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4

이우연[전강수 교수에게 답한다 ①(2)] “강제징용”에 대한 오해와 왜곡

[전강수 교수에게 답한다 ①] “강제징용”에 대한 오해와 왜곡


[전강수 교수에게 답한다 ①] “강제징용”에 대한 오해와 왜곡
‘노예사냥과 같은 징용’이라는 일제시대 이미지는 허구라는 것이 바로 필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2019.08.22 19:16:16


[이우연 ·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전강수 교수(이하 전 교수로 칭함)가 우리가 최근 발간한 단행본 ‘반일종족주의’(이영훈, 김낙년, 김용삼, 주익종, 정안기, 이우연 저, 미래사)에 대해 지난 8월 14일, 오마이뉴스에 비판문을 기고했다.


필자(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가 집필한 식민지기 말기, 전시 조선인노동력 조달 문제, 소위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전 교수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강제동원 파트 집필을 담당한 이우연 박사는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관련 없는 사진으로 일제 강제동원의 참상을 알린 사실을 발견하고는 의기양양해진 모양이다. 마치 서 교수가 실수한 것이 강제동원이 없었다는 증거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우연 박사 스스로 인정하는 대로, 1944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8개월 동안 무려 10만 명 가까운 조선인 노동자가 징용, 즉 강제동원을 당했다.”



필자는 서경덕 교수가 이용한 사진이 엉뚱한 것이었다는 이유로 징용과 같은 “강제동원이 없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 문장조차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염전노예”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사역되던 1926년의 일본인들을 두고서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이라고 헛된 주장을 할 때 쓰인 그 사진, 그것이 지금도 초등학교 국정교과서, 중학교 검인정 교과서, 얼마 전까지 채택된 전체 고등학교 교과서에 사용되었음을 지적했을 뿐이다.





▲ 서경덕 교수가 조선인 강제징용 관련 사진이라면 공개했던 사진은 실은 일본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출처=유튜브 캡쳐


필자는 그에 이어 그 사진의 이미지가 한국인들이 피해자라며 위로금을 받기위해 제출한 그들 자신들의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의 수백 장의 사진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또 그 사진을 이용한 “강제노동” “노예노동”이라는 역사왜곡과 필시 그를 모델로 했을 “강제징용노동자상”을 비판했다. 이것이 서경덕 교수가 이용한 사진에 대해서 필자가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미리 이야기해 두는데, 필자는 전시노동력조달에 대한 서술의 앞부분에서 이미 “징용”의 그 자체로서의 강제성에 대해 서술했다. 전강수 교수는 필자의 서술을 보고서야 징용이 언제부터였는지 그것이 어떻게 강제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징용에 응하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엔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었고, 이는 명백한 강제였다. 필자는 분명 그렇게 썼다. 이 서술과 서 교수에 대한 비판 사이에 어떤 상관이 있는가?


일단 오늘은 전 교수가 필자가 마치 “강제적인 동원이 없었다”는 주장을 했다는 식으로 필자의 입장을 오해 또는 왜곡하였다는 문제에 대하여 말하겠다.


필자는 필자가 집필한 부분의 서두에서 노동자를 충원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징용은 법률이 규정하는 그야말로 강제적인 동원방법”이었다고 분명하게 서술했다. 그에 응하지 않으면 징역이나 고액의 벌금에 처해진다는 것도 설명했다.


전강수 교수가 주목한 부분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첫날밤을 치르려는데 군화발로 안방에 쳐들어와 끌고 갔다’거나, ‘논에서 일하고 있는데 관헌이 끌고 갔다’는 식의 “강제연행”은 기본적으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강제연행”을 두고 한국과 일본의 일부 연구자들은 “노예사냥”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필자는 제도적으로 볼 때, 다시 말해서 조직적이고 장기적이었는가 하는 면에서 볼 때, 그러한 방식의 노동력조달은 없었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 ‘반일종족주의’ 표지


전시 조선인노동력 조달은 1939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총 72만 4천여 명의 조선인이 이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징용은, 일본에서는 1939년 9월부터 바로 실시되었음과 달리, 조선에서는 1944년 9월에야 비로소 실시되었다. 징용 이전 만 5년 동안은 “모집”과 “관알선”이라는 방법이 취해졌다. 이런 방법으로 52만 명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모집과 관알선에는 법적 강제성이 없었다. 누가 가라고 해도 안가면 그만이었고, 처벌할 방법이 없었다. 당시 일본은 신문명(新文明)이었고, 특히 일자리, 그로부터 얻는 고소득으로 인해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행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전시노동력조달 정책을 시행하자 그에 호응하여 그 조선인들이 자발적 의지에 따라 일본행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모집과 달리, 상급 행정기관이 할당한 수의 조선인을 일선 행정기관에서 확보하는 관알선의 경우, 일부에서는 하급 기관의 일탈행위나 행정기구의 미비로 인해 원치 않는 조선인이 일본으로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원 제도를 벗어난 일탈이었던 것이었고, 전체의 흐름은 아니었다.

1945년 3월까지 실시된 징용을 통해 일본에 간 조선인은 최대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징용조차도 “강제연행”이나 “노예사냥”은 아니었다. 징용도 법규로 정한 절차가 있었다. 징용영장이 나오면 그것을 수령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나가 신체검사와 적성검사를 받고, 거기에서 통과하면 다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일본인 회사직원은 일본으로 그들을 인솔하였다.


1939년 이후의 전시 조선인 노동력조달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같은 기간에 전쟁과 무관하게 순수하게 자유의지로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무려 170만명 이상, 노무동원의 2.5배에 달한다는 점이다. 전시 노동력조달 이전부터 이러한 흐름은 뚜렷했다.


이상을 고려하면 전시 노동력조달이란, 벼락 치듯 어느 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눈사태”와 같은 흐름을 전쟁이라는 상황에 맞게 정돈하려한 정책이었다. 즉 ‘일본에는 가고 싶지만 험한 일은 피하려했던 사람들을 전시물자 생산으로 유도’하는 것이 정책의 근본적 목적이었다.


관알선에서의 부분적 일탈이나 징용의 강제성도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조차 4할 이상이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도주(조선으로의 귀환이 아니라)하였다는 사실도 이러한 해석을 지지해준다.


실상이 이러하기에 필자는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최소한 제도적으로 볼 때 그렇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필자가 ‘징용이 엄존했는데도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있는가? 이것이 왜곡이 아니면 무엇이 왜곡인가? 책을 읽었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대학생 수준만 되도 이해하고도 남을 내용을 유독 전 교수만 이해하지 못하였는가? 전 교수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필자의 논지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독자들이 무언가 모순을 느낄 것이다. 바로 “강제동원”이라는 개념에 애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모집과 관알선이라는 방법에는 제도적으로 강제성이 없었다면, 전시 노동력조달을 한 데 묶어 “강제동원”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 개념을 문제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력조달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필자가 “전시노무동원”이라고 쓰지 않고 “전시노동력조달”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다. “전시노무동원”에서 “동원”이라는 용어가 “강제성”이라는 강력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강제징용”이라는 표현도 오해에 기인하거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개념이다. 징용은 그 자체가 강제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징병을 “강제징병”이라고 하지 않는다. 국민개병제하에서 징병 그 자체가 강제이기 때문이다. 징용도 마찬가지다. 그저 징용이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도 왜 연구자들은 “강제징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세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는가?


다름 아니라, 징용을 “강제연행”, 곧 노예사냥의 이미지로 덧칠하기 위한 것이다. 징용 앞에 “강제”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노예사냥과 같은 징용’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당시에 징용은, 우리에게는 불편한 사실이지만, 합법적 국가정책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식민지기 말기의 징용은, 징병이 그렇듯이, 국제사회에서 전쟁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1920년대에 일본을 포함하여 주요국이 체결한 ILO협약은 전시 징용을 “강제노동”의 범위에서 제외해두고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반일종족주의 역사가들과 일본의 소위 “양심적”지식인들은 조선인 노동력조달을 범죄행위, 그것도 비인도적ㆍ반인간적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예사냥 또는 강제연행의 이미지가 필요했고, 그 결과 “강제징용”이라는 말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별 문제없이 널리 사용되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일반인들까지 널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기회가 되어 이번에 “강제동원”과 “강제징용”이라는 말 그 자체가 오해, 허구, 나아가 역사왜곡임을 말하였다. 다시 한번, 필자는 징용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그 강제성을 부정한 적이 없고, 필자가 부정한 것은 ‘노예사냥과 같은 “강제연행”이었음을 강조해둔다.


끝으로 연구자라는 동직자로서, 또한 함께 한국경제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덧붙인다. “우쭐해진 모양이다”, “의기양양해진 모양이다”, 이런 언사가 꼭 필요할까? 전 교수보다 몇 년 덜 배운 필자 입장에서, 수년 더 배운 것이 고작 이런 것인가 생각하니 씁쓸하고, 그 대상이 본인이라는 점에서 역시나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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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수 교수에게 답한다 ②] “작업배치에서의 민족차별”과 ‘노예적 일상’의 문제
‘작업배치에서의 인위적 민족차별은 없었다는 사실’과 ‘조선인 중에는 채탄부가 많았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아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등록 2019.08.26 21:38:03

[이우연 ·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전강수 교수의 말을 계속 옮겨보자.

“이 박사는 ‘반일종족주의’ 82-4쪽에서 조선인이 작업 배치에서 불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는 바로 뒤 85-6쪽에서는 위험한 작업을 맡은 조선인의 비율이 일본인보다 2배나 높았고 그 결과 사망률도 높았다고 말한다. 이건 자가당착 아닌가?”

타인을 주장을 비판하려면, 힘써 그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진정한 비판은 그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하지만 전 교수는 논리적 모순을 찾겠다는 욕심이 과하여 필자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조선인 전시노동자 중 가장 많은 것이 탄광의 채탄부였다. 그들의 작업은 2:1의 비율로 일본인들과 함께 작업조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작업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다.

채탄 작업에서는 작업의 안전과 효율을 위하여 경험이 풍부한 광부가 탄을 캐는데, 그들을 선산(先山)이라고 한다. 선산이 캐낸 석탄을 모아 담고 컨베이어까지 운반하는 사람들을 후산(後山)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은 선산, 조선인들은 후산이었고, 선산과 후산의 비율은 대체로 1:2였다.



▲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한국인들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이미지는 반일세력의 인상조작에 의해서 상당부분이 과장 왜곡되어 있었다. 사진출처=이승만TV

작업조의 구성과 역할분담은 첫째, ‘조선인을 의도적으로 위험한 작업에 배치했다’는 통설이 사실과 다름을 말해준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곳에서 일하는데, 어떻게 조선인만 위험할 수 있겠는가?

둘째, 조선인 채탄부가 일본인 채탄부보다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채탄부는 갱내부 중에서도 가장 센 완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그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일본인 청장년층은 모두 전장으로 나갔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이 조선인이었다. 일본 탄광회사들은 애당초 조선에서 그러한 작업에 맞는 건장하고 근력이 좋은 20대 젊은이들을 선발하였다.

탄광 사고율이 갱외보다 갱내가 높음은 더 이상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또 갱내부 중에서도 채탄부의 사고율이 가장 높았다. 채탄부는 낙반이나 가스누출과 같은 고위험의 막장(채탄면)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의 사고율이 일본인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인위적 차별의 결과는 아니었다. 탄광의 노동수요는 젊고 건장한 젊은이에 집중되었고, 조선의 노동공급은 그러한 수요에 부응하였던 것에 불과하다.

‘작업배치에서의 인위적 민족차별은 없었다는 사실’과 ‘조선인 중에는 채탄부가 많았다는 사실’은 이와 같이 모순없이 양립하였다. 전 교수는 탄광의 노동력 구성과 작업 실태에 대한 필자의 서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였기에, 이를 모순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동남아 노동자는 3D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두고 “차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연구자의 결과물을 평가할 때는 오류를 지적하려는 의욕보다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앞서야한다. 그래야 합리적인 비판이 가능하다.



▲ 영화 '군함도' 석탄 채굴 촬영 장면. '군함도'는 당시 광부들이 상의는 물론 하의까지 벗고 석탄을 캐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런 장면은 과연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

다음으로 일상생활의 문제다. 필자는 연구자의 통설이나 “국민적 상식”과 달리 조선인 전시노동자들은 일상에서 자유롭게 생활했다고 주장하였다. 전 교수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이우연 박사는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이 대단히 자유로웠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거가 어처구니없다. 밤새워 화투 치고, 과음하고, 특별위안소에서 월급을 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노동자가 고된 노동에 찌들어서 범한 일탈로 봐야지 어떻게 그것을 자유로 이해할 수 있는가? 조선인 노동자를 사용한 탄광업주로서도 그런 '자유'쯤은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 교수는 조선인 전시노동자들의 생활에 대한 학계의 통설을 모르는 것일까? 영화 ‘군함도’를 굳이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일반 국민들에도 익숙한 것이 ‘아우츠비츠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노예와 같은 감금생활’이라는 신화다. 높은 담장을 치고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망루 위에 군인이 서치라이트를 켜고 총을 들고 감시하고, 월장을 시도하는 조선인이 있으면 사격하고, 외출의 자유는 전혀 없는 노예적 생활‘을 그만 모르는 것일까?

필자가 바로잡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신화였으며, 극단적인 사례로서 주색잡기로 수입을 “모두 탕진할 정도로 그들은 자유”로웠다고 썼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전 교수는 이러한 취지를 살피려하지 않았기에 ‘일탈을 자유로 볼 수 없다’거나 ‘그 정도 자유는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었다’고 횡설수설하였다.

만약 필자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무자유의 감금과 노예적 구속의 증거를 제시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정직한 비판이다.

물론 필자는 이경우에 우선 피동원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입증한다면서 한국 정부에 제출한, 외출하여 사진관에 가서 근사한 옷을 빌려입고 촬영한 수백 장의 사진부터 먼저 보여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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