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1

Ilwon Yoon | 북한 - 국민 수 대비 1%의 정규군과 4%의 정규군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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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won Yoon

[삼선 이야기] 국민 수 대비 1%의 정규군과 4%의 정규군의 차이
2022.10.21.


북한 김정은은 연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여차하면 핵실험을 감행하겠는 호언으로 무력 시위를 하고 있다. 역대 모든 사료를 뒤져도 평시 정규군의 숫자가 국민 수의 1%에 수렴하는 룰에 벗어난 제국이 단 하나도 없는데 북한은 오랫동안 이 룰에서 벗어나 4% 대의 정규군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정규군 1%를 유지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다. 과거처럼 노예를 가져다 용병으로 쓸 수 없는 구조에서는 경제적 붕괴를 감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버티면 북한은 무너지는 구조다.
또한 지금의 군사전략은 단독 작전이 아니라 연합작전이다. 과연 단독 작전을 수행하는 북한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한미일 연합작전을 불편해하는 반쪽 진리가 횡횡하는 것을 보면 그나마 북한 김정은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다.
우연의 일치로 유럽과 일본은 봉건제 국가를 오랫동안 시행한 나라이다. 또한 우연의 일치로 유럽은 300년(1560~1660년 혹은 그 이전으로는 14세기, 이후로는 19세기 말까지 연장) 동안 전쟁하면서 군사적 혁신과 국부의 교환을 이루었고,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1336-1573년) 237년 동안 무사의 시대였고, 근대를 알리는 메이지 유신을 시작하기 전까지도 사실상 쇼군이 통치하는 사무라이 나라였다. 이들 나라는 우연의 일치로 산업혁명을 일으켜 근대화를 이끌었다.
봉건제도는 나라가 기마병이 필요하여 영주에게 영토와 백성을 나눠주고, 왕이 전쟁 때 필요한 기마병을 차출하는 제도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왕은 전쟁을 선택하기가 더 쉬웠고 그 결과 끊임없이 전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아자 가트(Azar Gat)는 <문명과 전쟁>에서 유럽과 일본은 봉건제와 산업혁명을 이룬 나라로 우연히 일치하지만, 자본주의 성장에 이바지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봉건제는 중앙권위로부터 토지 수여를 바탕으로 존속하는 기마 전사들과 영주들 쪽으로 지역, 지방의 정치권력과 사법 권력을 끌어당기는 중력이었다. 봉건제는 다음 조건에서만 등장 할 수 있었다. 1) 말을 소유한 사회에서, 2) 전쟁 도구로서 말을 선호한 환경에서, 3) 가장 기초적인 소규모 농업경제를 가진 큰 국가에서, 다시 말해 탐나지만 값비싼 기마 부대를 지원하고 관리할 경제․관료제 하부구조가 없는 까닭에 군역의 대가로 토지를 수여하고 ‘조세’ 대신 ‘지대’를 받아야 했던 국가에서 봉건제가 진화하려면 이 세 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야 했다.”
로널드 핀들레이는 <권력과 부>에서 무엇보다도 1560~1660년 사이 서구에서 발생한 '군사혁명'이 유럽과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 간 근본적인 불평등을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주장한다.
“군사혁명이라는 개념은 전략과 전술, 장비와 무기, 요새, 징집과 훈련, 육·해군 조직에서 복잡하고 서로 연결된 일련의 발전에 적용할 수 있다. 군사혁명의 결과, 절대적 측면에서 물론이거니와 인적 물적 자원의 전체적 가용성을 고려한 상대적 측면에서도 군대의 규모가 실질적으로 커졌다. 아울러 군대 내 서로 다른 조직 단위와 업무 사이에 규율과 조정이 이루어졌으며 장교의 전문성 역시 모든 수준에서 향상했다.”
전쟁이라는 국가적인 총력전에서 민간의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환하느냐 하는 것은 전쟁 이후 국가의 생산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언 모리스는 ‘생산적 전쟁’이 될 수가 있고 파괴를 위한 ‘파괴적 전쟁’이 될 수 있는 차이는 국가 운용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한다.
반면에 필립 T. 호프먼은 <정복의 조건>에서 전쟁이 산업혁명에 기여한 것은 기름과 연료가 아니라 고작 성냥이었다고 주장한다. 기름은 ‘인적자본’ 바꾸어 말하면 전쟁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분야의 숙련된 노동자의 지식과 역량이며, 또 다른 연료로 “의회의 재정 통제, 각료의 책임, 균일한 제정·사법제도 등을 포함하는 정치 제도”라 했다. 
“군사혁명의 발명품들이 산업혁명에 필수 요소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산업혁명의 위대한 발명가들이 모두 군사 부문에 종사했던 것도 아니다. 실은 그들 중 13%만이 어떤 식으로든 군사 부문과 연관이 있었다. … 산업혁명의 주된 특징은 노동생산성과 자본 생산성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봉건제를 시행하지 않았고, 전쟁을 통한 군사혁명을 이루지도 못했으며, 나라가 가난하여 인적자본을 축적할 시간적 여유도 없는 가운데 매우 빠른 속도로 성공하였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많은 원인이 있었지만, 단언컨대 안보를 미국과 동맹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자본과 기술을 일본에서 받아들여 흔들림 없는 단일 대오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참고 및 인용: 로널드 핀들레이, 케빈 H. 오루크 지음 하임수 옮김 <권력과 부> pp.230-231, 아자 가트 지음 오숙은 · 이재만 옮김 <전쟁과 문명> pp.439-453, 필립 T. 호프먼 지음 이재만 옮김 <정복의 조건> pp.244-245
*사진은 전곡리 선사시대 유적지(2019.10)
Ilwon YoonByungtae Lee
14 February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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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 이야기] 코미타투스 그리고 북한 정권의 친위대
북한 핵실험에 이어 미사일 발사, 그리고 이어진 개성공단 폐쇠 등 국가간 최고의 전략게임이 시작되었다. 문인식 무엇인지? 그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내린 정책결정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미래의 어느 순간에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른다. 하지만 현재시점에서 우리의 친구와 적 그리고 이방인이 누군지는 서서히 들어나고 있다.
인터넷 나무위키 사전에 보면 북한정권의 코미타투스, 친위부대는 "북한 김정은의 신변안전과 경호를 담당하고 북한 중심지 평양을 경비하며 과거에는 호위총국으로 불렸다. ... 가장 중요한 임무는 김정은의 호위이며 김씨 일가와 북한 최고위급 간부들의 경호, 반체제 쿠데타 및 폭동 진압, 수도 평양의 방위다.... 김씨일가가 쓰는 각종 물품 조달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라고 하였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면, 북한은 헌법에 의해 나라를 통치하기 보다는 김일성 3대 정권이 만들어 놓은 코미타투스, 즉 충성스러운 친위부대, 12만명(나무위키 자료)에 의해 정권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코미타투스는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족에게 나타나는 전통적인 통치방식 중 하나였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에게도 충성스러운 친위그룹이 있었으며, 징기스 칸에서는 그 전통이 더 뚜렷한 형태로 남아있다. 현대 우리나라 3김 정치시대에도 이런 유사한 경험을 할 정도로 유목민족에게는 뿌리깊은 전통이다.
코미타투스을 수립할 때는 거대한 비전이 있었다. 징기스 칸은 부족중심에서 탈피하여 능력중심으로 나라를 건국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 '자신 만이 유일한 황제이며 하늘 아래 모든 곳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하였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3김이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것도 '민주화'라는 거대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코미타투스는 무엇일까? 북한 정권 수립초기인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 즉 식민지라는 가난에 찌든 백성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이라는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비전은 실패했다. 아마도 모든 북한 주민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실패한 비전을 대신할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한반도에 미군을 몰아내고 통일하자!'하자는 거대한 꿈도 힘에 부치고 근근히 정권을 유지하기도 벅찬 실정이다.
북한 정권은 12만명이 되는 코미타투스에게 어떤 인센티블 제공하여 운영 유지되는 걸까? 비전이 사라진 그 자리에 인간본성의 최종 단계인 '차별화된 지배계층' 제공과 끊임없는 '사치품' 공급일 것이다. 징기스 칸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고 전쟁도 불사했던 품목이 바로 '비단'과 '금'이였다.
로널드 핀들레이 등 지음 <권력과 부, Power and Plenty>에 보면 "몽골인은 항상 무역을 장려했으며,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는 무역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변화했다. ... 중국에 온 유럽인들은 비단 같은 전통적 수출품인 사치재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또한 사들여 기독교 상인들이 구매하기 전에 북쪽에 있는 본토로 보냈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핵과 미사일이 북한 주민 전체를 아우르는 대외적 통치수단이라면, 정권을 실질적으로 운영 유지하는 수단은 충성스러운 코미타투스를 위한 '사치품'이며 이를 위한 '현찰 달러'일 것이다. 우리가 이 계층을 와해시킬 수 있다면 북한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나라가 IMF사태를 맞이한 것은 우리나라 돈인 원화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국제통화인 현찰 달러가 부족해서이다. 미국의 대북한 경제제재와 우리나라의 개성공단 폐쇠조치로 북한으로 유입되는 현찰 달러를 막는다면 북한은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다.
한 사회가 생존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가치를 고수하고, 어떤 가치를 버리고, 어떤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느냐'는 현명한 판단과 용기에 달려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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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타투스에게, 특히 핵심 그룹에게는 가족처럼 대해주었고, 거주지와 세속적인 보물들을 그들과 함께 공유했으며, 상당한 재산을 하사했다. 코미타투스 전사들은 그들의 사회에서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재물과 명예를 보상으로 받았다. 
그것도 단 한번이 아니라, 그들이 주군을 위해 충성하는 한 평생에 걸쳐 받고 또 받았고, 죽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금실로 수놓은 비단 옷이나 보석, 진주, 금붙이 장식이 달린 황금 홋을 입었다. 그들은 주군과 함께 궁궐에서 살았다. 그들은 주군과 같은 음식을 먹고 마셨다. 삶에 있어서나 죽은뒤에서, 그들은 주군의 동료였다.(중략)
칭기스 칸의 코미타투스는 소규모 핵심 그룹(누케르 nokers 혹은 친구들)과 대규모 황제 친위대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캐식 또 케식텐으로 불렸는데, 칭키스칸이 죽을 무렵에는 그 수가 1만에 달했다. 마르코 폴로는 여기에 대해 꽤 상세한 설명을 전해준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에 의하면 쿠빌라이 칸의 코미타투스는 1만 2,000명의 기마전사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네 부대로 나뉘어 각 부대에 지휘관이 있었다.(중략)
중국인들은(고대 그리스인이나 후기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코미타투스 전통이 없었다. ... 주군은 전사들을 존중하고 자주 재물을 하사했다. 특히 고급 비단옷이나 몸에 지니기 쉬운(혹은 운반하기 쉬운) 금붙이들을 주었다. 고대 중앙유라시아 궁정을 묘사하는 자료를 보면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군주의 친구들도 언급된다.(중략)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요소들 가운데 코미타투스가 근동 지역으로 소개된 것은 아랍제국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던 무렵이었다. ... 중앙아시아를 통치했던 가장 유명한 통치자이자 장군이었던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 알 바힐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코미타투스는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인용: 크리스토퍼 백위드 지음 이강한 류형식 옮김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pp.71-86, 사진은 theguardian, KCNA/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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