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대환의 근현대사 톡톡] 결국 우리는 ‘건국전쟁’을 이야기해야 한다
기자명 주대환
입력 2022.10.21
예를 들면 1972년 10월 17일, 유신 헌법이 공포되던 날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불안정한 존재였다. 이렇게 좁은 한반도 안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는 상태는 그리 자연스럽지도 않고, 오래 갈 수 있는 안정적인 상황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세계적인 냉전체제만 무너지면(!) 이런 부자연스런 상황은 종료되고 ‘통일’이 되리라고 많은 식자들이 생각하였다. 그것이 많은 지식인들이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진 배경이자 통일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이며, 수십 가지의 통일방안들이 나온 이유다. 나 역시 어른들 흉내를 내어 통일 수도를 철원에 두는 ‘독창적인(!)’ 통일 방안을 고안하였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면, 1972, 3년이야말로 전쟁이 끝난 지 20년밖에 되지 않았고, 바로 그래서 불안정하고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4•19혁명’(오늘 말하는 건국혁명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이후의 통일운동은 물론이고, 1987년 6월 이후의 통일운동도 결국 과거 지향적이고 낭만적이고, 반동적이었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에 머문 것이다.
거대한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동북부를 다 차지하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한반도의 남쪽 절반에 외롭게 매달린 대한민국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불안한 심리가 바탕에 깔려 있었으니, 식자들 사이에서 스위스, 오스트리아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가자는 논의도 심심찮게 자주 나왔다.
나라의 운명을 오직 미국에 맡겨놓은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하나의 온전한 나라로서 사유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반쪽짜리 나라라고 생각하였고, 불안한 존재이며, 긴 역사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태봉이나 후백제 같은 나라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술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대한민국은 아직 사학자(史學者)들의 연구 대상, 역사 서술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신에 민족사(民族史)를 썼으며, 한반도사(韓半島史)를 쓰고 싶어 했고, 분단체제론을 세웠다. 대한민국을 중심에 두고 역사를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민주화운동에 정통성 부여를 하기 위해 저널리스트들이 썼던 책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다.
나는 50년이 지나서야 영미(英美)가 지배하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통하여 에너지와 식량을 공급받는 번영하는 산업국가로서 대한민국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50년 동안 공부해서 깨닫게 된 사실을 나의 손자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제야 대한민국을 그 자체로 이해해야만 할 나라가 된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역사, 탄생의 이야기, 성장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써야 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역시 전쟁과 혁명을 통해서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야 한다.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 전쟁과 혁명의 결과 탄생한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닌가?
8년 동안의 사회혁명과 건국전쟁이 유혈(流血)이 낭자하고 희생이 컸던 만큼 그 과정에서 태어난 나라는 위대한 나라, 독특한 나라였다. 전근대(前近代)의 잔재가 철저히 청산•파괴된 나라, 말 그대로 만민(萬民)이 평등한 나라,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나날이 전개되고 치열한 생존경쟁이 전개되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한 덩어리의 ‘건국전쟁’으로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역사를 다루지 않으면 그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한 국민으로서, 한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의 주인, 시민으로서 공동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른바 ‘국민통합’을 이루고 국가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어떤 운명의 이끌림에 의해서든 하찮은 인연 때문이든, 사상 때문이든 대한민국의 건국 혁명•전쟁에 참여하고 헌신한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를 써야 한다. 특히 1945년부터 1953년까지 8년 동안 대한민국 편에 선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좋은 사람들이지만,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선악(善惡)의 구도로 세상을 보는 아동용 만화가 아니라, 성인(成人)을 위한 소설을 써야 한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개인의 나약함과 인식의 한계,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김구, 여운형, 박헌영 같이 유명한 사람뿐만 아니라 숱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대한민국의 반대편에 섰다.
그들을 굳이 반역자로 규정하거나, 증오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50년 전에는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두 세대가 지나면서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건국전쟁’을 이야기해야 한다.
주대환(周大煥)
1954년 경남 함안 출생,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플랫폼 '통합과전환' 운영위원장,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저서 <좌파논어>, <시민을 위한 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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