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3

홍승표의 태극기와 한국교회 < 연재 < 뉴스앤조이 [2][9-18]


9] 종로통의 태극기와 차별 극복의 모뉴먼트
[태극기와 한국교회] 만민이 평등한 대동 세상을 꿈꾸는 태극기의 역설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11.01


"19세기 중엽 우리나라 연해에는 수많은 외국 군함들이 출몰했는데 그 군함에는 한결같이 국기와 소속을 알리는 기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국기가 특정한 나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과 개항 조약을 맺을 때 일본에서는 국기를 내걸었으나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 사절이 조선의 국기는 무엇이냐고 묻자 오경석吳慶錫이 임기응변으로 강화 연무당 여기저기에 그려진 태극을 가리키며 '저것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이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태극은 건축물이나 생활 도구 등에 많이 그려져 있어 그 말이 억지는 아니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 : 500년 왕국의 종말>, 한길사, 2003, 225-226.)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근대적 의미의 외교 관계나 조약, 국가 개념 및 상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이때가 태극이 구한말 조선과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그 방향이 대략 결정된 시점이었다. 변화하는 국제 현실과 제국주의의 발호에 무지한 한 관료의 임기응변적 손짓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민중도 <주역>과 <태극도설> 같은 철학서의 심오한 이론과 의미까지 헤아리진 못했겠지만, 태극에 담긴 천지 음양, 태극이 남녀 귀천이 조화하고 평등하는 대동大同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몸과 삶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태극은 개항기 이후 한국 사회와 민족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채택되고 민중의 생활 속에 깊숙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대한성공회 강화읍교회 대문에 그려진 십자가와 태극 문양.
역설적이게도, 구한말 태극기는 외적으로 조선 500년이 추구하고 구축해 온 지배 가치와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지만, 내적으로는 억눌리고 잠들어 있던 민중 역할에 대한 각성과 대동 세상을 향한 욕망을 자극해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달음박질치게 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반상의 차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제가 국가 시스템과 사회제도로 고착된 조선 500년의 끝자락에 서서 이러한 태극 사상과 대동 세상의 구체적 실현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에는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도도히 흐르는 대동사상과 그 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大道之行也,天下爲公 (대도지행야 천하위공) 選賢與能, 講信修睦 (선현여능 강신수목)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고인부독친기친 부독자기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사노유소종 장유소용 유유소장 환과고독폐질자 개유소양) 男有分, 女有歸 (남유분 여유귀) 貨惡其棄於地也, 不必藏於己 (화오기기어지야 불필장어기)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역오기불출어신야 불필위기) 是故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시고모폐이부흥 도절난적이부작 고외호이불폐) 是謂大同 (시위대동)"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천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현명한 자를 등용하고 능력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이 아닌 남의 부모도 사랑하며, 자기 자식뿐 아니라 남의 자식에게도 자애롭게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재주와 능력을 펼칠 수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혼자 남겨진 남편, 부인,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들은 모두 각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여자들은 돌아갈 곳이 있도록 한다. 물건은 아무 곳에 두더라도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스스로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음모를 꾸미거나 간사한 모의가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횡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문을 열어 놓고 닫지 않으니 이러한 사회를 일러 '대동 세상'이라 한다."]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그렇게 구한말 태극기의 게양과 함께 조선 500년 동안 억눌린 어깨를 펴며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새롭게 드러낸 상징적 인물이 바로 백정 출신 기독교인 '박성춘朴成春'(1862~1933)이었다.

1894년 그가 중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아들 봉출(박서양)이 곤당골 예수교학당의 무어(S. F. Moore) 선교사에게 아버지의 응급 상황을 알렸고, 무어는 당시 고종의 시의侍醫로 활동하고 있던 에비슨(O. R. Avison)을 대동해 왕진 치료를 해 주었다. 마침내 기사회생한 박성춘은 크게 감동하여 곤당골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백정의 출석에 반발하는 양반들의 모습을 맞닥뜨리게 된다.


"선교사 무어 목사는 여러 조선인들을 일요일마다 교회에 모이게 했는데, 박성춘도 이 모임에 들어갔다. 물론 이들은 갓도 쓰지 않은 사람들이 끼어드는 것을 보고 눈을 흘겼으며, 백정의 친구들이 집회에 많이 나오기 시작하여 이 모임이 흔히 백정교회라 불리게 되자 몹시 당황하게 되었다. 무어는 양반들과 협의하고 교인인 백정을 교회 밖으로 몰아낼 수 없다고 했으며, 결국 양반들이 교회에서 나오기로 결정하여 교회가 번성하게 되었다." (O. R. 에비슨, <구한말 비록>, 대구대학교출판부, 1984, 193-196.)

무어 선교사는 기독교의 '만민 평등' 가치를 내세워 백정들을 교회에서 내보내 달라는 양반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에 반발한 양반들은 인근 홍문섯골교회로 분립해 나갔다. 이렇듯 선교 초기 기독교는 조선 500년의 고질적인 신분제도와 차별, 배제의 인습과 문화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안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었다.

백정 출신 박성춘이 장로로 장립된 승동교회 신축 예배당 모습(1913년 준공).

기독교의 '만민 평등'의 정신에 고무된 박성춘은 이후 백정 해방 운동을 펼쳤다. 갑오개혁으로 명목상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백정을 향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여전하여 백정은 호적도 없고, 상투도 틀지 못하며, 갓이나 망건도 쓸 수 없었다. 당시 백정들 중에는 정부의 칙령만을 믿고 도포를 입고 외출했다가 구타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1895년 콜레라가 만연했을 당시 방역 책임자로 활동했던 에비슨은 정부를 대표한 유길준의 감사 편지에 회신하며, 백정도 상투를 틀고 갓을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박성춘도 무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 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해 5월 13일 백정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칙령이 다시 한번 반포되고 11월에는 전국에 방이 붙었다. 이에 환호한 박성춘은 '500년 동안' 금기시되었던 의관衣冠을 갖추고 여러 백정들과 함께 하루 종일 종로 거리를 행진했다. 얼마나 좋았던지 잘 때도 갓을 벗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박성춘의 이러한 경험은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서, 새로운 대동 세상의 시민 사회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898년 3월 10일부터 독립협회 주최 하에 외세의 침탈과 이권 개입, 간신들의 전횡과 부패에 대해 비판하는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가 수개월간 개최되었다. 이 당시 첫 모임에만 한양 시민 1만 명 이상이 종로 거리에 운집해, 정부의 정책과 외세의 침탈 행위에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더 적극적인 자주독립과 사회 개혁 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만민공동회의 군중집회는 10월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10월 29일 정부 관료들도 함께하는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의정부 참정 박정양을 비롯한 법무대신, 탁지부대신, 중추원 의장, 한성부판윤 등 정관계 거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러한 대규모 시국 집회의 개막 연설자로 단상에 선 인물은 바로 백정 출신 박성춘이었다. 그는 조선의 천민 출신으로, 정부의 관료들과 시민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1898년 10월 29일 종로에서 개최된 관민공동회에서 개막 연설을 하는 박성춘. 그는 백정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정부 관계자와 한양 시민들 앞에서 시민의 권리와 책임에 대해 역설했다. 그의 등 뒤에는 당당하게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하는利國便民 길은 관민官民이 합심한 연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햇볕을 가리는 천막(차일遮日)에 비유하자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하면 그 힘이 심히 견고(공고鞏固)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독립협회에서 주최한 관민공동회, 박성춘의 개막 연설 중에서, 1898. 10. 29.)

이 연설은 불과 수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인 일개 백정이 조선 500년 뿌리 깊은 신분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사회의 새로운 출현을 양반 관료들과 시민들 앞에서 당당히 외친 한국 근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였다.

만민공동회의 노력으로, 마침내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원칙으로 황제에게 제출된 헌의 6조를 관철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자주성을 가진 군주 주권국가를 확립하되 의정부를 폐지하고, 서구의 상원의회와 같은 중추원을 국가 의결기관으로 설립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일을 비롯해 재정 기관의 탁지부 일원화, 공정한 재판제도 확립, 외세의 배격, 부정부패 척결, 공정한 인사 제도 도입 등 정치와 사회제도의 개혁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이러한 개혁 성과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의회(중추원) 설립이 아닌 황제 폐위와 민주 공화제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전단을 뿌리고 고종에게 모함했다. 이에 놀란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으며, 정치 깡패(보부상)들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진압하고는 결국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했다.

독립협회와 일진회. 왼편의 독립관은 청나라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을 1896년 독립협회가 개수하여 사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회의를 개최하거나 시국 집회, 대중 계몽 강연회 등을 열었다. 한편 독립관 옆 팔각형의 양관에 자리를 잡은 일진회는 친일 매국 단체로 조선의 문명 개화를 촉진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에 앞장섰다.

이렇게 박성춘이 개막 연설에 참여한 관민공동회는 한국 사회에 자주적 민주 시민사회의 희망을 보여 주었지만, 기득권에 눈이 먼 황제와 수구파들에 의해 그 꿈이 짓밟히고 말았다. 하지만 백정 박성춘은 태극기가 게양된 관민공동회 단상에 올라, 종로 거리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 한양 시민들을 향해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자신의 이름과 생명을 걸고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참하겠다고 외쳤다. 이 연설은 이미 한반도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성춘의 아들 봉출(박서양)은 이후 에비슨 박사의 제자가 되어 세브란스의학교 첫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첫 한국인 교수가 되었는데, 백정 출신 교수의 부임 소식에 불만과 저항의 태도를 보인 당시 의학생들에게 그가 첫 강의 단상에서 했던 일성一聲 은 다음과 같았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왼쪽)의 도움을 받아 에비슨이 수술하는 장면(오른쪽)을 찍은 유리 건판 사진(등록문화제 제448호)이다.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십시오."

평민과 양반 출신 학생들에게 무시와 냉대, 조롱을 받았던 그는 기독교 신앙을 통한 정체성과 존재의 회복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고, 이후 만주로 이주해 한인 이주 사회를 위한 의료 및 교육 사업, 독립운동과 독립군 지원 사업을 이어 갔다.

이렇듯 백정 출신 박성춘과 박서양 부자의 삶에 기독교와 태극기는 그렇게 아로새겨져, 그들의 인생이 더 넓은 터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성취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 되었다.
서린동 한성감옥의 개종자들


백정 박성춘이 1898년 만민공동회 개막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역사적인 자리에는 현재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영풍문고가 들어서 있는 서린동은 사실 조선 시대 죄수들을 수감하던 한성감옥(전옥서)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조선 후기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도 다수 수감되거나 순교했으며, 외세 침탈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에 저항한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들도 이곳에서 처형(1895년 3월 30일)되었다.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 사상은 유교의 차별적 세계관을 국체로 숭상하는 이들에게는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처형되기 직전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새벽에) 남몰래 죽이느냐?"고 관원들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부패하고 무기력한 당대 조선의 국가권력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처형도 은밀히 숨어서 진행할 수밖에 없을 만큼 허약하고 비겁했다.



전옥서로 끌려가는 전봉준의 모습(위)과 현재의 전봉준 동상(아래).

전봉준 장군의 처형 이후 창설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부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근대 민주주의를 소개하면서 개혁적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수구 세력들이 고종을 설득해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이에 연루된 이들을 한성감옥에 수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곳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던 인사들은 내부 토목국장을 역임했던 남궁억, 개화파 원로 유길준의 동생인 유성준, 시위 진압 책임이 있는 경무관인데도 오히려 독립협회를 지지했던 김정식, 처음부터 독립협회 핵심 세력으로 참여했던 이상재와 그의 아들 이승인, 법무협판을 지낸 이원긍,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 후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배재학당 학생 신흥우·박용만 등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수감 당시 개화 인사들 모습. 맨 왼쪽의 이승만은 중죄수 복장으로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김정식, 이상재, 유성준, 홍재기, 강원달. 뒷줄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한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당시 개화파 양반 엘리트들의 집단 투옥은 한성감옥 내에 적잖은 변화를 불러왔다. 1902년에 새로 부임한 김영선 감옥서장은 이승만의 요청을 수용해 옥중 도서관을 설치했다. 독립협회의 양반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언더우드·아펜젤러·벙커·헐버트 등의 선교사들은 이때를 양반 엘리트층에 대한 전도 기회로 삼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서적을 한성감옥에 넣어 주었다. 다양한 서구의 과학·철학·역사·정치 관련 서적뿐 아니라, 한글 성경과 기독교 서적도 함께 제공되었다.

한성감옥을 찾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승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03년에 이르러 이상재와 이승만, 김정식, 박용만, 유성준 등 양반 유학자들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읽기 시작하면서 감옥 내 집단 개종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때는 마음속 깊이 정치적 야망과 정적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웠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집단 회심은 정치적 야심가의 모습에서 겸양의 신앙인으로 스스로를 변모케 했다.

집단 개종한 이후 한성감옥의 수감자들. 이전보다 표정이 밝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다.


"이 해(1903년) 12월 말에 피수된 여러 동지들이 모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 오늘날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얻음은 모두 이근택 씨(당시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한 정적 - 필자 주)의 덕이라 출옥한 후에는 그를 심방하고 치사함이 옳다 하고 원수 갚을 생각이 이같이 변한 것을 일동이 감사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유성준, '밋음의 동기와 유래' <기독신보>, 1928. 7. 11. 5쪽)

1903년 한성감옥에서의 양반 엘리트 그룹의 집단 개종 사건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주로 민중 계층을 중심으로만 수용되던 상황에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개종한 이들은 이후, 한국교회의 충실한 지도자로서, 구국 계몽 운동의 선구자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후 수립되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주축 멤버들이 모두 이들 옥중 개종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피맛길, 그 차별의 역사를 끊고
우뚝 선 새 시대의 모뉴먼트


서울 종각의 옛 성서공회와 예수교서회 자리 바로 맞은편에는 한국 기독교의 청년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했던 서울YMCA가 위치해 있다. 과거 조선 500년 신분 차별의 상징적 길이었던 종로 뒷골목, 피맛길. 사대부들의 가마를 피해 민초들이 걸어야 했던 저 500년 묵은 옛길의 질기고 질긴 숨통을 단숨에 끊어 버렸던 그 건물이 바로 오늘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서울YMCA회관이었다. 1908년 준공한 이 건물은 마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기념비(Monument)와도 같았다.

1908년 준공 초기의 종로 YMCA회관. 현관 초입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이 새 회관은 서울의 심장부에 우뚝 서 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진고개의 천주교당과 덕수궁을 빼놓으면 이 회관은 서울에서 가장 훌륭하고 출중한 건물이다." (J. S. Gale, Korea in Transition, 1909, 238-239.)

기독교청년회(YMCA)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청년들의 세계적 연대체로서, 기독교 정신이 사회 속에서 구체적 모습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1844년 창립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한국의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이후 1904년부터 미래 청년 지도자들을 양성키 위해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이라는 교육기관도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YMCA 운동을 주도한 헐버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다 살펴봅시다. 한국의 개신교 기독교인이야말로 이 강산의 가장 총명하고 가장 진취적이며, 가장 충실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중략) 그들의 비전을 흐리게 하는 올가미를 걷어 버리게 하고, 그들의 희망을 밝혀 주는 데에는 뭐 대단한 캠페인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 문을 연 YMCA가 도와주면 됩니다." (H. B. Hulbert, The Education Needs of Korea, The Korea Review, 1904년 10월호, 451.)

임시 건물에 교실을 마련한 청년회학관은 처음에는 야학 형식으로 150여 명의 학생들에게 주간 3일의 교육을 실시했으며, 1906년에 이르러 수강 인원의 증대로 학관이 정식으로도 발족했다. 청년회 학관에서는 기독교와 신문물을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배우지 않았다. 실용적 기술(설계, 목공, 염색, 섬유, 도자기, 비누, 피혁, 인쇄, 양화, 사진, 금속가공 등)과 실업교육도 병행했다.



YMCA회관의 기계공작(위), 목공 실습(아래) 광경.


"금개今開한즉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각 학교를 창설하고 국내 청년들을 교육하는데 그중其中에 공업교육과를 특설特設하고 과목과 연한을 규정하여 물품 제조하는 학술을 교습하여 (중략) 한국의 부흥지원富興之原이 재차在此할지라. 전국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이 숙대어시孰大於是리오. 차此는 본국의 유지제씨有志諸氏와 외국의 인애제군자仁愛諸君子가 병심동방幷心同方하여 진실주거眞實做去함이니 상천上天이 한국을 권애眷愛하시는 은총이 아니면 영유시야寧有是也리오." (이상재, '富興說', <황성신문>, 1906년 11월 7일)

직접 기술을 연마하는 공작 실습 참여를 선뜻 내켜 하지 않던 양반 출신 청년들도 결국 노동 실습에 참여하게 되었고, 청년회에서 실시하는 야구·축구·농구·배구 등 다양한 스포츠 게임을 통해 노동과 체육의 가치와 의미를 깨달아 갈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통해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이와 차별은 서서히 불식되어 갔다.

YMCA의 이러한 사회변혁적 활동에는 한국 강점을 노골화한 일제에 대한 항일 의식과 애국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1907년 1월, 250여 명이 참여한 YMCA 월례 회의를 은밀히 참관한 일본공사관 직원의 보고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온다.


"애국가, 이 창가唱歌는 비애悲哀다. 즉, 그 뜻은 우리나라 삼천 리 강토疆土와 500년 종사宗社를 천주天主에 빌어 독립을 빨리 회복해 주십사고 노래하는 것으로서, 듣기에는 눈물이 나도록 (중략) 기도하고 폐회하였다." (일본공사관 편책, 1907년 기밀 서류철 갑 사법계에 수록된 일련의 청년회 상황 보고, <한국 독립운동사 1>, 401쪽)

위 문서에서는 의사부議事部 보고와 이상재 선생의 연설, 신임 학감 및 공업 교사 그레그(G. A. Gregg) 소개 등의 진행 과정이 묘사되고 있는데, 신임 학감 소개에 덧붙여 "우리들은 잘 공부하여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학감의 마음에 보답할 것을 명심하여야 하며, 또 우리는 (중략)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특별히 강조해 기록했다. 당시 YMCA의 청년운동, 교육 운동의 목표와 정체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YMCA학관은 보통과·어학과·공업과·상업과·야학과 등으로 나뉘어 다양한 근대 교육을 시도해 나갔으며, 개교한 지 3년이 지난 1907년에 이르러서는 학생이 1800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1906년부터 1907년 6월까지 10개월간의 통계에 의하면 축구 경기가 56회, 실내 체육 경기가 33회 개최되었으며, 부족한 체육 시설에 대한 아쉬움이 수시로 토로되었다.

또 1906년부터 7년까지 성경연구회의 모임 횟수가 크게 증가했으며, 여병현, 윤효정, 이승만, 안창호, 윤치호, 이상재, 이준, 최병헌, 전덕기, 김규식, 지석영 등이 연사로 참여한 종교 집회와 강연회에는 회마다 평균 16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1907년 세계적인 선교 운동가이자 국제YMCA 학생부 책임자였던 존 모트(J. R. Mott)가 내한해 집회를 진행했을 때에는 6000여 명의 관중이 모여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창단 초기의 YMCA야구단 모습.

1909년 삼선평三仙坪에서 개최한 황성기독교청년회 주최 축구 대회. 축구 대회 운동장에는 십자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1903년 11월 향정동(현 인사동, 태화빌딩 자리)에 처음 임시 회합 장소를 마련하고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온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날로 성장하는 청년 사업의 요구에 더 이상 회관 건축을 미룰 수 없었다. 정령正領 벼슬을 한 현흥택玄興澤의 24칸 기와집(지금의 종로2가 9) 기증으로 대지가 마련된 후, 중국 상해의 알제비스리(Alger Beesly)사의 건축사 퍼시 비스리(Percy M. Beesley)가 1906년 3월 서울을 방문하여 설계와 건축 관련 조사를 실시했다.

건축 경비는 국내외 모금으로 충당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의 4만 달러 쾌척과 각계각층의 위정자들과 시민, 독지가들의 후원을 통해 1907년 5월 중순부터 공사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설계 감리는 돈함(B. C. Donham)이 맡았고, 공사는 헨리 장(Henry Chang)이라는 중국인이 맡았다.

YMCA회관 건축을 위한 모금 홍보 사진. 태극기와 기부금이 어우러져 있다. 월간지 <THE WORLD'S WORK> 1908년 10월호에 소개된 사진이다.

1907년 기공식 이후 건축이 한창 진행 중인 YMCA회관.

마침내 1907년 11월 14일 오후 2시, 신축 YMCA회관의 상량식이 개최되었다. 당시 나이 11세의 황태자 이은李垠과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대신 이완용과 각부 대신들, 중추원 칙임관들, 일본군 조선주둔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내외국 고등관들과 외교 사절단, 미합중국 주한 총영사, 내한 선교사들, 한국교회의 지도자 등이 건평 600평, 벽돌 3층의 위용을 갖춘 종로의 신식 빌딩 건축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조선통감과 일본군사령관의 밀착 호위(혹은 감시)하에 참석한 황태자는 신화新貨 1만 원을 하사하고 '一千九百七年'이라는 여섯 글자를 적어 주었고, 황태자와 통감은 나란히 회관 입구의 초석 둘을 하나씩 정초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기독교 신문 <예수교신보>는 황태자의 글씨에 대해서만 보도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정초식에 참가한 황태자 이은(1907년, 왼쪽), 황태자가 직접 쓴 '一千九百七年' 정초석의 현재 모습(오른쪽).


"그때에 황태자 전하께옵서 금 일만 환을 하사하옵시고 예필睿筆로 일천구백칠 년 여섯 자를 크게 쓰셨는데 여러 손님들이 다 들러 구경하더라." (<예수교신보>, 1907년 11월 27일 자.)

이 글씨가 적힌 정초석은 6·25 전쟁 당시 폭격에도 살아남아, 1961년 재건한 서울YMCA회관 입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을사늑약 이후 망국의 그늘이 드리운 종로 하늘 아래 새 시대의 이상과 한국의 독립 자주를 외치는 청년운동 단체 회관 기공식에 참가한 이들의 면면은 그로테스크(grotesque)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마지막 안간힘으로 몸부림치는 청년들의 치열함과 처연함이 교차하는 자리. 절망이 절정에 이른 곳에서 극한의 희망을 쏘아 올리던 역설의 자리였다.



학관 학생들이 도열한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의 모습으로, 입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위). 현재의 서울YMCA 빌딩 전경(아래).

1908년 12월,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이 낙성하여 개관식을 거행했다. 개관 예식은 3일간 지속되었으며, 서울의 수많은 교회와 학원에서 본 회관의 개관 축하 행사를 가졌다. 새 회관은 960평의 부지와 약 600평의 건물로 강당, 체육관, 교실, 도서관, 공업실습실, 식당, 목욕탕, 사진부, 사무실, 소년부 등 다양한 기능과 공간을 구성했다. 게일 선교사는 1905년 선교 편지에서 YMCA회관의 의미와 건축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YMCA회관이 일반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YMCA는 이제 시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 회관은 상가와 관가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고 대지는 훌륭한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나가 쉽게 찾아올 수 있다. 무엇보다 흐뭇한 일은 많은 사람들이 이리로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1년 동안 내쳐 더 큰 회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제 YMCA를 통하여 나의 다년간의 소원이던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천민의 자식, 상인들의 자식, 선비 또는 양반들의 자식이 한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밤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질레트 씨가 별도로 각종 교육사업과 강연 등에 관한 보고를 하였거니와, 모든 사업을 하든지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기도를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성경 공부는 계동桂洞(북촌의 한 동리)에 사는 양반집에서 금요일마다 한다. 그 당시 한성판윤이던 김 씨는 성경 공부를 하는 데 자기 집 사랑채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계동에서 찬송가 소리가 나기는 이것이 처음 일이며, 성경 공부를 하는 것도 이것이 처음이었다. (중략)



지금 이때야말로 한국이 천시天時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YMCA는 이 도시 청년들의 유일한 집회 장소로서 또 실질적인 사교 장소로서의 의의가 크다. 미신은 서구적인 세력에 밀려 무너져 가며, 국민 생활은 전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청년들이 천시를 만나고 국민 생활이 변하고 있는 것, 일평생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일하던 애국자들에게는 다시없는 기쁨이요, 힘이 아닐 수 없다. 신자들이 이처럼 많이 모여드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이 이 나라를 버리시지 않으며, 도리어 큰일을 예비하사 YMCA를 통하여 그의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J. S. Gale’s Letter to the International Committee, YMCA, New York, on June 1905)

게일의 증언대로 "천민의 자식, 상인의 자식, 양반의 자식"이 차별과 구별의 구습을 극복하고, 기독교의 복음과 신앙 안에서 민족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한자리에 앉고, 뜻과 힘을 모으기 시작한 그 자리. 종로통 피맛길의 심장부에 새 시대의 기념비(모뉴먼트)로 우뚝선 YMCA회관에는 그렇게 자랑처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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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못다 이룬 꿈, 태극으로 새기다
[태극기와 한국교회] 3·1 운동의 유산과 태극에 투영한 희망의 신앙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12.10 



"그날 우리의 아들이 태어났다.



의식이 반쯤 돌아온 상태에서 나는 병원에서 커다란 동요가 일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문들이 열렸다 닫히고, 귓속말과 고함 소리,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발끝을 들고 조심조심 걷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내 방에 살금살금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어느 순간 눈을 떴더니 간호사가 아기가 아니라 종이 뭉치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그 서류를 내 침대의 이불 밑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바깥 거리도 온통 소란스러웠다. 간간이 비명 소리와 총성이 들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만세, 만세' 하고 외치는 커다란 함성이 계속 반복되었다. '만세!' 그 소리는 거의 포효와 같았다." (메리 린리 테일러,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책과함께, 2014, 225.)

3·1 운동 당시 갓 출산한 산모였던 메리 테일러(Mary L. Taylor)의 자서전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그의 남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는 1896년 광산업자로 내한했다가 UPI 통신사의 임시기자직을 겸하게 되어 3·1 운동을 가장 먼저 세계에 타전했다. 이후 원한경 선교사(H. H. Underwood), 미 영사 커티스와 함께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3·1 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학살 현장을 취재해 세계에 고발한 한국인의 선한 벗이자, 양심적인 언론인이었다.
이 부부의 외아들 브루스가 태어난 직후 세브란스병원 병실에서 메리가 목격한 3·1 운동의 풍경들은 생동감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세브란스 직원들(선교사와 한국인 간호사들)의 인식과 대응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메리 테일러와 앨버트 테일러 부부.

테일러가 취재한 제암리 사건 현장


"'우리도 모두 한국인들의 대의가 성취되기를 기도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수간호사는 창가에 모여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국인 간호사들에게 돌아서서 무어라고 말을 했다. 이어서 모두 함께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했다. 그런 다음 수간호사를 선두로 재빨리 병실을 나갔다." (메리 린리 테일러,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책과함께, 2014, 226.)

메리는 에스텝 수간호사를 통해 세브란스병원 직원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인쇄기를 병원 시트 보관 창고에 숨겨 뒀는데 발각되었고, 경찰들이 인쇄물을 찾고 있지만 그것들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에스텝 수간호사는 한국인들이 벌인 만세 운동을 두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평화적 시위라고 말했다. 메리는 "지금 한국은 전 세계의 모든 민중과 손을 잡고 자유와 인류애를 다짐하고 있었다. 나는 수간호사의 들뜬 표정에서 그녀 역시 그들과 같은 이상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세브란스에서 출산 직후 아들을 안은 메리 테일러. 그녀는 창밖으로 3·1 운동의 군중을 바라보았다.

서울 태평로를 가득 메운 3·1 만세 시위 군중.

간호사들이 메리의 침대 밑에 숨겨 놓은 종이 뭉치는 기미 독립선언문이었다. 병실이 어둑할 무렵, 아들을 보러 온 남편 앨버트는 종이 뭉치를 발견해 급히 아들을 내려놓고 한 장을 꺼내 읽었다. 그는 아들과의 행복한 밤을 뒤로하고, 그날 밤 동생 빌에게 독립선언문 사본과 3·1 운동에 대해 쓴 기사를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보냈다. 더 엄격하고 삼엄한 검속령이 내려지기 전에 이 놀라운 소식을 미국 본사에 타전하기 위함이었다. 앨버트는 급히 기사를 넘기고 난 후,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잠든 아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일본인들이 많은 시위자를 체포하고 진압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태극기가 교차되어 편집된 <독립신문> 3·1절 기념호(49호, 1920년)의 독립선언서. 본 선언서 왼쪽 측면에는 "대한민국 2년 3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1919년 4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 전문과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 임시헌장, 선서문, 정강 등이 담겼다. 여기에도 태극기가 교차 삽입되었다.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앨버트와 메리는 외아들 브루스의 탄생만큼이나 한국인의 독립선언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한국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함께 응원했던 푸른 눈의 선한 이웃이었다. 이후 전개된 한국인의 시련과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세상에 전하고자 애썼던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증언자였다. 이러한 그들의 드라마틱한 삶의 한 장면이 펼쳐진 장소는 기독교 의료 선교 기관 세브란스병원이었다.
일장기가 삽시간에 변하여
태극기 되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이자 개신교 연합 의료 선교 기관이었던 세브란스병원(제중원)에는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李甲成(1889~1981)이 제약 담당 사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의전 재학생 이용설은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병원 지하에서 등사해 세브란스 의전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캐나다 출신 세균학 교수 스코필드 선교사는 내한 선교사로서는 유일하게 이갑성과 은밀히 소통하며 3·1 운동에 협력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후 3·1 운동의 진상과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해외에 알리는 일에 적극 협력했다. 졸업생들 중에도 박서양과 김필순, 이태준, 배동석, 이용설 등 의사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가 적지 않았다.

이렇듯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는 역사적 의미를 따졌을 때 단순히 한국 기독교의 선구적 의료 선교 기관일 뿐 아니라 스러져 가는 민족과 국가의 독립과 미래를 위해 헌신한 민족운동의 기지 역할도 감당했다.

태극 문양이 표기된 제중원의 약 광고(왼쪽, <독립신문> 1898년 10월 12일 자).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이토 히로부미가 세브란스병원에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장면(오른쪽, 1908년). 병원 외부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세브란스병원 내 태극 모양으로 조성된 정원에서 기념 촬영을 한 세브란스 간호학교 학생들 모습(19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뿐 아니라 기독교 연합 대학인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연희전문 학생대표 김원벽金元璧이었다. 김원벽은 민족 대표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서울시 내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 대표단을 소집해 청년 학생들이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으로 집합하기로 결의하고, 28일 승동교회에서 각 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이갑성으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배부했다. 그는 3월 1일과 5일 두 차례의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의 서울 집회를 이끈 김원벽 선생.

그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8년 4월 12일 자).

이러한 기독교 교육기관의 학생들이 3·1 운동에 적극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역사관·시대정신을 공동으로 품어 내고 당당히 선포한 집단적 회개 사건이자 혁명 사건이었다. '회개'의 본뜻은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즉, "생각을 고쳐먹는"다는 것이다. 왕의 백성, 천황의 신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나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자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자각하고 회개를 경험한 사건이 바로 3·1 운동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전근대의 가부장성과 차별적 사회구조, 제국주의의 폭력 앞에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교회사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의 무단통치가 심화한 1919년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을 통해 민족의 자존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조화시켜 나가는 것은 한국교회의 역사적 당위가 되었다. 3·1 운동 당시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안전망이라는 치외법권적 특권을 이용해 각 지역 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태극기 제작과 배포도 교회를 중심으로 적극 이루어졌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3·1 운동 참여 과정에서 태극기를 제작·게양·배포했다는 사실을 증언한 민족 대표 김병조 목사의 저술과 3·1 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목격한 도인권 목사와 선교사들의 진술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숭실학교 태극기. 1919년 3월 1일 평양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숭실학교 교정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던 것이다. 3·1 운동 이틀 전 숭실학교 학생 김건, 박병곤 등이 제작. 교장 마펫 선교사가 보관하다가 사후 그의 아들이 1974년 숭실대학교에 기증했다(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한국에서의 독립운동

조선, 평양 1919년 3월 1일 (중략)



한국인들 사이에는 요 며칠 동안 분명히 억누른 흥분이 감돌고 있고, 우리는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B(S. A. Moffett) 씨와 C(E. M. Mowry) 씨 그리고 나(C. F. Bernheisel)는 그 모임에 직접 참가해서 우리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로 했다. AA(선천)의 F(S. L. Roberts) 씨도 후에 늦게 와서 운동장 뒤편에 서 있었다. 운동장은 3000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교회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입구 정면에는 강단이 있었고, 그 주위와 뒤에는 몇몇 목사들과 이 도시의 장로교 임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제5교회(서문외교회)의 목사이며 장로회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4교회(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는 이미 고종 황제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김선두 목사는 이제 송영가를 부르고 축도를 하며 봉도회를 마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음 순서가 남았으니 그 자리에 그냥 앉아있어 달라고 말했다.



축도를 한 후,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그가 이 말씀을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볼 때, 심각한 일이 남아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4교회(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 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강규찬 목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리고서 우리 모두가 대열을 지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자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C. F. Bernheisel,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Chosen. Pyengyang, Chosen, March 1st ,1919" 이 보고서는 <Korean Independence Outbreak>(1919)에 익명으로 게재되었다.)


"준비했던 태극기를 숭덕학교 큰 승강구에다 높이 걸어 놓게 되니 일반대중들은 미치리만큼 놀라며 흥분하였다. 이어서 독립선언식을 정중히 거행하게 되었다. 나는 먼저 독립선언식의 취지와 주제를 선포한 것이며 강규찬 목사는 연설을 하였고 정일선 목사(전도사 - 인용자)는 선언문을 봉독하였으며, 윤원삼 황민영 양 씨는 태극기를 대중에게 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곽권응 씨는 10년 만에 애국가를 인도하여 일반 대중이 제창토록 하였고, 김선두 목사는 이 집회의 사회를 하였다. 이러한 일의 구체적 상황은 독립운동혈사獨立運動血史에 평기評記되어 있는 것이다. 이 회합이 진행된 때는 일본 경관 수십 명이 달려와서 이 운동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수천 군중이 달려들어 우리를 전체로 잡아가라고 고함과 반역을 하니 그들은 실색을 하고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큰 태극기를 선두에 내세우고 해추골로 시가행진을 하려고 나와본즉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으며 좌우 상점에는 눈부시리만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일장기가 삽시간에 변하여 태극기가 된 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의 국권 앞에 머리 숙일 예표인 양 보였다." (장로교계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서 3월 1일 평양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도인권都寅權 회고록>(1962), 34-37.)


"의주 인민의 독립선언



김병조, 김승만은 비밀 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운천동雲川洞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여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통고문을 밀포密布하여 2월 28일 밤에 군내 양실학원養實學院에 모여 회의하고, 다음 날에 경성에서 (거사하라는) 전보가 내도來到하였으므로 (중략) 오후 1시에 2000여 명의 민중이 학슬봉鶴膝峰 아래에 회집하였다.



유여대가 헌앙軒昻한 기개와 충성스럽고 간곡한 언사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가를 제창한 후, 황대벽, 김이순 두 사람의 연설이 있었으니,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八卦國旗(태극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統軍亭 숙운宿雲에 놀란 학鶴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嗚咽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김병조가 1920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 독립운동사> 중. ; 김형석 편, <일재 김병조의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93, 217-218.)


"함흥에서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인 1919년 3월 2일 밤과 3월 3일 새벽에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 몇 명과 교사 한 명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3일 월요일에 경찰이 (장날인데도) 가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심가에 모였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나팔을 불었고, 이를 신호로 하여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맥래 선교사(Rev. M. D. MacRae, 마구례)가 1919년 3월 20일 함흥 만세 시위의 실상을 영국영사관에 알리고 총독부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작성한 진술서. ; "Statement by Rev. M. McRae of Events in Hamheung, Korea(Seoul, March 20th, 1919)," <Korean Independence Outbreak>(1919)]

평양 출신 한국 화가 혜촌 김학수 화백이 그린 '평양 남산현교회'(1998년).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했다.

이상의 몇몇 진술만 살펴보더라도 3·1 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면서 만세 시위 현장에서 대개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민들에게 다수의 태극기를 배포해 참여를 독려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평양 거리 상점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수많은 일장기가 삽시간에 태극기로 바뀐 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의 국권 앞에 머리 숙일 예표인 양 보였다"는 도인권 목사의 회고는 자못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3·1 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태극기 제작 배포 관련 기사는 다양하게 확인되나 지면 관계상 이 정도의 소개로 소략하고자 한다.)

3·1 운동 결과로 전환된 일제의 문화 통치에는 1910년 이후 거의 10년간 금기시되었던 태극기 제작과 게양이 여전히 금기시되었지만, 태극 문양 사용에 대해서는 우회적으로 용인되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언론·출판·결사의자유를 허락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된 분위기에서 192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의 다양한 문화적 양식과 표현 속에 구 한국의 상징이었던 태극 문양이 조심스럽게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3·1 운동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애비슨이 교장을 겸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의 신축 교사에서 확인된다. 3·1 운동 이후 조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던 시기, 내한 선교사들도 한국인들을 위한 고등교육에 더 많은 지원과 확대를 위해 재정과 인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연희전문학교의 캠퍼스 내에 더 나은 교육 여건을 확보하기 위한 석조 교사들이 속속 신축되었다.

미국 LA의 찰스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이 대학 설립 자금으로 기부한 2만 5000달러를 기반으로 1920년 8월 연희전문의 첫 석조 건물이 준공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준공식에는 기독교와 정관계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는데, 행사장에는 어쩔 수 없이 일장기가 교차 게양되었고, 단상에는 영국과 미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연희전문의 선교사들과 학교 관계자들은 이 건물의 동측과 남측 베이 윈도(bay window) 상단에 화강암으로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아울러 스팀슨관의 중앙 출입문은 특별히 제작된 태극 문양의 유리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문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1924년과 1925년 연이어 준공한 아펜젤러관과 언더우드관에도 동일한 패턴의 태극 문양이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에 자랑처럼 새겨졌다.

1920년 스팀슨관 준공식(왼쪽). 월남 이상재 선생이 축사를 했다(오른쪽). 일제강점기이기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지만,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과 출입문에는 태극 문양을 은밀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베이 윈도 상단에 태극기가 새겨진 스팀슨관(왼쪽)과 아펜젤러관(오른쪽).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귀국 직전 스팀슨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애비슨 교장 부부(중앙). 그들의 뒤로 태극문이 보인다. 이 문은 현재도 남아 있다.

현 아펜젤러관 모습.

비록 3·1 운동을 통해 구체적인 민족 독립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건립된 연희전문학교의 신축 교사를 드나드는 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조화하며 장차 성취할 독립의 이상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배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태극이 아로새겨진 연희전문의 건물과 태극문을 통해 이후 윤동주·송몽규·강성갑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이곳을 통해 위당 정인보, 외솔 최현배, 한결 김윤경 등,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하에서도 한국의 정신과 언어를 연구하는 한국학 연구의 토대를 만들고 이후 조선어학회 주축 멤버가 된 이들이 배출되었고, 일본의 식민 사관에 대항하는 민족 사관의 역사적 노력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일제 파시즘 광기 속에 민족 얼이 파괴되어 가는 절망의 시절 윤동주가 한글 시를 붙들고, 여러 선생과 후학들이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지켜 내기 위해 투쟁한 최후의 보루가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대학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역설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연희전문에 유학한 윤동주 생가의 막새기와. 삼태극 문양과 주변의 십자가. 무궁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또한 기독교 신앙(십자가)을 통한 민족 구원(삼태극, 무궁화)의 의지를 만주 용정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확고히 했던 결과였다(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소장).
강당 트러스에 새긴 태극 문양


1919년 4월 1일 충남의 고도 공주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공교롭게도 충청권 최대의 만세 시위라고 알려진 천안 병천 장날 만세 시위가 열린 날, 공주에서도 똑같이 장터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날 공주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이들은 감리교 윌리엄스(F. E. C. Williams)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 교사와 목사, 학생들이었다. 3월 24일부터 영명학교의 현석칠·안창호·김수철·김관회 등은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 활동을 전개했으며, 25일에는 교사 김관회가 김수철에게 독립선언서 제작을 의뢰했다. 김수철 권유로 유우석(유관순 열사의 오빠)·노명우·윤봉균·강윤 등이 3월 31일 오후 3시경 영명학교 기숙사에 모여 윤봉균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1000매를 준비했다. 이 선언서는 4월 1일 강윤·노명우·유우석·양재순 등 영명학교 학생들이 공주시장에 나가 군중들에게 배포했다. 학생들은 장터에 운집한 회중 앞에 서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날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강윤姜沇(1899~1975)은 함께 운동을 전개한 동기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구금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함께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병천에서 공주로 잡혀 온 유관순은 5년형을 선고받은 뒤 경성복심법원으로 옮겨져 3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주 3·1 운동을 주도한 강윤과 유우석 등이 재학했던 공주 영명학교.

영명학교의 윌리엄스 선교사는 일제 당국과 재판장을 찾아다니며 학생들 입장을 대변하며 탄원했다. 결국 구속 교사와 학생들에 대해서는 조건부 감형이 이루어졌으며, 영명학교는 이듬해 신입생 모집을 못 하게 되었다. 강윤을 비롯한 7명의 3·1 운동 주도자들은 졸업식은 치르지 못하고 졸업장만 받았다.
강윤의 도일渡日과
건축가의 길


공주 3·1 운동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강윤은, 출소 이후 윌리엄스 선교사 추천으로 일본으로 떠나 시가현의 오미하치만에서 활동하던 평신도 선교사 보리스(W. M. Vories)를 찾아갔다. 강윤은 보리스가 선교적 목적으로 설립한 건축 사무소에서 건축 일을 배우게 되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에는 일본인·중국인·미국인·소련인·베트남인 등 다양한 인종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조선인은 세브란스병원 의료 선교사 추천으로 와 있던 임덕수와, 윌리엄스 선교사 추천으로 들어온 강윤이었다. 이 건축 사무소 직원들은 각기 국적과 성격이 달랐지만,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와 간사이공학전수학교에서 건축을 배울 당시의 강윤(가운데).

보리스건축사무소는 이윤을 추구하기보다는 건축을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삼았다. 일본을 비롯해 조선, 중국, 만주, 동남아시아 등지에 선교 사업을 위한 교회, 병원, YMCA, 복지시설, 선교사 저택 등의 건축물을 왕성하게 건축했으며, 그렇게 40여 년간 1484건의 건축물을 시공했다.

일본에서 건축을 배우고 풍부한 경험을 쌓은 강윤은 1933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도일한 지 1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사이 그는 간사이공학전수학교(현 오사카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보리스건축사무소 주축 멤버로 성장했다.

귀국 직후 강윤이 맡은 사업은 서울 정동에서 대현동으로 이전하는 이화여전 새 캠퍼스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는 1935년 이화여전의 본관·음악당·중강당·체육관을, 1936년에는 기숙사·보육과·영어실습소·가사실습소 등을 지었다. 이외에도 한국 내에 다양한 기독교 관련 건축물을 시공했다. 태화사회관, 공주 공제의원, 대천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세브란스병원, 평양 광성중학교, 함흥 영행중학교, 대구 계성학교, 원산중앙교회, 철원제일교회, 나남교회, 부산진교회,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대강당,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본관 등 그가 한반도에 시공한 건축물은 145건에 달했다.
3·1 운동의 원점, 태화사회관


한국으로 돌아온 강윤이 1930~1940년대 지은 건물 중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곳은 바로 종로의 '태화사회관'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는 다양한 역사의 노정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예전에는 순화궁터(중종이 순화 공주를 위해 지어 준 사저)였고, 후에 친일파 이완용의 땅이 되었는데, 3·1 운동 당시에는 명월관 지점 태화관太華館이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이 이 건물을 매각하면서 남감리교 여선교사들이 구입하여 '태화여자관'(1921년, 후에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사용되었다.

옛 순화궁 전경.

이렇게 조선 시대에는 명문대가·권문세도 양반 귀족이 살던 대감집이자, 왕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룡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 이완용의 가족이 살다가 장안 제일의 요릿집이 되어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복잡하고도 독특한 이력의 순화궁, 태화관은 기독교 선교의 새로운 장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던 것이다.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이라는 이름으로 1921년 4월 문을 연 이곳에서는 서울의 여성과 학생, 청년들의 전도 집회와 성서 교육, 부녀자들을 위한 직업교육, 요리, 재봉, 위생, 아동교육, 유치원 및 탁아 사업, 여성들의 친교와 교류 활동, 야학과 우유 급식 등 다양한 여성 사회복지 사업이 전개되었다. 마이어스 선교사가 이곳의 원래 이름인 태화太華를 태화泰和로 바꾼 것은 사대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이곳을 통해 여성들이 큰 평화와 하나님나라의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었다.

한국YWCA도 바로 이곳,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별유천지 6호실', 즉 '태화정'에서 출범했다는 사실은 이곳이 한국 여성 선교와 여성운동의 배꼽 자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옛 별유천지 태화정의 현 위치를 직접 찾아보면 휑한 공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태화빌딩 남측 주차장 부지(옛 태화유치원 자리)이다. 이렇듯 3·1 운동의 역사적 현장이 빌딩의 부속 주차장으로 변모해 있는 데에는 안타까운 역사적 과정이 존재했다.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왼쪽). 태화관 내부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한 민족 대표 33인(오른쪽).
'한양韓洋 절충식'으로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 표현하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옛 건물은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3·1 운동에 참여해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이 남달랐던 강윤은, 한국의 전통적인 팔작지붕과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룬 '한양 절충식'으로 회관 건물을 시공했다(1939년). 강윤은 자신에게 인생의 고난과 기회를 동시에 주었던 3·1 운동의 역사적 원점에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조화한 역사적인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태화사회관 도면(아래), 외관(왼쪽 위) 및 내부 강당 전경(오른쪽 위).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당의 측면 트러스에 태극 문양이 보인다(왼쪽). 강윤은 강당에 깔린 장의자 측면에도 태극 문양을 조각해 넣었다(오른쪽).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윤은 태화관 옛 한옥의 기와를 재활용해 새 건물의 기와지붕에 올렸다. 기존의 역사성을 새 건물이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일제의 파시즘이 극에 달했던 이 시기에 그는 한국인에게 친숙한 토담 형식의 외벽을 쌓고 한옥의 전통 띠 문양을 장식했다. 내부의 전형적인 고딕풍 예배당과 교육 공간은 서양식으로 구성했다. 구조재인 목조 트러스와 장의자 등 곳곳에 한국을 상징하는 암호처럼 태극 문양을 새겼다. 강윤은 태화사회관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YMCA회관 뒤로 보이는 태화복지재단. 삼태극은 태화복지재단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태화빌딩 앞에는 3·1 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이 '양식'이 우리 건축가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일까. 그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 그 지방의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모양의 집을 세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조선과건축朝鮮と建築>, 1940년 4월호)

이렇듯 공주 3·1 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르고, 도일해 근대건축을 배워 온 민족운동가 강윤은 자신의 전공인 건축을 통해 신앙과 민족의식을 묵묵히 펼쳐 보였다. 이곳은 일제의 제국주의 야욕이 정점에 달했던 파시즘 시기에 식민지민의 저항과 불굴의 의지,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믿음을 건축이라는 양식에 담아 담대히 표현해 낸 3·1 정신의 상징, 기념비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 건물은 일제 말 전시체제, 해방 공간,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변형·철거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강윤은 태화사회관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전쟁을 치르고 1955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부가 건물을 되찾았을 때에도 강윤은 이 건물의 복원 공사를 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윤은 1975년 1월 30일 76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태화사회관 옆 중앙교회에서 장례를 치렀다. 강윤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며,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강윤의 사후 5년 뒤인 1980년 인사동 개발계획으로 철거되었다. 비록 3·1 독립선언식이 열렸던 태화관, 이후 3·1 정신을 계승해 이 땅의 선교와 복지, 근대화에 기여한 태화사회관은 그 역사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 터는 여전히 남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겸허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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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독립의 못다 이룬 꿈, 태극으로 새기다
[태극기와 한국교회] 3·1 운동의 유산과 태극에 투영한 희망의 신앙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12.10 


"그날 우리의 아들이 태어났다.



의식이 반쯤 돌아온 상태에서 나는 병원에서 커다란 동요가 일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문들이 열렸다 닫히고, 귓속말과 고함 소리,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발끝을 들고 조심조심 걷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내 방에 살금살금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어느 순간 눈을 떴더니 간호사가 아기가 아니라 종이 뭉치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그 서류를 내 침대의 이불 밑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바깥 거리도 온통 소란스러웠다. 간간이 비명 소리와 총성이 들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만세, 만세' 하고 외치는 커다란 함성이 계속 반복되었다. '만세!' 그 소리는 거의 포효와 같았다." (메리 린리 테일러,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책과함께, 2014, 225.)

3·1 운동 당시 갓 출산한 산모였던 메리 테일러(Mary L. Taylor)의 자서전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그의 남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는 1896년 광산업자로 내한했다가 UPI 통신사의 임시기자직을 겸하게 되어 3·1 운동을 가장 먼저 세계에 타전했다. 이후 원한경 선교사(H. H. Underwood), 미 영사 커티스와 함께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3·1 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학살 현장을 취재해 세계에 고발한 한국인의 선한 벗이자, 양심적인 언론인이었다.
이 부부의 외아들 브루스가 태어난 직후 세브란스병원 병실에서 메리가 목격한 3·1 운동의 풍경들은 생동감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세브란스 직원들(선교사와 한국인 간호사들)의 인식과 대응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메리 테일러와 앨버트 테일러 부부.

테일러가 취재한 제암리 사건 현장


"'우리도 모두 한국인들의 대의가 성취되기를 기도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수간호사는 창가에 모여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국인 간호사들에게 돌아서서 무어라고 말을 했다. 이어서 모두 함께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했다. 그런 다음 수간호사를 선두로 재빨리 병실을 나갔다." (메리 린리 테일러,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책과함께, 2014, 226.)

메리는 에스텝 수간호사를 통해 세브란스병원 직원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인쇄기를 병원 시트 보관 창고에 숨겨 뒀는데 발각되었고, 경찰들이 인쇄물을 찾고 있지만 그것들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에스텝 수간호사는 한국인들이 벌인 만세 운동을 두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평화적 시위라고 말했다. 메리는 "지금 한국은 전 세계의 모든 민중과 손을 잡고 자유와 인류애를 다짐하고 있었다. 나는 수간호사의 들뜬 표정에서 그녀 역시 그들과 같은 이상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세브란스에서 출산 직후 아들을 안은 메리 테일러. 그녀는 창밖으로 3·1 운동의 군중을 바라보았다.

서울 태평로를 가득 메운 3·1 만세 시위 군중.

간호사들이 메리의 침대 밑에 숨겨 놓은 종이 뭉치는 기미 독립선언문이었다. 병실이 어둑할 무렵, 아들을 보러 온 남편 앨버트는 종이 뭉치를 발견해 급히 아들을 내려놓고 한 장을 꺼내 읽었다. 그는 아들과의 행복한 밤을 뒤로하고, 그날 밤 동생 빌에게 독립선언문 사본과 3·1 운동에 대해 쓴 기사를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보냈다. 더 엄격하고 삼엄한 검속령이 내려지기 전에 이 놀라운 소식을 미국 본사에 타전하기 위함이었다. 앨버트는 급히 기사를 넘기고 난 후,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잠든 아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일본인들이 많은 시위자를 체포하고 진압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태극기가 교차되어 편집된 <독립신문> 3·1절 기념호(49호, 1920년)의 독립선언서. 본 선언서 왼쪽 측면에는 "대한민국 2년 3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1919년 4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 전문과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 임시헌장, 선서문, 정강 등이 담겼다. 여기에도 태극기가 교차 삽입되었다.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앨버트와 메리는 외아들 브루스의 탄생만큼이나 한국인의 독립선언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한국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함께 응원했던 푸른 눈의 선한 이웃이었다. 이후 전개된 한국인의 시련과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세상에 전하고자 애썼던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증언자였다. 이러한 그들의 드라마틱한 삶의 한 장면이 펼쳐진 장소는 기독교 의료 선교 기관 세브란스병원이었다.
일장기가 삽시간에 변하여
태극기 되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이자 개신교 연합 의료 선교 기관이었던 세브란스병원(제중원)에는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李甲成(1889~1981)이 제약 담당 사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의전 재학생 이용설은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병원 지하에서 등사해 세브란스 의전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캐나다 출신 세균학 교수 스코필드 선교사는 내한 선교사로서는 유일하게 이갑성과 은밀히 소통하며 3·1 운동에 협력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후 3·1 운동의 진상과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해외에 알리는 일에 적극 협력했다. 졸업생들 중에도 박서양과 김필순, 이태준, 배동석, 이용설 등 의사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가 적지 않았다.

이렇듯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는 역사적 의미를 따졌을 때 단순히 한국 기독교의 선구적 의료 선교 기관일 뿐 아니라 스러져 가는 민족과 국가의 독립과 미래를 위해 헌신한 민족운동의 기지 역할도 감당했다.

태극 문양이 표기된 제중원의 약 광고(왼쪽, <독립신문> 1898년 10월 12일 자).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이토 히로부미가 세브란스병원에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장면(오른쪽, 1908년). 병원 외부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세브란스병원 내 태극 모양으로 조성된 정원에서 기념 촬영을 한 세브란스 간호학교 학생들 모습(19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뿐 아니라 기독교 연합 대학인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연희전문 학생대표 김원벽金元璧이었다. 김원벽은 민족 대표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서울시 내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 대표단을 소집해 청년 학생들이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으로 집합하기로 결의하고, 28일 승동교회에서 각 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이갑성으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배부했다. 그는 3월 1일과 5일 두 차례의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의 서울 집회를 이끈 김원벽 선생.

그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8년 4월 12일 자).

이러한 기독교 교육기관의 학생들이 3·1 운동에 적극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역사관·시대정신을 공동으로 품어 내고 당당히 선포한 집단적 회개 사건이자 혁명 사건이었다. '회개'의 본뜻은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즉, "생각을 고쳐먹는"다는 것이다. 왕의 백성, 천황의 신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나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자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자각하고 회개를 경험한 사건이 바로 3·1 운동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전근대의 가부장성과 차별적 사회구조, 제국주의의 폭력 앞에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교회사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의 무단통치가 심화한 1919년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을 통해 민족의 자존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조화시켜 나가는 것은 한국교회의 역사적 당위가 되었다. 3·1 운동 당시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안전망이라는 치외법권적 특권을 이용해 각 지역 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태극기 제작과 배포도 교회를 중심으로 적극 이루어졌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3·1 운동 참여 과정에서 태극기를 제작·게양·배포했다는 사실을 증언한 민족 대표 김병조 목사의 저술과 3·1 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목격한 도인권 목사와 선교사들의 진술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숭실학교 태극기. 1919년 3월 1일 평양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숭실학교 교정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던 것이다. 3·1 운동 이틀 전 숭실학교 학생 김건, 박병곤 등이 제작. 교장 마펫 선교사가 보관하다가 사후 그의 아들이 1974년 숭실대학교에 기증했다(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한국에서의 독립운동

조선, 평양 1919년 3월 1일 (중략)



한국인들 사이에는 요 며칠 동안 분명히 억누른 흥분이 감돌고 있고, 우리는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B(S. A. Moffett) 씨와 C(E. M. Mowry) 씨 그리고 나(C. F. Bernheisel)는 그 모임에 직접 참가해서 우리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로 했다. AA(선천)의 F(S. L. Roberts) 씨도 후에 늦게 와서 운동장 뒤편에 서 있었다. 운동장은 3000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교회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입구 정면에는 강단이 있었고, 그 주위와 뒤에는 몇몇 목사들과 이 도시의 장로교 임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제5교회(서문외교회)의 목사이며 장로회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4교회(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는 이미 고종 황제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김선두 목사는 이제 송영가를 부르고 축도를 하며 봉도회를 마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음 순서가 남았으니 그 자리에 그냥 앉아있어 달라고 말했다.



축도를 한 후,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그가 이 말씀을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볼 때, 심각한 일이 남아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4교회(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 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강규찬 목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리고서 우리 모두가 대열을 지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자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C. F. Bernheisel,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Chosen. Pyengyang, Chosen, March 1st ,1919" 이 보고서는 <Korean Independence Outbreak>(1919)에 익명으로 게재되었다.)


"준비했던 태극기를 숭덕학교 큰 승강구에다 높이 걸어 놓게 되니 일반대중들은 미치리만큼 놀라며 흥분하였다. 이어서 독립선언식을 정중히 거행하게 되었다. 나는 먼저 독립선언식의 취지와 주제를 선포한 것이며 강규찬 목사는 연설을 하였고 정일선 목사(전도사 - 인용자)는 선언문을 봉독하였으며, 윤원삼 황민영 양 씨는 태극기를 대중에게 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곽권응 씨는 10년 만에 애국가를 인도하여 일반 대중이 제창토록 하였고, 김선두 목사는 이 집회의 사회를 하였다. 이러한 일의 구체적 상황은 독립운동혈사獨立運動血史에 평기評記되어 있는 것이다. 이 회합이 진행된 때는 일본 경관 수십 명이 달려와서 이 운동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수천 군중이 달려들어 우리를 전체로 잡아가라고 고함과 반역을 하니 그들은 실색을 하고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큰 태극기를 선두에 내세우고 해추골로 시가행진을 하려고 나와본즉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으며 좌우 상점에는 눈부시리만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일장기가 삽시간에 변하여 태극기가 된 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의 국권 앞에 머리 숙일 예표인 양 보였다." (장로교계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서 3월 1일 평양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도인권都寅權 회고록>(1962), 34-37.)


"의주 인민의 독립선언



김병조, 김승만은 비밀 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운천동雲川洞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여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통고문을 밀포密布하여 2월 28일 밤에 군내 양실학원養實學院에 모여 회의하고, 다음 날에 경성에서 (거사하라는) 전보가 내도來到하였으므로 (중략) 오후 1시에 2000여 명의 민중이 학슬봉鶴膝峰 아래에 회집하였다.



유여대가 헌앙軒昻한 기개와 충성스럽고 간곡한 언사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가를 제창한 후, 황대벽, 김이순 두 사람의 연설이 있었으니,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八卦國旗(태극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統軍亭 숙운宿雲에 놀란 학鶴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嗚咽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김병조가 1920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 독립운동사> 중. ; 김형석 편, <일재 김병조의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93, 217-218.)


"함흥에서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인 1919년 3월 2일 밤과 3월 3일 새벽에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 몇 명과 교사 한 명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3일 월요일에 경찰이 (장날인데도) 가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심가에 모였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나팔을 불었고, 이를 신호로 하여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맥래 선교사(Rev. M. D. MacRae, 마구례)가 1919년 3월 20일 함흥 만세 시위의 실상을 영국영사관에 알리고 총독부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작성한 진술서. ; "Statement by Rev. M. McRae of Events in Hamheung, Korea(Seoul, March 20th, 1919)," <Korean Independence Outbreak>(1919)]

평양 출신 한국 화가 혜촌 김학수 화백이 그린 '평양 남산현교회'(1998년).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했다.

이상의 몇몇 진술만 살펴보더라도 3·1 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면서 만세 시위 현장에서 대개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민들에게 다수의 태극기를 배포해 참여를 독려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평양 거리 상점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수많은 일장기가 삽시간에 태극기로 바뀐 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의 국권 앞에 머리 숙일 예표인 양 보였다"는 도인권 목사의 회고는 자못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3·1 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태극기 제작 배포 관련 기사는 다양하게 확인되나 지면 관계상 이 정도의 소개로 소략하고자 한다.)

3·1 운동 결과로 전환된 일제의 문화 통치에는 1910년 이후 거의 10년간 금기시되었던 태극기 제작과 게양이 여전히 금기시되었지만, 태극 문양 사용에 대해서는 우회적으로 용인되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언론·출판·결사의자유를 허락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된 분위기에서 192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의 다양한 문화적 양식과 표현 속에 구 한국의 상징이었던 태극 문양이 조심스럽게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3·1 운동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애비슨이 교장을 겸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의 신축 교사에서 확인된다. 3·1 운동 이후 조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던 시기, 내한 선교사들도 한국인들을 위한 고등교육에 더 많은 지원과 확대를 위해 재정과 인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연희전문학교의 캠퍼스 내에 더 나은 교육 여건을 확보하기 위한 석조 교사들이 속속 신축되었다.

미국 LA의 찰스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이 대학 설립 자금으로 기부한 2만 5000달러를 기반으로 1920년 8월 연희전문의 첫 석조 건물이 준공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준공식에는 기독교와 정관계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는데, 행사장에는 어쩔 수 없이 일장기가 교차 게양되었고, 단상에는 영국과 미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연희전문의 선교사들과 학교 관계자들은 이 건물의 동측과 남측 베이 윈도(bay window) 상단에 화강암으로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아울러 스팀슨관의 중앙 출입문은 특별히 제작된 태극 문양의 유리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문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1924년과 1925년 연이어 준공한 아펜젤러관과 언더우드관에도 동일한 패턴의 태극 문양이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에 자랑처럼 새겨졌다.

1920년 스팀슨관 준공식(왼쪽). 월남 이상재 선생이 축사를 했다(오른쪽). 일제강점기이기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지만,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과 출입문에는 태극 문양을 은밀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베이 윈도 상단에 태극기가 새겨진 스팀슨관(왼쪽)과 아펜젤러관(오른쪽).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귀국 직전 스팀슨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애비슨 교장 부부(중앙). 그들의 뒤로 태극문이 보인다. 이 문은 현재도 남아 있다.

현 아펜젤러관 모습.

비록 3·1 운동을 통해 구체적인 민족 독립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건립된 연희전문학교의 신축 교사를 드나드는 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조화하며 장차 성취할 독립의 이상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배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태극이 아로새겨진 연희전문의 건물과 태극문을 통해 이후 윤동주·송몽규·강성갑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이곳을 통해 위당 정인보, 외솔 최현배, 한결 김윤경 등,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하에서도 한국의 정신과 언어를 연구하는 한국학 연구의 토대를 만들고 이후 조선어학회 주축 멤버가 된 이들이 배출되었고, 일본의 식민 사관에 대항하는 민족 사관의 역사적 노력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일제 파시즘 광기 속에 민족 얼이 파괴되어 가는 절망의 시절 윤동주가 한글 시를 붙들고, 여러 선생과 후학들이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지켜 내기 위해 투쟁한 최후의 보루가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대학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역설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연희전문에 유학한 윤동주 생가의 막새기와. 삼태극 문양과 주변의 십자가. 무궁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또한 기독교 신앙(십자가)을 통한 민족 구원(삼태극, 무궁화)의 의지를 만주 용정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확고히 했던 결과였다(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소장).
강당 트러스에 새긴 태극 문양


1919년 4월 1일 충남의 고도 공주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공교롭게도 충청권 최대의 만세 시위라고 알려진 천안 병천 장날 만세 시위가 열린 날, 공주에서도 똑같이 장터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날 공주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이들은 감리교 윌리엄스(F. E. C. Williams)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 교사와 목사, 학생들이었다. 3월 24일부터 영명학교의 현석칠·안창호·김수철·김관회 등은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 활동을 전개했으며, 25일에는 교사 김관회가 김수철에게 독립선언서 제작을 의뢰했다. 김수철 권유로 유우석(유관순 열사의 오빠)·노명우·윤봉균·강윤 등이 3월 31일 오후 3시경 영명학교 기숙사에 모여 윤봉균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1000매를 준비했다. 이 선언서는 4월 1일 강윤·노명우·유우석·양재순 등 영명학교 학생들이 공주시장에 나가 군중들에게 배포했다. 학생들은 장터에 운집한 회중 앞에 서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날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강윤姜沇(1899~1975)은 함께 운동을 전개한 동기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구금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함께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병천에서 공주로 잡혀 온 유관순은 5년형을 선고받은 뒤 경성복심법원으로 옮겨져 3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주 3·1 운동을 주도한 강윤과 유우석 등이 재학했던 공주 영명학교.

영명학교의 윌리엄스 선교사는 일제 당국과 재판장을 찾아다니며 학생들 입장을 대변하며 탄원했다. 결국 구속 교사와 학생들에 대해서는 조건부 감형이 이루어졌으며, 영명학교는 이듬해 신입생 모집을 못 하게 되었다. 강윤을 비롯한 7명의 3·1 운동 주도자들은 졸업식은 치르지 못하고 졸업장만 받았다.
강윤의 도일渡日과
건축가의 길


공주 3·1 운동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강윤은, 출소 이후 윌리엄스 선교사 추천으로 일본으로 떠나 시가현의 오미하치만에서 활동하던 평신도 선교사 보리스(W. M. Vories)를 찾아갔다. 강윤은 보리스가 선교적 목적으로 설립한 건축 사무소에서 건축 일을 배우게 되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에는 일본인·중국인·미국인·소련인·베트남인 등 다양한 인종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조선인은 세브란스병원 의료 선교사 추천으로 와 있던 임덕수와, 윌리엄스 선교사 추천으로 들어온 강윤이었다. 이 건축 사무소 직원들은 각기 국적과 성격이 달랐지만,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와 간사이공학전수학교에서 건축을 배울 당시의 강윤(가운데).

보리스건축사무소는 이윤을 추구하기보다는 건축을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삼았다. 일본을 비롯해 조선, 중국, 만주, 동남아시아 등지에 선교 사업을 위한 교회, 병원, YMCA, 복지시설, 선교사 저택 등의 건축물을 왕성하게 건축했으며, 그렇게 40여 년간 1484건의 건축물을 시공했다.

일본에서 건축을 배우고 풍부한 경험을 쌓은 강윤은 1933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도일한 지 1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사이 그는 간사이공학전수학교(현 오사카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보리스건축사무소 주축 멤버로 성장했다.

귀국 직후 강윤이 맡은 사업은 서울 정동에서 대현동으로 이전하는 이화여전 새 캠퍼스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는 1935년 이화여전의 본관·음악당·중강당·체육관을, 1936년에는 기숙사·보육과·영어실습소·가사실습소 등을 지었다. 이외에도 한국 내에 다양한 기독교 관련 건축물을 시공했다. 태화사회관, 공주 공제의원, 대천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세브란스병원, 평양 광성중학교, 함흥 영행중학교, 대구 계성학교, 원산중앙교회, 철원제일교회, 나남교회, 부산진교회,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대강당,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본관 등 그가 한반도에 시공한 건축물은 145건에 달했다.
3·1 운동의 원점, 태화사회관


한국으로 돌아온 강윤이 1930~1940년대 지은 건물 중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곳은 바로 종로의 '태화사회관'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는 다양한 역사의 노정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예전에는 순화궁터(중종이 순화 공주를 위해 지어 준 사저)였고, 후에 친일파 이완용의 땅이 되었는데, 3·1 운동 당시에는 명월관 지점 태화관太華館이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이 이 건물을 매각하면서 남감리교 여선교사들이 구입하여 '태화여자관'(1921년, 후에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사용되었다.

옛 순화궁 전경.

이렇게 조선 시대에는 명문대가·권문세도 양반 귀족이 살던 대감집이자, 왕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룡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 이완용의 가족이 살다가 장안 제일의 요릿집이 되어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복잡하고도 독특한 이력의 순화궁, 태화관은 기독교 선교의 새로운 장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던 것이다.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이라는 이름으로 1921년 4월 문을 연 이곳에서는 서울의 여성과 학생, 청년들의 전도 집회와 성서 교육, 부녀자들을 위한 직업교육, 요리, 재봉, 위생, 아동교육, 유치원 및 탁아 사업, 여성들의 친교와 교류 활동, 야학과 우유 급식 등 다양한 여성 사회복지 사업이 전개되었다. 마이어스 선교사가 이곳의 원래 이름인 태화太華를 태화泰和로 바꾼 것은 사대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이곳을 통해 여성들이 큰 평화와 하나님나라의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었다.

한국YWCA도 바로 이곳,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별유천지 6호실', 즉 '태화정'에서 출범했다는 사실은 이곳이 한국 여성 선교와 여성운동의 배꼽 자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옛 별유천지 태화정의 현 위치를 직접 찾아보면 휑한 공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태화빌딩 남측 주차장 부지(옛 태화유치원 자리)이다. 이렇듯 3·1 운동의 역사적 현장이 빌딩의 부속 주차장으로 변모해 있는 데에는 안타까운 역사적 과정이 존재했다.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왼쪽). 태화관 내부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한 민족 대표 33인(오른쪽).
'한양韓洋 절충식'으로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 표현하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옛 건물은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3·1 운동에 참여해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이 남달랐던 강윤은, 한국의 전통적인 팔작지붕과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룬 '한양 절충식'으로 회관 건물을 시공했다(1939년). 강윤은 자신에게 인생의 고난과 기회를 동시에 주었던 3·1 운동의 역사적 원점에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조화한 역사적인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태화사회관 도면(아래), 외관(왼쪽 위) 및 내부 강당 전경(오른쪽 위).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당의 측면 트러스에 태극 문양이 보인다(왼쪽). 강윤은 강당에 깔린 장의자 측면에도 태극 문양을 조각해 넣었다(오른쪽).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윤은 태화관 옛 한옥의 기와를 재활용해 새 건물의 기와지붕에 올렸다. 기존의 역사성을 새 건물이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일제의 파시즘이 극에 달했던 이 시기에 그는 한국인에게 친숙한 토담 형식의 외벽을 쌓고 한옥의 전통 띠 문양을 장식했다. 내부의 전형적인 고딕풍 예배당과 교육 공간은 서양식으로 구성했다. 구조재인 목조 트러스와 장의자 등 곳곳에 한국을 상징하는 암호처럼 태극 문양을 새겼다. 강윤은 태화사회관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YMCA회관 뒤로 보이는 태화복지재단. 삼태극은 태화복지재단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태화빌딩 앞에는 3·1 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이 '양식'이 우리 건축가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일까. 그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 그 지방의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모양의 집을 세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조선과건축朝鮮と建築>, 1940년 4월호)

이렇듯 공주 3·1 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르고, 도일해 근대건축을 배워 온 민족운동가 강윤은 자신의 전공인 건축을 통해 신앙과 민족의식을 묵묵히 펼쳐 보였다. 이곳은 일제의 제국주의 야욕이 정점에 달했던 파시즘 시기에 식민지민의 저항과 불굴의 의지,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믿음을 건축이라는 양식에 담아 담대히 표현해 낸 3·1 정신의 상징, 기념비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 건물은 일제 말 전시체제, 해방 공간,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변형·철거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강윤은 태화사회관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전쟁을 치르고 1955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부가 건물을 되찾았을 때에도 강윤은 이 건물의 복원 공사를 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윤은 1975년 1월 30일 76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태화사회관 옆 중앙교회에서 장례를 치렀다. 강윤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며,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강윤의 사후 5년 뒤인 1980년 인사동 개발계획으로 철거되었다. 비록 3·1 독립선언식이 열렸던 태화관, 이후 3·1 정신을 계승해 이 땅의 선교와 복지, 근대화에 기여한 태화사회관은 그 역사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 터는 여전히 남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겸허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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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잃어버린 태극, 지워 버린 일장기
[태극기와 한국교회] 황국신민의 시대, 국기 게양의 비애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02.24 

"일장기는 그저 신호일 뿐"



"(일제) 당국은 조선의 국가적 상징인 태극을 반지나 부채의 문양으로 쓰는 것조차 허용하질 않는다. 조선의 관리들이나 독재자들의 쩨쩨함이 정말이지 거짓말 같기만 하다." (<윤치호 일기>, 1919년 6월 23일 월요일 중에서)


"오늘은 총독부 시정始政 기념일(10월 1일)이다. (중략) 조선인들이 경축일에 일장기를 달지 않은 탓에 일본인 관리들과 민간인들이 잔뜩 화가 났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일장기를 달지 않은 걸 두고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난 국경일에 일장기를 다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본 치하에서 사는 한, 통치자들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 큰 굴욕(한일 강제 병합 - 필자 주)은 감수하면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가 하면 당국은 조선인들에게 일장기를 달라고 강요하지 않을 만큼 너그러워야 한다. 그들, 즉 당국자들은 조선의 국가 상징인 태극을 문양으로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한다. '우리는 너희들의 국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우리의 국기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들의 좌우명이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1일 수요일)

예상치 못한 3·1 운동의 확산과 지속은 일제 당국을 당황케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만세 시위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일장기에 태극기를 그려 넣어 재사용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에 일제는 일반인들의 반지나 부채 따위의 생활용품에 그려지는 태극 문양까지도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3·1 운동에 참여하지도 찬성하지도 않았던 당대 최고의 기독교인 엘리트 윤치호조차 그의 일기에서 일제의 이러한 과민 반응이 "쩨쩨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윤치호는 총독부 기념일에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며 - 비록 소극적이라 할지라도 - 저항하는 조선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한심하게 생각했다.

윤치호는 일제의 태극 문양 사용 금지 조치도, 일장기를 게양해야 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의 저항도 모두 불만스러웠다. 한때 애국가를 작사해(혹은 그렇게 알려진) 뜨거운 애국심을 표현했던 윤치호는 그 특유의 현실주의적 태도와 사고로, 서서히 일제의 지배와 일장기 게양에 타협점을 찾고 있었다.

3·1 운동이 거의 마무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돼 체제를 갖춰 갈 무렵이던 10월, 조선에서는 천황 탄생일(천장절)에 일장기 게양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시류에 대해 윤치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태극은 한국인의 생활 깊숙이 사용돼 온 친숙한 문양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생활용품의 태극 문양 사용조차 금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태극선', 19~20세기 제작 추정, 도쿄박물관 소장).


"내일 일장기를 달 것이냐 하는 문제가 최근 며칠간의 가장 중요한 골칫거리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가 민영환 씨처럼 자살을 하거나 이승만 군처럼 떠난다면, 그것은 별문제다. 하지만 좋든 싫든 우리가 일본 법령의 보호하에서 사는 한, 다시 말해서 좋든 싫든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해 그 법령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한, 그 법령이 요구하는 사항을 준수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선인들 입장에서 일장기는 그저 일본의 법령하에서 살고 있다는 신호일 뿐이다. 그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일본 법령에 호소하지 않겠다고 작심한다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라면 그저 신호에 불과한 일장기 게양을 거부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30일 목요일)


"아침에 일장기를 내건 가정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일장기를 단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경찰관들이 상점과 가정집을 돌면서 일장기를 달라고 독려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예전에 프리드리히대왕이 사람 하나를 때리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날 무서워하지 마! 넌 날 좋아해야 해!'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일본식 충성심과 신도神道를 심어 주려는 시도야말로,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행하고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 중의 하나다. 충성심과 신도는 일본의 토양에 적합한 민족성이고 종교다. 열대식물이 조선의 정원에서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이 두 가지는 일본의 역사적 환경과 유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31일 금요일)

윤치호는 일장기가 단순한 '신호'에 불과하고, 일제의 법령하에 통치당하는 현실이므로 일장기 게양에 대한 감정적·민족적 저항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합리화했다. 반면, 일장기 게양을 강요하며 천황에 대한 충성과 신앙을 주입하려는 일제의 태도에 대해서도 냉소했다. 당대 최고 지식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모순돼 보였다. 하지만 그 자신도 결국 모순적 태도에 함몰돼 가고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윤치호(1865~1945).

3·1 운동을 겪은 일제는 보다 치밀하게 조선인들의 정신과 민족성을 파괴하고 작위적이라 하더라도 천황에 대한 충성과 신앙을 조선에 이식하기 위한 강고한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었다. 윤치호가 진단한 일제의 법령이 지배하는 현실은 외면적으로 문명국처럼 보이지만, 더욱 정교하고 노골적인 폭력과 야만이 도사리는 야누스의 얼굴이었다.

윤치호가 그의 일기에 남긴 "일장기는 그저 신호일 뿐"이라는 논리는 이후 1930년대 말 파시즘 시기 일제 당국이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당시 "신사참배는 그저 국가 의례일 뿐"이라는 회유 논리의 숨겨진 일란성쌍생아 같다는 기시감을 들게 한다.
바꿀 수 없다면 지운다 – 일장기 말소 사건



"손군은 우리 학교(양정고보)의 생도요, 우리도 일찍이 동경-하코네箱根 간 역전경주驛前競走의 선수여서 마라톤 경주의 고苦와 쾌快를 체득한 자요, 손군이 작년 11월 3일 동경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코스에서 2시간 26분 41초로써 세계최고기록을 작성할 때는 '선생님 얼굴이 보이도록 자동차를 일정한 거리로 앞서 모시오'하는 요구에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하면서도 이때에 생도는 교사의 심장 속에 녹아 합일되어 버렸다. 육향교六鄕橋 절반 지점에서부터 종점까지 차창에 얼굴을 제시하고 응원하는 교사의 쌍협雙頰(양 뺨)에는 제제할 줄 모르는 열루熱淚(뜨거운 눈물)가 시야를 흐르게 하니 이는 사제합일師弟合一의 화학적 변화에서 발생하는 눈물이었다. 그 결과가 세계기록이었다. 이런 처지에서 베를린 전파를 잡을 때에 남다른 감격이 없지 못하다. [김교신,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김교신 전집 1 - 인생론>(부키, 2001), 36~37쪽]

일본의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이자 <성서조선> 편집인으로 유명한 김교신 선생은 양정고보의 박물학 교사로 재직하면서 당대 최고의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정신적 멘토로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교신은 제자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 소식에 남다른 감격을 전하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김교신(1901~1945)과 양정고보 제자들.


"어째 손기정 군에게 우승의 영예가 돌아왔나. 식자에게는 일대 의문이다. 때에 공중에 소리가 있어 가로되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저의 심사心思에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중략)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며, 강한 자를 꺾으시고 약한 자를 세우시느니라(눅 1:51-53)'고.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시다. 손 군의 우승은 우리에게 심술궂은 여호와 신의 현존을 설교하여 마지 않는다. (1936년 9월)." [김교신,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성서조선> 1936년 9월호, <김교신 전집 1 - 인생론>(부키, 2001), 37~38쪽]

위와 같은 김교신의 감상은 1936년 일제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리라. 김교신이 인용한 누가복음 1장 51~53절은 독일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선전하고자 했던 나치스에게도, 일본의 마라톤 우승에 환호했지만 실상 그 면류관의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일제 당국에게도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대륙 침탈의 야욕을 노골화하며 조선에 대한 문화 통치를 전시체제로 전환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1920년대와는 달리 조선에서의 언론통제와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으며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체주의적 통제는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 손기정과 남승룡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과 3위 소식(1936년 8월 10일)은 일제의 체제 선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3·1 운동 이후 문화 통치기에 설립된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 사진을 게재하면서 그의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지워 보도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에서 연설하는 여운형(1886~1947) 선생. 1945년 8월 16일, 종로YMCA. 여운형 선생의 뒤편에 태극기 시안이 부착돼 있고, 우측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깃발이 게양돼 있다. 건준위 깃발에도 태극이 그려져 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첫 언론사는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여운형의 딸 여연구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전송해 온 손기정 선수의 입상식 사진을 쥔 아버지는 기쁨에 앞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였다. '신문을 이대로 내야 하는가? 아니다.' 아버지는 단호한 결심을 하고 사내 간부들을 불러 사진동판에서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를 지워 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모두 반대하였다. 그렇게 되면 신문이 폐간될 것은 물론 모두 감옥 귀신이 될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안심하십시오. 절망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기개와 자긍심을 안겨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리하여 8월 10일 <조선중앙일보>는 '오호, 대한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비롯해서 손기정의 특집 기사로 꽉 차고 가슴에 일장기를 지워 버린 선수의 사진이 크게 났다. [여연구,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2001)]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 보도는 여운형 선생과 더불어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이 투철한 양정고보 마라톤 선수 출신이자 손기정의 선배였던 유해붕 등 <조선중앙일보> 몇몇 직원들의 협력으로 이뤄 낸 사건이었다. 이 신문은 보도 직후 검열에 적발되지 않았고, 유해붕에게 이 사실을 전해들은 <동아일보>의 이길용이 후속으로 일장기 말소 보도를 이어 간 것이었다. 이후 <동아일보>의 말소 사실이 문제시되면서 <조선중앙일보>도 관련자들이 처벌받고 신문은 자진 휴간에 들어가 마침내 폐간됐다.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도 기독교인이었고,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이길용 기자도 인천 영화학교와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한 독립운동가 출신 기독교인이었다.



<동아일보> 일장기를 말소한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 원판 사진(위). 손기정·남승룡 선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조선중앙일보>1936년 8월 13일 자 조간 2판 지면(왼쪽)과 손기정 선수의 가슴 일장기를 말소한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 자(24일 석간) 2판 지면.

이길용 기자는 배재학당 졸업 후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하던 중 귀국해 철도국에 취업하고, 3·1 독립선언서와 상해임시정부 기밀문서 등을 철도 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자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돼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출옥 후 송진우 사장 권고로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길용은 대전지국에서 근무하며 대전 감리교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와 대전청년회의 뿌리가 된 대전소년회를 창설하는 등 애국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한국 최초의 체육 전문 기자로 <여자 정구 10년사>·<조선 야구사> 등을 집필하며 한국의 주체적인 스포츠 역사를 정리했다.

이길용은 스포츠를 통해 식민지 조선이 여전히 건재함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1932년 8월 제10회 미국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 마라톤 종목에 출전한 김은배·권태하 선수의 결승선 통과 사진에서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말소하면서 숨겨진 의기를 분출했다. 일제를 향한 그의 도전은 1936년 8월 <동아일보> 표지에도 이어져, 손기정 선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신동아>에 일장기 삭제 사진을 실은 것도 그가 주도해 진행된 일이었다. 연일 이어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이길용과 그의 동료들은 종로경찰서에서 극한 고문을 받은 뒤 1936년 9월 25일 강제 사직을 당했고, <동아일보>는 네 번째 정간을 당하고 <신동아>는 폐간되고 말았다. 이길용은 그 뒤에도 네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이길용(1899~?) 기자.

해방 직후 이길용은 <동아일보>에 복직했고,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를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1946년에는 이승만과 김구 선생이 공동회장으로 참여한 '기미 독립선언 전국대회'에 실행위원으로 참여했고 본 행사의 사회를 맡았다. 이후로 그는 <대한 체육사>와 <체육 연감>을 정리해 발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 당시 납북됐다. 1991년 이길용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1989년부터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그의 숭고한 정신과 삶을 기념해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공적 조서 개요를 보면 그가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민족 해방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꿈의 청년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1919년 만철滿鐵경성관리국에 근무하며 철도 수송 업무를 맡아 보는 것을 이용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보내오는 반일격문反日檄文을 수송하며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았고, 1936년 8월 25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의 사진을 <동아일보>에 게재할 때 손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리고 보도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운 후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공적이 인정되므로 건국훈장 애국장에 해당되는 분으로 사료된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관리 번호 제6292호)

기독교인 여운형과 이길용의 용기 있는 일장기 말소 보도는 조선 언론과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과 전시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비록 신문 지면을 통해서였지만, 일장기 말소라는 방식으로 일제에 담대히 저항한 두 기독교인 저널리스트의 양심과 정신은 더욱 빛나는 역사로 후대에 남게 됐다.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은 "슬푸다"라는 외마디 소리만을 엽서에 적어 친구에 부쳤던 청년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설움에도 일말의 위로를 주었을 것이며, 일제 강점 통치에 울분을 토하던 조선 민중들에게도 한줄기 희망이 됐다.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 수여 직후에 친구에게 보낸 엽서(위)와 사인. 여백에 "슬푸다"라는 단 세 글자만이 적혀 있다. 손기정 선수는 비록 일본 대표 선수로 출전했지만, 자신의 사인에서 일본식 이름인 'Kitei Son'이 아닌 한국 이름과 'KOREAN'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드러냈다. (박건호 소장).
교회 마당에 설치된 국기 게양탑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대륙 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일제는 새로운 전시체제에 국가를 총동원하고 사상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각종 국가 행사를 개최하며 신사참배 강요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32년부터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나 '만주사변 전몰자 위령제' 등에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려 했지만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마침내 1935년 11월 평남도청에서 일어난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인해 총독부와 도 당국은 '학교장 파면과 강제 폐교를 불사하겠다'는 경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신사참배 및 국가 의례 참가 강요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 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No. 114>(1940. 4.), 182~183쪽]

1937년 중일전쟁 직후 대륙 침략에 자신감을 얻은 일제는 1938년 1월 29일, 개신교 대표자들을 총독부 학무국에 초청해 전시체제와 황국신민화에 협조하라고 설득했고, 같은 해 2월에 이르러 조선총독부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정 정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1. 시국 인식 철저를 위하여 기독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여 지도 계몽에 힘쓸 것.

2. 시국 인식의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실시

(1) 교회당에 국기 게양탑을 건설할 것.

(2) 기독교인의 국기 경례, 동방 요배, 국가 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창을 실시할 것.

(3) 일반 신도의 신사참배에 바른 이해와 여행을 힘쓸 것.

(4) 서력 연호의 사용을 삼갈 것.

3.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서는 이상의 것들의 실시에 관하여 자각시킬 것.

4. 찬송가, 기도문, 설교에 있어 불온 내용을 검열, 임검臨檢 등으로 보다 엄중히 취체取締할 것.

5. 당국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신자는 법적 조치를 취할 것.

6. 국체에 맞는 기독교의 신건설 운동은 이를 적극 원조할 것." [<朝鮮總督府施政三十年史>(조선총독부, 1940), 833쪽]

이러한 일제의 회유와 억압 속에 기독교조선감리회는 1936년 6월 양주삼 총리사가 총독부 초청 좌담회에 참석한 후 일제의 입장을 수용했으며, 1938년 9월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도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한국 개신교의 대표 교파·교회들이 일제의 전시 총동원 체제와 황국신민화 정책에 순응하기에 이르렀다.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마치고 일동 평양 신사에 참배를 실시한 장로교 대표들.

이러한 일제의 교회 통제 정책 중에서도 신사참배 문제와 교회당 내 국기 게양탑 건설의 문제가 가장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다음은 1938년 5월 수원 기독교인들의 일장기 게양 반대 운동에 대한 보도다.


"수원서 고등계에서 목사 등 다수 남녀 기독교 신자를 검거 취조 중이던 바 요지음 취조의 일단락을 짓고 목사 외 좌기 6명의 남녀 기독교 신자를 보안법 위반 등 죄명하에 10일 경성지방 법원검사국에 송국하여 와서 방금 동법원 사상검사가 취조를 하고 있다는데 사건의 내용은 수원 기독교 신자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와 국기 게양을 반대하는 불온 운동을 일으키려던 것이라 한다." ['수원서 사건 기독교도 송국送局, 일당 7명 경성으로 : 신사참배와 국기 게양 반대 운동으로', <동아일보>, 1938년 5월 11일 자]

국기 게양과 신사참배에 저항한 수원 지역 기독교인들에 대한 <동아일보> 1938년 5월 11일 자 보도.

위의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부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교회 내 국기 게양 및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전국 대다수 교회는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며 교회 내에 국기 게양탑을 설치하고 일제가 요구하는 국가 행사를 적극적으로 개최했다. 필자가 당시의 언론 자료들을 조사한 바 교회당에 국기 게양탑을 설치한 지역적 사례와 그 범위는 평남·함북·전남·강원·충남·경북 등 전국적인 규모였다. 1938년 봄, 교회당 내 국기 게양대 설치와 국가 의례 개최에 관련한 신문 보도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 내에 국기 게양탑 설치와 국가 의례 개최 요구에 순응한 교회들에 대한 신문 보도들.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용반리에 잇는 장노파 교회에서는 지난 년말에 한 수일 동안 련합 사경회를 개최하엿는데 그때에 매일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제창하야 국민의 관념을 강조하엿다. 이것은 종내의 경향으로 보면 일대 원향願向으로서 당국에서도 감격하고 잇다.


함북 경성군鏡城郡 하의 긔독교도는 일전의 교도의 시국 좌담회를 열고 다음과 가튼 사항을 협의하엿다. ①매월 6일의 애국일 기타 축제일에는 신사에 참배할 것. ②예배일 기타 교회에 집회한 때에는 황거皇居를 요배할 것. ③각 교회 내에 국긔 게양탑을 건설할 것. ④축제일에는 반드시 각 집에 국긔를 게양 할 것 등을 협의하고 곳 이것의 설시에 착수하야 교도의 시국 인식을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엇다 한다." ['천도교와 기독교도 등 애국 행사 적극 참가 : 각 교회당에 국기 게양탑 건설코 황국신민의 서사 제송', <매일신보>, 1938년 1월 18일 자 2면]


"전남에 있어서의 기독교 목사를 위시하여 신도들 상당 다수에게서 높아지고 있는 황군의 위문, 국방 헌금, 신사참배 등 상당한 열성을 보이고, 심지어는 도제직회都諸職會 같은 것을 열어, 각 교회 매일 국기 게양탑을 건설하는 것을 결의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인쇄하여 각 교도에게 배포하는 등, 비상시국에 즉응하여 교연躈然하게 분기하고 있음은 왼쪽의 이러한 겹치는 이름들로 확인된다. 광주 양림정교회 목사 김영국, 광주 금정錦町 동 이경필李敬弼, 중앙교회 동 최병준, 가메오카정亀岡町교회 양응수, 광주교회 총무 김창선, 강진교회 집사 황복규 외 65명은 솔선하여 4월 2일의 진무덴노 마츠리神武天皇祭(신무천황제) 때에 신사참배를 행하여, 총후의 열성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각 교회도 국기 게양탑 건설, 전남의 기독교들, 총후의 집성을 피력', <부산일보>, 1938년 4월 7일 자 5면]


"춘천「그리스트」교회에서는 지난 1일 교회 정문에 국긔 게양탑을 건설하야「그리스트」신자도 훌륭한 황국신민인 것을 자랑하엿는데 압흐로는 집회가 잇는 때마다 벽두에 먼저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하기로 결정하엿다." ['춘천 기독교회서도 국기 게양, 신사참배 - 조국에 진충보국을 결의', <매일신보>, 1938년 4월 16일 자 3면]


"보은 야소교회에서도 황국신민으로서 그 의무를 철저히 하기 위하야 동 야소교 구내에다가 국긔 게양대를 설치하는 동시에 지난 17일에는 야소교인 50여명이 당일 오후 1시에 보은 신명신사를 참배하얏다 한다." ['보은 야소교회서도 교도가 신사참배 : 구내에는 국기 게양대', <매일신보>, 1938년 4월 19일 자 4면]


"비상시국에 잇서서의 총후 국민의 인식 강조에 박차를 가하고 일층 일본 정신과 내선일체의 인식 강조를 위하야 청진부 내의 중앙中央, 서부西部, 동부東部, 신암동성결新岩洞聖潔, 제칠일안식第七日安息의 각 교회에서는 국기 게양탑에 집회하야 일반 신자의게 국가 관렴의 보급을 위해 당국과 일체 협동하리라 한다." ['청진 각 교회에서 국기 게양탑 설치', <매일신보>, 1938년 5월 10일 자 2면]


"충남 부여군 내에 산재하여 잇는 예수교회 각 단체 34개소의 교역자 전부가 부여경찰서 연무장에 집합하야 교역자 시국 좌담회敎役者時局座談會를 개최하고 현하 중대 시국에 당면한 이즈음 기독교 교역자로서 마땅히 가진 태도와 새로운 인식을 현저히 하고저 흉금을 펴노코 잇엇는데 그중에 제일 중대 문제는 국체명징國體明徵에 관하야 금후로는 ①각 신도들도 각기 교회 예배 순서에 국가 합창, 신민서사를 반드시 너흘 것과 ②각 교회마다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고 동방 요배를 할 것과 ③축제일에는 반드시 신사참배를 실행할 것을 결의하엿다는데 지난 4월 26일의 국민정신 총동원 주간을 계기로 하야 각 교회는 전부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고 국기를 게양하엿으며 예배 시마다는 국가 합창한 후 신민서사를 암송하엿다는데 국체명징의 인식이 각 신도들에까지 철저하게 되엇으므로 현하 국민정신의 총동원에 제하야 만흔 성과를 거두게 되엇다 한다." ['부여 기독교회에서 국기 게양대 설치',<동아일보>, 1938년 5월 8일 자 7면]


"신사참배 문제로 당국에서 수차 종용하여 온 결과 시국이 점차 중대화함에 감하여 선산군善山郡(현재의 경북 구미시 - 필자 주) 내의 각 야소교에서는 종래 고집하여 오든 신자 불참배는 포기하고 모든 국가 행사에 참가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총후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저 지난 천장절에도 일제히 봉축식을 거행하고 아침마다 각 교회에서 시국 인식에 대한 기도를 하고 경축일에는 일장기를 놉히 걸고 시국 재인식에 철저를 강화하고 잇든 바, 지난번 선산 야소교회에서는 동교회 시국 인식에 대한 강화講話를 소목사蘇牧師가 장시간에 긍하여 설화한 바 일반 부녀 신도들은 솔선하야 각각 푼푼이 거출하여 제1선에서 활동하는 황군을 위하야 국방비로 금 3원 3전을 소관 경찰서에 의뢰하엿다 한다." ['신사참배와 국기 게양 - 선산 교회서도 실시', <매일신보>, 1938년 5월 17일 자 4면]

<동아일보>·<매일신보>·<부산일보> 등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1938년 4월~5월에 걸쳐 전국 교회의 국기 게양탑 설치와 황국신민서사 제창, 국가 제창, 동방 요배, 신사참배의 실시에 대한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2월 총독부가 교회에 대한 시정 정책을 발표한 직후의 일이라 주목된다. <매일신보> 평남 용강군 장로교 연합 사경회의 황국신민서사 제창 소식을 알리는 보도에서는 그 말미에 "이것은 종래의 경향으로 보면 일대 원향으로서 당국에서도 감격하고 있다"고 말하며, 같은 신문의 선산교회 관련 보도 서두에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당국에서 수차 종용하여 온 결과 시국이 점차 중대화 함에 감感하여 선산군 내 각 야소교에서는 종래 고집하여 오던 신자 불참배는 포기하고"라는 대목에서 이 시기가 한국교회 훼절·굴종의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고 있음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

<매일신보> 1932년 12월 29일 자에 게재된 남산 국기 게양탑(현재 남산 팔각정 부근, 왼쪽) / <경성일보> 1933년 2월 19일 자에 수록된 국기 게양탑 설치 광고(가운데) / <대륙신사대관>(1941)에 수록된 천안 신사의 국기 게양탑 전경. 일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전국의 다양한 시설(학교, 관공서, 종교 시설, 공원 등)에 국기 게양탑을 대대적으로 설치했다. [이순우, '서울 남산 꼭대기 국사당 터에 건립된 일제의 국기 게양탑',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민족사랑>, 2016년 12월호, 47쪽에서 인용]

위의 기사들처럼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고조된 1930년대 말에 이르러 교회는 예배당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교회 내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와 국가 의례를 노골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이러한 일장기와 신사에 대한 숭배와 선양 사업은 한국 기독교가 그동안 지켜 온 신앙의 정통성과 민족 정체성 양 축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유래가 없는 타협과 굴종이었다. 결국 1938년의 치욕적 역사를 통해 소위 '민족 교회'로서의 역사적 명맥은 소수의 저항자들을 통해 계승·유지될 수밖에 없게 됐다.

예배당 입구에 일장기가 새겨진 '종교보국'과 '황도선양'이라는 팻말을 부착한 경남 합천의 한 농촌 교회 모습. (1938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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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일장기 부채를 헌납했나
[태극기와 한국교회] 저항과 훼절, 일상과 권력의 함수관계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04.14 

"신사참배는 더욱 기회를 볼 필요가 있으나"



"4. 기독교도의 동정.

1. 기독교의 시국 인식

(1) 평남 노회의 동정

평안남도 소재 평양 및 평서 양 노회는 12월 7일부터 평양부에 있어서 동계 연합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위 양 노회 간부는 신사참배 문제 이래 각종 국가적 행사에 교리 위반을 방패로 당국의 방침에 결항決抗하고 있는 바 (중략) 소관 평양서에 있어서 사전 책임자에게 엄중 경고 (중략) 노회 자체의 존립에 미칠 영향을 가늠하기가 어렵지(난계難計) 않으므로, 점차 자중하여 시국에 순응하여 숭미崇米 사상을 배제해야 하니, 동교仝教 혁신을 말하는 데 이른 결과, 혁신 의식이 점차 교내에 미만(㳽漫, 넘쳐 흐름)하여 사경회 회장에 있어서 민족파의 급선봉인 목사 주기철도 드디어 대세에 순응하여 13일 제7일에 참가자 2000명에 대하여 극히 시국을 인식한 인사를 한 뒤에 출정군인 가족出征軍人 家族 위문금의 헌납을 제안했으니 즉좌卽座에서 56엔 50전의 거금이 모였다." ['치안 상황: 기독교도의 동정' 제44보-47보, <국내 항일운동 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1938년 1월 14일]

1937년 12월 7일, 평양과 평서 양 노회가 공동주최한 동계 연합 사경회가 평양에서 개최됐다. 당시 서북 지역 장로교회들은 "신사참배 문제와 각종 국가 의례에 교리 위반을 명분 삼아 저항"했다. 하지만 일제 당국의 엄중한 경고로 "노회 자체의 존립"에 위협을 느낀 장로교 지도부는 "점차 순응"했다. 마침내 12월 13일 2000명의 사경회 참가자 앞에서 장로교 지도부의 전향적 태도가 미묘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치안 상황: 기독교의 동정',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1938년 1월 14일. 이 보고서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평양 지역 장로교 지도자들의 전향적 태도에 대한 보고가 비교적 상세히 적혀 있다. 이 당시 지도부는 신사참배 문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논의하기로 하되 국기 게양과 동방 요배는 교회 차원에서 수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평양 연합 사경회에서의 비상한 기류 변화를 감지하고 보고한 문서 '치안 상황: 기독교도의 동정'(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1938년 1월 14일)에서는 "사경회 회장에 있어서 민족파의 급선봉인 주(기철)목사(당시 부노회장 - 필자 주)"가 "극히 시국을 인식한 인사"와 "(중일전쟁) 출정군인 가족을 위한 위문금 헌납 제안"을 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평양에서는 1935년 일제가 평남도지사 야스다케安武直夫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와 국가 의례를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강요하기 시작해 1938년에 이르러 그 강압적 핍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 속에서 "교리상 이유로" 신사참배를 비롯한 각종 국가 의례를 반대해 오던 장로교의 보수적인 지도자들이 일제 당국으로선 눈엣가시 같았을 것이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과 이어지는 승전보, 일제의 더욱 강고해진 탄압과 강요 앞에서 완강하던 교회 지도자들도 결국 "일제에 순응하는 것은 시대의 대세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체념과 한계에 봉착했다.

1932년 평양 숭실학교 강당에서 열린 평서·평양 양 노회 연합 사경회 광경

주기철 목사(1897~1944)

평양·평서 양 노회의 지도자들은 연합 사경회 기간에 일종의 타협안을 궁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사경회를 개최한 지 7일째 되는 13일, 2000명의 신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천명했다.


"주 목사의 전향한 행위転向振에 일반 회중도 다대한 감동을 받은 바와 같이 간부 등은 '신사참배는 더욱 기회를 볼 필요가 있으나, 당장은 국기 게양 및 동방 요배는 장래 이것을 실행해야 함'이라고 의견에 일치하여 일반에게 주지周知시켜야 함을 가지고, 동정 시찰 중." ['치안 상황: 기독교도의 동정' 제44보-47보, <국내 항일운동 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1938년 1월 14일]

정리하면 "교리상 신사참배를 시행하는 것은 곤란하나 일제가 요구하는 국기 게양과 동방 요배는 앞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장면은 이후 네 차례의 구속과 탄압 속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의 저항 동기가 순수한 종교적·교리적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주기철을 비롯한 당대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교회 내 일장기 게양과 동방 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은 정치적 타협 과제에 불과했다. 이렇게 1937년 12월 평양 연합 사경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일말의 갈등 가능성만 여지로 남겼고, 전국 모든 교회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빠르게 순응해 갔다. 그리고 1938년 2월 평북노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시작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년 9월 10일)는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당시 홍택기 총회장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황국신민서사 암송(사진 위)과 동방 요배 모습(사진 아래).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宗敎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自覺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率先 수행하고 급히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 總動員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非常時局下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성명서 중에서)

이러한 장로교 총회 결의에 반발한 평양신학교는 가을 학기 개교를 무기한 연기·휴교했고, 소위 (후)평양신학교가 총독부 인가를 받아 1940년 4월 11일 개교(교장 채필근 목사)했다. 이때부터 평양신학교에서도 각 절기마다 신사참배와 동방 요배를 실시했으며, 교내 강당에는 일장기를 게양했다.

1941년 3월 12일 (후)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 모습. 강당 중앙 전면에 일장기가 크게 게양돼 있다.

1930년대 말 김화감리교회 내부 모습.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피도수 선교사가 예배당을 한국식으로 아름답게 조성했지만, 그 중앙 상단에는 일장기가 게양됐다.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붉은 신앙


파시즘 시기 일제는 한국교회 어용화 및 일본 기독교 체제로의 편입을 적극 획책했다. 1938년 5월 8일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창설해 이를 '친일어용단체'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 단체는 조선 내 일본인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 "이 시국을 극복하자면 내선內鮮 교회가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조직됐다. "본회는 기독교의 단결을 도모하고 상호 협조하여 기독교 전도의 효과를 올려, 성실한 황국신민으로서 보국함을 목적으로 한다"(<靑年>, 1938년 7월 호, 18~19쪽)는 조항을 포함한 11개조로 된 간단한 회칙을 통과시킨 뒤, 위원장에 일본 교회의 니와 세이지로丹羽淸次郎, 부위원장에 아키츠키 이타루秋月致, 정춘수 등이 당선됐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법적으로 일본기독교단 산하에 예속 됐다. 이 시기부터 일제는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신사참배를 대대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령'을 내려 민족말살·황국신민화 정책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내선일체'의 미명하에 조선인 청년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실시했다. 이에 경성의 각 교파 기독교회들은 1942년 5월 1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신자 1000여 명을 동원한 가운데, '징병제 감사 기독교 신도 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감리교 정춘수·박연서 목사, 장로교 전필순·김영주 목사 등은 "진충보국盡忠報國의 결의를 보이고, 동시에 전 조선 700만 청년에게 용진분기勇進奮起할 것"을 외쳤다[<기독교신문>, 1942년 5월 13일 자]. 그들은 이 행사장에서 다음과 같은 낯 뜨거운 성명을 낭독하고 천황의 장수를 기원하며 '성수만세聖壽萬世'를 봉창했다.

1942년 대전역에서 전선으로 출병하는 조선 청년들을 배웅하는 이 땅의 가련한 어머니들. 그들이 손에 들고 흔든 일장기와 "덴노 반자이!"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병합 이후 이날이 빨리 오기를 얼마나 앙망仰望하고 있었던가. 30여 년간 조선 시정 중施政 中 최대의 획기적 업적이고, 특히 남南 총독(미나미 지로 총독 - 필자 주)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이념에 현실적인 요소를 넣은 것이어서 실로 찬송할 말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는 대도大道가 열린 것이다. 소집을 받을 청년 제군! 제군은 폐하의 방패가 되려는 어신임御新任을 얻은 것이다. 이 감격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또 일장기에 환송을 받는 세계에 관절冠絶한 황군 용사를 내 아들, 내 손자 내 동생을 갖는 아버지도 조부도, 형도, 누나도 울어라. 울 수 있는데 까지 울어라. 울음이 그치거든 여하如何히 하여 이 감격에 답할까를 종용히 생각하라. 기실其實 아등我等은 아직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에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폐하의 적자赤子라고 말하여 부끄러운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도 동포에 이 영광을 사賜하옵신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어인자御仁慈에 봉대奉對하여 감사感謝의 적성赤誠을 봉捧하게 됨에 응소應召되는 자는 물론 노약남녀老若男女는 함께 감분흥기感奮興起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중략) 취중就中 아등我等 기독교도는 율선率先 몸으로써 이것의 지도指導에 당할 정신대挺身隊가 되기를 전 동포에 호소하고 또한 서약하는 바이다." ['징병제 감사 기독교 신도 대회: 성명서', <기독교신문>, 1942년 5월 13일 자, 2면]

한국교회의 훼절한 지도자들은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교회 종鐘과 대문을 떼다 바쳤으며, 많은 청년들에게 전장에 자원입대하라고 종용·강권했다. 그리고 전장으로 떠나는 장병들에게 일장기를 들어 환송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전쟁 부역 활동은 동남아시아·태평양 등지에서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을 위한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이는 전선에서 무더위에 고통받는 장병들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일장기가 그려진 '히노마루 부채'를 다량 제작해 보내는 사업이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이러한 일제의 전시 총동원 체제에 동원되거나 적극 동참했다. 1942년 이래 한국교회의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에 관한 보도는 적잖이 확인된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기사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 시기 제작된 히노마루 부채의 앞면(사진 위)과 뒷면(사진 아래). 국방부인회(1932~1942)에서 제작해 전장에 헌납한 부채로 '국방 부인의 노래'와 '총후의 꽃' 노래 가사가 뒷면에 적혀 있다. 사진 제공 홍이표


"원산 기독교연합회 주최로 지난 7월 8일 밤에 중앙교회당에서 지나사변(일본에서 중일전쟁을 이르던 말 - 편집자 주) 급 대조봉대(일왕이 미국에게 선전포고한 날 - 편집자 주) 기념 예배회를 열고, 부위원장 권의봉權義奉 목사 사회하에 국민의례로 시작하여 '성서적으로 본 금차 전쟁'이란 제로 위원장 김상권金尙權 목사의 시국 설교가 있었고, 히노마루日ノ丸 부채 헌금을 한 후 폐회하고, 다시 간담회로 옮기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한다." ['원산 기련 주최 사변 기념 예배', <기독교신문>, 1942년 7월 2일 자]


"빗나는 대전과를 거두어 싸우고 잇는 남방의 제일선 용사에게 종후의 서늘한 바람을 보내자고 본사에서 제창한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은 사회 각 방면에 큰 반향을 이르켜 연일 적성의 헌납 부대가 쇄도하고 잇는 중인데 24일에는 부내 종로 2정목 91번지 조선기독교서회 양원주삼(梁原柱三, 양주삼)씨가 본사를 방문하고 부채 1000본의 대금으로 280원을 기탁하엿다." ['적성의 히노마루 부채 일천 본을 헌납: 조선기독교서회의 적성赤誠', <매일신보>, 1942년 4월 28일 자]


"남방의 고열 속에서 충용무비忠勇無比한 활약을 하고잇는 육해군 장병에게 총후 국민의 적은 뜻이라도 표하겟다는 본사 주최의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의 소문을 들은 의산노회 교직자 혁신회革新會에서는 신의주와 의주군 일대에 잇는 각종의 예수교회 단체에 헌납하기를 제의하야 크다란 감격 밑에 각 교회 신도들은 1만 본을 자진 헌납하엿다. 20일 오후 1시 동 혁신회장 산본득의山本得義씨는 본보 평북지사를 방문하고 1만 본 대금 2800원을 내여 노흐며 겸손한 태도로 다음과 가치 말한다.



'귀사에서 히노마루 부채를 헌납한다는 사고를 보고 의산노회 교직자 혁신회에서는 전 교도의 헌납을 꾀하엿습니다. 세간에서는 기독교도들은 찬송가나 부르고 기도나 하는 줄로만 알지만 우리들은 신앙보국信仰報國이라는 큰 깃발 밑에서 국책에 순응하려 합니다. 귀사의 이 헌납 운동은 실로 더운 지대에 출정한 육해군 장병에게 적지 안은 도움이 될 것을 알고저 그나마 1만 본을 헌납한 것입니다. 이 헌납하는 부채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붉은 신앙이 잇는 것을 특별히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적성의 히노마루 선자扇子 신의주서 만 본 헌납: 야소교도들 애국의 열정", <매일신보>, 1942년 5월 22일 자]

<기독교신문> 1942년 6월 3일 자 기사 '감리교단 충청구역 연회 개요'를 보면 여자 사업의 중요 사업으로 '일장기 부채(日ノ丸扇子, 히노마루 센수) 백 본 헌납百 本 獻納'이라는 보고가 확인된다. 이처럼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기독교 기관인 기독교서회를 비롯해 지방 교회와 여성들에게까지도 요구되는 전시 총동원 체제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일장기 부채 헌납 운동 관련 기사들. '원산 기련 주최: 사변 기념 예배', <기독교신문>, 1942년 7월 29일 자(사진 위), '적성의 히노마루 부채: 일천 본을 헌납 조선예수교서회의 적성', <매일신보>, 1942년 4월 28일 자(사진 왼쪽), '적성의 히노마루 선자 신의주서 만 본 헌납: 야소교도들 애국의 열정', <매일신보>, 1942년 5월 22일 자(사진 오른쪽).

1937~1945년은 한국교회사 굴욕과 암흑의 시대였고, 이 시기 한국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는 훼절과 순교가 교차했다. 전시체제 총동원령의 열기 속에 히노마루가 새겨진 부채를 들고 땀을 식혔을 그 시대의 부채질 소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후텁지근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한 일장기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산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수혜자이자 생산자이다. 그래서 결혼하고 출산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시대의 다양한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특하고도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만들어 왔다. 그런 점에서 문화라는 것도 순수하게 문화적인 것은 없고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건호,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휴머니스트), 236쪽]

역사학자 박건호는 2020년 출간한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 평범한 물건에 담긴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의 체취가 깃든 일상의 흔적을 통해 대중적·미시적 역사 서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는 12장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에서 해방 이후 태극기를 게양한 결혼식 문화를 통해 국가주의가 당대 민초들의 삶과 일상에 미친 강한 영향력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태극기가 게양된 1950년대 결혼 사진들.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국가주의적 상징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박건호 소장


"이런 결혼식 문화의 배경에는 일제강점기 말 군국주의의 영향이 있는 듯하다. 이제껏 내가 수집한 일제 말기의 결혼 기념사진 대부분은 결혼식장에 일장기가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은 대부분 결혼식장에서 혼례를 치르는 '신식 결혼식'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결혼식장에서 '신식'으로 예식을 치르고 남긴 결혼 기념사진들, 그중 특히 일제강점기 말의 사진에는 어김없이 일장기가 등장한다. 욱일기는 물론이고 일본의 동맹국이던 독일의 나치 깃발이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일제강점기 황국신민화 교육의 일환으로 궁성 요배(동방 요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강요와 함께 히노마루(일장기)에 대한 배례가 강요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결혼식장에도 일장기가 걸렸을 것이다. 이런 일제강점기 결혼식장의 일장기가 해방 이후 자연스럽게 태극기로 바뀐 것이 아니었을까?" (12장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 245~247쪽)

박건호는 "해방 이후 북한 체제와 대결해야 하는 이승만 정부가 국민 결속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태극기의 상징성을 더욱 강조"했으며, "1950년대 한국인들이 해방을 기쁨을 일상생활에서 표현하는 차원에서 결혼식장 태극기 게양을 실천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는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힘이 세다. 일제 파시즘의 전시체제는 해방 이후 수립된 새로운 대한민국 정부 위정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지배 논리로 일정 부분 수용·동원됐다. 아울러 한국전쟁이라는 극심한 민족상잔 비극을 겪은 이후로는, 실제적으로 상존하는 주적을 앞에 두고 더욱더 강고한 국가주의를 주입해야 했을 것이다.

파시즘 시기 일제의 지배 논리는 '식민지민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한 제국'이었다. 아동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맹세하는 서사를 암송해야 했으며, 모든 젊은이들은 국가의 미래 세대를 생산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며 혼례를 치러야 했다. 결혼식장에 일장기가 게양된 것은 이러한 파시즘 지배 이데올로기의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그리고 신식 결혼식에서 가장 선호된 장소인 교회 예배당은 이러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공간이 됐다.

교회 내 일장기(혹은 욱일기) 게양 풍경은 비단 결혼식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은퇴 목회자 기념식이나 유치원 졸업식 등 교회에서 이뤄진 행사 대부분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갔다. 그렇게 파시즘 시기 한국교회는 국가권력에 철저히 순응해, 얻을 수 있는 일상의 안락과 일말의 권력을 향유하며 도적같이 찾아올 '해방의 카이로스'를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었다.



일제 말기 일장기와 욱일기를 게양한 결혼식 풍경. 박건호 소장

1940년대 초, 대전감리교회 인동예배당에서의 결혼식 풍경. 중앙에는 일장기가, 오른쪽 벽면에는 황국신민서사가 부착돼 있다. 사진 제공 김영순

만국기가 게양된 1940년대 교회 결혼식 풍경. 만국기 중에는 나치기와 욱일기,일장기 등이 포함돼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장

1940년대 욱일기와 일장기가 포함된 만국기를 게양한 삼척읍교회 결혼식 풍경. 사진 제공 홍승표

1934년 함경남도 단천읍교회 보구유치원 졸업식 풍경.

1942년 함중노회 강두송 목사 성역 30주년 기념식. 예배당 전면 상단에 욱일기와 일장기를 포함한 만국기가 게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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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제국과 혼종 DNA
[태극기와 한국교회] 십자가와 태극기의 혼합적 변형과 일탈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05.13 

정도교 이순화가 뿌린 혼종 DNA


천부교 박태선, 통일교 문선명, 영생교 조희성, JMS 정명석, 신천지 이만희 등…. 현대 한국교회와 사회에 끊임없이 논란·물의를 일으켰거나 여전히 일으키고 있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들은 이제 일반 대중에게도 낯설지 않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과도기를 거치며 확산한 수많은 신흥종교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면, 그 정점에는 '정도교'의 창시자 '이순화'라는 인물이 서 있다.
경북 거창 출신 이순화(1870~1936)는 평범한 농민의 딸로 성장해 남편 진경성과 함께 1911년 서간도로 이주했다. 그가 38세 때 다섯 살 아들이 병에 들었는데, 물감 장수의 부인에게 전도받아 예수를 믿고 아들의 병이 낫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후로 기도 생활에 전념한 이순화는 48세 되던 1917년 3월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이제부터 이 두 가지 기旗(녹십자기·태극팔괘기)를 가지고 일을 하여 천하 만민에게 신시대 천국 건설 운동과 진리 방법을 가르쳐서 나의 뜻을 이루고 너희 세계 인류가 천국 복락을 누리도록 하여라. (중략)



품질 좋은 단군 자손들아! 성신으로 교통시켜 줄 것이니 시급히 독립운동을 일으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 나라에 거하여 심판 권세 가지고 인간들의 모든 죄악을 심판한 후에 천하만국을 통일하여 일체로 화평케 다스려 천국 복락을 줄 것이고 만일 너희 나라가 독립국가가 되지 못하면, 내가 너희 나라에서 거할 수 없고, 세상은 불원간 망할 것이니라. (중략)



각국 각처에 살고 있는 조선 민족은 태극기를 만들어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어라. 이같이 하라고 하는 뜻은 내가 이 천지 구만 년 천국 시대에는 조선에 거하여 각국 대표자들을 없애버리고 통일 천하에 한 법으로 다스려 일체로 천국 복락을 누리기 위함이니 (하략)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311쪽, 괄호 안은 필자 추가]

기도 중에 세계 통일 평화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녹십자기綠十字旗', 세계 정돈 평화 시대를 의미하는 '태극팔괘기太極八卦旗'는 정도교 창교주 이순화 신앙 운동의 핵심적인 상징이 됐다. 이순화와 그의 추종자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사대문에 녹십자기와 태극팔괘기를 달고 '예수교 찬미가'와 '독립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제의 '예심종결 결정서'는 이순화와 그의 추종자가 시위 도중 배포한 불온 문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기미년 6월 26일 천명天命을 받아서 천하 만민에게 고한다. 나는 천天, 인人, 만물을 만들어 나라마다 그 대표자를 정해 두었는데, 각 대표자들은 사욕私慾으로 분쟁을 일으켜 만국을 부패시킨 것이다. 나는 일찍이 조선 나라에 만국독립기인 (태극)팔괘기와 십자기를 부여했는데도 너희들은 그것을 잘 수호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중략) 선천先天 시대에 사용하던 기는 전부 파기하고 내가 주는 팔괘기와 십자기를 게양하면 만국 만민이 구제될 것이다. 나는 천사에게 명하여 만국대표기를 경성 동서남북 사대문에 세움으로써 6월 29일을 기해 어떤 사람이라도 이 기를 수호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또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은 서로 융화하여 부패시키고 망치는 일을 중지하면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시대가 올 것이다."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 결정서'(1920년 4월 20일) 중에서,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313쪽]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6개월의 징역을 마치고 1923년 출옥한 이순화는 1924년 3월 초 신자 400여 명을 이끌고 충남 계룡산 신도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정도교' 포교 활동을 하다 1936년 1월 26일 67세의 일기로 병사했다. 이순화의 별세 후 정도교 2대 교주는 그의 아들 진영수가 맡게 됐고, 이후에도 조선 독립과 일제 패망을 부르짖고, 천황제 비판 등으로 일제의 검속과 탄압을 겪었다.

정도교 2대 교주 진영수(사진 오른쪽)와 故 탁명환 소장. 정도교 교당 배후에는 녹십자기와 팔괘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정도교는 체계적인 교리와 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천국 건설의 중심지로 한국을 예정"해 놓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만국에서 국어, 국문, 국기를 다 일체로 없애 버리고, 한국어와 국문, 한국기(태극기) 그리고 녹십자기를 세계만방에서 다 같이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냈다. 이러한 내용은 이순화가 받은 계시를 경전으로 정리한 <정도교 법문>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정도교 성가>에서도 태극기와 십자기의 상징성·중요성을 다양한 곡이 등장한다.


1. 펄럭이는 녹십자기 계룡주산 형제봉 밑

지상천국 기호므로 우리 함께 모셔 오세

2. 녹십자 팔괘기는 신시대의 표준 기호

만민들의 생문방길 구원 기호 분명하다.

3. 성스럽고 거룩하신 성부 뜻을 깨달아서

썩은 세상 바로잡아 빛 세계를 맞이하세

4. 천하 만민 형제들아 일심 통일 단결로써

십자기 뜻 깨달아서 영생 길로 걸어가세

5. 신시대의 녹십자기 반공중에 높이 솟아

날으는 것 바라볼 때 기쁘고도 즐겁도다

(<정도교 성가> 제59장, '성부 뜻을 깨달아서 십자팔괘 높이 들고 천국 건설' 중에서)

정도교의 정기 예배는 매월 3회 음력 9일, 19일, 29일에 시행했으며, 태극팔괘기와 녹십자기가 장식된 천단天壇에서 녹십자기가 그려진 신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백색포를 둘렀다.



계룡산에 있었던 정도교 본부와 그 신자들(사진 위). 유니폼에는 녹십자가 그려져 있고, 양쪽에 녹십자기와 팔괘태극기를 들고 있다. 제단(사진 아래)도 녹십자기와 태극기로 장식돼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는 <현대종교> 2020년 3월호에 기고한 '정도교와 이순화'라는 글에서, 정도교가 처음에는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1924년 계룡산 신도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정감록과 도참사상이 혼합된 '신흥종교'로 변형"됐으며, 또 일제강점기라는 비정상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항일운동을 과감하게 실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순화의 정도교는 굴절된 민족주의적 혼합종교의 효시가 되어,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발흥·확산에 지대하고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천국의 도래와 정도령 혹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한 이순화의 논리는 이후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 세력에 파급됐다.

한국 주요 이단 계보도. 싸이비가 판치는 세상_싸이판2 유튜브 채널 갈무리
새주파 김성도와 그 후예들


이순화와 더불어 서북 지역에서 발흥한 '새주파(성주교)'의 김성도는, 이순화가 보여 준 민족주의적 특성을 답습하면서도 현대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윤리적 일탈에 명분을 제공하는 교리의 해석·변형을 모색했다.


"1923년 음력 4월 2일에 김성도는 입신하여 천군 천사들을 만났고 영계에 들어갈 때에 사탄의 방해를 받았으나 이기고 들어가서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때 예수와 나눈 대화 속에는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열흘 뒤인 음력 4월 12일에는 예수와의 두 번째 면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로부터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생각하는백성), 24쪽]

'새주파'라는 이름은 "새 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순화의 한반도 메시아 도래설 외에도 죄의 근원이 '음란'이라는 논리를 구축한다. 이는 세 번째 결혼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아들의 죽음과 상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시집 가족들의 박해 경험에서 비롯한, 가부장적 권력과 남성 중심적 폭력성에 대한 거부감·혐오가 성서 해석에 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이후 새주파에 합류한 예수교회의 창립 주역 백남주 목사와 그의 제자 김백문이 체계적으로 계승해 나간다. 김성도의 신비체험과 성적 타락설, 한반도 재림주 도래설 등의 주장을 문제시한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1925년 그를 출교 처분했다.



새주파 교주 김성도(사진 위)와 그의 사상을 체계화한 백남주(사진 아래 왼쪽)·김백문.

백남주는 신비주의자 스웨덴보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새 생명의 길>(1933)에서 "구약, 신약, 새 생명의 시대"라는 '삼시대론'을 펴면서, 이 시대에 새로운 구원자가 도래할 것이라는 신흥종교 이론을 개진했다. 그의 수제자 김백문은 1937년 새주파 성주교 창립 예배 당시 사회를 볼 정도로 백남주·김성도의 메시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해방 이후 경기도 파주에 '예수교이스라엘수도원'을 시작한 김백문은 <성신신학>(1954)·<기독교 근본원리>(1958)에서 인간의 타락을 '성적 타락'으로 보고, 백남주의 삼시대론을 계승하며 이후 문선명의 <원리해설>(1957)과 '통일교'의 발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75년 통일교에서 개최한 서울 여의도 '구국 세계 대회'. 100만 인파가 운집한 당시 국내 최대 규모 행사였다. 행사장 좌우에는 욱일기와 유사한 형태의 통일교 상징이, 중앙에는 만국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문선명이 1975년 1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한국 각계 인사 초청 만찬회. 만찬장 중앙 상단에 태극기가, 하단에는 통일교기가 게양돼 있다.

최근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통일교도들. 태극기와 통일교기를 함께 들고 있다.

이순화·김성도 등에서 비롯한 신비적 계시 신앙의 역사적 노정에서 배태한 한국 기독교계의 신흥종교들은 '구약과 신약 시대 이후의 새 메시아의 시대'를 천명하며, 그러한 역사가 성취될 땅은 '한반도'가 될 것이라는 세계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굴절된 민족주의와 동양 종교적 요소들과 혼합돼, 근대화·식민지·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역사적 콘텍스트하에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민중의 영혼 속으로 빠르게 파급돼 갔다.

이순화의 정도교나 김성도의 성주교는 해방 이전까지도 항일적인 면모를 보이며, 민족주의적 가치와 기독교 신앙을 조합하고자 모색했다. 하지만 영적 투쟁의 대상이 사라진 해방 정국과 분단 체제 하에서 그 후예들로 불리는 여러 상이한 신흥종교 분파에 이르러, 민족적 정체성은 단지 교리적 차원에서의 선언으로 전락했다.

통일교의 문선명, 천부교의 박태선, 동방교의 노광공, 세계일가공회의 양도천, 새마을전도회(천국복음전도회)의 구인회, 대한기독교천도관의 천옥찬, 만교통화교(에덴문화연구원)의 김민석, 영생교의 조희성, JMS의 정명석, 신천지의 이만희 등 다양한 신흥종교 분파로 이어지는 변이·진화 과정은 점차 '정치적 편향'과 '내적 교조화'로 치달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개 교주를 한반도에 도래한 새로운 메시아로 내세우고, 민족적 가치와 태극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문선명·양도천·구인회·천옥찬·김민석 등은 태극 문양을 종교적 행위·상징·교리 등에 적극 활용해 포교했다.

태극 문양과 십자가를 겹친 세계일가공회의 심벌(사진 왼쪽)과 교주 양도천. 가운데 사진의 제목은 '백마를 탄 어린양'이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새마을전도회(천국복음전도회)는 태극기를 성서적으로 풀이해 새 예루살렘인 한국에 지상천국이 건설된다고 주장했다. 교주 구인회(사진 왼쪽)은 박정희 정권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했지만 1975년 사이비 종교 일제 단속 과정에서 구금돼 옥사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태극 문양이 박힌 구인회의 묘. 비석에는 '재림 예수님의 묘'라고 적혀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박정희와 자신의 사진을 나란히 게시하고 태극기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구인회. 사진 제공 현대종교

전도관 출신 천옥찬은 박태선의 감람나무 사명은 끝났고, 자신의 무화과나무 사명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며 대한기독교천도관을 창설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천도관 강단에 게시된 감사장. 교인들이 교주 천옥찬에게 헌사했다. 중앙 상단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자신을 '민석 대왕 심판주'라고 칭한 만교통화교(에덴문화연구원) 교주 김민석. 사진 제공 현대종교
시온산제국이 세운 망각 지대


이순화에서 신천지로 이어지는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흐름과는 별개로, 경북 지역 장로교를 기반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신앙 운동을 전개한 박동기(1907~1991)의 '시온산제국'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싸우라"는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받들어 1944년 독자적인 항일적 국가 체제와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정부 관리를 조직하고, 국기國旗까지 제작해 공포한 일명 '시온산제국(시온산성일제국,시온山聖逸帝國)'은 1945년 5월 경북 경찰부에 발각돼 지도부 3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온산제국기. 시온산제국 국기는 중앙의 정사각형(4방을 상징) 안에 녹색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중앙에 적색 십자가와 광채가 형상화돼 있으며, 무궁화가 십자가 하단부를 둘러싸고 있다. 중앙 정사각형 미지 외곽에는 흰색·녹색·적색 가로줄이 반복돼 일곱 번(흰색은 여덟 번) 겹쳐진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시온산제국기의 도안은 철저히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성경에 기반해 있으며, 유일하게 무궁화가 성경과 관련 없는 민족적 상징으로 삽입됐다. 정운훈이 쓴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사>(시온산예수교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이를 "무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계속 꽃이 피는 것인데 그래서 무궁화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 나라 군국주의 일본 제국의 국화인 벚꽃이 며칠 안에 일제히 피고 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함은 영원무궁하신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궁화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을 상징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박동기는 포항교회 전도사 시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다가 경북 청송으로 피신해 기도하던 중 1940년 11월 29일 영적 체험을 하고, 조선의 독립과 지상천국 건설을 위해 기성 교회를 이탈해 독자 교단을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이며, 이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으로 1944년 7월 7일을 '예수 재림의 날'로 정하고 신자들을 규합했는데,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은 많은 신자에게 실망을 끼치고 무위로 끝난 바 있다. 성경에 대한 주관적·독선적 해석과 예언에서 번번이 오류가 드러나자 신자들의 반발과 한계에 봉착했고, 개인적인 문제에까지 성경을 적용해 내부 반발과 논란으로 분열됐다. 박동기는 보수 신앙과 성경에 근거한 말세 신앙으로, 일제를 '음녀의 나라', '사탄 용의 나라'로 규정하면서 신사참배와 일장기 배례 등을 거부해,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시온산제국을 설립한 박동기 전도사. 사진 제공 현대종교

박동기의 시온산제국이 이순화의 정도교와 다른 점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과정에서 요구된 의무교육과 국가 의례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로 이름을 고쳐 재건한 시온산교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채택된 국가 상징물 태극기를 '태극점복기'로 폄하하며, '점복기 개정 운동'을 펼쳐 나갔다. '시온산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실제적 기독교 국가 수립을 모색했던 박동기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일정 부분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1949년 11월, 경북 의성에 무장공비들이 출몰해 민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경찰은 시온파 신자들을 소집해 연행했다. 당시 이들이 연행된 죄목은 태극기에 배례를 하지 않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탁명환은 당시 검찰의 심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소개하고 있다.

시온산제국 간부들. 사진 제공 현대종교


[문] 태극기를 왜 반대하는가?

[답] 태극기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 창조론에 비추어 태극太極의 시조 '태호복희太昊伏羲'도 한낱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태극이 조판造版이라 하니, 첫째 성경 창조 교리에 배치되고, 둘째 성경은 하나님을 시조로 하고 역경易經은 태호복희로 하니 피차간 시조가 다르다.

[문] 기독교도로서 경배는 못할지언정 경례와 목례를 행함은 어떠한가?

[답] 태극기뿐만 아니라 성경이나 십자가기라고 할지라도 숭배의 대상으로 예배 의식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그 자체를 우상화하기 때문이다.

[문] 신도 중에 병역의무에 대하여 말하기를 "태극기를 폐지하고 십자가기를 세운다면 총검을 메고 백두산봉까지 솔선 돌진한다"고 했다는데 그 이유는?

[답] 그것은 그 신도가 우리 교리에 정통하지 못한 데서 한 말인데, 만약 경배의 대상물로 삼을 때는 태극기나 십자가인 경우에나 동일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자작신自作神으로 신격화·우상화하기 때문이다.

[문]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어느 교육기관에서든지 우상숭배의 행사가 있어서는 안 될 줄 생각한다. ['대구지방검찰청 의성지청 심문조서'(1949년 11월 14일) 중에서,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183~184쪽에서 재인용.]

시온산교회는 태극 사상이 성경의 창조론을 위배하는 것으로 봤으며, "주역과 태극 원리가 성경에 배치됨을 말씀으로 증거"하기 위해 태극기를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태극 문양 자체의 사상적·신학적 이질성 혹은 비기독교적 성격을 이유로 태극기 자체를 거부한 현상으로, 그동안 '국기배례'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저항해 온 일반적인 보수 기독교의 주장과는 매우 차별화된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분단, 좌우 분열, 반공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용공'으로 치부됐다.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 건축된 시온산예수교장로회 경주교회 주보(1987년 5월 21일 자). 주보의 한 면에는 시온산교회의 특징을 상세히 적어 놓았는데, 장로교회 정통성 계승,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 해방 후 하나님 말씀대로 전도, 음양신(태극) 문제를 지적하면서 수난과 옥고를 치른 유일한 교회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시온산제국의 교주 박동기는 1950년 1월 5일 내무대신 정운권, 농무대신 징운훈과 함께 남대구서로 연행돼 10일 동안 전기 고문 등 가혹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결국 박동기는 사찰계원들의 회유에 타협해 <대구일보> 등 신문지상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1. 우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태극기를 지지하고 대한민국 시책에 순응할 것.

2. 에스겔서, 다니엘서에 대한 과격한 해석을 중지할 것.

3. 정감록과 주역을 성경에 대조해 해석하지 말 것.

4. 국기 개정 운동을 합법적으로 전개할 것.

5. 세상 만국 교회가 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신부인즉, 박동기 1인만 신부라고 호칭하지 말 것.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185쪽에서 재인용.]

이 성명은 그동안 강경하던 시온산제국 지도부의 항복 선언으로 읽혔다. 그 후로 시온산제국은 故 탁명환 소장의 말처럼 "교회사 속의 망각 지대"로 침잠해 갔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흐름 속에서 이순화를 정점으로 한 종교 혼합적 신흥종교의 확산세 속에서, 다른 종교와 대조되는 규범적·폐쇄적 신앙 논리로 태극기의 국기 채택 자체에 문제 제기하며 해방 이후 국가와 갈등을 빚은 기독교계 신흥종교라는 점에서, 시온산제국의 정체성과 신학적 논리 구조는 같은 시기 전개된 한국 기성 개신교회의 국기배례(경례) 거부 운동의 중요한 신학적 기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분단이라는 격변, 민족사의 환희와 비극 앞에서 기독교계 신흥종교는 태극기를 둘러싼 양분된 논리에 천착해 갔으며,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혼종적 신흥종교의 득세가 현실화됐다. 아마도 민중들은 신비체험과 성경에 입각한 배타성 논리에 충실한 교주(시온산제국 박동기)보다, 민족적 정서와 타협하고 분단·전쟁의 비극 속에서 생존·번영을 약속한 매혹적인 메시아(통일교 문선명, 천부교 박태선 등)를 더 갈구하고 욕망했던 것 같다. 그렇게 태극기는 해방·분단·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역사 노정 속에서 대중의 욕망을 투영하는 푯대가 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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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제국과 혼종 DNA
[태극기와 한국교회] 십자가와 태극기의 혼합적 변형과 일탈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05.13 12:16


정도교 이순화가 뿌린 혼종 DNA


천부교 박태선, 통일교 문선명, 영생교 조희성, JMS 정명석, 신천지 이만희 등…. 현대 한국교회와 사회에 끊임없이 논란·물의를 일으켰거나 여전히 일으키고 있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들은 이제 일반 대중에게도 낯설지 않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과도기를 거치며 확산한 수많은 신흥종교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면, 그 정점에는 '정도교'의 창시자 '이순화'라는 인물이 서 있다.
경북 거창 출신 이순화(1870~1936)는 평범한 농민의 딸로 성장해 남편 진경성과 함께 1911년 서간도로 이주했다. 그가 38세 때 다섯 살 아들이 병에 들었는데, 물감 장수의 부인에게 전도받아 예수를 믿고 아들의 병이 낫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후로 기도 생활에 전념한 이순화는 48세 되던 1917년 3월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이제부터 이 두 가지 기旗(녹십자기·태극팔괘기)를 가지고 일을 하여 천하 만민에게 신시대 천국 건설 운동과 진리 방법을 가르쳐서 나의 뜻을 이루고 너희 세계 인류가 천국 복락을 누리도록 하여라. (중략)



품질 좋은 단군 자손들아! 성신으로 교통시켜 줄 것이니 시급히 독립운동을 일으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 나라에 거하여 심판 권세 가지고 인간들의 모든 죄악을 심판한 후에 천하만국을 통일하여 일체로 화평케 다스려 천국 복락을 줄 것이고 만일 너희 나라가 독립국가가 되지 못하면, 내가 너희 나라에서 거할 수 없고, 세상은 불원간 망할 것이니라. (중략)



각국 각처에 살고 있는 조선 민족은 태극기를 만들어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어라. 이같이 하라고 하는 뜻은 내가 이 천지 구만 년 천국 시대에는 조선에 거하여 각국 대표자들을 없애버리고 통일 천하에 한 법으로 다스려 일체로 천국 복락을 누리기 위함이니 (하략)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311쪽, 괄호 안은 필자 추가]

기도 중에 세계 통일 평화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녹십자기綠十字旗', 세계 정돈 평화 시대를 의미하는 '태극팔괘기太極八卦旗'는 정도교 창교주 이순화 신앙 운동의 핵심적인 상징이 됐다. 이순화와 그의 추종자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사대문에 녹십자기와 태극팔괘기를 달고 '예수교 찬미가'와 '독립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제의 '예심종결 결정서'는 이순화와 그의 추종자가 시위 도중 배포한 불온 문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기미년 6월 26일 천명天命을 받아서 천하 만민에게 고한다. 나는 천天, 인人, 만물을 만들어 나라마다 그 대표자를 정해 두었는데, 각 대표자들은 사욕私慾으로 분쟁을 일으켜 만국을 부패시킨 것이다. 나는 일찍이 조선 나라에 만국독립기인 (태극)팔괘기와 십자기를 부여했는데도 너희들은 그것을 잘 수호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중략) 선천先天 시대에 사용하던 기는 전부 파기하고 내가 주는 팔괘기와 십자기를 게양하면 만국 만민이 구제될 것이다. 나는 천사에게 명하여 만국대표기를 경성 동서남북 사대문에 세움으로써 6월 29일을 기해 어떤 사람이라도 이 기를 수호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또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은 서로 융화하여 부패시키고 망치는 일을 중지하면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시대가 올 것이다."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 결정서'(1920년 4월 20일) 중에서,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313쪽]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6개월의 징역을 마치고 1923년 출옥한 이순화는 1924년 3월 초 신자 400여 명을 이끌고 충남 계룡산 신도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정도교' 포교 활동을 하다 1936년 1월 26일 67세의 일기로 병사했다. 이순화의 별세 후 정도교 2대 교주는 그의 아들 진영수가 맡게 됐고, 이후에도 조선 독립과 일제 패망을 부르짖고, 천황제 비판 등으로 일제의 검속과 탄압을 겪었다.

정도교 2대 교주 진영수(사진 오른쪽)와 故 탁명환 소장. 정도교 교당 배후에는 녹십자기와 팔괘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정도교는 체계적인 교리와 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천국 건설의 중심지로 한국을 예정"해 놓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만국에서 국어, 국문, 국기를 다 일체로 없애 버리고, 한국어와 국문, 한국기(태극기) 그리고 녹십자기를 세계만방에서 다 같이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냈다. 이러한 내용은 이순화가 받은 계시를 경전으로 정리한 <정도교 법문>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정도교 성가>에서도 태극기와 십자기의 상징성·중요성을 다양한 곡이 등장한다.


1. 펄럭이는 녹십자기 계룡주산 형제봉 밑

지상천국 기호므로 우리 함께 모셔 오세

2. 녹십자 팔괘기는 신시대의 표준 기호

만민들의 생문방길 구원 기호 분명하다.

3. 성스럽고 거룩하신 성부 뜻을 깨달아서

썩은 세상 바로잡아 빛 세계를 맞이하세

4. 천하 만민 형제들아 일심 통일 단결로써

십자기 뜻 깨달아서 영생 길로 걸어가세

5. 신시대의 녹십자기 반공중에 높이 솟아

날으는 것 바라볼 때 기쁘고도 즐겁도다

(<정도교 성가> 제59장, '성부 뜻을 깨달아서 십자팔괘 높이 들고 천국 건설' 중에서)

정도교의 정기 예배는 매월 3회 음력 9일, 19일, 29일에 시행했으며, 태극팔괘기와 녹십자기가 장식된 천단天壇에서 녹십자기가 그려진 신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백색포를 둘렀다.



계룡산에 있었던 정도교 본부와 그 신자들(사진 위). 유니폼에는 녹십자가 그려져 있고, 양쪽에 녹십자기와 팔괘태극기를 들고 있다. 제단(사진 아래)도 녹십자기와 태극기로 장식돼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는 <현대종교> 2020년 3월호에 기고한 '정도교와 이순화'라는 글에서, 정도교가 처음에는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1924년 계룡산 신도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정감록과 도참사상이 혼합된 '신흥종교'로 변형"됐으며, 또 일제강점기라는 비정상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항일운동을 과감하게 실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순화의 정도교는 굴절된 민족주의적 혼합종교의 효시가 되어,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발흥·확산에 지대하고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천국의 도래와 정도령 혹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한 이순화의 논리는 이후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 세력에 파급됐다.

한국 주요 이단 계보도. 싸이비가 판치는 세상_싸이판2 유튜브 채널 갈무리
새주파 김성도와 그 후예들


이순화와 더불어 서북 지역에서 발흥한 '새주파(성주교)'의 김성도는, 이순화가 보여 준 민족주의적 특성을 답습하면서도 현대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윤리적 일탈에 명분을 제공하는 교리의 해석·변형을 모색했다.


"1923년 음력 4월 2일에 김성도는 입신하여 천군 천사들을 만났고 영계에 들어갈 때에 사탄의 방해를 받았으나 이기고 들어가서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때 예수와 나눈 대화 속에는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열흘 뒤인 음력 4월 12일에는 예수와의 두 번째 면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로부터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생각하는백성), 24쪽]

'새주파'라는 이름은 "새 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순화의 한반도 메시아 도래설 외에도 죄의 근원이 '음란'이라는 논리를 구축한다. 이는 세 번째 결혼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아들의 죽음과 상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시집 가족들의 박해 경험에서 비롯한, 가부장적 권력과 남성 중심적 폭력성에 대한 거부감·혐오가 성서 해석에 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이후 새주파에 합류한 예수교회의 창립 주역 백남주 목사와 그의 제자 김백문이 체계적으로 계승해 나간다. 김성도의 신비체험과 성적 타락설, 한반도 재림주 도래설 등의 주장을 문제시한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1925년 그를 출교 처분했다.



새주파 교주 김성도(사진 위)와 그의 사상을 체계화한 백남주(사진 아래 왼쪽)·김백문.

백남주는 신비주의자 스웨덴보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새 생명의 길>(1933)에서 "구약, 신약, 새 생명의 시대"라는 '삼시대론'을 펴면서, 이 시대에 새로운 구원자가 도래할 것이라는 신흥종교 이론을 개진했다. 그의 수제자 김백문은 1937년 새주파 성주교 창립 예배 당시 사회를 볼 정도로 백남주·김성도의 메시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해방 이후 경기도 파주에 '예수교이스라엘수도원'을 시작한 김백문은 <성신신학>(1954)·<기독교 근본원리>(1958)에서 인간의 타락을 '성적 타락'으로 보고, 백남주의 삼시대론을 계승하며 이후 문선명의 <원리해설>(1957)과 '통일교'의 발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75년 통일교에서 개최한 서울 여의도 '구국 세계 대회'. 100만 인파가 운집한 당시 국내 최대 규모 행사였다. 행사장 좌우에는 욱일기와 유사한 형태의 통일교 상징이, 중앙에는 만국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문선명이 1975년 1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한국 각계 인사 초청 만찬회. 만찬장 중앙 상단에 태극기가, 하단에는 통일교기가 게양돼 있다.

최근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통일교도들. 태극기와 통일교기를 함께 들고 있다.

이순화·김성도 등에서 비롯한 신비적 계시 신앙의 역사적 노정에서 배태한 한국 기독교계의 신흥종교들은 '구약과 신약 시대 이후의 새 메시아의 시대'를 천명하며, 그러한 역사가 성취될 땅은 '한반도'가 될 것이라는 세계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굴절된 민족주의와 동양 종교적 요소들과 혼합돼, 근대화·식민지·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역사적 콘텍스트하에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민중의 영혼 속으로 빠르게 파급돼 갔다.

이순화의 정도교나 김성도의 성주교는 해방 이전까지도 항일적인 면모를 보이며, 민족주의적 가치와 기독교 신앙을 조합하고자 모색했다. 하지만 영적 투쟁의 대상이 사라진 해방 정국과 분단 체제 하에서 그 후예들로 불리는 여러 상이한 신흥종교 분파에 이르러, 민족적 정체성은 단지 교리적 차원에서의 선언으로 전락했다.

통일교의 문선명, 천부교의 박태선, 동방교의 노광공, 세계일가공회의 양도천, 새마을전도회(천국복음전도회)의 구인회, 대한기독교천도관의 천옥찬, 만교통화교(에덴문화연구원)의 김민석, 영생교의 조희성, JMS의 정명석, 신천지의 이만희 등 다양한 신흥종교 분파로 이어지는 변이·진화 과정은 점차 '정치적 편향'과 '내적 교조화'로 치달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개 교주를 한반도에 도래한 새로운 메시아로 내세우고, 민족적 가치와 태극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문선명·양도천·구인회·천옥찬·김민석 등은 태극 문양을 종교적 행위·상징·교리 등에 적극 활용해 포교했다.

태극 문양과 십자가를 겹친 세계일가공회의 심벌(사진 왼쪽)과 교주 양도천. 가운데 사진의 제목은 '백마를 탄 어린양'이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새마을전도회(천국복음전도회)는 태극기를 성서적으로 풀이해 새 예루살렘인 한국에 지상천국이 건설된다고 주장했다. 교주 구인회(사진 왼쪽)은 박정희 정권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했지만 1975년 사이비 종교 일제 단속 과정에서 구금돼 옥사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태극 문양이 박힌 구인회의 묘. 비석에는 '재림 예수님의 묘'라고 적혀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박정희와 자신의 사진을 나란히 게시하고 태극기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구인회. 사진 제공 현대종교

전도관 출신 천옥찬은 박태선의 감람나무 사명은 끝났고, 자신의 무화과나무 사명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며 대한기독교천도관을 창설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천도관 강단에 게시된 감사장. 교인들이 교주 천옥찬에게 헌사했다. 중앙 상단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자신을 '민석 대왕 심판주'라고 칭한 만교통화교(에덴문화연구원) 교주 김민석. 사진 제공 현대종교
시온산제국이 세운 망각 지대


이순화에서 신천지로 이어지는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흐름과는 별개로, 경북 지역 장로교를 기반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신앙 운동을 전개한 박동기(1907~1991)의 '시온산제국'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싸우라"는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받들어 1944년 독자적인 항일적 국가 체제와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정부 관리를 조직하고, 국기國旗까지 제작해 공포한 일명 '시온산제국(시온산성일제국,시온山聖逸帝國)'은 1945년 5월 경북 경찰부에 발각돼 지도부 3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온산제국기. 시온산제국 국기는 중앙의 정사각형(4방을 상징) 안에 녹색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중앙에 적색 십자가와 광채가 형상화돼 있으며, 무궁화가 십자가 하단부를 둘러싸고 있다. 중앙 정사각형 미지 외곽에는 흰색·녹색·적색 가로줄이 반복돼 일곱 번(흰색은 여덟 번) 겹쳐진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시온산제국기의 도안은 철저히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성경에 기반해 있으며, 유일하게 무궁화가 성경과 관련 없는 민족적 상징으로 삽입됐다. 정운훈이 쓴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사>(시온산예수교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이를 "무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계속 꽃이 피는 것인데 그래서 무궁화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 나라 군국주의 일본 제국의 국화인 벚꽃이 며칠 안에 일제히 피고 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함은 영원무궁하신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궁화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을 상징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박동기는 포항교회 전도사 시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다가 경북 청송으로 피신해 기도하던 중 1940년 11월 29일 영적 체험을 하고, 조선의 독립과 지상천국 건설을 위해 기성 교회를 이탈해 독자 교단을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이며, 이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으로 1944년 7월 7일을 '예수 재림의 날'로 정하고 신자들을 규합했는데,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은 많은 신자에게 실망을 끼치고 무위로 끝난 바 있다. 성경에 대한 주관적·독선적 해석과 예언에서 번번이 오류가 드러나자 신자들의 반발과 한계에 봉착했고, 개인적인 문제에까지 성경을 적용해 내부 반발과 논란으로 분열됐다. 박동기는 보수 신앙과 성경에 근거한 말세 신앙으로, 일제를 '음녀의 나라', '사탄 용의 나라'로 규정하면서 신사참배와 일장기 배례 등을 거부해,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시온산제국을 설립한 박동기 전도사. 사진 제공 현대종교

박동기의 시온산제국이 이순화의 정도교와 다른 점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과정에서 요구된 의무교육과 국가 의례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로 이름을 고쳐 재건한 시온산교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채택된 국가 상징물 태극기를 '태극점복기'로 폄하하며, '점복기 개정 운동'을 펼쳐 나갔다. '시온산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실제적 기독교 국가 수립을 모색했던 박동기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일정 부분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1949년 11월, 경북 의성에 무장공비들이 출몰해 민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경찰은 시온파 신자들을 소집해 연행했다. 당시 이들이 연행된 죄목은 태극기에 배례를 하지 않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탁명환은 당시 검찰의 심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소개하고 있다.

시온산제국 간부들. 사진 제공 현대종교


[문] 태극기를 왜 반대하는가?

[답] 태극기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 창조론에 비추어 태극太極의 시조 '태호복희太昊伏羲'도 한낱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태극이 조판造版이라 하니, 첫째 성경 창조 교리에 배치되고, 둘째 성경은 하나님을 시조로 하고 역경易經은 태호복희로 하니 피차간 시조가 다르다.

[문] 기독교도로서 경배는 못할지언정 경례와 목례를 행함은 어떠한가?

[답] 태극기뿐만 아니라 성경이나 십자가기라고 할지라도 숭배의 대상으로 예배 의식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그 자체를 우상화하기 때문이다.

[문] 신도 중에 병역의무에 대하여 말하기를 "태극기를 폐지하고 십자가기를 세운다면 총검을 메고 백두산봉까지 솔선 돌진한다"고 했다는데 그 이유는?

[답] 그것은 그 신도가 우리 교리에 정통하지 못한 데서 한 말인데, 만약 경배의 대상물로 삼을 때는 태극기나 십자가인 경우에나 동일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자작신自作神으로 신격화·우상화하기 때문이다.

[문]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어느 교육기관에서든지 우상숭배의 행사가 있어서는 안 될 줄 생각한다. ['대구지방검찰청 의성지청 심문조서'(1949년 11월 14일) 중에서,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183~184쪽에서 재인용.]

시온산교회는 태극 사상이 성경의 창조론을 위배하는 것으로 봤으며, "주역과 태극 원리가 성경에 배치됨을 말씀으로 증거"하기 위해 태극기를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태극 문양 자체의 사상적·신학적 이질성 혹은 비기독교적 성격을 이유로 태극기 자체를 거부한 현상으로, 그동안 '국기배례'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저항해 온 일반적인 보수 기독교의 주장과는 매우 차별화된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분단, 좌우 분열, 반공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용공'으로 치부됐다.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 건축된 시온산예수교장로회 경주교회 주보(1987년 5월 21일 자). 주보의 한 면에는 시온산교회의 특징을 상세히 적어 놓았는데, 장로교회 정통성 계승,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 해방 후 하나님 말씀대로 전도, 음양신(태극) 문제를 지적하면서 수난과 옥고를 치른 유일한 교회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시온산제국의 교주 박동기는 1950년 1월 5일 내무대신 정운권, 농무대신 징운훈과 함께 남대구서로 연행돼 10일 동안 전기 고문 등 가혹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결국 박동기는 사찰계원들의 회유에 타협해 <대구일보> 등 신문지상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1. 우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태극기를 지지하고 대한민국 시책에 순응할 것.

2. 에스겔서, 다니엘서에 대한 과격한 해석을 중지할 것.

3. 정감록과 주역을 성경에 대조해 해석하지 말 것.

4. 국기 개정 운동을 합법적으로 전개할 것.

5. 세상 만국 교회가 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신부인즉, 박동기 1인만 신부라고 호칭하지 말 것.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185쪽에서 재인용.]

이 성명은 그동안 강경하던 시온산제국 지도부의 항복 선언으로 읽혔다. 그 후로 시온산제국은 故 탁명환 소장의 말처럼 "교회사 속의 망각 지대"로 침잠해 갔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흐름 속에서 이순화를 정점으로 한 종교 혼합적 신흥종교의 확산세 속에서, 다른 종교와 대조되는 규범적·폐쇄적 신앙 논리로 태극기의 국기 채택 자체에 문제 제기하며 해방 이후 국가와 갈등을 빚은 기독교계 신흥종교라는 점에서, 시온산제국의 정체성과 신학적 논리 구조는 같은 시기 전개된 한국 기성 개신교회의 국기배례(경례) 거부 운동의 중요한 신학적 기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분단이라는 격변, 민족사의 환희와 비극 앞에서 기독교계 신흥종교는 태극기를 둘러싼 양분된 논리에 천착해 갔으며,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혼종적 신흥종교의 득세가 현실화됐다. 아마도 민중들은 신비체험과 성경에 입각한 배타성 논리에 충실한 교주(시온산제국 박동기)보다, 민족적 정서와 타협하고 분단·전쟁의 비극 속에서 생존·번영을 약속한 매혹적인 메시아(통일교 문선명, 천부교 박태선 등)를 더 갈구하고 욕망했던 것 같다. 그렇게 태극기는 해방·분단·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역사 노정 속에서 대중의 욕망을 투영하는 푯대가 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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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제국과 혼종 DNA
[태극기와 한국교회] 십자가와 태극기의 혼합적 변형과 일탈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05.13 


정도교 이순화가 뿌린 혼종 DNA


천부교 박태선, 통일교 문선명, 영생교 조희성, JMS 정명석, 신천지 이만희 등…. 현대 한국교회와 사회에 끊임없이 논란·물의를 일으켰거나 여전히 일으키고 있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들은 이제 일반 대중에게도 낯설지 않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과도기를 거치며 확산한 수많은 신흥종교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면, 그 정점에는 '정도교'의 창시자 '이순화'라는 인물이 서 있다.
경북 거창 출신 이순화(1870~1936)는 평범한 농민의 딸로 성장해 남편 진경성과 함께 1911년 서간도로 이주했다. 그가 38세 때 다섯 살 아들이 병에 들었는데, 물감 장수의 부인에게 전도받아 예수를 믿고 아들의 병이 낫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후로 기도 생활에 전념한 이순화는 48세 되던 1917년 3월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이제부터 이 두 가지 기旗(녹십자기·태극팔괘기)를 가지고 일을 하여 천하 만민에게 신시대 천국 건설 운동과 진리 방법을 가르쳐서 나의 뜻을 이루고 너희 세계 인류가 천국 복락을 누리도록 하여라. (중략)



품질 좋은 단군 자손들아! 성신으로 교통시켜 줄 것이니 시급히 독립운동을 일으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 나라에 거하여 심판 권세 가지고 인간들의 모든 죄악을 심판한 후에 천하만국을 통일하여 일체로 화평케 다스려 천국 복락을 줄 것이고 만일 너희 나라가 독립국가가 되지 못하면, 내가 너희 나라에서 거할 수 없고, 세상은 불원간 망할 것이니라. (중략)



각국 각처에 살고 있는 조선 민족은 태극기를 만들어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어라. 이같이 하라고 하는 뜻은 내가 이 천지 구만 년 천국 시대에는 조선에 거하여 각국 대표자들을 없애버리고 통일 천하에 한 법으로 다스려 일체로 천국 복락을 누리기 위함이니 (하략)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311쪽, 괄호 안은 필자 추가]

기도 중에 세계 통일 평화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녹십자기綠十字旗', 세계 정돈 평화 시대를 의미하는 '태극팔괘기太極八卦旗'는 정도교 창교주 이순화 신앙 운동의 핵심적인 상징이 됐다. 이순화와 그의 추종자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사대문에 녹십자기와 태극팔괘기를 달고 '예수교 찬미가'와 '독립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제의 '예심종결 결정서'는 이순화와 그의 추종자가 시위 도중 배포한 불온 문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기미년 6월 26일 천명天命을 받아서 천하 만민에게 고한다. 나는 천天, 인人, 만물을 만들어 나라마다 그 대표자를 정해 두었는데, 각 대표자들은 사욕私慾으로 분쟁을 일으켜 만국을 부패시킨 것이다. 나는 일찍이 조선 나라에 만국독립기인 (태극)팔괘기와 십자기를 부여했는데도 너희들은 그것을 잘 수호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중략) 선천先天 시대에 사용하던 기는 전부 파기하고 내가 주는 팔괘기와 십자기를 게양하면 만국 만민이 구제될 것이다. 나는 천사에게 명하여 만국대표기를 경성 동서남북 사대문에 세움으로써 6월 29일을 기해 어떤 사람이라도 이 기를 수호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또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은 서로 융화하여 부패시키고 망치는 일을 중지하면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시대가 올 것이다."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 결정서'(1920년 4월 20일) 중에서,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313쪽]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6개월의 징역을 마치고 1923년 출옥한 이순화는 1924년 3월 초 신자 400여 명을 이끌고 충남 계룡산 신도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정도교' 포교 활동을 하다 1936년 1월 26일 67세의 일기로 병사했다. 이순화의 별세 후 정도교 2대 교주는 그의 아들 진영수가 맡게 됐고, 이후에도 조선 독립과 일제 패망을 부르짖고, 천황제 비판 등으로 일제의 검속과 탄압을 겪었다.

정도교 2대 교주 진영수(사진 오른쪽)와 故 탁명환 소장. 정도교 교당 배후에는 녹십자기와 팔괘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정도교는 체계적인 교리와 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천국 건설의 중심지로 한국을 예정"해 놓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만국에서 국어, 국문, 국기를 다 일체로 없애 버리고, 한국어와 국문, 한국기(태극기) 그리고 녹십자기를 세계만방에서 다 같이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냈다. 이러한 내용은 이순화가 받은 계시를 경전으로 정리한 <정도교 법문>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정도교 성가>에서도 태극기와 십자기의 상징성·중요성을 다양한 곡이 등장한다.


1. 펄럭이는 녹십자기 계룡주산 형제봉 밑

지상천국 기호므로 우리 함께 모셔 오세

2. 녹십자 팔괘기는 신시대의 표준 기호

만민들의 생문방길 구원 기호 분명하다.

3. 성스럽고 거룩하신 성부 뜻을 깨달아서

썩은 세상 바로잡아 빛 세계를 맞이하세

4. 천하 만민 형제들아 일심 통일 단결로써

십자기 뜻 깨달아서 영생 길로 걸어가세

5. 신시대의 녹십자기 반공중에 높이 솟아

날으는 것 바라볼 때 기쁘고도 즐겁도다

(<정도교 성가> 제59장, '성부 뜻을 깨달아서 십자팔괘 높이 들고 천국 건설' 중에서)

정도교의 정기 예배는 매월 3회 음력 9일, 19일, 29일에 시행했으며, 태극팔괘기와 녹십자기가 장식된 천단天壇에서 녹십자기가 그려진 신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백색포를 둘렀다.



계룡산에 있었던 정도교 본부와 그 신자들(사진 위). 유니폼에는 녹십자가 그려져 있고, 양쪽에 녹십자기와 팔괘태극기를 들고 있다. 제단(사진 아래)도 녹십자기와 태극기로 장식돼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는 <현대종교> 2020년 3월호에 기고한 '정도교와 이순화'라는 글에서, 정도교가 처음에는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1924년 계룡산 신도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정감록과 도참사상이 혼합된 '신흥종교'로 변형"됐으며, 또 일제강점기라는 비정상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항일운동을 과감하게 실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순화의 정도교는 굴절된 민족주의적 혼합종교의 효시가 되어,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발흥·확산에 지대하고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천국의 도래와 정도령 혹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한 이순화의 논리는 이후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 세력에 파급됐다.

한국 주요 이단 계보도. 싸이비가 판치는 세상_싸이판2 유튜브 채널 갈무리
새주파 김성도와 그 후예들


이순화와 더불어 서북 지역에서 발흥한 '새주파(성주교)'의 김성도는, 이순화가 보여 준 민족주의적 특성을 답습하면서도 현대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윤리적 일탈에 명분을 제공하는 교리의 해석·변형을 모색했다.


"1923년 음력 4월 2일에 김성도는 입신하여 천군 천사들을 만났고 영계에 들어갈 때에 사탄의 방해를 받았으나 이기고 들어가서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때 예수와 나눈 대화 속에는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열흘 뒤인 음력 4월 12일에는 예수와의 두 번째 면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로부터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생각하는백성), 24쪽]

'새주파'라는 이름은 "새 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순화의 한반도 메시아 도래설 외에도 죄의 근원이 '음란'이라는 논리를 구축한다. 이는 세 번째 결혼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아들의 죽음과 상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시집 가족들의 박해 경험에서 비롯한, 가부장적 권력과 남성 중심적 폭력성에 대한 거부감·혐오가 성서 해석에 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이후 새주파에 합류한 예수교회의 창립 주역 백남주 목사와 그의 제자 김백문이 체계적으로 계승해 나간다. 김성도의 신비체험과 성적 타락설, 한반도 재림주 도래설 등의 주장을 문제시한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1925년 그를 출교 처분했다.



새주파 교주 김성도(사진 위)와 그의 사상을 체계화한 백남주(사진 아래 왼쪽)·김백문.

백남주는 신비주의자 스웨덴보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새 생명의 길>(1933)에서 "구약, 신약, 새 생명의 시대"라는 '삼시대론'을 펴면서, 이 시대에 새로운 구원자가 도래할 것이라는 신흥종교 이론을 개진했다. 그의 수제자 김백문은 1937년 새주파 성주교 창립 예배 당시 사회를 볼 정도로 백남주·김성도의 메시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해방 이후 경기도 파주에 '예수교이스라엘수도원'을 시작한 김백문은 <성신신학>(1954)·<기독교 근본원리>(1958)에서 인간의 타락을 '성적 타락'으로 보고, 백남주의 삼시대론을 계승하며 이후 문선명의 <원리해설>(1957)과 '통일교'의 발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75년 통일교에서 개최한 서울 여의도 '구국 세계 대회'. 100만 인파가 운집한 당시 국내 최대 규모 행사였다. 행사장 좌우에는 욱일기와 유사한 형태의 통일교 상징이, 중앙에는 만국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문선명이 1975년 1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한국 각계 인사 초청 만찬회. 만찬장 중앙 상단에 태극기가, 하단에는 통일교기가 게양돼 있다.

최근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통일교도들. 태극기와 통일교기를 함께 들고 있다.

이순화·김성도 등에서 비롯한 신비적 계시 신앙의 역사적 노정에서 배태한 한국 기독교계의 신흥종교들은 '구약과 신약 시대 이후의 새 메시아의 시대'를 천명하며, 그러한 역사가 성취될 땅은 '한반도'가 될 것이라는 세계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굴절된 민족주의와 동양 종교적 요소들과 혼합돼, 근대화·식민지·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역사적 콘텍스트하에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민중의 영혼 속으로 빠르게 파급돼 갔다.

이순화의 정도교나 김성도의 성주교는 해방 이전까지도 항일적인 면모를 보이며, 민족주의적 가치와 기독교 신앙을 조합하고자 모색했다. 하지만 영적 투쟁의 대상이 사라진 해방 정국과 분단 체제 하에서 그 후예들로 불리는 여러 상이한 신흥종교 분파에 이르러, 민족적 정체성은 단지 교리적 차원에서의 선언으로 전락했다.

통일교의 문선명, 천부교의 박태선, 동방교의 노광공, 세계일가공회의 양도천, 새마을전도회(천국복음전도회)의 구인회, 대한기독교천도관의 천옥찬, 만교통화교(에덴문화연구원)의 김민석, 영생교의 조희성, JMS의 정명석, 신천지의 이만희 등 다양한 신흥종교 분파로 이어지는 변이·진화 과정은 점차 '정치적 편향'과 '내적 교조화'로 치달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개 교주를 한반도에 도래한 새로운 메시아로 내세우고, 민족적 가치와 태극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문선명·양도천·구인회·천옥찬·김민석 등은 태극 문양을 종교적 행위·상징·교리 등에 적극 활용해 포교했다.

태극 문양과 십자가를 겹친 세계일가공회의 심벌(사진 왼쪽)과 교주 양도천. 가운데 사진의 제목은 '백마를 탄 어린양'이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새마을전도회(천국복음전도회)는 태극기를 성서적으로 풀이해 새 예루살렘인 한국에 지상천국이 건설된다고 주장했다. 교주 구인회(사진 왼쪽)은 박정희 정권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했지만 1975년 사이비 종교 일제 단속 과정에서 구금돼 옥사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태극 문양이 박힌 구인회의 묘. 비석에는 '재림 예수님의 묘'라고 적혀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박정희와 자신의 사진을 나란히 게시하고 태극기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구인회. 사진 제공 현대종교

전도관 출신 천옥찬은 박태선의 감람나무 사명은 끝났고, 자신의 무화과나무 사명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며 대한기독교천도관을 창설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천도관 강단에 게시된 감사장. 교인들이 교주 천옥찬에게 헌사했다. 중앙 상단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자신을 '민석 대왕 심판주'라고 칭한 만교통화교(에덴문화연구원) 교주 김민석. 사진 제공 현대종교
시온산제국이 세운 망각 지대


이순화에서 신천지로 이어지는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흐름과는 별개로, 경북 지역 장로교를 기반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신앙 운동을 전개한 박동기(1907~1991)의 '시온산제국'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싸우라"는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받들어 1944년 독자적인 항일적 국가 체제와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정부 관리를 조직하고, 국기國旗까지 제작해 공포한 일명 '시온산제국(시온산성일제국,시온山聖逸帝國)'은 1945년 5월 경북 경찰부에 발각돼 지도부 3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온산제국기. 시온산제국 국기는 중앙의 정사각형(4방을 상징) 안에 녹색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중앙에 적색 십자가와 광채가 형상화돼 있으며, 무궁화가 십자가 하단부를 둘러싸고 있다. 중앙 정사각형 미지 외곽에는 흰색·녹색·적색 가로줄이 반복돼 일곱 번(흰색은 여덟 번) 겹쳐진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시온산제국기의 도안은 철저히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성경에 기반해 있으며, 유일하게 무궁화가 성경과 관련 없는 민족적 상징으로 삽입됐다. 정운훈이 쓴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사>(시온산예수교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이를 "무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계속 꽃이 피는 것인데 그래서 무궁화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 나라 군국주의 일본 제국의 국화인 벚꽃이 며칠 안에 일제히 피고 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함은 영원무궁하신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궁화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을 상징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박동기는 포항교회 전도사 시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다가 경북 청송으로 피신해 기도하던 중 1940년 11월 29일 영적 체험을 하고, 조선의 독립과 지상천국 건설을 위해 기성 교회를 이탈해 독자 교단을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이며, 이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으로 1944년 7월 7일을 '예수 재림의 날'로 정하고 신자들을 규합했는데,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은 많은 신자에게 실망을 끼치고 무위로 끝난 바 있다. 성경에 대한 주관적·독선적 해석과 예언에서 번번이 오류가 드러나자 신자들의 반발과 한계에 봉착했고, 개인적인 문제에까지 성경을 적용해 내부 반발과 논란으로 분열됐다. 박동기는 보수 신앙과 성경에 근거한 말세 신앙으로, 일제를 '음녀의 나라', '사탄 용의 나라'로 규정하면서 신사참배와 일장기 배례 등을 거부해,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시온산제국을 설립한 박동기 전도사. 사진 제공 현대종교

박동기의 시온산제국이 이순화의 정도교와 다른 점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과정에서 요구된 의무교육과 국가 의례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로 이름을 고쳐 재건한 시온산교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채택된 국가 상징물 태극기를 '태극점복기'로 폄하하며, '점복기 개정 운동'을 펼쳐 나갔다. '시온산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실제적 기독교 국가 수립을 모색했던 박동기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일정 부분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1949년 11월, 경북 의성에 무장공비들이 출몰해 민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경찰은 시온파 신자들을 소집해 연행했다. 당시 이들이 연행된 죄목은 태극기에 배례를 하지 않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탁명환은 당시 검찰의 심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소개하고 있다.

시온산제국 간부들. 사진 제공 현대종교


[문] 태극기를 왜 반대하는가?

[답] 태극기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 창조론에 비추어 태극太極의 시조 '태호복희太昊伏羲'도 한낱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태극이 조판造版이라 하니, 첫째 성경 창조 교리에 배치되고, 둘째 성경은 하나님을 시조로 하고 역경易經은 태호복희로 하니 피차간 시조가 다르다.

[문] 기독교도로서 경배는 못할지언정 경례와 목례를 행함은 어떠한가?

[답] 태극기뿐만 아니라 성경이나 십자가기라고 할지라도 숭배의 대상으로 예배 의식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그 자체를 우상화하기 때문이다.

[문] 신도 중에 병역의무에 대하여 말하기를 "태극기를 폐지하고 십자가기를 세운다면 총검을 메고 백두산봉까지 솔선 돌진한다"고 했다는데 그 이유는?

[답] 그것은 그 신도가 우리 교리에 정통하지 못한 데서 한 말인데, 만약 경배의 대상물로 삼을 때는 태극기나 십자가인 경우에나 동일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자작신自作神으로 신격화·우상화하기 때문이다.

[문]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어느 교육기관에서든지 우상숭배의 행사가 있어서는 안 될 줄 생각한다. ['대구지방검찰청 의성지청 심문조서'(1949년 11월 14일) 중에서,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183~184쪽에서 재인용.]

시온산교회는 태극 사상이 성경의 창조론을 위배하는 것으로 봤으며, "주역과 태극 원리가 성경에 배치됨을 말씀으로 증거"하기 위해 태극기를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태극 문양 자체의 사상적·신학적 이질성 혹은 비기독교적 성격을 이유로 태극기 자체를 거부한 현상으로, 그동안 '국기배례'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저항해 온 일반적인 보수 기독교의 주장과는 매우 차별화된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분단, 좌우 분열, 반공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용공'으로 치부됐다.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 건축된 시온산예수교장로회 경주교회 주보(1987년 5월 21일 자). 주보의 한 면에는 시온산교회의 특징을 상세히 적어 놓았는데, 장로교회 정통성 계승,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 해방 후 하나님 말씀대로 전도, 음양신(태극) 문제를 지적하면서 수난과 옥고를 치른 유일한 교회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시온산제국의 교주 박동기는 1950년 1월 5일 내무대신 정운권, 농무대신 징운훈과 함께 남대구서로 연행돼 10일 동안 전기 고문 등 가혹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결국 박동기는 사찰계원들의 회유에 타협해 <대구일보> 등 신문지상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1. 우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태극기를 지지하고 대한민국 시책에 순응할 것.

2. 에스겔서, 다니엘서에 대한 과격한 해석을 중지할 것.

3. 정감록과 주역을 성경에 대조해 해석하지 말 것.

4. 국기 개정 운동을 합법적으로 전개할 것.

5. 세상 만국 교회가 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신부인즉, 박동기 1인만 신부라고 호칭하지 말 것.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185쪽에서 재인용.]

이 성명은 그동안 강경하던 시온산제국 지도부의 항복 선언으로 읽혔다. 그 후로 시온산제국은 故 탁명환 소장의 말처럼 "교회사 속의 망각 지대"로 침잠해 갔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흐름 속에서 이순화를 정점으로 한 종교 혼합적 신흥종교의 확산세 속에서, 다른 종교와 대조되는 규범적·폐쇄적 신앙 논리로 태극기의 국기 채택 자체에 문제 제기하며 해방 이후 국가와 갈등을 빚은 기독교계 신흥종교라는 점에서, 시온산제국의 정체성과 신학적 논리 구조는 같은 시기 전개된 한국 기성 개신교회의 국기배례(경례) 거부 운동의 중요한 신학적 기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분단이라는 격변, 민족사의 환희와 비극 앞에서 기독교계 신흥종교는 태극기를 둘러싼 양분된 논리에 천착해 갔으며,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혼종적 신흥종교의 득세가 현실화됐다. 아마도 민중들은 신비체험과 성경에 입각한 배타성 논리에 충실한 교주(시온산제국 박동기)보다, 민족적 정서와 타협하고 분단·전쟁의 비극 속에서 생존·번영을 약속한 매혹적인 메시아(통일교 문선명, 천부교 박태선 등)를 더 갈구하고 욕망했던 것 같다. 그렇게 태극기는 해방·분단·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역사 노정 속에서 대중의 욕망을 투영하는 푯대가 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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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의 길, '그리스도인'과 '책임 있는 시민'의 조화
[태극기와 한국교회] 우주적 태극, 대낙원의 날을 기다리며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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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분단'과 '반공'의 상징으로



"곳곳에서 30년 40년 동안 광야는 아닌 궤짝 농짝 밑에서 잠을 자던 태극기가 나왔습니다. 열아홉 살에 삼일운동 만세를 부르던 날 이후 27년 만에 처음 시원한 날을 보았습니다. 가슴 밑바닥에 쌓였던 묵은 시름의 가스가 다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사람은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내가 고랑을 차고 거리를 지나가도 모르는 척 지나가던 그 사람들 그대로, 내가 애써 친구가 되려 해도 곁을 주지 않던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이제 나는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 어색함도 막힘도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다 훨훨 벗고 한 바다에 들어 뛰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만 아니라 저기 저 언덕에 있는 일본 사람, 어제까지 밉고 무섭던 그들이 도리어 어떻게 잘못되어 다치기나 할까 걱정스러웠습니다. 단번에 우리는 새 시대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함석헌, '내가 맞은 8·15', <씨알의소리>, 1973년 8월 호.)

해방은 농짝 구석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태극기를 다시 거리로 소환했다. 펄럭이는 태극의 물결은 어제의 적과 동지의 경계를 무색하게 했으며, 그토록 증오스럽던 일본인들에게까지도 연민과 동정을 베풀 수 있는 넉넉한 관용을 허락해 줬다. 이처럼 태극기는 해방의 기쁨과 환희 속에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다시금 증명해 보이는 푯대로 하늘 높이 게양됐다.

해방 소식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온 군중의 모습(1945년).

한일 협정 반대 시위 중 연행되는 함석헌 선생(1965년).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강연하는 함석헌 선생. 그는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평화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

역설적이게도 태극기는 해방 직후에는 남북 두 정권 모두에서 선호받았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은 각종 군중 집회·행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1946년에는 해방 1주년을 맞아 태극기·무궁화를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얼굴을 도안으로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으며,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평양 합동 회의와 1948년 평양 남북 정치 협상 회의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고 애국가를 제창했다. 이처럼 북한의 좌익 세력들도 해방 공간 초기에 태극기를 별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대표적 상징물로 채택한 것을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좌우 이념 차이를 초월한 민족 공동체의 상징으로서 보편성·대표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평양 군중대회에 소련군 장성들과 함께 등장한 김일성. 배후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1945년 10월 14일).

소련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1946년 2월 8일). 위원회 발족식에는 김일성의 사진과 태극기가 게양됐다.

해방 1주년을 맞아 북한에서 발행한 기념우표(1946년 8월 15일). 중앙에 김일성 초상이 배치됐으며, 그 뒤로 태극기, 상단에 무궁화가 장식돼 있다.

평양에서 열린 5·1절 기념행사의 무대 장식.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 좌우로 태극기와 소련기가 게양돼 있다(1947년 5월 1일).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 김일성이 연설하는 모습. 뒷편에 한반도 이미지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1948년 4월 19일).

하지만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하자 김일성은 7월 8일 제5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인공기를 처음 게양했다. 당시 북조선인민회의 정재용을 비롯한 일부 대의원들은 "태극기는 지난날 우리 인민의 희망의 표징"이었다는 이유로 새로운 국기(인공기) 채택에 반대했지만 결국 이를 막지는 못했다. 당시 헌법제정위원장이이었던 김두봉은 "(태극기가) 1) 비민주적이고 동양 봉건국가 전 통치 계급의 사상을 대표하며, 2) 근거가 되는 주역의 학설이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며, 3) 제정 당시부터 일정한 의의와 표준이 없었으며, 4) 그 의미가 쓸데없이 어렵다는 점"(김혜수, '해방 후 통일국가 수립 운동과 국가 상징의 제정 과정', 119~120쪽 참조) 등을 들어 태극기 폐지를 추진했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1948년 9월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독립문과 중앙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인공기를 게양하는 소위 '인공기 게양 사건'이 발생했고, 10월 발생한 여순 사건을 거치면서 인공기 소지자를 처벌하고 태극기 게양을 강제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여수·순천에서는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을 경우 총살하겠다는 포고문까지 나올 정도로 태극기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애국심의 상징이기보다는 좌우익을 감별하고 애국심을 시험하는 리트머스종이로 그 역할이 변질됐다. 이렇듯 한반도 남북 분단 이후 태극기에 대한 긍정·부정 여부에 따라 피아가 구분되고 생사의 기로에서 운명이 결정됐으며, 민족 보편의 상징이었던 태극은 이제 남한 정부와 반공 이념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그 의미가 협소해지고 말았다.

제5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처음으로 인공기를 게양하는 모습(1948년 7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최고인민회의 광경. 뒷편에 인공기가 장식돼 있다(1948년 9월 2~10일).

여순 사건 진압 작전 당시 태극기를 게양한 거리 모습. 이때부터 태극기는 좌익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며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그 역사적 역할과 기능이 전환되기 시작했다(1948년 10월).

해방 직후 그리스도인들이 개진한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건국론은 반공의 기치를 내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됐다. 대한민국 헌법은 정교분리 원칙을 근본정신으로 채택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쳐 4·19혁명을 맞이하기까지의 세월은 사실상 기독교와 정부가 '반공·친미'라는 공통분모 아래 더욱 공고한 제휴·유착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남한 사회는 전후 재건과 북한과의 체제 경쟁, 국민 통합 과정에서 '민주화·산업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애국심은 악당들의 최후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한 사무엘 존슨의 말처럼, 해방 이후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은 '반공'으로 포장된 애국의 선봉에서 태극기를 들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순국열사에 대한 숭배·현양과 국가 의례가 강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태극기는 각종 의전·이벤트의 중심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이르는 독재 권력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산업화의 주역'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옹호됐다. 이렇게 남한 사회는 '반공'에만 충실하다면 '민주주의'를 일부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쯤은 '미덕'으로 여기는 왜곡된 길을 걷게 됐다.
태극기, 민주주의와 인권의 표상



"기독교인의 최고 이상理想은 하나님나라가 인간 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 미래적인 소위 '천당'이라는 말로서 그 전부를 의미한 것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 사회에 삼투滲透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미래 세계에까지 생생生生 발전하여 우주적 태극太極의 대낙원大樂園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전모全貌일 것이다."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국가 구성의 최고 이성과 그 현실성', 선린형제단 집회에서의 강연 요지(1945년 8월) 중에서]

해방의 날이 도적같이 찾아오자, 그동안 억눌려 온 기독교 지성들은 자신들의 '하나님나라 이상'과 새롭게 출범할 '신생 정부의 이념'을 합치해 나가고자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김재준 목사는 비상한 대전환의 시기에 기독교의 이상이 온전히 구현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수립하길 염원했고, 이는 "우주적 태극의 대낙원"이라는 상징적 언어로 표현됐다. 한경직도 해방 정국을 맞아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민주주의국가' 건설을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자 전제로 삼았다.

기독교 건국 운동을 주도한 김재준 목사(사진 왼쪽)와 한경직 목사.


"이 새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하겠고, 또 필연적으로 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확호한 신념입니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 새 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상의 핵심은 (1)개인 인격의 존중 사상, (2)개인의 자유사상, (3)만인의 평등사상 등일 것입니다. 이 사상의 근본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한경직, '기독교와 건국', <기독교와 건국>(기문사, 1956) 153~154쪽)

초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개신교는 '반공'에도 투철했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공산 독재 사회인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4·19 이후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전향적으로 저항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반공과 민주주의 중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놓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설정한 대정부 관계의 두 노선을 가르는 주요 화두였다.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의 역사적 분기점이 된 매 순간에도 시민들과 청년·학생들은 태극기를 게양했다. 민주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열망은 분단의 아픔과 상처를 딛고 수호해 낸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 내기 위한 애국심과 충정의 결과였다. 군사독재 정권은 민주화를 향한 노력과 열망에 '폭도'와 '좌익 용공'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도·탄압했지만, 이들의 무도한 폭력 앞에서도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켜 내기 위해 광장에 모여 애국가를 제창했고, 태극기를 손에 쥐고 펄럭였다.


"(전략) 시민들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이 금남로 바닥을 타고 퍼지면서 일대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중략) 광주는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며 한 몸뚱이처럼 됐다. 스크럼을 짠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곤봉에 피범벅이 되어 가면서도 스크럼을 풀지 않았다. (중략) 이날 저녁 수천 개의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이렇게 전했다. '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그토록 피 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중략) 도청 앞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4회, "80년 5월 20일 고립무원 '광주'는 밤새 공수부대와 싸웠다", <한겨레>, 2016년 1월 4일 자 19면)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의 식순에는 빠짐없이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었으며, 항쟁 기간 내내 애국가와 함께 태극기가 '애국심·저항·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활용됐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서도 청년·학생, 시민 시위대는 명동성당 앞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태극기를 들고 4·19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사진 제공 <조선일보>

4·19혁명 당시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는 청년의 모습. 사진 제공 <한국일보>

5·18 당시 평화적 시위를 주도했던 전남대의 교내 시위. 학생들이 선봉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1980년 5월 13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사망자 유족이 태극기로 덮인 관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일보>

6월 민주 항쟁 당시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는 한 시위 참가자의 절규. 1987년 민주 항쟁의 상징적 사진에도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6월 민주 항쟁 당시 태극기를 게양하고 명동성당 앞으로 행진하는 학생들(1987).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노정 외에도,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인권과 근무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기독 청년 전태일의 죽음 이후 청계피복노동조합지부가 처음으로 결성됐을 때도 이소선 여사(전태일 모친)의 등 뒤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신 독재의 서슬 퍼런 사법 살인이 자행된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고 이를 비판한 조지 오글 목사의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회 활동에도 태극기는 그 자리를 함께했다. 이처럼 태극기는 해방 이후 분단의 비극과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반공'이라는 레드 콤플렉스에 함몰돼 가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반독재·민주주의·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시민사회와 종교 지도자들의 결단과 헌신 속에서 마침내 '민주화의 상징'으로 한국 현대사 속 자리를 새롭게 확보해 나갈 수 있게 됐다.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치른 후 청계피복노동조합 창립 총회에서 발언하는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 그의 뒤에는 노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돼 있었다(1970년).

시국 선언을 위해 종로 YMCA에 모인 재야인사들(함석헌, 김재준, 지학순 주교, 이호철 소설가, 김지하, 계훈제, 법정, 천관우 등, 1973년 11월 5일). 사진 제공 <동아일보>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의 진실과 부당성에 대해 연설하고 있는 조지 오글 목사(1974). 사진 제공 MBC
태극기, 민족 화해와 통일의 근본원리


한국 사회와 기독교계의 민주화 운동은 어디까지나 북한과의 체제 경쟁 과정에서 '승공론'의 관점으로 시작한 측면이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은 한국 사회의 모든 불평등, 독재, 비민주적 모순이 결국 굴절된 분단의 역사에서 비롯됐다는 각성·반성의 1985년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채택했다. 1988년에는 "분단은 한국교회의 책임이며, 이러한 분단 역사에 일조한 것은 우리의 죄책"이라고 고백하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1988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면서 분단 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



1) 한국 민족의 분단은 세계 초강대국들의 동서 냉전 체제의 대립이 빚은 구조적 죄악의 결과이며, 남북한 사회 내부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 왔다.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마 22:37~40)을 어기는 죄를 범해 왔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분단은 전쟁을 낳았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 방지의 명목으로 최강 최신의 무기로 재무장하고 병력과 군비를 강화하는 것을 찬동하는 죄(시 33:1; 6~20, 44:6~7)를 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는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각 분야에서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고, 동서 냉전 체제에 편입되고 예속되게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민족 예속화 과정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포기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상실하는 반민족적 죄악(롬 9:3)을 범하여 온 죄책을 고백한다.



2) 우리는 한국교회가 민족 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져 온 자주적 민족 통일 운동의 흐름을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단을 정당화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체제가 강요하는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역죄(출 20:3~5)이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는 교회가 정권의 뜻에 따른 죄(행 4:19)이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 정권을 적개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 1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요 13:17)이다. [3.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 중에서]

교회협은 이 선언을 통해 교회가 '자주', '평화', '사상·이념·제도 초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참여'한다는 다섯 원칙하에 종교와 민간 차원에서 온전한 통일 운동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누구도 비판·침해할 수 없었던 기독교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죄책 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관점과 실천신학을 제시한 '88선언'은, 이후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과 대북 교류 사업에 역사적 전환을 가능케 해 줬다. 이 선언은 이후 해외 교회에서 그 신학적·신앙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았으며, 특별히 후대에 이르러 '6·15 공동선언'에 반영돼 남과 북이 상생하는 통일 정책의 근간이 됐다.

한편, 88선언 이후 분단 현실에 대한 역사 인식 차이와 이념 갈등으로 더욱 뚜렷해진 한국교회의 분화 현상은 1990년대를 거치며 더욱 심화·첨예화했다. 교회협 등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운동과 통일 운동을 거부하는 반공적 보수교회를 중심으로,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창설돼 한국교회의 양극화가 더욱 분명해졌다.

한편,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방북한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통일 운동의 정신적 근거를 성서와 더불어 <주역>의 태극 사상에서 찾았다. 아래는 그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다 1986년 투옥됐을 당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문익환 목사.

큰아들 문호근 돌잔치 당시 모습(왼쪽부터 문익환, 박용길의 할아버지 박승희, 문재린, 김신묵, 박용길). 돌잔치 뒷배경을 태극기와 한반도 무궁화 자수로 장식한 것이 인상적이다(1947년경).

도봉구 '통일의집'에 소장·전시돼 있는 한반도 무궁화 자수와 돌잔치 사진.


"평화를 위한 평화의 싸움은 분열, 상극하자는 게 아니죠. 평화란 이지러짐 없는 완전, 이를테면 태극인 거죠. 음이 양을 배격하지 않고, 양이 음을 배격하지 않는 평화의 싸움은 넓고 크게 서로 끌어안는 경쟁이지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각기 그 가진 가치를 빛내면서 어울려 즐거운 큰 하나가 되는 몸짓이지요. 하나라도 이지러지면 그걸 채우지 않고는 숨이 턱에 닿아 안달하는 몸부림이지요. 사랑이지요. 싸움으로서는 복에 겨운 사랑싸움인 거고.



'너는 자유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그건 통일하지 말자는 게 아니냐? 공산주의는 자유와는 상극이니까.' 이게 내가 흔히 서양 사람들에게서 듣는 질문이었소. 서양 사람들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논리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지요. 자유냐 평등이냐, 우리는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자유를 택하면 평등을 버려야 하고, 평등을 택하면 자유는 희생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서양의 논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일으킨 것이 6·25라는 민족상잔이었거든요. 6월 23일 진격 명령을 내린 김일성은 평등을 위해서는 자유를 때려 부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아니겠소?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북진 통일을 외친 이승만은 자유의 수호를 위해서는 평등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고. 주역의 음양의 원리에서 보든, 기독교의 평화의 원리에서 보든, 이 둘은 결코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워야 할 것이 아니거든요. 평등과 표리일체가 될 때 자유는 만인의 자유가 되는 거고, 자유와 표리일체가 될 때라야 평등이 만인의 평등, 만인이 자유를 고르는 평등이 되는 거거든요. 우리의 국기(태극기)가 상징하는 음과 양이 하나인 태극을 이루는 거죠. 그러고 보니 민족 통일의 원리가 바로 우리 국기에 있군요. 자유를 양이라고 하면 평등은 음이니까요." (문익환, '음과 양이 하나인 태극기, 그 안에 있는 민족 통일의 원리', 문익환 목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86년 11월 12일 중에서)

이렇게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는 문익환 목사에게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성취를 향한 방향을 흔들림 없이 제시해 주는 이정표가 돼 주었다. 태극은 분단의 역사 속에서 반공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전락하기도 했지만, 태극 사상에 깃든 강력한 다이너미즘(dynamism)은 철옹성 같은 냉전 의식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정면으로 돌진하게 하는 에너지원이 되기도 했다.
태극기와 교회의 조건부 동행


태극기의 게양은 적어도 199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교파와 진보·보수를 초월해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 분위기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공격하며 분리주의적 태도를 보였던 맥킨타이어의 내한 행사장(1959년 11월 11일)에도 중앙에 태극기가 게양됐고, 1965년 8월 15일 한일 국교 비준 반대 기도회에 참여한 신자들과 청년들도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한국교회는 교파를 초월해 8·15 광복절 감사 예배, 3·1절 기념 예배, 6·25 상기 예배 등을 개최하며 각종 교회 행사에 태극기를 적극 게양했다. 1970년대 연세대 김찬국 교수(신학과)는 교회 강단의 태극기 장식을 장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 매킨타이어의 방한과 WCC 비판 강연(1959년).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집회에서도 태극기 게양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사진 제공 김응호

박정희 정부의 한일 협정에 반대 집회를 마치고 거리로 나서다 사복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는 기독교 청년들.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쥐어져 있었다(1965년). 사진 제공 김응호


"서강교회 설립 70주년 기념 예배에서 장로로 취임하는 분들이 태극기와 감리교회기를 두 개 강단에 봉헌한 것을 보고 흐뭇했었다. 강단에 꽂아 둔 태극기가 강단의 권위를 더 높여 주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 교회들도 미국기를 강단에 꽂아 두고 있는지 오래이다. 3·1절 기념 예배 때에는 태극기와 감리교회기를 선두로 행진해 들어가 강단 옆에 세워 둔다." (김찬국, '강단의 권위 문제: 오늘의 설교 목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세계>, 1975년 11·12월 호, 5쪽)

김찬국은 같은 글에서 향후 "3·1절과 8·15 광복절은 한국교회가 예배 의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기념"하자고 권했으며, "국민 의례에 나오는 애국가, 독립선언서 낭독, 만세 삼창, 3·1절 노래, 광복절 노래 등을 기독교 예배 순서에 삽입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한국인의 신앙 주체성을 살리는 길"이며, "교단적으로도 자발적인 움직임을 권장하고 일반화할 필요가 있으며, 한국 기독교 전체가 이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세계> 1981년 2월 호의 "3·1운동 기념 예배와 출애굽 운동: 3·1절을 교회 명절로 만들자"라는 글에서 반복됐다. 다만 눈에 띄는 점은 "'국기에 대한 경례'는 예배 순서에 넣지 않는다"(7쪽)고 강조한 점이다. 이는 앞서 한국교회가 국가권력과 큰 갈등을 빚은 1949년 국기배례 거부 사건의 경험이 수반된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찬국 교수(연세대 신학과).


"금년 3월 1일 주일예배 때에는 각 교회가 강단에 태극기를 걸고 예배를 시작하기 바란다. 애국가, 찬송, 기도, 성경 봉독, 독립선언서 낭독, 3·1절 노래, 설교, 찬양(어린이들은 유관순 노래), 회고담(회고담을 할 수 있는 분을 모시는 경우), 찬송, 만세 삼창(태극기를 나누어 주거나 가져오도록 하여), 축도 이런 예배 순서로 짜면 된다. 또 기념 예배에는 지방 유지나 시민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에 참여케 하여도 좋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예배 순서에는 넣지 않는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은 기도를 맡은 분에게 뜻을 알려서 기도하도록 하면 된다." (김찬국, '3·1운동 기념 예배와 출애굽 운동: 3·1절을 교회 명절로 만들자,' <기독교세계>, 1981년 2월 호, 7쪽.)

김찬국은 교회 내에 태극기를 설치하고 3·1절 기념 예배를 드림으로써, "3·1운동의 기본명제인 독재 배격, 군국주의 배격과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성취를 오늘과 내일의 우리 역사에 실현하도록 힘써야 할 것"(7쪽)이라고도 강조했다. 한국 감리교회 사례만 살펴보더라도 다양한 교계 행사에 태극기를 게양하거나 대형 태극기 행진 퍼포먼스, 기념품·소품 제작 등 태극기 관련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한 사례를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김찬국, '강단의 권위 문제: 오늘의 설교 목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세계>, 1975년 11·12월 호.

'탁상용, 교단기, 태극기 판매', <기독교세계>, 1985년 6월 호, 26쪽. 1980년대에는 교회 예배당과 목회자의 책상에 태극기·교단기가 장식되는 관행이 매우 일상적이었다.
교회당 강단을 떠나
광장에 운집한 태극기


하지만 1990년대까지 교회 내에 안착돼 가던 태극기 게양 문화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1994년 이태원교회 김성일 장로가 한국교회 여러 예배당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는 것을 문제 삼았은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신문>·<현대종교> 등 신문·잡지에 '교회의 국기 게양은 성경적인가', '교회의 깃발은 그리스도'와 같은 글을 기고하며 교회 내 국기 게양 반대 운동을 전개해 감리교회 안에서 논쟁을 야기했다. [김성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홍성사, 1994), 24~33쪽 참조]


"각국의 교회들이 자기네 국기를 게양한다면 태양신을 그려 놓은 우루과이의 깃발, 아쇼카의 법륜을 그려 놓은 인도의 깃발, 무신론의 낫과 망치를 그려 놓은 공산국가의 깃발 아래서도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인가? 그대들은 저 사우디아라비아의 깃발 아래서도 예배드릴 수 있는가? 저들의 녹색 깃발에는 흰색의 아랍어 글자가 들어 있는데 그 뜻은 '알라신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모하메드만이 신의 유일한 예언자이다'라는 뜻이다." (김성일, '교회의 깃발은 그리스도,' <비느하스여 일어서라>(국민일보사, 1994), 205쪽)

이러한 분위기는 1992년 감리회의 '변선환·홍정수 교수 종교재판 사건' 등 종교다원주의·포스트모던신학에 대한 뜨거운 논쟁과 더불어 '서태지와 아이들', '뉴 에이지 운동' 등 새로운 대중문화의 출현에 대한 보수 개신교계의 강한 거부감으로부터 촉발된 측면이 있다. 태극기 게양에 대한 김성일 장로의 보수주의적 문제 제기는 '낮은울타리문화선교회'(1990년 창간) 같은 근본주의적인 문화 선교 언론 단체, 같은 해 사단법인으로 인가받은 '한국창조과학회' 등의 공격적인 활동과 연계됐다. 당시 세속적인 사회 문화에 강한 거부감과 경각심을 공유하고 있던 보수교회는 이에 크게 호응했고, 교회당 태극기 게양 문화도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1990년대 이후 교회 강단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문화가 점진적으로 소멸하게 된 역사적 동인과 과정에 대해서는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한때 태극기가 근엄하게 게양돼 있던 교회당 강단은 현대적 공연·영상 예배의 수월성·실용성을 꾀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급격히 변모해 갔으며, 권위적인 공간들도 점차 단순화·해체되고 있다. 그렇게 태극기 게양은 과거의 추억이 돼 버렸다. 20세기 <통일찬송가>에 존재하던 교독문 '68.국가기념주일', '69.삼일절', '70.광복절'도 현재 <21세기 찬송가>에서는 "나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모두 대체됐다. 현대 한국교회는 외적으로는 교회 성장론 혹은 새로운 예배학적 실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예배 공간을 빠르게 변형하고 상징물을 제거·신설하고 있으며, 내적으로는 민주적 가치와 기독교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자연스럽게 예배당 강단에서 배제하게 됐다.

극우 기독교 단체들의 서울시청 앞 집회 광경.

현대 교회의 예배 문화와 신앙 양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극우적 신앙'과 '국가주의'가 결합한 극단적 보수 기독교 세력은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광장에 게양된 태극기 아래로 재결집해 그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이들은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수준의 영향력 있는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사회와 언론은 이들의 행태에 주목하며 한국 개신교 전체에 대한 이미지·인식을 소비하고 있다. 또한 사회규범·상식을 파괴하는 이들의 과격한 발언과 폭력적 행동은 정치·사회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향후 한국교회가 선교를 이어 나가고 새로운 정체성 수립을 위해서는, 이러한 극단적 신앙 양태가 더 이상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그리스도인과 시민사회가 소통·연구하며 힘을 모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태극의 역사 앞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


초기 한국 기독교에 태극기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근대국가·자주독립을 성취한 대안적 시민사회를 꿈꾸게 하는 표상이었다. 그렇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동양적 세계관을 표현한 '태극'을 기독교 신앙 안에 녹여내 동서 조화를 모색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태극기를 손수 제작해 만세 시위를 벌이면서 그러한 희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확대 앞에 상실과 절망을 체험한 한국인들은 결국 일장기 숭배를 강요받거나 자발적 숭배의 길을 선택했다. 일장기 숭배의 길은 굴욕적이지만 달콤한 안전과 권력을 허용해 줬다. 사실 한국교회의 역사적·신앙적 타락과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교회는 일장기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훼절의 길에 들어섰다. 그렇게 한국 기독교는 독재(파시즘)와 폭력에 순응한 대가로 물질적 번영과 정치적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예상치 못한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교회는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국가와 충돌한 일부 기독교계 세력들은 태극기를 이용하거나 혹은 거부하며 여러 신흥 종교들을 형성했다. 그들은 태극기를 내걸고 민족의 메시야인양 행세했다. 일제에 부역한 기성 교회 또한 회개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민족 분단이라는 위기 앞에서 '친일'을 은폐하기 위해 '반공'이라는 안전지대로 숨어들었으며, 결국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다.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며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물적·제도적 특혜를 누렸다. 일제 파시즘 시기보다도 더욱 강력한 물신숭배와 권력화에 경도돼 갔다. 분단과 냉전 체제는 일제강점기에 태극기 배례(경례)를 거부하며 순전한 신앙을 고수했던 보수 신앙마저도 용공, 공산주의, 반체제 인사로 왜곡해 나갔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과 국가주의가 결합된 국기 숭배의 메커니즘은 일제 파시즘 시기부터 본격화했고 오늘까지도 한국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더욱 확실해지는 점은, 최근 반세기 동안 벌어진 태극기의 가치 훼손·왜곡·굴절 과정에서도 여전히 태극기 본연의 정신과 가치를 온전히 인식해 온 건강한 시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4·19 직후, 한국교회 주요 신학대학의 학장을 맡고 있던 홍현설 박사(감신대)와 김재준 박사(한신대)는 <기독교사상>에 4·19에 대한 현실 인식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홍현설, '4·19에서 얻은 교훈', <기독교사상>, 1960년 6월 호.


"4·19를 겪고 난 우리 낡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만 부끄러움과 자책하는 마음에서 학생 제군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이제부터 우리는 좀 더 책임 있는 시민이 되기를 힘써야 하겠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가가 된다'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무관심과 방관주의의 태도를 버리고 우리의 눈을 크게 뜨고 우리의 귀를 열어서 어디에 부정이 있으며, 불법이 있으며, 민의가 묵살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서 여론을 일으키고 자유로운 비판을 내려서 그러한 병폐가 축적되어 후일에 또 큰 불행을 가져오지 않도록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민주주의의 감시병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홍현설, '4·19에서 얻은 교훈', <기독교사상>, 1960년 6월 호)


"4·19는 암흑을 뚫고 터진 눈부신 전광이었다. (중략) 교회도 이 섬광에서 갑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하여 구정권의 악행에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교인까지 생겨났다. (중략) 교회가 대국가 관계에서 긴장을 풀었다는 것은 무서운 실수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중략) 신약에서 본다면,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장에 국가를 적극적으로 긍정하였으며, (중략) 하나님이 그(국가) 안에서 그것(국가)을 통하여 섭리하신다고 하였고,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이 국가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복종'이란 말은 현대 민주 사회에 있어서는 '책임적으로 참여 또는 동참'한다는 용어로 대체되는 것이다. (중략) 국가가 전체주의적으로 자기를 신화神化하는 때 이 선(정교분리의 선)은 사실상 도말塗抹되는 것이므로 신자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 (중략)



대략 이상과 같은 원칙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선이 그어진다고 본다면 우리 교회가 이(승만) 정권 시절에 똑똑히 굴지 못했던 자화상이 드러날 것이다. 국가를 절대화하려는 독재 경향이 익어감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에 교회로서의 경고를 제대로 발언하지 못했다는 것, 교회가 멋없이 집권자와의 일치 의식에 자위소를 설정했다는 것, 교회가 대사회 건설 사업에 활발하지 못했다는 것 등등이 원칙적으로 반성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준, '4·19 이후의 한국교회', <기독교사상>, 1961년 4월 호, 36~38쪽)

이들이 4·19 이후를 준비해야 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숙제로 내건 것은 '교회와 국가의 건강한 관계를 수립'하는 일이며, 단순 종교인으로서가 아닌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민주 사회 건설의 주체로 역사에 동참하라는 요청이었다. 홍현설이 말한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것"과 김재준이 말한 "책임적으로 참여 또는 동참"하는 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체적 실천이자 소명이다. 그러나 60여 년 전 두 신학자의 교훈과 경계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고 절실하게 들리는 현실은 자못 씁쓸하고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국가 상징물인 태극기를 관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유에는 - 김찬국 교수가 강조했듯 - "독재와 군국주의를 배격하고 인권의 기본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취를 오늘 우리의 역사에 실현하도록" 힘쓰겠다는 대전제와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잃고 권력과 물신의 노예가 되는 순간, 태극기는 언제든지 민족과 시민사회를 분열시키고 자신의 욕망만을 드러내는 추악한 깃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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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배례와 주목례 사이에서
[태극기와 한국교회] 해방 직후 '교회'와 '국가'의 갈등, 그리고 뒤바뀐 '보수'의 자리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06.11
 
일장기에서 태극기로


해방을 맞았다. 그동안 옥죄던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서 벗어나 잠시 자유를 찾은 듯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내 해방 이전 훼절·부역의 유무·정도를 놓고 정죄·논쟁에 몰두하며 분열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교회와 학교에 게양됐던 일장기는 내려졌지만 '국가'와 '민족'이라는 새로운 억압 기제가 그 자리를 대치代置해 가고 있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미군정이 시작됐다. 약 3년간 지속된 미군정기 동안 한국 사회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좌우로 분열됐다. 교회도 이 모든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일장기를 게양하던 교회에 태극기가 게양되자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당황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교회 지하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기억은 무의식으로 아련히 침잠한 것일까. 해방 직후 그리스도인들에게 태극기는 국가 의례라는 미명하에 강요된 신사참배와 일장기 배례를 연상케 하는 트라우마의 매개로 전락해 있었다.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독립국가 건설을 부르짖는 구호와 청사진은, 이미 익숙해진 일제의 파시즘적 퍼포먼스와 구호를 답습하며 신자들의 일상에 침투하고 있었다.

점령 직후 신속한 치안 유지와 정국 안정을 모색한 미군정은 친일 부역 인사들을 재발탁했다. 이들은 정부 요직과 경찰·군사·교육·문화·종교 등 다양한 영역의 헤게모니를 빠르게 장악했고, 이전에 누리던 특혜와 기득권을 유지·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애국심은 악당들의 최후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 - 새뮤얼 존슨

그렇다. 해방 공간에서 친일 부역 세력은 '애국'이라는 이름 뒤에 숨었다. 예상치 못한 분단 체제는 '반공이 곧 애국'이라는 도식을 정당화했다. 반공 노선을 선명하게 견지한 미군정기 친일 부역 세력은 태극기를 마치 수개월 전 일장기를 다루던 그 눈빛과 애정으로 신성히 여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기괴한 풍경을 목도하며 당대 양심 있는 시민과 그리스도인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이제부터라도 순전한 신앙을 지켜 나가자 다짐한 해방 공간의 신앙인들은 국가國家도 국기國旗도 언제든 '우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기억을 자연스레 담지하고 이를 경계했다. 그리고 여전히 일제강점기와 동일하게 '국기에 대한 배례'를 실시하고 있는 학교 교육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 금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손양원 목사와 손명복 목사 자녀들은 학교 조례 시간에 국기 배례를 거부했다. 안동에 살던 이원영 목사도 국민학교에서 국기 배례를 강요하자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특히 이원영 목사 딸 이정순은 국기 배례를 참여하지 않기 위해 안동여자중학교에서 대구 신명학교로 전학하기까지 했다.

퇴계 이황의 14대손 봉경 이원영 목사(1986~1956).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부산 좌천동 일신여학교 2층을 빌려 개교할 당시, 여학교 학생들이 국기 배례를 하는 모습을 본 신학생들이 이에 항의한 사례도 있으며, 1947년 경기도 파주 봉일천국민학교에서는 죽원리교회를 다니는 남준효 학생이 처음으로 혼자 국기 배례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미군정기 학교 교육 현장의 국기 배례를 둘러싼 갈등이 처음으로 지역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시점은 1947년 3월 즈음이었다. 이때 안동농림중학교(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에서 국기 배례를 거부한 학생 5명이 정학 처분을 당했던 것이다.

안동농림중학교 전경.


"(안동 19일발 UP조선) 지난 7일 안동농림중학교에서는 벌써부터 전前 교장과 열여덟 직원 사이에서 알력이 있었다는데 교유 전근敎諭轉勤(교사 인사이동 - 필자 주)이 발단 되여 직원의 교장 배척排斥으로 총사직總辭職을 감행하였다. 교장은 휴교를 선언하였으나 그 후 쌍방 교섭은 결렬되어 11일 직원 측은 1. 전 직원을 복직시킬 것, 2. 금후 직원의 전근 및及 재직을 보장할 것, 3. 교장의 독재 배척 등의 7조항을 요구하고, 이어서 학생(생도) 측에서도 역시亦是 1. 교장의 독재 배척, 2. 교장의 교유(교사)에 대한 성의 부족 등을 항의하였다. 그 후 생도 측에서는 급속 복교를 탄원한 바 있었는데, 일방(한편), 학부형회장이 21일 도道 학무과에 가는 등, 당지에서는 학원의 불상사가 처음인 만큼 일반의 물의가 자자하다." ['민의 무시한 교장 - 안동농림교 불상사 발생', <서울석간>, 1947년 3월 20일 자 2면]

1947년 3월 안동농림중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은 당시 교장의 독재적 행태로 불거진 교사들과의 갈등, 학생들에 대한 과도한 징계 등을 이유로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징계에는 국기 배례를 거부한 학생 5명에 대한 퇴학 조치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사건 발생 한 달 반쯤 후에 발행된 <독립신보> 기사는 아래와 같이 의미심장한 지적을 한다.

'민의 무시한 교장 - 안동농림교 불상사 발생', <서울석간>, 1947년 3월 20일 자 기사.

'안동농림중학서도 다수 학생을 퇴학', <독립신보>, 1947년 5월 9일 자 기사.


"[경북안동지국발] 안동농림중학교에서는 지난 1일 불순분자 그리고 교내 질서 교란자라는 다수의 학생을 퇴학 처분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교 교장 전영한 씨는 일제시대의 도회의원道會議員, 해방 후에는 독촉회장獨促會長(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 필자 주)이라 하며, 이번의 다수 학생 퇴학 처분에 대하야 비난이 크다." ['안동농림중학서도 다수 학생을 퇴학, <독립신보>, 1947년 5월 9일 자 2면]

학생들을 '불순분자', '교내 질서 교란자'로 몰아 퇴학 처분한 교장 전영한 씨는 불과 수년 전 일제 당국에 협력하는 도회의원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이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을 지내며 지역사회의 지도층, 교육자로서 대규모의 학생들을 퇴학 처분했다. <독립신보>는 이에 대한 지역사회의 충격과 비난이 크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1947년 3월 학생 5명의 퇴학 처분으로 발발한 사태는 이후 직원들의 반발과 총사직, 7월 말 재학생들의 시험 거부로 이어졌으며, 학교장은 시험 거부에 동참한 학생 143명을 추가로 퇴학 처분했다. 사태의 전개 과정은 몇몇 언론에 보도됐으며, 대강의 흐름은 신문지상 기사 제목만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1947. 3. 20. <서울석간>, '민의 무시한 교장 - 안동농림교 불상사 발생'
1947. 3. 20. <부녀일보>, '안동농림교 소동 - 교장 배척코 교유 총사직'
1947. 3. 21. <부녀일보>, '안동농림학교 소동 해결?'
1947. 5. 9. <독립신보>, '안동농림중학서도 다수 학생을 퇴학'
1947. 9. 13. <영남일보>, '150명 퇴학 처분 - 학무국서 진상 조사 착수'
1947. 9. 19. <영남일보>, '안동농림생 퇴학 처분 - 경과 진상을 발표'
1947. 10. 2. <영남일보>, '안동농림교 사건 복교 편입?'
1947. 10. 14. <부녀일보>, '민주 학원 건설 위하야 전제적 교장 파면하라 - 안동농교 퇴학처분거부투위 성명'
1947. 10. 24. <부녀일보>, '150명 퇴학 처분한 안동농교 사건 미해결'
1947. 10. 24. <영남일보>, '안동 농림교 사건 - 해결은 생도 측 자숙에서'

안동농림중학교 사태가 지역사회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도지사와 학무국 장학사들이 조사에 나섰다. 그 과정을 통해 밝혀진 재학생들의 7월 시험 거부 사유는 "전에 퇴학당한 5명의 동료를 복교시켜 달라는 요청에 대한 학교의 불응"('안동농림생 퇴학 처분 - 경과 진상을 발표', <영남일보>, 1947년 9월 19일 자)이었다. 투쟁 과정을 보도한 <부녀일보> 10월 14일 자 기사 '민주 학원 건설 위하야 전제적 교장 파면하라 - 안동농교 퇴학처분거부투위 성명'은 "날조 죄목"으로 5명이 퇴학당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친일 이력이 있는 학교장의 일방적인 국기 배례 강요', '이에 신앙 양심상 거부한 일부 학생에 대한 중징계', '교직원과 전교생의 반발과 학사의 파행' 등이 이 사태의 본질에 가까운 설명 아닐까. 결국 안동농림중학교의 '국기 배례 거부 사건'은 전교생 중 무려 150여 명이 퇴학당하며 학교와 투쟁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비화하는 촉발점이 됐다.

당시 학교 당국의 국기 배례 강요 정책에 강한 불만과 경계를 보였던 원로 이원영 목사는 안동농림고등학교 이홍원 교장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


"국기에 경배하는 일이 신앙인으로서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동일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처벌당한 학생은 어떤 처벌이라도 각오하고 신앙 양심에 따라 국기 경배를 거부한 것이다. 그 용기와 신념이야말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참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양심에 어긋난 것을 '아니오'라고 거절하는 정신을 길러 주는 것이 참 교육이 아니겠으며,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유린할 때 용감히 항거할 줄 아는 인물을 길러 내는 것이 학교 교육이 맡은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김세현의 증언', 임희국, <선비 목회자 봉경 이원영 연구>(기독교문사, 2001), 220쪽]

안동에서 벌어진 큰 소란은 국기 배례가 가져올 전국적 혼란에 대한 사회와 교계의 우려를 고조시킨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1월 16일 주일예배에서 손양원 목사는 사도행전 14장 8~18절,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본문 삼아 '국기 경배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 했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손양원 목사(1902~1950).


"국기를 보고 경배하는 것은 망국지본亡國之本입니다. 국기 경배하는 나라는 다 망합니다. 조선교회 지도자들이여, 너희는 진정한 선지자의 책임을 다하십시오. 조선의 운명은 조선교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 나라의 흥망성쇠를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다 보여 주십니다. 오늘 교회 지도자의 책임은 중합니다.


듣고도 보고도 알고도 말하지 않는 지도자여, 너희 죄는 더욱 중합니다. 나라를 사랑합니까? 국가의 흥망성쇠는 종교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가인 정치 지도자들이여, 종교로써 국가를 지배하십시오. 국기 경배는 우상입니다. 예수의 사진에도 경배하지 않습니다.


우상인 줄 알고 섬기는 자가 있고 우상인 줄 모르고 우상을 만드는 자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을 보고도 절을 못하게 합니다. 조선의 삼강오륜三綱五倫 중에 절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여자가 남편에게, 아들이 부모에게, 백성은 임금에게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답례할 줄 아는 자에게 합니다. 국기 경배는 우상입니다. 임금의 얼굴을 본 후에야 절해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국기는 기旗 행렬 할 때, 만세 부를 때, 나라 경절慶節때 집집에 달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기 자체입니다. 국기는 경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국기에 대한 의무는 이 세 가지입니다. 국기의 원리가 지나치면 나라가 망합니다. 조선의 태극기에는 태음太陰, 즉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우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인은 경배하지 않고 주인이 만든 물건에게 경배하니 죄입니다. 저도 태극기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절은 아니합니다. [손양원, '국기 경배에 대하여', 1947년 11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 설교 - 손양원>(홍성사, 2009), 55~56쪽]

손양원 목사의 눈에는 곧 도래할 대한민국 신생 정부의 미숙하고 어설픈 국가주의적 전횡·강요가 선연히 그려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준엄하게 경고하는 '태극기 우상화'는 이내 현실이 됐다. 그 자신도 한국인이기에 태극기에 대한 애정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절을 하는 행위에는 결코 타협할 수 없었다. 손 목사의 경고와 함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때는 가까워 오고 있었다.
태극기, 우상인가 상징인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헌법은 종교의자유를 보장했다. 하지만 정부가 진행하는 국가 의례는 일제 말기 파시즘의 습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김양선 목사는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1949년 봄부터 일부의 국가지상주의자들에 의해 태극기에 대한 경례가 강요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해방 직후 남산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1945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1948년 8월 15일).

1949년 4월 28일 경기도 파주 조리면 죽원리교회(현 대원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초등학생 수십 명이 국기 배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이 학교 교장이 기독교인 학생 42명을 퇴학 처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래는 <동아일보>에 소개된 관련 기사인데, 아마도 정부 당국의 입장을 소개한 지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건축 직후의 죽원리교회(현 대원교회, 사진 위)와 죽원리교회 주일학교 교사 및 학생들(1948년 12월 26일, 사진 아래). 사진 제공 대원장로교회


"일부 종교인이 국기 배례는 우상숭배라고 이를 거부하고 있으나 이는 절대로 우상숭배가 아니오 우리 국기는 우리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국가 밑에서 종교를 발전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국기 배례를 거부하여 퇴학된 학생에 대해서는 만약 국기 배례를 승인하면 복교시키겠다." ['談官長安 - 국기 배례는 당연', <동아일보>, 1949년 5월 13일 자]

정부 당국의 논리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닌, 단순한 국가 의례"라며 기독교 지도자들을 회유·설득하던 일제 당국의 논리와 매우 흡사하다. 당시 안호상 문교부장관(대종교 핵심 인물)은 "극소수의 종교인이 우상숭배라고 해서 국기 배례를 반대하고 있는 듯하나 이는 그릇된 해석이며 이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의 상징인 국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종교 신앙은 자유거니와 국가를 떠난 종교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연합신문, 1949년 5월 13일 자]."라고 주장했다.

국기 배례 거부 사건이 전국적인 교계 이슈로 부상하게 된 현장인 파주 봉일천초등학교. 사진 제공 봉일천초등학교

'국기 배례 거부한 국민교생 42명을 퇴학', <자유신문>, 1949년 5월 8일 자 기사.

한국 교계에서도 일련의 반응이 나타났다. 제35회 장로교 총회(1949년 4월 19~23일)에서는 경남노회·군산노회가 '국기 경례 방식 변경'에 대한 헌의를 제출했고, 죽원리교회 최중해 목사는 봉일천국민학교 국기 배례 거부 사건에 대해 보고했으며, 총회는 '국기에 대한 주목례 변경 문제'를 손양원 목사에게 맡겨 정부 당국과 교섭하는 것으로 결의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5월 11일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하자는 진정서를 제출해 찬성 회신을 받았다. 그리고 17일 한국기독교연합회 실행위원회 주최로 각 파 대표 연석회의를 실시해 현 사태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공표했다.

파주 대원교회에 세워진 100주년 기념 십계명 신앙비. "그들은 대원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퇴학당하고 집에서 쫓겨도 나고 이 소식을 들은 전국 교회는 기도했고, 대통령에게 진정서가 전달되고, 국무회의를 소집한 대통령은 행사시 '국기에 대한 경례' 대신 '국기에 대하여 주목(오른손을 왼쪽 가슴에)'으로 결정했고, 학생들은 복교가 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뒷면(사진 오른쪽)에는 국기 배례 거부에 참여한 이들(교장·부장·반사·학생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사진 제공 대원교회

죽원리교회 주일학교 교장이자 봉일천 국기 배례 거부 사건으로 구속된 최중해 목사(사진 가운데, 1949년 3월). 사진 제공 대원교회


"한국기독교연합회 실행위원회에서 17일 기독교 각파 대표와의 연석회의를 열고 국기 배례가 우상숭배냐 아니냐를 의제로 격론을 전개한 끝에 국기는 우상이 아니나 현재의 배례 방법은 일제 잔재적인 형식이라는 데 대체의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파주군 봉일천국민학교의 교인 가정 아동의 42명이 국기 배례를 거부하여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을 계기로 기독교 각 파에서는 국기 배례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일대 파문을 일으켜 그 귀추는 한 개의 사회문제로 주목되었던 것이다. 17일의 연석회에서도 각 파간의 의견이 구구하여 좀처럼 통일적인 결론은 얻기 곤란하였다고 하는데 대체 이번의 결론으로 기독교인들의 국기 내지及 이의 배례에 관한 태도는 결정된 것으로 동회의同會議의 대체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국기는 우상이 아니다. 一. 현재의 국기 배례 방법은 일제 잔재적인 형식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우상숭배라 할 염려가 있다. 一. 국기를 우상화하던 일본과 나치 독일은 패망하였다. 一. 기독교는 애국적인 양심에서 국기의 우상화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국기 배례 문제에 기독교 각 파 의견 일치', <동아일보>, 1949년 5월 23일 자 2면]

'국기는 우상이 아니다 - 기독교 각 교파 의견 일치', <영남일보>, 1949년 5월 22일 자 기사.

'국기 배례 문제에 기독교 각 교파 의견 일치' <동아일보>, 1949년 5월 23일 자 2면 기사.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국기가 우상이 아닌 것은 인정하지만, 우상화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국기 배례 문제에 대하야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천명함>이라는 8쪽 분량의 소책자를 간행해 적극적인 입장을 펼쳤으며, 국기 우상화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해 1949년 10월 20일에는 안호상 문교부장관의 반기독교적 문교 정책을 조사하는 특별대책위원회를 조직하게 됐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50년 3월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 청원서('경애하옵는 이 대통령 각하')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일제의 '일장기 배례'와 유사한 형태의 '태극기 배례' 의식은 기독교적 규범과 신앙 양심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우상숭배'로 인식돼, 당시 친기독교적 성격을 띤 이승만 정부가 '배례拜禮'를 '주목례注目禮'로 전환하는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정부에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공개 청원서 '경애하옵는 이 대통령 각하'(1950년 3월). 사진 제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국기 주목례를 실시하는 모습. 영화 '국제시장' 갈무리


"지난 25일 개회한 국무회의에서는 종전에 실시하고 있던 국기에 대한 예식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우리가 국기에 대하여 존경하며 애국심을 가지는 것은 국기가 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인 까닭에 종래 우리가 허리를 꾸부리고 배례하는 것은 일제식이고 우상숭배의 형식에 가까우므로 금번에 이를 변경하여 다만 국기에 대하여 주목하면서 부동자세로 '차렷'한 후에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 심장 위에 대기로 하였다. 그런데 군인 및 경찰관만은 종전 예식대로 실시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각종 의식 때에 묵도는 일체 폐지하기로 되었다 한다. (이상 <동아일보> 제847호에 기록된 대로 옮겨 적음] ('국기에 대한 예식을 변경 -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에', <조선감리회보>, 1950년 4·5월호, 15쪽)
'배례'에서 '주목례'로 변경됐지만


1949년 국기 배례가 주목례로 변경됐지만, 봉일천초등학교 국기 배례 거부 사건 이후로도 함평국교와 안동 남후국교, 1950년대에 들어서도 횡성 공근국교와 거창 위천국교, 울산 방어진초급중학교 등에서 다양한 유형의 국기 배례 거부와 이에 따른 탄압 사건이 발생했다. 관련 기사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번 국기 배례 거부 문제로 파주군 봉일천과 고양 지도초등학교 아동 수십 명이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함평초등학교 교사 임영권(가명, 20)은 기독교 신자로서 요즈음 일부에서 국기우상론國旗偶像論이 대두하자 국기 배례는 일제 잔재 행위이니 주목은 하나 배례는 할 수 없다 하여 학교 당국의 누차에 긍한 주의에도 불응하고 최후에는 사표까지 제출하였다는데 학교 당국의 사표 수리는 지난번 문교부 방침의 견지로 보나 학원 내에서의 개인 자유행동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므로 책임자로서 부득이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는데, 이 문제는 교육상 견지로나 정치적 관점으로 보아 중대한 문제인 만큼 경시할 수 없을 것이라 하며 전기前記 임(교사)은 동교의 모범 교원이었던 만큼 동(임) 교사의 사표 제출에는 일반이 애석히 여기고 있다고 한다." ['(각지 소식) 국민학교 교사가 국기 배례 거부 - 주목은 하나 배례는 일제 잔재 행위라고' <호남신문>, 1949년 6월 15일 자 2면]


"기독 신자의 국기 배례 폐지에 대한 진정 문제 - 그것은 부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전국적인 문제인 만큼 나로서는 가부可否에 대하야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 처리는 물론 중앙 당국에서 할 것임으로 경찰로서는 동태를 조사하여 보고할 따름이나 기독 신자의 진정은 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 ['최 경찰국장, 기자회견담, 양산 폭도 침입은 보복 수단, 이재민들은 응급 구호, 기독교인의 국기 배례 폐지설 동태를 조사', <자유민보>, 1950년 2월 25일 자]


"[방어진] 한동안 진□ 모 중학교 생도가 국기 배례를 거부하여 세간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 기억도 사라지지 아니한 이때 방어진초급중학교 생도 5명이 □□히 성명姓名을 비秘합 □이 아침 조례 시에 국기 배례를 거부한 불순 생도가 있어 학교 당국으로부터 이들 생도에 대하여 단호 퇴학 처분을 하였다는데 □제 그 진상을 탐문컨대 이들 생도는 모두가 기독교 신자로서 우상을 숭배치 아니한다는 그릇된 기독교 신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국기 배례 거부 학생 퇴학 처분', <자유민보>, 1950년 4월 23일 자 2면]

아래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 직전(1947~1950)까지 '국기 배례'를 둘러싸고 전개된 교회와 국가 간 갈등 상황을 요약한 내용이다.

1947. 파주 죽원리 교회 주일학교 학생 남준효 국기 배례 거부.
1947. 3. 안동농림고교 국기 배례 거부 사건 → 거부 학생들 퇴학.
1947. 월남 재건교회 무인가 초등학교 운영 → 박형채 교장, 국가 교육 거부.
1948. 6. 고양 지도(능곡)국민학교 학생 수십 명 국기 배례 거부 → 몽둥이로 구타당함. 모두 퇴학 처분 후 30여명은 학교에 사과 후 복교 조치. 나머지 12명은 서울 모 학교로 원거리 통학.
1949. 5. 파주 봉일천국민학교 국기 배례 거부 → 42명 퇴학.
1949. 6. 함평초등학교 교사 임영권(가명, 20) 국기 배례 거부 → 학교 당국의 주의를 받던 중 사직.
1949. 8. 안동 남후국민학교 국기 배례 거부 → 50여명 퇴학(김수만 장로 자녀 포함).
1950. 1. 안중섭 전도사의 수난. 공근국민학교 학생들 국기 배례 거부로 전도사 연행 → 안 전도사 공산주의자로 몰려 춘천형무소에 수감, 검찰 10년 구형, 수감 80일만에서 '주목례' 정책으로 변경돼 무죄 석방.
1950. 3. 거창 위천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수난. 3·1절 행사에서 위천국교 학생 54명 국기 배례 거부 → 교사와 학생들 군인에게 구타당해 피범벅이 되고 아수라장. 교사 2명과 53명 학생은 경찰 이감.
1950. 4. 울산 방어진초급중학교 학생 5명이 아침 조례 국기 배례 거부 → 모두 퇴학 처분.

국기 배례가 주목례로 바뀐 상황에서도 1972년 유신 체제부터는 다시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유사한 사건들이 재발했다. (이하 <한겨레21>, 2006년 1월 10일 자, 3월 28일 자 참조)

1972년 광양 진원중앙국민학교에서 학생 50여 명이 국기 경례를 거부해 경찰들이 10대 학생들을 심문·체벌·추궁했으며, 주일학교 교사 양영례 씨는 국기·국장을 비방한 혐의로 구속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양씨는 1개월여를 순천교도소에 복역하다 보석으로 풀려났다.

같은 해 제천 동명초등학교 학생들이 국기 경례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남천교회 백영침 목사와 주일학교 강태호 교사를 국기 경례 거부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백 목사와 강 씨는 자신들의 애국심을 강조하며 종교적 차원에서 우상숭배를 금하는 십계명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점을 변증했다. 하지만 2개월 정도 구치소에 있는 동안 험한 조사 과정으로 온몸이 피멍으로 얼룩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애국심' 입증에 주력하여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

1973년 9월에는 김해여고에서 국기 경례를 거부한 기독교인 학생 6명이 제적당했다. 교련 검열 대회 준비 과정에서 35명의 국기 경례 거부자가 적발되자 추후 서약서에 연명하지 않는 6명을 교장 직권으로 제적한 것이다. 이에 학생들은 헌법이 보장한 양심과 종교의자유를 침해당했다면서 제적 처분 취소소송을 냈지만 3년여의 재판 끝에 대법원은 학교의 손을 들어 줬다.

국기 배례를 홍보하는 영화. 해방 직후 진행된 국기 신성화 및 우상화 정책은 독재 정권에 권위를 부여하고 국가 폭력을 정당화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상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1970년대 사법부는 국가주의와 종교적 양심의자유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엇갈린 판결을 내려 신앙 양심을 지키려 했던 신앙인들을 '반국가 사상범'으로 낙인찍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주변 기독교인들마저 그들의 행동을 극단적이라고 평가하며 냉소했다고 한다. 1972년 유신 체제 출범으로 더욱 강화된 국가주의와 독재 체제에 순응적이었던 당시 한국교회 대다수의 정체성과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요된 충성과 국가의 성역화는 마치 1930년대 말 일장기 배례와 동방 요배, 황국 신민 서사 제창을 강요하던 일제 당국 및 이에 순응했던 한국교회 모습과 극명하게 겹쳐 보인다.

반면 일제강점기, 불굴의 신앙 의지와 저항 정신을 계승해 독재 정권의 국가주의와 국기 숭배의 구습에 저항했던 소수의 보수적 신앙인들은 해방 이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용공분자', '공산주의자', '반국가 사범'으로 규정됐다. 분단과 한국전쟁, 좌우 분열과 이념 대립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 또한 굴절시키고 왜곡하는 역사의 일그러진 프리즘이 되고 말았다. 분단과 냉전 체제는 한국 기독교에서 '보수'의 자리를 바꿔치기 했다. 그 자리에는 일제 말기 교회 지도자들이 권력과 안위를 보장받으며 거래했던 '욕망'이라는 물신, 우상숭배가 슬며시 똬리를 틀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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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 게양된 성조기와 태극기(1)
[태극기와 한국교회] 한국교회 성조기 게양의 노정과 친미주의의 뿌리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07.19



"지난 토요일과 같이 좋은 날씨는, 7월 4일 미국인들의 축제를 위해 마련된 드문 날씨이다. 맑은 하늘, 산들바람과 향기로운 공기는 이날을 완벽한 휴일로 만들어 주었다. 국방부에서 친절하게 빌려준 천막이 햇빛을 가려 주었고, 많은 경찰들은 이전에 이런 모임을 본 적이 없는 한국 군중이 밀려오는 것을 제재하고 있었다.



피아노 전주로 기념식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기도를 드리고, 의장 H. G. 아펜젤러가 몇 마디 말을 했다. 애국심을 부르는 몇몇 합창에 이어서 독립선언문 낭독이 있었고, 이어서 연설이 시작되었다.



'동방에 온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이라는 연설이 있었는데, 정열적인 연설로, 앵글로색슨의 열정과 헌신이 동방 국민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즉 선교사들이 설교만 하러 여기 온 것이 아니고, 그들 앞에서 모범적 삶을 보여 주려고 온 점을 강조하였고, 이렇게 유익한 선교 활동의 범위는 인류가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까지 미쳐야 한다고 했다. 선교사의 봉사 형태는 다양하지만 모든 봉사 속에는 앵글로색슨 문명이 기반이며, 방파제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 목사님의 연설문을 들었는데, 진정한 애국심이란 협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남의 장점을 수용하는 넓고도 관대한 감화력이지 부풀리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이론을 전개하는 내용이었다. 이 연설은 특히 서울과 같은 국제적인 도시에 사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유익한 충고로 들렸다." [H. G. Appenzeller, '7월 4일 축제(1896)', <아펜젤러와 한국>(배재대학교, 2012), 53~54쪽]

위 글은 1896년 서울에서 개최한 미국 독립기념식 축제 행사를 참가한 <독립신문>의 서재필이 영문으로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한 기사의 일부다. 초기 내한 선교사의 다수가 미국인이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종교적·정치적·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0년 남짓한 신생독립국가였던 미국 특유의 애국주의는 개화의 기치를 내걸고 사대를 넘어 독립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한국의 당대 개화파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당연한 태도로 인식됐을 것이다.

1861년 간행된 '컬럼비아 만세(Hail Columbia)' 악보 표지. 이 곡은 1931년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가 국가로 제정되기 전까지 비공식적인 미합중국의 국가로 불렸다.

이날 행사에서 서재필은 회중을 대표해 '미국 독립선언문(1776)'을 낭독했으며, 제창된 주요 노래들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아메리카', '공화국전투찬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 '양키 두들(Yankee Doodle, 미국에서 애국심을 표현하며 즐겨 불린 노래이며, 독립전쟁 당시 군가로 쓰였다. 코네티컷주의 주가이기도 하다.)',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 1931년 이후 현재까지 미국의 국가)', '컬럼비아 만세(Hail Columbia, 1931년까지 비공식적으로 사용된 미국의 국가)'등이었다. 행사에서 불린 모든 노래가 찬송가가 아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가·애국가였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방에 온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이라는 연설은 19세기 말 미국인 내한 선교사들의 세계 인식과 선교관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단순히 복음의 전파라는 종교적 역할 수행에만 국한하지 않고 '앵글로색슨'의 민족적·국가적 모델을 선교 현장에 이식하는 것, 즉 미국식 문명· 문화·정치·경제 등 "인류가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로의 선교적 확대를 넓은 의미의 '선교'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들이 보여 준 애국심과 애국적 태도 또한 그들이 한반도에서 자주독립국을 모색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선교의 일부였음을 언더우드의 연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국가를 위한 기도'였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미국 독립기념일 외에도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탄생일'을 축일로 기념해 즐겼다. 사진은 1900년 미국공사관 내 알렌의 공관에서 벽 전면에 성조기를 게양하고 가든파티를 즐긴 선교사들의 모습이다. 참석자들은 워싱턴 시대의 의상을 입고 미국 건국 초기의 역사를 연극으로 시연했다. 사진 왼쪽부터 궁내부 고문관 샌즈, 전기회사 기술자 모리스, 선교사 노블 부인, 존스 부인, 정신여학교 교사 웜볼드, 아펜젤러, 벙커 선교사다. 이처럼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선교 현장에서 성조기의 게양·게시를 통해 강렬한 애국심을 표현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조기와 태극기 게양:
동경과 우호의 표현


선교 초기부터 미국인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보여 준 애국적인 국가 의례·의식·퍼포먼스와 기념물 제작 등의 행태는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독립문 건립, 태극기 공포·보급, 한국인의 민족 공동체, 한 국가의 시민이라는 정체성 발견 등은 이러한 선교적 특징·성격과 연동된 현상이었다. 당시 독립협회를 주도했던 이완용도 독립문 정초식에서 다음과 같은 친미적 연설을 통해 미국을 하나의 근대 독립국가의 모델로 상정한 바 있다.


"그 후 외부대신 이완용 씨가 연설하되 조선 전정前程이 어떠할까 한 문제를 가지고 연설을 하는데, 의논이 모두 절당하고 이치가 있더라.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에 있는 펄낸(폴란드)이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라. 세계 사기(역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같이 독립이 되야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펄낸 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하더라." ('독립관 연회',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근대 시민 국가의 모델로서의 미국에 대한 동경·우호의 감정을 교회와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초기 한국교회의 각종 행사에서 태극기뿐만 아니라 성조기도 함께 게양한 여러 사례가 확인된다.

조이스 감독의 방한을 맞아 태극기와 성조기를 높이 게양했던 돈의문.


"이번 감독이 나오신 후 5월 9일 예배를 처음 드릴 것인데 배재학당은 좁아서 능히 여러분이 움직일 수도 없는지라 정동 새 회당이 아직 완성은 되지 못하였으나 대강 수리는 하였으니 거기서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여러 도시 각처의 교중 형제자매들이 다 모였는데 남녀노소 합하여 천여 명이었다. 서대문 위에 대조선 국기와 대미국 국기를 보기 좋게 높이 달고 전도소 앞에는 각색 화초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마루 한가운데는 흰색 포장을 길게 치고 남녀 교우가 좌우로 장소를 나누어 앉았다. 그 후에 감독께서 전도하시고 시크란돈(스크랜턴) 목사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들려주는데 누가복음 5장 1절부터 4절까지 보신 후에 깊은 뜻과 참 이치를 절절히 해석하며 글자마다 형용하여 한 시간 동안 강론하시니 듣는 자 뉘 아니 감복하였겠는가? 후에 조원시(존스) 목사가 또 연속하여 논설하니 그 넓은 곳에 빈틈없이 앉은 사람들이 모두 흐트러짐이 없고 조금도 떠들지 않고 다 재미있게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일제히 찬미하는 소리에 북악산이 진동하는 듯하였다." ['회중신문', <죠선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5월 12일 자]

1897년 제12회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연회에 참석차 중국에 주재하던 조이스 감독(Bishop I. W. Joyce)이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은 준공을 보지 못하였지만 대강 자리를 마련해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1000여 명이 운집했다고 전한다. 당시 조이스 감독이 주재한 연회에서는 감리회의 청년 선교 단체인 엡웟청년회를 정식으로 조직했다. 당시는 독립문의 건립(1897년 11월 20일 준공)과 시기가 겹쳐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한껏 부풀었을 때였다. 사람들은 돈의문(서대문)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보기 좋게 높이" 달았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말 한국 사회가 동경하고 모델로 삼았던 우호적 국가가 미국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에 황제의 나이 수 만큼의 태극등을 게양한 것과 더불어 교회당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해 설치하기도 했다. 다음은 1900년의 인천 내리교회 성탄절의 풍경이다.


"이번 구세주의 탄일을 당하여 본 교회에서 기쁜 마음으로 경축할새 회당 안에는 구세주 강생 여섯 자를 크게 써서 달고 홍십자기를 한문으로 '금일대벽성위이생구주' 열 자를 금자로 새겨 전도소에 달고 좌우에는 태극기와 미국기를 달았으며 그 앞에는 등 열다섯 개에 국문으로 '오늘 대벽성에 우리 위해 구주 나셨네' 열다섯 자를 써서 높이 달고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탄일 나무를 성양 물종으로 단장하여 세웠으며, 밖에 대문 앞에는 청송으로 취병을 틀어 세우고 그 밑에는 큰 등으로 금자로 '구주탄일경축' 일곱 자를 한문으로 크게 써서 달고 그 앞에는 십자기와 태극기를 엇메어 끼었으며 각색 등 수백 여 개를 상하로 달았습니다. ['엡웟청년회: 제물포교회',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900년 1월 10일 자]

성탄절에 교회 대문 앞에 십자기와 태극기를 교차 게양하는 것과 더불어 교회 내부 좌우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 게양한 풍경은 오늘날 교회에서는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 풍경이지만, 이를 통해 당시 한국교회가 기독교 복음의 메신저이자 추종해야 할 모델국으로 '미국'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미국을 향한 한국교회의 우호적 표현은 평양에서 사역하다 본국으로 귀국하게 된 사무엘 오스틴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의 송별 행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음은 길선주 목사가 <그리스도신문>에 기고한 평양 소식의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대동강과 모란봉, 평양성 북성의 문루들. 마펫 선교사의 송별회(1905년) 당시 이곳에서 배 10척틀 띄우고 각 배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게양한 후 전별회를 성대히 거행했다. 사진 제공 미디어한국학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숭실학교 졸업식(1907년)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고,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다.

평양 장대현교회 초기 당회원들, 사진 중앙이 길선주 목사, 그의 왼쪽이 마펫[마포삼열], 오른쪽이 그레이엄 리[이길함] 선교사다.


"양 6월 1일에 마 목사께서 이곳에서 떠나 본국으로 들어가는데 몇 날 전에 이곳 형제 수삼백 명이 한 전별회를 열고 대동강에 수상선 10척을 준비하야 모든 풍류와 각색 음식을 갖춘 후에 모든 뱃머리마다 태극기를 높이 달고 각 목사 탄 배에는 미국기호(성조기)와 태극기를 쌍으로 단 후에 강파에 떠서 재미있는 풍류를 치며 좋은 노래를 하며 기쁜 찬미로 즐거이 놀고 헤어진 후에 그 떠나기 전날에 또 각 목사와 각 부인들이 일본 부리사와 그 다른 일본 사람과 이곳 장로 두 사람이 일제히 회집하야 전별회를 열고 리길함 목사가 회장이 되어 영어로 전별하는 연설을 하는데 목사 2~3인이 연설한 후에 마 목사께서 연설할 때에 모든 목사와 부인들이 이별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더라. (중략)



그 이튿날 신학도 오십 명이 서로 사랑하는 정을 기념하고자 각각 열심히 돈을 모아 은으로 기념장 두 개를 만들어 한 개는 목사께 드리고 한 개는 부인께 드렸는데, 그 기념장 만든 법식은 가운데에는 태극기호를 파란으로 놓고 가장자리에는 국문으로 '대한국 신학부 학도등 사랑표'라 하고 뒷 면에는 '마 목사 각하'라고 하고 자위 옆에 '성신보호'라 새겼고 부인께 드리는 기념장도 이와 같이 새기고 '마 부인 각하'라 하였으며 그 기념장을 드릴 때에 신학도들이 일제히 모여 학도 중 두 사람이 총대로 한 학도는 마 목사께 기념장을 드리고 한 학도는 부인께 기념장을 드린 후 학도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떠날 때에 네 곳 소학당 학도들 수삼백 명이 태극기를 받고 일제히 모이고 세 곳 여소학당 학도들 수백 명이 일제히 모여 각 목사와 각 부인들과 남녀교우 천여 명이 일제히 모여 외성 정거장으로 가서 모든 학도들이 삽보를 벗어 두르며 남녀교우들은 수건을 둘러 전별할 때에 마 목사와 그 부인과 여러 형제자매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랑하는 정이 밀밀하여 이별을 슬퍼하니 장하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길 쟝로, '평양래신', <그리스도신문> 제10권 제26호, 1906년 6월 28일 자]

마펫은 이날 전별회의 감동에 대해 "저는 겨우 16년 만에 평양시에 그토록 뚜렷한 변화가 왔다는 것을 깨닫기가 힘들었습니다. 16년 전 이달 그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도시에는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었습니다. (중략) 남성, 여성, 남학생, 여학생이 모두 줄지어 서서 송별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볼 때 우리의 가슴은 벅찼습니다. (중략) 우리는 주님께서 한국에서 섬기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마포삼열, 옥성득 편역, <마포삼열 자료집 4: 1904~1906>(새물결플러스, 2017), 537쪽]라고 기록했다.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서 사역한 16년 동안 서북 지역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에 평양 시민들은 물론 선교사 스스로도 크게 고무된 흔적이 역력하다. 아울러 미국과 한국의 우호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커다란 성취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는 듯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 초기 한국 기독교 내부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더불어 게양된 풍경은 기독교 신앙이 새로운 국가 공동체와 시대를 열어 가는 이데올로기로서 양국 간에 적극 수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서울 거리에 나부낀 성조기:
망국의 지푸라기



"모건 미 장관은 예상되는 손님들의 환영 계획에 있어서 서울의 자원을 고갈시켰다. 한국군과 일본군, 황실악대, 루스벨트 여사의 황실용 가마를 비롯한 궁궐의 여행용 의자 등이 연회를 기다렸고, 길가에 서서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던 한국인들의 긴 행렬이 연회 장소로 향했다. 한국의 관료들은 또한 가능한 한 모든 가게와 집 앞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이날을 기리려고 했다. 각각의 경우에 미국 국기는 '가정에서 만든' 것이었다." ['Happenings of the Month: The Bible Conference', <The Korea Methodist>, Vol.1, No.11, 1905년 9월 10일 자]

1905년 9월 간행된 미감리회 선교 잡지 <The Korea Methodist>의 기사다.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50여 명의 제국순방단을 조직해 한·중·일을 순방하는 과정에서 중국에 이어 9월 19일 한국을 방문했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고종 황제는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에 맞서 고군분투 중이었으며, 미국 대통령 딸의 방한 소식에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앨리스 루즈벨트를 국빈급으로 환대했다. 황실에서는 앨리스를 위해 황실용 전용 기차·가마를 비롯한 최대한의 인원과 자원을 제공했다. 심지어 앨리스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순방단 일행이 지나가는 동선마다 환영 인파를 동원했으며, 거리의 모든 집과 상점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하게 했다.

앨리스 루즈벨트가 대구를 방문했을 당시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양된 경상북도관찰부 정문 앞 풍경이다. 문루에는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는 편액이 붙어 있고 아래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교차 게양돼 있다. 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 촬영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앵> 1905년 10월 8일 자 표지에 실린, 황실 가마를 타고 구한국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궁으로 들어가는 앨리스 루즈벨트의 모습.

이러한 정부 당국의 과도하다 싶은 조치를 지켜본 당시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은 성조기와 태극기의 거리 게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게재했다.


"원래 한국은 가까운 나라隣邦 일본日本과 같지 않아不同 겉으로만 좋게 보이려 하는 것은 오히려 의미 없는 일不用外飾로 보거늘 이제 앞으로는至于此日 도성 내 모든 집집마다滿城家戶 한미 국기를 교차해 높이 달아 놓아交叉高掛 경의를 표하니以表敬意 놀랍고 괴이한 일이라고 할만可謂驚怪之事 하다." ['논설: 令娘嘉賓', <대한매일신보>, 1905년 9월 22일 자]

1905년 미국 대통령 딸의 방한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호들갑을 <대한매일신보>는 "놀랍고 괴이한 일"이라고 일갈했다. 소위 일본인의 속성이라 불리는 '혼네와 다테마에本音と建前'를 한국이 답습하는 것과 같아 불편함과 모욕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매일신보>가 태극기와 성조기 교차게양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로 게재한 논설.

이처럼 1905년은 망국의 기운이 어둡게 드리운 시절이었고, 고종은 '한미수호통상조약(1882)'을 통해 맺어진 한미 간의 우호와 상호 보호의 약속을 미국이 이행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했다. 그러나 이미 국제 정세가 일본에 기운 시점에서 미 대통령 딸에게 최후의 읍소를 하는 대한제국 황제의 모습은 망국을 향해 치닫는 초라한 초상이었다. 그는 고종의 모습과 한국 방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앨리스 루즈벨트의 순방을 기념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한 모습(사진 위). 순방단이 대구를 방문했을 당시 거리 가옥의 모습(사진 중앙). 모든 깃발이 가내수공으로 제작된 것이기에 성조기의 가로줄이 세로로 잘못 제작돼 있다. 대구 시내 아동들도 환영 행사에 동원돼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도열했다(사진 아래). 성조기의 제작 수준이 매우 조악하다. 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 촬영


"우리는 고종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전반적으로 다소 연민을 자아내는 분위기였다. 그는 여러 벌의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의복을 입었고 슬퍼 보였다. 전혀 호화롭지 않았다. 식사를 하러 들어갈 때 그는 다정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지 않았다.



환송 회견장에서 황제와 황세자는 각각 사진을 나에게 주었다. 그들은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제임스 브래들리 지음, 송정애 옮김, <임페리얼 크루즈>(프리뷰, 2010), 305~315쪽]

앨리스는 방한 기간 내내 오만하고 무례하고 방종하기까지 했다. 그는 고종을 만나는 시간, 말 위에서 승마복과 장화를 신고 시가를 피우며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황실 격식과 의전에도 장난스럽게 대응했다. 마침내 명성황후가 모셔진 홍릉을 방문했을 때도 정중히 예를 갖추기보다는 능 앞에 설치된 석상에 올라타 기념 촬영을 하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앨리스의 행태는 대한제국 관료들과 수행원들을 경악케 했다. 이러한 행적은 이후로도 미국과 서구 언론에서 큰 논쟁과 논란을 야기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와의 어떠한 외교적 대화에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수행원들과 파티와 유람만을 즐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앨리스 루즈벨트는 순방 당시 명성황후의 능 앞에 있는 석상에 올라타 기념 촬영을 하는 무례를 저질렀다.

앨리스의 이러한 행동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한편으로 그의 행동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앨리스 일행이 방한하기 두 달 전인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이 서로 필리핀과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한 '가츠라·태프트협정'이 체결됐으며, 2주 전인 9월 5일엔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미국·영국·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승인한 사실 등을 모두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겼다.


"'여하튼 좀 슬프고 애처로웠다. (중략) 나라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고, 내가 본 일본군 장교들은 대단히 민첩하고 유능해 보였다.' - 앨리스 루즈벨트



'이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있었고 그들은 앨리스 루즈벨트 일행을 마치 생명 줄이나 되는 것처럼 붙잡고 매달렸다.' -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가 친구 파머에게 보낸 편지, 1905년 10월 3일." [제임스 브래들리 지음, 송정애 옮김, <임페리얼 크루즈>(프리뷰, 2010), 305~315쪽]

황실과 순방단의 웃지 못할 만남과 현실을 목도하고 있던 헐버트 선교사는 앨리스의 방한 일정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일 도착, 20일 황제 알현 및 연회, 21일 궁중 연회 및 공사관 연회, 22일 창덕궁 파티 및 미국 선교사 접견, 23일 전차 시승, 25일 승마 여행, 27일 전차 탑승해 왕비 민 씨 왕릉 구경, 28일 환송 만찬, 30일 부산행 출발'. 축제와 만찬과 야외 파티와 여행이 전부였다. 한국인들은 이번 방문이 정치적으로 무슨 뜻이 있어서 미국 정부가 한국을 도와 위태로운 상황에서 꺼내 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사실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Homer B. Hulbert, <The Korea Review vol.5: 1905>(경인문화사, 1984), 332쪽]

이렇게 1882년 이래 '동경과 우호'의 깃발을 교차해 게양했던 한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는 냉혹한 국제 질서와 양육강식의 야만적 제국주의 논리 속에서 한국만의 일방적 짝사랑으로 결론 나고 말았다. 미국은 야멸차게 한국을 배신했지만,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미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는 망국의 암운에 풀이 죽어 있을 서울의 청년 학생들을 향해 미국을 본받아 국기에 절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국기 예배'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에서와 같은 애국주의적 국가 의례를 한국에서도 시행해 꺼져 가는 국운을 어떻게든 되살려 보겠다는 안간힘이었다.


"서서西署 만리현 의무균명학교義務均明學校에서 지난해去年 귀국하였던 미국 유학생 안창호 씨가 생도에게 대하여 권면한 내개內開(봉투에 넣어 봉하여진 편지 내용)에 '미국 각종 학교에서는 애국 사상으로 매일 수업上學 전에 국기國旗에 예배禮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것唱을 보았은見즉, 그 개명開明 모범模範은 사람으로 하여금今人 감격感昻케 한다. 그러므로然則 우리나라凡吾 학교들도 이제부터 시행하자從今施行' 함으로 그 학교該校에서 지난 달去月 일주일曜日로 위시爲始하여 배기창가례拜旗唱歌例를 행한다더라." ['국기 예배',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 자 2면]

*이 글은 다음 회차 게재 예정인 '교차 게양된 성조기와 태극기(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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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 게양된 성조기와 태극기(2)
[태극기와 한국교회] 한국교회 성조기 게양의 노정과 친미주의의 뿌리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08.18
 

*이 글은 '교차 게양된 성조기와 태극기(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편집자 주

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태극기·성조기
: 상생과 생존을 위한 표지


'디아스포라(Diaspora)'는 '씨앗이 뿌려진다'는 뜻으로, '흩어짐', '흩어져 사는 자', '흩어진 곳'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약성서 야고보서 1장 1절과 베드로전서 1장 1절에는 각지에 "흩어진 자들(Diaspora)"에게 서신을 보낸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는 대개 이스라엘 밖으로 흩어져 이방 세계에 정착해 사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근대 이전에는 종교적 귀속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의미가 강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같은 혈통·소속을 기반으로 한 특정 인종(ethnic) 집단이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의미하게 됐다.

한국 근현대사 최초의 해외 이주는 1860년대 전후 압록강·두만강 너머 서간도·북간도를 비롯한 남만주·북만주·연해주에서 이뤄졌다. 한반도 인접 지역 외의 해외 이민이 정부 승인하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02~1907년 하와이·멕시코 농업 이민이었다. 이는 최초의 공식 이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민자들 중에는 순수한 농민 외에도, 도시 노동자, 구한국 군대 군인, 정치적 망명객, 유학을 염두에 둔 학생, 망국의 전환기에 해외에서 새로운 민족운동·독립운동을 모색했던 이들이 두루 포함돼 있었다. 농업 이민, 망명 이민, 유학 이민은 하와이 이민 시기와 겹쳐 중국·러시아로의 활발한 이민 행렬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사이, 한반도 내에서는 태극기의 제작·게양이 일제에 의해 철저히 금지됐다. 태극기가 적극적으로 보급되고 게양된 곳은 오히려 해외 이주민의 삶의 자리였다. 대한제국 국민 자격으로 미주 지역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국가를 상실한 디아스포라' 처지에 놓였다. 초기 해외 이주 한인들은 이주 지역 주민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 사이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중간자적 존재로서 큰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콘텍스트(context)는 그들로 하여금 공동체성에 대한 더욱 강한 애착과 지향을 갖게 했고, 태극기는 이를 시각적으로 강화해 주는 매개물로 자연스럽게 그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태극기는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다른 인종과 한국인을 구분해 주는 표지였으며, 나라 잃은 민족 공동체이면서도 미국 사회 내 실재하는 민족 집단으로서 한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을 결속하는 상징물로 작용했다.

1905년 윤치호 외부협판이 하와이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 윤치호와 하와이 교민들 위로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사진 제공 <크리스천헤럴드>

고종 황제 탄신 기념식을 마친 직후의 하와이 한인들. 태극기를 게양해 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표현했다(1907년). 사진 제공 로베르타 장

미주 지역 한인 사회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게양하는 것이었다. 태극기·성조기가 공동 게양된 가장 오래된 장면으로 1904년 하와이에 먼저 도착한 초기 이민자들이 새 이민선이 들어왔을 때 부두에 나가 환영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당시 주간에 남성들은 노동 현장에 투입된 터라, 사진 속 환영단 대부분이 여성·아동으로만 구성된 점이 눈에 띈다. 마중을 나간 여성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이민단을 맞았다. 1909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 지방 총회 당시 기념사진에도 국민회 간부들 배후에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 게양돼 있으며, 대한인부인구제회 엠블럼, 하와이한인기독교회 3·1절 기념 야외 예배 사진에서도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 게양된 모습이 확인된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이 부두에서 새 이민선을 맞아 환영하는 모습. 여성·아동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다(1904년). 사진 제공 이덕희

대한부인구제회의 황마리아. 황마리아는 첩을 두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남편을 피해 세 아이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해 1913년 대한인부인회 창설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인부인구제회 엠블럼에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태극기·성조기가 교차 게양돼 있다(1919년 경). 오성진 소장. 사진 제공 로베르타 장

대한인국민회 1909년 하와이 총회에서 태극기·성조기가 교차 게양됐다.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하와이 한인 기독교인들이 3·1절 기념 야외 예배를 마치고 찍은 사진.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했다(1936년). 사진 제공 이덕희

미주 지역 한인들은 국권이 피탈된 1910년 이후 매년 8월 29일 '국치 기념일' 행사를 개최했다. 국치 기념일國恥記念日 식순에는 항상 식장 전면에 게양된 태극기를 내렸다가 다시 올리는 "국기 부활 예식"[<신한민보>, 1917년 8월 30일 자]이 포함됐다. 이 예식 직전에는 '국치 기념가'를 불렀으며, "국기가 주벽에 걸리면 국기의 게양이 마치 광복을 이룬 것처럼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국치 기념일 행사는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는 '3·1절 기념행사'로 명칭과 형식이 바뀌었다. 3·1절 기념행사는 국치 기념일 행사보다 훨씬 더 가볍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1931년 대한인국민회 LA 지역회 주최로 열린 3·1절 12주년 기념식에서는 200여 명의 학생이 애국가를 부르고, 기도, 축사, 국기 게양식 등을 거쳐 '국기가國旗歌'를 제창했다[<신한민보>, 1931년 3월 12일 자]. 미주 지역 한인 사회 초기 국치 기념일의 '국기 부활 예식'에서 민족사적 치욕·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유효한 상징적 레토릭으로 기독교 '부활 신앙'이 활용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일제강점기 미주 지역 한인 사회의 역사 인식이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자연스럽게 결합해 조화를 이룬 형태로 발전했다는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국기가' [<신한민보>, 1914년 6월 18일](사진 위)와 '국치 기념가' [<신한민보>, 1915년 9월 30일](사진 아래).

3·1운동 이후 미주 대륙 한인 교회에서 거행된 3·1절 기념행사를 찍은 대부분의 사진 자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게양하고 있다는 점은 눈에 띄는 사실이다. 미주 지역 한인 교회의 태극기·성조기 교차 게양 문화는 미국 내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이자 결과였다. 미주 지역 한인들은 내부적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태극기를 내걸었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삶의 터전인 미국에 대한 소속감과 애국심도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두 국기를 동시에 게양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이 분리되고 한편으론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교차 게양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미 중부 캘리포니아 다뉴바한인장로교회, 1920년).

다뉴바한인장로교회의 3·1절 1주년 기념 예배 당시 예배당 내부 모습(1920년).

다뉴바한인장로교회의 성조기·태극기 교차 게양(1940년대).

중부 캘리포니아 리들리한인장로교회 헌당식 겸 3·1절 기념식을 마치고(1939년). 1919년 설립된 남감리교회로 시작한 이 교회는 1936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신사참배 실시를 결정하자 이에 반발해 장로교로 교파를 변경했다.

1922년 5월,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 한인들의 한미 수교 40주년 기념 퍼레이드 사진을 보면 "Americo-Korean"이라는 플래카드를 게시하고, 전통 한복과 양복을 입은 두 명의 한인을 선두에 세워 한미 양국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민 공동체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기념 퍼레이드 차량 사방으로 태극기·성조기를 장식해 두 국가·민족 정체성이 미주 지역에서 공존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적극 표현하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 교차 게양한 한인 퍼레이드 사례는 다양하게 확인된다. 이처럼 미국 사회에 대한 한인들의 적극적인 소속감 표현과 우호적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은 미국 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한인 이민 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는 일종의 자치 정부로서 미국 정부의 승인하에 미주 지역 한인들의 자치권과 위상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행사에서의 한국인 퍼레이드. 한인 여성들이 태극기를 들고 앞서가고 있고, 뒤따르는 퍼레이드 차량에는 성조기가 게양돼 있다(1921년 11월).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캘리포니아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의 한미 수교 40주년 기념 퍼레이드. 퍼레이드 차량에 "Americo-Korean"이라고 쓰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장식했다(1922년 5월). <코리아헤럴드> 제공

태평양전쟁 시기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전 미국인 퍼레이드. 한인들의 퍼레이드 차량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게양돼 있고, "한국의 승리는 민주주의의 승리입니다(Victory for Korea is Victory for Democracy)"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이는 한국이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지하고 함께 가겠다는 정치적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사진 제공 정한경

도산 안창호 선생 추모 예배(1938년). 사진 제공 <크리스천헤럴드>

미주 한인 사회에서의 태극기·성조기 교차 게양 문화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단순한 우호와 공존의 차원을 넘어선 한인의 생존과 결부된 상징으로 심화됐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르며 적국敵國이 되자, 미주 지역 일본인들의 신변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아울러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들은 일본인 여권을 소지했기에, 전시 상황 속에서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정치적·외교적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에 대한인국민회는 태극기·성조기가 교차 게양된 모양의 배지에 일련번호를 부여해 한인들에게 패용佩用하게 했으며, 이 배지는 일인과 한인을 구분해 주는 일종의 신분증 역할을 하게 됐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미주 한인들에게 태극기와 성조기를 통한 신변의 안전과 민족적·국가적 충성도를 강화하는 상징물로 그 위상과 무게가 신장돼 갔다.

대한인국민회에서 한인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제작한 태극기와 성조기 배지(1941)와 미국에서 발행된 한국 독립 기원 피침국被侵國 태극기 우표(1943~1944년 발행). 사진 제공 한국이민사박물관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우표(2003). 사진 제공 우정사업본부

한국 근대미술사학자인 목수현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미주 지역 한인 디아스포라의 현실에서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 게양된 역사적 흐름과 현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본국을 떠나 흩어져 사는 존재인 디아스포라, 그리고 그 본국이 현실적으로 지켜 주지 못하는 존재인 미주 한인들에게는 태극기라는 상징은 현실적인 국가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집착하게 되는 표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표상은 그 자체로서 힘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거주하는 곳의 국기가 받쳐 줌으로서만 힘을 지닐 수 있었다. 나란히 게양된 태극기와 성조기는 그 두 나라 사이에 불안하게 유동하고 있던 그들 삶의 존재 양태이기도 했다." (목수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태극기', <사회와역사>, No.86, 2010, 72쪽)
해방과 전쟁, '친미주의'의 내재화
: 욕망과 숭배의 심벌



"1945년 9월 9일 일요일 서울의 거리는 가장 엄숙한 빛 속에 잠겨 있었다. 높고 푸르게 개인 첫 가을 하늘에 찬란한 아침 해가 오르자 명치정明治町(현재의 명동 - 필자 주) 교회당에 평화의 종소리는 은은하게 들려왔다. 푸른 가로수 사이로 태극기가 휘날리고 성조기, 유니온재크 또는 소비에트연방 국기, 중화민국 국기 등 4국 국기가 나란히 세워 있었다. (중략) 한편 거리에는 점점 사람의 홍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각 단체에서는 혹은 행렬을 지어 나오기도 하고 혹은 트럭과 자동차를 장식하여 깃발을 휘날리며 나오기도 했다. 도처에 군악대가 웅장한 행진곡을 울리고 지나갔다. 벌써 어느 가게에서도 기를 만들어 팔기에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거리에 진주군이나 미국의 통신기자들이 지날 때 마다 군중의 박수와 환호성이 끊일 새 없이 맑은 하늘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거리는 정연한 질서 아래 움직이었다." ('하지 중장 휘하의 진주군進駐軍이 인천으로부터 입경入京', <매일신보>, 1945년 9월 9일 자)

해방이 도적같이 찾아왔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거리에는 태극기와 연합국 깃발들이 휘날렸고, 10월 20일 구 조선총독부(중앙청) 앞에서는 연합군 환영 시민대회가 개최됐다. 하지만 연합군 깃발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태극기는 오히려 포위된 듯 그 운신이 협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누가 우리 편인지 더 강한 나라인지 분별하기에 혼란스러웠고, 얼마 전까지도 대동아공영권의 기치 아래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맹세했던 서양국 특히 미국 군대와의 낯선 조우와 동거에 당황해하기도 했다.

'핫지 중장 휘하 미군, 8일 오후 인천 상륙', <매일신보>, 1945년 9월 8일 자.



동대문에서 거행된 연합군 환영 대회. 보이스카우트의 환영 현수막에(사진 위)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으며, 환영 퍼레이드(사진 아래) 선두에는 태극기를 중심으로 연합국기가 주변에 게양돼 있다(1945년 9월 9일).



서울에 입경하는 미군들을 향해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환영하는 시민들(사진 위)과 성조기를 들고 환영 퍼레이드를 하는 부녀자들(사진 아래, 1945년 9월 9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 시민대회(1945년 10월 20일).

종교사회학자 강인철은 "해방 당시 반일 성향이 강했던 일부 한국인들은 일본의 적국이었던 미국을 '해방자'로 환영한 반면, 갑자기 미군정 치하에 놓인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멀리 떨어진 강대국'일 뿐이었으며 미군은 '점령자'에 불과"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제의 "반미적 옥시덴탈리즘"에 철저히 경도돼 있던 식민지 엘리트 세력(친일파 다수)들에게 '친미'는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생존의 길"이 됐다. 이들은 미군정에 협조해야 하는 새로운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거북함과 불안의 감정이 뒤섞인 채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환기의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압도돼 형식적으로는 "친미적 오리엔탈리즘"의 어색한 협력자로 해방 공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낯선 진주군인 미군 앞에서 한국인들의 친미적 행보는 한편으로는 과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1946년 미국의 국경일인 독립 기념일을 맞이한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사진 8 - '미국의 전도를 축복 : 가가호호마다 성조기', <독립신보>, 1946년 7월 5일 자.


"뜻깊은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이해 미 주둔군에서는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등 주요 도시에서 진주 후 처음 보는 대열병 분열식을 거행 1776년 7월 4일의 독립선언의 감격을 새로이 하였다. 이날 조선 민중은 각 집마다 성조기를 게양하여 조선을 해방하여 준 미국에 뜨거운 감사를 바치는 동시에 미국 독립일을 경축하였다. 이외에도 민전을 비롯하여 각 단체에서는 미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다채한 행사를 거행하여 위대한 미국의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전도를 축복: 가가호호마다 성조기', <독립신보>, 1946년 7월 5일 자)

해방 직후 첫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은 한국 거리는 가가호호 성조기를 게양한 낯선 풍경이었다. 이는 새로운 힘의 세력인 미군정에 최선을 다해 우호적 신호을 보냄으로써 생존과 안위를 모색하려 했던 식민지 엘리트들의 자구책이었다. 이러한 식민지 엘리트들의 낯 뜨거운 친미적 행보 이면에 가려진 불안과 불편함을 일거에 해소해 준 전환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회에서 제정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관한 특별 법률 조례'에 대해 미군정장관이 거부권을 행사해 무효화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의 친일파에 대한 관용적·포용적 태도와 정책을 눈으로 확인한 식민지 엘리트들은 그동안 외형적으로만 견지해 오던 친미적 태도를 '친미주의(pro-Americanism)'라는 이데올로기로 적극 내면화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 엘리트 친일 부역자들은 미국이 지닌 힘과 관용의 그림자에 숨어 자신들의 흑역사를 은폐하고, 미국이 수호하는 가치들(반공·민주주의·자본주의)을 함께 옹호하며 일제강점기 동안 누려 온 기득권을 유지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고자 했다. 해방 이후 한국 종교 내의 강고한 지배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새로운 형태의 '친미주의'는 바로 이 시점부터 파종되고 발아하기 시작했다.

강인철은 현대 대한민국 시민종교의 5대 신념 체계를 "민족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민주주의", "친미주의"로 꼽았다. 민족주의는 "해방 직후 의심과 이론의 여지없이 즉각 수용"된 가치이며, 반공주의는 "미군정 치하에서 식민지 엘리트(친일파)들이 격렬한 과거 청산의 운동으로부터 자신과 가족,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다. 발전주의는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키워지고 응축된 근대화에 대한 열망의 결과"였으며, 민주주의는 "주권재민, 삼권분립, 대의제, 평등, 자유, 인권 등의 가치를 표방하며 반공주의의 중요한 명분과 필수 요소로 그 우월성을 재강조하기 위해 적극 수용"됐다. 한국의 현대 시민종교 특히 기독교 내에서 바로 이러한 민족·반공·발전·민주주의의 가치는 최근에 이르는 현대사 속에서 항구적 지배 신념 체계로 작동해 왔다.

강인철은 민족, 반공, 발전, 민주주의라는 네 가지 신념 체계 외에 '친미'라는 특정 국가에 대한 외적 태도가 이데올로기적 독자성과 내면화를 형성하게 된 과정과 매커니즘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친미주의는 간혹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지만, 끊임없이 발전주의, 반공주의, 민주주의 담론과 융합되는 경향을 보였다. 친미주의 자체가 독립적인 시민종교 교리로 정립되기보다는 반공주의, 발전주의, 민주주의의 효과가 함께 어우러져 결과적으로 '친미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찬양이나 숭배보다는, 반공 자유 진영의 지도 국가,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잘사는 나라 등의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친미적 효과가 발휘된다는 점에서 친미주의는 '숨은 혹은 은폐된 지배 이념'이기도 했다." [강인철,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 대한민국의 종교학>(지의회랑, 2019) 64쪽]

강인철은 이러한 "친미주의의 다면성과 비가시성이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자부심과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도 친미주의가 시민종교 신념 체계 내에 순조롭게 스며들 수 있었던 신비스런 비결"이었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미국은 "반공주의, 발전주의, 민주주의 교리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현현"함으로써 일제를 대체해 민족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숙원을 성취해 줄 모델 국가이자 새로운 선망의 대상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 엘리트들의 '친미주의'로의 전환은 1948년 남한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친미적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더욱 노골화했다. 아울러 1949년 6월, 주한미군의 철수는 남한 정부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하며 미국에 대한 의존적 태도를 심화해 나갔다. 1949년 여름, 미 해병 친선 함대가 부산에 입항할 당시 환영 포스터에 그려진 성조기에 오류가 있었는데, 이를 비판한 언론의 보도 내용은 당시 미국을 향한 한국 사회의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우방 미국에 대한 실례 : 포스터 성조기에 오류', <민주중보>, 1949년 7월 13일 자.


"한미 친선 함대를 맞이하여 항도 부산에서는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열렬한 환영의 행사가 벌어졌고 이 함대의 입항과 함께 미 해병은 이채롭게 항도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역전 모처에 붙어 있는 '환영 미국 친선 함대'라는 포스터 앞에 그들은 운집하고 손가락질하며 일소一笑하고 돌아가고 또 모여들고 한 바 있어 일반의 의아를 품게 했는데 그 포스터를 보면 우편에 태극기와 나란히 좌편에 성조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성조기는 원래 48주를 의미하여 별星 48개로 국기를 표현한 것인데 이 환영 포스터에 그려진 성조기의 별 수는 42개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우방 미국기에 대한 실례라 아니할 수 없는데, 그러기에 그들 해병들은 부내 각처에 붙은 이 포스터를 보고 조소하고 있으니 한국인의 무지를 여실히 말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당국은 이와 같은 무성의한 미국기 포스터 제작자의 맹성猛省을 촉구하여 앞으로 이러한 일이 없도록 바라는 소리가 높다." ('우방 미국에 대한 실례: 포스터 성조기에 오류', <민주중보>, 1949년 7월 13일 자 2면)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미국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은 해방 공간에 발생한 국내 미국인들의 사망 사건에 대한 대응에서도 비상한 풍경으로 나타났다. 언론인 오소백이 "암살의 해"라고 표현한 1949년에는 김구 선생의 서거 외에도 당시 연희대학 영문과 교수였던 언더우드 부인이 자택에서 제자들에게 저격당하는 사건(3월 17일)이 발생해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아직까지도 사건의 구체적 진상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언더우드(원한경) 부인의 죽음은 국내에서 발생한 한국인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첫 살해 사건으로, 당시 친미적 신생 정부의 수립 직후 빚어진 예기치 않은 참극이었다. 동시에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선교에 헌신한 내한선교사 언더우드 부인에 대한 폭거였기에 당시 남한 사회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홍이표, '언더우드부인 저격사건의 진상과 의미', <한국기독교와 역사>(2011) 참조]

언더우드 부인의 장례식(3월 22일)을 직접 목격한 배민수 목사는 "그녀(원한경 부인)를 아는 모든 한국인, 기독교인들, 수 천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교통과 통신은 장례식으로 차단이 됐고, 많은 이들이 곳곳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마치 국장을 치르는 듯했다"라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초대 정부도 언더우드 부인의 장례식 외에 헐버트(1949년 8월)와 앨리스 아펜젤러(1950년 2월) 등 개신교 선교사들의 죽음과 장례식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정부 차원에서 적극 대응했다.



제자들에게 저격당한 언더우드 부인의 관이 연희동 사택에서 운구되는 모습(사진 위)과 영결식 관련 기사 (사진 아래) '애끓는 각계 조사 고 원한경 부인 장의 엄수', <동아일보>, 1949년 3월 23일 자.

특히 헐버트(H. B. Hulbert)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금 태극기와 성조기의 조우를 목격하게 된다. 한국 감리교의 초대 내한 선교사 중 한 명이며, 대표적인 친한파 선교사로서 한국 근대 교육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헤이그에 파견돼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던 헐버트 선교사가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1949년 7월 29일 40년 만에 귀환한 바 있다. 그러나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한 직후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해 헐버트 박사는 서울 도착 즉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고, 8월 5일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 속에 결국 임종을 맞았다.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은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8월 11일 오후 태평로 부민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 요인, 사회 각계 인사들의 참여 속에 엄숙히 치러졌다.

미군의 한반도 철수. 미군 기지 내 성조기와 태극기의 하기식을 거행하는 모습(1949년 6월). 사진 제공 <LIFE>

당시 부민관 내부의 영결식장에도 전면에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게양됐으며, 외부에도 헐버트 박사의 초상화 좌우로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시됐다. 이는 헐버트의 장례식이 단순히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한 개인 선교사를 추모하는 차원을 넘어, 한미 간의 군사적·외교적 관계 전환을 모색하고자 한 정치적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6월 30일 이후 미군은 한반도에서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을 잔류시킨 채 대부분의 장비와 병력을 철수한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미군 철수가 시작되자 1949년 1월부터 38선을 냉전의 전초로서 부각시키고자 시도했다. 이곳에서는 미군 철수 이후 1년여의 짧은 시기에 400~500여 회의 충돌로 양측에 각각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전쟁사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도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1949년부터 사실상 한국전쟁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38선에서 충돌이 가장 격화했던 시기가 7~8월이었으며, 10월 북한의 공세로 다시 격화된 전투는 11월까지 지속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 등으로 한 차례 위기를 맞았고,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받자 이에 다시 자신감을 얻은 이승만 대통령은 실지회복론失地回復論을 내세우며 1949년 초부터 38선 대북 공세를 통해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한국사학자 정병준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북진, 북벌, 실지회복론의 기대와 목적을 과장하여 미국의 더 많은 경제·군사 원조를 얻어냄과 동시에 국내를 단속하려는 노회한 이승만의 '책략'이자 '허풍 전략(bluffing strategy)'이었다." (정병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돌베개, 2006), 276~277쪽)

헐버트의 영결식은 이렇게 38선에 실제적인 전투가 빈번히 발생하며 남북관계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은 한편에서는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을 통해 한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미국을 향한 구애와 원조의 신호를 적극적으로 보낸 것이다. 영결식이 끝난 후 거리에서는 100대가 넘는 자동차와 1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영구차 뒤를 따라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듬해인 1950년 3월 1일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했다.

1942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2차 한인 자유 대회에서 참석한 이승만과 헐버트 박사. 그들의 배후에 태극기가 게양된 것이 보인다. 헐버트 박사는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1949년 7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헐버트 박사.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이 사회장으로 거행된 부민관의 모습. 행사장의 내·외부에는 헐버트 박사의 초상과 함께 좌우에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시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언더우드 부인, 헐버트 선교사, 앨리스 아펜젤러 선교사 등의 서거에 정부 차원에서 적극 관심을 표명하고 지원했다.

헐버트 박사 영결식 관련 기사. '삼천만의 애끓는 통곡 : 어제 '헐벝' 박사 영결식', <동아일보>, 1949년 8월 12일 자.

헐버트 사후 1년도 되지 않아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맞게 되고, 한반도는 3년간 참혹한 전쟁의 광기에 철저히 파괴됐다. 이 전쟁은 일제 말기 "반미적 옥시덴탈리즘"의 세례를 받았던 식민지 엘리트에게는 '친미주의'를 더욱 교조화·체계화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 대한 긍정적·선망적 인식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식민지 대중에게 미군의 영웅적 승리와 구원의 전공들을 보여 줌으로써, 의심·경계 대신 숭배·맹신을 가져다 줬다. 한국 민중은 전쟁의 공포와 트라우마 속에서 '성조기는 태극기와 함께 생명과 안전을 보존해 주는 희망의 상징'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으며, '반공'과 '자유 대한'이라는 구호를 철저히 이념적으로 내면화해 나갔다. 전쟁이라는 비극은 그렇게 한 국가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고착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연합군과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그동안 인민군 점령지에 나부끼던 인공기는 삽시간 태극기와 성조기, 또는 유엔기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세상 인심도 돌변했다. 경인가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유엔군의 서울 수복을 환영하는 주민들(1950년 9월 27일). 사진 제공 NARA

1950년 9월 29일 서울 중앙청 로비에서 열린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맥아더 장군이 기도하고 있다. 행사장 좌우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앞줄 왼쪽부터 버나네 아프리카 유엔대표, 무초 주한 미대사, 맥아더 장군,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신성모 국방장관. 사진 제공 NARA



서울 수복 직후(1950년 9월 27일) 미 해병대는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성조기를 게양했다(사진 위). 국기 게양대의 성조기는 서울 수복 기념식(9월 29일) 이후에는 유엔 깃발로 교체됐다(사진 아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박정모 소위의 중앙청 태극기 게양 사진은 1954년 서울 수복 4주년 기념식에서 재현한 모습이다. 사진 제공 NARA

서울 수복 직후 유엔기와 태극기, 성조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는 연합군과 국군(1950년 9월 28일).


"우리는 선진先陣의 영광을 입고 일발의 교전도 없이 다시금 정든 수도의 땅(서울)을 디디게 됐다. 보병 척후대 지휘관은 중위 존 하우젠이다. 가로街路라는 가로는 황량의 극에 달했으며 하우젠 중위의 분대는 조심성 있게 교외로부터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입성의 소식은 어느 틈에 거리에 퍼졌다. 시민들은 처처에 떼를 지어 어디다 감추어 두었었는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이것은 승리를 의미하는 한국말이다). 아이들은 문짝을 박차고 마치 줄달음치듯이 이 골목에서 뛰어나와 고함을 지르면서 우리의 손에 매달리고자 서로 다투었다. 노인들과 등에다 어린아이를 업은 여인까지도 거리로 몰려나왔다. 우리들의 앞길에 몸을 던지고 땅을 치며 흐느껴 우는 여인도 있었다. 이네들의 남루한 의복은 그동안其間의 고생을 여실히 말하고 있었다. (중략) 백아白亞의 중앙청, 춘색春色이 충만한 창공에는 태극기가 마치 태양처럼 휘날리고 있다. 이 태극기를 올린 것은 14일 밤 7시 15분 한국 국군 척후대이다." (서울에서 15일발 AP 특파원 짐 베커, '서울 재탈환 풍경', <대구매일>, 1951년 3월 17일 자)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은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경험을 반복해 공유했다. 이렇게 미국은 한국을 "북조선 괴뢰 정권"의 적화 야욕으로부터 "반공"과 "자유 민주" 진영의 숨통을 트여 준 구세주가 됐다. 류대영은 한국 개신교에게 있어 "미국은 이중적 의미에서의 '구원자'"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구원자'로서의 미국은 감사와 보은의 대상이며, '세계의 구원자'로서의 미국은 추종과 협력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를 구원할 섭리적 사명(providential mission, 언더우드가 1896년 연설에서 말한 '앵글로색슨'의 선교적 사명" - 필자 주)을 지닌 '기독교 국가'이므로, 한국 개신교는 미국의 충직한 파트너이자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류대영, '2000년대 한국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의 친미·반공주의 이해', <경제와사회>, 62, 2004. 참조)

강인철은 한국전쟁을 통해 "친미주의의 '대중화'가 급진전되고, 식민지 엘리트층의 반쪽 친미주의가 '온전한 친미주의'로 바뀌"었으며, "미국에 부착된 반공주의-발전주의-민주주의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는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고"해졌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이후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교회도 이러한 친미적 종교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고 내면화해 나갔다.

이때부터 미국의 대통령은 온 국민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거리에서 성대히 맞이해야 할 "자유 대한민국"의 수호신이자 흠모의 대상으로 격상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마련된 환영식장(사진 위)과 김포 거리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하기 위해 도열한 시민들(사진 아래). 시민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환영! 자유 진영의 영도자, 좋아합니다"라고 적혀 있다(1960년), 사진 제공 Bill Smothers


"손꼽아 기다리던 미국 차기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원수의 환영 서울 시민대회는 드디어 4일 상오 10시 10분 중앙청 앞 광장에서 성대히 개막됐다. 급작스럽게 습격해 온 초겨울 추위를 박차고 너도나도 길가로 흘러나온 남녀노소 십수 만은 이른 아침부터 '아이젠하워 원수 내한 환영', '자유 대한민국하에 남북통일', '중공 오랑캐를 축출하라' 등등 표어가 뚜렷이 쓰여진 각종 플래카드와 태극기 및 성조기를 손에 손에 누구 할 것 없이 들고 회장인 중앙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어 넓은 동 광장도 삽시간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 차 중앙청 앞으로부터 광화문 그리고 시청 앞과 을지로 입구까지 흘려내려 글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이젠하워 방한 환영 서울 시민대회 개최', <조선일보> 1952년 12월 6일 자)

최근 십수 년간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광장에 쏟아져 나온 소위 보수(극우) 기독교인들의 정신 세계는 대체적으로 △트라우마 △소외감 △선민의식 △증오(혐오) 등의 심리로 분석된다. 트라우마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전쟁 공포에 기초한 것이며, 소외감은 장기간 유지해 온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득권 상실이 반영됐을 것이다.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고 재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욕망의 표상이자 모델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극기 집회에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는 것은 태극기와 이스라엘기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선민의식'의 발로다. 집회 참석자들은 공포와 상실을 상쇄하고 정당화할 증오의 대상을 상정한다. 오늘 태극기는 이러한 욕망과 증오가 뒤엉킨 분단과 냉전의 표상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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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의 길, '그리스도인'과 '책임 있는 시민'의 조화
[태극기와 한국교회] 우주적 태극, 대낙원의 날을 기다리며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1.10.18 


태극기, '분단'과 '반공'의 상징으로



"곳곳에서 30년 40년 동안 광야는 아닌 궤짝 농짝 밑에서 잠을 자던 태극기가 나왔습니다. 열아홉 살에 삼일운동 만세를 부르던 날 이후 27년 만에 처음 시원한 날을 보았습니다. 가슴 밑바닥에 쌓였던 묵은 시름의 가스가 다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사람은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내가 고랑을 차고 거리를 지나가도 모르는 척 지나가던 그 사람들 그대로, 내가 애써 친구가 되려 해도 곁을 주지 않던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이제 나는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 어색함도 막힘도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다 훨훨 벗고 한 바다에 들어 뛰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만 아니라 저기 저 언덕에 있는 일본 사람, 어제까지 밉고 무섭던 그들이 도리어 어떻게 잘못되어 다치기나 할까 걱정스러웠습니다. 단번에 우리는 새 시대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함석헌, '내가 맞은 8·15', <씨알의소리>, 1973년 8월 호.)

해방은 농짝 구석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태극기를 다시 거리로 소환했다. 펄럭이는 태극의 물결은 어제의 적과 동지의 경계를 무색하게 했으며, 그토록 증오스럽던 일본인들에게까지도 연민과 동정을 베풀 수 있는 넉넉한 관용을 허락해 줬다. 이처럼 태극기는 해방의 기쁨과 환희 속에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다시금 증명해 보이는 푯대로 하늘 높이 게양됐다.

해방 소식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온 군중의 모습(1945년).

한일 협정 반대 시위 중 연행되는 함석헌 선생(1965년).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강연하는 함석헌 선생. 그는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평화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

역설적이게도 태극기는 해방 직후에는 남북 두 정권 모두에서 선호받았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은 각종 군중 집회·행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1946년에는 해방 1주년을 맞아 태극기·무궁화를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얼굴을 도안으로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으며,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평양 합동 회의와 1948년 평양 남북 정치 협상 회의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고 애국가를 제창했다. 이처럼 북한의 좌익 세력들도 해방 공간 초기에 태극기를 별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대표적 상징물로 채택한 것을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좌우 이념 차이를 초월한 민족 공동체의 상징으로서 보편성·대표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평양 군중대회에 소련군 장성들과 함께 등장한 김일성. 배후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1945년 10월 14일).

소련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1946년 2월 8일). 위원회 발족식에는 김일성의 사진과 태극기가 게양됐다.

해방 1주년을 맞아 북한에서 발행한 기념우표(1946년 8월 15일). 중앙에 김일성 초상이 배치됐으며, 그 뒤로 태극기, 상단에 무궁화가 장식돼 있다.

평양에서 열린 5·1절 기념행사의 무대 장식.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 좌우로 태극기와 소련기가 게양돼 있다(1947년 5월 1일).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 김일성이 연설하는 모습. 뒷편에 한반도 이미지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1948년 4월 19일).

하지만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하자 김일성은 7월 8일 제5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인공기를 처음 게양했다. 당시 북조선인민회의 정재용을 비롯한 일부 대의원들은 "태극기는 지난날 우리 인민의 희망의 표징"이었다는 이유로 새로운 국기(인공기) 채택에 반대했지만 결국 이를 막지는 못했다. 당시 헌법제정위원장이이었던 김두봉은 "(태극기가) 1) 비민주적이고 동양 봉건국가 전 통치 계급의 사상을 대표하며, 2) 근거가 되는 주역의 학설이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며, 3) 제정 당시부터 일정한 의의와 표준이 없었으며, 4) 그 의미가 쓸데없이 어렵다는 점"(김혜수, '해방 후 통일국가 수립 운동과 국가 상징의 제정 과정', 119~120쪽 참조) 등을 들어 태극기 폐지를 추진했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1948년 9월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독립문과 중앙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인공기를 게양하는 소위 '인공기 게양 사건'이 발생했고, 10월 발생한 여순 사건을 거치면서 인공기 소지자를 처벌하고 태극기 게양을 강제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여수·순천에서는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을 경우 총살하겠다는 포고문까지 나올 정도로 태극기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애국심의 상징이기보다는 좌우익을 감별하고 애국심을 시험하는 리트머스종이로 그 역할이 변질됐다. 이렇듯 한반도 남북 분단 이후 태극기에 대한 긍정·부정 여부에 따라 피아가 구분되고 생사의 기로에서 운명이 결정됐으며, 민족 보편의 상징이었던 태극은 이제 남한 정부와 반공 이념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그 의미가 협소해지고 말았다.

제5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처음으로 인공기를 게양하는 모습(1948년 7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최고인민회의 광경. 뒷편에 인공기가 장식돼 있다(1948년 9월 2~10일).

여순 사건 진압 작전 당시 태극기를 게양한 거리 모습. 이때부터 태극기는 좌익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며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그 역사적 역할과 기능이 전환되기 시작했다(1948년 10월).

해방 직후 그리스도인들이 개진한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건국론은 반공의 기치를 내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됐다. 대한민국 헌법은 정교분리 원칙을 근본정신으로 채택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쳐 4·19혁명을 맞이하기까지의 세월은 사실상 기독교와 정부가 '반공·친미'라는 공통분모 아래 더욱 공고한 제휴·유착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남한 사회는 전후 재건과 북한과의 체제 경쟁, 국민 통합 과정에서 '민주화·산업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애국심은 악당들의 최후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한 사무엘 존슨의 말처럼, 해방 이후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은 '반공'으로 포장된 애국의 선봉에서 태극기를 들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순국열사에 대한 숭배·현양과 국가 의례가 강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태극기는 각종 의전·이벤트의 중심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이르는 독재 권력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산업화의 주역'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옹호됐다. 이렇게 남한 사회는 '반공'에만 충실하다면 '민주주의'를 일부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쯤은 '미덕'으로 여기는 왜곡된 길을 걷게 됐다.
태극기, 민주주의와 인권의 표상



"기독교인의 최고 이상理想은 하나님나라가 인간 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 미래적인 소위 '천당'이라는 말로서 그 전부를 의미한 것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 사회에 삼투滲透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미래 세계에까지 생생生生 발전하여 우주적 태극太極의 대낙원大樂園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전모全貌일 것이다."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국가 구성의 최고 이성과 그 현실성', 선린형제단 집회에서의 강연 요지(1945년 8월) 중에서]

해방의 날이 도적같이 찾아오자, 그동안 억눌려 온 기독교 지성들은 자신들의 '하나님나라 이상'과 새롭게 출범할 '신생 정부의 이념'을 합치해 나가고자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김재준 목사는 비상한 대전환의 시기에 기독교의 이상이 온전히 구현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수립하길 염원했고, 이는 "우주적 태극의 대낙원"이라는 상징적 언어로 표현됐다. 한경직도 해방 정국을 맞아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민주주의국가' 건설을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자 전제로 삼았다.

기독교 건국 운동을 주도한 김재준 목사(사진 왼쪽)와 한경직 목사.


"이 새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하겠고, 또 필연적으로 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확호한 신념입니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 새 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상의 핵심은 (1)개인 인격의 존중 사상, (2)개인의 자유사상, (3)만인의 평등사상 등일 것입니다. 이 사상의 근본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한경직, '기독교와 건국', <기독교와 건국>(기문사, 1956) 153~154쪽)

초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개신교는 '반공'에도 투철했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공산 독재 사회인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4·19 이후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전향적으로 저항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반공과 민주주의 중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놓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설정한 대정부 관계의 두 노선을 가르는 주요 화두였다.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의 역사적 분기점이 된 매 순간에도 시민들과 청년·학생들은 태극기를 게양했다. 민주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열망은 분단의 아픔과 상처를 딛고 수호해 낸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 내기 위한 애국심과 충정의 결과였다. 군사독재 정권은 민주화를 향한 노력과 열망에 '폭도'와 '좌익 용공'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도·탄압했지만, 이들의 무도한 폭력 앞에서도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켜 내기 위해 광장에 모여 애국가를 제창했고, 태극기를 손에 쥐고 펄럭였다.


"(전략) 시민들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이 금남로 바닥을 타고 퍼지면서 일대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중략) 광주는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며 한 몸뚱이처럼 됐다. 스크럼을 짠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곤봉에 피범벅이 되어 가면서도 스크럼을 풀지 않았다. (중략) 이날 저녁 수천 개의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이렇게 전했다. '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그토록 피 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중략) 도청 앞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4회, "80년 5월 20일 고립무원 '광주'는 밤새 공수부대와 싸웠다", <한겨레>, 2016년 1월 4일 자 19면)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의 식순에는 빠짐없이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었으며, 항쟁 기간 내내 애국가와 함께 태극기가 '애국심·저항·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활용됐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서도 청년·학생, 시민 시위대는 명동성당 앞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태극기를 들고 4·19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사진 제공 <조선일보>

4·19혁명 당시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는 청년의 모습. 사진 제공 <한국일보>

5·18 당시 평화적 시위를 주도했던 전남대의 교내 시위. 학생들이 선봉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1980년 5월 13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사망자 유족이 태극기로 덮인 관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일보>

6월 민주 항쟁 당시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는 한 시위 참가자의 절규. 1987년 민주 항쟁의 상징적 사진에도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6월 민주 항쟁 당시 태극기를 게양하고 명동성당 앞으로 행진하는 학생들(1987).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노정 외에도,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인권과 근무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기독 청년 전태일의 죽음 이후 청계피복노동조합지부가 처음으로 결성됐을 때도 이소선 여사(전태일 모친)의 등 뒤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신 독재의 서슬 퍼런 사법 살인이 자행된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고 이를 비판한 조지 오글 목사의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회 활동에도 태극기는 그 자리를 함께했다. 이처럼 태극기는 해방 이후 분단의 비극과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반공'이라는 레드 콤플렉스에 함몰돼 가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반독재·민주주의·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시민사회와 종교 지도자들의 결단과 헌신 속에서 마침내 '민주화의 상징'으로 한국 현대사 속 자리를 새롭게 확보해 나갈 수 있게 됐다.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치른 후 청계피복노동조합 창립 총회에서 발언하는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 그의 뒤에는 노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돼 있었다(1970년).

시국 선언을 위해 종로 YMCA에 모인 재야인사들(함석헌, 김재준, 지학순 주교, 이호철 소설가, 김지하, 계훈제, 법정, 천관우 등, 1973년 11월 5일). 사진 제공 <동아일보>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의 진실과 부당성에 대해 연설하고 있는 조지 오글 목사(1974). 사진 제공 MBC
태극기, 민족 화해와 통일의 근본원리


한국 사회와 기독교계의 민주화 운동은 어디까지나 북한과의 체제 경쟁 과정에서 '승공론'의 관점으로 시작한 측면이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은 한국 사회의 모든 불평등, 독재, 비민주적 모순이 결국 굴절된 분단의 역사에서 비롯됐다는 각성·반성의 1985년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채택했다. 1988년에는 "분단은 한국교회의 책임이며, 이러한 분단 역사에 일조한 것은 우리의 죄책"이라고 고백하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1988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면서 분단 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



1) 한국 민족의 분단은 세계 초강대국들의 동서 냉전 체제의 대립이 빚은 구조적 죄악의 결과이며, 남북한 사회 내부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 왔다.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마 22:37~40)을 어기는 죄를 범해 왔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분단은 전쟁을 낳았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 방지의 명목으로 최강 최신의 무기로 재무장하고 병력과 군비를 강화하는 것을 찬동하는 죄(시 33:1; 6~20, 44:6~7)를 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는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각 분야에서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고, 동서 냉전 체제에 편입되고 예속되게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민족 예속화 과정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포기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상실하는 반민족적 죄악(롬 9:3)을 범하여 온 죄책을 고백한다.



2) 우리는 한국교회가 민족 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져 온 자주적 민족 통일 운동의 흐름을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단을 정당화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체제가 강요하는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역죄(출 20:3~5)이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는 교회가 정권의 뜻에 따른 죄(행 4:19)이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 정권을 적개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 1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요 13:17)이다. [3.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 중에서]

교회협은 이 선언을 통해 교회가 '자주', '평화', '사상·이념·제도 초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참여'한다는 다섯 원칙하에 종교와 민간 차원에서 온전한 통일 운동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누구도 비판·침해할 수 없었던 기독교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죄책 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관점과 실천신학을 제시한 '88선언'은, 이후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과 대북 교류 사업에 역사적 전환을 가능케 해 줬다. 이 선언은 이후 해외 교회에서 그 신학적·신앙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았으며, 특별히 후대에 이르러 '6·15 공동선언'에 반영돼 남과 북이 상생하는 통일 정책의 근간이 됐다.

한편, 88선언 이후 분단 현실에 대한 역사 인식 차이와 이념 갈등으로 더욱 뚜렷해진 한국교회의 분화 현상은 1990년대를 거치며 더욱 심화·첨예화했다. 교회협 등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운동과 통일 운동을 거부하는 반공적 보수교회를 중심으로,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창설돼 한국교회의 양극화가 더욱 분명해졌다.

한편,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방북한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통일 운동의 정신적 근거를 성서와 더불어 <주역>의 태극 사상에서 찾았다. 아래는 그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다 1986년 투옥됐을 당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문익환 목사.

큰아들 문호근 돌잔치 당시 모습(왼쪽부터 문익환, 박용길의 할아버지 박승희, 문재린, 김신묵, 박용길). 돌잔치 뒷배경을 태극기와 한반도 무궁화 자수로 장식한 것이 인상적이다(1947년경).

도봉구 '통일의집'에 소장·전시돼 있는 한반도 무궁화 자수와 돌잔치 사진.


"평화를 위한 평화의 싸움은 분열, 상극하자는 게 아니죠. 평화란 이지러짐 없는 완전, 이를테면 태극인 거죠. 음이 양을 배격하지 않고, 양이 음을 배격하지 않는 평화의 싸움은 넓고 크게 서로 끌어안는 경쟁이지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각기 그 가진 가치를 빛내면서 어울려 즐거운 큰 하나가 되는 몸짓이지요. 하나라도 이지러지면 그걸 채우지 않고는 숨이 턱에 닿아 안달하는 몸부림이지요. 사랑이지요. 싸움으로서는 복에 겨운 사랑싸움인 거고.



'너는 자유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그건 통일하지 말자는 게 아니냐? 공산주의는 자유와는 상극이니까.' 이게 내가 흔히 서양 사람들에게서 듣는 질문이었소. 서양 사람들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논리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지요. 자유냐 평등이냐, 우리는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자유를 택하면 평등을 버려야 하고, 평등을 택하면 자유는 희생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서양의 논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일으킨 것이 6·25라는 민족상잔이었거든요. 6월 23일 진격 명령을 내린 김일성은 평등을 위해서는 자유를 때려 부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아니겠소?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북진 통일을 외친 이승만은 자유의 수호를 위해서는 평등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고. 주역의 음양의 원리에서 보든, 기독교의 평화의 원리에서 보든, 이 둘은 결코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워야 할 것이 아니거든요. 평등과 표리일체가 될 때 자유는 만인의 자유가 되는 거고, 자유와 표리일체가 될 때라야 평등이 만인의 평등, 만인이 자유를 고르는 평등이 되는 거거든요. 우리의 국기(태극기)가 상징하는 음과 양이 하나인 태극을 이루는 거죠. 그러고 보니 민족 통일의 원리가 바로 우리 국기에 있군요. 자유를 양이라고 하면 평등은 음이니까요." (문익환, '음과 양이 하나인 태극기, 그 안에 있는 민족 통일의 원리', 문익환 목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86년 11월 12일 중에서)

이렇게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는 문익환 목사에게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성취를 향한 방향을 흔들림 없이 제시해 주는 이정표가 돼 주었다. 태극은 분단의 역사 속에서 반공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전락하기도 했지만, 태극 사상에 깃든 강력한 다이너미즘(dynamism)은 철옹성 같은 냉전 의식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정면으로 돌진하게 하는 에너지원이 되기도 했다.
태극기와 교회의 조건부 동행


태극기의 게양은 적어도 199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교파와 진보·보수를 초월해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 분위기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공격하며 분리주의적 태도를 보였던 맥킨타이어의 내한 행사장(1959년 11월 11일)에도 중앙에 태극기가 게양됐고, 1965년 8월 15일 한일 국교 비준 반대 기도회에 참여한 신자들과 청년들도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한국교회는 교파를 초월해 8·15 광복절 감사 예배, 3·1절 기념 예배, 6·25 상기 예배 등을 개최하며 각종 교회 행사에 태극기를 적극 게양했다. 1970년대 연세대 김찬국 교수(신학과)는 교회 강단의 태극기 장식을 장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 매킨타이어의 방한과 WCC 비판 강연(1959년).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집회에서도 태극기 게양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사진 제공 김응호

박정희 정부의 한일 협정에 반대 집회를 마치고 거리로 나서다 사복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는 기독교 청년들.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쥐어져 있었다(1965년). 사진 제공 김응호


"서강교회 설립 70주년 기념 예배에서 장로로 취임하는 분들이 태극기와 감리교회기를 두 개 강단에 봉헌한 것을 보고 흐뭇했었다. 강단에 꽂아 둔 태극기가 강단의 권위를 더 높여 주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 교회들도 미국기를 강단에 꽂아 두고 있는지 오래이다. 3·1절 기념 예배 때에는 태극기와 감리교회기를 선두로 행진해 들어가 강단 옆에 세워 둔다." (김찬국, '강단의 권위 문제: 오늘의 설교 목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세계>, 1975년 11·12월 호, 5쪽)

김찬국은 같은 글에서 향후 "3·1절과 8·15 광복절은 한국교회가 예배 의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기념"하자고 권했으며, "국민 의례에 나오는 애국가, 독립선언서 낭독, 만세 삼창, 3·1절 노래, 광복절 노래 등을 기독교 예배 순서에 삽입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한국인의 신앙 주체성을 살리는 길"이며, "교단적으로도 자발적인 움직임을 권장하고 일반화할 필요가 있으며, 한국 기독교 전체가 이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세계> 1981년 2월 호의 "3·1운동 기념 예배와 출애굽 운동: 3·1절을 교회 명절로 만들자"라는 글에서 반복됐다. 다만 눈에 띄는 점은 "'국기에 대한 경례'는 예배 순서에 넣지 않는다"(7쪽)고 강조한 점이다. 이는 앞서 한국교회가 국가권력과 큰 갈등을 빚은 1949년 국기배례 거부 사건의 경험이 수반된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찬국 교수(연세대 신학과).


"금년 3월 1일 주일예배 때에는 각 교회가 강단에 태극기를 걸고 예배를 시작하기 바란다. 애국가, 찬송, 기도, 성경 봉독, 독립선언서 낭독, 3·1절 노래, 설교, 찬양(어린이들은 유관순 노래), 회고담(회고담을 할 수 있는 분을 모시는 경우), 찬송, 만세 삼창(태극기를 나누어 주거나 가져오도록 하여), 축도 이런 예배 순서로 짜면 된다. 또 기념 예배에는 지방 유지나 시민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에 참여케 하여도 좋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예배 순서에는 넣지 않는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은 기도를 맡은 분에게 뜻을 알려서 기도하도록 하면 된다." (김찬국, '3·1운동 기념 예배와 출애굽 운동: 3·1절을 교회 명절로 만들자,' <기독교세계>, 1981년 2월 호, 7쪽.)

김찬국은 교회 내에 태극기를 설치하고 3·1절 기념 예배를 드림으로써, "3·1운동의 기본명제인 독재 배격, 군국주의 배격과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성취를 오늘과 내일의 우리 역사에 실현하도록 힘써야 할 것"(7쪽)이라고도 강조했다. 한국 감리교회 사례만 살펴보더라도 다양한 교계 행사에 태극기를 게양하거나 대형 태극기 행진 퍼포먼스, 기념품·소품 제작 등 태극기 관련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한 사례를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김찬국, '강단의 권위 문제: 오늘의 설교 목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세계>, 1975년 11·12월 호.

'탁상용, 교단기, 태극기 판매', <기독교세계>, 1985년 6월 호, 26쪽. 1980년대에는 교회 예배당과 목회자의 책상에 태극기·교단기가 장식되는 관행이 매우 일상적이었다.
교회당 강단을 떠나
광장에 운집한 태극기


하지만 1990년대까지 교회 내에 안착돼 가던 태극기 게양 문화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1994년 이태원교회 김성일 장로가 한국교회 여러 예배당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는 것을 문제 삼았은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신문>·<현대종교> 등 신문·잡지에 '교회의 국기 게양은 성경적인가', '교회의 깃발은 그리스도'와 같은 글을 기고하며 교회 내 국기 게양 반대 운동을 전개해 감리교회 안에서 논쟁을 야기했다. [김성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홍성사, 1994), 24~33쪽 참조]


"각국의 교회들이 자기네 국기를 게양한다면 태양신을 그려 놓은 우루과이의 깃발, 아쇼카의 법륜을 그려 놓은 인도의 깃발, 무신론의 낫과 망치를 그려 놓은 공산국가의 깃발 아래서도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인가? 그대들은 저 사우디아라비아의 깃발 아래서도 예배드릴 수 있는가? 저들의 녹색 깃발에는 흰색의 아랍어 글자가 들어 있는데 그 뜻은 '알라신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모하메드만이 신의 유일한 예언자이다'라는 뜻이다." (김성일, '교회의 깃발은 그리스도,' <비느하스여 일어서라>(국민일보사, 1994), 205쪽)

이러한 분위기는 1992년 감리회의 '변선환·홍정수 교수 종교재판 사건' 등 종교다원주의·포스트모던신학에 대한 뜨거운 논쟁과 더불어 '서태지와 아이들', '뉴 에이지 운동' 등 새로운 대중문화의 출현에 대한 보수 개신교계의 강한 거부감으로부터 촉발된 측면이 있다. 태극기 게양에 대한 김성일 장로의 보수주의적 문제 제기는 '낮은울타리문화선교회'(1990년 창간) 같은 근본주의적인 문화 선교 언론 단체, 같은 해 사단법인으로 인가받은 '한국창조과학회' 등의 공격적인 활동과 연계됐다. 당시 세속적인 사회 문화에 강한 거부감과 경각심을 공유하고 있던 보수교회는 이에 크게 호응했고, 교회당 태극기 게양 문화도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1990년대 이후 교회 강단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문화가 점진적으로 소멸하게 된 역사적 동인과 과정에 대해서는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한때 태극기가 근엄하게 게양돼 있던 교회당 강단은 현대적 공연·영상 예배의 수월성·실용성을 꾀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급격히 변모해 갔으며, 권위적인 공간들도 점차 단순화·해체되고 있다. 그렇게 태극기 게양은 과거의 추억이 돼 버렸다. 20세기 <통일찬송가>에 존재하던 교독문 '68.국가기념주일', '69.삼일절', '70.광복절'도 현재 <21세기 찬송가>에서는 "나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모두 대체됐다. 현대 한국교회는 외적으로는 교회 성장론 혹은 새로운 예배학적 실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예배 공간을 빠르게 변형하고 상징물을 제거·신설하고 있으며, 내적으로는 민주적 가치와 기독교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자연스럽게 예배당 강단에서 배제하게 됐다.

극우 기독교 단체들의 서울시청 앞 집회 광경.

현대 교회의 예배 문화와 신앙 양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극우적 신앙'과 '국가주의'가 결합한 극단적 보수 기독교 세력은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광장에 게양된 태극기 아래로 재결집해 그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이들은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수준의 영향력 있는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사회와 언론은 이들의 행태에 주목하며 한국 개신교 전체에 대한 이미지·인식을 소비하고 있다. 또한 사회규범·상식을 파괴하는 이들의 과격한 발언과 폭력적 행동은 정치·사회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향후 한국교회가 선교를 이어 나가고 새로운 정체성 수립을 위해서는, 이러한 극단적 신앙 양태가 더 이상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그리스도인과 시민사회가 소통·연구하며 힘을 모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태극의 역사 앞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


초기 한국 기독교에 태극기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근대국가·자주독립을 성취한 대안적 시민사회를 꿈꾸게 하는 표상이었다. 그렇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동양적 세계관을 표현한 '태극'을 기독교 신앙 안에 녹여내 동서 조화를 모색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태극기를 손수 제작해 만세 시위를 벌이면서 그러한 희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확대 앞에 상실과 절망을 체험한 한국인들은 결국 일장기 숭배를 강요받거나 자발적 숭배의 길을 선택했다. 일장기 숭배의 길은 굴욕적이지만 달콤한 안전과 권력을 허용해 줬다. 사실 한국교회의 역사적·신앙적 타락과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교회는 일장기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훼절의 길에 들어섰다. 그렇게 한국 기독교는 독재(파시즘)와 폭력에 순응한 대가로 물질적 번영과 정치적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예상치 못한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교회는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국가와 충돌한 일부 기독교계 세력들은 태극기를 이용하거나 혹은 거부하며 여러 신흥 종교들을 형성했다. 그들은 태극기를 내걸고 민족의 메시야인양 행세했다. 일제에 부역한 기성 교회 또한 회개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민족 분단이라는 위기 앞에서 '친일'을 은폐하기 위해 '반공'이라는 안전지대로 숨어들었으며, 결국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다.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며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물적·제도적 특혜를 누렸다. 일제 파시즘 시기보다도 더욱 강력한 물신숭배와 권력화에 경도돼 갔다. 분단과 냉전 체제는 일제강점기에 태극기 배례(경례)를 거부하며 순전한 신앙을 고수했던 보수 신앙마저도 용공, 공산주의, 반체제 인사로 왜곡해 나갔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과 국가주의가 결합된 국기 숭배의 메커니즘은 일제 파시즘 시기부터 본격화했고 오늘까지도 한국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더욱 확실해지는 점은, 최근 반세기 동안 벌어진 태극기의 가치 훼손·왜곡·굴절 과정에서도 여전히 태극기 본연의 정신과 가치를 온전히 인식해 온 건강한 시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4·19 직후, 한국교회 주요 신학대학의 학장을 맡고 있던 홍현설 박사(감신대)와 김재준 박사(한신대)는 <기독교사상>에 4·19에 대한 현실 인식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홍현설, '4·19에서 얻은 교훈', <기독교사상>, 1960년 6월 호.


"4·19를 겪고 난 우리 낡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만 부끄러움과 자책하는 마음에서 학생 제군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이제부터 우리는 좀 더 책임 있는 시민이 되기를 힘써야 하겠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가가 된다'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무관심과 방관주의의 태도를 버리고 우리의 눈을 크게 뜨고 우리의 귀를 열어서 어디에 부정이 있으며, 불법이 있으며, 민의가 묵살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서 여론을 일으키고 자유로운 비판을 내려서 그러한 병폐가 축적되어 후일에 또 큰 불행을 가져오지 않도록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민주주의의 감시병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홍현설, '4·19에서 얻은 교훈', <기독교사상>, 1960년 6월 호)


"4·19는 암흑을 뚫고 터진 눈부신 전광이었다. (중략) 교회도 이 섬광에서 갑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하여 구정권의 악행에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교인까지 생겨났다. (중략) 교회가 대국가 관계에서 긴장을 풀었다는 것은 무서운 실수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중략) 신약에서 본다면,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장에 국가를 적극적으로 긍정하였으며, (중략) 하나님이 그(국가) 안에서 그것(국가)을 통하여 섭리하신다고 하였고,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이 국가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복종'이란 말은 현대 민주 사회에 있어서는 '책임적으로 참여 또는 동참'한다는 용어로 대체되는 것이다. (중략) 국가가 전체주의적으로 자기를 신화神化하는 때 이 선(정교분리의 선)은 사실상 도말塗抹되는 것이므로 신자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 (중략)



대략 이상과 같은 원칙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선이 그어진다고 본다면 우리 교회가 이(승만) 정권 시절에 똑똑히 굴지 못했던 자화상이 드러날 것이다. 국가를 절대화하려는 독재 경향이 익어감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에 교회로서의 경고를 제대로 발언하지 못했다는 것, 교회가 멋없이 집권자와의 일치 의식에 자위소를 설정했다는 것, 교회가 대사회 건설 사업에 활발하지 못했다는 것 등등이 원칙적으로 반성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준, '4·19 이후의 한국교회', <기독교사상>, 1961년 4월 호, 36~38쪽)

이들이 4·19 이후를 준비해야 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숙제로 내건 것은 '교회와 국가의 건강한 관계를 수립'하는 일이며, 단순 종교인으로서가 아닌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민주 사회 건설의 주체로 역사에 동참하라는 요청이었다. 홍현설이 말한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것"과 김재준이 말한 "책임적으로 참여 또는 동참"하는 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체적 실천이자 소명이다. 그러나 60여 년 전 두 신학자의 교훈과 경계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고 절실하게 들리는 현실은 자못 씁쓸하고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국가 상징물인 태극기를 관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유에는 - 김찬국 교수가 강조했듯 - "독재와 군국주의를 배격하고 인권의 기본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취를 오늘 우리의 역사에 실현하도록" 힘쓰겠다는 대전제와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잃고 권력과 물신의 노예가 되는 순간, 태극기는 언제든지 민족과 시민사회를 분열시키고 자신의 욕망만을 드러내는 추악한 깃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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