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満洲」に渡った朝鮮人たち Tankobon Hardcover – June 20, 2019
by 李 光平 (著)
5.0 out of 5 stars 2 ratings
Paperback ¥3,680
185 pages
Product description
内容(「BOOK」データベースより)
旧「満洲」に渡った朝鮮人の姿と声を収めた初の写真記録集。写真家・李光平の20年かけたオーラルヒストリー・ノート。その“声”から植民地主義の歴史へより立ち入った問いが始まる…。
内容の紹介
帝国日本によって植民地化された朝鮮を離れ、植民地「満洲国」へ移動を余儀なくされた朝鮮人農民たちがいた。そのような時間とアジアの場所とは何であったのかを証言し、現代とつなげてくれるのが、これら移動した朝鮮の人々である。本書はそれを、肖像写真・体験証言・分析論考でトータルに記録し、分析・紹介する。
著者略歴 (「BOOK著者紹介情報」より)
李/光平
ドキュメンタリー写真家、群衆文化専業副研究館員、龍井3.13記念事業会会長
金/富子
ジェンダー史・ジェンダー論、植民地期朝鮮教育史。東京外国語大学大学院教授
中野/敏男
社会理論・社会思想。東京外国語大学名誉教授
橋本/雄一
中国近代文学・植民地社会事情。東京外国語大学大学院准教授
飯倉/江里衣
朝鮮近現代史、在満朝鮮人史。関東学院大学ほか非常勤講師(本データはこの書籍が刊行された当時に掲載されていたものです)
Product Details
Publisher : 世織書房 (June 20, 2019)
Publication date : June 20, 2019
Language : Japanese
Tankobon Hardcover : 18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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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満洲」に渡った朝鮮人たち 李光平写真・文 世織書房 2400円
2019/09/08 05:00
知られざる移民の記録
評・藤原辰史(農業史研究者・京都大准教授)
◇り・ぐぁんぴょん=ドキュメンタリー写真家、群衆文化専業副研究館員。編著に『中国朝鮮族民俗』など多数。
著者の李光平リグァンピョンは、中国吉林省龍井市の文化館長という要職を早期に辞め、2000年からバイクで3万キロ、車で2万キロ走り、旧満洲国にあたる現中国東北部に住む膨大な数の老人の聞き取りをし、写真を撮ってきた。
この老人たちはかつて朝鮮半島に住んでいた。朝鮮総督府が、朝鮮との国境にある満洲国間島省に集団的に移住させた人々が聞き取りの中心にある。彼らは、どの国の歴史からも排除されてきた。語り手たちは、寝食を共にして話を聞く李の態度に動かされ、重い口を開き、泣き、笑った。調査資金はどの団体からももらわず、給料を使い尽くした。
このあたりは金日成キムイルソンらが率いる東北抗日聯軍が抵抗闘争を展開していた。移民者は、それに対する防波堤としての役割も期待されたのだ。しかし、総督府の圧政に苦しめられた移住者の一部は、聯軍に食糧や荷物を運搬した。他方で、抗日運動に誘われ、断った人もいる。聯軍が援助を求めに家に来ると、怖くて布団から出られなかったという証言もある。
朝鮮半島から満洲に移民した朝鮮人に対する日本の軍人の行為も常軌を逸していたと老人たちは回顧する。李が聞いた回想を引用しよう。〈1〉金容真キムヨンジン。「日本人教官」が「靴を履いた足で容真の下腹を蹴飛ばし、こぶしで殴り倒した」。抵抗しようと決意した金に「他の日本人教官が容真を強く投げ倒したあと、靴を履いた足で踏みつけた」。〈2〉朴徐雲パクソウン。金が稼げるという「人買いの口車に乗せられ」、ソ連との国境にある吉林省の慰安所に連れてこられた。長患いで1日に1人から3人しか相手できず、後に追い出された後、「乞食をしながら」生き抜いた。写真の表情も重く、切ない。
日本統治下の朝鮮で起こった「三・一独立運動」から今年で100年。日本内地からの満洲移民の体験も想像を絶するが、朝鮮半島からの満洲移民もまた悲劇的だった事実も、心に刻んでおきたい。
2019年6月26日 3時00分
写真集を手にする李光平さん=2019年6月19日午後1時2分、新宿区大久保の高麗博物館、北野隆一撮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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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前や戦中に朝鮮半島から旧満州に渡り、戦後は中国東北地方で朝鮮族として暮らしてきた人々を撮り、歴史をたどった写真集「『満洲』に渡った朝鮮人たち」(世織書房)が今月出版された。記念の写真展「李光平写真展 植民地朝鮮から『満洲』へ渡った朝鮮人移民」が26日から7月7日まで、新宿区大久保の高麗博物館で開かれる。
李光平(リグァンピョン)さん(74)の両親と祖父は1939年、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下の朝鮮半島北部・咸鏡北道(ハムギョンブクド)から旧満州の龍井(現中国吉林省龍井市)に移住。李さんは99年から朝鮮人集団移住の歴史を調べ始めた。翌2000年には地域の文化館長を早期退職して調査に専念。戦前を知る老人約600人に話を聞き、写真を撮った。当初はバイクで移動していたが、04年に転倒事故で頭や腕に大けがをし、車に切り替えた。
戦前、旧満州には日本の内地や朝鮮半島南部などから開拓民が送り込まれ、朝鮮人は抗日活動が盛んな朝鮮国境地域などへの移住が進められた。45年の日本敗戦時、旧満州にいた朝鮮人約216万人の多くは朝鮮に戻り、現在は朝鮮族約130万人が中国に住む。
中国で朝鮮人移民の研究者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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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조선인 ‘집단 이민’ 역사 공백 메우고 싶었죠”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901502.html?_ga=2.208438034.1284102366.1671577018-986997618.1537583198
등록 :2019-07-11
조기원 기자 사진
‘조선족 2세’ 이광평 전 룽징현 문화관장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일어판 사진집
1999년부터 10여년 5만㎞ 600명 증언 채록
“일제때 만주에 일본인보다 조선인 많아”
지난 7월 8일 일본 도쿄 신주쿠 카페에서 이광평씨가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일본판 사진집을 소개하고 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일제 강점기 옛 만주(중국 동북지방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을 일컫는 명칭)로 건너간 조선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조선족 2세로 룽징(용정)현 문화관장을 지낸 이광평(74)씨는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10년 이상 사진을 찍고 600명의 증언을 채록했다. 5만㎞ 넘는 거리를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이동해가며 모은 사진을 토대로 최근 일본에서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그의 채록 증언에는 “만주에 가면 모두 부자가 된다”는 거짓말에 속아 만주로 온 평범한 조선인들의 사연이 나온다.
지난 8일 도쿄 신주쿠구에서 저자를 만났다. 그가 만주의 조선인을 테마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계기는 “집단 이민”이라는 생소한 단어 때문이었다. 1999년 지린(길림)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왕칭현 한 마을에 갔다가, 마을이 조선총독부 계획에 따라 조선에서 집단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옛 기록을 찾아봤지만 “집단 이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거나 있어도 개략적인 내용이 몇쪽에 불과했다. 이때 조선족 생활사 공백을 메우겠다고 결심했단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동북항일연군(중국인과 조선인이 연합한 항일 무장단체) 주요 활동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선인 집단 이주민을 정착시켰다. 집단 이주한 조선인들은 항일연군에게 식량을 내주면 뒤에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취조를 당해야 했다.
1937년 왕칭현으로 이주해온 서타관씨를 2003년에 촬영한 사진. 서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토담을 쌓다가 허리를 다쳐서 노년에는 허리를 펴지 못했다고 한다. 이광평씨 제공
2007년에 네 차례나 찾아가 겨우 사진을 찍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모습. 평안(平安)이라고 쓰인 반지를 끼고 있다. 할머니는 취업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부산에서 만주로 갔다가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광평씨 제공그는 조선족 내부와 중국에서 조선인 집단이주의 역사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고 했다. “조선족도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주로 항일 투쟁사를 연구했죠.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뒤 건너온 조선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의 사진은 일상적 기념사진처럼 보이지만 아픈 이주 역사를 말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2003년 왕칭현에서 촬영한 서타관 할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텃밭에 거의 엎드려 있다. 1937년 왕칭현으로 이주한 그는 이주 초기 토담을 쌓는 공사에 동원됐다가 허리를 다쳤다. 노년 들어 그 후유증으로 거의 기어서 생활한단다. 2007년에 네 차례나 찾아가 겨우 사진을 찍었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평안’(平安)이라고 쓰인 반지를 끼고 있다.
사진집 출판에 참여한 재일동포 김부자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교수는 “일본에서 만주 이민자는 일본인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패전 뒤) 일본인들이 도망올 때 고생했다는 식으로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 시절 만주에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많았다. 200만명 이상이었다. 식민주의 역사이기에 한국에도 이 책이 소개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写真集を手にする李光平さん=2019年6月19日午後1時2分、新宿区大久保の高麗博物館、北野隆一撮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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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前や戦中に朝鮮半島から旧満州に渡り、戦後は中国東北地方で朝鮮族として暮らしてきた人々を撮り、歴史をたどった写真集「『満洲』に渡った朝鮮人たち」(世織書房)が今月出版された。記念の写真展「李光平写真展 植民地朝鮮から『満洲』へ渡った朝鮮人移民」が26日から7月7日まで、新宿区大久保の高麗博物館で開かれる。
李光平(リグァンピョン)さん(74)の両親と祖父は1939年、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下の朝鮮半島北部・咸鏡北道(ハムギョンブクド)から旧満州の龍井(現中国吉林省龍井市)に移住。李さんは99年から朝鮮人集団移住の歴史を調べ始めた。翌2000年には地域の文化館長を早期退職して調査に専念。戦前を知る老人約600人に話を聞き、写真を撮った。当初はバイクで移動していたが、04年に転倒事故で頭や腕に大けがをし、車に切り替えた。
戦前、旧満州には日本の内地や朝鮮半島南部などから開拓民が送り込まれ、朝鮮人は抗日活動が盛んな朝鮮国境地域などへの移住が進められた。45年の日本敗戦時、旧満州にいた朝鮮人約216万人の多くは朝鮮に戻り、現在は朝鮮族約130万人が中国に住む。
中国で朝鮮人移民の研究者は…
この記事は有料記事です。残り177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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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조선인 ‘집단 이민’ 역사 공백 메우고 싶었죠”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901502.html?_ga=2.208438034.1284102366.1671577018-986997618.1537583198
등록 :2019-07-11
조기원 기자 사진
‘조선족 2세’ 이광평 전 룽징현 문화관장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일어판 사진집
1999년부터 10여년 5만㎞ 600명 증언 채록
“일제때 만주에 일본인보다 조선인 많아”
지난 7월 8일 일본 도쿄 신주쿠 카페에서 이광평씨가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일본판 사진집을 소개하고 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일제 강점기 옛 만주(중국 동북지방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을 일컫는 명칭)로 건너간 조선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조선족 2세로 룽징(용정)현 문화관장을 지낸 이광평(74)씨는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10년 이상 사진을 찍고 600명의 증언을 채록했다. 5만㎞ 넘는 거리를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이동해가며 모은 사진을 토대로 최근 일본에서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그의 채록 증언에는 “만주에 가면 모두 부자가 된다”는 거짓말에 속아 만주로 온 평범한 조선인들의 사연이 나온다.
지난 8일 도쿄 신주쿠구에서 저자를 만났다. 그가 만주의 조선인을 테마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계기는 “집단 이민”이라는 생소한 단어 때문이었다. 1999년 지린(길림)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왕칭현 한 마을에 갔다가, 마을이 조선총독부 계획에 따라 조선에서 집단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옛 기록을 찾아봤지만 “집단 이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거나 있어도 개략적인 내용이 몇쪽에 불과했다. 이때 조선족 생활사 공백을 메우겠다고 결심했단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동북항일연군(중국인과 조선인이 연합한 항일 무장단체) 주요 활동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선인 집단 이주민을 정착시켰다. 집단 이주한 조선인들은 항일연군에게 식량을 내주면 뒤에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취조를 당해야 했다.
1937년 왕칭현으로 이주해온 서타관씨를 2003년에 촬영한 사진. 서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토담을 쌓다가 허리를 다쳐서 노년에는 허리를 펴지 못했다고 한다. 이광평씨 제공
2007년에 네 차례나 찾아가 겨우 사진을 찍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모습. 평안(平安)이라고 쓰인 반지를 끼고 있다. 할머니는 취업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부산에서 만주로 갔다가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광평씨 제공그는 조선족 내부와 중국에서 조선인 집단이주의 역사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고 했다. “조선족도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주로 항일 투쟁사를 연구했죠.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뒤 건너온 조선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의 사진은 일상적 기념사진처럼 보이지만 아픈 이주 역사를 말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2003년 왕칭현에서 촬영한 서타관 할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텃밭에 거의 엎드려 있다. 1937년 왕칭현으로 이주한 그는 이주 초기 토담을 쌓는 공사에 동원됐다가 허리를 다쳤다. 노년 들어 그 후유증으로 거의 기어서 생활한단다. 2007년에 네 차례나 찾아가 겨우 사진을 찍었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평안’(平安)이라고 쓰인 반지를 끼고 있다.
사진집 출판에 참여한 재일동포 김부자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교수는 “일본에서 만주 이민자는 일본인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패전 뒤) 일본인들이 도망올 때 고생했다는 식으로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 시절 만주에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많았다. 200만명 이상이었다. 식민주의 역사이기에 한국에도 이 책이 소개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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