공, 호전적인 북한의 핵무력 과시에서 비롯된 종말론이다. 미야자키의 세계관은 종말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거기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보는 것은 그의 종말론은 단념과 체념이 아니라 결국 “살아야 한다”는 위급상황을 피 토하듯 절규하는 외침이기 때문이다. 또 어느때보다도 극렬한 위험을 예고하면서 그가 회한에 차서 보여주는 우리의 대자연과 사람살이가 사무치게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야자키의 동아시아적 세계관은 무궁무궁 새롭고 매혹적이지만 수용하려 애쓸 필요가 없이 내 무의식 그대로여서 깊이 들어갈수록 편안하기 때문이다.
28You, Namgok Lee, Chee-Kwan Kim and 25 others
26 comments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