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0

이만열 | Facebook 한일관계, 남북관계

(3) 이만열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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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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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11 December at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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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2월 10일은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선생이 72년 전 6,25때 납북되어 압록강 가에서 서거하신 날이다. 다음 글은 2년 전 우사 선생 서거 70주년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70주기에 우사 김규식 선생을 생각한다.  
올해 12월 10일은 우사 김규식 선생이 납북되어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에서 서거하신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돌아가실 때도 민족의 통일을 아쉬워했던 선생은 간병인조차 자리를 뜬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필자는 2000년 초에 몇 차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을 방문, 선생의 묘비 앞에서 예를 올린 적이 있기에 이 글을 초한다. 선생의 서거 70주년을 맞아 먼저 납북가족 및 이산가족의 아픔에 깊은 위로를 드린다.  
선생은 일찍이 미국 로아노크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그 학자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1904년에 귀국, YMCA 등에서 활동했으며 1910년 12월에는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되었다. 1913년 11월, 그는 영문학자로서 보장된 삶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다. 민족과 함께 고난받는 길,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연약한 체구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으나 그는 동족과 함께 가시밭길을 선택, 노블리스 오빌리쥬를 실천했다.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동족의 고난을 끌어안은 것이다.  
1919년 한국독립운동계를 대표하여 파리에 파견, 독립청원서를 제출했고 임정의 외무총장에 임명되는 등 그의 독립운동은 외교 분야에서 돋보였다. 한편 1910년대에 그는 몽골지역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고 했을 정도로 군사투쟁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의 독립운동의 이념은 민족주의 좌파의 김두봉·김원봉 등과 관련을 맺을 정도로 폭이 넓었다. 임정이 다당제를 채택하자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김구 주석을 도와 임정의 부주석도 맡았다. 독립을 위해서는 좌우세력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조류를 직감하고 실천에 옮겼다.   
선생이 해방정국에서 보인 이념도 민족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신탁통치 문제가 터졌을 때 선생은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하고 탁치문제는 그 후 민족적 대의에 따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되자, 7월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우합작운동에서도 여운형·안재홍·홍명희 등과 먼저 민족대단결을 도모하고 좌우합작에 의한 정부 수립만이 민족문제를 해결한다고 보았다. 해방 정국에서 몽양과 우사는 중도 좌·우파를 이끌며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미 군정기간을 단축하는 것이 통일의 길임을 인식하고 입법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1948년 2월 UN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이 통과되자, 분단을 막고 민족 통일을 달성하려는 대의에 입각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 실천했다. 이렇듯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통일을 추구하다가 6.25 때 피난하지 않고 납북되었다.  
선생 가진지 70년. 그가 기독교 지도자로서 좌우합작을 시도했던 것은 깊은 의미를 남겼다. 그는 1989년 뒤늦게야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고, 선생을 위한 국가적 의전도 현충원에 위패를 남긴 정도다. 민족지도자를 위한 기념사업이 많지만 선생께는 합당한 예우가 주어지지 않았다. 해방공간에서 우사는 우남 이승만·백범 김구와 함께 3거두의 한분으로 활동했다. 
우사가 납북때까지 거주했던 삼청장은, 국가적 기념물로 보존되는 경교장·우남장과는 달리, 청와대 부속건물로 되어 그 역사적 의미를 상실한 단계에 있다. 그의 70주기를 맞아 우사의 길이 민족통일이념의 큰 축임을 확인하고 삼청장을 선생의 독립정신과 통일정신을 전수하는 교육공간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아울러 지방정부도 우사 선생이 활동했던 삼청장 주변의 동십자각∼삼청터널에 이르는 길을 ‘우사로(尤史路)’라 명명하고, 그의 민족사에 끼친 공헌을 길이 전수하려고 노력하는 민간운동에 적극 화답하기를 기대한다. [이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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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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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19 December at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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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오늘은 윤봉길 의사께서 순국하신 날이다. 이 글은 9년 전 2013년 7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독립정신답사단’을 인솔하고 윤 의사의 시신이 처음 매장되었던 일본 가나자와(金澤) 소재 일본군 9사단 연병장 언저리를 방문하고 남긴 일기의 일부로, 필자의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이』 (동연, 2022)  238쪽-239쪽에 게재되어 있다.   
“…아침 9시가 지나 가나자와 시에 들어선 일행은 윤봉길 의사 암장지(暗葬地)를 먼저 찾았다. 월진회 일본지부장 박현태 선생과 교민 몇 분이 맞아 주었다. 
윤 의사가 사형당한 곳은 이곳에서 약 3km 떨어진 곳인데 일본 자위대에서 감시하고 있어서 그곳에는 가지 못한다고 한다. 암장지 바로 위에는 큰 연병장 모양으로 된 일본군 묘지가 있었다. 노일전쟁 때 포로로 잡혀온 러시아 군인의 묘소도 있었다. 
윤봉길 의사를 이곳에 암장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거사 후 윤 의사는 5월 25일 일본 군법회의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육군은 사형집행을 미루고 윤 의사를 일본으로 송치하도록 했다. 당시 상해에 파견된 부대가 9사단이었는데 그 사단 본부가 있는 곳이 가나자와였던 것도 한 이유다. 윤 의사는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성의 구금소에 1개월간 지나다가 12월 18일 9사단 위수구금소에서 일박한 후 그 이튿날 12월 19일 산속으로 옮겨져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게 하고 두 손을 십자가 형틀에 묶은 채 아침 7시 27분에 두 사람의 사수가 이마에 정조준하여 사살했다. 그리고는 앞서 언급한 일본 육군 묘지 사무실이 있는 쓰레기더미 옆에다 암장했다. 
암장지가 사무실 옆에 있었던 것은 시신이 도굴당하지 않도록 함이었다. 어떤 이는 윤 의사가 사형당한 시각 7시 27분은 시라가와(白川義則)가 폭살당한 시간에 맞춰졌고, 안중근의 사형시각 10시도 이토(伊藤博文)의 운명시각과 맞추었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헌화 헌주하고 경건한 예를 올렸다. 1946년 3월 김구 선생이 일본에서 돌아간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봉환하기 위해 조성환 선생 등을 파견했다. 윤 의사의 시신은 3일간을 찾았으나 매장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수소문 끝에 암장시에 독경(讀經)을 했다는 스님을 찾게 되어 겨우 이 암장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윤 의사를 이런 쓰레기더미 옆에 암장한 일제에 분노하는 한편 일제의 문명국 수준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아무리 그들 요인을 폭살한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윤 의사는 상대국의 ‘의인’이다. 그렇다면 그 의인의 죽음의 길에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 무릎을 꿇게 해서 형을 집행토록 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사형 후 가족에게 반드시 알려야 하며,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여 묘를 만들어주는 것은 근대국가가 갖는 최소한의 예의다. 그러나 윤 의사는 1932년 12월 돌아가신 후 1946년 3월 유해봉환 때까지 그런 최소한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직도 안 의사는 독립된 나라에서 봉환하여 예우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윤 의사의 암장지를 관리한 것은 박인조 박현태 부자의 공이 컸다. …
우리는 암장지 가까이에 대한민국정부가 윤의사 순국 60주년을 맞아 세운 <윤봉길의사순국기념비> 앞으로 가서 경건되이 묵념을 올린 후 다음 답사지인 누가타니(額谷)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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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9 December at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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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9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다.] 
<시민모임 독립>의 박덕진 대표는 내년 9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과 관련 내게 두 가지 사항을 알려주었다. 하나는 <소환, 1923년 9월 간토>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2천만원 목표의 ’카카오 같이 가기‘ 모금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12월 26일까지 계속될 이 모금운동은 현재까지 목표액의 약 60%를 달성했단다. 둘째는 오래 전부터 진행한다고 알려진 국회의 관련 입법 진행상황이었다. 
먼저 ‘간토조선인 학살’ 문제를 알아보자. 1923년 9월 1일(토) 정오에 일본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일대에 진도 7의 지진이 발생, 10만여명이 희생되었고 도쿄시의 44%가 소실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있다’, ‘조선인이 부녀자를 강간하고 있다’는 등 사회불안을 조성, 전가시키려는 내용이었다. 이는 엄청난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전가일 뿐아니라 희생양 찾기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이날부터 며칠 동안 여러 곳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유구인에 대한 사냥이 계속되었고, 일본 국내의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체포도 이뤄졌다. 박열(朴烈)과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의 ‘대역사건’도 이 때 만들어졌다.   
지진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때맞춰 내무성 주도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내무대신 미즈노(水野鍊太浪)는 3.1운동 직후 조선의 정무총감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일본 정부 각료로 영전해 왔던 인물로 이 때 그가 조선인 사냥의 주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계엄령을 발동한 후 ‘조선인 사냥’에 동원된 기관은 일본 군대와 경찰, 민간단체의 탈을 쓴 자경단(自警團)이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이 ‘유언비어’임을 알고 있었지만, 군대와 경찰 등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경찰의 지휘 하에 움직인 자경단의 조선인 사냥을 방조했던 것이다. 
조선인 학살 사건이 터지자 일본에서는 계엄령으로, 조선에서는 언론 통제로 그 실상을 미봉했다. 그러나 설립(1919)된 지 얼마 안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성명을 통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한편 재일거류민을 통해 이 학살의 진상을 조사토록 했다. 상해에서 발간되는 『독립신문』에는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이 발표되었다. 학살자수가 1만 5천명이나 되었다는 보도도 있었고, 여러 목격자들의 의견을 종함하여 2만여명이 되었을 것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뒷날 재일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당시 『독립신문』에 발표된 6,661명설이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고, 현재 학계에서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당시 조선인이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하는 것은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 몇년 전 번역 출간된, 일본작가 가토 나오키(加藤直樹)가 펴낸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2015, 갈무리)에는, 조선인 학살 당시의 증언들을 옮겨 놓은 많은 사례들을 소개했다. 다음 기사도 있다.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명령을 내린 경시청이었지만, 2일 밤과 다음날인 3일에 이르러서는 조선인 폭동이 과연 실재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유언비어를 뒷받침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어었다.(54쪽)” “아마도 3일 점심때였어. 아라카와 강의 요쓰기바시 하류에 자경단들이 줄에 묶인 조선인 몇명을 끌고 와서 죽였지, 정말 잔인했어. 일본도로 자르거나 죽창이나 쇠막대기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어. 여자, 그 중에는 배부른 사람도 있었지만 다 죽였어. 내가 본 것만 30명 정도 죽였어.(67-68쪽)”
간토 조선인 대학살이 일어난 지 99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그 자세한 내막을 발표한 적이 없다. 당시 희생된 조선인은 대부분 생계형 노동자들로서 고향에서도 그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상황에서 그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이 사건은 묻혀버린 듯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많은 일본인들이 학살지역을 중심으로 위령제를 지내는가 하면, 2003년에는 일본 변호사연합회에서 당시 고이즈미 총리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건의한 적도 있고, 2006년부터는 일본의 중앙방재협회의 공식보고서에서 이 문제를 취급하게 되었다.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조선인들을 기억하며 일본의 시민단체 차원의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정작 자국민의 이 제노사이드에 대해 그 내용을 밝혀야 할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만 2014년부터 국회에서 그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입법을 추진하려고 했을 뿐이다. 19대 국회에서 유기홍의원 등 103인이 2014년 4월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한 적이 있으나 국회의 회기만료에 따라 자동 폐기되고 말았고 이명수 의원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두 차례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내년에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는다. 그 동안 각계에서 이 문제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했다. 작년과 올해 8월 한달동안 ‘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한 적이 있고, 시민단체들은 ‘간토 조선인 학살 100주기 추모사업 추진위를 발족’시키는 한편 국회를 통해서는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키로 했다. 국회에서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기자회견도 하고 공동발의를 위해 참여의원수를 확대, 100명의 공동발의자를 확보코자 하나 아직 60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곧 100주년이 되는데, 아직도 “간토조선인대학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하나도 제정하지 못한 채 잠을 자고 있으니 국회의원들이 과연 역사의식이 있는지 답답하다. 우리가 이 법의 제정을 기대하는 것은 법적인 근거를 확실히 마련하지 않으면, 국제간의 문제로 되어 있는 진상규명에 힘을 받고 진상규명을 통해 화해와 명예회복으로 나아가는 길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시는 독자들께 당부한다. 자기 지역구의 국회의원들이 이 법안의 공동발의에 참여했는지를 확인해 주시고, 의원들을 격려하여 이 법안이 속히 제정되도록 전화 한통화라도 넣어 주시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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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12 Ju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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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간토대학살(關東大虐殺) 100주년을 준비하는 모임 결성] 내년 9월 1일이 되면 '간토학살 100주기'를 맞는다. 100주년에 대비하여 오늘 오전 11시 한국프레스센터19층 기자회견장에서 <간토학살 100주기 도사업추진위원회 발족식>이 있었다., 다음 글은 발족식에서 행한 본인의 개회사와 오늘 대회에서 채택한 발족선언문이다. 
[개회사] 
내년(2023)이 되면 간토학살 100주년이 된다. 1923년 9월 칸토 대지진 때에 자행된 조선인 학살은 아직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늘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려고 하는 것은 조선인대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여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 원혼들을 위로하는 한편 그 진실을 바탕으로 가해자들에 대해서도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 하자는 것이다.    
1923년 9월 1일 토요일 11시 58분,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간토 일대에 진도 7의 대규모 지진이 발생, 9월 3일 아침까지 화재가 계속되었다. 이 지진으로 도쿄와 그 주변 가옥 45만채가 파괴되었고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10만 5천여명을 냈다. 지진으로 극도의 혼란이 일어나자,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이를 기화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있다’, ‘조선인이 부녀자를 강간하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와 함께 조선인 학살이 무법적으로 행해졌고, 요건도 갖추지 않은 채 발포된 계엄령은 조선인 학살의 불법성을 덮어버렸다.  
유언비어의 확산과 함께 불붙은 조선인 학살은 경찰과 군대, 그리고 민간인으로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자행되었다. 일본의 관민이 합세하여 조선인 학살에 나선 것이다. 조선인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일본어의 발음을 이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어의 ‘라行(ラ行)’을 제대로 발음해 보라거나 일본어의 독특한 탁음 발음, 가령 ‘15엔 55센’(쥬고엔고쥬고엔)을 발음토록 하여 발음이 시원치 않으면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자 상해 임정에서는 그 진상을 조사했다. ‘재일본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도움으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임정이 간행하는 독립신문에는 조선인 학살자수를 6천여명에서 1만3천명, 많게는 2만 1천 600명까지 보도했다. 맨 뒤의 수치는 당시 연구차 일본에 체재했던 독일미술사학자 부르크하르트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 중 6,661명 피살설이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연구에 의한 것으로, 당시 간토지방에 거주했던 조선인 수가 2만여명이었는데 그 중 일본관헌에 의해 강제수감된 숫자가 1만 1천여명, 이를 제외한 9천여명 중 상당수가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고 6,661명설을 지지한 것이다. 북한은 아직도 2만 3천여명 학살설을 고수하고 있다.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일본 당국과 국민의 진솔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당시 조선인학살을 주도한 것은 경찰과 군대, 자경단이었는데 이는 일본의 군경민이 조선인 학살의 주범이었다는 뜻이다. 때문에 일본 정부와 국민은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 진실의 바탕 위에서라야만 명예회복과 화해․용서가 가능하게 된다.  
일본 못지 않게 남북한 정부와 시민사회도 이 제노사이드를 100년이나 묵힌 데 대한 통열한 반성이 필요하다. 학살 당시 임정에서 그 진상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것은 당연했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그 진상보도를 위해 노력했으나 1923년 9월 1일에서 11일까지 간토조선인학살 관련 게재금지 602건에 차압조치 18건을 당했다. 그러나 해방 후 남북한 정부와 시민사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지가 거의 없었다. 그 동안 국회가 2014년부터, 오늘 이자리에 참석하신 유기홍 의원의 발의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정하려 했으나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도 재일조선인 및 일본의 시민단체와 연결,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아베 이후 더욱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은 종전까지 시행하던 추도식마저 형해화시키고 있다.  
만시지탄이 없진 않지만 간토대학살 100주년을 맞아 우리 시민사회가, 세계사에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앞서 자행된 이민족 대량학살 제노사이드 Genocide를 그냥 넘길 수 없어, <간토대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자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다. 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것은 먼저 학살의 진실을 파악하여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 원혼들을 안돈시키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한편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용서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이런 끔찍한 학살사건을 외면한 채 한일 양국이 서로를 용납․포용하고 화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수치스런 유산을 후세에 물려주어 그들의 짐이 되게 해서도 안된다. 양국의 당국자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도록 격려하고, 시민단체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상호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적극 노력하여 한일간에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개회사에 가름한다.
[간토학살100주기추도사업추진위원회 발족 선언문]
우리는 오늘 1923년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추도 활동을 계승하기 위해 한국 시민사회의 뜻을 모아 간토학살100주기추도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최근 아베 전 총리의 사망으로 충격에 빠진 일본 사회에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하지만 그가 간토대학살의 국가책임을 줄곧 부인해 왔으며, 나아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고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주도해 왔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베 전 총리가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해 수출규제로 한일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갔으며, 조선학교에 대한 법적 제도적 차별을 주도하고, 재일동포들의 지방참정권을 제약해 왔으며, 일본 사회에서 혐한의 분위기를 조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아베 전 총리의 뜻을 계승한다며 헌법 9조의 개악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에 심각하게 우려한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묻어두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 학살이 일어나고 100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가 왜 진실을 은폐하고, 증거를 인멸해 왔으며, 역사를 부정하려 하는지,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80년이 되어가도록 진실규명을 미룬 채, 학살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단 한 줄의 추도사조차 보내지 않은 한국 정부의 무책임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을 대신해 준엄하게 따져 묻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이제라도 일본 정부가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의 책무를 다하기를 촉구한다. 1923년 조선의 노동자들과 유학생들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학살을 당했는지, 희생자들의 유해는 어디에 있는지, 학살피해자들과 관련된 모든 조사자료를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특히 1923년 제국의회에서 당시 총리였던 야마모토 곤노효우에(山本権兵衛)가 ‘지금 조사 중이다’라고 언급한 조사자료도 숨김없이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2003년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이미 일본 정부에 ‘국가책임 인정’, ‘피해자들과 유족에 대한 배보상’, ‘재발방지를 위해 조치할 것’을 권고한 사실이 있다. 이제라도 일본 정부는 간토대학살에 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이에 따르는 진정성 있는 사죄와 역사청산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 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온갖 종류의 혐한 선동을 당장 멈추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한국 정부 역시 간토대학살에 대한 국가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반성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학살피해자들을 제대로 추모하고,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린 유족들을 찾아 위로해야 한다. 또한, 흩어진 피해자의 유해를 고향으로 모시고, 억울한 누명으로 돌아가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재일동포를 향한 혐오와 배제와 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가 책임 있는 조치를 마련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간토학살 100주기를 맞아 <간토대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의 국회 입법을 비롯하여 학살피해자를 제대로 추모하고 역사적 기억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한 사업을 벌여 나갈 것이다. 우리는 간토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남북과 재일동포는 물론 중국, 일본의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일본의 국가폭력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물을 것이며 이를 위해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세계 시민과 연대해 나갈 것이다. 더는 늦출 수 없는 간토학살의 진상규명은 식민주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실현이라는 오늘의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미 있는 발걸음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2022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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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23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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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2 제1549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주간보고]: 역사적 진실이 다시 정치적 협상 테이블 위에 올랐다. 
출범 전부터 역사문제와 안보문제를 묶어 위에서 한꺼번에 해결한다는 ‘그랜드 바겐,’ ‘포괄적 해결,’ ‘톱다운 방식’을 공언했던 윤석열 정부는 피해자 중심의 원칙을 저버렸던 ‘2015 한일합의’를 복권시키고, 한미일 안보동맹을 빌미로 또 다른 정치적 합의를 시도하고 있다. 정상회담을 하려면 ‘과거사 해법’부터 가져오라고 윽박지르는 일본 정부에 떠밀려 외교부와 주일대사, 피해자간 형식적 만남이 명분을 만드는 사이, 한국 정부와 기업이 가해자 일본 정부와 기업을 대신해 대위변제 해주는 안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형식적 과정을 떠맡을 ‘민관협력기구’ 출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의 소녀상 철거 압력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4월 28일 독일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기시다 총리는 숄츠 총리에게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청했다. 그리고 당일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대표는 6월 23일부터 베를린 소녀상 철거 요청을 위해 다른 3명과 함께 독일에 가기로 했다고 공언했다. 지난 1월 발족한 ‘위안부사기청산연대’의 핵심 인물들이며, 수요시위 방해집회를 지속해 온 이들은 ‘위안부는 사기,’ ‘성노예는 없다,’ ‘소녀상 철거’ 등을 주장하며 일본 극우 역사부정론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세등등하게 모금활동을 펼치다 독일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홀로코스트 피해국 시민들이 스스로 ‘네오 나치’로 정체화하고 가해자들과 결탁해 홀로코스트 기념비 철거를 위해 행동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참담한 상황을 만든 결정적 계기는 ‘2015 한일합의’였다. 
우리 모두가 똑똑히 기억하듯, 2015년 12월 28일, 한일외교부 장관 기자회견에서 기습적으로 발표된 ‘2015 한일합의’는 일본 정부의 애매모호한 유감표명, 법적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 10억 엔, 화해치유재단 설립을 대가로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 협조, 국제사회에서 비난·비방 자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한국 정부가 약속해 준 정치적 합의였다. 비공개를 전제로 “피해자 관련 단체 설득, 제3국 기림비 문제, ‘성노예’ 용어”에 관한 이면합의까지 담겨있는 굴욕적 합의였다. 
이로써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일본 정부는 각의결정을 통해 역사교과서 왜곡을 자행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 한일합의로 해결되었다,’ ‘한국 정부가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 ‘성노예는 없다,’ ‘소녀상은 철거되어야 한다’는 등 어깃장을 놓으며 뻔뻔스러운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지난 한국 정부는 법원의 선제적 판결조차 이행하지 못하며 전전긍긍 수세적 대응에 머물다 세월을 보냈고, ‘2015 한일합의’로 역사에 되돌릴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정권의 후계자는 ‘합의 정신 계승’ 운운하며 물밑 협상을 지속하고 있다. 
정확한 역사 인식은커녕 선후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일본정부의 눈치만 보면서 ‘만남과 관계개선’을 애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써 노력하는 태도로 일본정부의 비위를 맞추며 이미 판명 난 오류를 다시 반복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해결은커녕 또 다른 문제만 야기해 온 바로 그 길로 되돌아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적 진실은 억지로 가린다고 해서 가려지지도, 외교적 협상으로 다른 명분과 맞바꿔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일시적으로 가려진 해는 곧 다시 환하게 우리의 뒤를 비추며 얼굴을 드러낼 것이고, 맞바꿔진 진짜는 다시 우리 앞에 결연히 서 있을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다음 사람이, 우리 세대가 아니어도 그 다음 세대가 반드시 그리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구한다.
하나. 윤석열 정부는 ‘2015 한일합의부터 시작하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합의 전 과정과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라. 
하나. 윤석열 정부는 굴욕적 협상 중단하고 자주독립 국가 대한민국 위상에 걸맞은 당당한 자세로 대일협상에 나서라. 
하나. 일본 정부는 식민지 불법강점과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진정어린 사죄와 법적 배상을 당장 이행하라.
2022년 6월 22일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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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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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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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9: 무인기 사건은 우리에게 안보의 경각심을 환기시켜 주었다. 

이린 일을 당하고도 안보의 심각성을 느끼지 않을 국민은 없다. 그런데 NSC조차 적시에 소집하지 않은 불감증의 병역미필 인사가 전쟁도 불사한다는 식의 선동적 언사를 열창하고 있다. 자기 집무실을 위해 국방부와 합참을 한 때 해체시키다시피한 분이 할 소리는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중요한 안보는 평화다. 평화는 안보의 최종적인 목표요 민생이요 최대의 복지다. 분단국에서 평화는 국방이요 경제며, 상생과 통일의 길이다. 지도자가 전쟁을 ‘선동’할 때 어떤 위험이 올 것인지, 자신과 정부가 법인세를 대폭 삭감하면서까지 그렇게 도와 주려고 한 경제인들과 기업인들에게 먼저 물어보라.
아무개씨가 꿰고 있다는 구약성경에는 ‘칼을 쳐서 모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서라도 평화를 이룩하고자 갈구하는 귀절이 있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는 안전을 위한 귀절도 보인다. 그런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정부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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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27 Ju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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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7:휴전 협정 69주년, 한반도에는 아직도 종전과 평화가 없습니다.]  

오늘이 ‘6.25’로 촉발된 한국 전쟁이 휴전된 지 69주년이다.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 냉전과 적대의식이 점증하고 있다. 싸움이 그쳐졌다고 해서 평화가 온 것은 아니다. 휴전이라는 ‘전쟁’ 속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기에 이제 통일은 언감생심 생각지 못하겠고 정(휴)전이 ‘종전’으로 변화되는 것이라도 보고 싶다. 
초등학교 6학년 때, 38선에서 ‘사변’이 터졌다고 했으나 남쪽에 있었던 나는 그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름 방학이 되어갈 무렵, 학교 옆 기차역에서 무기와 흑인 병사들을 보게 되면서 비로소 전쟁이 우리 근처에까지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지 한달 남짓 지난 후 우리 고장이 바로 전투지역이 되었다. 방호산이 거느린 북한군 6사단이 마산을 대척점에 두고 유엔군과 지구전에 나서게 되었고 마산 방어선을 뚫지 못한 채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북한군이 점령한 일선 지역에서 몇 달을 지냈다. 전쟁과 함께 아버지를 여의었고 종형 자형 등 몇 분이  전쟁 통에 사라졌다. 
중학교에 진학하러 마산으로 가서 휴전회담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중3 학년 초 어느날 학교에서는 확성기로 소련 수상 스탈린(1878-1953. 3.5)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날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나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좋아들했다. 그 때까지도 학교는 육군병원으로 징발된 채 계속 부상병을 받았다. 어느날 새벽 숙모님과 함께 새벽기도회에 가다가 총소리가 요란했던 것을 기억한다. 뒤에 알고 보니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서명한 휴전협정에 서명당사자로 유엔군 총사령관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그리고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은 들어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빠졌다. 이승만이 휴전을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다. 총 63개항으로 된 휴전협정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정전의 구체적인 조치, 군사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원회,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등이 규정되어 있고 끝부분(제 4조 60항)에 <쌍방 관계정부들에 대한 건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삼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이 건의와 관련하여 제네바 회담이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0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다. 주제는 첫째 한국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료하는 것과 둘째 베트남 분단 협약에 관한 것이었다. 이 때 한국의 외무부 장관 변영태가 대표로 참석하여 14개 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종료에 관한 첫째 주제는 이 회담에 참석한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에 의해 거부된 채 논의조차 할 수 없었고, 둘째 주제만 논의되었다. 이 때 미국이 왜 거부했을까 하는 문제는 그 뒤에 한반도에서 전개된 상황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추측을 가능케 하고 있다. 
지난 주 토요일(7월 23일) 임진각에서는 정전협정체결 69주년을 앞두고 수백명이 모여 한반도의 종전 평화 캠페인을 벌였다. 국내외에서 참석한 평화통일꾼들이 뙤약볕을 무릅쓰고 한반도의 종전 평화를 위해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 결의문의 일절이다. 
“한반도에 불신과 적대의 기운이 가득합니다.…유례없이 긴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70년이 다 되어가도록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해 오랜 시간 대립과 긴장, 고통과  불안의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헤어진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이곳 한반도와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우리는 오늘 임진각 평화행동을 시작으로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한국 전쟁을 끝내고 세계를 좀 더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전 세계 시민들과 함께 평화행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길이고 평화가 답이라고 더 크게 이야기하고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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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5 Ju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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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4.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 정부는 물론 언론이나 심지어 시민 사회도 이 날을 너무 무덤덤하게 보내고 있다. 이게 최근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해서 그럴 것이다. 안타깝고 속상한다.  
‘7.4공동성명’은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을 겪은 후, 남북의 정부가 공동으로 서로를 인정하면서 나온 첫 작품이다. 분단이래 민족적 과제라 할 통일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남북이 최초로 합의하여 발표한 공식적인 문건이다. 이 일이 있게 된 배경은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로 국교가 트일 무렵이어서 국제환경에 영향받은 바 없지 않지만, 그 동안 남북이 서로를 향해 허수아비(괴뢰)라고 지목하던 비난을 지양한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정부가 ‘괴뢰’가 아니라 남북을 관리하는 실질적인 정권임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서로가 주고 받은 문건이다.  
이날 발표된 선언에는 7개항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로 표현되는 통일의 3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자주의 원칙으로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 평화의 원칙으로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햐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들은 그 뒤 남북관계를 거론할 때마다 상기시키고 되풀이되어 온 것이다. 이 원칙이 바탕이 되어 그 뒤 남북관계 합의가 도출되었다. ‘남북기본합의서’(1991)를 비롯하여, ‘6.15 남북공동성명’(2000), ‘10.4남북정상선언’(2007), ‘판문점선언’(2018), ‘평양공동선언’(2018)등은 ‘7.4공동성명’이 뿌리가 되어 나타난 열매들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서 지금까지 유지시켜온 남북사이의 이같은 통일원칙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국민들은 궁금해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선제타격론’을 들먹이고,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취해온 북방정책의 기조와는 거리가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도 지난 번 박진 외교부장관이 방미해서 내 놓은 성명이나, 이번에 윤 대통령이 마드리드 방문 후 한미일 3국이 내 놓은 것도 흘러간 옛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구태뿐이다. 이런 구태를 굳이 미국이나 마드리드에 가서 새삼 강조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할 필요가 있었을까.    
1972년 7월 4일, 7.4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 날 오후 나는 신촌에서 둘째를 해산하기 위한 아내의 입원수속을 끝내고 그 근처 처형이 경영하는 약국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서울 상공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그런 때에 신문호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호외에는 ‘남북공동성명’이란 문자가 ‘대문짝만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남측 대표였던 이후락의 얼굴도 보였다. 그 때의 놀람과 가슴벅찬 환희는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심훈이 <그 날이 오면>에서 표현한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삶에서 다시는 그런 환희의 순간을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해방을 맞던 때 어린 나이에 고향 신사마당에서 맞았던 시골 어르신들의 그 기쁨도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뛰놀 듯한 그 환희는 사라졌다. 언제 다시 그런 가슴벅찬 민족적인 환희를 내 생애에 맛보기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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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22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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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1,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지원검토 중단>을 촉구하는 한국종교시민단체의 기자회견문]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반대한다!
즉각적인 휴전과 인도적 지원을 위해 노력하라!

한국 정부가 윤석열 대통령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정상회의(6/29~6/30) 참여를 앞두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지원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지난 6월 11일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한국에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완곡하게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해 온 캐나다에 낮은 가격으로 포탄을 수출하는 등 우회적인 무기 지원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는 한국과 더불어 일본, 호주, 뉴질랜드, 스웨덴, 핀란드, 우크라이나 등 나토 비회원국이 참여할 예정이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등이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장기화되고, 동부 지역에서는 전투가 멈추지 않고 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러시아의 폭격으로 도시와 삶의 터전이 파괴되었다. 러시아군의 전쟁 범죄 증거들도 밝혀지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비인도적인 무기인 확산탄(Cluster Bomb)을 사용한 정황도 포착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피해는 늘어나고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도 커진다. 그리고 이는 다시 적대감으로 이어져 전쟁을 키울 뿐이다. 무기 지원과 같은 군사적 해법으로는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 하루빨리 휴전에 합의하고 평화협상을 재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은 휴전과 평화협상을 위한 중재보다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에 힘써왔다.
무기 지원은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이지만, 우리는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전쟁 등 21세기 우리가 목도한 모든 전쟁에서 완벽한 승자는 없었고 죽음과 고통, 폭력의 악순환이 남았다. 더 많은 국가의 더 많은 군사적 개입은 전쟁을 격화하거나 확대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남길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고 무기 사용이 늘어날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방산업체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즉각 전투를 중단하고 휴전에 합의하여, 진정성 있게 평화협상에 임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검토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지원 무기가 구체적으로 특정되지는 않았지만, 국군이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대외무역법, 전략물자수출입고시 등 국내법상 방위사업청장의 허가가 필요하다. 허가의 핵심적 기준은 “해당 물품 등이 평화적 목적에 사용되는 경우”로만 제한된다. 현재 교전 중인 국가 일방에 대한 무기 지원은 해당 무기가 곧바로 살상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명백하기에 “평화적 목적”이라는 허가 기준에 전혀 부합할 수 없다. 캐나다 등을 통한 우회 지원 역시 사실상 전략물자 수출입을 통제하는 국내법을 무력화하는 매우 나쁜 선례만을 남길 뿐이다.
살상 무기 지원이 아니더라도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많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휴전에 합의하고 러시아군이 병력을 철수하며 평화협상을 통해 양국의 안전 보장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중재를 위한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더불어 전쟁 피해자와 난민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을 확대하고, 평화적인 재건을 위한 노력도 함께 해야 한다.
이에 우리 한국 정부에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우크라이나 살상 무기 지원 검토를 중단하라!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 아니라 인도적 지원 확대를 위해 노력하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즉각적인 휴전과 평화협상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하라!
2022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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