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4

홍대선 [유신 그리고 유신] 한청훤 서평

(8) Facebook

 
한청훤

홍대선 <유신 그리고 유신>


딴지일보 시절부터 ‘필독’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시며 엄청난 필력을 자랑하시던  DaeSun Hong  홍대선 작가님의 최신 신작 ‘유신 그리고 유신’을 나오자 마자 다 읽어 버렸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 분이시고 장르와 소재 자체도 딱 내 취향이라 큰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니 내 기대치를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나게 재미있고 또 책 막판에는 살짝 뭉클해질 정도로 감동까지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장점이 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머니머니 해도 동아시아 근현대사 해석과 서술에 있어 기존에 쉽게 접하던 규범적 관점과 해석에 벗어나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추동 했던 어떤 근원적 힘과 거기에 매료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19세기 비서구 국가 중 유일하게 근대화와 서구 열강 대열에 동참하는 데 성공한 국가인 일본이 국가 개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정치적 원동력은 바로 에도 막부 말기 선비화(士化) 된 사무라이, 즉 소위 유신지사들의 탄생이었다. 막부 중기부터 시작된 성리학의 보급과 유행으로 사무라이들은 집단적으로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되었고 정치적 허수아비에 불과한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마침 등장한 서구열강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대거 폭발적인 정치적 참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소위 난세에 자신이 품은 대의를 위해 수단으로써의 폭력과 자신의 목숨 까지 아끼지 않고 실천하는 지사들의 등장은 봉건체제의 일본의 정치적 변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성리학은 이 소위 유신지사들의 정체성에 현실의 불의에 대한 정치적 참여라는 동기부여 외에 내면 깊이 자리를 잡지는 못하게 된다. 만세일계라는 천황에 대한 신화적이고 종교적 관념, 일본 열도를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일종의 신국(神國)으로 규정하며 보편성을 부정하는 일본 특유의 배타적 세계관, 사무라이 자체가 갖고 있던 원래의 무사적 정체성이 더해지면서 유신지사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윤리적 세계관에서 비켜나 미학적 심지어 탐미적 세계관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유신지사들의 정체성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해 어떻게 막부체제가 성공적으로 타도 되었고 수 많은 내전 후 일본의 정치적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의 역량 이상으로 무리해 가며 어떻게 외부세계로 팽창을 거듭하여 최종적으로 자기파괴적 결말을 맞게 되었지를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요행과 정세가 결합한 덕에 몇 번의 성공을 거듭하자 유신지사들은 점점 더 미신적 세계관과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하는 탐미적 세계관을 추구하게 된다. 소위 유신지사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던 일본 군부 세력들은 품고 있는 뜻만 가상 하다면(보통은 천황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 과시) 무슨 짓을 하건, 설사 명령을 어기고 하극상을 행해도 관대하게 넘어가고 심지어 사후승인 등을 통해 용인해 주는 괴상한 집단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자기파괴적 충동은 미국의 응징으로 자기예언적 실현으로 끝을 맺게 되지만 이 책은 이 때부터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로 유신지사의 정체성을 그대로 내면화한 조선인들이 메이지 유신과 2.26 쿠데타들 그대로 본떠 과거 열도의 유신지사들의 꿈꾸었던 국가개조와 부국강병의 대의를 이루기 위한 실험을 신생 국가 대한민국에서 벌일 참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천황에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며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군에 배치된 전직 일본군 출신 박정희가 집권 후 왜 그렇게 독립투사들을 떠받들고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부추겼는지 그의 의도에 대해 여러 엇갈린 주장을 내세웠다. 이 책은 박정희가 유신지사들의 정신적 후계자자로써 그의 언뜻 모순된 동기를 해석하는 데 개인적으로 크게 설득력 있다고 느꼈다. 박정희는 자신의 대의를 위해 수단이나 방법 등은 크게 신경을 안쓰는 인물이었고 또한 설사 과거 자기의 행적과는 다른 대의를 갖고 목숨을 받쳤던 사람들은 마음속 우러러 존경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반도의 유신지사 김재규는 유신의 정신으로 파국을 향해 치닫던 유신을 끝내기 위해 지극히 유신지사스러운 방식으로 19세기와 20세기 내내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던 유신 그 자체를 끝낸다. 19세기 초기 유신지자들에게 볼 수 있었던 대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걸던 당시의 숭고함과 장엄함을 내뿜으며 유신의 최후의 걸맞는 유신 자신의 자살이었다.

이 짧은 서평으로 이 책의 재미와 책 자체의 미덕을 다 담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역덕후라면 꼭 사서 읽어보시길 강추 드린다. 이 책의 원래 목적은 한국인 정체성에 대한 탐구였다고 저자가 서문과 후기에 남긴 것처럼 유신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 한국인에게 있어 자기 정체성과 세계관의 일부의 기원을 탐구하는 여행의 의미도 담겨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여하튼 다 떠나서 워낙 필력이 좋으신 분이 쓰신 책이 너무 재미있었다.
======
11 comments
Yonghee Han
이책 읽어 보려 했던 책입니다^^
1 d
Bum Choi
근대 한국의 아버지인 일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네요^^
1 d
한청훤
머 그런점에서 미덕이 있는 책 같습니다~
1 d
Choonsik Yoo
한청훤 일단 추천 믿고 구매
1 d
DaeSun Hong
크으 이런 좋은 리뷰를... 뿌듯합니다.
1 d
한청훤
크 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1 d
Sangchul Moon
안알남이란 팟캐스트에서 홍작가님이 방송한 내용이 첵으로 나왔나보네요. 그 방송 애청자인데요. 방송에선 김재규 이후 세대들이 유신지사 마인드를 받아서 이후 한국사회 곳곳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그런 이야기들도 나옵니다. 시간되시면 한번 들어보셔도 좋을 듯 하네요.
1 dEdited
한찬욱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미 "근대화" 되었던 나라로 압니다 물론 산업화와 군국화는 되지 못했고 서구식의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 부재 그리고 화폐제도의 후진성 등 문제가 많긴 햇읍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에도말기에 부유한 나라였고 그래서 그 돈으로 해외 서구 문물을 바르게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잇었읍니다 반면에 한국은 조선 말기에 외척의 간섭으로 성리학 체제가 제대로 작동 못하고 성장이 정체되어 서구의 산업화와 군국주의 그리고 획일적인 전국적 교육 시스템을 도입할 형편이 안 되고 화폐 제도 개혁도 성공하지 못한 걸로 압니다
==
유신 그리고 유신 - 야수의 연대기 
홍대선 (지은이)메디치미디어2022-12-15

































정가
18,000원
기준) 지역변경
역사 주간 60위|
Sales Point : 1,520 

 10.0 100자평(2)리뷰(0)

352쪽


책소개
5.16은 한국판 ‘쇼와 유신’이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10월 유신까지, <바람의 검심>에서 김재규까지… 괴물이 된 유신의 생성과 폭주, 부활과 소멸의 150년을 쫓는 본격 추적물.

‘유신’은 메이지 유신(일본)과 10월 유신(한국)의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다. <유신 그리고 유신>은 외세와 일본의 두 번의 만남(여몽연합군의 침공과 페리 제독의 흑선)에서 싹트기 시작한, 자기신성화와 자기파괴의 정념인 ‘유신’을 주인공 삼아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추적한다. 만주침략,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 일본의 폭주는 결국 가미카제와 ‘1억 옥쇄’ 그리고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종결되었다. 그것은 한편 ‘유신’의 종말이었지만, ‘유신’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부활하였다.

박정희와 김재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유신의 세계관 안에서 성장했다. 한국은 ‘10월 유신’ 이전에 이미 ‘유신’과 만났었다. 박정희의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쿠데타와 달랐다. 메이지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주창한 기타 잇키와 황도파 청년장교 등을 잇는 한국의 유신, 더 적나라하게는 일본에서 실패한 ‘쇼와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일본국민을 인질로 삼아 위기에 이르렀듯, 박정희의 유신도 폭주해 국민 살해의 임계점에 도달했었다. 부마항쟁 당시 몇 백만을 죽여도 괜찮다는 박정희의 뜻을 가까스로 막아낸 것은 마지막 ‘유신 지사’ 김재규였다.


목차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
3장 탄생: 신성한 타락
4장 팽창: 전쟁중독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
6장 광기: 순수의 시대
7장 임종: 덴노 헤이카 반자이
8장 부활: 윤리적 세계와 미학적 세계
9장 절정: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육

10장 완성: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후기: 유신의 제단


책속에서



P. 28~29이 책의 주인공은 한국도 일본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유신 그 자체다. 나는 유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다룰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신은 사건이 아니다. 1868년의 일본 메이지 유신도 아니고, 1972년 남한에서 일어난 10월 유신도 아니다. 이 둘은 사건으로서의 유신이며, 사건의 명칭일 뿐이다. 근본적인 유신은 현실의 사건들을 만들어낸 상상력이다. 상상의 구체적 내용은 관념과 정념이다. 관념은 믿음이다. 유신의 믿음은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 남을 파괴해도 된다는 신앙이다. 정념은 욕망이다. 유신의 욕망은 스스로 아름다워지기 위해 죽어도 되는 자기파괴의 충동이다. 유신은 관념과 정념이 결합해 낭만의 들숨과 비극의 날숨을 얻은 인격적 생물이다. 우리는 유신의 탄생과 성장, 죽음 그리고 부활의 대서사시를 살펴볼 것이다. 유신은 일본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후 한국에서 완성되었다가 소멸했다. 유신은 낭만과 비극의 150년이다. 가깝고도 먼 두 나라의 살갗에 화상처럼 새겨진 강렬한 흔적이다.
_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 중 접기
P. 53~54요시다 쇼인은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분량도 지나치게 짧고 비논리적이며 근거도 없다. 그 정도 수준의 학문을 가진 이는 어느 시대나 흔하디흔하다. 나는 요시다 쇼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가 어째서 지금처럼 중요하게 취급되는지 되묻는 것이다. 한 인물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후대인의 취향이 결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원래 ‘성지’를 만들어 찾아가기를 좋아한다. “일본을 일으켜 세운 유신→유신의 중심이 된 조슈 번→조슈 번 사무라이들의 사상과 패기→그들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 이렇게 순서를 거꾸로 되짚어 송하촌숙을 성지로 받들겠다면 그건 그들의 자유다. 같은 원리로 큰 강의 근원지가 되는 작은 샘물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다만 진실은 수많은 물줄기와 지하수, 빗물이 모여 비로소 큰 강을 이룬다는 것이다.
_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 중 접기
P. 69‘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미토 번사들의 최후 대신 자신들의 성공신화를 음미했다. 그 모든 무모함과 과격함은 결국 옳았다. 일본은 옳은 나라이므로 이제 밖/세계를 상대로, 즉 청나라와 러시아, 미국에 싸움을 걸어야 한다. ‘상대가 강대한데도 불구하고 / 옳은’ 전쟁이므로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는 ‘상대가 강대한 만큼 무모한 전쟁이므로 / 옳다’는 무서운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살아남지 못해 지워진 미토 번 대신 어쨌든 살아남아 역사에 길이 남은 죠슈와 사쓰마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겪은 폭주의 경로와 그 결과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로 남았다.
_ 3장 탄생: 신성한 타락 중 접기
P. 112청일전쟁의 기적 같은 승리는 제사에 하늘이 응답한 결과였지 않은가. 일본은 언제나처럼 또 다른 제사를 준비했다.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국가로 진화한다. 역사 속에 출현한 전쟁국가는 전쟁기업의 형태를 띤다. 일례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전쟁을 지속함으로써 성장동력을 유지했다. 전쟁 국가에 있어 전쟁은 어디까지나 도구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의 전쟁국가화는 전쟁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것을 제사에 쏟아붓고 결과를 하늘에 맡기는 관념적 의식이 시작되었다.
_ 4장 팽창: 전쟁중독 중 접기
P. 163~164일본 군부에 있어 재일 조선인은, 히틀러에게 있어 독일에 사는 유대인과 같은 의미의 땔감이었다. 일제 군부는 자신들이 도취한 유신의 정념에 일반 국민을 포섭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설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반박에 재반박을 반복해야 한다. 공범끼리는 토론할 필요가 없다. 외부의 더러움으로부터 신토를 지켜야만 하는 유신의 관념 안에서 학살은 성전(聖戰)이 되었다. 일본 군국주의는 조선인들의 시체 위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처럼, 다음에 차릴 제사상을 일본인들의 시체로 채우게 된다. 관동대지진 2년 후 1925년, 유신은 군국주의 일본의 틀을 완성한다. 치안유지법을 통해서다. 치안유지법은 한국의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아버지다.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핑계로 실행된 치안유지법의 핵심은 두 가지다. 감히 천황제의 신성함을 의심하지 말 것 그리고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지 말 것이다.
_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 중 접기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홍대선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문학과 칼럼, 시나리오 등 다양한 글쓰기를 해왔다. 국내 최초 인터넷 신문인 《딴지일보》에서 일하며 쓴 <테무진 to the 칸>은 역대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다. 인문교양 팟캐스트 〈안 물어봐도 알려주는 남 얘기〉 등의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1미터 개인의 간격》,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테무진 to the 칸》, 《축구는 문화다》, 《태양의 해적》 등이 있다.
한국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현재의 한국인이 되었는지를 탐구하며 답을 찾고 있다.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중간보고서이며, 한국 근현대사의 한 조각을 맞추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접기

최근작 : <유신 그리고 유신>,<[큰글자도서]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1미터 개인의 간격> … 총 11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메디치미디어
도서 모두보기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포노사피엔스는 거꾸로 공부한다>,<유신 그리고 유신>,<노무현 트라우마>등 총 223종
대표분야 : 책읽기/글쓰기 5위 (브랜드 지수 102,732점) 





출판사 제공책소개

이상하고 기묘한 정념, 죽음을 탐미하는 낭만과 폭력의 역사!
‘유신’의 눈으로 한일 근현대사의 주요 대목들을 조망한다.

일본 근현대사의 흥성과 파멸은 모두 ‘유신’ 때문이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역사가 이렇게 폭주할 수 있었는가, 에 대한 명쾌한 대답.

‘유신’은 메이지 유신(일본)과 10월 유신(한국)의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다.
한국은 ‘10월 유신’ 이전에 이미 ‘5.16’으로 유신과 조우하였다.
한일 역사의 문제적 인물들을 움직인 동력, 그것이 ‘유신’이다.

#1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1936년 2월 29일, 나흘 전 시작한 청년장교들의 쿠데타(2.26사건)가 이제 막 종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국 육군 제1사단 보병제3연대 제6중대장 안도 데루조 대위는 황도파 청년장교의 한 명으로서 군부 내 라이벌인 통제파의 상급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안도는 쿠데타를 말렸으나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자 누구보다 열심히 현장을 지휘하고 사수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토벌군의 투항 권유 방송이 계속되자 안도는 부하들에게 투항을 명령한 뒤 자신의 목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즉사하는 데 실패하고 후에 사형 당했다).
안도 데루조는 자결을 말리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전에 이 중대장을 혼낸 적이 있지. 중대장님, 언제 궐기하는 거냐고 말이야. 이대로 두면 농촌은 구할 수 없다면서. (*결국) 농민은 구하지 못하고 말았네.” 다른 부하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쇼와 유신’을 내걸고 궐기한 청년장교들과 그들의 사상적 지도자 기타 잇키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과 투옥 등을 받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 당했다. 안도는 살아남은 부하들이 ‘유신’을 계속하기 바랐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도 데루조의 유언과도 같은 말에서 ‘유신’은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책의 한 항목,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어떤 관념이고 정신이고 정념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자기가 속한 세계를 바꾼다는 믿음 아래 자기와 타인을 기꺼이 파괴해버리는 마음이다.

#2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유신은 선언이 아니다. ‘이제 일본이 재통일되었으니, 유신이란 것을 선포한다.’는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메이지 유신 원년으로 불리지만, 1868년 당시는 한쪽에서는 신정부가 수립되고 다른 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난세의 시기였다. 유신(維新)이라는 말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서경(書經)》에 기록된 표현이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가 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정비해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되살아난 사건을 유신이라고 한다. 막부를 뒤집어엎은 신정부세력은 자신들의 성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서경》에서 ‘유신’이라는 표현을 찾아 사용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여러 유신 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한 결과 주어진 선물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청년장교들의 2.26 쿠데타가 ‘쇼와 유신’을 내걸었던 것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신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걸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의 대의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성공신화는 어느새 고스란히 실패담으로 이어졌다. 대의명분을 내걸고 일본제국의 번영과 성공을 부르짖으며 사실은 자기 앞가림에만 열중하거나, 자기 생각에 현실을 뜯어 맞추며 부하와 동료, 국민들을 태연히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이 일본을 이끌었다. 이상하고 기묘한 우연이 모여 일본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위험한 질주였다. 일본 근현대사에 흔적을 남긴 문제적 인물들은 과감하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역사 진행을 앞당기거나 궤도를 이탈하곤 했다. 만주침략,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 거침없던 일본의 질주는 결국 가미카제와 ‘1억 옥쇄’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종결되었다. ‘유신’의 종말은 그만큼 파괴적이었다.
대한민국 독립에 공헌한(?) 비밀 독립지사로까지 불리는 무타구치 렌야는 버마와 인도의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임팔전투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 한다. 무기가 없다, 탄약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등은 퇴각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탄약이 없다면 칼로, 칼이 없다면 맨손으로, 맨손도 안 되면 다리로 걷어차라, 다리도 당하면 이빨로 싸워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자기파괴적인 유신-관으로 무장한 일본은 이처럼 파괴적인 생각을 앞세워 미국, 중국, 소련 등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세 방향 모두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유신이 마침내 당도한 초라한 결말이었다.

#3 성공한 ‘쇼와 유신’ 5.16과 유신 지사 박정희와 김재규

유신은 그냥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까? 일본에서 파멸을 맞은 유신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조용히 부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마침내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역사에서 해방되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한 이들과 달리, 한반도의 어느 세대는 ‘일제’를 조국으로 한 채 태어나 자랐다. 공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어도, 해방 이후 지금 우리와 잇닿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역시 박정희를 꼽을 수밖에 없다. 그 박정희와 박정희의 폭주를 막은 김재규는 각각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유신’의 세계관 안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은 1972년의 ‘10월 유신’으로 명칭을 달기 이전에 이미 유신의 시대에 돌입해 있었다.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청년장교들의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군인들의 쿠데타와 달랐다. 메이지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 세계전쟁을 꿈꾼 이시와라 간지와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주창한 기타 잇키 등을 잇는 한국의 유신,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일본에서는 실패한 ‘쇼와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인 사병들로부터 일본의 진짜 현실을 전해 듣고 새로운 일본의 장래를 추궁 당했던 안도 데루조와 황도파 청년장교들처럼, 박정희는 스스로 발견하고 체험한 가난한 대한민국의 농촌을 구원하고, 산업화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싶어 했다. 5.16 이후 전투적으로 진행된 산업 발전은 가까이는 만주국의 경험, 더 거슬러서는 전쟁과 국가총동원체제로 성장한 일본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하지만 자기파괴의 정념은 결국 한계에 도달한다.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일본 국민 전체를 인질로 삼아 위기에 이르렀듯(이들은 1억 옥쇄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려 했고, 그 1억 명 속에는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 역시 폭주해 국민 살해의 임계점에 도달했었다. 부마항쟁 당시 몇 백 만 명을 죽여서라도 나라와 정권을 지키겠다는 박정희의 뜻을 가까스로 막아낸 것은, 한때 그가 사랑하고 믿었던 김재규였다. 러일 전쟁의 영웅 ‘노기 대장’을 가슴에 품고 성장했던 김재규는 ‘유신’의 세계관 안에서 성장했고, 그가 주군 대신 택한 ‘국민’을 위해 마지막 바친 충정은 몇 발의 탄환이었다. 김재규는 마지막 유신 지사였고,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은 마침내 150여년 역사의 긴 질주를 끝낼 수 있었다. 접기



구매자 (2)
전체 (2)
공감순 

    

우와, 미쳤다. 책을 펴든 순간부터 한번에 다 읽어버렸다. OTT에 전편 공개된 흥미진진한 시리즈물을 한방에 다 몰아서 본 느낌. 에도 막부 말기의 사무라이들부터 일본이 벌인 온갖 전쟁에서 날뛴 전쟁광들 그리고 박정희와 김재규에 이르기까지 한줄기로 솜씨있게 엮어내고 있다. 흥미진진한 역작!  
zappa 2022-12-16 공감 (2) 댓글 (0)


    


최근 10년 간 읽은 책 중 가장 도발적이고 가장 흥미로운 책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