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기억을 보는 시선 — 서설적 성찰과 제국의 기억들
장인성
일본비평 2호
편집자의 말
장인성 _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일본정치사상)
제국의 기억을 보는 시선
— 서설적 성찰과 제국의 기억들
편집자의 말 _ 제국의 기억을 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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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기억의 출현과 제국–식민지
냉전 종식은 한때 미국에서는 ‘역사의 종언’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동아시아에서
는 ‘역사의 시작’을 의미했다. 일본의 전후체제를 규정한 냉전체제에서 망각되어
있던 ‘역사’—제국/식민지와 태평양전쟁의 역사—가 공공 기억의 장으로 소환
되었던 것이다. 냉전의 언설공간에서 제국 경험은 냉전체제의 주도 세력에 의해 망
각되어 있었고, 개인의 체험과 기억은 공적 영역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다. 민족/국
가를 지향하는 감성을 간직한 ‘제국’ 표상에 대한 기억은 이념 지형에 따라 갈려 있
다. 진보는 제국주의와 침략을 상징하는 제국에 대한 기억을 부정하였다. 보수는 제
국의 기억을 은밀히 유통시키면서 보수파들의 ‘망언’에서 보듯이 간헐적으로 제국
을 정당화하곤 했다. 냉전이 끝난 뒤 상황은 바뀌었다. 진보에 압도당해 있던 보수
는 국민과 민족을 강조하는 언어와 감정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냈고 국가 표상을 내
걸고 ‘역사’의 재구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쟁
책임 논쟁은 제국의 기억을 논의하는 언설 공간을 만들어 냈다.
제국의 기억은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보는 관점뿐 아니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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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제국이 식민지 조선과 대만, 만주국, 중국, ‘대동아’에 연루된 양상을 보는 시선까
지를 포함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일본제국-조선식민지 공간을 포착하는 시선이 문
제가 된다. 냉전체제 하의 일본 지식계에서는 ‘제국/식민지’ 구도에 기초한 이원론
적 지배/피지배 의식이 제국 기억을 구속하였다. 냉전체제는 문서상으로 식민지지
배 청산을 허용하였고 제국에 관한 기억을 봉쇄하였다. ‘제국/식민지’ 틀에서 진보
는 제국을 부정하였고, 보수는 식민지 지배를 근대화를 가져다 준 제국의 ‘시혜’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여전하다. 다만 냉전 종식과 더불어 제국을 하나의 세계 혹
은 생활공간으로 놓고 제국과 식민지의 비대칭적 상호작용을 상정하는 ‘제국=식민
지’ 틀도 부상하고 있었다.
‘진보-보수’ 이념구도와 ‘제국-식민지’ 인식틀은 탈냉전기 일본에서 제국 기
억을 규정하는 두 인식론적 좌표축을 구성한다. 전쟁책임의 소재와 사죄의 방식을
둘러싼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논쟁은 두 좌표축에
서 제국일본과 전후일본을 어떻게 기억/망각할지를 따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
다. 흔히 진보 지식인들은 제국을 망각하길 바라면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전후체제를 영원히 기억의 창고에 남겨 두고자 한다. 보수 지식인들은 전후의 민주
주의체제=평화헌법체제를 미국에 의해 타율적으로 강요된 허구로 규정하면서 망
각의 강으로 흘려 보내고 제국을 기억해 내고자 한다. 제국일본과 전후일본에 관한
기억은 전후체제의 진보주의 해석에 대한 보수파들의 반격에서 비롯된 전쟁책임
론이라는 언설 투쟁을 통해 쟁점화되었다.
이 두 좌표축이 활성화한 것은 탈냉전과 지구화로 일본 국내에 위협과 불안감
이 유포되고, 동아시아 경제발전으로 역내의 불균형이 현저하게 완화되면서 일본
의 역내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맥락과 관련된다. 기억은 불균형 관계에서는
객관화되기가 어렵다. 국제체제 수준의 불안감이 증대되고 동아시아 역내의 상대
적 균형과 상호 인정성이 높아지면서 역사 문제, 즉 기억의 문제가 부상했다. 가해
자(일본)와 피해자(아시아) 사이에 균형과 소통의 가능성이 열렸을 때, 기억의 국제
정치와 기억의 국내정치가 착종하면서 제국의 기억은 문제화=공식화될 수 있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서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 발생은
어쩌면 이를 매개하기 위한 필연적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제국 기억의 출현, 가해
자-피해자 구도의 부상, 전쟁책임과 사죄방식의 쟁점화는 상관되어 있었다. 기억
과 망각, 가해와 피해, 책임과 무책임 등의 이항 언어들이 언설공간을 구성했다.
한편 탈냉전의 맥락과 가해책임의 쟁점화는 개인과 시민의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체제에서 방치되어 있었던, 비정치적 영역에서 영위된 개인의
일상적 삶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종군위안부, 전시 노무자와 같은 개인이 피
해의 주체로서 부상하였다. 총력전체제에서 제국에 동화된 식민지인의 사상과 행
동, 재조(在朝) 일본인들의 일상도 말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제국-식민지에서의 사
상연쇄, 혹은 ‘학지(学知)’ 유통을 탐구하는 시선도 확산되고 있다. 개인과 일상의
층위에서 제국의 기억이 재구성되면서 ‘제국/식민지=지배/피지배’ 틀도 독점적 지
위를 잃기 시작했다. 제국이 식민지를 일방적으로 규율하는 제국-식민지 상에서
벗어나 비록 비대칭적이지만 제국도 식민지를 의식하는 모습까지 조명할 여지를
제공하는 ‘제국=식민지’ 틀이 상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세계를 살았던 일상의
기억들이 복원될 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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