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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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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3 October
아들이 보낸 책들을 공부하고 있다.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에 이어 왕후이의 ‘탈정치 시대의 정치’ ‘아시아는 세계다’를 보내더니 홍기빈이 쓴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보냈다.
동서양의 정치이론과 사상에 대한 책들을 교대로 보내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균형감 있게 교육시키려고 기획을 하는 것 같다. ㅎㅎ
내가 원하는 방향이라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치이론사상과는 좀 다른 범주일지 몰라도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사상이나 철학에 더 깊은 관심이 간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경제)이론사상이 이들과 깊이 있게 연관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나는 학자나 이론가가 아니라서 체계적인 저술을 할 능력은 없지만, 직관적으로 나름의 종합적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학자 두 분이 있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사람’과 ‘문명’이 인류 진화나 인류사의 진보의 핵심고리로 되고 있는 21세기에 위대한 사상을 전개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최근에 두 사람이 서로 교류하고 있는데, 서로 초기의 전공이 다른 만큼 큰 시너지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 역사에 오래 동안 큰 영향을 끼쳐온 유교(유학)에 대해 나는 젊은 시절 별로 관심이 없었다. 뒤늦게 논어를 통해 공자를 만나면서 공자의 사상 이념과 유교가 큰 괴리가 있게 변화되어 왔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역사에 특히 한국 역사에 부정적 역할을 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도덕군자(道德君子)는 위선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개념으로 비아냥 받는 단어로 들리거나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도 뭔가 현실을 중시하고 실용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 동안 한국이 거쳐야했던 역사적 과정(특히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화) 속에서 그렇게 된 것 같다.
내가 발견한 공자의 사상은 이런 것과는 사뭇 다르다.
공자의 중요한 창조 가운데, 군자(君子)와 예(禮)의 내용을 공자 이전의 관념으로부터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것에 주목하게 된다.
군자(君子)는 자기중심성을 넘어 모든 존재의 생명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려는 정신으로 진화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바꿨고, 예(禮)는 종래의 예의(禮儀)를 나타내는 말로부터 인간이 이루려고 하는 이상 사회를 나타내는 말로 그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어제도 개천절(開天節)에 대한 소회의 일단을 페북에 올렸지만, 우리 공동체의 건국 이념으로 알려진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 또는 在世理化)는 공자가 아마도 바랐을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고전(古典)을 중시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고조선의 건국(開天) 이념에 깊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종래의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보다 더욱 진취적인 목표를 갖는 나라로 되기를 바란다.
요즘 말로 하면 보다 진화된 사람들(君子)이 만들어가는 이상적인(禮) 새로운 문명 사회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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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is with Bo-ram Kim.
12 October at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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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계속 읽고 있다.
한 세기 전 스웨덴 모델을 만들어가는 사상 이론 실천의 궤적들을 학자가 아니라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저술한 책이다.
특히 한국의 좌파 진보주의자들이나 진보정당원들 나아가 좌우 보혁을 넘어 큰 꿈을 가지고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물론 지금 한국이 당면하고 있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은 당시와 다르다.
더 큰 이상을 그려볼 수 있는 물적 사회적 토대도 있고, 더 위험한 상황도 긴박하게 발생하고 있다.
동서 문명이 교차하고 역사의 굴곡이 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반도 특히 한국에서 인류사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갈 사상 이론 실천이 창조될 객관적 개연성은 존재한다.
이 개연성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결국 한국 사람들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구절 들을 소개한다.
‘이제 혁명가들에게 남은 선택은 둘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을 것인가? 혁명을 계속할 것인가?’-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낡은 것은 명이 다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그람시
‘ 우리 사회민주당은 향후 100년 동안 성취할 경제 강령은 가지고 있지만, 향후 10년 동안의 경제 강령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비그포르스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보아서 행동강령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권을 잡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행동 강령으로 결정되는 것이다’-비그포르스
사진은 어제 원광대에서 모임을 갖고 원광대 수목원을 산책하고 있는 지리산 정치학교 운영위원들.
나도 초대 받아 노(老) 세대의 열정을 토로했다. ㅎㅎ
1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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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1 October at 07:57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에 대한 연대는 출발점이다.
그 대척점에 있는 부와 권력과 명예의 늪에 빠져 기득권층으로서 알거나 또 모르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사회적 악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넘어 연민의 마음이 된다.
그것이 석가와 예수 그리고 공자가 걸은 길이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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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0 October at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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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주변 동아시아 정세 나아가 세계 정세의 큰 변수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변화 같다.
북한은 지금 붕괴와 변화 사이의 임계점에 이르는 것 같다.
북한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대해 한국의 좌우ㆍ보혁이 큰 범주에서 합의하는 것이 꽉막힌 정치를 벗어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철지난 민족주의나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대전환기의 세계사에 어떻게 주체적으로 대응할 것인지 중지衆知를 모아야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1민족 2국가'로 일반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을 제안해왔다.
통일은 의외의 변수로 성큼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의외의 변수'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은 정상적 대응이 아니다.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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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6 October at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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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모델의 중요성.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부터 시민이 주체가 되는 시민운동으로.
20년전 익산희망연대의 출발이었다.
아직 시민운동의 주류로 되지는 못하고 있지만,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꾸준히 넓혀가고 있는 지역 모델이다.
이제 '정치없는 정치운동(정치는 사라지고 권력투쟁만 남은)'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부터 새로운 정치의 지역 모델 출현이 요구된다.
'시민 주체의 정치운동'이다.
시장(자본주의)은 결함이 있다.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 국경 안에서는 강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다.
그런데 국가(중앙정부)의 정치가 실종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강제력만으로는 자본주의 시장의 냉혹함을 넘어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자본주의가 세계화(글로벌화)된 상태에서 국가 간의 관계에 강제력을 독점하는 기구가 없다.
그러다보니 세계적 범위에서 정치의 실종은 발달한 과학기술만큼 더 위험해졌다.(핵전쟁, 기후위기)
이제 정치의 복원(단순한 재정치화가 아니라 승화된)을 '지역 단위'에서 모색하는 것은 세계정치의 피할 수 없는 요구라는 생각이 든다.
즉 지역정치가 곧 세계정치라는 '평천하'의 지역 모델들이 요청되는 것이다.
몽상이 아니라 인류가 생존번영하기 위한 조건으로 되고 있다.
단순히 지역으로 분권되거나 자치를 확대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내용에 '정치'를 새로운 단계로 격상시키는 '재정치화'를 담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주체의 정치이고, 강제가 아닌 설득과 공감에 의한 사회권력(시민권력)의 창출을 의미한다.
요즘 지역정당이나 지역정치에 마음이 가는 것은 단순히 꽉막힌 중앙 정치를 뚫어보자는 것을 넘어서는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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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7 October at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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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정치代議政治의 생명선生命線은 그 대표성의 건강함에 있다.
지금 정치의 혼돈 내지 실종은 대표성의 위기와 직결되어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과학기술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그 실현 범위의 확대와 실현가능성이 높아졌다.
직접민주정치의 생명선은 주권자인 시민(무어라 불러야할지가 사실은 정체政體의 핵심테마다)의 의식수준과 정치문화다.
집단적확증편향이나 팬덤 현상, 물신의 지배와 이기주의(사익私益 위주)를 넘어서는 의식으로 진화해야 한다.
즉 자율성이 공익公益과 조화되는 의식이다.
권리중심에서 권리와 책임이 동반하는 것이 진정한 주권자의 태도라는 자각이 넓어져야 한다.
충분히 숙의熟議하는 정치문화가 발전하지 않고는 결국 다수결로 결정하는 직접민주정치는 대단히 불안정하기 쉽다.
현재의 대의정치가 갖는 대표성의 결함(위기)과 미래의 직접민주정치가 갖는 불안정성을 넘어서려는 진지한 시도가 지역정치나 지역정당 안에서 이루어질 때라야, 시대적 보편성을 띈 정치운동으로 될 것이다.
2 comments
남평오
지역정치의 이상은 노자때나 가능한 이상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신자유쥬의(이기성,자본의 노예, 약육강식)가 굳건한 사회를 두고 지역정당하는 건 지역에 강고한 기득권 세력만 성장합니다.
창조적 소수도 결국 지배적 소수로 변하는 것은 운동권 문화도 비슷하듯이 초기에는 기득권과 싸우더라도 금방 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Reply2 w
Namgok Lee
남평오 충분히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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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9 October at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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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낸다)'하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하게 된다.
무소주(無所住)는 진공(眞空)이고 생기심(生其心)은 묘유(妙有)다.
이 묘유(妙有)의 마음이 원하는대로 하면(從心所欲) 애쓰지 않아도 우주자연의 리(理)에 합치하는 삶을 살게 된다(不踰矩).
이렇게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런 목표를 가슴에 품고 설렘이 있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사람으로 태어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무소주(無所住)는 목표가 아니라 출발이지만, 그것이 어렵다.
인간이 가진 관념의 특성 때문이다.
여러 가지 자의식(自意識)들이 대자유(大自由)의 삶을 방해한다.
그러나 그것과 싸우기보다는 품어 안아서 넘어서는 길을 가야한다.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의 목표이고, 동시에 인간 공동체의 목표다.
이런 공동체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이야말로 인류(人類)의 정수(精髓)다.
나는 아직 멀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이런 설렘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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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0 October at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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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읽고 있다.
제 1장 ‘비그프로스 초기 사상의 형성’ 가운데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20세기 들어 독일 사민당에서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사이에 벌어진 수정주의 논쟁은 스웨덴 사민당에도 파란을 몰고 왔다.
(중략)
이 논쟁은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지향하는 목표에서 시작하여 활동의 방법, 다른 정치 세력에 대한 태도, 의회정치의 일상투쟁을 조직하는 관점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있었고 나아가 사민당의 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닿아 있는 핵심적인 것이었다.
(중략)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건을 집필하는 책임이 비그포르스에게 주어졌다. 당수인 브란팅은 아직 20대의 젊은이지만 놀라운 박식과 이론적 능력을 갖춘 비그포르스에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글을 집필하도록 직접 의뢰했고, 이에 비그포르스가 1908년에 집필한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은 이후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논쟁과 관련하여 스웨덴 사민당의 이론적 입장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버먼은 비그포르스의 입장 정리가 이후 스웨덴 사민당이 실천적인 조직운동과 정책과제에 천착하면서도 마구잡이식 실용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 지향점으로의 미래사회의 비전을 움켜지는 태도를 가지게 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요컨대 실천 없는 이론에 빠져버린 독일 사민당과 이론 없는 실천에 매몰되어 버린 영국 노동당이라는 두 개의 극단 사이 다른 길로 빠져 나가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파업이 실패로 끝나자 사회민주당 내에서도 계급노선을 포기하고 윤리적 이상을 호소하여 공적인 여론을 움직이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한 사람이 린드하겐이었다.
(중략)
비그포르스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1910년 집필한 <사회주의와 도덕>을 통해 신랄한 일격을 가한다. 린드하겐이 말하는 도덕과 양심은 ‘어느 계급의 도덕과 양심’인가? 그리고 그 도덕과 양심을 사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법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들이며, 이 개인들의 도덕적 윤리적 판단 기준은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각자의 물질적 계급적 이익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보편적 도덕과 이성이 본디부터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진한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비그포르스의 생각이었다.
비그포르스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목표가 온 사회가 사회민주주의의 윤리적 이상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단 그 출발점은 계급투쟁이라는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내걸어야할 윤리적 이상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상식’이 아니라 바로 노동계급의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윤리적 이상을 온 사회가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과정이 바로 노동운동이며 사회민주주의 운동이다.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스스로 자본가들보다 더 높고 더 이상적인 도덕을 사회 성원 모두에게 내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비그포르스가 보기에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그저 막연하게 좋고 진보적으로 보이는 정책을 두서없이 진행해나가는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자와 근로대중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서 간절히 열망하는 윤리적 이상을 추출해 모든 사회 성원의 동의를 얻는 가운데 그러한 윤리적 이상을 담은 사회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최대한 총체적으로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노동운동과 사회민주주의가 주어진 현 상황에서 실현해내고자 하는 ‘잠정적 유토피아’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후 한 세기 동안 세계는 러시아 10월혁명, 1, 2차 세계대전, 미쏘 냉전, 사회주의의 붕괴 등을 거쳐 왔다. 그리고 과학기술도 엄청난 발전을 했고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테크 이상주의’가 과학기술 특히 인터넷이나 인공지능을 통해 예측하기 어렵지만 수평사회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가하면 그 동안 자본주의 세계화가 나타내었던 모순이 인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팬데믹현상이나 기후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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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 이후 한 세기의 변화를 거치며 지금의 한국과 세계가 있다.
지금 한국 정치의 혼돈을 보며, 이 글을 읽는다.
20대의 청년 비그포르스가 스웨덴 모델을 만드는데 기여한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정치를 생각하게 된다.
어디선가 21세기의 비그포르스 같은 젊은이들이 한국의 현실이라는 토양 위에 ‘리얼 유토피아’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이 책을 읽고 있다.
‘리얼 유토피아’는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 한 세기 후 에릭 올린 라이트라는 학자가 저술한 책 이름이기도 하다.
Namgok Lee is with Bo-ra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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