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3

홍승표의 태극기와 한국교회 < 연재 < 뉴스앤조이 [1][1-8]

홍승표의 태극기와 한국교회 < 연재 < 기사목록 - 뉴스앤조이

홍승표의 태극기와 한국교회 목록총 :1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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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개신교, 만남과 갈등의 역사…선교 초기부터 해방, 산업화·민주화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터뷰] 홍승표 목사, <뉴스앤조이>에 '태극기와 한국교회' 연재
기자명 강동석
승인 2020.01.28 17:27


매주 토요일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반정부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광장에는 태극기가 휘날린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몇 년 전부터 '태극기'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시위하는 극우 개신교 세력을 떠올리게 됐다. 사실 태극기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와 친밀했다. 태극기가 민족 상징으로 자리 잡는 데 개신교가 적지 않게 기여했다. 태극기와 한국교회는 시대마다 만남과 갈등을 겪으면서 관계를 형성했다.
<뉴스앤조이>는 태극기와 한국교회 사이에 있었던 만남과 갈등의 역사를 정리하는 연재를 진행하기로 했다. NCCK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연구원 홍승표 목사가 2월 둘째 주부터 격주 간격으로 '태극기와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한다. 개신교 선교 초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돌아볼 예정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인 홍승표 목사는 연세대 대학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친 역사 연구가다. 그는 한국교회사 관련 연구와 저술 활동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부설 한국기독교역사문화아카데미(채현석 원장) 연구원으로서 매년 '기독교 문화유산 해설사 양성 과정'을 진행한다. 기독교 문화유산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현장에서 직접 인솔하면서 해설한다.

한국교회사와 대중문화 콘텐츠를 연결하고 현장과 연구를 연결하는 데 관심이 많아, 2017년부터 팟빵에서 한국교회사 전문 팟캐스트 방송 '한국 기독교사 톺아보기'도 진행하고 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장으로도 일한 바 있다. 2018년 <뉴스앤조이>에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를 연재한 일본 선교사 홍이표 목사 동생이기도 하다.

여러 활동 가운데 홍승표 목사가 주력하는 일은 NCCK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이홍정 총무) 100년 발자취와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의 사료와 역사를 정리하는 사업이다. 그는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연구·생산하는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홍 목사는 태극기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오늘날 태극기 현상을 진단·대응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내비쳤다. 1월 23일 한국기독교회관 NCCK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이번 연재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NCCK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사무실에서 홍승표 목사를 인터뷰했다. 홍 목사는 2월 6일 첫 글을 시작으로, '태극기와 한국교회' 연재를 이어 갈 예정이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주력하는 일은 지난해부터 시작한 NCCK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연구원이다. 지난해부터 교회협 100주년을 맞는 2024년까지, 교회협 역사와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를 정리하는 연구 프로젝트다. 해방 전후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영인影印하면서 분야별 역사를 정리하고, 추후 기독교 사회운동사 역사자료실이나 기념관을 만드는 것까지 구상하고 있다.

연구 기초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라, 교파 간 연합 운동, 사회운동 역사 자료를 스캔해 하나로 묶어 일반에 보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연세대 국학자료실 협조로 해방 이전 창설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1918)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 회의록을 제공받아 자료로 펴냈다. 해방 이후 교회협 관련 회의록 및 보고 자료, 기독교 사회운동사 관련 영인 사료집을 단계적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 관련 주제로 출판된 단행본, 학술 논문, 학위논문 등 연구 현황을 정리한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 관련 문헌 해제>도 펴냈다. 이 자료를 통해 관심 있는 대중과 학자들이 과거부터 최근까지의 연구 동향을 이해하고, 수월하게 자료에 접근해 연구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기초 연구 자료를 쉽게 열람할 수 있게 수집·정리, 영인·보급하는 작업을 이어 갈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 교회 제도·체제, 신학·사상 등 한국교회 내부 역사는 연구와 관심이 이어져 왔다.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교회와 사회가 어떻게 상응하고 호흡했는지 다루는 교회 바깥 문제에 관한 연구는 가치와 중요성에 비해 미진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 기독교 사회운동의 중요한 사실들과 역사적 유산들이 새롭게 발굴되고 재조명되는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 '태극기와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뉴스앤조이>에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어떤 내용을 다룰 생각인가.

대학원 시절 교회가 국가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공부하면서 해방 후 국기배례, 태극기 문제가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라 생각했다. 한국은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시점과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춰 가는 시기가 겹친다. 십자가·비둘기·어린양·물고기·장미·백합 등 다양한 상징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기독교 전통에 따라, 한국교회는 민족 신앙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태극기를 적극 수용했다.

개신교는 '한국'이라는 새로운 선교 현장에 들어와 신앙 운동을 펼치면서, 태극기·무궁화 등 새로운 민족 정체성이 담긴 상징을 보급·확산했다. 새로운 이미지가 한국인을 상징하는 보편적 이미지로 각인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해방 이전에는 초기 선교사들부터 한국인 개종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태극기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저항했던 역사가 있다. 해방 이후에는 태극기를 향한 한국교회의 인식이 분화해, 분단과 좌우 분열을 겪으며 새롭게 해석 지평을 열어 갔다.

지금까지 역사학이나 교회사 분야에서 태극기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시기별로 개관하며 분석을 시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촛불 혁명 이후로 태극기 이미지가 특정 정치 세력의 전유물처럼 돼 버려서, 지금은 태극기에 대한 혐오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현재 벌어지는 표피적 현상만으로 태극기와 기독교 신앙의 긴밀한 결합을 혐오·비판하는 단편적 현상도 보게 된다.

역사 연구자로서 한발 물러나 긴 호흡으로 보면, 태극기와 기독교의 조우와 동거는 선교 초기부터 존재하던,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연재를 통해 선교 초기 태극기와 기독교가 만나고 친밀해지는 과정을 보면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시기별 역사적 콘텍스트가 상이하기에 태극기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저마다의 풍경을 입체적·차별적으로 온전히 바라보고 제대로 인식하는 안목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번 연재를 통해 오늘날 '태극기 부대'로 대변되는 사회현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태극기와 한국교회의 관계에 담긴 복합성을 살피면서 성숙하고 여유 있게 오늘의 현상을 진단하고 대응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홍승표 목사는 긴 호흡으로 태극기 현상을 진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한편, 경계하는 것은 연재로 소개되는 콘텐츠를 태극기 부대에서 자의적으로 악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초기 평양신학교 재학생들이 선교사들과 찍은 단체 사진을 보면, 한석진 목사가 태극기를 들고 있다. 선교 초기 개종한 한국인 민족 지도자들이 들고 있던 태극기의 역사적 무게감과 가치를 태극기 부대가 흔드는 태극기와 동일시하면서 성급하게 일반화하고 확대해석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초기 신앙 선배들의 태극기 사랑과 애민 애족 신앙이 당파성이나 정치적 구호에 오염된 편협한 인식의 볼모가 되도록 좌시해서는 안 된다. 연재를 통해 한국 기독교 신앙 선배들이 보여 준 태극기 신앙의 보편성과 개방성, 그 상징에 담긴 진보적 신앙과 예언자적 성격을 선명히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겸허히 수용하면서도, 이를 어떻게 현시대에 적용 가능한 시대정신으로 명쾌히 해석할 것인지 모색해야 한다. 선교 초기,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현대 산업화·민주화 과정 등에서 항상 존재해 왔던 태극기가 그때그때 어떤 역할을 했고,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수용해 왔는지 정밀하게 살펴보려 한다.

- 연재를 통해 기대하는 지점이 있다면.

이번 연재에서 다루는 주제에 대해 늘 관심은 있었지만, 생업에 쫓겨 제대로 연구를 심화하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격주마다 마감에 쫓기며 그동안 막연하게 구상하고 있던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조금씩 완성해 나갈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 글을 써 나갈 스스로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교차한다. 연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자료들을 어김없이 계속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연재 제안을 받고 추가로 자료를 훑어봤더니,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료와 사실들이 툭툭 튀어나오더라. 자료들을 심층적으로 읽어 나가다 보면,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분석과 사료 발굴이 보너스처럼 주어질 것 같다.

2012년 관련 주제로 <기독교사상>에 글을 쓴 적 있다. 그때는 선교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태극기와 한국교회'가 관계 맺어 온 과정을 글 한 편에 담았다. 함축적으로 개관하는 방식으로 썼다. 이번에는 시기별로나 주제별로나 세분화해서 다룰 것이다.

예전에는 망원경으로 전체를 조망했다면, 이제는 현미경으로 한 시기 한 시기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셈이다. 태극기와 한국교회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분석해 보며 나 자신에게도 많은 배움의 시간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극우적 집회 현장에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기, 심지어 일장기까지 나부끼는 몰역사적 행태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태극기의 홍역은 다른 의미로는 한국교회에 백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백신주사를 맞으면 잠깐 열이 오르지만, 극복하고 나면 더 강한 바이러스가 와도 견딜 수 있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지 않나.

어떤 역사적 연원이 있는지 관련성을 긴 호흡으로 보면서 성숙하게 현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한발 더 나아가, 세계 교회를 향해 활동 무대를 넓혀야 한다.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 교회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는 애민 애족 정신을 바탕으로 자긍심을 갖는 중요한 코드로 태극기를 내재화하고 수용해 왔다. 이제는 태극기를 사랑한 한국교회의 신앙 유산이 보편적 세계 교회로 나가는 방향으로 새롭게 재해석·재창출·재조명할 수 있는 촉매가 됐으면 좋겠다.

이번 연재가 위와 같은 성숙한 역사의식을 갖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바랄 게 없겠다. 더 보편적인 가치들, 인류 사회가 고민하고 끌어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의 보편적 지평으로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앞으로의 계획은.

연구하고 싶은 개인적 과제는 아나키즘과 기독교의 관계성이다. 한국교회사적으로 이를 탐색하고 싶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극복하는 대안 이데올로기로 아나키즘이 언급되기도 했는데, 한국교회사에서 아나키즘과 기독교가 실제로 어떤 교섭 과정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싶다.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의 이상과 비전에 담긴 대안적 가치를 아나키즘적으로 재조명해 봤으면 한다.

현재 홍이표 박사가 일본에서 일본 신도와 국가 상징으로 대표되는 국화 문양, 일장기, 욱일기 등의 상징체계가 동양사와 한국사, 한국교회사 속에서 어떻게 이입·수용되고 저항·갈등되었는지 연구하고 있다. 홍이표 박사와 협력해 동아시아 교회사 속에서 '국가 상징과 기독교'의 역사를 미시적으로 정리해 나가려는 계획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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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게양된 성 조지의 십자기
[태극기와 한국교회] 순전한 신앙과 제국주의 민낯이 교차하는 이중의 심벌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02.10 18:07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표ㅅ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깃발', 유치환의 첫 시집 <청마 시초>, 1939.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이다. 시인은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말했다. 깃발이 지닌 태생적 집단성과 동질감이 뭇사람의 심장을 뛰게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 깃발의 이상 너머에 드리운 호전성과 폭력, 공포에 몸서리쳐지는 이중 구조를 시인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언표한 것은 아닐까.


1930년대 말 시인이 보았음직한 그 깃발은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가 현실의 일상 속에서 맞닥뜨렸을 다수의 깃발은 일장기(혹은 욱일기, 만주 국기)였을 것이다. 다만 시인의 내면에서 나부꼈을 그만의 깃발은 - 누구도 알 수 없지만 - 일장기는 분명 아니었으리라. 저 시에 언급된 깃발의 정체를 유추하는 일은 독자 저마다의 몫이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태극기'로 상정했을 때라야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애수" 등의 시어들에 공감하며 안도하게 된다. 저 깃발을 일장기로 치환하는 순간, 유치환의 시는 현제명의 '희망의 나라로'(1931)가 일제 만주 침략을 찬양한 곡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역겨운 친일 어용문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국가와 민족의 상징체계들은 오랜 역사와 부침, 갈등과 동의 과정을 거치며 수용되고 자리매김해 왔다. 그 역사의 노정을 면밀히 살펴보는 일은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나부끼는 깃발들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 될 것이다.
맨 처음 공중에 달린 깃발



시인은 묻는다. "맨 처음 공중에 깃발을 달 줄 안 그"가 누구인지. 아마도 깃발의 첫 게양자는 사냥꾼 혹은 군인이었을 것 같다.


"사냥을 할 때나, 적과 싸우게 되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표적과 신호가 많이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다수의 군중이 떼를 지어 오고 갈 때에 대오가 필요하게 되고, 대오를 편성하자면 각자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 표준과 가치가 필요하게 됨은 물론이요, 이 대오를 지휘하는 지휘자의 표지나 군호를 위하여서도 기와 같은 성질의 것이 꼭 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국기에 앞서 군기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손도심, <세계의 국기>, 개조출판사, 1967, 34-35.)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깃발은 전쟁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착안되고,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부족과 지역공동체, 더 나아가 제국과 근대 민족국가 수립 과정에서 배타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깃발의 정체성과 성격은 구약성서에도 수차례 확인된다. 주로 큰 단위의 무리(군대)를 나타내는 깃발인 '데겔'(민 1:52; 2:2)과 작은 단위의 무리(종족, 가족)을 나타내는 기호인 '오트'(민 2:2; 시 74:4), '높다', '눈에 띄다'는 뜻의 '나사스'에서 유래한 '네스'(출 17:15 ; 시 60:4 ; 사 11:12)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귀스타브 도레의 성화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 깃발은 전쟁 수행의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구약성서에서도 깃발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도구(출 17:16 ; 민 2장, 사 5:26; 13:2, 18:3, 30:17 ; 렘 4:21, 50:2, 51:12, 27 등)로 등장한다. 주로 병력의 집결과 통제, 적군에 대한 선전포고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한편으로는 전쟁과 재난으로부터 사람들이 대피하도록 안내는 구원과 회복의 상징(사 11:10 ; 시 60:4 ; 렘 4:6 등)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전쟁과 관련 없이 사용된 사례도 있다. 아가서는 사랑의 성취와 경사를 알리는 상징으로 깃발(아가 2:4)을 언급하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깃발'에 대한 언급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다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진리와 구원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의 목표점을 '푯대'(σκοπόν, '주시하다'라는 뜻의 σκέπτομαι에서 유래)라고 언급하고 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3-14, 개역개정)."

이처럼 성서에서 깃발은 실제적인 전쟁 수행과 긴급 상황에 대한 신호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사랑과 진리라는 관념적·추상적 가치를 담아내는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깃발의 성격과 기능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전쟁 수행과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호전성과 배타성이 수반되는 동시에 애민·애족·애국뿐 아니라, 초월적 인류애의 가치와 진리 추구라는 보편성을 동시에 담지한 이중성이 '깃발'이라는 표상에 서려 있다.
황해도 소래교회에 내걸린
성 조지 십자기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깃발은 최초의 자생적 민중 교회인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의 옛 사진에서 확인된다. 소래교회는 만주의 초기 개종자 서상륜이 1885년 3월 동생 서경조가 사는 황해도 장연 소래松川에서 전도해 세운 우리 민족의 첫 자생적 토착 교회이다. 소박한 한옥 예배당과 사래 긴 밭, 사립문 언저리에 앉고 서 있는 얼굴을 알 수 없는 두 인물이 130여 년 전 초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묵묵히 증명해 보여 준다.


한국교회의 원형적 이미지인 이 교회당에는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첨탑이 없다. 대신 낯선 깃발의 게양이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하늘을 찌를 듯 장대에 걸려 나부끼는 깃발은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십자 문양이었다. '성 조지의 십자가'(St. George’s cross). 이 낯선 깃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이를 통한 구원, 진리의 궁극적 승리를 표현하는 기독교의 상징이었고, 이 땅에서 선포된 새로운 복음의 시그널이었다.

성 조지 십자기가 하늘 높이 게양된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1895년경).


소래교회에 성 조지의 십자가 깃발이 내걸리던 시기는 한반도에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워진 때였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 세력의 힘이 약화되고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과시하던 시기, '척왜양이'斥倭洋夷의 기치를 높이 세운 한국 민중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봉기했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청국의 한반도 출병에 일본도 침입하여, 결국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1894)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의 민중은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고 전쟁 공포에 쫓겨 피난처를 찾아 길을 나서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숱한 민중은 강제로 전투에 투입되거나 병참 지원에 동원되어 죽거나 다쳤다. 여성과 노인, 아동들은 굶주림과 질병, 강간과 죽임의 공포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이렇게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동학도들에 대한 색출이 극심하던 상황에서 도피 중이던 동학도들은 선교사의 거처나 교회에 몸을 숨기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를 향해 몰려들었다. 마펫 선교사의 편지 내용이다.


"전투는 9월 15일에 벌어졌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불쌍한 한국인들은 놀랐고 그 중 반은 죽거나 도망쳤다. 평양에 남아 있던 교인들 대부분은 예배당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S. A. Moffett’s letter to Dr. Ellinwood, Nov. 1, 1894 중에서)


평양에 진주한 일본군은 교회의 재산은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독교 선교 본국과 미국 등과의 외교적 관계,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청일전쟁을 겪은 민중에게 교회는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피난처의 의미로 각인되었다. 심지어 서양 세력 척결을 기치로 내세웠던 동학도들까지 성 조지 십자기가 세워진 교회로 숨어들었다. 당시 교회는 외국인의 영역이자 치외법권적 지대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교회 입구에 십자기 혹은 성조기를 내거는 사례가 생겼다. 치외법권 구역임을 표시하는 상징이었다. 황해도 소래교회의 성 조지 십자기는 유명하다. 매켄지가 교인들과 함께 구덩이를 파고 장대를 세운 후 십자기를 게양했는데, 그 십자기는 동학군에게도 효력이 있었다. 십자기가 게양된 지 오래지 않아 동학군들이 지나가다가 깃발을 보고 외국인을 만나러 왔다. 그 후 동학군 접장과 지도자들이 매켄지를 찾아 왔고, 그 답례로 매켄지도 동학군들이 사는 마을을 방문했다." (E. A. McCully, 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Rev. W. J. McKenzie, 1903, 154-155.)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피한 동학도들까지도 포용한 19세기 말 한국 사회의 새로운 '소도'蘇塗는 '교회'였다. 그리고 선교 초기 교회로 몰려든 신자들 중 상당수는 혼란한 정세 속에 자신의 생명과 재산, 안위를 지키기 위해 교회로 몰려온 이들이었다. 초기 기독교 선교의 결실과 성과는 이러한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와 민중의 현실적인 요구가 토대로 작용했다.
성 게오르기우스
: 순교자에서 전사로



성 조지 십자기는 흰색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전형적인 십자기다. 이 깃발은 제노바의 국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이후 잉글랜드, 조지아의 국기, 이탈리아의 밀라노, 제노바, 도이칠란트의 프라이부르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시기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성 조지의 십자기가 유럽 전역에서 사랑받고 각국과 도시의 상징 깃발로 사용된 데에는 십자군 원정의 역사가 그 배경에 있다. 십자군의 동방 원정길에 사용된 군기가 바로 성 조지의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1432~1435년경).

성 조지(St. George)는 성 게오르기우스(St. Georgius)의 영어식 발음이다. 성 게오르기우스에 대해서는 303년경 팔레스티나 지방의 디오스폴리스(Diospolis)라고 불리던 룻다[Lydda, 현재 텔아비브의 남동쪽에 위치한 중소 도시, 현재 도시명은 로드(Lod)]에서 순교했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496년 교황 젤라시우스 1세(Gelasius I)가 반포한 교령에선 "성인을 공경하는 것은 정당하나, 성인의 정확한 행적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신다"고 말했다. 다만 일찍이 게오르기우스가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 양쪽에서 '위대한 순교자'로 널리 알려지고 공경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전해지는바 그는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 이즈미르(İzmir)]에서 275년에서 285년 사이에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입대를 제안받아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 군인들이 로마의 신들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체포하겠다는 칙령이 발표되자, 게오르기우스는 이에 거부하여 마침내 참수형을 당해 순교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 교회에서 게오르기우스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는 전사나 군인보다는 순교자로 고착되어 있었다.

성카타리나수도원에 그려진 '성모자와 성인들'(6세기). 성모자 양편에 성 테오도루스(좌)와 성 게오르기우스(우)가 서 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게오르기우스에게서는 군인과 전사의 이미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전 유럽으로 알려지고 확산됐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는 십자군 원정의 군기로 사용되었고,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는 성 게오르기우스를 자신과 자기 군대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성 게오르기우스에 대한 새로운 영웅적 전설은 1260년경 제노바의 대주교 보라기네의 야코부스(Jacobus de Voragine, 1228~1298)가 쓴 <황금 전설 Legenda aurea>에서 처음 등장했다.


"카파도키아의 원주민이었던 게오르기우스는 군인으로서 호민관 계급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리비아 지방의 실레나라는 도시에 여행을 가고 있었다. 이 마을 가까이에는 호수만 한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역병을 일으키는 용이 숨어 있었다. 이 괴물의 광포를 달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매일 두 마리의 양을 용의 먹이로 바쳤다. 결국 마을에는 양이 떨어졌고 사람들은 용에게 양 한 마리와 남자 혹은 여자 한 명을 공물로 바쳤다. 제비뽑기로 청년이나 처녀의 이름이 뽑히면 징발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없었다. 곧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가 잡아먹히고 말았고, 어느 날 왕의 외동딸이 제비에 뽑혔다. 공주는 포박되고 용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다. 왕은 슬픔으로 정신을 잃고 자신의 금과 왕국의 절반을 내놓으며 공주를 살리고자 하였으나, 진노한 백성들은 이를 거부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공주를 축복했고, 공주는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게오르기우스가 우연히 공주 옆을 지나가게 되었고, 자초지종을 들은 게오르기우스는 공주를 돕는다. 용이 나타나고 성인은 치명상을 입히고, 공주의 허리띠를 용의 목에 감게 하여 도시로 들어간다. 그는 두려워 도망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용을 죽이겠다고 말한다. 그날 여인과 아이들은 계산에 넣지 않고 2만 명이 세례를 받았고 게오르기우스는 칼을 뽑아 용을 죽이고 용을 도시 밖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네 마리의 수소들이 용을 성벽 바깥에 있는 넓은 들판으로 끌어내었다. 왕은 게오르기우스에게 많은 돈을 주었는데 그는 돈을 거절하고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 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보라기네의 야코부스, <황금 전설 : 성인들의 이야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7, 385-392.)

미술사학자 정은진의 연구("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 순교자에서 기사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vol 38, 2013)에 따르면, 게오르기우스의 성인 이미지에 군인 이미지가 삽입된 때는 11세기경이었다. 10세기 이전까지 숭고한 순교자로만 각인되었던 성 게오르기우스에게, 십자군 전쟁이라는 거대한 전환점이 계기가 되어 이교도와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이다.

그 이미지 전환의 절정으로 12세기 <황금 전설>을 통해 용과 싸워 여성을 구하는 스토리가 가미되었다. 이는 그리스의 영웅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이야기와 오버랩된다. 거룩한 순교자가 벌이는 용과의 투쟁은 기독교 성인을 영웅으로 이상화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용과의 사투 끝에 공주를 구한다는 설정은 중세 유럽 최고의 판타지 <트리스탄과 이죄 Le Roman de Tristan et Iseut> 이야기에서 차용되었다. 켈트인들의 전설을 근간으로 구전되었던 설화를 12세기 프랑스 남부 시인들이 필사해 전 유럽에 알려진 트리스탄과 이죄의 사랑 이야기는 기사가 용을 물리치고 미녀를 구하는 일화로 유명하다.



위의 그림부터, 파올로 우첼로의 '트리스탄과 이죄'(1455~1460년)와 '성 조지와 용'(1458~1460년). 두 작품의 구성이 매우 유사하다.

그러면 왜 이런 성 게오르기우스에 대한 새로운 전설이 12세기 유럽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313년 그리스도교의 공인 이후 교회는 꾸준한 선교와 교세 확장을 통해 중세 기독교 유럽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며, 엄격한 기독교적 윤리관과 평화주의를 표방했다. 공교롭게도 1000년경에 이르러 신흥 직업군이 등장했는데, 바로 '기사'였다. 야금술과 말 사육 기술의 성장, 무기와 등자鐙子의 발달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귀족들이 주군에게 충성하는 직업 전사들을 육성하도록 자극했다. 그러나 교회는 다수 직업군인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성직자들은 살인의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정기적으로 전투를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고, 교회가 제시한 대안이 바로 '십자군'이었다. 교회는 기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대신 이교도들을 죽이도록 권장했다. 이렇게 10세기의 유럽 교회는 세속적 지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약자를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이상적 전사의 모델을 새롭게 창출하고 있었다. 그 모델이 바로 '성 게오르기우스'였다.
타자를 향한
정복과 폭력의 상징


교회가 고안하고 확산시킨 성 게오르기우스의 전설은 십자군 전쟁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였으며, 마침내 광기 어린 폭력과 정복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십자군의 역사는 기독교가 인류에 끼친 가장 치욕스러운 만행의 역사로 평가된다. 그 해악은 기독교 이외의 세계를 타자화·악마화하고 그에 대한 혐오와 분노,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 것이었다. 게오르기우스가 용과 싸우는 모습은 그러한 타자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구현해 주었다. 기독교에서 용은 악마나 사탄으로 묘사되며 적그리스도로 규정(계 12:7-9; 20:2)되었다.

'십자군을 이끄는 그리스도', 1090년경. 십자군의 창과 방패에 성 조지의 십자기가 그려져 있다.

기독교 외부 세계를 '너'가 아닌 '그것'으로 규정하며 악마화·타자화한 기독교 유럽의 정신은 '힘의 숭배'를 신학화한 제국주의를 수립에도 기여하며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제국주의 팽창의 역사는 명실상부 '기독교 유럽'의 세계적인 확산 과정이기도 했다. 미국의 교회사학자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는 기독교의 지구적 확산이 절정에 달한 1800년대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20세기까지 전개된 서구 기독교의 세계 선교는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침략하고, 수탈하고, 학살하고, 다양한 문화를 파괴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과정이었다. 기독교 이외의 세계를 이교와 사탄의 영토로 규정했던 십자군의 관점과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 내한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서도 이러한 타자 인식의 메커니즘은 여실히 작동했다.

소래교회에 내걸린 성 조지 십자기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복음의 순전한 시그널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기독교 세계 바깥에 대한 혐오와 분노, 폭력을 정당화해 온 십자군의 신학과 서구 제국주의의 민낯이 드리운 이중성이 교차하는 심벌이었다. 한국교회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러한 서구 제국주의의 심벌이 내걸린 교회가 신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신음하던 민중의 최후 피난처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반도가 기독교 선교 국가와 제국주의 침략국이 이원화한 첫 교회사의 현장이었다는 특수한 상황이 빚어낸 역사적 이중 구조였다. 이러한 역사의 이중 구조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교회의 야누스적 두 얼굴을 끊임없이 반복해 드러내 보여 주었다. 현대 한국교회의 대표적 인물이 해방 공간에 남긴 설교문의 한 대목이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대로 공산주의야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한경직 목사, 1947년 설교 '기독교와 공산주의' 중에서, <건국과 기독교>, 보린원, 1949. 212.)

저 그로테스크적인 성 게오르기우스의 전설 이야기로 야기된 중세 기독교 유럽의 광기와 폭력이 20세기 한국 현대사에서도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었음을 한국교회의 한 걸출한 목회자의 일성에서 모골이 송연하도록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과민한 감흥일까.

한국교회에 나부낀 첫 깃발은 이렇게 복음의 향긋한 매력과 십자군의 비릿한 광기가 교차하며 저 황해도 장연 땅에서 그렇게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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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태극기와 한국교회] 굴종의 시대 지나 자주의 푯대 세우다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02.27 11:41


우리나라의 첫 국가 상징 태극기는 누가 창안하고 만들었을까? 결과부터 말하면 이응준 제작설과 박영효 제작설이 상당 기간 갑론을박해 오다, 현재 이응준의 창안, 박영효의 제정, 조선 정부 반포라는 단계로 전개·확정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전근대 국가 조선에는 근대국가의 필수 아이템인 국기國旗가 존재하지 않았다. 국기를 정하는 제도는 서양에서 유래했고, 오랫동안 중국에 사대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해 온 조선은 특별히 근대 독립국가로서의 상징에 대한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았다.

조선은 1875년 강화도 일대에서 일어난 운요호雲揚號사건 이후, 서양 각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876년 1월 강화도조약朝日修好條規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을 했는가"라고 트집을 잡았다. 당시 조선 관리는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1875년 강화도를 침략한 운요호. 선미 상단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1876년과 1880년에 2차에 걸친 수신사 일행이 일본을 다녀왔고, 1881년 2월에는 일본시찰단(신사유람단) 일행이 방일했다. 이렇게 잦은 조일 간 교류와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는 조선 정부의 국기 제작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1881년 9월 4일 충청도관찰사 이종원李淙遠이 고종에게 국기 제정에 대한 장계를 올렸고, 1882년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국기 제작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응준의 첫 태극기 도안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당시, 역관이었던 이응준李應俊(1832~?)이 5월 14일과 22일 사이에 미국 함정 스와타라(Swatara)호 안에서 처음 태극기 도안을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은 매우 긴장감이 흘렀는데, 청국 특사로 내한한 마젠중馬建忠이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므로 청국의 국기(황룡기)와 유사한 '청운 홍룡기'靑雲紅龍旗를 게양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위배된다고 판단해 조선 대표에게 국기를 제정해 사용하라고 촉구했다. 물론 고종도 청국의 이러한 태도에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이에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 제작을 명했고, 조선의 국기로서 태극기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함께 나란히 게양되었다.

제물포에서 열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의 모습(1882). 성조기와 태극기 게양 모습은 기록화에 수록되지 않았다.

현재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게양되었던 태극기의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882년 7월 19일 미 상원 의결과 28일 하원 동의를 통해 미 해군부가 발간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 Flags of Maritime Nations>(1882)에서 이응준 태극기로 추정되는 이미지가 확인되었다. 이 책은 1882년 당시 세계 49개국 154점의 깃발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태극기의 삽화가 등장한 것이다. 영문 명칭에는 'Corea'라고 표기되어 있고, 태극기 하단에는 'Ensign'(선적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1899년 간행된 제6판에는 태극기 하단에 'National Flag'(국기)라는 설명으로 수정].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당시 미국이 태극기의 실물(혹은 사진이나 스케치 등)을 입수하여 그 도안을 책에 수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처음에는 이응준 태극기가 선적기의 의미로 고안되었지만,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국가 정체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미 해군에서 간행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 Flags of Maritime Nations>(1882)에 게재된 청국 황룡기(왼쪽)와 이응준의 태극기(추정).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슈펠트 문서 박스에서 발견한 태극기 도안.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미 해군에서 간행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에 수록된 태극기의 도안과 거의 일치한다. 사진 출처 이태진 명예교수
박영효의 태극기 도안 확정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1882년 8월, 임오군란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박영효의 일본 방문기 <사화기략使和記略>에 태극기 제작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언급되고 있다.

1883년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오사카판) 1월 10일 자에 게재된 박영효의 초상(왼쪽). 그가 수신사로 일본에 체류 중일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문서에 실려 있는 태극기(오른쪽). 이 태극기는 1882년 11월 일본 외무성 관원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Harry S. Parkes)에게 보낸 문서에 남아 있는 태극기다. 일반적으로 이 문서 작성 시기가 박영효의 일본 체류 기간과 일치하며, 당시 박영효가 각국 공사에게 태극기를 배포했다는 점에서 이 태극기가 박영효의 도안으로 추정된다.


"1882년 9월 25일, 맑음. 새벽 4시 고베에 도착해 아침 8시에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에 여장을 풀고, 누각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했음. (중략) 새로 제작한 국기를 누각에 달았음. 흰 바탕의 천을 네모나게 세로로 깃대에 걸었는데, 세로의 길이는 가로의 5분의 2를 넘지 않았음.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메우고, 네 모서리에는 건乾·곤坤· 감坎·리離의 4괘를 그렸음. 이는 일찍이 상감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바임." (<국역 해동 총재 Ⅺ> 중 '사화기략', 87.)

박영효는 태극기 제작이 개인적인 결정이 아닌 오래전부터 고종의 명으로 진행되었던 프로젝트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초기 태극기 제작은 그런 의미에서 당시 청국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 자주국가로 가기 위한 길을 모색한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영효는 같은 글에서 태극기는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했으며, 디자인은 일본 주재 영국 영사 애스턴(W. G. Aston, 阿須頓)과 상의해 당시 해외 각국 깃발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영국인 선장과 의논해 만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영국인 선장은 "태극 주변의 8괘는 시각적으로 복잡하고 타국에서 모방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4괘만을 네 모퉁이에 그려 넣으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어 3개의 시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정된 국기의 시안을 조정에 보내 보고했다(<사화기략> 89-90.). 태극기는 이듬해인 1883년 3월 6일 자 <승정원 개수 일기承政院改修日記>에 국기 반포에 관한 왕명이 실려 공식 채택되었다.

박영효 방일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유길준이 그린 태극기(왼쪽)와 유길준 사진. 태극기 형태와 구성은 박영효의 태극기와 유사하다(<유길준 전서 4>, 일조각, 1996.).

박영효는 이응준의 태극기에서 4괘卦의 좌우 위치를 바꾸었으며 그 모양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 모본으로 확정되었다. 이응준과 박영효의 태극기 도안 제작 과정은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매우 역동적인 노정의 산물이었다.
이상재의 태극기 제작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태극기 첫 도안자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논쟁이 있었지만, 시기적으로 이응준의 태극기 도안(1882년 5월)이 가장 앞섰으며, 이후 박영효가 이응준의 태극기를 오늘의 모습과 유사하게 확정(1882년 9월)했고, 이듬해 조선 정부의 공식 채택과 반포(1883년 3월) 과정을 거쳐 우리 민족 역사 속에 널리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

그런데 그동안 학계에서 이응준과 박영효의 양 제작설이 갑론을박하는 동안 간과되었던 다른 하나의 주장이 있었으니 바로 이상재李商在(1850~1931)의 제작설이다.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기 문신으로 일본시찰단(1881) 수행원, 주미공사 서기관, 학무아문 참의, 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지낸 엘리트 정치인이었다. 그는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한성감옥에서 성서를 읽고 개종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출옥 후 이상재는 YMCA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조선교육협회장, 조선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주도, 흥업구락부 회장, 신간회 회장 등의 활동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사회운동, 교육 운동, 민족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한성감옥에 투옥된 개혁당 사건 연루자들(1903년경). 맨 왼쪽에 결박된 채 서 있는 사람이 이승만,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홍재기·유성준·이상재·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이숭인(이상재의 아들)·유동근·김린·안국선.

고환규는 '태극기와 월남 이상재 장로'라는 기고(1978년 월간 <목회> 9월호)를 통해 태극기의 최초 창안자가 이상재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1882년 당시 22세에 불과했던 박영효보다는 11세 연상이었고 <주역>과 <태극도설>에 조예가 깊었던 이상재가 최초의 태극기 창안자로서 더 유력하다는 것이다.

이상재는 1881년 1월(박영효가 사절단으로 방일하기 1년 전), 박정양을 단장으로 구성된 일본시찰단(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될 때 박정양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당시 박정양은 국가를 대표해 방일하는 일본시찰단이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갖고 일본에 입국해야겠다는 생각에 비서인 이상재에게 깃발을 고안하라고 지시했고, 이상재는 선상에서 태극기의 초안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1881년 일본시찰단 방일 과정에서 이상재가 고안한 태극기는 이후 전개된 대일對日, 대미對美 외교 활동에서 조선을 상징하는 국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이상재의 유족인 이홍식李鴻植 씨의 주장이다.

조선의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 그는 주미공사로 지낸 11개월간 미국을 관찰·탐문한 기록인 <미속습유美俗拾遺>를 남겼다.


"할아버지께서 태극기를 만드셨다는 말은 구전口傳으로 심심찮게 들어왔습니다. 개화 초기 외교관 박정양 씨와 가장 밀착해 계셨던 조부는 일찍이 역학易學에 달통하신 관계로 박씨의 요구에 따라 능히 오늘의 태극기를 창안한 줄 아는데 우리 한산韓山 이 씨 가문은 무슨 일을 밖에 선전하지 않는 미풍을 지키느라 내세우지 않아요." ('이홍식의 증언', "태극기와 월남 이상재 장로", <목회>, 1978년 9월호, 154.)

고환규의 글에서는 YMCA에서 이상재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 사제 관계를 맺은 윤치영尹致暎(1898~1996)의 진술도 장문으로 인용되었다. 윤치영은 "월남 선생은 후일에 우리와 접촉할 때에도 유학 체계에 밝고 <주역>과 <태극도설>에 깊은 이해가 있는 자신이 그때 태극기를 손수 고안하고 박정양 씨와 의견을 모아 직접 내걸었다는 말을 비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월남 선생 측근의 많은 인사들과 함께 나는 선생으로부터 태극기가 지닌 심오한 의미의 말씀을 자주 들을 기회가 있었고, 그 해명을 육성으로 듣곤 했다"고 증언했다. 윤치영은 이러한 정황적 근거들을 토대로 이상재 선생이 태극기를 고안하고 창제한 인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전에 이상재 선생은 잡지 <별건곤>에 자신이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1887)되어 박정양 전권대사와 함께 도미할 당시의 회고문을 기고했다. 이 글을 통해 월남 선생은 당시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가 미국 땅에 나부끼는 모습을 매우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초대 주미공사관원 일행.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이완용·박정양·이채연. 뒷줄 왼쪽부터 김노미·이헌용·강진희·이종하·허용업 등 수행원과 하인들.

1891년 고종의 내탕금 2만 5000달러로 사들인 두 번째 주미공관. 입구에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도처에 흔날리는 태극기

이 상투잡이 공사의 일행인 우리가 떠날 때에 공사관에 게양할 조선 국기를 미리 예비한 것은 물론이어니와 우리가 타고 가는 기선 중에도 좌상에 국기를 꼬잣섯는데 눈치 빠른 선주는 벌서 우리 국기를 준비하야 식당이나 우리 출입하는 문구에다 게양하고 또 미국에 상륙할 시에도 부두, 정차장, 차내, 호탤까지 우리 국기를 게양하야 환영의 의를 표하엿섯다. 도처에 조선 국기를 볼 때에 반갑기도 하려니와 미국인의 외교술이 발달된 것도 감복하엿섯다." (이상재,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갓든 이약이', <별건곤> 제2호 1926년 12월 1일 자)
합력하고 조화하여 완성한
민족의 상징, 태극


이상재 선생이 자신을 태극기 최초 창안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문헌이나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1948년 2월 8일 <경향신문>에 유자후柳子厚(1895~ 납북, 이준 열사의 사위, 경사經史에 해박하며 신학문新學文에도 능통했다고 전해진다.)가 기고한 '국기 고증 변辨'이라는 글을 보면 이상재가 태극기 제작 과정에서 일정 부분 참여했으리라는 정황적 개연성이 확인된다.

유자후, '국기 고증 변', <경향신문> 1948년 2월 8일 자.


"나라를 대표하는 국기로서의 기호에 관한 문헌은 고적에서 도무지 이를 찾어볼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호로써 이 태극 국기의 근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주설이 구구한 모양이니, 혹자는 병자 강화조약(1876) 때에 제정된 것이라 하고, 혹자는 임오년 한미 통상조약(1882) 때 선정된 것이라 하고, 또 혹자는 임오군란 후 일본 수신사(1882) 박영효 씨가 작作하였다 하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주장 가운데 최후의 설이 근시近是(사실에 가까운)한 것이다. 지금까지 참고 된 결과를 보면 본래 김옥균 씨의 창○(創○)로써 김홍집 씨와 상의하고 어윤중 씨의 찬성을 받은 후에 박영효 씨의 동의를 얻어 고종 황제께 품달하여 어재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듯하다. 그리고 보면 우리 태극기의 창안자는 김옥균 씨요. 그 제정자는 고종 황제였던 것이다.

(중략) 우리 태극 8괘의 국기가 이와 같은 경위와 이와 같은 뜻을 갖고 탄생하기는 실로 대조선 개국 491년 임오년 7월 25일 고종 19년 서력 188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에 특명전권대사 수신사 박영효 씨가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향하였던 날이다. 그리고 고종 황제께서 각국의 기호와 비교하여 만약 고칠 점이 있거든 고치라는 품허까지 내리셨다. (하략)" (유자후, '국기 고증 변辨', <경향신문> 1948년 2월 8일 자)

최근 언론을 통해 알려진 유자후 선생이 쓴 '국기 고증 변'의 내용에는 기존의 이응준·박영효 제작설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주장이 제기된다. 그의 글에는 이응준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으며, "지금까지 참고된 결과" 김옥균·김홍집·어윤중·박영효 등이 논의를 거쳐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유자후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자료들과 관련 증언 등을 수집해 근거로 삼았는지는 추후 심층 연구 과제이다). 태극기 창안이 어느 한 사람의 독단적인 노력이나 재능으로 성취된 결과가 아니라 당대 집단 지성의 협업과 공동 작업의 결과라는 관점이다. 그리고 당시 청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립국가의 자주성을 획득하려 한 고종의 의지와 노력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유자후의 <경향신문> 기고에서도 이상재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글에서 언급된 인물들 중 김홍집은 이상재가 수행원으로 참여한 1881년 일본시찰단의 조직과 출범의 제안자였으며, 김옥균·어윤중은 이상재와 함께 일본시찰단에 직접 참가한 단원이었고, 박영효는 이듬해 일본사절단 대표로 활동한 인물이다. 아울러 1882년 박영효의 태극기 도안을 기록으로 남긴 유길준은 이상재와 함께 1881년 일본시찰단에 동행하여 도일 후 곧바로 최초의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러한 태극기와 관련한 여러 인물 간의 친밀성과 유기적인 관계망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응준과 박영효가 태극기를 고안하고 확정 짓기 이전부터 고종의 주도하에 당시 조정의 젊은 인재들이 협력하여 조선 국기의 도안을 함께 궁리하고 모색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역동적인 시대 흐름 속에 이상재도 이들과 함께 일했을 것이며, 그도 태극기 창안에 일정 부분 역할을 감당했으리라는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사료된다.
동양의 하늘과 서양의 하늘을
조화케 하는 믿음


그럼에도 굳이 이상재 선생이 태극기의 최초 창안자라고 무리하게 주장하며 논쟁을 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가 사대事大를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로서 독립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바라보며 느꼈을 감흥과 시대 인식은 어떠했을까하는 점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가 조미 수교 이후 주미공사관 서기관으로 처음 도미하는 과정에서 미국 땅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았던 고백은 청국 공사의 간섭과 훼방을 물리치며 주체적인 독립국의 시민 정체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재발견하는 전환기적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이상재가 새롭게 올려다보았을 태극기는 지난 500여 년간 지속된 반상과 남녀의 차별, 상하 군림과 굴종의 역사를 극복하고 만국과 만민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세계관을 상징하는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였던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 맞이하게 된 태극기의 자유로운 나부낌은 억압된 과거를 벗어나 자주적 독립국가로 나아가는 새 시대의 시그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태극기의 첫 창안자로 구한말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이상재나 박영효보다도 중인 역관 출신 이응준이 지목되고 기억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인 감동과 울림을 준다.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그 상징이 되는 태극기의 게양 앞에 가슴 뜨거웠던 인간 이상재의 애민 애족 정신은 이후 큰 정치적 시련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과 만나 더욱 견고해졌다. 그는 유자 출신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양의 지혜와 정신 유산을 기독교와 조화하고 상호 보완하는 관용과 공존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는 종종 '하나님'이라는 호칭 대신 유교의 '상제'上帝를 즐겨 사용했다. 동양의 하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가 잡지 <신생명>에 기고한 '참평화眞平和'라는 글의 일부 내용이다.

이상재, '眞平和', <신생명>, 1924년 4월, 31.


"마태 십이 장 이십오 절 '국國마다 스스로 분쟁하면 멸망할 것이요, 성城이나 가家이나 스스로 분쟁하면 입入치 못한다'하였고, 동양 선성先聖이 왈曰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하늘이 주는 좋은 때는 지리적 이로움만 못하고)요,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지리적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라 하였으니, 천하만사가 화평化平이 아니고는 하나도 될 수 없나니라. (중략) 우리 기독基督이 자기를 희생하여 사람人의 죄를 대속하신 진의眞意(참뜻)를 불망不忘(잊지 않을 것)할지니, 진평화眞平和의 본원本源은 애愛(사랑)와 노怒(애씀)에 재在(있다)하다 하노라. 동양 선성先聖도 부도夫道는 인노人怒뿐이라 하였나니라." (이상재, '眞平和', <신생명>, 1924년 4월호, 31.)

이상재의 삶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과 진리를 잊지 않으면서도 동양 성현들이 남긴 지혜와 수덕修德의 정신 또한 무시하지 않는 균형감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이상재 선생은 태극의 조화로운 이미지처럼 평생을 흔들림 없이 이 땅의 고통 받는 민족에 대한 애정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고 투쟁할 수 있었다. 그가 감히 그러한 삶을 살아 낼 수 있었던 것은 새 시대를 향한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가 그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까닭은 아니었을까.

1923년 함흥 지역 YMCA 농촌 강습회를 마치고 청년들과 함께한 월남 이상재 선생(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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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무능한 태극이 어찌 능히 세계를 창조하랴
[태극기와 한국교회] 태극 사상과 기독교 신앙의 충돌과 제휴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03.23 20:40


"우리는 대학과 신학교의 새 건물을 세워야 합니다. (중략) 지금은 황금의 기회입니다. 선교지가 열렸습니다. 우리의 지도력이 인정을 받았습니다. 앞서 있는 우리의 위치를 지키려면 계속하여 앞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 남감리교 형제들은 신학 사업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현재 학교들의 첫 번 교재는 <천자문 Thousand Character Classic>입니다. 두 번째 교재는 간단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가르칩니다:



태극(Great Absolute)의 근원을 자연에 존재하는 음과 양의 원칙에 두고, 오행(Five Primordial Essences)이 탄생하여, 기의 원리가 제일 먼저 옵니다. 나뭇잎들과 가지들처럼 많은 사람들 사이로 성자가 하늘과 함께 와서 질서를 잡아 줍니다. 그중 하나는 (혀가 세 개 있고 물고기처럼 비늘이 있는) 옥황상제이고, 다른 하나는 (용머리에 사람 얼굴을 가진) 인간 황제입니다. 또 하나는 (말 다리와 용의 몸뚱이를 가진) 대지 황제입니다.



학교 졸업 후의 과정으로 학생들은 <주역 Book of Changes>을 읽습니다." (H. G. 아펜젤러, '한국: 선교 현장, 우리들의 사업과 기회'(1901), <아펜젤러와 한국>, 배재대학교, 2012. 81.)

한국 개신교의 선교가 비교적 안정 궤도에 오른 20세기 초, 초대 내한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1901년 1월 필라델피아 목회자협회에서 발표한 보고서의 일부 내용이다. 이 글에서 아펜젤러는 한국의 지리와 기후, 풍속, 문화, 종교와 정치 등을 간략히 소개한 후, 한국의 초기 선교 과정과 향후 과제 등을 비교적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학과 신학교 설립에 대한 언급에서 그는 서양인들에게는 낯선 단어 '태극'(Great Absolute)을 언급한다. 감리교에서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첫 교재가 바로 <천자문>이라는 점을 소개하며, 이러한 동양적 가치 체계인 한문 교육으로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양성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특히 '태극'이라는 동양의 근본적 우주관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물론 배재학당에서는 한글·한문 외에도 영어·수학·과학·미술·음악·토론·성경과 테니스·야구·축구 같은 체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그럼에도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진행되는 기독교 교육 기초 과정을 언급하며 '태극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히려 매우 낯설고 신선한 충격까지 느끼게 한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정규 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주역>을 연구한다는 점을 연이어 소개했다. 그는 초기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왜 <주역>을 읽게 했을까?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자 기독교 미션스쿨인 배재학당에서 왜 '태극 사상'을 가르친 것일까? '태극'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개종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해석되었을까?

초기 배재학당 학생들과 아펜젤러 선교사(오른쪽 맨 뒤).
상제냐 하ㄴ.님이냐:
초기 한국교회의 '태극 사상' 이해의 기본 틀


서구 그리스도교가 아시아 선교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된 현실은 유·불·선을 중심으로 한 동양 종교의 도전이었다. 특히 16~17세기에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교를 중심으로 한 사회 지도층들을 선교 대상으로 삼고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종교 간 대화를 모색했는데, 이들이 체계화한 이론이 바로 '보유론'補儒論이었다. 보유론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유교 이론과 접맥해 유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유교의 결핍된 측면을 그리스도교 복음으로 보완하고 완성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는 동양 문화와 사회 속에서 이질적 종교로 인식된 기독교가 취한 적응주의 선교 전략의 산물이었다. 1582년 예수회 선교사로 최초의 중국 선교를 단행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주도한 보유론적 선교신학은 이후 유교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천주와 상제上帝의 동일성, 영혼의 사후 불멸, 천당, 지옥의 존재를 유교 경전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17세기 독일 예수회 회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편찬한 일종의 중국 백과사전인 <중국 도설 China Ilustrata>(1667)에 실린 마테오 리치(왼쪽)와 서광계.

초기 내한 선교사 언더우드도 이러한 예수회의 중국 선교의 역사적 산물인 '상뎨'(상제)나 '텬쥬'(천주)와 같은 신 호칭을 선교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당시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이 널리 사용하는 '하ㄴ.님'(웹 사이트 폰트 문제로 아래아가 제대로 출력되지 않아 '.'로 일괄 표기합니다. - 편집자 주) 호칭을 큰 고민 없이 수용하는 과정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1893년 <찬양가>의 출판 과정에서 그는 '상뎨'와 '텬쥬' 대신 '참(아래아)신'과 '여호와'를 채택했다. 이러한 언더우드의 신 호칭 채택은 당시 이미 '하ㄴ.님' 호칭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다른 내한 선교사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언더우드는 '하ㄴ.님' 호칭을 성급하게 사용할 경우, 혹시라도 기독교의 신 개념이 동양적 정령 개념과 혼합적으로 혼용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1894년에 접어들면서 다른 선교사들이 선호해 사용하던 '하ㄴ.님' 표기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언더우드 부인은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그러던 얼마 후 빛이 다가와, 그 자신이 잘못된 방식으로 일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과 초기 한국의 종교를 탐구하는 동안에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 왕국(the Kingdom of Kokurie)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말은 설명적인 용어로서, 크고 '유일한 하나'(only One)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하ㄴ.님'이란 말의 사용을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그가 발견하였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의 그 의미가 원래의 의미이고 지금의 의미는 거기서 파생된 것임에 틀림이 없었으므로, 언더우드는 이 본래의 의미에 담긴 속성을 가지고 이 말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사용되면, 그 본래의 의미가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쉽게 살아날 것이었다. 새로운 발견을 통한 이 빛 속에서 이전에는 자신이 거부하였던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 조리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L. 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1918. ; 이만열 역,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 기독교문사, 1990, 136.)

언더우드는 자신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고대 고구려의 신 개념'과 '기독교의 유일신 개념'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하ㄴ.님' 호칭이 기독교 내에서 수용되어도 좋겠다는 근거로 삼게 된 것이었다. 헐버트 선교사(H. B. Hulbert, 1863~1949)도 이러한 언더우드의 이해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왼쪽)와 헐버트 선교사.


"이상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종교적인 개념은 외래적인 의식과 아무런 연관이 없고, 원시적인 자연숭배와 거리가 먼 '하ㄴ.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 '하ㄴ.님'이란 단어는 '하늘'과 '님'의 합성어로 한자어 천주天主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든 한국인들은 이 하ㄴ.님을 우주의 최고 주재자로 간주한다. 그는 자연계에 횡행하는 여러 영이나 귀신들이 무리로부터 떨어져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인들은 엄격한 일신론자(monotheists)이며, 이 하ㄴ.님에 부여된 속성이나 권능은 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가르칠 때 거의 보편적으로 이 용어를 수용할 정도로 여호와(Jehovah)의 속성과 권능에 일치한다. (중략) 중국에서는 천주天主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을 찾아볼 수 있는 데 반하여, 한국인들은 하ㄴ.님에 어떤 외적인 형상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 (H.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Wm. Heinemann Co. London, 1906, 404.)

이상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기독교의 'God'과 동일한 의미로서 유일성·절대성·보편성이 확보된 신 호칭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했고, 순 한글로 이루어진 '하ㄴ.님'이라는 호칭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앞서 16세기 명나라에서 활동한 마테오 리치가 성리학의 관념론이 아닌 원시 유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상제'上帝와 기독교의 인격적 하나님을 동일시해 동양 문화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성을 증명하려 했듯이,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내한 선교사들도 고대의 한국 종교에 존재했던 '신 개념'을 오늘의 기독교 '신 개념'과 연관 지어, 한국인의 심성에 존재하는 유일신적 정서를 기독교 복음 선교에 적용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한 선교사들의 신 호칭 논쟁은 비슷한 시기, 한국 개신교의 '태극 사상'에 대한 인식과 해석, 비판과 수용의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태극'은 바로 우주의 근원과 섭리, 창조론에 대한 동양적 진술이자 인식 체계였기 때문이다. 결국 동양의 태극 사상은 기독교의 신론, 창조론과의 필연적인 대화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태극은 실상 이치뿐이라:
탁사 최병헌의 태극 사상에 대한 비판적 수용


앞서 언급된 선교사들의 인격적 유일신 개념은 초기 한국 개신교의 타 종교 인식과 종교 간 대화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자 변증 대상으로 상정되었다. 특히 감리교 잡지 <죠션크리스도인회보> 주필로서, 초기 개종자이자 한국 최초의 종교학자, 기독교 변증 신학자로 알려져 있는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 목사(1858~1927)를 중심으로 동양 세계의 대표적 우주론인 태극 사상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이 확인된다.

탁사 최병헌 목사.

기독교 개종 이후 최병헌은 <죠션크리스도인회보>에 '논설'과 '삼인 문답', <신학월보>에 '성산 유람기' 등의 기고를 통해 자신의 종교철학적 입장을 활발히 개진해 나갔다. 그가 <죠션크리스도인회보>에 게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만물의 근본'이라는 논설에서 동양의 태극 사상에 대한 짧지만 강렬한 비평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 논설은 <도덕경>, <주역>, <유가서>, <격치서> 등에 언급된 태극 사상의 주요 내용을 요약·소개한 후, 그 사상에 담긴 한계와 결핍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웹 사이트 폰트 문제로, 아래에서 세 차례 인용되는 '론셜: 만물의 근본'에 나오는 고어를 필자가 현대어로 수정했습니다. 옛글의 맛을 충분히 살리고자 했습니다. 읽으시는 데 참고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전략) 주역에 이른바 하늘의 도는 사나이를 이루고 땅의 도는 계집을 이룬다 한 말씀이 옳다 하고 하늘이 자시에 열리며 땅이 축시에 열리며 사람이 인시에 생生하여 삼재三才(천·지·인 세 가지)와 오행五行의 기운으로 만물이 생긴다 하였으니 태극의 이치는 뉘가 냈으며 음양의 기운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으며 (중략) 주회암 격치서에 가라사대 태극의 이치가 조화의 지도리(돌쩌귀: 문짝을 문설주에 달아 여닫는 데 쓰는 두 개의 쇠붙이)가 되어 남녀와 만물을 생生하는 근본이 되나니 나의 몸은 곧 천지의 기운이요 나의 성품은 곧 천지의 이치라 하며 이치는 곧 하늘이라 하고 또 말씀하기를 태극은 만물을 생生하는 근본이로되 형상도 없고 지각도 없고 정의도 없고 계교하여 헤아림도 없다 하였으니 영동 활발靈動活潑 하는 권능이 없을 것인데 태극은 곧 가련한 물건이라. 어찌 능히 하늘과 땅과 일월과 사람과 초목금수를 내었으리요. 이것은 만물의 근본을 크게 잃어버림이라. 슬프다. 동양 성인의 요순 공명 같은 이는 당초에 하ㄴ.님의 도와 만물의 근본을 말씀하되 없고 송나라 유현들의 이치를 말씀한 것이 이같이 몽농(불분명)하여 후생(후세)의 이목을 어둡게 한고로 유서만 강구하는 선배들은 지금까지라도 만물의 근본을 황연히(분명히) 깨닫지 못하는지라. 어찌 인재를 교육하는 방침에 흠전(흠이 되는 일)이 아니리요." ('론셜 : 만물의 근본', <죠션크리스도인회보>, 제5호, 1897년 3월 3일 자.)

최병헌은 태극 사상의 원리와 그 내용의 탁월성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태극의 원리를 주관하는 주체 혹은 의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태극의 이치는 누가 만들었으며, 음양의 기운이 어디서 왔는지" 동양 선현들의 수많은 설명과 주석들로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태극 사상에 대한 유구한 설명들에는 "영동 활발靈動活潑하는 권능"이 부재하며, 결국 태극은 "가련한 물건"에 불과하다는 다소 냉소적 비판을 가하며, 천지 만물의 창조주가 별도로 존재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최병헌이 기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론셜 – 만물의 근본'.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년 3월 3일 자)


"반드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시며 대주재大主宰 되시는 하ㄴ.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나니 창창蒼蒼한 하늘과 막막漠漠한 땅이 또한 창조하심을 받은 물건이라 어찌 만물을 내었으리요." ('론셜 : 만물의 근본', <죠션크리스도인회보>, 제5호, 1897년 3월 3일 자.)

최병헌이 위 글을 쓴 시기는 그가 세례를 받은 지(1893) 4년 후이며, 이전까지 아펜젤러의 주선으로 종로에 대동서시大東書市라는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고, 배재학당 학생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협성회 회보를 출판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또 1895년에는 정부의 농상공부 주사로 임명되어 능묘 제사 주관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결국 2년 만에 사임하고 교회 일에만 전념하게 된다. <최병헌 선생 약전>에 주사직 사임 이유에 대해 "상주上主를 존경하는 자 엇지 위패를 숭배하리오"라고 언급된 사실로 보아, 신앙적 동기가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자의 나라 조선의 선비로서 입신양명을 완전히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에 전념하게 된 최병헌이 자신의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 작성한 기고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비판한 대상이 바로 동양 정신의 보편적 우주관, 세계관을 담고 있던 태극 사상이었다.

최병헌은 1900년 3월 <죠션크리스도인회보>에 '삼인 문답'이라는 짧은 글을 기고하면서 다시 한번 '태극'에 대해 짧게 언급한다. 자신의 경험담으로 추정되는 이 글은 서울 북촌 마을에서 선비 3인이 회동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동양 학문에 대강 섭렵이 되어 있는 전도인"이 유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에 상당한 학식과 이해를 지닌 선비들과 만나 진리에 대해 대화하는 내용이다. 전도인은 "유·불·선 삼도가 모두 타국에서 온" 종교라는 점을 강조하며 기독교를 외래 종교로 여기는 편견과 배타적 태도를 극복하기를 요청하며, 기독교도 아시아에서 발원한 "동양의 종교"임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글에서 공자, 노자, 석가모니, 예수, 무함마드 모두가 도달한 진리의 산이 나오는데, 바로 이 산이 "태극 이치"로 형성된 장소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 산은 태초시太初時에 조화옹造化翁(우주의 만물을 만든 신)의 수단手段으로 태극 이치를 좇아 천작天作으로 된 산이라 쳥정한 지경에 경개景槪가 절승絶勝하고 일월이 명랑한데 그 산꼭대기에는 다섯 성인이 있어 서로 담화하며 항상 한가하여 근심과 걱정이 없으니 다섯 성인은 공부자(공자)와 노자와 석가모니와 구세주 예수 씨와 회회교의 무함마드라. 세상 사람이 항상 그 산에 올라가 다섯 성인과 같이 놀고자 하나 첫째는 정성이 부족하고 둘째는 문호門戶(외부와 교류하기 위한 통로나 수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달라 올라가는 길이 각각 다름이라." ('삼인 문답', <죠션크리스도인회보>, 1900년 3월 21일 자)

물론 '삼인 문답'의 전도인은 전도에 실패하는 결론에 이른다. 집주인과 선비로 상징되는 기성 토착 종교의 벽을 넘지 못한 최병헌 자신의 실존적 한계에 대한 감정과 고뇌가 반영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그의 글에서 인류사에 등장한 각 종교적 성인들이 오르고자 한 산이 "태극의 이치"로 형성된 산이라고 소개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병헌은 태극 사상의 기본 개념에 대해 전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최병헌은 '삼인 문답'에서 논의한 내용을 발전시켜, 1907~1908년 <신학월보>에 '셩산 유람긔'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 바로 이 "셩산"聖山(<셩산 명경>, 2쪽.)은 '삼인 문답'에 나오는 "조화옹의 수단으로 태극 이치를 좇아 천작天作된 산"이 보다 세련되고 심오하게 발전한 공간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최병헌은 '셩산 유람긔' 연재를 마무리한 후, 그 내용을 묶어 <셩산 명경聖山明鏡>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정동황화서재 1909년 초판)했다.

이 책 저술 목적은 '삼인 문답'에서와 같이 유·불·선 동양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종교 간 대화를 통한 기독교 변증으로 이웃 종교인들의 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선교적 목적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 따라서 <셩산 명경>은 유교의 진도眞道, 불교의 원각圓覺, 도교의 백운白雲, 기독교의 신천옹信天翁이 성산聖山에 모여 종교를 주제로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흘간의 대화를 이야기체로 정리한 이 책의 내용은 유교와 기독교, 불교와 기독교, 도교와 기독교의 대화 순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도교인, 불교인, 유교인이 순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결론을 보여 준다.

최병헌, <성산 명경>, 정동황화서재, 1909.

바로 이 책 서두에서 기독교인인 신천옹이 유교의 진도眞道와 기독교의 창조론에 해당하는 태극 사상과 음양오행에 대해 깊이 있게 토론한다. 앞서 <죠션크리스도인회보>에 기고한 '만물의 근본'의 내용과 그 문체와 얼개가 유사하고 더 심화한 내용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 기본 주장과 내용은 앞서 기고한 글과 그 맥락이 다르지 않다.


"신천옹이 가로되, '선생의 말씀이 가장 유리하거니와 도徒(다만) 지기일知其一이요, 미지기이未知其二(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니 주회암朱晦庵의 <격치서>에 가로되, '태극은 실상 이치뿐이라. 이치가 합벽闔闢(닫고 열고 함)하는 문호(소통 수단)와 지도리(돌쩌귀)가 되어야 남녀와 만물의 생생生生하는 근본이 된다' 하고, 또 가로되 '이치란 것은 정의情意(감정과 의지)도 없고 계교計巧(이리저리 생각을 해서 낸 꾀)함도 없고 조작함도 없다' 하였으나, 태극의 이치가 만일 정의와 조작함이 없을진대 지혜와 신령도 없는 것이니 어떻게 허령 지각虛靈知覺(마음에 잡된 생각이 없고 지극히 신령하여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고 이치를 깨달음)이 있는 사람과 만물을 생하며, 또한 건곤 이기乾坤理氣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만물이 생긴다 하시는 건곤 음양乾坤陰陽은 당초에 어디서 생겼다 하시나이까.'



진도 왈 '그러하면 그대는 천지 만물이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하느뇨?'



신천옹이 답왈 '반드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조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라. 음양오행은 천지 일월天地日月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를 가르쳐 말씀함이오나, 천지 오행은 하나님께 만드심을 받은 물건으로 아무 권능이 없거늘 어지 만물을 생生하리오. (중략) 대개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물체요, 다른 하나는 영혼이라. (중략) 무지 무능無知無能한 태극이 어찌 능히 세계를 창조하였으리요, 반드시 전능하신 주재主宰가 천지 만물을 만드셨다 하나이다.'" [최병헌, <성산 명경>, 동양서원, 1911(재판), 11-12.]

최병헌이 앞서 발표한 '만물의 근본'(1897)에서는 태극을 "가련한 물건"이라 폄하적으로 평가한 것에 비해 <성산 명경>의 신천옹(최병헌)은 태극은 "실상 이치뿐"이라는 비교적 중립적·객관적 표현으로 변화한 점이 눈에 띈다. 어쨌든 최병헌은 태극이 감정과 의지가 없는 피조 세계의 원리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일관되게 주장하며, 태극에서 나온다는 건곤 이기乾坤理氣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실제적 창조주가 별도로 존재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병헌은 유교에서 말하는 '하늘' 또한 피조물의 하나일 뿐, 그것이 창조주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원시 유교의 경전에서 등장하는 '상제'上帝는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전략) '하늘 천'天 자와 '상제'上帝란 글자가 어찌 같은 뜻이라 하나이까. 그런고로 양인梁寅의 <역주易註>에 가로되 '제帝라 하심은 신의 이름이요, 신神은 상제의 영이니 만물을 주재하신다' 하고, 자하子夏 <역전易傳>에 가로되, '제자帝者는 조화의 주재요 천지의 조종이라' 하고, 도한 우리 성경에 가라사대 '태초에 상제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였으니, '하늘이 만물을 낸 것이 아니라 상제께서 창조하셨다' 하느니라. 진도眞道 능히 반대하지 못하는지라." [최병헌, <성산 명경>, 동양서원, 1911(재판), 14.]

이상의 내용에서 초기 그리스도인 최병헌은 유교 성리학을 통해 발전한 태극 사상과 음양오행론의 관념성을 비판하면서도, 원시 유교에 깃든 천지 주재로서의 '상제' 개념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개념이라고 논증하여, 동양 사상에 면면히 흐르는 태극의 상징성과 가치를 우상이나 이교적 틀에 묶어 배척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조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선교 초기 내한 선교사들과 1세대 개종자 간의 신학적 교감과 소통을 통해, 동양적 가치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한계성을 매우 진지하고 노련하게 극복해 나간 숙고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한국교회가 일정 부분 수용한 유교적 신앙 언어와 상징체계는 이후 전개되는 한국교회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착화하고 상호 조화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바야흐로 민족 교회, 충군애국 신앙의 뿌리가 이때부터 발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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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가를 불러 보세"
[태극기와 한국교회] '충군애국'의 교회, 그 낯선 동행의 시작①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04.28

"한국교회가 지닌 가장 흥미 있는 양상의 하나는 애국심입니다. 우리의 연안선沿岸船은 어느 주일 아침 늦게 북쪽 땅에 우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강 언덕 마을로 이씨李氏는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대나무 끝에서 조그마한 한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이 깃발은 기독교인들의 집이나 교회 위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이면 그들의 집이나 교회에 국기를 단다는 것은 선교사들의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들 사이에 일어난 실천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날의 성격을 표방하고, 그들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Notes from the Wide Field, The Missionary Herald, March, 1898, 112. ; 민경배, <한국 기독교회사>, 연세대출판부, 1982, 216쪽에서 재인용.)

세계 교회사 속에서 한국교회가 지니는 차별성과 특징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통해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표현하고 실천했다는 점일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 팽창 과정에서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고 변증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있었다. 아울러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는 피식민지민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민족과 조국을 배신해야 하는 모순과 딜레마에 봉착해야만 했다. 애초에 유대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세계적 보편성과 구원의 이상을 표방한 기독교 신앙이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및 '민족주의'와 뒤엉켜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대변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 식민지 경험을 공유한 제3세계 중에서 유례없이 제국주의 침략국과 기독교 선교국이 분리되어 들어온 공간이 바로 한국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서 한국교회는 "예수 믿는 일이 곧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는 역사적 신앙고백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 속에서 기독교 신앙은 한국의 민족성 혹은 민족적 상징체계를 자연스럽게 수용, 내재화할 수 있었다. 소위 '민족 교회'라는 개념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 토대가 19세기 말 한반도에서 구축되었다.

독립관 앞 만민공동회에 운집한 군중들. 독립관 입구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사적 배경 외에도 한국 개신교 내에 민족주의가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개신교보다 100여 년 앞서 수용된 가톨릭의 존재였다. 19세기를 시작하며 구한말 조선의 국가권력과 충돌하며 숱한 박해를 겪어 낸 가톨릭과의 선교 경쟁은 개신교에 차별성을 드러내도록 요구했다.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 반국가·반민족 집단으로 치부되어 온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는 조선의 정부와 백성을 존중하고 이로운 집단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체선언'異體宣言을 통해 19세기 말 당시 가톨릭이 교회 중심적 선교에 머물러 있던 것과 달리 "병원-교회-학교"라는 트라이앵글 선교 방식을 구사하며 차별화를 시도했다. 아울러 개신교는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종교임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시대적 흐름 속에서 한국 개신교는 청일전쟁(1894),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독립협회 창설(1896), 대한제국 선포(1897)가 숨 가쁘게 전개된 격변기를 거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충군애국'적 교회로의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독립문에 새긴 태극기


청일전쟁(1894~1895)이 예상 밖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 조선이 500년간 유지해 온 사대事大의 관습을 내려놓고 새 시대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다시 구축해야 하는 전환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이후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0년 만에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조선에 돌아왔다. 그는 정동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집에서 머물며 정치 활동을 재개했고, 1896년 4월 7일 자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근대 언론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독립문 건립, 독립관 조성도 이끌었다.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1921년 5월호

독립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사대의 상징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워졌다. 또 중국 사신들을 접대했던 모화관을 개조하여 근대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평등사상을 고취하고 보급하는 독립관으로 바꾸었다. 이때 서재필은 윤치호·남궁억·이상재·이승만·주시경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도 적극 교류하며 1897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서재필 박사.

서재필은 1896년 6월 20일 자 <The Independent>지에 독립문의 건립 취지와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새겼다.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의 옛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할 것을 승인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 문의 조명彫銘이 국문으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에 대항해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해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 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그(조선)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조선)의 머리 위에 쏟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해 조선은 손상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이광린, 신용하 편저, <(史料로 본) 韓國文化史 : 近代篇>, 일지사, 1984, 186-187.]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이 지닌 의미는 "이제 한국이 중국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 그 외 유럽의 모든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독립문이 이후 전개된 일제 강점 35년간 철거를 모면하고 존치된 까닭으로, 일제 당국이 독립문을 청일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일제 당국이 1928년 거액을 들여 독립문에 대한 대대적인 수리를 단행한 것이나, 1936년 40년도 채 되지 않은 독립문을 고적 제58호로 지정하기도 한 것을 보면, 당시 일제가 독립문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자신들의 대륙 침탈에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기념물이자,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부역자들이 적극 참여해 건립한 건축물이기에 더더욱 존치에 무게중심을 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독립문의 건립 목적이 단순히 청에 대한 사대의 시대를 끝내고 '독립'을 천명하는 것으로, 항일성이 미약했기에 철거를 면했다는 주장은 재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위의 기고에서 강조되었듯이 서재필이 말한 '독립문'의 '독립'은 특정 국가로부터의 해방과 자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반도를 둘러싼 온 세계 제국주의의 야욕에 대한 전방위적 독립선언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독립문의 한글명 좌우로 조각된 태극기. 하단 아치에는 왕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조각되었다.

<독립신문> 제12호(1896년 5월 2일 자)부터 사용된 태극기 삽화.

독립문은 1896년 11월에 정초식을 진행(1897년 준공)했다. 당시 독립문의 외관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소나무로 아치형의 홍예문을 만들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지나간 토요일 오후 두 시 반에 독립문 주초돌 놓는 예식을 독립공원지에서 시행하였는데, 일기도 매우 좋았거니와 각색 일이 절차가 있게 되어 사람이 내외국민병(군인)까지 오륙천 명이 왔더라. 독립문 들어가는 데는 푸른 나무로 홍예를 만들어 조선 국기로 좌우를 단장하고 문 위로는 흰 바탕에 붉은 글자로 독립문이라 써 높이 달고 안 문에는 독립협회 기를 훌륭하게 만들어 바람에 흔들리게 하였으며 청한 손님들 있는 밖으로는 목책으로 울타리를 하여 그 안에 정부 높은 관원들과 각 학교 학원들과 외국 공영사와 그 외 외국 신사들과 여러 외국 부인네들이 많이 앉고 서고 하였으며, 새로 세우는 문 주초를 벌써 높이 모았는데 좌우에 넉 자 높이까지 돌로 쌓는데 한편은 회장과 연설하는 사람들과 기도하는 교사가 섰고 또 한편은 배재학당 학도들이 섰더라." ('독립관 연회',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자 1면)

서재필의 바람대로 이후 준공된 독립문의 정면은 한글로 "독립문"이라 각인되었으며, 그 이름 좌우에는 태극기가 새겨졌다. 독립문의 아치 이맛돌에는 왕실의 상징인 오얏꽃李花 문양이 조각되었다. 아울러 <독립신문>에도 제12호(1896년 5월 2일 자) 제호題號부터 그 중앙에 태극기 삽화가 배치되었다.

독립관과 독립문 전경.

독립관 앞에 운집한 만민공동회 군중. 중앙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이렇게 건립된 독립문은 일제 강점 이후 점차 방치되고 퇴락해졌으며, 한때 철거 위기를 겪기도 했다. 1925년 9월 16일 자 <동아일보>는 독립문이 철거된다는 소문의 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독립문 오른편 다리에는 보기에도 위태롭게 틈이 생겼습니다. 삼십 년이 될락말락한 이 문에 벌써 틈이 생긴 것이 이상하여 근처 사람에게 물어보니 삼일운동 때에 어떤 청년이 태극기를 꽂아 두었던 것을 경관이 발견하고 그것을 빼어 버리는 동시에 원래부터 독립문 앞이마에 붙이고 있던 태극기의 색채色彩를 없애 버리려고 소방대를 불러다가 소방 펌프를 들이대었더랍니다. 수년 동안 바람 비의 침노를 입고도 엄연하게 서 있던 독립문은 소방 펌프의 줄기찬 물결에 무수한 매를 맞았을 뿐입니까. 이마에 붙였던 자랑거리까지 잃어버리게 됨에 할 일 없이 병든 몸에 뼈까지 어그러진 것이라 합니다.



독립문은 앞으로도 얼마 동안 헐어 버리지 않으리라고 당국자는 말합니다. 무악재 고개에서 넘어오는 쓸쓸한 가을바람과 악박골 좁은 골에서 내려 몰리는 눈보라를 지금 이 모양으로 한동안 더 받을 것이라 합니다." ('철폐설이 전하는 독립문 소식', <동아일보>, 1925년 9월 16일, 2면)

독립문이 건립된 지 30년 가까이 된 시점인데도 독립문에 각인된 태극기에는 건곤감리 청홍백의 선명한 채색이 여전히 암석 깊이 스며 있었나 보다. 문화 통치기라는 일제의 기만적 지배 전략은 이처럼 독립문에 채색된 태극기의 빛깔마저 무자비한 살수차의 수압으로 모두 퇴색케 하고 말았다. 비록 그 색상의 미감을 엿볼 길은 묘연하나 우리는 그 자리에서 울려 퍼진 노래와 기도 소리에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1925년 9월 16일 자 <동아일보> 관련 기사(왼쪽)와 해방 직후의 독립문(사람들이 '독립문'과 '태극기'에 다시 색깔을 덧입혔다).
독립문 정초식에서 울린 기도와 노랫소리


독립문 정초식은 1896년 11월 21일 오후 2시 30분 거행되었는데, 식장에는 독립협회 간부들, 정부 관료들, 각국 사절, 서울 시내 각 학교 학생들, 일반 시민들이 다수 참여했다. 배재학당의 학당장 아펜젤러 선교사는 축도 순서를 맡아 조선말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배재학당 학도들이 조선가를 부르고 회장이 주초돌을 놓고 교사 아펜젤러 씨가 조선말로 하나님께 축수하되 조선 대군주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성체가 안강하시고 조선 독립이 몇 만 년을 지내도 무너지지 않게 되며 조선 전국 인민이 점점 학문이 늘고 재산이 늘어 새 사람들이 되게 하야 줍소서라고 하더라." ('독립관 연회',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자 1면)

1896년 11월 거행된 독립문 정초식 광경.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건립 직후의 독립문 전경.

독립문 정초식에서 아펜젤러가 맡았던 축복기도 내용은 다소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의 기도 어디에도 종교적인 내용이나 상징, 표현들은 크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왕실의 안녕과 임금의 만수무강, 조선국의 만세와 인민의 학문 및 재산 증식에 대한 세속적 축복과 기원으로 점철되어 있다. 다만 이 기도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새사람"이라는 단어에서 선교사 아펜젤러가 기저에 깐 의도를 읽어 낼 수 있으리라. 아펜젤러는 기독교 신앙과 근대 민주 시민사회의 가치를 한국 땅에 이식하여 이 나라가 더 이상 과거의 인습과 제도에 머물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에 충실히 대응하고, 자신의 가능성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문 정초식 당시 배재학당 학생들은 '조선가', '진보가', '독립가' 등의 창가를 제창했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노래들의 제목만이 전해져 왔다. 이 노래들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2013년,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인 이현표 씨에 의해서였다. 그는 주한독일대사관 재직 기간 중(1999~2004) 베를린에서 구입한 <The Korean repository>(1892년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에 의해 창간된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를 들춰 보던 중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한지韓紙 한 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세 번 접힌 그 종이에는 '조선가', '독립가', '진보가'가 순서대로 적혀 있고, 여백에는 '환호'라는 제목의 "만세만세만만세/우리셩쥬만만세 천셰천셰쳔쳔세/독립협회쳔쳔셰 – Rha! Rha! Rha! P.C.S., P.C.S Horangi"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P.C.S"는 "Pai Chai School"의 이니셜이고, 호랑이(Horangi)는 배재학당의 마스코트로 보인다.]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래 전단. 사진 출처 이현표

이현표 씨가 발견한 이 유인물은 아마도 1896년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노래를 제창할 당시 들고 보았을 전단으로 보인다. 그중 '독립가'에는 그 가사 중에 "태극기"가 등장한다. (※본사의 지면 시스템 문제로 고어를 현대어 표기에 맞게 일부 수정했음. – 필자 주)


'독립가'



[一] 일천팔백 구십륙년 / 건양원년 십일월에

아세아주 독립조선 / 독립문을 새로세(우)네

[후렴]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 일월같이 빛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 날

[二] 영은문이 독립되니 / 모화관이 공원지라

이백여년 병자지치 / 오늘이야 씻는구나

[三] 독립자주 터를닦고 / 문명개화 주초놓네

전국인민 굳게보호 / 부강지업 이뤄보세

[四] 단군기씨 독립자주 / 신라고려 연호썼다

성조승동 오백년후 / 건양개원 새롭구나

[五] 우리성주 여천공덕 / 방국권리 다시찾네

전국인민 동심합력 / 갈충보국 하여보세

[六] 우리 독립 장구술은 / 충애이자 제일이라

애국지심 있는이는 / 독립이자 잊지말자

[七] 곤륜산이 벽해되고 / 태평양이 육지되나

어화 우리 독립기초 / 견고하기 반석이라

[八] 태극기를 높이달고 / 독립가를 불러보세

이천만중 일심으로 / 승평악을 화답하네

이 노래의 8절에는 "태극기를 놉히달고 / 독립가를 불너보셰"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승평악昇平樂을 화답하네"는 태평성대의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대중이 함께 부르는 노랫말에서 태극기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태극기는 이미 한국인의 마음속에 국가와 민족 공동체를 상징하는 보편적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노래를 자세히 살펴보면 독립문 정초식(11월 21일)에 앞서 <독립신문> 10월 31일 자에 게재된 또 다른 '독립가'와 그 형식 및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바로 최병헌의 '독립가'이다. 그는 1893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한 후 잠시 선교사들 일을 돕다가 1895년부터 2년간 정부의 녹을 받던 시기에 이 노래를 작사한 것 같다. 최병헌이 독립문 정초식에 앞서 <독립신문>에 '독립가'를 게재한 시기가 10월 31일이니,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문 정초식에서 부른 '독립가'는 최병헌의 '독립가'에 적잖은 영향을 받아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최병헌이 작성한 '독립가'의 초안이다.

1896년 10월 31일 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최병헌의 '독립가'(왼쪽)와 최병헌 목사.


농상공부주사 최병헌 '독립가'



[제일] 천지만물 창조후에 / 오주구역 천정이라

아시아주 동양중에 / 대조선국 분명하다

[후렴] 기쁜 날 기쁜 날 / 대조선국 독립한날

독립기초 장구술은 / 군민상애 제일이라

기쁜 날 기쁜 날 / 대조선국 독립한날 (※<독립신문> 원문에는 순서가 바뀌어 있음 - 필자주)

[제이] 단군기자 자주시고 / 신라연호 건원이라

개국홍제 인평후에 / 고려건원 광덕이라

[제삼] 만세완산 선이화는 / 신인금적 천수로다

기원경절 오백후에 / 건양연호 빛나도다

[제사] 음양조판 태극기를 / 일월같이 높이다니

조선역시 구방이라 / 기명유신 차시로다

[제오] 금성옥야 온대지에 / 구천오백 방리로다

이천만중 합심하여 / 독립가를 불러보세

최병헌 '독립가' 4절에는 "음양조판陰陽肇判 태극기를 / 일월같이 높이다니"라고 적혀 있다. 이미 동양의 태극 사상과 종교철학, 역사 문화에 조예가 깊은 최병헌이었기에, 그가 작성한 '독립가'의 내용은 "한반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독립국 조선에 부여된 섭리와 뜻을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성취해 나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최병헌의 가사가 다소 관념적이고 학문적인 측면이 강하다 보니, 한 달쯤 후 독립문 정초식에서 제창된 '독립가'의 가사는 독립문의 건립 취지와 대중적 성격에 맞춰 보다 실제적이고 시의적인 내용들로 대폭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노래의 목적과 지향하는 바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면 이 두 노래의 가사에는 어떠한 곡조가 붙었을까. 두 노래 후렴구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기쁜 날 기쁜 날 / 대조선국 독립한 날"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 날"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보고 불러봄직한 낯익은 가사가 아닌가. 바로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ge, 1702~1751) 목사가 작사한 찬송가 '주의 말씀 받은 그날'(새찬송가 285장)이다. 이 찬송가는 생키의 <복음 찬송가(1~6합본) Gospel Hymns No. 1 to 6 Complete>(1894)의 'Oh! happy day, that fixed my choice'(543장)를 번역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찬양가>(1895)에 처음 실었다(139장). 이어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출판한 <찬숑가>(1908)에도 이 곡이 수록(162장)되었다. 최병헌과 배재학당 학생들은 자신들이 교회에서 즐겨 부르던 찬송가 곡조에 '독립가'의 가사를 붙여 불렀던 것이다.

언더우드가 편집한 <찬양가>(1895, 왼쪽)와 장·감 연합으로 간행된 <찬숑가>(1908)에 실린 'Oh! happy day, that fixed my choice'의 국문 가사.

이렇게 구한말에서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는 격동의 시기, 근대 시민사회의 가치와 기독교 신앙을 결합하고자 모색했던 내한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이상은 '태극기', '독립', '충군애국'이라는 생경한 언어들을 적극 수용하면서 '민족 교회' 정체성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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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군과 국기를 자기 목숨보다 더 중히 생각하며"
[태극기와 한국교회] '충군애국'의 교회, 그 낯선 동행의 시작②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06.02 16:40


"서울 야소교회 교원들이 대군주 탄신 경축회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근 천 명이 모여 애국가를 하기를 대군주 폐하의 성체 안강하심과 조선 인민의 부강함을 축수하고 전국 인민이 동심협력하야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야 아모쪼록 조선이 자주 독립이 되고, 인민이 타국 인민과 같이 세상에 대접을 받고 학문과 재능이 늘며 생해生解하는 법이 진보하야 의복 음식과 거쳐 범절이 태서泰西(서양) 각국과 같이 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하야 누구든지 조선 사람이 외국 사람에게 무리하게 욕을 보든지 곤경을 당하든지 하면 전국 인민이 자기가 당한 것과 같이 분히 여겨 그 사람의 역성을 하고, 님군과 국기를 자기 목숨들보다 더 중히 생각하며, 성벽이 생겨 기어이 조선도 남의 나라와 같이 되야 남의 나라가 일 년에 십 보를 나아갔으면 조선은 이십 보를 갈 생각들을 하며, 나라 명예와 영광을 다른 일보다 먼저 생각하고 모두 하나님께 축수하되 조선을 불쌍히 여겨서 태서 각국과 같이 복을 받게 도와주소서 하고 여러 백 명이 일심으로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것을 보니 만일 이 사람들이 참 혈심血心으로 야소(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가지고 이렇게 빌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이 이 기도에 대답하실지라." ('논설', <독립신문>, 1896년 9월 3일 자.)

1896년 9월 2일 고종 탄신 축하일 풍경이다. 당시 한국 개신교 신자 1000여 명은 서울 모화관(독립협회 독립관) 앞에 운집해 성대히 축하식을 치렀다. 이들은 1000명이 넘는 대규모 집회에서 한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달성회당 예수교인 애국가, <독립신문> 1896년 7월 23일 자.


대조선 달성회당 예수교인 등 애국가



독립공원 굳게짓고 / 태극기를 높이다세

상하만민 동심하야 / 문명예의 이뤄보세

전국인민 깊이사랑 / 부강세계 주야빌세

앞뒤집이 인심요량 / 급히급히 합심하세

천년세월 허송말고 / 동심합력 부디하오



하나님께 성심기도 / 국태평과 민안락을

님군봉축 정부사랑 / 학도병정 순검사랑

사람마다 애자품어 / 공평정직 힘을쓰오

육신세상 있을때에 / 국태평이 제일좋다

국기잡고 맹세하야 / 대군주의 덕을돕세
위 애국가를 만든 달성교회達城敎會 예수교인들은 누구일까? 바로 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W. B. Scranton, 1856~1922)이 설립하고 민족운동가 전덕기全德基 목사(1875~1914)가 목회한 상동교회尙洞敎會의 옛 이름이다. 교회 설립 초기에는 달성위궁(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서 시작해 이후 상동의 병원 자리로 이전하여 상동교회가 된 것이다. 상동교회 신자들이 지어 부른 애국가는 기독교 신앙은 자연스럽게 애민 애족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이어져 있음을 전하고 있으며, 선교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과 신앙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상동교회의 민족 구국 신앙은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원을 중심으로 을사늑약 무효 상소 운동, 구국 기도회, 한글 보급 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다.

상동교회 옛 모습.

상동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애국가 1절과 2절에는 공통으로 태극기가 등장한다. "독립공원 굳게 짓고 태극기를 높이 다세", "국기 잡고 맹세하야 대군주의 덕을 돕세" 등 가사의 내용만을 살펴보더라도 19세기 말 근대 자주독립 국가를 모색하며 대중에 선보인 태극기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증명하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시대정신의 표상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리스도인들의 황제 탄신일 제등 행렬


선교 초기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고종의 생일(만수성절萬壽聖節)뿐 아니라 태조의 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기원절'紀元節 행사도 개최했다. 교회력과 관계없는 절기에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고 "임금과 국기를 자기 목숨보다 더 중히 생각"하는 집단의식을 공유하는 모습은 초기 한국 개신교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96년 학무국 편집국에서 편찬한 <신정심상소학>에는 목판화 삽도揷圖를 통해 학생들의 이해를 도왔다. 총 31과로 구성된 교과서 내용에는 대한제국 건국과 고종 황제 탄생 및 즉위에 대해 소개하는데, 태극기 게양을 권면하는 삽화揷畫가 그려져 있다.


"만수성절을 당하매 사람마다 기쁜 마음으로 다투어 경축하는 정성을 표할 새 독립협회 회원들은 독립관에 모이어 국기를 높이 들고 황금 대자로 만수성절 네 글자를 삭여 들어가는 문에 크게 붙였으며 회원 수천 인과 각 학교 학도들이 각각 머리 위에 종이로 만든 꽃가지를 꽂았으며 반공에 차일을 높이 치고 풍악 소리가 진동하는데 회원 중 한 분이 경하 축사를 연설한 후에 학원과 학도들이 차례로 경축가를 노래하고 다과를 내어 장유와 노소가 하나도 빠진 이 없이 다 먹고 오후 한 시에 폐회하였으며 ○ 구세교회 교인들은 그날 오후 세 시에 장악원掌樂院(조선 시대 국악國樂 관장 기관, 이 당시에는 독립협회 부속 건물로 사용)에 모이어 경축할 새 남녀 교우가 처소를 다르게 하야 백포장으로 가운데를 막고 일제히 경축가를 노래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황제 폐하를 위하여 기도하고 본국 교우들과 서국 목사가 서로 감사한 뜻을 연설하는데 그 즐거운 모양과 하례하는 말씀은 일필로 다 기록할 수 없으며 ○ 저녁에는 배재학당에서와 달성회당(상동교회)에서 각색 등을 달고 남녀 교우가 일심으로 모이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축가를 노래하며 하나님을 공경하고 님군을 사랑하는 주장 뜻을 논설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한지라. 우리는 전국 인민이 해마다 오늘을 큰 명일로 알아 충군애국하는 목적을 기념하기를 바라노라." ('대황뎨 탄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년 9월 14일 자.)

'대황뎨 탄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년 9월 14일 자.

이러한 개신교의 행보는 당시 조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독자적으로 교세를 확장하며 선교 정책을 펼치던 가톨릭과는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내한 선교사들과 개신교 신자들의 적극적 정치 행보에 대해 당시 한국에서 활동한 뮈텔 주교(Gustave-Charles-Marie Mutel, 1854~1933)는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고 있다.

뮈텔 주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으로 1891년 조선대목구장으로 부임해 1933년 별세하기까지 43년간 한국에서 활동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대구와 원산, 평양에 교구가 생기는 등 한국 가톨릭은 기틀을 잡았다.


"음력 7월 25일, 황제의 탄신일이다. 예년보다 더 요란스러웠다. 여러 협회들과 학교들, 특히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많은 열성을 보였다. 시내의 많은 교회당에서는 모임이 있었고, 장악원에서는 전체 모임이 있었다. 저녁에는 여러 곳에서 제등 행렬이 있었다. 정부의 부처들은 기旗들과 조명으로 장식되었다." ('뮈텔의 1898년 9월 10일 일기', <뮈텔 주교 일기 2 : 1896-190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316.)

뮈텔은 개신교인들의 대한제국 황제를 향한 열성적인 충성과 애국 활동에 대해 비교적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예년보다 요란스럽다"는 표현에서 제3자 관점에서 이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느껴진다. 그의 일기에 묘사된 만수성절 풍경에서 주목되는 점은 정부 각 부처들이 기旗와 조명으로 장식되었으며, 저녁에 제등 행렬 행사가 거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대한크리스도인회보> 보도 내용만으로도 저녁 제등 행렬에도 개신교 신자들이 다수 참가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위의 기사를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국가 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된 연등회燃燈會이다. 신라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불교 행사이자 축제인 연등회 풍경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매년 사월 초파일에는 서울 시내 각 거리를 연등으로 수놓고 연등 행렬이 종로통을 가득 메운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이벤트가 한국 개신교인들의 황제 탄신 축하 제등 행렬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120여 년 전에 거행되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다. 이덕주 박사(전 감신대 교수)는 "이러한 제등 행사는 한국에서는 사월 초파일이나 국경일에 거행되는 낯익은 문화"였으며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제등 행사를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토착화 신앙 양태로서 분석(이덕주, '청송 홍예문에 태극등과 십자기', <기독교세계>, 2016년 12월호, 25.)하고 있다.
태극등과 십자기 걸고 성탄을 축하하다


뮈텔 주교 왈 '요란한' 제등 행렬을 주도했던 한국 기독교는 과연 고종 황제의 탄신일(9월 8일)에 어떤 등불을 내걸었을까. 1898년 서울에서 열린 만수성절 이벤트는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서울의 보기 드문 성대한 행사에 동참한 인근 지역 기독교인들은 상동교회와 배재학당 학생들이 선보인 제등 행사를 저마다 자기 지역과 교회에서 재현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1898년 성탄절을 맞아 인천과 강화의 개신교 신자들이 보여 준 예배 풍경은 가을에 서울에서 개최된 만수성절 행사의 연장선 위에 서 있었다.

강화 교산교회 역사박물관에 복원된 1898년 성탄절 당시 모습. 교회 마당에서 십자가와 태극 문양이 그려진 태극등을 밝히고 있다.


"성탄일에 인천 담방리교회에서 남녀 교우들이 열심히 연보한 돈이 사원 오십 전인데 처음으로 십자기를 세우고 등 삼십륙 개를 십자로 달고 회당 문 위에 태극기를 세웠으며 남녀 교우 합 오십사 인이 모였는데, 전도 듣는 사람은 이백여 명이오, 속장 이근방 씨가 기도하고, 권사 복정채 씨가 목사 조원시 씨를 대신하여 누가복음 이 장 일 절로 이십 절까지 읽고 애찬을 베풀며 하나님 성자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연설하는데, 남녀 교우와 구경하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인천 담방리교회 성탄일 축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년 1월 4일 자.)


"성탄일 경축에 형제가 삼십오 인이오 자매가 삼십칠 인인데 본토 전도선생 김상임 씨가 마태복음 이 장 일 절로 십이 절까지 보니 애찬례를 베풀며 저녁 예배에 태극등 삼십칠 개를 달고 형제자매와 외인까지 육칠십 명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였더라." ('강화 교항동교회 성탄일 축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년 1월 4일 자.)


"구주님 탄일에 등불 이백오십 개를 전후좌우에 달고 십자기와 태극기를 세우고 청송 홍예문을 세우고 방포 삼성 후에 좌우에서 지포를 일시에 놓고 성기전을 올리며(폭죽의 일종으로 추측됨) 교인 남녀 오십이 명이 모이매 사간 회당에 꼭 차고 팔십구 찬미를 노래하고 회중 속장 이영순 씨가 누가복음 일 장 이십육 절부터 삼십팔 절까지 논설하고 모든 교우들이 기쁜 마음으로 천부 전에 기도하옵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려보내며 성신을 받은 마음으로 간증하며 기쁜 마음으로 찬미할 새 근처 여러 동네 사람들이 남녀노소 없이 구경하여 회당 문이 다 상하도록 들어오며 하는 말이 우리도 돌아오는 주일부터 다 예수를 믿겠다 하고 우리가 예전에는 구세교회가 이렇게 옳은 줄을 몰랐더니 이제 본즉 좋은 일이로다 하고 모든 교우들이 일심으로 하나님께로 영화를 돌리더라." ('부평 굴재회당에셔 성탄일 경축',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년 1월 4일 자.)

이덕주 교수는 이러한 강화·인천 지역 감리교회 신자들의 성탄절 행사를 분석하며 ①성탄절 예배 행사의 주도권이 선교사에서 토착 전도자와 신자들에게 넘어간 점 ②성탄 예배도 토착 전도인들이 인도했다는 점 ③성탄 예배 후 애찬과 친교 시간을 가진 점 ④교인들이 성탄절에 예배당을 장식하면서 태극등과 십자기를 걸고 청솔가지에 홍예문을 세워 태극등과 일반등 수백 개 혹은 36~37개를 걸었다는 점 ⑤신자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대거 참석해 관심과 호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이덕주, '초기 한국교회 성탄절 문화', <토착화와 민족운동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8, 175.)하고 있다.

위의 초기 한국교회에서 나타난 성탄절 풍경은 예수 탄생의 의미(종교)와 황제 탄생의 의미(국가)를 결합해 충군애국 신앙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천 담방리교회에서 십자기를 36개 게양한 것이나 교산교회에서 태극등(혹은 태극기)을 37개 거치한 것은 당시 고종 황제 즉위(1863년) 햇수를 기념하는 일이었다.
스러져 가는 국가 향해 올린 태극등의 불빛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성직자(선교사, 목사)와 신자들이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기원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황제의 만수무강과 안녕을 기원하고 적극적인 정치적 퍼포먼스를 하는 것에서 일면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당시 한국교회는 강력한 선교 라이벌인 가톨릭의 존재 앞에서 열세적 선교 경쟁을 벌여야 했고, 가톨릭 박해 과정을 통해 형성된 무군 무부無君無父, 오랑캐 종교, 매국 종교라는 편견과 오해의 시선들을 적극 해명하고 극복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울러 19세기 말 조선은 세계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해 풍전등화 일로였다. 당시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통한 위태로운 나라의 새 진로를 제시하고 모색하며 황실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여 안정적인 선교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 역사적 요구 앞에 서 있었다.

성탄절에 황제의 건강과 제국의 안녕을 비는 모습은 의외로 반전과 성과를 거두었다. 인천 굴재교회에서 열린 성대한 성탄 행사에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지역민들도 다수 참여했고, 그들은 이 예배를 통해 "우리가 예전에는 구세교회가 이렇게 옳은 줄을 몰랐더니 이제 본즉 좋은 일이로다", "우리도 다음 주일부터 다 예수를 믿겠다"라는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보였던 명성왕후가 을미사변乙未事變(1895)으로 비참한 죽임을 당한 후, 슬픔과 좌절에 빠진 고종에 대한 지지와 격려의 의미로 초기 내한 선교사들과 개신교 신자들의 정치적인 목소리와 적극적인 행동은 더욱 두드러졌다. 명성왕후의 죽음 이후 2년 만에 국가 장례가 치러질 때도 장로회와 감리회의 모든 신자가 한자리에 모여 추도 예배를 진행했다. 그 당시 모습은 <죠선그리스도인회보>와 <독립신문> 등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명성왕후 추모 예배가 거행된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십일월 이십일 일 (중략) 예배 날을 맞아 명성황후의 인봉因封하시는 때라. 서국 목사들과 본국 성도들이 특별히 황후를 생각하여 비통한 마음과 나라를 위하여 사랑하는 정성으로 장로회 교우들과 미이미(감리)회 형제들이 함께 대정동 새로 지은 회당에 모이어 하나님께 기도할 새 아편셜라 씨가 마태복음 십육 장을 읽어 드리고 교우 양홍묵 씨는 로마인서 십삼 장의 말씀으로 전도하되 우리가 마땅히 님군을 잘 섬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님군을 내시고 또 황제가 되시게 하셨으니 님군의 명령을 거역함은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이라 하고, 목사 원두우 씨는 말씀하되 '명성황후께서 병환이 계셔 천명으로 승하하시고 인산因山 때를 당하였더라도 나라 신민이 되어 사람마다 비감할 것이어늘 하물며 역적의 손에 변란을 당하심이리오 우리가 오늘 한 곳에 모임은 황후를 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라를 도우사 교회가 흥왕케 하시기를 원한다 하고 (하략)'" ('나라를 위함', <죠션그리스도인회보>, 1897년 12월 1일 자.)


"요전 일요일 오전에 장로교 교회와 미이미(감리)교회 회원들이 정동 새 예배당에 모여 명성황후 폐하 혼백을 위하야 기도하고 황실을 공경하야 하나님께 축수하고 신문사장 제손씨와 그리스도신문 사장 원두우 씨와 그리스도회보 사장 아편셜라 씨가 연설하고 교敎하는 백성들이 다른 백성과 달라 특별히 충군애국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행실이 정직하고 청결하여야 하겠다고들 말하며 대한 인민이 속히 성교聖敎를 믿어 일심이 되야 나라를 도와 중흥하게 하여야 할 터이오, 전국 인민이 옳은 백성들이 되거드면 하나님이 복음을 국민 간에 다 입히리라고 하더라." ('잡보', <독립신문>, 1897년 11월 25일 자.)

이덕주 교수는 한국교회 교인들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복음적이고 민족적이며 토착적인' 신앙 양태는 복음의 토착화, 그 필연적인 과정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초기 신앙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문화양식으로 장식한 예배당에서 당시 민족적 과제였던 '충군애국'과 '국권 회복'의 염원을 기독교 예배를 통해 표현했다. 그 결과 "이 땅에서 복음은 민족적이고 토착적인 양식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게 되었고, "토착민을 통한 '토착적인 신앙'을 통해 '민족적인 신앙'을 거쳐 '복음적인 신앙'으로 접근해 간다"고 분석했다. '낯설었던 이방 종교'인 기독교가 한국인의 문화와 역사 속에 '친숙한 종교'로 뿌리내리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복음의 보편성과 본질을 완성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120여 년 전 '태극등 성탄 축하'의 단편적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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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너 대한국기여!"
[태극기와 한국교회] 태극기와 일장기의 공존과 대결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07.21 18:33


"우리가 이왕에는 항상 대한국기를 바라보고 슬피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슬프다 너 대한국기여 너는 무슨 연고로 영국 십자기와 같이 오대양과 육대주에 널리 꽂히지 못하였으며 너는 무슨 연고로 미국의 사십팔성기와 같이 십삼도 안에서 영구히 빛나지 못하며 이태리국 삼색기와 같이 반도국의 영광을 날리지 못하며 아라사(러시아)의 쌍솔개기와 같이 아세아와 구라파 대륙을 굽어보지 못하고 다만 동방 한 모퉁이에서 수치와 욕을 면치 못하고 있어서 서녘 하늘에 풍우가 일며 너의 다리가 흔들리며 남녘 지방에 티끌이 날리며 너의 낯이 참담하여 너를 대하는 이천만 형제로 하여금 애곡함을 말지 않게 하니 슬프다. 너는 어느 때에나 나라 사기史記의 신령한 빛이 돌아오게 하며 국민의 권리를 붙들어 호위하리오 하고 눈물을 뿌렸더니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한국 국민의 국가 정신을 보니 네가 분발하여 일어날 때가 반드시 있으며 네가 독립을 할 날이 반드시 있으리로다.



국민의 국가 정신이 이 같은즉 우리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시고 지존 지대至尊至大하신 상제上帝께서 너의 위에 임하사 너로 하여금 나라의 혼을 부르게 하시며 너로 하여금 나라의 힘을 붙들게 하시고 너의 이르는 곳에 보배로운 빛이 항상 비치더니 저 마장魔障(귀신의 장난)이 무슨 물건이며, 고통이 무슨 물건이며, 수치가 무슨 물건이며, 번뇌가 무슨 물건인가. 무릇 일체 한국동포들아 이외의 혁혁한 국기를 항상 볼지어다. 그 대내의 국가 정신이 여기 있느니라. 바람이 임하여 대한국기에 대하여 두 번 절하고 한 붓을 들어 전국 동포를 권면하노라." ('논설 – 자국 정신',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7일 자 1면.)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를 불과 1년 6개월 앞두고 비애와 한탄의 눈물을 쏟으며 <대한매일신보> 주필은 위와 같이 통렬한 애가哀歌를 읊조리고 있었다. 처연하게 나부끼는 태극기 옆에는 언제인가부터 섬뜩하고 음험한 일장기가 팔짱을 끼듯 교차해 걸려 있었으리라. 이러한 기괴한 풍경이 바로 1909년 망국 직전 한반도 태극기의 처지였다.

친일 단체 일진회가 남대문 앞에 게양한 태극기와 일장기. 통감부는 1907년 8월 27일 순종 즉위식에 일본 황태자가 방한할 당시 숭례문을 통과하는 것은 조선 왕실을 숭배한다는 의미라 하여 친일 단체 일진회를 통해 숭례문 성곽을 철거하게 하고 마차로 덕수궁까지 이동했다. 숭례문과 서울 성곽의 수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진회는 일본 황태자가 지나갈 수 있는 봉영문奉迎門을 조성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게양했다.

기록상 태극기가 처음 내걸린 민간 행사는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이었다. 이러한 군중 집회와 '애국가' 혹은 '독립가'의 제창은 태극기가 민족 공동체와 국가를 상징하는 표상임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되었다. 이렇게 태극기는 단순히 "대한제국의 주권과 국체의 상징"으로 시작해 이후 "애국심을 표현하는 도구", 더 나아가 "애국심을 투사投射하는 대상"으로 확장해 마침내 '임금과 인민의 몸을 받은 존재', 즉 국가 자체라는 계몽이 진행되었다.


"(독립)신문 사장(서재필)이 연설하되 '대체 무슨 일이던지 까닭이 있는지라. 오늘날 조선 학교 학도들이 여기 모여 대운동회를 할 때 이 마당을 조선 국기로 단장을 하였으니 그걸 보거드면 조선 인민도 차차 국기가 무엇인지 알며 국기가 소중한 것을 아는지라. 국기란 것은 우흐로는 님군을 몸 받은 것이요 아래로는 인민을 몸 받은 것이라. 그러한 고로 국기가 곧 나라를 몸 받은 것이니 이렇게 학도들이 모여서 운동회를 할 때에 국기를 모시고 하는 것은 조선 인민들이 차차 조선도 남의 나라와 같이 세계에 자주 독립하는 것을 보이자는 뜻이라.'" (<독립신문>, 1897년 4월 29일 자 1면.)

이러한 태극기의 위상은 대한제국의 국운이 망국의 시기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월적 단계로 격상되어 갔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국기 의례를 시행할 것을 제안하고 국기에 대한 사랑과 숭상을 의전적으로 보급하고자 했다.

'국기 예배'라는 제목의 기사. 도산 안창호(사진 오른쪽)의 제안으로 태극기를 숭상하는 행사가 공식 행사로 채택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서서西署 만리현 의무균명학교義務均明學校에서 지난해去年 귀국하였던 미국 유학생 안창호 씨가 생도에게 대하여 권면한 내개內開(봉투에 넣어 봉하여진 편지 내용)에 '미국 각종 학교에서는 애국 사상으로 매일 수업上學 전에 국기國旗에 예배禮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것(唱함)을 보았은(見한)즉, 그 개명開明 모범模範은 사람으로 하여금今人 감격感昻케 한다. 그러므로然則 우리나라凡吾 학교들도 이제부터 시행하자從今施行' 함으로 그 학교該校에서 지난 달去月 일주일曜日로 위시爲始하여 배기창가례拜旗唱歌例를 행한다더라." ('국기 예배',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 자 2면.)

1907년 국가 존망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은 안창호의 제안을 기점으로 기독교 예배 의식을 차용한 '배기창가례拜旗唱歌禮'를 채택했다. 이러한 학교에서의 국기 의례는 오늘 우리에게도 익숙한 국민의례와 학교 조회의 역사적 연원이 되었다. 체제의 허약과 붕괴 조짐은 사회규범과 제도를 더욱 보수화·제도화·형식화하는 관성이 있다. 현재까지 전승되어 온 국기 게양 이벤트와 퍼포먼스가 바로 이러한 망국의 불안이 정점에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07년 당시 '배기창가례'가 어떠한 형태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큰절을 하거나 허리와 고개를 숙여 태극기를 향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태극기에 대한 사랑과 숭배는 일장기라는 실체적 그림자를 품은 불안한 사랑이었다.
태극기와 일장기의 대결


일반적으로 교회사 연구가들은 국권 상실의 절망이 높아 가던 시기의 한국교회가, 1907년 대부흥 운동 이후 개인적 내세 신앙과 성령 체험에 몰두한 나머지 '비민족화'되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근대 시민 정체성과 만민 평등 사상을 공유하며 오히려 더욱 끈끈하고 내밀한 애민 애족 정신을 구축했다. 1903년 원산 대부흥의 산실인 원산 남산동교회 신축 예배당 기념사진(1906년)을 보면, 전 교인 뒤로 태극기를 게양해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표현했다.

원산 남산동교회 신축 예배당에서 신자들이 함께한 사진. 교회 전면에 태극기를 교차해 게양한 것이 눈에 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운은 날로 쇠약해 갔다.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일제가 한국 침탈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교회 내에서도 강제적으로 일장기를 게양토록 하는 조치가 빈번해졌으며, 이는 민족적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표 사례가 1909년 초 순종 황제가 평안도 일대를 돌아본 '서북 순행' 당시 교회와 학교 기관에서 일장기를 태극기와 함께 게양하는 것에 평양의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며 저항했던 사건이다.

1909년 1월 27일 평양역 앞에서의 순종 서북 순행 장면. 평양역 입구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되어 게양되어 있다. 순종은 1909년 1월 경상도와 충청도 순행을 마친 후, 27일부터 2월 3일까지는 7박 8일간 평양·의주·신의주·개성 등지를 순행하고 돌아왔다. 이 순행에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비롯한 궁내부 201명, 내각 49명, 통감부 29명 등 총 279명이 호종원으로 참여했다. <순종 황제 서북 순행 사진첩>,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번 서도 거동 시에 지영차로 한일 국기를 같이 달려는 문제에 대하야 평양야소교회 목사 길선주 씨와 장로 김성택 안봉주 박치득 제씨가 극력 반대하야 교회 여러 학교에서 태극기만 달았는데 그곳에 잇는 경찰서에서 김성택 씨를 불러다가 일본기 달지 아니한 일을 질문하매 김씨가 대답하기를 모든 학도들이 다 일본기 다는 것을 즐겨 하지 아니함으로 이같이 하였노라 하였다더라." ('일국기 반대',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5일 자 2면.)

태극기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의 애정과 관심은 1903년 한국 최초로 조선인 미주 이민단이 하와이와 멕시코 지역에 이주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역만리 타국에 정착하게 된 한인 이민자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 정착하는 불안감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해소하고자 신앙에 의지했고, 자연스럽게 한인 교회는 이민 사회 구심점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1906년경에 이르러서 한인들은 13개 교회와 35개 전도소를 갖추었고, 하와이 한인 교회는 10년 만에 예배당 39개, 신자 3800명에 이르렀다. 당시 하와이 한인 중 70~80%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는 초기 미주 지역 이민 사회가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확장·발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이렇게 성장한 하와이 한인 교회들에는 한민족의 동질성과 공동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태극기가 어김없이 게양되었다.

그러나 하와이는 이미 일본인 이민자들이 다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일본 이민 사회와의 교류 및 관계 또한 요구되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 연회가 열릴 경우, 다인종 사회가 참여하는 대개의 연례 회의는 한인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1909년 하와이 한인 교회에서 열린 회의 사진을 보면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다. 당시 한일 강제 병합을 눈앞에 둔 시점에 한일 이민자 간의 적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음에도 양국기가 교회에 게양되어 있는 모습은 당시의 미묘한 전환기적 상황을 여실히 증언해 주고 있다.

1909년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의 선교 연회 기념사진. 1909년 한인과 일본인들의 갈등과 적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음에도 양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민병용 소장/로베르타 장 제공.)
의병장 출신 구연영 전도사의 순국


기독교계에서도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 과정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 광주·이천 지역에서 활동한 구연영·구정서 전도사 부자의 순국 사건을 주목할 수 있다. 1895년 일제가 자행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당시 경기도 광주와 이천 지역을 통해 활동하던 구연영은 의병대 중군장이 되어 백현(이천 널고개) 전투를 압승으로 이끈 바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 점거 이후 경북 의성까지 내려가 항전하던 그는 의병 운동에 한계를 느껴 반년 만에 회군했다. 그리고 구국 운동의 새로운 방편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2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으며, 오히려 더욱 강한 민족의식과 구국 의지를 담아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믿음信은 진실한 신념으로 상제上帝를 신봉하고 그리스도基督의 교훈으로 죄과罪過를 회개하고 진리의 삶으로써 완전한 인간의 기초를 삼고자 함이오,



소망望은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관존민비官尊民卑, 의타 사상依他思想, 직업 차별職業差別, 미신 허례迷信虛禮 등 악풍 폐습惡風弊習을 타파 개선하며 신교육新敎育을 흡수하여 현실 만에 낙념落念 말고 직업에 충실함이오.



사랑愛은 진정한 애의 정신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을 표어로 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며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고 정의로 단결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조국 광복의 기초라." ('춘경春景 구연영 선생 약전', <獨立血史>, 2권, 1950, 179.)

의병장 출신 양반의 개종과 전도 활동은 지역사회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는 자신의 노비들을 풀어 주었고 천민들에게도 존칭을 사용해 광인狂人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구연영은 권서인 활동에 충실하면서도 각 지역의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해 구국 계몽 운동을 진행했다.

특히 친일 어용 단체인 일진회一進會(1904년 친일파 송병준 주도로 설립된 친일 어용 단체)의 민낯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이에 일제 헌병대는 기밀문서에서 "경성 동편 십여 군郡에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배일자排日者도 근절될 것"이라고 했다. 구연영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 계획과 일진회 활동에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1907년 구한국 군대 해산에 따라 거병된 정미의병으로 전국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군 헌병대는 의병장 출신 전도사 구연영과 그 아들 구정서가 활동하는 이천 지역에 진주하여 마침내 두 부자를 이천 우시장 미루나무에 묶고 팔과 다리를 칼로 찌른 후 총살했다. 초기 개신교 전도인 중 첫 순국이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구연영·구정서 전도사 부자와 그들의 순국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1907년 9월 29일 자 3면). 구연영 전도사(중앙)와 그를 기리는 순국 추모비(오른쪽). 추모비는 이천중앙교회 앞에 건립되어 있다.


"일병 오십여 명이 이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 구정서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하엿다더라." ('부자 구몰',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9일 자 3면. ※구몰俱沒: 부자가 모두 죽다 / 충화衝火: 일부러 불을 지르다)

구연영·구정서 부자의 비극적 죽음을 몇 줄 단신으로 보도한 <대한매일신보>는, 그로부터 2년 후 친일 매국노들과 일진회의 패악질로 스러져 가는 조국과 태극기의 처량함을 한탄하며 다음과 같은 울분에 찬 논설을 내놓았다.


"오늘날 한국에 무슨 물건이 남아 있는가. 외교도 저 역적이 팔았으며 군대와 경찰도 저 역적이 팔았고, 삼림과 광산도 저 역적이 팔았으며, 사법권도 저 역적이 팔았고 정부 관리자리도 저 역적이 팔았으니 그 남은 것은 빈껍데기 대한이라 하는 명칭뿐인데 지금 와서는 이 빈껍데기까지 한입에 집어넣고자 하여 소위 합방 성명서를 주출하였으니 오호라! 동포여 아는가 모르는가! (중략)



생각하여 볼지어다. 합방이 된 이후에는 단군을 배척하고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받들 것이오, 군부君父를 버리고 명치 천황을 높일 것이며, 조국의 태극기를 버리고 태양기를 잡을지니 동포의 마음이 이때에 어떠하겠는가. 저 일진회는 외교권을 내어준 것이 독립하는 복이라 하고 모든 이익을 다 빼앗기는 것이 행복의 종자라 하더니 이제 또 그 성명서에 하기를 황실을 존숭한다 인민의 복이 된다 보호국의 수치를 벗어 버린다 하였으니 오호라! 지옥을 천당이라 하는 마귀들아 그 말의 간교하고 불경함이 어찌 이렇게 심하뇨.



폐일언蔽一言하고 저 일진회는 한국이 한 치만 넘어도 한 치를 멸하고 한인이 일개만 넘어도 일개를 죽이고자 하나니 동포들아 아는가 모르는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논설 - 두 번 한국 동포에게 고하노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8일 자 1면.)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폭력과 침탈 앞에 무기력한 조선 지식인들은 이제 단군왕검 자리를 일본 천조대신이, 대한제국 황제 자리를 일본 천황이, 태극기 자리를 일장기가 차지하리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비극 앞에 무기력한 동포를 향해 덧없는 호소만을 쏟아 낼 뿐이었다.
태극기에 새긴 혈서의 신앙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통해 나라의 외교권이 강탈당하고 일제의 조선 침탈 야욕이 극에 달하자 천주교인 안중근(안응칠)과 상동감리교회 웹웟청년회 출신 우덕순 등 항일 투사 11명은 1909년 3월 동의단지회東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손 약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는 혈서를 남겼다.

안중근 의사(왼쪽)와 그의 재판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제작된 '대한의사안중근공혈서' 엽서. 엽서 중앙에 단지회 동지들이 함께 쓴 '대한 독립' 태극기 혈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 태극기의 원본은 안 의사 사후 동생 안정근이 보관하다 1946년 분실했다.

단지회 동지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당국과 남만주 철도 건설을 협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토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채가구역은 압록강 건너 봉천에서 출발한 하얼빈행 기차가 중간에 기관차를 바꾸기 위해 머무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중간 정차역인 채가구와 종착역인 하얼빈에서 각각 이토 암살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다음은 안중근의 '장부가'에 우덕순이 답가 형식으로 작성한 '의거가' 내용이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也런고 /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리를

혹은 윤선 혹은 화차 천신만고 거듭하여 / 노청露淸 양지 지날 때에 앙천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 동반도東半島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오호라 간악한 노적老賊아 / 우리我等 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 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삼천리를 소리 없이 뺏느라고 / 궁흉극악窮凶極惡 저 수단을 (중략)

지금 네 명 끊어 지닌 너도 원통하리로다 / 갑오 독립 시켜 놓고 을사체약乙巳締約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할 줄 나도 역실 몰랐도다 /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너 뿐인 줄 알지 마라 너의 동포 오천만을 /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 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8일 자 1면)

거사에 대한 우덕순의 의지는 이처럼 결연했다. 안중근·우덕순의 이토 암살 계획은 민족 해방을 향한 신앙적 결단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거사의 기회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계획은 우덕순이 하얼빈을 맡기로 했었다. 결행 하루 전에 거사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각자의 위치를 다시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이토가 탄 기차가 채가구역을 통과할 때 러시아 경찰 당국이 역사 전체를 봉쇄하는 바람에 우덕순은 은신처였던 지하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결국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 이토는 안중근의 총에 죽었다.

안중근 의사 공판 장면. 앞줄 왼쪽부터 유동하·조도선·우덕순·안중근.

우덕순의 '의거가',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8일 자 2면.

이로써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우덕순은 징역 3년 형을, 조도선·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우덕순은 경성감옥에 수감 중 1908년의 함흥감옥 탈옥 사건이 드러나 형이 추가되어 7년의 옥고를 치르고 1915년 2월에야 출옥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처단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한반도는 완벽히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태극기는 더 이상 나부낄 공간을 허락받지 못했다. 망국 대한亡國大韓의 비애를 목 놓아 울던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에 강제 매수되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발행되었다. 강제 병합 직후 이 신문에서는 태극기의 처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신으로 보도했다.


"각 학교 및 관청과 회관 양제옥자문洋製屋子門(서양식 건물 입구) 비 위上에 조각凋刻한 태극기호太極旗號를 일전日前부터 일절一切 말거抹去(기록 따위를 뭉개버리거나 지워 없앰)하고 다시更 일본기호日本旗號를 게양 및 부착揭付한다더라." ('잡보 - 태극기호 말거', <매일신보>, 1910년 9월 3일 자 2면)

1910년 가을 이후, 이제 한반도 어디에서도 태극기의 게양이나 표시는 불법이 되었다.



1910년 소위 '한일 합방'을 기념하여 발행된 다양한 기념엽서들. 명치 천황과 고종의 얼굴이 그려진 엽서(왼쪽 위) 배경에는 오얏꽃과 국화,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하고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의 사진이 그려진 엽서(오른쪽 위), 경운궁 대한문이 그려진 엽서(왼쪽 아래)에도 태극기와 일장기가 있다. 봉황이 그려진 '일한 합방 기념' 카드(오른쪽 아래)에는 일장기와 태극기가 대각선으로 교차되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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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나팔 소리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태극기와 한국교회] 태극기를 높이 올린 기독교 학교와 무장 독립 투쟁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09.03 




"대군주 폐하 탄신 날에 평양서 성교聖敎하는 백성 삼백여 명이 국기를 높이 달고 대동강 건너 사각 대청으로 모여 처음에 교우 한석진 씨가 기도하고 우리나라 자주독립한 경사로운 것을 연설하고, 방기창 씨는 모든 교우를 흥기興起하여 독립가를 부르고 이영언 씨는 연설하되 우리나라가 일찍이 청국에 속하여 종노릇만 하더니 지금은 자주국이 되었으니 우리 인민들도 각각 자주할 마음을 두어 대군주 폐하의 성덕을 돕고 태서泰西 각국과 같이 문명 개화되어 보자 혹 풍설을 들은즉 우리나라는 개화되기 어렵다 하나 이는 지각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이라 일본국이 삼십 년 전에 극히 쇠미하더니 지금은 동양에 제일 개화되어 국부 병강하고 인민이 태평한지라 어찌 그러한고 하니 인재를 교육함이라. 우리 조선 사람들도 인재가 없는 바이 아니로되 교육이 없는 까닭이라. 이제부터 교육을 힘 쓰거든면 나라가 저절로 자주 기초가 더욱 튼튼하여질지라 하며 김종섭 씨가 연설하되 우리나라가 단군 기자 때부터 자주독립 이룬 이름도 알지 못하다가 오늘날 우리들이 독립가를 부르는 것이 모두 우리 대군주 폐하의 성신 문무하신 덕택이라 하고 여러 교우들이 만세를 부르고 종일토록 길거拮据 하였다더라." ('잡보', <독립신문>, 1897년 9월 2일 자 3면.)

1897년 고종의 탄신일을 맞은 평양 기독교인들 모습이다. 평양 쾌재정(사각 대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행사에서는 신자 300여 명이 참석해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으며, 한석진이 기도하고 방기창의 인도로 독립가를 제창했다.
이 당시 행사를 진행한 사람들은 장로교의 영수였던 이영언(1898년 사망)을 비롯해 이후 평양신학교의 첫 입학생(김종섭, 방기창 1905년), 첫 졸업생(방기창, 한석진 1907년)으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로서 부흥과 체제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이들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자주독립 국가의 국민,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내재화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후 수학하게 된 신학교에서 자연스레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조화하게 되었다.

1896년부터 제정된 황제탄신기념일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충군애국'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이 행사에는 어김없이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각종 악기를 사용해 '애국가'와 '독립가' 등을 불렀다.

1905년 개교한 평양신학교의 초기 단체 사진을 보면, 한석진은 태극기를, 길선주는 성경을 들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 정체성을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러한 신학생들의 민족주의적 행동에 대하여 사진 속 신학교 교수(선교사)들은 크게 문제 삼거나 경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교수진 스스로도 자국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민족적 혹은 국가적 정체성을 내재화하고 상호 존중하는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세기 말 개신교 내한 선교사들은 다양한 교파적 배경을 지님과 동시에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 근대 서구 다양한 국민국가의 정체성도 강하게 지녔다. 따라서 개항 이후 외국 공관들과 내한 선교사들이 각종 행사나 의례에서 자국의 국기를 사용하던 관행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만 인상적인 일이었다. 특히 전 세계에 파견된 미국인 내한 선교사들이 보인 자국 국기(성조기)를 향한 사랑은 남달랐다. 그들은 교회나 학교를 설립할 때마다 국기에 대한 미국식 태도를 한국인에게 가르쳤다.

1905년 평양신학교 재학생들과 교수들. 맨 앞줄의 한석진이 태극기를, 길선주가 성경을 들고 있다.
기독교 학교와 부흥회에 게양된 태극기


19세기말 20세기 초 열강의 각축장이 된 한국의 위태로운 시대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통한 근대 자주 국가 건설 의지와 독립 정신 고취에 적극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많은 선교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학교를 세워 차세대를 향한 신앙 교육과 민족 교육을 적극적으로 병행해 나갔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배재학당 당훈을 "욕위대자欲爲大者 당위인역當爲人役"(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라)으로 정했다. 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라는 성경 말씀을 교육 이념에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우리 학교의 목표는 통역관이나 기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교양을 쌓은 사람을 만들고자 하는 것"(<미감리교 해외선교부 연례 보고서>, 1892, 285.)이라고 밝히며, 기독교적 근대 교육을 통해 근대적 시민과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아펜젤러 전기를 집필한 그리피스는 이러한 그의 교육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배재학당 운동장에 도열한 학생들.


"이 민족 앞에 아펜젤러는 잔치를 벌이고, 생명의 떡을 찢어 나누고자 했다. 목소리와 펜으로, 낡아빠진 중국 학문에 짓눌려 있던 젊은이들 대신에, 배재학당에서 훈련된 근대적 삶을 영위할 자질을 갖춘 수백 명의 교사들이 아펜젤러의 눈앞에서 배출되었다. 동시에 깨어 있는 젊은이들과 호기심 많은 어른들은 세계와 인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자기 민족과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보다 고상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고무되었다. 그들을 구원하려고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기에." (W.E.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 :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1912, 180.)

이화학당을 창설한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B. Scranton, 1832~1909)도 한국인에 대한 기독교 학교의 교육목표는 한국인의 주체적인 민족성과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 그 가치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다고 역설했다.


"나는 학생들이 서양인의 생활양식과 의복제도를 따르게 하도록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사람을 가장 훌륭한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려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라 교육하려고 힘쓰는 것뿐이다." (The Godpel in All Lands, 1888, 373.)

이러한 초기 한국 기독교의 교육 선교는 단순히 개종자들을 양산하는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근대국가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 즉 애국심과 민족애,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를 향한 헌신과 개혁의 자세를 기독교 교육을 통해 배양하려는 일이었다. 그러한 교육철학에 기초해 19세기 말 20세기 초 풍전등화의 한반도 현실에서 기독교 학교는 자연스럽게 애민 애족 독립 정신 고취의 중심이자 대안적 공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각 교파 선교부들은 서울의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을 모델로 삼고, 각 지역의 교회 건물을 이용해 지역의 아동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매일학교'(Day School)를 실시했다. 그 목적은 기독교 교육을 통한 지역 복음화였다. 당시의 학생들은 전통 유교 가치만을 배우는 서당보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매일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했고, 전국 각 지역의 교회에서는 교인 스스로 학교 건물을 짓고 예산을 마련해 매일학교를 운영했다. '아현여학교', '상동매일학교', '동대문매일학교', '인천매일학교', '평양매일학교', '공주매일학교' 등 전국 각처 교회에서 매일학교 운동이 전개되었다.

매일학교에서는 주로 한글과 한문, 기독교 교리와 성서를 비롯해 근대적 지식들과 예체능을 교육했으며, 매일학교에 입학한 소년과 소녀들은 아동 시기부터 기독교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해 갔다. 인천 내리교회가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한 초등교육 기관인 '영화소년매일학교'(Boys Day School)의 단체 사진과 평남 강서교회에서 운영한 강서매일학교 학생들의 단체 사진을 보면 자연스럽게 태극기가 게양된 모습이 확인된다.



인천 영화학교(위)와 강서매일학교 학생들(1900년대 초). 학생들 배후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남감리교 선교의 일환으로 윤치호가 설립한 개성 '한영서원'(이후 송도고보)에서도 실재적 기술과 지식 습득을 위한 실업교육과 더불어 민족의식 함양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영서원의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으며 촬영한 초기 사진에도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으며, 1907년 개성 지역 기독교 학교 학생들의 야유회 사진 속에서도 어김없이 학생들은 태극기를 들고 행사에 참여했다. 진남포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남포매일학교 학생들이 방문 선교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선두에도 태극기가 게양된 모습이 눈에 띈다.





위쪽부터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 중인 개성 한영서원 학생들(1907년), 개성 인근으로 야유회를 떠난 개성의 신자들과 한영서원 학생들(1908년), 선교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진남포매일학교 학생들(1907년). 이들 모두 각 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다.

감리교뿐 아니라 장로교의 각 지역 기독교 학교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00년 설립된 전주 신흥남학교에서도 선교사 지도하에 모든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도열한 모습(1908년)이 확인되며, 목포장로교회에서 운영한 목포남학교의 학생들이 십자기와 태극기 아래 목총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1908년)도 인상적이다. 평양 숭덕학교 학생들은 대운동회에서 태극기를 들고 집단체조를 실시하고 있다(1907년).





위쪽부터 선교사의 지도하에 태극기를 들고 도열해 있는 전주 신흥학교 학생들(1908년), 목총을 들고 지도교사 및 교인들과 함께 서 있는 목포남학교 학생들(1908년), 태극기를 들고 집단체조를 실시하는 평양 숭덕학교 학생들(1907년). 이들은 모두 기독교 학교에서 태극기를 들고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함께 교육받았다.

이처럼 초기 개신교회와 그 학교들이 보인 태극기 게양의 모습은, 교회가 민족의식을 존중하되 비정치적인 신자들도 육성하기 위한 절충안이었다. 1906년 당시 목포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진행한 프레스톤 선교사의 진술을 보자.


"내가 참여한 가장 강력한 부흥회가 최근 목포에서 일어났다. (중략) 성령의 특별한 초대와 분명한 인도하심으로 남감리교 저다인 목사가 내려와 일주일 동안 하루 두 번 설교했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 중보 기도, 고백의 영이 회중에게 쏟아졌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부흥회 4일 동안 150명이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부흥회 기간 동안 몇 명이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고 설교하기 위해 기도를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했는데, 이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집회의 목적은 외부인 전도보다는 신자들을 일깨우고 생동력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만족스럽게 달성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받은 은혜를 분명하게 간증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회심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먼 지방에서 온 매우 명석한 남자의 경우였다. 그는 정치적 목적으로 기독교를 이용하려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신앙적 경험을 하였다." (J.F. Preston, "A Notable Meeting", The Korea Mission Field, Oct, 1906, 227-228.)

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피탈된 해였으며, 1907년은 고종이 을사늑약의 무효를 세계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국권을 빼앗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한 해였다. 이 조약에는 비밀 각서가 첨부되었는데,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및 경찰권을 일본이 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비밀 각서를 근거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되었고, 이에 항거하는 정미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국권이 피탈되어 가는 시기에, 교회는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로 흘러들어 오는 이들을 경계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종교적 각성과 회개 운동을 통해 이들의 상실감을 위로하거나 신앙 체험으로 정치적 울분을 극복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비록 한반도의 망국과 전환기에 교회는 비정치화와 종교적 심연으로 침잠했지만, 태극기라는 국가 상징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국권피탈이라는 슬픔과 절망을 위로하고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신앙을 통해 발견할 수 있도록 모색했다.


"그해(1907년) 서울은 선교사들이나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생활하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중략) 한국인 장로(길선주)가 와서 이 대도시의 교회들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것은 정화 체험의 시작이었다. (중략) 죄로 인한 고뇌와 슬픔, 고백할 때의 극심한 고통, 삶에서 나타나는 깊고 놀라운 능력의 현상들이 동일하게 나타났다." (Jones & Noble, The Religious Awakening of Korea, 1908, 22-23.)

망국의 그늘이 드리운 태극기를 게양하고 부흥회에 임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느꼈을 죄책감이란 무엇이었을까. 각자의 나태와 안일함, 윤리적 일탈과 무관심 속에서 국권피탈이라는 절망적 상황을 맞았다는 각성이 그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수치와 모욕감을 녹여 내고자 기독교 신앙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자신들을 내어던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가니의 열기가 달아오른 바로 그 현장에서 태극기는 그렇게 민망한 모습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1907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게일 선교사를 환영하는 인파 2000여 명이 서울 연동교회에서 환영회 겸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에도 한국 기독교인들은 태극기와 십자기를 게양했다.
행군 나팔 소리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어서가세 / 바삐가세 / 구세할때 / 늦어가오

구자세자 / 이두자를 / 형제마다 / 깊이 듣고

열심으로 / 단체하여 / 속히속히 / 구세하세

("군가", 32-36행, <필사본 구세군 가사>)

1907년에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이듬해 낯선 신식 군복을 입은 브라스밴드가 행군 찬송을 부르며 황성 거리에 등장했다. 군복을 벗고 망연해 있던 구한국 군인들은 구세군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들은 구세군에 가입하면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외형상 군대의 틀을 갖춘 구세군이었으나 그들에게 총은 지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구세군은 기독교의 기본 원리를 비롯해 엄격한 사회윤리와 절제 운동, 사회악 해소와 빈민 구제라는 사회 선교의 구체적 소명을 가르쳤다.

많은 군인들은 실망하여 구세군을 떠났지만, 일부는 구세군에 남아 이 또한 민족 구원의 새로운 대안의 길이라 믿고 전도와 사회 구제 사업에 동참하고 헌신했다. 이렇게 구세군은 총이 아닌 자선냄비의 종소리로 새로운 나라의 꿈을 향해 행진해 나갔다.

1901년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서울 평동에서 개최된 구세군 한국 총회 모습. 회중 뒤편에 게양된 태극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구세군과 달리 유소년 및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감리교회의 학교에서는 실제적인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특히 한반도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 학교는 민족의식 함양뿐 아니라 군사훈련의 요구 앞에도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군사훈련을 더 체계화한 대표적인 기독교 학교가 공옥소학교와 상동청년학원이었다. 두 학교는 전덕기 목사를 필두로 김구, 이준, 이동녕, 이동휘, 노백린, 이회영, 남궁억, 신채호, 최남선, 이상재, 이상설, 양기탁, 주시경, 이필주, 이승훈, 안창호, 이승만 등 쟁쟁한 민족운동가들이 활동한 상동청년회(소위 상동파)가 운영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1904년 상동청년학원을 통해 민족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 양성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두고, 독립지사들을 강사·교사·특별강사로 초빙하여 차세대 청소년들에게 교수토록 했다. 이 학교에서는 기독교 신앙 교육뿐 아니라 한글, 한국사, 외국어, 각종 신문화(음악·미술·연극 등)와 체육을 교육했다.

특히 체육은 구한국 군대의 직업군인 출신인 이필주(훗날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에게 맡겨 여러 체육 종목을 지도함과 동시에 학생들에게 군복과 같은 유니폼을 입히고,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제식과 행군 등의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이러한 훈련 광경은 서울 시내의 유명한 구경거리였는데, 대내외적으로 한국 청소년들의 기개와 기상을 선보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위쪽부터 내리교회 영화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 광경(1900년대 초), 상동청년학원의 졸업증서(1911년). 감리교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현순 목사가 학원장이었던 때에 한상원 졸업생에게 발급된 졸업증이다.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진 시기인데도 상단에 지구와 한반도, 십자기와 태극기가 교차된 이미지가 사용된 점이 인상적이다.

일제의 한국 침탈이 노골화한 1905년에는,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박용만이 도미하여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 청소년들을 모아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일제에 저항할 독립군 장교로 양성할 목적하에 1909년 미 중부 네브래스카주 커니(Kearney)에 세웠다. 이는 식민지로 전락한 고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해외에서 시작한 최초의 구체적 도전이었다. 그가 미국에 소년병학교를 설립한 것은, 상동청년회와 연계된 나름의 계획을 실행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박용만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과 관련해 <사이토 문서>에 실린 '조선독립운동의 근원'에서 상동청년회에 대한 언급이 이를 시사한다.


"메이지明治 37년(1904) 가을, 즉 러일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때에 예수교 전도의 이름 아래 상동청년회라는 것이 출현하였다. (중략) 청년회의 간부는 이동녕, 이승만, 정순만, 이희간, 박용만, 조성환 외에 예수교 목사 전덕기를 회장으로 하고 (중략) 회의 사업은 청년학원을 경영하여 뜻있는 청년을 양성하는 외에, 미국에 이민의 명분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이민 개발 회사와 묵계를 맺어 이희간을 러일전쟁 중에 고등군사탐정으로 종군하여 얻은 6만 8000원 중 1만 3000원을 유학생의 미국 상륙 휴대금으로 유용하고, 박용만과 이희건(이희간의 동생)을 미국에 파견하여 그 수지(상륙 후 휴대금은 바로 반환하는 방법)를 맞추었고, 이어 이승만도 유학생 감독으로 도미하고 이희간도 또한 상황 시찰을 위해 일시 도미하였다." (<조선총독부관계사료 "齋藤實 文書" 9>, 고려서림, 1990, 354-360.)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는 상동청년회 활동 당시 상동교회에서 운영한 공옥소학교와 상동청년학원에 큰 영향을 받았다. 상동청년학원의 교과목이 "국문, 영어, 한문, 산술, 지지, 역사, 습자, 수신, 성서, 체조"("학원모집광고", <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인 점과, 1909년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목이 "국어, 영어, 한문, 일본어, 수학, 역사, 지리, 과학, 성서, 병학"(안형주,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지식산업사, 2007, 171-173.)인 점을 보면 소년병학교가 상동청년학원의 교육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년병학교에서 상동청년학원과 달리 '습자'(글쓰기)와 '수신'(윤리·도덕)을 빼고, '일본어'와 '과학'을 추가한 것만이 예외적이며, 두 학교 모두 '성서'를 중요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네브래스카주 커니와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위)과 그 훈련 광경.

공옥소학교와 상동청년학원에서 강조한 교육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 고양 및 군사훈련이었다. 1907년 당시 공옥소학교 학생들이 행진하며 부르던 <행보가行步歌>는 상동청년회의 교육 이념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준다.


산 곱고 물 맑은 우리 동반도는 / 사천년래 살아오는 우리 땅

사시 기후 항상 좋고 화평한데 / 우리 그 중에서 호흡하누나

하나님은 좋은 천지 주셨으나 / 지금 우리 더욱 힘쓸 때로다

전일 태도 급히 벗어버리고서 / 강한 용맹으로 다 나아가누나

지식을 넓히고 신체를 강케해 / 부강흥성하는 모든 학문을

주야 바삐 촌음 다투어가면서 / 풀무 속에 백련 강철이 되게

약육강식 험한 오늘 당한 세계 / 열심하는 의기 우리 갑줄세

사면 열강들은 호랑들 같으나 / 무릅쓰고 마고 몰아나가세

(후렴) 나아가누나 나아가누나 / 우리 학생들이 나아가누나

("공옥소학교 행보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3일 자.)

박용만은 바로 상동청년회의 이러한 교육 이념을 더욱 강화하고, 미주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무장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다음은 한인소년병학교의 군가이다.


이 몸 조선 국민 되어 / 오늘 비로소 군대에 바쳐

군장 입고 담총하니 / 사나이 놀음 처음일세

군인은 원래 나라의 번병藩屛 / 존망과 안위를 담당한 자

장수가 되나 군사가 되나 / 나의 직분 나 다할 것

나팔소리 들릴 깨마다 / 곤한 잠을 쉬이 깨어

예령 돌령 부를 때마다 / 정신차려 활동하라

우리 조련 이같이 함은 / 황천이 응당 아시리라

독립기 들고 북치는 노래 / 대장부 사업 이뿐일세

(후렴) 종군악從軍樂 종군악 / 청년 군가 높이 하라

사천년 영광 회복하고 / 이천만 동포 안녕토록

종군악 종군악 / 이 군가로 우리 평생

("소년병학교 군가", <신한민보> 1914년 4월 16일 자 2단.)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목적은 첫째, 장기적인 독립 투쟁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서방의 최신 군사교육을 습득해 우수한 핵심 장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둘째, 문약文弱해진 민족의 성격을 바로잡고 폭넓은 신지식과 세계정세에 밝은 눈을 갖도록 서방국가의 앞선 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안형주의 같은 책, 124-125.)이었다. 하나 더 추가하면, 기독교 신앙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의식과 의지를 함양하려 한 것이다. 당시 소년병학교의 일과시간표를 보면, 오전 6시 기상 이후 오전 7시 50분에 아침 예배를 드리고 하루 종일 교육과 훈련을 마친 후, 오후 9시 10분에 저녁 예배를 드리고 하루 일과를 마치는 일상(124-125.)이었다. 소년병학교의 하루 시작과 마무리는 '예배'였던 것이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을 전후하여 뜨겁게 타오른 민족의식과 애국심, 일제 침탈에 대한 적개심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이 학교를 통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해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파견, 무장 항일 투쟁 운동을 지원하려 했다. 하지만 한인소년병학교는 1914년 6기 생도를 받고 폐교의 운명을 맞았다. 일본이 미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해 압박을 느낀 헤이스팅스대학이 지원을 끊었기 때문이다.

소년병학교는 6년간 170여 명이 입학해 40여 명이 졸업했다. 졸업생들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고, 학계와 언론계 등에 종사하기도 했다. 소년병학교 동문 중 널리 알려진 이로 기독교 실업가인 유일한(유한양행)과 초대 보건사회부장관 구영숙 등이 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자리를 옮겼던 박용만은 다시 하와이로 이주해 1913년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창설하고 300여 명의 군인을 양성했다.



박용만은 1914년 6월 하와이 오아후섬 카훌루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사관학교를 개교했으며, 이곳에서 300여명의 군인들을 훈련시켰다. 국민군단 사열식 모습(1913년, 위)과 훈련 중 휴식 광경(아래). 훈련병들 뒤로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네브라스카 커니의 농장과 헤이스팅스의 캠퍼스, 국민군단사관학교의 오아후섬 훈련장 등은 비록 타국의 설움과 외로움이 가득한 땅이었지만, 망국의 절망 속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강열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피땀 흘린 역사의 현장이었다. 나라 잃은 소년과 청년들이 기도하며 바라보았을 네브래스카와 하와이의 태극기는 그렇게 처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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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통의 태극기와 차별 극복의 모뉴먼트
[태극기와 한국교회] 만민이 평등한 대동 세상을 꿈꾸는 태극기의 역설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11.01 10:09



"19세기 중엽 우리나라 연해에는 수많은 외국 군함들이 출몰했는데 그 군함에는 한결같이 국기와 소속을 알리는 기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국기가 특정한 나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과 개항 조약을 맺을 때 일본에서는 국기를 내걸었으나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 사절이 조선의 국기는 무엇이냐고 묻자 오경석吳慶錫이 임기응변으로 강화 연무당 여기저기에 그려진 태극을 가리키며 '저것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이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태극은 건축물이나 생활 도구 등에 많이 그려져 있어 그 말이 억지는 아니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 : 500년 왕국의 종말>, 한길사, 2003, 225-226.)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근대적 의미의 외교 관계나 조약, 국가 개념 및 상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이때가 태극이 구한말 조선과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그 방향이 대략 결정된 시점이었다. 변화하는 국제 현실과 제국주의의 발호에 무지한 한 관료의 임기응변적 손짓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민중도 <주역>과 <태극도설> 같은 철학서의 심오한 이론과 의미까지 헤아리진 못했겠지만, 태극에 담긴 천지 음양, 태극이 남녀 귀천이 조화하고 평등하는 대동大同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몸과 삶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태극은 개항기 이후 한국 사회와 민족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채택되고 민중의 생활 속에 깊숙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대한성공회 강화읍교회 대문에 그려진 십자가와 태극 문양.
역설적이게도, 구한말 태극기는 외적으로 조선 500년이 추구하고 구축해 온 지배 가치와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지만, 내적으로는 억눌리고 잠들어 있던 민중 역할에 대한 각성과 대동 세상을 향한 욕망을 자극해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달음박질치게 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반상의 차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제가 국가 시스템과 사회제도로 고착된 조선 500년의 끝자락에 서서 이러한 태극 사상과 대동 세상의 구체적 실현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에는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도도히 흐르는 대동사상과 그 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大道之行也,天下爲公 (대도지행야 천하위공) 選賢與能, 講信修睦 (선현여능 강신수목)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고인부독친기친 부독자기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사노유소종 장유소용 유유소장 환과고독폐질자 개유소양) 男有分, 女有歸 (남유분 여유귀) 貨惡其棄於地也, 不必藏於己 (화오기기어지야 불필장어기)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역오기불출어신야 불필위기) 是故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시고모폐이부흥 도절난적이부작 고외호이불폐) 是謂大同 (시위대동)"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천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현명한 자를 등용하고 능력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이 아닌 남의 부모도 사랑하며, 자기 자식뿐 아니라 남의 자식에게도 자애롭게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재주와 능력을 펼칠 수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혼자 남겨진 남편, 부인,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들은 모두 각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여자들은 돌아갈 곳이 있도록 한다. 물건은 아무 곳에 두더라도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스스로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음모를 꾸미거나 간사한 모의가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횡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문을 열어 놓고 닫지 않으니 이러한 사회를 일러 '대동 세상'이라 한다."]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그렇게 구한말 태극기의 게양과 함께 조선 500년 동안 억눌린 어깨를 펴며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새롭게 드러낸 상징적 인물이 바로 백정 출신 기독교인 '박성춘朴成春'(1862~1933)이었다.

1894년 그가 중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아들 봉출(박서양)이 곤당골 예수교학당의 무어(S. F. Moore) 선교사에게 아버지의 응급 상황을 알렸고, 무어는 당시 고종의 시의侍醫로 활동하고 있던 에비슨(O. R. Avison)을 대동해 왕진 치료를 해 주었다. 마침내 기사회생한 박성춘은 크게 감동하여 곤당골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백정의 출석에 반발하는 양반들의 모습을 맞닥뜨리게 된다.


"선교사 무어 목사는 여러 조선인들을 일요일마다 교회에 모이게 했는데, 박성춘도 이 모임에 들어갔다. 물론 이들은 갓도 쓰지 않은 사람들이 끼어드는 것을 보고 눈을 흘겼으며, 백정의 친구들이 집회에 많이 나오기 시작하여 이 모임이 흔히 백정교회라 불리게 되자 몹시 당황하게 되었다. 무어는 양반들과 협의하고 교인인 백정을 교회 밖으로 몰아낼 수 없다고 했으며, 결국 양반들이 교회에서 나오기로 결정하여 교회가 번성하게 되었다." (O. R. 에비슨, <구한말 비록>, 대구대학교출판부, 1984, 193-196.)

무어 선교사는 기독교의 '만민 평등' 가치를 내세워 백정들을 교회에서 내보내 달라는 양반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에 반발한 양반들은 인근 홍문섯골교회로 분립해 나갔다. 이렇듯 선교 초기 기독교는 조선 500년의 고질적인 신분제도와 차별, 배제의 인습과 문화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안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었다.

백정 출신 박성춘이 장로로 장립된 승동교회 신축 예배당 모습(1913년 준공).

기독교의 '만민 평등'의 정신에 고무된 박성춘은 이후 백정 해방 운동을 펼쳤다. 갑오개혁으로 명목상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백정을 향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여전하여 백정은 호적도 없고, 상투도 틀지 못하며, 갓이나 망건도 쓸 수 없었다. 당시 백정들 중에는 정부의 칙령만을 믿고 도포를 입고 외출했다가 구타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1895년 콜레라가 만연했을 당시 방역 책임자로 활동했던 에비슨은 정부를 대표한 유길준의 감사 편지에 회신하며, 백정도 상투를 틀고 갓을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박성춘도 무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 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해 5월 13일 백정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칙령이 다시 한번 반포되고 11월에는 전국에 방이 붙었다. 이에 환호한 박성춘은 '500년 동안' 금기시되었던 의관衣冠을 갖추고 여러 백정들과 함께 하루 종일 종로 거리를 행진했다. 얼마나 좋았던지 잘 때도 갓을 벗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박성춘의 이러한 경험은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서, 새로운 대동 세상의 시민 사회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898년 3월 10일부터 독립협회 주최 하에 외세의 침탈과 이권 개입, 간신들의 전횡과 부패에 대해 비판하는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가 수개월간 개최되었다. 이 당시 첫 모임에만 한양 시민 1만 명 이상이 종로 거리에 운집해, 정부의 정책과 외세의 침탈 행위에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더 적극적인 자주독립과 사회 개혁 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만민공동회의 군중집회는 10월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10월 29일 정부 관료들도 함께하는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의정부 참정 박정양을 비롯한 법무대신, 탁지부대신, 중추원 의장, 한성부판윤 등 정관계 거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러한 대규모 시국 집회의 개막 연설자로 단상에 선 인물은 바로 백정 출신 박성춘이었다. 그는 조선의 천민 출신으로, 정부의 관료들과 시민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1898년 10월 29일 종로에서 개최된 관민공동회에서 개막 연설을 하는 박성춘. 그는 백정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정부 관계자와 한양 시민들 앞에서 시민의 권리와 책임에 대해 역설했다. 그의 등 뒤에는 당당하게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하는利國便民 길은 관민官民이 합심한 연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햇볕을 가리는 천막(차일遮日)에 비유하자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하면 그 힘이 심히 견고(공고鞏固)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독립협회에서 주최한 관민공동회, 박성춘의 개막 연설 중에서, 1898. 10. 29.)

이 연설은 불과 수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인 일개 백정이 조선 500년 뿌리 깊은 신분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사회의 새로운 출현을 양반 관료들과 시민들 앞에서 당당히 외친 한국 근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였다.

만민공동회의 노력으로, 마침내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원칙으로 황제에게 제출된 헌의 6조를 관철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자주성을 가진 군주 주권국가를 확립하되 의정부를 폐지하고, 서구의 상원의회와 같은 중추원을 국가 의결기관으로 설립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일을 비롯해 재정 기관의 탁지부 일원화, 공정한 재판제도 확립, 외세의 배격, 부정부패 척결, 공정한 인사 제도 도입 등 정치와 사회제도의 개혁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이러한 개혁 성과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의회(중추원) 설립이 아닌 황제 폐위와 민주 공화제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전단을 뿌리고 고종에게 모함했다. 이에 놀란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으며, 정치 깡패(보부상)들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진압하고는 결국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했다.

독립협회와 일진회. 왼편의 독립관은 청나라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을 1896년 독립협회가 개수하여 사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회의를 개최하거나 시국 집회, 대중 계몽 강연회 등을 열었다. 한편 독립관 옆 팔각형의 양관에 자리를 잡은 일진회는 친일 매국 단체로 조선의 문명 개화를 촉진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에 앞장섰다.

이렇게 박성춘이 개막 연설에 참여한 관민공동회는 한국 사회에 자주적 민주 시민사회의 희망을 보여 주었지만, 기득권에 눈이 먼 황제와 수구파들에 의해 그 꿈이 짓밟히고 말았다. 하지만 백정 박성춘은 태극기가 게양된 관민공동회 단상에 올라, 종로 거리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 한양 시민들을 향해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자신의 이름과 생명을 걸고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참하겠다고 외쳤다. 이 연설은 이미 한반도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성춘의 아들 봉출(박서양)은 이후 에비슨 박사의 제자가 되어 세브란스의학교 첫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첫 한국인 교수가 되었는데, 백정 출신 교수의 부임 소식에 불만과 저항의 태도를 보인 당시 의학생들에게 그가 첫 강의 단상에서 했던 일성一聲 은 다음과 같았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왼쪽)의 도움을 받아 에비슨이 수술하는 장면(오른쪽)을 찍은 유리 건판 사진(등록문화제 제448호)이다.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십시오."

평민과 양반 출신 학생들에게 무시와 냉대, 조롱을 받았던 그는 기독교 신앙을 통한 정체성과 존재의 회복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고, 이후 만주로 이주해 한인 이주 사회를 위한 의료 및 교육 사업, 독립운동과 독립군 지원 사업을 이어 갔다.

이렇듯 백정 출신 박성춘과 박서양 부자의 삶에 기독교와 태극기는 그렇게 아로새겨져, 그들의 인생이 더 넓은 터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성취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 되었다.
서린동 한성감옥의 개종자들


백정 박성춘이 1898년 만민공동회 개막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역사적인 자리에는 현재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영풍문고가 들어서 있는 서린동은 사실 조선 시대 죄수들을 수감하던 한성감옥(전옥서)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조선 후기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도 다수 수감되거나 순교했으며, 외세 침탈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에 저항한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들도 이곳에서 처형(1895년 3월 30일)되었다.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 사상은 유교의 차별적 세계관을 국체로 숭상하는 이들에게는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처형되기 직전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새벽에) 남몰래 죽이느냐?"고 관원들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부패하고 무기력한 당대 조선의 국가권력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처형도 은밀히 숨어서 진행할 수밖에 없을 만큼 허약하고 비겁했다.



전옥서로 끌려가는 전봉준의 모습(위)과 현재의 전봉준 동상(아래).

전봉준 장군의 처형 이후 창설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부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근대 민주주의를 소개하면서 개혁적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수구 세력들이 고종을 설득해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이에 연루된 이들을 한성감옥에 수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곳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던 인사들은 내부 토목국장을 역임했던 남궁억, 개화파 원로 유길준의 동생인 유성준, 시위 진압 책임이 있는 경무관인데도 오히려 독립협회를 지지했던 김정식, 처음부터 독립협회 핵심 세력으로 참여했던 이상재와 그의 아들 이승인, 법무협판을 지낸 이원긍,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 후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배재학당 학생 신흥우·박용만 등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수감 당시 개화 인사들 모습. 맨 왼쪽의 이승만은 중죄수 복장으로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김정식, 이상재, 유성준, 홍재기, 강원달. 뒷줄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한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당시 개화파 양반 엘리트들의 집단 투옥은 한성감옥 내에 적잖은 변화를 불러왔다. 1902년에 새로 부임한 김영선 감옥서장은 이승만의 요청을 수용해 옥중 도서관을 설치했다. 독립협회의 양반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언더우드·아펜젤러·벙커·헐버트 등의 선교사들은 이때를 양반 엘리트층에 대한 전도 기회로 삼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서적을 한성감옥에 넣어 주었다. 다양한 서구의 과학·철학·역사·정치 관련 서적뿐 아니라, 한글 성경과 기독교 서적도 함께 제공되었다.

한성감옥을 찾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승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03년에 이르러 이상재와 이승만, 김정식, 박용만, 유성준 등 양반 유학자들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읽기 시작하면서 감옥 내 집단 개종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때는 마음속 깊이 정치적 야망과 정적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웠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집단 회심은 정치적 야심가의 모습에서 겸양의 신앙인으로 스스로를 변모케 했다.

집단 개종한 이후 한성감옥의 수감자들. 이전보다 표정이 밝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다.


"이 해(1903년) 12월 말에 피수된 여러 동지들이 모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 오늘날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얻음은 모두 이근택 씨(당시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한 정적 - 필자 주)의 덕이라 출옥한 후에는 그를 심방하고 치사함이 옳다 하고 원수 갚을 생각이 이같이 변한 것을 일동이 감사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유성준, '밋음의 동기와 유래' <기독신보>, 1928. 7. 11. 5쪽)

1903년 한성감옥에서의 양반 엘리트 그룹의 집단 개종 사건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주로 민중 계층을 중심으로만 수용되던 상황에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개종한 이들은 이후, 한국교회의 충실한 지도자로서, 구국 계몽 운동의 선구자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후 수립되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주축 멤버들이 모두 이들 옥중 개종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피맛길, 그 차별의 역사를 끊고
우뚝 선 새 시대의 모뉴먼트


서울 종각의 옛 성서공회와 예수교서회 자리 바로 맞은편에는 한국 기독교의 청년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했던 서울YMCA가 위치해 있다. 과거 조선 500년 신분 차별의 상징적 길이었던 종로 뒷골목, 피맛길. 사대부들의 가마를 피해 민초들이 걸어야 했던 저 500년 묵은 옛길의 질기고 질긴 숨통을 단숨에 끊어 버렸던 그 건물이 바로 오늘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서울YMCA회관이었다. 1908년 준공한 이 건물은 마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기념비(Monument)와도 같았다.

1908년 준공 초기의 종로 YMCA회관. 현관 초입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이 새 회관은 서울의 심장부에 우뚝 서 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진고개의 천주교당과 덕수궁을 빼놓으면 이 회관은 서울에서 가장 훌륭하고 출중한 건물이다." (J. S. Gale, Korea in Transition, 1909, 238-239.)

기독교청년회(YMCA)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청년들의 세계적 연대체로서, 기독교 정신이 사회 속에서 구체적 모습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1844년 창립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한국의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이후 1904년부터 미래 청년 지도자들을 양성키 위해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이라는 교육기관도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YMCA 운동을 주도한 헐버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다 살펴봅시다. 한국의 개신교 기독교인이야말로 이 강산의 가장 총명하고 가장 진취적이며, 가장 충실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중략) 그들의 비전을 흐리게 하는 올가미를 걷어 버리게 하고, 그들의 희망을 밝혀 주는 데에는 뭐 대단한 캠페인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 문을 연 YMCA가 도와주면 됩니다." (H. B. Hulbert, The Education Needs of Korea, The Korea Review, 1904년 10월호, 451.)

임시 건물에 교실을 마련한 청년회학관은 처음에는 야학 형식으로 150여 명의 학생들에게 주간 3일의 교육을 실시했으며, 1906년에 이르러 수강 인원의 증대로 학관이 정식으로도 발족했다. 청년회 학관에서는 기독교와 신문물을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배우지 않았다. 실용적 기술(설계, 목공, 염색, 섬유, 도자기, 비누, 피혁, 인쇄, 양화, 사진, 금속가공 등)과 실업교육도 병행했다.



YMCA회관의 기계공작(위), 목공 실습(아래) 광경.


"금개今開한즉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각 학교를 창설하고 국내 청년들을 교육하는데 그중其中에 공업교육과를 특설特設하고 과목과 연한을 규정하여 물품 제조하는 학술을 교습하여 (중략) 한국의 부흥지원富興之原이 재차在此할지라. 전국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이 숙대어시孰大於是리오. 차此는 본국의 유지제씨有志諸氏와 외국의 인애제군자仁愛諸君子가 병심동방幷心同方하여 진실주거眞實做去함이니 상천上天이 한국을 권애眷愛하시는 은총이 아니면 영유시야寧有是也리오." (이상재, '富興說', <황성신문>, 1906년 11월 7일)

직접 기술을 연마하는 공작 실습 참여를 선뜻 내켜 하지 않던 양반 출신 청년들도 결국 노동 실습에 참여하게 되었고, 청년회에서 실시하는 야구·축구·농구·배구 등 다양한 스포츠 게임을 통해 노동과 체육의 가치와 의미를 깨달아 갈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통해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이와 차별은 서서히 불식되어 갔다.

YMCA의 이러한 사회변혁적 활동에는 한국 강점을 노골화한 일제에 대한 항일 의식과 애국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1907년 1월, 250여 명이 참여한 YMCA 월례 회의를 은밀히 참관한 일본공사관 직원의 보고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온다.


"애국가, 이 창가唱歌는 비애悲哀다. 즉, 그 뜻은 우리나라 삼천 리 강토疆土와 500년 종사宗社를 천주天主에 빌어 독립을 빨리 회복해 주십사고 노래하는 것으로서, 듣기에는 눈물이 나도록 (중략) 기도하고 폐회하였다." (일본공사관 편책, 1907년 기밀 서류철 갑 사법계에 수록된 일련의 청년회 상황 보고, <한국 독립운동사 1>, 401쪽)

위 문서에서는 의사부議事部 보고와 이상재 선생의 연설, 신임 학감 및 공업 교사 그레그(G. A. Gregg) 소개 등의 진행 과정이 묘사되고 있는데, 신임 학감 소개에 덧붙여 "우리들은 잘 공부하여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학감의 마음에 보답할 것을 명심하여야 하며, 또 우리는 (중략)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특별히 강조해 기록했다. 당시 YMCA의 청년운동, 교육 운동의 목표와 정체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YMCA학관은 보통과·어학과·공업과·상업과·야학과 등으로 나뉘어 다양한 근대 교육을 시도해 나갔으며, 개교한 지 3년이 지난 1907년에 이르러서는 학생이 1800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1906년부터 1907년 6월까지 10개월간의 통계에 의하면 축구 경기가 56회, 실내 체육 경기가 33회 개최되었으며, 부족한 체육 시설에 대한 아쉬움이 수시로 토로되었다.

또 1906년부터 7년까지 성경연구회의 모임 횟수가 크게 증가했으며, 여병현, 윤효정, 이승만, 안창호, 윤치호, 이상재, 이준, 최병헌, 전덕기, 김규식, 지석영 등이 연사로 참여한 종교 집회와 강연회에는 회마다 평균 16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1907년 세계적인 선교 운동가이자 국제YMCA 학생부 책임자였던 존 모트(J. R. Mott)가 내한해 집회를 진행했을 때에는 6000여 명의 관중이 모여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창단 초기의 YMCA야구단 모습.

1909년 삼선평三仙坪에서 개최한 황성기독교청년회 주최 축구 대회. 축구 대회 운동장에는 십자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1903년 11월 향정동(현 인사동, 태화빌딩 자리)에 처음 임시 회합 장소를 마련하고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온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날로 성장하는 청년 사업의 요구에 더 이상 회관 건축을 미룰 수 없었다. 정령正領 벼슬을 한 현흥택玄興澤의 24칸 기와집(지금의 종로2가 9) 기증으로 대지가 마련된 후, 중국 상해의 알제비스리(Alger Beesly)사의 건축사 퍼시 비스리(Percy M. Beesley)가 1906년 3월 서울을 방문하여 설계와 건축 관련 조사를 실시했다.

건축 경비는 국내외 모금으로 충당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의 4만 달러 쾌척과 각계각층의 위정자들과 시민, 독지가들의 후원을 통해 1907년 5월 중순부터 공사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설계 감리는 돈함(B. C. Donham)이 맡았고, 공사는 헨리 장(Henry Chang)이라는 중국인이 맡았다.

YMCA회관 건축을 위한 모금 홍보 사진. 태극기와 기부금이 어우러져 있다. 월간지 <THE WORLD'S WORK> 1908년 10월호에 소개된 사진이다.

1907년 기공식 이후 건축이 한창 진행 중인 YMCA회관.

마침내 1907년 11월 14일 오후 2시, 신축 YMCA회관의 상량식이 개최되었다. 당시 나이 11세의 황태자 이은李垠과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대신 이완용과 각부 대신들, 중추원 칙임관들, 일본군 조선주둔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내외국 고등관들과 외교 사절단, 미합중국 주한 총영사, 내한 선교사들, 한국교회의 지도자 등이 건평 600평, 벽돌 3층의 위용을 갖춘 종로의 신식 빌딩 건축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조선통감과 일본군사령관의 밀착 호위(혹은 감시)하에 참석한 황태자는 신화新貨 1만 원을 하사하고 '一千九百七年'이라는 여섯 글자를 적어 주었고, 황태자와 통감은 나란히 회관 입구의 초석 둘을 하나씩 정초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기독교 신문 <예수교신보>는 황태자의 글씨에 대해서만 보도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정초식에 참가한 황태자 이은(1907년, 왼쪽), 황태자가 직접 쓴 '一千九百七年' 정초석의 현재 모습(오른쪽).


"그때에 황태자 전하께옵서 금 일만 환을 하사하옵시고 예필睿筆로 일천구백칠 년 여섯 자를 크게 쓰셨는데 여러 손님들이 다 들러 구경하더라." (<예수교신보>, 1907년 11월 27일 자.)

이 글씨가 적힌 정초석은 6·25 전쟁 당시 폭격에도 살아남아, 1961년 재건한 서울YMCA회관 입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을사늑약 이후 망국의 그늘이 드리운 종로 하늘 아래 새 시대의 이상과 한국의 독립 자주를 외치는 청년운동 단체 회관 기공식에 참가한 이들의 면면은 그로테스크(grotesque)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마지막 안간힘으로 몸부림치는 청년들의 치열함과 처연함이 교차하는 자리. 절망이 절정에 이른 곳에서 극한의 희망을 쏘아 올리던 역설의 자리였다.



학관 학생들이 도열한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의 모습으로, 입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위). 현재의 서울YMCA 빌딩 전경(아래).

1908년 12월,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이 낙성하여 개관식을 거행했다. 개관 예식은 3일간 지속되었으며, 서울의 수많은 교회와 학원에서 본 회관의 개관 축하 행사를 가졌다. 새 회관은 960평의 부지와 약 600평의 건물로 강당, 체육관, 교실, 도서관, 공업실습실, 식당, 목욕탕, 사진부, 사무실, 소년부 등 다양한 기능과 공간을 구성했다. 게일 선교사는 1905년 선교 편지에서 YMCA회관의 의미와 건축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YMCA회관이 일반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YMCA는 이제 시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 회관은 상가와 관가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고 대지는 훌륭한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나가 쉽게 찾아올 수 있다. 무엇보다 흐뭇한 일은 많은 사람들이 이리로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1년 동안 내쳐 더 큰 회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제 YMCA를 통하여 나의 다년간의 소원이던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천민의 자식, 상인들의 자식, 선비 또는 양반들의 자식이 한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밤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질레트 씨가 별도로 각종 교육사업과 강연 등에 관한 보고를 하였거니와, 모든 사업을 하든지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기도를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성경 공부는 계동桂洞(북촌의 한 동리)에 사는 양반집에서 금요일마다 한다. 그 당시 한성판윤이던 김 씨는 성경 공부를 하는 데 자기 집 사랑채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계동에서 찬송가 소리가 나기는 이것이 처음 일이며, 성경 공부를 하는 것도 이것이 처음이었다. (중략)



지금 이때야말로 한국이 천시天時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YMCA는 이 도시 청년들의 유일한 집회 장소로서 또 실질적인 사교 장소로서의 의의가 크다. 미신은 서구적인 세력에 밀려 무너져 가며, 국민 생활은 전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청년들이 천시를 만나고 국민 생활이 변하고 있는 것, 일평생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일하던 애국자들에게는 다시없는 기쁨이요, 힘이 아닐 수 없다. 신자들이 이처럼 많이 모여드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이 이 나라를 버리시지 않으며, 도리어 큰일을 예비하사 YMCA를 통하여 그의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J. S. Gale’s Letter to the International Committee, YMCA, New York, on June 1905)

게일의 증언대로 "천민의 자식, 상인의 자식, 양반의 자식"이 차별과 구별의 구습을 극복하고, 기독교의 복음과 신앙 안에서 민족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한자리에 앉고, 뜻과 힘을 모으기 시작한 그 자리. 종로통 피맛길의 심장부에 새 시대의 기념비(모뉴먼트)로 우뚝선 YMCA회관에는 그렇게 자랑처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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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못다 이룬 꿈, 태극으로 새기다
[태극기와 한국교회] 3·1 운동의 유산과 태극에 투영한 희망의 신앙
기자명 홍승표
승인 2020.12.10 20:11


"그날 우리의 아들이 태어났다.



의식이 반쯤 돌아온 상태에서 나는 병원에서 커다란 동요가 일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문들이 열렸다 닫히고, 귓속말과 고함 소리,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발끝을 들고 조심조심 걷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내 방에 살금살금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어느 순간 눈을 떴더니 간호사가 아기가 아니라 종이 뭉치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그 서류를 내 침대의 이불 밑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바깥 거리도 온통 소란스러웠다. 간간이 비명 소리와 총성이 들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만세, 만세' 하고 외치는 커다란 함성이 계속 반복되었다. '만세!' 그 소리는 거의 포효와 같았다." (메리 린리 테일러,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책과함께, 2014, 225.)

3·1 운동 당시 갓 출산한 산모였던 메리 테일러(Mary L. Taylor)의 자서전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그의 남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는 1896년 광산업자로 내한했다가 UPI 통신사의 임시기자직을 겸하게 되어 3·1 운동을 가장 먼저 세계에 타전했다. 이후 원한경 선교사(H. H. Underwood), 미 영사 커티스와 함께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3·1 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학살 현장을 취재해 세계에 고발한 한국인의 선한 벗이자, 양심적인 언론인이었다.

이 부부의 외아들 브루스가 태어난 직후 세브란스병원 병실에서 메리가 목격한 3·1 운동의 풍경들은 생동감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세브란스 직원들(선교사와 한국인 간호사들)의 인식과 대응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메리 테일러와 앨버트 테일러 부부.

테일러가 취재한 제암리 사건 현장


"'우리도 모두 한국인들의 대의가 성취되기를 기도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수간호사는 창가에 모여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국인 간호사들에게 돌아서서 무어라고 말을 했다. 이어서 모두 함께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했다. 그런 다음 수간호사를 선두로 재빨리 병실을 나갔다." (메리 린리 테일러,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책과함께, 2014, 226.)

메리는 에스텝 수간호사를 통해 세브란스병원 직원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인쇄기를 병원 시트 보관 창고에 숨겨 뒀는데 발각되었고, 경찰들이 인쇄물을 찾고 있지만 그것들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에스텝 수간호사는 한국인들이 벌인 만세 운동을 두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평화적 시위라고 말했다. 메리는 "지금 한국은 전 세계의 모든 민중과 손을 잡고 자유와 인류애를 다짐하고 있었다. 나는 수간호사의 들뜬 표정에서 그녀 역시 그들과 같은 이상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세브란스에서 출산 직후 아들을 안은 메리 테일러. 그녀는 창밖으로 3·1 운동의 군중을 바라보았다.

서울 태평로를 가득 메운 3·1 만세 시위 군중.

간호사들이 메리의 침대 밑에 숨겨 놓은 종이 뭉치는 기미 독립선언문이었다. 병실이 어둑할 무렵, 아들을 보러 온 남편 앨버트는 종이 뭉치를 발견해 급히 아들을 내려놓고 한 장을 꺼내 읽었다. 그는 아들과의 행복한 밤을 뒤로하고, 그날 밤 동생 빌에게 독립선언문 사본과 3·1 운동에 대해 쓴 기사를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보냈다. 더 엄격하고 삼엄한 검속령이 내려지기 전에 이 놀라운 소식을 미국 본사에 타전하기 위함이었다. 앨버트는 급히 기사를 넘기고 난 후,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잠든 아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일본인들이 많은 시위자를 체포하고 진압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태극기가 교차되어 편집된 <독립신문> 3·1절 기념호(49호, 1920년)의 독립선언서. 본 선언서 왼쪽 측면에는 "대한민국 2년 3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1919년 4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 전문과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 임시헌장, 선서문, 정강 등이 담겼다. 여기에도 태극기가 교차 삽입되었다.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앨버트와 메리는 외아들 브루스의 탄생만큼이나 한국인의 독립선언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한국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함께 응원했던 푸른 눈의 선한 이웃이었다. 이후 전개된 한국인의 시련과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세상에 전하고자 애썼던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증언자였다. 이러한 그들의 드라마틱한 삶의 한 장면이 펼쳐진 장소는 기독교 의료 선교 기관 세브란스병원이었다.
일장기가 삽시간에 변하여
태극기 되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이자 개신교 연합 의료 선교 기관이었던 세브란스병원(제중원)에는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李甲成(1889~1981)이 제약 담당 사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의전 재학생 이용설은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병원 지하에서 등사해 세브란스 의전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캐나다 출신 세균학 교수 스코필드 선교사는 내한 선교사로서는 유일하게 이갑성과 은밀히 소통하며 3·1 운동에 협력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후 3·1 운동의 진상과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해외에 알리는 일에 적극 협력했다. 졸업생들 중에도 박서양과 김필순, 이태준, 배동석, 이용설 등 의사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가 적지 않았다.

이렇듯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는 역사적 의미를 따졌을 때 단순히 한국 기독교의 선구적 의료 선교 기관일 뿐 아니라 스러져 가는 민족과 국가의 독립과 미래를 위해 헌신한 민족운동의 기지 역할도 감당했다.

태극 문양이 표기된 제중원의 약 광고(왼쪽, <독립신문> 1898년 10월 12일 자).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이토 히로부미가 세브란스병원에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장면(오른쪽, 1908년). 병원 외부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세브란스병원 내 태극 모양으로 조성된 정원에서 기념 촬영을 한 세브란스 간호학교 학생들 모습(19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뿐 아니라 기독교 연합 대학인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연희전문 학생대표 김원벽金元璧이었다. 김원벽은 민족 대표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서울시 내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 대표단을 소집해 청년 학생들이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으로 집합하기로 결의하고, 28일 승동교회에서 각 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이갑성으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배부했다. 그는 3월 1일과 5일 두 차례의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의 서울 집회를 이끈 김원벽 선생.

그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8년 4월 12일 자).

이러한 기독교 교육기관의 학생들이 3·1 운동에 적극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역사관·시대정신을 공동으로 품어 내고 당당히 선포한 집단적 회개 사건이자 혁명 사건이었다. '회개'의 본뜻은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즉, "생각을 고쳐먹는"다는 것이다. 왕의 백성, 천황의 신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나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자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자각하고 회개를 경험한 사건이 바로 3·1 운동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전근대의 가부장성과 차별적 사회구조, 제국주의의 폭력 앞에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교회사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의 무단통치가 심화한 1919년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을 통해 민족의 자존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조화시켜 나가는 것은 한국교회의 역사적 당위가 되었다. 3·1 운동 당시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안전망이라는 치외법권적 특권을 이용해 각 지역 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태극기 제작과 배포도 교회를 중심으로 적극 이루어졌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3·1 운동 참여 과정에서 태극기를 제작·게양·배포했다는 사실을 증언한 민족 대표 김병조 목사의 저술과 3·1 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목격한 도인권 목사와 선교사들의 진술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숭실학교 태극기. 1919년 3월 1일 평양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숭실학교 교정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던 것이다. 3·1 운동 이틀 전 숭실학교 학생 김건, 박병곤 등이 제작. 교장 마펫 선교사가 보관하다가 사후 그의 아들이 1974년 숭실대학교에 기증했다(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한국에서의 독립운동

조선, 평양 1919년 3월 1일 (중략)



한국인들 사이에는 요 며칠 동안 분명히 억누른 흥분이 감돌고 있고, 우리는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B(S. A. Moffett) 씨와 C(E. M. Mowry) 씨 그리고 나(C. F. Bernheisel)는 그 모임에 직접 참가해서 우리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로 했다. AA(선천)의 F(S. L. Roberts) 씨도 후에 늦게 와서 운동장 뒤편에 서 있었다. 운동장은 3000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교회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입구 정면에는 강단이 있었고, 그 주위와 뒤에는 몇몇 목사들과 이 도시의 장로교 임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제5교회(서문외교회)의 목사이며 장로회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4교회(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는 이미 고종 황제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김선두 목사는 이제 송영가를 부르고 축도를 하며 봉도회를 마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음 순서가 남았으니 그 자리에 그냥 앉아있어 달라고 말했다.



축도를 한 후,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그가 이 말씀을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볼 때, 심각한 일이 남아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4교회(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 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강규찬 목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리고서 우리 모두가 대열을 지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자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C. F. Bernheisel,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Chosen. Pyengyang, Chosen, March 1st ,1919" 이 보고서는 <Korean Independence Outbreak>(1919)에 익명으로 게재되었다.)


"준비했던 태극기를 숭덕학교 큰 승강구에다 높이 걸어 놓게 되니 일반대중들은 미치리만큼 놀라며 흥분하였다. 이어서 독립선언식을 정중히 거행하게 되었다. 나는 먼저 독립선언식의 취지와 주제를 선포한 것이며 강규찬 목사는 연설을 하였고 정일선 목사(전도사 - 인용자)는 선언문을 봉독하였으며, 윤원삼 황민영 양 씨는 태극기를 대중에게 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곽권응 씨는 10년 만에 애국가를 인도하여 일반 대중이 제창토록 하였고, 김선두 목사는 이 집회의 사회를 하였다. 이러한 일의 구체적 상황은 독립운동혈사獨立運動血史에 평기評記되어 있는 것이다. 이 회합이 진행된 때는 일본 경관 수십 명이 달려와서 이 운동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수천 군중이 달려들어 우리를 전체로 잡아가라고 고함과 반역을 하니 그들은 실색을 하고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큰 태극기를 선두에 내세우고 해추골로 시가행진을 하려고 나와본즉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으며 좌우 상점에는 눈부시리만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일장기가 삽시간에 변하여 태극기가 된 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의 국권 앞에 머리 숙일 예표인 양 보였다." (장로교계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서 3월 1일 평양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도인권都寅權 회고록>(1962), 34-37.)


"의주 인민의 독립선언



김병조, 김승만은 비밀 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운천동雲川洞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여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통고문을 밀포密布하여 2월 28일 밤에 군내 양실학원養實學院에 모여 회의하고, 다음 날에 경성에서 (거사하라는) 전보가 내도來到하였으므로 (중략) 오후 1시에 2000여 명의 민중이 학슬봉鶴膝峰 아래에 회집하였다.



유여대가 헌앙軒昻한 기개와 충성스럽고 간곡한 언사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가를 제창한 후, 황대벽, 김이순 두 사람의 연설이 있었으니,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八卦國旗(태극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統軍亭 숙운宿雲에 놀란 학鶴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嗚咽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김병조가 1920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 독립운동사> 중. ; 김형석 편, <일재 김병조의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93, 217-218.)


"함흥에서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인 1919년 3월 2일 밤과 3월 3일 새벽에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 몇 명과 교사 한 명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3일 월요일에 경찰이 (장날인데도) 가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심가에 모였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나팔을 불었고, 이를 신호로 하여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맥래 선교사(Rev. M. D. MacRae, 마구례)가 1919년 3월 20일 함흥 만세 시위의 실상을 영국영사관에 알리고 총독부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작성한 진술서. ; "Statement by Rev. M. McRae of Events in Hamheung, Korea(Seoul, March 20th, 1919)," <Korean Independence Outbreak>(1919)]

평양 출신 한국 화가 혜촌 김학수 화백이 그린 '평양 남산현교회'(1998년).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했다.

이상의 몇몇 진술만 살펴보더라도 3·1 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면서 만세 시위 현장에서 대개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민들에게 다수의 태극기를 배포해 참여를 독려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평양 거리 상점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수많은 일장기가 삽시간에 태극기로 바뀐 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의 국권 앞에 머리 숙일 예표인 양 보였다"는 도인권 목사의 회고는 자못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3·1 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태극기 제작 배포 관련 기사는 다양하게 확인되나 지면 관계상 이 정도의 소개로 소략하고자 한다.)

3·1 운동 결과로 전환된 일제의 문화 통치에는 1910년 이후 거의 10년간 금기시되었던 태극기 제작과 게양이 여전히 금기시되었지만, 태극 문양 사용에 대해서는 우회적으로 용인되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언론·출판·결사의자유를 허락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된 분위기에서 192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의 다양한 문화적 양식과 표현 속에 구 한국의 상징이었던 태극 문양이 조심스럽게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3·1 운동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애비슨이 교장을 겸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의 신축 교사에서 확인된다. 3·1 운동 이후 조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던 시기, 내한 선교사들도 한국인들을 위한 고등교육에 더 많은 지원과 확대를 위해 재정과 인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연희전문학교의 캠퍼스 내에 더 나은 교육 여건을 확보하기 위한 석조 교사들이 속속 신축되었다.

미국 LA의 찰스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이 대학 설립 자금으로 기부한 2만 5000달러를 기반으로 1920년 8월 연희전문의 첫 석조 건물이 준공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준공식에는 기독교와 정관계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는데, 행사장에는 어쩔 수 없이 일장기가 교차 게양되었고, 단상에는 영국과 미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연희전문의 선교사들과 학교 관계자들은 이 건물의 동측과 남측 베이 윈도(bay window) 상단에 화강암으로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아울러 스팀슨관의 중앙 출입문은 특별히 제작된 태극 문양의 유리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문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1924년과 1925년 연이어 준공한 아펜젤러관과 언더우드관에도 동일한 패턴의 태극 문양이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에 자랑처럼 새겨졌다.

1920년 스팀슨관 준공식(왼쪽). 월남 이상재 선생이 축사를 했다(오른쪽). 일제강점기이기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지만,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과 출입문에는 태극 문양을 은밀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베이 윈도 상단에 태극기가 새겨진 스팀슨관(왼쪽)과 아펜젤러관(오른쪽).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귀국 직전 스팀슨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애비슨 교장 부부(중앙). 그들의 뒤로 태극문이 보인다. 이 문은 현재도 남아 있다.

현 아펜젤러관 모습.

비록 3·1 운동을 통해 구체적인 민족 독립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건립된 연희전문학교의 신축 교사를 드나드는 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조화하며 장차 성취할 독립의 이상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배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태극이 아로새겨진 연희전문의 건물과 태극문을 통해 이후 윤동주·송몽규·강성갑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이곳을 통해 위당 정인보, 외솔 최현배, 한결 김윤경 등,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하에서도 한국의 정신과 언어를 연구하는 한국학 연구의 토대를 만들고 이후 조선어학회 주축 멤버가 된 이들이 배출되었고, 일본의 식민 사관에 대항하는 민족 사관의 역사적 노력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일제 파시즘 광기 속에 민족 얼이 파괴되어 가는 절망의 시절 윤동주가 한글 시를 붙들고, 여러 선생과 후학들이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지켜 내기 위해 투쟁한 최후의 보루가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대학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역설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연희전문에 유학한 윤동주 생가의 막새기와. 삼태극 문양과 주변의 십자가. 무궁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또한 기독교 신앙(십자가)을 통한 민족 구원(삼태극, 무궁화)의 의지를 만주 용정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확고히 했던 결과였다(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소장).
강당 트러스에 새긴 태극 문양


1919년 4월 1일 충남의 고도 공주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공교롭게도 충청권 최대의 만세 시위라고 알려진 천안 병천 장날 만세 시위가 열린 날, 공주에서도 똑같이 장터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날 공주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이들은 감리교 윌리엄스(F. E. C. Williams)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 교사와 목사, 학생들이었다. 3월 24일부터 영명학교의 현석칠·안창호·김수철·김관회 등은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 활동을 전개했으며, 25일에는 교사 김관회가 김수철에게 독립선언서 제작을 의뢰했다. 김수철 권유로 유우석(유관순 열사의 오빠)·노명우·윤봉균·강윤 등이 3월 31일 오후 3시경 영명학교 기숙사에 모여 윤봉균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1000매를 준비했다. 이 선언서는 4월 1일 강윤·노명우·유우석·양재순 등 영명학교 학생들이 공주시장에 나가 군중들에게 배포했다. 학생들은 장터에 운집한 회중 앞에 서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날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강윤姜沇(1899~1975)은 함께 운동을 전개한 동기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구금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함께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병천에서 공주로 잡혀 온 유관순은 5년형을 선고받은 뒤 경성복심법원으로 옮겨져 3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주 3·1 운동을 주도한 강윤과 유우석 등이 재학했던 공주 영명학교.

영명학교의 윌리엄스 선교사는 일제 당국과 재판장을 찾아다니며 학생들 입장을 대변하며 탄원했다. 결국 구속 교사와 학생들에 대해서는 조건부 감형이 이루어졌으며, 영명학교는 이듬해 신입생 모집을 못 하게 되었다. 강윤을 비롯한 7명의 3·1 운동 주도자들은 졸업식은 치르지 못하고 졸업장만 받았다.
강윤의 도일渡日과
건축가의 길


공주 3·1 운동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강윤은, 출소 이후 윌리엄스 선교사 추천으로 일본으로 떠나 시가현의 오미하치만에서 활동하던 평신도 선교사 보리스(W. M. Vories)를 찾아갔다. 강윤은 보리스가 선교적 목적으로 설립한 건축 사무소에서 건축 일을 배우게 되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에는 일본인·중국인·미국인·소련인·베트남인 등 다양한 인종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조선인은 세브란스병원 의료 선교사 추천으로 와 있던 임덕수와, 윌리엄스 선교사 추천으로 들어온 강윤이었다. 이 건축 사무소 직원들은 각기 국적과 성격이 달랐지만,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와 간사이공학전수학교에서 건축을 배울 당시의 강윤(가운데).

보리스건축사무소는 이윤을 추구하기보다는 건축을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삼았다. 일본을 비롯해 조선, 중국, 만주, 동남아시아 등지에 선교 사업을 위한 교회, 병원, YMCA, 복지시설, 선교사 저택 등의 건축물을 왕성하게 건축했으며, 그렇게 40여 년간 1484건의 건축물을 시공했다.

일본에서 건축을 배우고 풍부한 경험을 쌓은 강윤은 1933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도일한 지 1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사이 그는 간사이공학전수학교(현 오사카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보리스건축사무소 주축 멤버로 성장했다.

귀국 직후 강윤이 맡은 사업은 서울 정동에서 대현동으로 이전하는 이화여전 새 캠퍼스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는 1935년 이화여전의 본관·음악당·중강당·체육관을, 1936년에는 기숙사·보육과·영어실습소·가사실습소 등을 지었다. 이외에도 한국 내에 다양한 기독교 관련 건축물을 시공했다. 태화사회관, 공주 공제의원, 대천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세브란스병원, 평양 광성중학교, 함흥 영행중학교, 대구 계성학교, 원산중앙교회, 철원제일교회, 나남교회, 부산진교회,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대강당,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본관 등 그가 한반도에 시공한 건축물은 145건에 달했다.
3·1 운동의 원점, 태화사회관


한국으로 돌아온 강윤이 1930~1940년대 지은 건물 중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곳은 바로 종로의 '태화사회관'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는 다양한 역사의 노정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예전에는 순화궁터(중종이 순화 공주를 위해 지어 준 사저)였고, 후에 친일파 이완용의 땅이 되었는데, 3·1 운동 당시에는 명월관 지점 태화관太華館이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이 이 건물을 매각하면서 남감리교 여선교사들이 구입하여 '태화여자관'(1921년, 후에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사용되었다.

옛 순화궁 전경.

이렇게 조선 시대에는 명문대가·권문세도 양반 귀족이 살던 대감집이자, 왕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룡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 이완용의 가족이 살다가 장안 제일의 요릿집이 되어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복잡하고도 독특한 이력의 순화궁, 태화관은 기독교 선교의 새로운 장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던 것이다.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이라는 이름으로 1921년 4월 문을 연 이곳에서는 서울의 여성과 학생, 청년들의 전도 집회와 성서 교육, 부녀자들을 위한 직업교육, 요리, 재봉, 위생, 아동교육, 유치원 및 탁아 사업, 여성들의 친교와 교류 활동, 야학과 우유 급식 등 다양한 여성 사회복지 사업이 전개되었다. 마이어스 선교사가 이곳의 원래 이름인 태화太華를 태화泰和로 바꾼 것은 사대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이곳을 통해 여성들이 큰 평화와 하나님나라의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었다.

한국YWCA도 바로 이곳,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별유천지 6호실', 즉 '태화정'에서 출범했다는 사실은 이곳이 한국 여성 선교와 여성운동의 배꼽 자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옛 별유천지 태화정의 현 위치를 직접 찾아보면 휑한 공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태화빌딩 남측 주차장 부지(옛 태화유치원 자리)이다. 이렇듯 3·1 운동의 역사적 현장이 빌딩의 부속 주차장으로 변모해 있는 데에는 안타까운 역사적 과정이 존재했다.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왼쪽). 태화관 내부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한 민족 대표 33인(오른쪽).
'한양韓洋 절충식'으로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 표현하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옛 건물은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3·1 운동에 참여해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이 남달랐던 강윤은, 한국의 전통적인 팔작지붕과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룬 '한양 절충식'으로 회관 건물을 시공했다(1939년). 강윤은 자신에게 인생의 고난과 기회를 동시에 주었던 3·1 운동의 역사적 원점에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조화한 역사적인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태화사회관 도면(아래), 외관(왼쪽 위) 및 내부 강당 전경(오른쪽 위).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당의 측면 트러스에 태극 문양이 보인다(왼쪽). 강윤은 강당에 깔린 장의자 측면에도 태극 문양을 조각해 넣었다(오른쪽).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윤은 태화관 옛 한옥의 기와를 재활용해 새 건물의 기와지붕에 올렸다. 기존의 역사성을 새 건물이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일제의 파시즘이 극에 달했던 이 시기에 그는 한국인에게 친숙한 토담 형식의 외벽을 쌓고 한옥의 전통 띠 문양을 장식했다. 내부의 전형적인 고딕풍 예배당과 교육 공간은 서양식으로 구성했다. 구조재인 목조 트러스와 장의자 등 곳곳에 한국을 상징하는 암호처럼 태극 문양을 새겼다. 강윤은 태화사회관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YMCA회관 뒤로 보이는 태화복지재단. 삼태극은 태화복지재단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태화빌딩 앞에는 3·1 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이 '양식'이 우리 건축가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일까. 그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 그 지방의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모양의 집을 세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조선과건축朝鮮と建築>, 1940년 4월호)

이렇듯 공주 3·1 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르고, 도일해 근대건축을 배워 온 민족운동가 강윤은 자신의 전공인 건축을 통해 신앙과 민족의식을 묵묵히 펼쳐 보였다. 이곳은 일제의 제국주의 야욕이 정점에 달했던 파시즘 시기에 식민지민의 저항과 불굴의 의지,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믿음을 건축이라는 양식에 담아 담대히 표현해 낸 3·1 정신의 상징, 기념비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 건물은 일제 말 전시체제, 해방 공간,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변형·철거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강윤은 태화사회관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전쟁을 치르고 1955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부가 건물을 되찾았을 때에도 강윤은 이 건물의 복원 공사를 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윤은 1975년 1월 30일 76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태화사회관 옆 중앙교회에서 장례를 치렀다. 강윤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며,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강윤의 사후 5년 뒤인 1980년 인사동 개발계획으로 철거되었다. 비록 3·1 독립선언식이 열렸던 태화관, 이후 3·1 정신을 계승해 이 땅의 선교와 복지, 근대화에 기여한 태화사회관은 그 역사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 터는 여전히 남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겸허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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