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은이),
유숙자 (옮긴이)민음사2007-10-30원제 : 深い河 (1993년)
책소개
국내에는 <침묵>의 작가로 잘 알려진, 평생에 걸쳐 신과 구원의 문제에 천착한 엔도 슈사쿠는, 1993년 병마와 사투를 벌이며 완성한 마지막 장편소설 <깊은 강>에 자기 문학의 모든 주제를 집약해 놓았다. 신은 인간 내면에 살아 숨 쉬며,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존재임을 이 소설을 통해 역설한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네 사람이 인도 단체 여행을 계기로 만난다. 이소베는 평범하게 살아온 가장이었다. 그러다 암 선고를 받은 아내가 투병 끝에 숨을 거두면서 꼭 다시 태어날 테니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남긴다. 동화 작가인 누마다는 병으로 죽음의 고비를 맞았을 때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 준 구관조를 잊지 못한다.
기구치는 태평양 전쟁 당시 미얀마에서, 죽은 동료의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처참한 상황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이소베의 죽어 가는 아내를 간호했던 미쓰코는 대학 시절 가톨릭 신자인 오쓰를 그저 장난으로 유혹했다가 버린 기억이 있다. 그녀는 신부가 된 오쓰가 인도의 수도원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각기 다른 사연을 품은 네 사람은 저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 인도로 간 것이다. 불가촉천민부터 수상이었던 인디라 간디까지, 신분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품어 안는 갠지스 강과 그곳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온 이들은 강한 인상을 받는다.
목차
1장 이소베의 경우
2장 설명회
3장 미쓰코의 경우
4장 누마다의 경우
5장 기구치의 경우
6장 강변 동네
7장 여신
8장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9장 강
10장 오쓰의 경우
11장 진실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12장 환생
13장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니
작품 해설 / 유숙자
작가 연보
책속에서
복수나 증오는 정치 세계뿐만이 아니라, 종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은 집단이 생기면 대립이 발생하고 분쟁이 벌어지고,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모략이 시작된다. 전쟁과 전후의 일본 속에서 살아온 이소베는 그러한 인간이나 집단을 싫증나게 보았다. 정의라는 단어도 지겹도록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 깊숙이, 아무것도 믿을... 더보기
체념과 피로가 뒤섞인 생활. 그 존재만으로도 그녀를 피곤하게 하는 선량한 남편.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이 남자는 무엇 하나 비난받을 구석이 없다. 없는 까닭에 테레즈는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초조함을 느낀다. -87쪽 - iamjune
"나는 그 후로, 생각합니다. 신은 마술사처럼 뭐든 활용하신다고, 우리의 나약함이나 죄도. 그렇습니다. 마술사가 상자에 지저분한 참새를 넣고 뚜껑을 닫고는, 신호와 더불어 두껑을 열잖습니까? 상자 속 참새는 새하얀 비둘기로 바뀌어 날아오릅니다."-93쪽 - iamjune
"나는 이곳 사람들처럼 선과 악을 그다지 확실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선 속에도 악이 깃들고, 악 속에도 선한 것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신은 요술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죄마저 활용해서 구원으로 이끌어 주셨지요."-97쪽 - iamjune
누마다는 어떤 부부건 간에, 서로 용해될 수 없는 고독이 있음을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알았다. -115쪽 - iam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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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종교적인 관점에서 영혼의 재탄생을 그리면서, 현대인이 마주치는 삶의 공허함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 퍼블리셔스 위클리 (미국)
가스통은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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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마로니에북스 刊)
저자 및 역자소개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지은이)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 가톨릭 신자인 이모의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열한 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9년 게이오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장학금으로 프랑스 리옹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결핵으로 인해 2년 반 만에 귀국한 뒤,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5년에 발표한 《하얀 사람》(白ぃ人)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바다와 독약》으로 신쵸샤 문학상과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을 수상하고 일본의 대표적 문학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엔도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유럽의 [신의 세계]를 경험한 [나]가 결국 동양의 [신들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자전적 소설 《아덴까지》를 발표했는데, 그 6개월 뒤에 《백색인白い人》을 발표하였고, 또 6개월 뒤에 《황색인黃色い人》을 발표했다. 그리고 백색인으로 1955년 제33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 《아덴까지》의 작품 의식을 기반으로 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역시 엔도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1966년에 《침묵》(沈默)을 발표하여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96년 타계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종교소설과 통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이자 일본의 국민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침묵》, 《예수의 생애》,《내가 버린 여자》, 《깊은 강》, 《사해 부근에서》, 《바다와 독약》, 《그리스도의 탄생》 등 다수가 있으며 1996년 9월 29일 서거. 東京 府中市 가톨릭 묘지에 잠들어 있다. 접기
수상 : 1980년 노마문예상, 1979년 요미우리 문학상, 1966년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1955년 아쿠타가와상
최근작 : <그리스도의 탄생>,<사무라이>,<나를 사랑하는 법> … 총 155종 (모두보기)
유숙자 (옮긴이)
번역가. 지은 책으로 『재일한국인 문학연구』(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재일한인문학』(공저), 옮긴 책으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손바닥 소설』, 『명인』,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만년』, 『디 에센셜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대산문화재단 번역 지원), 『유리문 안에서』,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 오에 겐자부로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쓰시마 유코의 『「나」』, 김시종 시선집 『경계의 시』, 데이비드 조페티의 『처음 온 손님』, 사토 하루오의 『전원의 우울』, 가와무라 미나토의 『전후문학을 묻는다』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재일 한국인 문학>,<재일한국인 문학연구> … 총 38종 (모두보기)
유숙자(옮긴이)의 말
동양과 서양, 강자와 약자, 선과 악, 삶과 죽음의 경계가 만년의 엔도에게는 이미 무의미한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이 한데 혼연히 어우러진 인류의 거대한 흐름을 부드럽게 응시하는 초월적인 존재, 모성적인 신의 세계에 작가는 마침내 당도하게 되었다.
오늘도 지구 한 쪽에서는 각기 다른 종교나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한다. 한편 타종교 간에 가로 놓인 벽을 허물고 상호 이해의 물꼬를 트려는 움직임도 당연시되는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 정황 속에서 엔도의 작품은 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환기와 더불어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감을 이끌어 내는 가치를 한층 발휘하고 있다. - 유숙자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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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본 전후 문학계 대표적인 작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160번)으로 출간되었다. 엔도 슈사쿠는 특히 종교적 문제, 신과 구원의 문제에 천착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에서 큰 영향을 받아 왔지만, 그의 작품들은 종교소설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보편적 삶과 그 삶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 왔다. 『깊은 강』은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해 온 모든 가치들을 집약해 놓은 그의 대표작이다.
상처 받은 인간들에게 신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
『깊은 강』은 엔도 슈사쿠가 1993년 완성한 마지막 장편소설이다. 이때는 그가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투병 생활을 하던 때로, 이 작품은 자신의 50년 가까운 문학 인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엔도 슈사쿠는 자신에게 커다란 명성을 안겨 준 『침묵』과 함께 이 책을 관 속에 넣어 달라고 유언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엔도 슈사쿠는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 왔던 모든 주제들을 그려 내고 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인생의 여러 굴곡을 겪고 이제 황혼기를 맞은 네 사람이 인도 단체 여행을 계기로 만난다. 이소베는 평범하게 살아온 가장이었다. 그러다 아내는 갑작스레 암 선고를 받고, 고통스런 투병 끝에 숨을 거둔다. 그녀는 꼭 다시 태어날 테니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동화 작가인 누마다는 병으로 죽음의 고비를 맞았을 때 구관조에게 큰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구관조는 마치 그를 대신하듯 죽어 버렸고, 그는 아직도 그 구관조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다. 기구치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가 미얀마에서 부상을 입고 낙오되었을 때 동료인 쓰카다가 곁에 남아 주었다. 쓰카다는 기구치를 살리고 자신도 살아남기 위해 다른 동료의 시체를 먹어야 했고, 그는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온 후에도 그 처참한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평생 괴로워했다. 미쓰코는 이소베의 죽어 가는 아내를 간호했던 자원 봉사자였다. 그녀는 대학 시절 가톨릭 신자인 오쓰를 그저 장난으로 유혹했다가 버린 기억이 있다. 그녀는 신부가 된 오쓰가 인도의 수도원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오쓰는 신부의 길을 걷기 위해 프랑스 수도원에서 수련을 하지만 신과 구원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인도로 가서, 홀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갠지스 강으로 데려다 주는 일을 하게 된다.
『깊은 강』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지울 수 없는 슬픔을 가슴속에 품은 채 살아간다. 등장인물들의 삶, 나아가 이 작품 전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의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이들은 인도에서 불가촉천민부터 수상이었던 인디라 간디까지, 신분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품어 안는 갠지스 강과 그곳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는 사람들을 보면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구원에 이르는 강의 이미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신의 모습
『깊은 강』은 다음과 같은 흑인 영가로 시작되며, 엔도 슈사쿠는 이 흑인 영가에서 작품의 제목을 따왔다.
깊은 강, 신이여, 나는 강을 건너,
집회의 땅으로 가고 싶어라.
흑인 영가에 나타나는 ‘강’은 그들의 고달픈 기억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만나는 새로운 세계, 구원의 세계에 대한 간절한 꿈을 이루어 주는 신과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소설 ??깊은 강??에서 말하는 ‘강’은 힌두교도들이 죽음을 맞기 위해 찾아오는 성스러운 갠지스 강, 나아가 삶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어머니와 같은 깊고 큰 강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힌두교의 여신 차문다를 통해 인간들의 고난을 상징적으로 그려 내면서, 나아가 그 고통을 함께 하고 또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는 신의 존재를 보여 준다. 이는 역시 강의 상징적인 이미지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오랜 병고를 대신 짊어진 채로 그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신은 우아하고 고결한 성모마리아와 대조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엔도 슈사쿠는 차문다를 통해 인간 위에 있는 신이 아닌, 인간과 함께하며 인간 안에 살아 숨 쉬는 신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그녀의 젖가슴은 이미 노파처럼 쭈글쭈글합니다. 하지만 그 쭈그러든 젖가슴에서 젖을 내어, 줄지어 있는 아이들한테 나눠 줍니다. 그녀의 오른발이 문둥병으로 짓물러 있는 걸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배도 허기 때문에 움푹 꺼질 대로 꺼졌고, 게다가 그걸 전갈이 물어뜯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런 병고와 아픔을 견디면서도, 쭈그러든 젖가슴으로 인간에게 젖을 주고 있습니다.
평생 신을 좇는 삶을 살아온 인물인 오쓰 역시 엔도 슈사쿠가 말하고자 하는 ‘강’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오쓰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이미 가톨릭교도가 되었고, 평생을 진정한 신을 찾아 헤매었다. 자신이 태어나 자란 나라를 떠나 프랑스까지 갔지만, 모든 인간을 품어 안는 신을 찾던 그는 신학교에서마저 배척당한 후 인도로 오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계급이나 성별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두터운 벽과는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갠지스 강에 감동한다.
결국 엔도 슈사쿠가 ‘강’의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하는 주제는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의 영혼이 갈구하는, 선과 악이 혼재한 모든 삶을 포용하는 지닌 신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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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410번 버스 타고 퇴근 길에 <깊은 강>을 펼쳐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 옆 사람한테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각 자는 자기 마음 속에 모두 깊은 강을 하나 씩 품고 있다. 자기 마음 속에 흐르는 이 깊은 강을 스스로 자기 힘으로 건너야 하는게 인간일런지도 모른다. 구매
wolf1000 2014-06-20 공감 (14) 댓글 (0)
제목만큼이나 깊은 생각에 빠지게하는 위대한 소설. 구매
kronovaserk 2009-09-25 공감 (3) 댓글 (0)
죽음 그리고 신... 결국엔 인간의 삶에 내포되어 있고 죽음과 삶은 서로 등을 맞대고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결국 다양한 길(종교들, 인생들)을 걸어 결국엔 같은 곳(겐지스강)으로 향하는 것 뿐이 아닐까.... 구매
윤재홍 2016-09-13 공감 (1) 댓글 (0)
《침묵》보다는 많이 약하지만 가볍게 읽을만한 종교관련 소설책..엔도 슈사쿠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책이라 감동이 덜해도 숙연한 느낌은 든다. 구매
마콘도 2015-09-05 공감 (1) 댓글 (0)
<침묵>이 확실히 더 좋지만, 엔도 슈샤쿠가 종교에 대해 한 평생의 고민들이 한 눈에 쉽게 잘 보이는 작품이다. 구매
GoldSoul 2017-10-12 공감 (1) 댓글 (0)
마이리뷰
[마이리뷰] 깊은 강
1. 노인과 바다로 갈까?, 깊은 강으로 갈까? 고민했지만 깊은 강으로 정말 잘 간것 같다.
침묵의 사무라이가 거대한 풍파를 헤지고 깊은 강에 한쪽 편까지 흘러들어가 갠지스를 바라보는 감동이란!
1-1. 내 존재란것이 온전히 나 하나로만 구성된게 아니었구나.
1-2. 구원을 추구하는 많은 종교는 저마다의 루트로 하나의 정상을 오르고 있는것 같다. 정상에 서면 수많은 길들이 모여 드는것이 보일것도 같은데.
1-3 인간은 누구나 금기를 넘어서면서 산다. 그게 금기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인간도 신이나 겐지스강은 보듬어 주는걸까? 두렵고, 미안하고, 맘 아픈 감정을 가지고 후미에를 밟았던 인간만 보듬어 주는걸까?
1-4 신의 존재는 인간의 허무를 억제하는데 도움이 될수있다.
2.(숙제1) 양파를 생각했다. 엔도슈사쿠의 양파가 카라마조프가의 양파우화랑 연결이 되어 있을까?ㅎ
3.(숙제2)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가벼운 해설서를 올해안에 한번 읽어야 겠다!
4.(숙제3)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임레의 운명, 엔도의 깊은강은 올해안에 꼭 한번 더 읽자! 누워서가 아니라 정좌를 틀고!
5.(바램) 갠지스강에 한번 가보고 싶다.
ps. 바깥에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난리인데 맥주가 땡기면 어떻해야 하는걸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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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2-08-15 공감(60) 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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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의 경우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인지, 엔도 슈사쿠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선별하고 그것을 각각의 등장인물로 만들어내어 전체 이야기를 전개한다. 따라서 <깊은 강>은 그가 살면서 평생 고민했던 문제들과 그것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 종합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된다.
이소베의 경우, 미쓰코의 경우, 누마다의 경우, 기구치의 경우, 오쓰의 경우. 등장인물 모두 각각의 경우는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찾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는 다른 어떤 것으로 덮어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은 결국 그것을 찾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나의 경우처럼.
그들은 자신이 찾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미쓰코는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공허감이라고 표현한다. 좋은 대학에 다녀도, 어떤 남자와 연애를 해도,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도,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려도, 그녀는 공허감을 느낀다.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정확히 설명도 못하겠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공허감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고 무엇으로도 덮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찾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에 무엇이 비어 있는 것인지, 자신의 심연에 있어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그 공허감을 안다.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도 마음 한편에 공허감이 있을 수 있고, 재밌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공허감을 느낄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마음 깊은 곳에 공허감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의 이유나 의미를 찾는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하든, 채워지지 않는 그 마음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존재한다. 파스칼의 통찰이 그것에 대한 적절한 묘사이지 않을까.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신을 배제한 이후로, 인간의 마음에는 무한한 신을 잃어버린 자리에 무한한 공허가 존재한다고. 인간에게는 유한한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공허감이 존재한다고.
오쓰는 자신이 찾던 것을 예수에게서 발견한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예수에게 붙잡힌 오쓰는 결코 예수를 떠날 수 없다. 신학적 견해에 문제가 있다며 신부가 되지 못하고 유급을 당해도, 가톨릭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사들에게 비판을 받고 배척을 당해도, 힌두교 수도원에서 힌두교인과 같은 모습으로 생활을 하면서도, 오쓰의 마음에는 십자가에서 모든 병고를 짊어진 볼품없는 모습의 예수가 항상 있다. 문둥병으로 짓물고 허기로 앙상한 늙고 추한 몸으로 코브라와 전갈의 독을 견디며 쭈그러든 젖가슴으로 인간에게 젖을 주고 있는 모습의 차문다 여신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는 깡마른 예수가 항상 오쓰의 마음에 있다. 그렇게 오쓰는, 죽어야 할 죄인을 대신하여 자신이 모든 비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무력한 예수처럼, 경계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가장 비참하게 죽어가는 이들과 죽어야 할 범죄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대신 내어주는 바보 같은 삶을 산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삶을 선택할까. 미쓰코에게 희롱당하고 버려진 개와 같던 오쓰를, 예수는 받아주었고 아무 말 없이 함께 하였다. 그렇게 오쓰는 예수의 사랑에 붙잡혔고, 그렇게 오쓰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통한 자들 편에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그들과 함께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오쓰처럼, 그리고 기구치가 만났던 외국인 청년 가스통처럼, 예수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소베의 경우, 미쓰코의 경우, 누마다의 경우, 기구치의 경우, 오쓰의 경우. 그리고 나의 경우. 표현되는 모습은 제각기 다르지만 우리가 결국에 찾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 우리의 심연에서 찾고 있는 그것은 사실 신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수가 보여준 것처럼 그 신의 모습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사랑을 찾아야만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니, 비참하고 초라하도다.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겨 버렸고, 마치 멸시당하는 자인 듯,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도다. - P65
"하지만 난 인간의 강이 있다는 걸 알았어. 그 강이 흐르는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모르긴 해도. 그치만 과거의 많은 과오를 통해, 자신이 무얼 원했는지 이제 겨우 조금 알게 된 느낌이야." 그녀는 다섯 손가락을 단단히 움켜쥐고 화장터 쪽을 바라보며 오쓰의 모습을 찾았다. "믿을 수 있는 건,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 하고, 미쓰코의 마음의 어조는 어느 틈엔가 기도풍으로 바뀌었다. "그 사람들을 보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저도 섞여 있습니다." - P316
미쓰코는 백인 수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시는 건가요?" "네?" 수녀는 깜짝 놀란 듯 푸른 눈을 커다랗게 뜨고 미쓰코를 응시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시는 건가요?" 그러자 수녀의 눈에 놀라움이 번지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그것밖에…… 이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게 없는걸요. 저희들은." 그것밖에라고 한 건지, 그 사람밖에라고 말한 건지, 미쓰코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 P324
라파엘 2022-06-18 공감(44) 댓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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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착의 경우
1.
어젯 밤엔 <깊은 강>을 읽고 레비나스를 떠올렸는 데, 잠들 기 전에는 아리송했다가 아침에 일어나니 좀 알겠다. 언제가 <소피의 선택>을 읽고 썼던 무력감과 구원서사에 관한 페이퍼(링크: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2799417) 가 있는 데, 그 이야기와 일맥 상통한다. 2차 대전 혹은 전쟁 이후에 남자 작가, 철학가, 사상가들이 천착한 어떤 인간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파고 파고 또 파내려간 심오함이 도달하는 지점에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내면이든 세계의 무엇이든 ‘모성적인 어떤 느낌’을 설명에 섞는 데 —나의 고통은 그들의 고통과는 다르므로 윤리적 비아냥은 할 생각이 없다— 여기에 그것이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한, 메일 바디가 경험(체험)한, 고통에 대한 어떤 안도가 있나보다… 하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난 그런 안도/구원을 구할 수가 없으니 이 지점에서 차라리 한나 아렌트(끝까지 안도하지 않기를 주문한)에 관심이 생겨버린다.
2.
이소베, 누마다, 기구치, 심지어 오쓰까지… 이 소설에서 엔도 슈사쿠가 그린 남성 인물들 모두에 나는 이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독서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가 쓴 미쓰코에 대해 (그가 뭘 그리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는 데)선 딱 절반 정도만 이해했고 이입했다(추후에 <깊은 강> 읽은 여자 독자들의 이입량이 궁금하다). 그리고 이소베의 아내에 대해선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이소베의 아내는 이소베의 판타지거나 엔도 슈사쿠의 판타지다. 그러므로 엔도 슈사쿠는 ‘남자’ 작가다.
쫌 더 성급한 일반화로 가볼까? 슈사쿠가 내세운 인물중 가장 깨달은 자에 가까운(?) 오쓰는 남자고, 그를 시험하며 온갖 위악을 떠는(그 역시 슈사쿠의 내면이겠지만) 인물 미쓰코는 여자다. 일본 전후 문학의 거장 엔도 슈사쿠여, 왜 그렇게 캐릭터를 할당했나요?
3.
인물들이 ‘인도’까지 가서 만난 뒤 인상 깊게 소회하는 소설에 등장하는 (하, 독을 견디며 젖이 쪼그라들어 말라붙은 상태로도 젖을 물리는ㅋㅋㅋㅋ)수난의 여신은, 그 모든 고통과 기아아와 죽음을 ‘견디는’ 메타포다. 나는 여기서 읅ㅋ했다. 으어어, 참으로 인류는 고통을 견디는 주체에 여신을 할당(?)하기를 즐기는 도다(자, 이 지점은 읽고 있는 <가부장제의 창조>를 마저 다 읽고 까는 것으로 하겠다.) 그러므로 차라리 천형 앞에 모두를 위해 대신 고통 받는 주체로 젊은 남자인 예수를 할당한 기독교가 양심(?)있게 느껴져버리는 나다(ㅋㅋ).
고통받은 동아시아 남자는 예수를 양파로 바꾸어 부르지만 나 역시 무엇으로 바꿔 불러도 상관 없다. 내게도 이 지독한 삶을 견딜 신이 필요하고, 양파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어떤 나만의 내면이 필요하다. 고통의 경험 앞에서 그것의 의미를 희구하는 각자들 만이 발견해 낼 수 있는 태도, 방법, 반응이 있는 것 같다. <깊은 강>은 그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를 구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의미라고 잠정적으로 부르고 있는 데, 그 의미의 결론으로써의 어떤 삶/죽음이 있다고 하면 오쓰의 경우 혹은 엔도 슈사쿠의 경우는 품위있게 느껴진다.
4. 공쟝쟝의 경우.
천착, 나는 뭔가를 찾고 있다. 그게 뭘까.
공허함?
나는 공허하지 않다. 삶 자체가 허무하긴 하지만 미쓰코가 느끼는 무료함에 가까운 공허는 잘 모르는 감정이다.
빈 곳?
나는 비어있지 않다. 내가 허덕이는 것은 없음보다는 차라리 압도적인 있음에 훨씬 가깝다. 당연 나의 내면에도 어떤 진공처럼 빈 공간이 분명있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그것이 비어져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비어져 있는 곳이 아니다. (그것이 채워지리라 기대하지 않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살지 않는다) 채우고 싶다거나 충족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상황들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걸 쓴다. 그럼 그걸 채우지 않아도 재밌게 살 수 있다.
의미?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까운데, 꽉꽉 들어차 있는 삶을 눈앞에 두고 의미에 몰두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의미로 의미가 없다. 덧붙여 자신의 의미부여가 너무도 심오한 나머지 다른 인간의 생산/재생산에 기대면서 안착(?)해버리거나 초극(!)해 버리는 브루주아적/남성적(동서양막론하고) 무의식…은… 그 맹점이 현재 인류에게 너무 치명적이기 때문에… 와따시는 다른 독자들처럼 그저 심오한 인간애에 감격해서 별 다섯을 줄 수가 절대 없는 것이다.
2차 대전같은 거대한 것을 겪지 않은 나 역시도 (그러나 꼭 그런 거대한 걸 겪어야지 거대한 사유를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통 이후에 삶을 재건하는 방법에 관심이 많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천착하는 혹은 천착해야 할 주제일지도 모르겠다고. 어제 그런 생각을 했다. 각자의 재건 방식이 있겠지만 그것은 내게 신의 존재나 구원은 아니다. 굳건한 물적 토대(피부에 와닿는 것…)와 현실 인식(고통은 현실로 부터 달아나려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에 근거한 어떤 삶의 태도이고 실천인 데… 아, 아직은 구체화되지 않았으므로 표현이 쉽지가 않다. 그냥 막연히 아렌트… 푸코… 뇌과학… 읽으면…? 이러고 있다.
사실 몇 년 동안 일기를 쓰면서 난 그것이 ‘언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더란다(이 지점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은 언어는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비교적 싸다) 재료일 뿐, 내가 살고 싶은 현실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5.
운동을 가야하기 때문에 글을 성급히 마무리 짓자.
‘제2의 성(여성)’인 내 안에 있는 *신*은 ‘고통받는 주체’이기도 전에 먼저 ‘타자’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나의 분열이고, 허덕임의 기원이며, 어쩌면 글쓰기를 일으키는 역량—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글쓰기가 곧 사랑의 활동이라고 했다. 아, 크리스테바 읽고 싶어ㅠㅠ—이다.
고통이 고통인지도 몰랐던… 내가 분명히 있고, 온전한(온전할 수 있을까?) 자아감의 회복 이후에야 나의 *신*은 정말 ‘신’ 처럼 경험되는 것일지도🤔.
엔도 슈사쿠는 혹은 오쓰는 자신 안에 있는 신을 그렇게 경험하고 살아보려고 했을 테다.
나 역시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내 안에 있는 *신*을.
덧1, 이소베의 아내는 환생하고 싶지 않았다에 내 손톱을 걸지. 만약 환생한 세상이 2010년대의 한국이라면 페미물 꼭 먹으세요. 환생하고 싶지 않아지실 거에요.
덧2, 그러므로 여기까지가 일본 문학의 성취이자 한계인가? 그렇다면 몇 년 전 내가 일본 남자 소설가들의 작품을 다시는 안 읽고 싶다고 했던 이유는 분명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치자면 인류가 생산한 숱한 고전은 9할 이상이 남자들의 작품이므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상황인데. 즐겨지지 않음에 내 훌륭함이 있는 것이지.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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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6-24 공감(40) 댓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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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품는 깊은 강
지난주에 엔도 슈사쿠의 신간 <사무라이>를 읽었다. 그리고 <침묵>으로 시작된 나의 엔도 선생에 대한 사랑은 <깊은 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지난주에 산 <바보>도 대기 중이다. 이제는 절판된 <숙적>도 구해서 읽어 보고 싶은데, 책이 없다. 또 헌책사냥에 나서야 하나.
엔도 슈사쿠가 1993년에 발표한 <깊은 강>의 시간적 배경은 1984년 가을, 인디라 간디가 암살되기 직전의 시기다. 그리고 제각각 사연을 지닌 네 명의 인물들이 인도 바라나시에 모인다.
첫 번째 주자인 오사무 이소베는 최근 35년간의 무난해 보이는 결혼생활의 동반자였던 아내를 잃었다. 일본 남자답게 아내에게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고 그는 고백한다. 아내는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다시 태어날 테니(환생), 꼭 자신을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그의 절대 고독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소베는 병상에서 죽어가는 아내를 돌본 자원 봉사자 나루세 미츠코를 알게 된다.
다음 주자는 바로 나루세 미츠코다. 기독교 대학 불문과 출신의 시골 처녀 나루세 미츠코는 자유연애의 신봉자로 집안의 도움으로 도쿄에서 화려한 대학생활을 펼친다. 그런 그녀에게 오츠라는 이름의 순진한 피에로가 등장한다. 친구들은 ‘모이라’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미츠코를 부추겨서 신실한 남자 오쓰를 유혹하자는 기묘한 게임을 제의한다. 사실 미츠코에게 오츠에게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신이 거대한 사랑의 덩어리라는 둥의 스콜라 철학에서나 나올 법한 타령을 하는 오쓰를 망가뜨려보겠다는 일그러진 욕망을 가지고 그를 유혹한다. 나루세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 오쓰를 단박에 걷어차 버린 미츠코는 화려했던 대학 시절을 마무리 짓고, 유복한 집안 출신의 일과 자동차 그리고 골프 밖에 모르는 남자와 결혼에 골인한다.
동화작가 누마다는 엔도 슈사쿠의 선생의 문학적 페르소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육군 최악의 작전으로 알려진 임팔 작전에서 살아남은 기구치가 차례로 등장한다. 각자 사연을 품은 이들이 모두 인도 바라나시에 모이면서 엔도 슈사쿠 서사의 수레바퀴는 힘차게 굴러가기 시작한다.
엔도 슈사쿠 선생이 <깊은 강>에서 다루는 여러 층위의 이야기 중에서는 나는 바로 미츠코와 오쓰가 벌이는 핑퐁게임과 ‘양파’에 대한 설전 그리고 처참하게 실패로 끝난 임팔 작전의 생존자 기구치의 고뇌가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일본, 프랑스 그리고 인도로 이어지는 미츠코와 오쓰의 끈질긴 인연의 설정이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오쓰가 촉발시킨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겠다는 신념에 찬 미츠코의 긴 여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삶과 죽음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기구치를 간호하고, 오쓰와 마지막으로 만나면서 과연 그녀는 그토록 갈구하던 공허로부터 안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 양파라고 그들이 명명한 신의 존재와 구원에 대한 대화는 결국 엔도 슈사쿠 문학의 핵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마다로부터 출발한 저자의 삶은 자신이 버린 ‘양파’에게 다시 귀의하여 프랑스 신학교에 간 오쓰에게 전이되기에 이른다.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공허함을 달랠 수 없었던 미츠코는 자신의 피에로였던 오쓰를 계속해서 찾아 희롱한다. 물론 그럴수록 자신이 공허 속으로 침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사실 난 이 소설을 문제적 인물은 기구치 때문에 읽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얼마 전에 너튜브를 통해 NHK에서 제작한 임팔작전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5년에 걸친 태평양전쟁 당시 300만 정도의 일본군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 20% 정도가 아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군은 전쟁에서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병참 문제에 대한 인식 없이 전쟁에 돌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배고픈 병사가 어떻게 최전선에서 보급을 잘 받아 잘 먹고 튼튼한 병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최악의 사령관 중의 하나였던 무다구치 버마군 사령관의 무모한 작전에 임팔작전에서 숱한 일본군 병사들이 그렇게 죽어 나갔다. 그들을 추격하던 영국군과 구르카 병사들보다, 기아와 말라리아 그리고 이질이 일본군에게는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퇴각하던 중에 빈사의 상태에 빠진 기구치를 구한 동료가 바로 쓰카다였다. 그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데에는 아주 끔찍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생환하는데 성공한 쓰카다는 결국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병상에서 죽어가는 그를 도운 청년이 가스통이라는 이름의 외국 청년이었다.
제각각 다른 목표를 가지고 이렇게 모인 일단의 관광객들을 통솔하는 가이드 에나미 또한 흥미로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4년 동안 인도 철학을 전공했지만, 고국 일본에 그를 위한 일자리를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가이드를 하면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인도의 이모저모를 보여 주는 것이 그의 본업이 되었다. 수박겉핥기식 인도 여행을 하는 자신의 손님들을 경멸하면서, 차문다 여신을 일행에게 소개하는 장면의 역설이란. 결국에 가서 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갠지스강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장면을 찍어 사단을 내고야 포토그래퍼 산조 부부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엔도 슈사쿠의 다른 작품들처럼, <깊은 강> 역시 독자에게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60억 인류의 사고방식과 얼굴 그리고 살아온 내력이 다른 만큼, 엔도 슈사쿠 문학의 수용 또한 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지의 어머니 같은 갠지스강은 도도하게 흐르며, 구도와 영혼의 안식을 구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아낌없이 내준다. 아니 스스로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고 해야 하나.
소설에서는 인도의 어머니라 불리는 인디라 간디가 시크 교도 경호원에게 암살당하면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종교 갈등이 다시 폭발한다. 산조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결국 아무런 죄 없는 오쓰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되고, 범신론적 신념 때문에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하던 오쓰가 ‘양파’의 희생을 재현한다.
엔도 슈사쿠의 작품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구사하는 마성 같은 서사와 양심을 타격하며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질문들이 매혹적이면서도 두렵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모양이다. <깊은 강>을 읽다가 사유의 심연에 빠져 버린 그런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미리 수배해둔 <바보>를 바로 읽기 시작했다.
레삭매냐 2021-08-17 공감(36) 댓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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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의 환생
한 남자, 야소베가 아내를 암으로 잃게 된다. 그 아내는 죽으면서 남편에게 부탁한다. "반드시...다시 태어날 거니까..찾아요..날 찾아요." 야소베는 환생된 아내로 짐작되는 여자아이를 찾으러 인도로 떠난다. 하지만 아이를 쉽게 찾지 못한다. 만나지 못한 실망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걸하는 한 여자아이를 만난다. 야소베는 공포같은 깨달음이 밀려온다. "어쩌면 이 아이는 아내가 아닐까. 다시 태어난 아내가 아닐까. 그 생각이 칼로 가슴을 에이는 듯이 스쳐갔다." 야소베는 환생된 아내를 찾는 여정 가운데서 아내와 같이 살면서 보낸 삶의 시간들을 복기하면서 아내가 자신에게 행했던 소소하고 작은 친절과 미소들을 기억한다. 그렇게 아내의 손길이 야소베의 삶 가운데 스며들어 있었다. 야소베는 "아내에 대한 추억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언제나 존재했던 아내의 손길이 죽어 사라지고 없어지자 야소베는 그 손길을 찾아 헤맨다. 오쓰는 말한다. "신은 존재라기보다는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인간은 윤회된 손길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신도. 양파는 사랑이라도 하셨다. 양파 덩어리가 베푸는 손길을 기억하는 자들은 이제는 본인이 사랑의 손길을 행하는 양파 덩어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야소베의 양파의 덩어리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그는 황급히 동전을 아이에게 건네고, 택시에 몸을 숨겼다" 그 이후에도 다시 한번 양파 덩어리 손길을 원하는 수많은 자들이 야소베 앞에서 구걸한다. 과연 야소베는 아내의 환생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종교에는 전혀 관심 없는 미스코는 신부가 되려하는 오쓰를 인도 바라나시에서 다시 만난다. 신혼여행 중 리옹에서 만난 후의 일이다. 오쓰를 매력적으로 여기지도 않고 괴롭히고 놀리곤 하지만, 존재에 이끌려 미스코는 오쓰를 쫒아 다닌다. 그리고 미스코는 스스로를 가리켜 "...... 통 알 수 없는 혼돈스러운 여자"라고 말하며 "이런 멍청한 짓거리고 난 대체 무얼 찾고 있는 걸까. 모두에게 부추김당해 오쓰를 곯려주고, 이것이 나의 삶일까".하며 고뇌하고 번민한다.혼돈이 있는 곳. 가버나움(Capernaum). 예수님이 제자를 택하시고, 말씀 전하고 기적을 행하신 곳이다. 가버나움은 바로잡기에는 너무 엉망이 되어버린 혼돈이라는 뜻도 있고. "나훔"의 마을 이라는 뜻도 있다. 나훔의 위로라는 뜻이다. 박영선 목사님은 "우리가 실패한 그 자리가 하나님이 은혜를 담는 자리 ([인생], 박영선, 62p)" 라고 하신다. 양파는 엉망이고 혼돈스러운 곳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택하시고 기적과 사랑을 베푸시며, 고뇌하고 번민하는 자들에게 위로자가 되어주신다. Grace다. 마음이 어지럽고 혼돈스러운 마스코 마음 가운데 양파가 찾아오신다. "자신을 채워 줄게 틀림없는 X를. 그러나 그녀는 그 X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마스코가 아직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더라도...하지만 무엇인가에 이끌려 쫒아가고, 그 길 가운에 양파를 일생을 신뢰하며 그길을 따라가는 오쓰의 고난의 삶을 본다.
생의 마지막 길에 다다르는 갠지스 강. 신분과 부의 격차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품는 곳. 그곳은 추하고 냄새하고 불결한 것. 모든 슬픔을 품는 깊은 강. 갠지스 강.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 인생의 순례길에서 우리가 찾고 머물고 싶은 곳이다. "갠지스 강을 볼 때 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갠지스강은 모든 이의 슬픔과 죄를 씻고 새로 태어나는 곳. 환생을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더러움과 죄를 품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양파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우리 마음과 삶에 환생됨이 곧 "다시 태어남" (거듭남,reborn)이다.
감동적이고 놀라운 책이다. 양파의 삶과 양파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 이처럼 은유적으로 잘 표현한 문학 작품이 있을까 싶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뜰이 보살폈던 야소베의 아내, 더럽고 가장 천한 사람의 곁에서 함께 하는 오쓰, 죽어가는 자의 옆에서 꼬부라져 그의 고통을 흡수하는 가스통.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을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구관조. 모두 양파 덩어리의 흔적들이라고 이 소설은 말한다. 이러한 양파의 손길을 느끼고 아는 자들이..그들의 마음에서 양파가 환생되어 우리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머물길 소망한다.
*파랑색 글자는 책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페이지는 편의상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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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5-14 공감(32) 댓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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