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8

Chee-Kwan Kim [에도, 사라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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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사라진 도시]

1.
몇 해전 동경에서 에도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박물관은 에도시대 물품들과 당시 서민들의 삶을 재현한 조형 등을 모아놓은 곳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18세기중반 에도의 서점 분포도를 담은 지도 한점이 내 눈길을 끌었다. 지도에 따르면 당시 에도의 서점은 크게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 지혼돈야 (地本問屋) 그리고 전문서적을 다룬 쇼모츠돈야 (書物問屋)로 나누어졌고, 개중에는 일반서적과 전문서적을 합친 서점들도 있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당시 에도에만 서점이 무려 205개 남짓 있었다는 사실인데, 에도시대 말기 후쿠자와 유키치 (福沢諭吉)의 “학문을 권한다”가 무려 30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는 일각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2.
“책읽는 사회”가 있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대중”이 상상되어야 하고, 사적 지식을 공적 지식으로 변환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 노력에 부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 읽는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전국시대와 명일전쟁 이후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 막부는 250년이라는 유례없이 긴 평화의 시대를 이끌어냈을 정도의 공고한 지배체제를 자랑했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리를 허용한 – 가령 조선과는 달리 막부는 일상의 영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물리적 규제가 현격히 적었다 - 탄력성으로 일본 사회를 활자사회로 변환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막부의 그림자통치 및 사회구조는 민간영역의 팽창을 견인하고, 이는 동시에 일본에서 급속한 속도로 진행된 도시화와 겹쳐서 일본 사회를 (활자로 이어진) 하나의 공동체라는 자각으로까지 도달하게끔 했다. 명치유신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민족정체성의 발견/개발은 이러한 발판 위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3.
반면 일본 각지 명소들을 소개한 책자를 손에 쥐고 열도관광에 심취하던 에도시대 일본인들에게 명치유신과 일본제국주의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매해 여름이면 책이 좀먹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말리던 일본인 처자들 또한 도쿠가와의 통치가 오래도록 – 비록 도쿠가와 막부가 자신의 성을 명명한 것처럼 “千代”까지 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더라도 -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혹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내게는 아끼는 에도시대 판화 한점이 있는데, 에도말기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広重)가 그린 “에도백경 (江戸百景)”중 5월5일 남자아이의 날에 코이노보리 (鯉のぼり)가 에도의 어느 강을 배경으로 하늘 위로 힘차게 펄럭이는 그림이다. 히로시게 판화, 특히 에도백경 연작을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어려서 일본에서 보았던 코이노보리의 향수를 자극하는 부분도 있어 이 판화를 소장하게끔 되었다. 하지만 막연히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판화가 언제부터인가 에도라는 이제는 사라진 도시, 활자를 기반으로 한 풍성한 문화를 자랑한 도시에 대한 애도의 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 그림을 쳐다보는 나만의 착각일 것이다.

덧. 조선에서 서민들을 위한 서점이 처음 생긴 것은 언제일까?  
조선시대에 교서관 따위의 관영서점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서점이라 할 수는 없고, “대중”이 “만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장”으로서의 서점이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것은 결국 일본통치시대로 추정된다. 
조선의 정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단면이다. 흔히 한반도의 역사의 전환점을 구한말로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성리학적 질서 하에서 역동성을 상실한 조선의 사회질서는 아무리 늦어도 청나라의 등장 후에는 철저히 파괴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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