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6

똥 같은 괴물, 괴물 같은 똥(1) ―「분지」, 「똥바다」를 중심으로 김철

 1. 머리말

똥 같은 괴물, 괴물 같은 똥(1)

―「분지」, 「똥바다」를 중심으로

김철

먹고 싸는 일이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그 역겨움을 외면하거 나 은폐함으로써 비(非)-축생(畜生)으로서의 인간 고유의 본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몸부림 역시 근대 휴머니즘의 한 경향일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똥’을 비롯한 배설물이 나 오물에 주목하는 것은 낯선 일도, 기이한 일도 아니다. 인문학의 역사, 특히 문학의 역사는 인간 자신의 더럽고, 역겹고, 공포스런 모습을 들춰내고, 파헤치고, 내보임으로써 인간의 자기 인식을 확대해 온(또는 축소해 온)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의 『눈먼 자들의 도시』(1995)만큼 “누는 자의 실존을 정 면으로”1) 그린 작품은 달리 없을 것이다. 이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인간은 눈이 멀었다 는 사실이 아니라 눈이 멂으로써 비로소 보게 되는 사실, 즉 똥을 처리할 길 없이 똥 속에 갇 힌 채 똥과 함께 뒹굴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공포를 느낀다. “눈이 보일 땐 보지 않고 보려 하지 않은 똥”이 눈이 멀자 “보이기 시작”2)하는 이 역설적 상황은 근대 이래 인간 이 쌓아 올린 오만의 탑을 일거에 깨부순다.

이 글은 똥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기획의 일부로서, 한국문학에서의 똥의 재현 양상을 남정현의 「분지(糞地)」(1965)와 김지하의 「똥바다」(1974. 원제 「糞氏物語」)를 통해 살핀다. (방영웅의 『분례기』(1967)는 2부에서 다룬다). 이들은 한국 현대문학 가운데 똥을 직접적 소재나 모티브로 삼은 작품들 가운데 일부이면서, 똥을 혐오와 적개심의 대상으로서의 ‘적(敵)’ 혹은 멸시와 천대의 대상으로서의 비천한 존재, 즉 이른바 비체(abject)의 상징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표상 방식은 똥과 배설물 등의 오물(그리고 그런 존재들)을 더럽고 역겨운 오염원, 더 나아가 부도덕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들의 은폐와 차단, 격리와 배제를 통 해 ‘인간’을 합리성과 질서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근대적 시스템에 정확히 부합하는 사 유이며 표현이다. 푸코가 말했듯이, 그것은 “인간에 고유한 속성을 고립시키는 인식론적 지식” 즉, 칸트 이래의 ‘인간학’이라는 “조물주가 겨우 200년 전에 창조해낸 극히 최근의 피조물”인 “인간’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처럼 “파도에 씻겨 곧 사라져 버릴” “종말”에 다가서고 있다.3) 나는 위 작품들의 분석을 통해 그 “종말”을 묻고자 한다.

1) 한만수, 「똥의 인문학으로의 초대」, 『똥의 인문학』, 역사비평사, 2021, 10쪽. 2) 같은 곳.

3) 미셸 푸코, 이광래 역, 『말과 사물』, 민음사, 1987, 355/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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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문학과 적: “총알을 찰칵 넣고 방아쇠에 살짝 손가락을 건다”

현대 유럽 문학의 전개에 관한 한 흥미로운 분석에서 폴 퍼셀(Paul Fussell)은 “현대적 글쓰기 의 바탕을 이루는 제일의 필수불가결한 관념은 바로 ‘적’ 관념”4)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중 끝없이 지속되는 참호 전투 속에서 병사들이 겪어야 했던 집단적 격리, 방 어적 수동성, “저쪽 편”이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신경증적 강박 등은 현대의 정치적, 사회적, 예술적, 심리적 양극화의 모델을 성립시켰고, 현대적 글쓰기의 기본 양식인 “편집증적 멜로드 라마”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여기에 있고 “적”은 저기에 있다. “우리”는 개별적 이름과 개성 을 지닌 존재이고 “적”은 그냥 이름 없는 “무리”일 뿐이다. “우리”는 보이고 “적”은 보이지 않 는다. “우리”는 정상이고 “적”은 괴물이다. “우리 것”은 자연스럽지만 “적의 것”은 괴상망칙하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우리를 위협한다. 따라서 반드시 쳐부수어야 하고, 쳐부술 수 없 다면 억누르고 무력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말을 잘 듣도록 가르쳐야 한다.

퍼셀은 현대 세계의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모든 부면에서 지속되는 이러한 관습적 상상을 “역겨운 이분법”(gross dichotomizing)으로 명명하면서, 예컨대, 공산주의자의 ‘자본가’, 자본가의 ‘공산주의자’, 히틀러의 ‘유태인’뿐 아니라, 에즈라 파운드, T.S. 엘리엇, 윌리암 포크너, D.H. 로렌스 등 영미 문학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분법적 적개심을 거론한다. 20세기의 두 번 에 걸친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심지어는 시간과 공간마저도 ‘우리 것’과 ‘저들의 것’으로 양 분하는 ‘대비(對比)의 관습’(the versus habit)을 낳았다. 단순 명료한 양극화만이 지배하는 이 세 계에서 사라진 것은 모호성이나 뉘앙스다. 세계대전의 주요 사상자는 바로 그들이었다.5)

‘친밀한 적’, ‘적대적 공존’ 등의 개념마저 진부해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정신문 화의 기저를 단순히 ‘역겨운 이분법’으로 파악하는 이런 방식이야말로 어쩌면 또 다른 단순화 의 오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현대적 글쓰기의 기본 형태를 ‘적/아’의 양극화에서 비롯된 “편집증적 멜로드라마”로 이해하는 1970년대 유럽 비평가의 이러 한 관점을 같은 시기의 한국문학 작품들, 예컨대 이제 다루고자 하는 남정현의 「분지」나 김지 하의 「똥바다」, 혹은 근현대 한국문학 전체의 해석에 참고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크 게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문학에서 ‘정의로운 우리’와 대립되는 ‘사악한 그들’, 즉 ‘적’의 존재가 명료하게 등장한 것은 언제 어디서부터였을까? 그리고 그 ‘적’은 어떤 식으로 표상되었던가? ‘나’의 삶을 위태 롭게 하는 정체불명의 괴물이자 악마로서의 ‘적’, 그럼으로써 동시에 ‘우리’를 단결시키고 강 력한 존재로 재탄생케 하는 사악한 ‘적’은 한국인에게 언제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그려졌는 가? 내가 아는 한, 이런 질문은 한국문학의 연구에서 제기된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6)

식민지 시대 조선인에게 ‘적’은 누구이며 어떻게 표상되었나?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인이

4) Paul Fussell, The Great War and Modern Mem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75, p. 76.

5) Ibid., pp. 75-81.

6) 신형기의 『이야기된 역사–남북한 민족 이야기가 그려낸 역사상 비판』 (삼인, 2005)은 한국 근현대의

역사 서술과 문학을 지배한 “신경병적 이분법”의 ‘억압’을 파헤치면서, 그 “희생자들의 시신 위에 덮 인 갖가지 깃발과 만장들을 걷어내는” 드문 비평적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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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악한 적”이라는 모범 답안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식민지 시 기 문학을 중심으로 간단한 스케치를 시도해 보자.

두루 알다시피, 이인직의 신소설 이래 1920년대의 이른바 계몽주의 문학에 이르기까지 식민 지 작가들의 주요한 적대적 대상은 구(舊)조선 사회의 봉건적 인습과 낡은 사회체제였다. 그것 은 증오스런 ‘적’이라기보다는 지향해야 할 문명 세계를 위해 청산해야 할 자기 안의 질병 같 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 사회주의 문학의 도입은 한국문학에서 ‘적 관념’을 처음 으로 확립하기 시작한 사건으로 읽을 수 있겠다. 새로운 작가들은 ‘악독한 부르주아/ 정의로운 프로레타리아’라는 계급론적 적대관에서 식민지 현실의 묘사를 위한 신영역을 발견했다. ‘적/ 아’의 이분법과 그에 따른 “편집증적 멜로드라마”가 20세기 문학의 기본적 양식이 되었다는 앞의 논의를 고려하면, 한국문학은 20년대 카프 문학을 통해 비로소 세계문학의 당대성에 접 속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퍼셀이 말하는 ‘적 관념’이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초유의 끔찍한 경험을 통해 생겨난 것임을 감안할 때,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 작가들의 계급 적대감은 그에 비할 수 없이 관념적 일 것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식민지기 사회주의 문학 작품 속에서 적대적 대상인 ‘자본가’나 ‘부르주아’는 구체적 실체로 드러나는 법이 거의 없다. 한설야, 송영, 이북명 등의 노동소설에 등장하는 착취자로서의 ‘적’은 대개 조선인 중간 관리자이다. 카프 문학 최고의 성과로 꼽히는 이기영의 『고향』에서도 빈농 계급의 억압자로서 소설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일본인 지주가 아 니라 조선인 마름이다.

카프 시기의 작품이나 이론이 리얼리티나 현실 정합성의 관점에서 ‘골방 속의 지루한 독백’ 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이 적대성이 작가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이라기보다는 학습을 통해 심어진 것이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최서해나 이북명 같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 분의 카프 작가들은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 다. 더욱이 카프 해산 이후의 이른바 ‘전향문학’이 이룩한 깊이 있는 사유와 수준 높은 예술적 형상화의 성과에 비추어 보면, 카프 시기의 추상적 관념성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한층 분명해진다. ‘전향’이야말로 그들이 실제로 몸과 마음으로 겪은 생생한 체험이었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문학이 보다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적을 묘사하고 적에 대한 증오심으로 충만한 작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부터 태평양 전쟁으로 이르는 전시 총동원 체제하에서의 이른바 ‘친일문학’/‘국민문학’의 실천을 통해서일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식민지 작가들은 비로소 적의 정체를 뚜렷이 하고 카프 시대에 형성된 관념적 적대성을 구체 적으로 언어화할 하나의 길을 발견했다고 해도 좋다. 예컨대, 사회주의 문학의 동반자 작가로 이름 높던 한 작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식민지 조선문학이, ‘적/아’의 이분법에 관한 한, 그 들이 적으로 삼은 자들과 완전히 동일한 문법을 사용하게 되었음을, 그리고 그럼으로써 20세 기 문학의 이른바 ‘보편성’에 다가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의 귀추는 벌써 뚜렷해졌읍니다. 침략자와 자기 방위자,부정자(不正者)와 정의자,세계제 패의 야망을 쫓는 자와 인류상애(人類相愛)의 이상에 불타는 자의,한마디로 말하면 악마와 신 의 싸움인 것입니다. 정의는 태양처럼,사악(邪惡)은 먹구름처럼,구름은 마침내 태양의 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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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의로와 정의자가 일어설 때는 그 승리는 저절로 명백한 것입니 다.7)

한편 「전(全) 일본 무산자 예술동맹(NAPF)」의 맹원으로 촉망받던 일급의 좌파 시인은 ‘적’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그들을 “쏘아 죽인다”고 외친다.

총알을 찰칵 넣고

방아쇠에 살짝 손가락을 건다

눈을 반쯤 뜨고 응시하며 깜짝 않고 정확히 삼백 미터를 겨냥한다

저 사람 머리 표적 속에

좋다,

귀축(鬼畜)의 얼굴이 나타난다

루즈벨트의 오만이

처어칠의 노회(老獪)가

장개석의 고충(苦蟲)이

그들 손에 놀아난 가련한 적병이

그 녀석들을 이 실탄으로 쏘아 죽인다8)

식민지 조선인의 ‘적’은 비로소 육체성을 얻는다. 귀축미영(鬼畜米英), 루즈벨트, 처칠, 장개 석, 그리고 “그 녀석들”. 식민지 조선의 작가들은 전쟁의 전선(前線)에 서서 마침내 적 귀축미 영의 “얼굴”을 본다. “정의/사악”, “신/악마”, “태양/구름”, “우리/그 녀석들” .... “역겨운 이분 법”과 “편집증적 멜로드라마”는 이렇게 피식민자의 가슴에 뿌리내리고 이후 한국문학과 한국 인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양식이 된다.

그러나 ‘국민문학’의 단계에 와서 이렇게 양식화된 ‘적 관념’도 카프 문학의 경우처럼 작가 자신의 구체적 체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기는 마찬가지다. 만주사변으로부터 태평양 전 쟁에 이르는 이른바 ‘15년 전쟁’의 전시기에 걸쳐 한반도는 직접적 전투의 현장이 아니라 후 방의 ‘병참기지’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 물론 가혹한 총동원 시스템과 ‘내선일체’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 역시 극심한 물질적-정신적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 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는 해도 전쟁의 현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극도의 적대 감, 후방 도시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과 폭격 등 현대 총력전 시스템으로부터 오는 육 체적-정신적 공포와 절망, 분노 같은 것들에서 식민지 조선은 한발 물러나 있었다. 예컨대, 식 민지 조선인에게 전쟁은 주로 선전영화, 극장에서의 전쟁 뉴스, 또는 가끔씩 하늘을 가로지르 는 비행기나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들을 가득 실은 군용열차 같은 것으로 감각되었다.9)

7) 유진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新時代』, 1944.9. (감병걸·김규동 편, 『친일문학작품선집』 2, 실천 문학, 1986, 71쪽).

8) 김용제, 「射的」, 위의 책,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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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귀축미영”이라는 적의 형상을 실제의 삶에서 직접 감각할 수 있는 조선인은 중국 이나 남방의 전장에 직접 동원된 일부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인에게 이 전쟁은 “남의 전 쟁”이었다.10) 그러나 “귀축미영”의 슬로건을 통해 구성된 세계―‘사악한 적/정의로운 우리’의 사생결단적 대립으로 이루어진―의 형상은 후방의 조선인에게도 공기처럼 흡입되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남의 전쟁’이 ‘나의 전쟁’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양극 화된 이분법과 편집증적 멜로드라마가 한반도의 모든 시간과 공간, 모든 개인과 집단을 확실 하게 지배하는 시대는 그 ‘남의 전쟁’이 끝나는 순간, 즉 1945년 8월 15일에 시작되었다. (그리 고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인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과연 ‘적’으로 표상되었는가, 하는 앞서 제기한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11)

일본의 식민 지배 기간에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건너와 살았다. 조선 총독부 통계연보, 조선 국세(國勢)조사 보고 등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10년 현재 조선 내 총인구 1,300만여 명 가운데 일본인은 1.28%, 즉 15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관리나 교원, 경찰, 군 인이었다. 한편 노동자, 농민, 유흥업 종사자 등의 하층 계급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조선으로 건너왔다. 1944년 현재 조선 내 총인구는 조선인 25,133,352명, 일본인 712,583명, 기타 외국인 71,573명, 합계 25,917,508명이었다. 그런데,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위치가 정해진 일본인 과 조선인은 조선 내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조선인 마을이나 거주지와 분리되어 서로 ‘소 닭 보듯이’ 살았을까? 아니면,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 역사기록들이 말하듯, 무력을 앞세운 소수의 외래 침입자가 다수의 ‘원주민’을 짓누르고 수탈하는 형태의 폭력이 이 들의 사이를 시종일관했을까?

수탈과 억압을 규탄하는 흥분된 기록들은 넘쳐흘러도 식민지에서의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적 기록들은 만나기 어렵다. 그 기록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바로 문학, 특히 소 설이다. 그런데 식민지 시기 소설에는 일본인과의 교류는 물론 일본인이 등장하는 경우가 거 의 없고, 있어도 극히 미미한 존재로 나타나기 일쑤다. 식민지 제도 아래서 신교육을 받고 일 본 유학까지 한 작가들,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일본인을 접했을 작가들의 작품에 일본인이 보 이지 않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유일한 예외는 염상섭이다. 그는 초기부터 일본(인)의 존재를 소설 무대에 끌어들였다. 두루 알다시피, 『만세전』(1924)에는 주인공과 일본인 여급(女給)과의 로맨스가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 로 되어 있다. 시모노세키(下關) 항구에서 주인공을 취체하는 일본인 순사나 관부연락선 욕탕 안의 일본인 브로커들의 형상도 한국 소설사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다. 이밖에도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의 고뇌를 다룬 「남충서(南忠緖)」(1927)를 비롯 해 여주인공을 불행에 빠뜨리는 일본인 악당이 등장하는 『이심』(1929) 같은 소설도 당대 문학 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삼대』(1931)에 이르면 조선인 사회주의 활동가가 일본 고등경찰

9) 이 주제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김철, 「우울한 형/명랑한 동생」, 『식민지를 안고서』, 도서출판 역 락, 2009 및 차승기, 「추상과 과잉」, 상허학보, 21집, 2007, 참조.

10) 차승기, 위의 글, 참조.

11) 이하의 서술은 김철, 『복화술사들』, 문학과 지성사, 2008, 89-100쪽 이곳저곳에서 인용 및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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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고문당하는 장면이 삽화와 함께 조선일보 지면에 등장한다. (검열을 어떻게 피했는지는 미스 터리다). 이 소설들에서 일본인을 그리는 염상섭의 붓끝은 상대방을 ‘악마’로 그리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염상섭을 한국문학 최고의 리얼리스트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이것만으로 도 충분하다. 일본/인이 등장하는 소설이 급증하는 것은 ‘내선일체’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 는 1940년 이후다. 작가 자신의 의도에서가 아니라 식민 통치자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고 주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이나 연애 문제를 다룬 것들이 많았다.12)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드 러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조선문학은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인을 ‘적’으로 표상했는가, 하는 질문 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염상섭의 경우를 제외하면) 적대 적이든 우호적이든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식민 지배자에 대한 적대감과 피식민자로서의 분노 가 없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 작가들의 작품에서마저도 억압자로서의 일본 제국주의나 일본인이 출현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단지 검열의 문제만으로 이유를 돌리기는 어 렵다). “귀축미영”에 대한 실감없는 적대감이 극단적 수사와 함께 표출되는 ‘국민문학’의 경우 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여기의 현실을 규정하는 데에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적대자인 식민 지배자의 “얼굴”이 은폐/차단/소거/망각되는 식민지 조선문학 ―이것은 한국 문학사가 풀어야 할 하나의 수수께끼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적을 누구로 삼았든 그 적개심이 아무리 관념적이 었든, ‘정의로운 우리/사악한 적’의 “역겨운 이분법”에 바탕을 둔 “편집증적 멜로드라마”라는 현대적 글쓰기의 양식은 한국 신문학의 장(場) 안에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남은 일은 이 장 안에 새로운 적의 “얼굴”을 그려 넣는 것뿐이었다.

앞서 말했듯, 일본 제국주의 지배자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인들은 ‘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제 “총알을 찰칵 넣고 방아쇠에 살짝 손가락을” 걸면 “저 사람 머리 표적 속에” 나타나는 “적”의 “얼굴”은 (한번도 본 적 없는) “루즈벨트”나 “처어칠”이나 “장개석”이 아 니라 (매일같이 함께 부대끼던) 나의 형제, 가족, 친구들이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의 이른바 ‘해방공간’은 명실상부한 내전(內戰)의 시기였고, 한국인들은 새로운 적을 “실탄으로 쏘아 죽”이는 데에 일찍이 식민 지배자의 선동에 의해 한껏 충전된 바 있는 적개심 과 증오심을 최대의 동력으로 삼았다.

‘적/아’의 대립이 뚜렷해질수록, 적에 대한 증오가 깊어질수록 적을 형용하는 언어 또한 유 례없는 변태의 과정을 겪는다. 분단과 전쟁을 지나는 동안 현대 한국어와 한국문학은 증오와 저주, 독기와 원한을 뿜어내는 강렬한 파토스적 어휘 및 표현 용례들의 전에 없이 새로운 목 록을 갖추었다고 해도 좋겠다. 한국전쟁기 남북 양쪽의 프로파갠더 문학(종군문학) 및 전후 냉 전기 남쪽의 반공문학과 북쪽의 반미문학에서 섬멸, 절멸해야 할 철천지 원수이자 악마, 나의 신체와 정신을 오염시키는 괴물이자 병균, 따라서 빈틈없이 감시, 격리, 차단하고 마침내 깨끗 이 청산해야 할 오물로서의 적의 존재는 쉴 새 없이 강박적으로 묘사되고 주입되었다. 묘사되 는 ‘적’의 얼굴은 달랐지만 그 묘사의 문법과 어휘는 남북 양쪽에서 동일하고 그 편집증의 강 도(强度) 또한 같았다는 데에 이 ‘적 관념’의 20세기적 보편성과 한반도적 특성이 있다. 남정현

12) 이주제에관한논의는김철,위의책.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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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소설 「분지」와 김지하의 담시 「똥바다」는 한국인과 한국문학에 새겨진 “역겨운 이분법”과 “편집증적 멜로드라마”의 충실한 계승자이다.

3. 「분지(糞地)」: 피식민자의 신경증에 관한 임상기록

소설 내에 명백하게 지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소설의 제목 ‘분지’가 ‘똥으로 뒤덮인 한반도’ 를 가리키는 조어(造語)임은 분명하다.13) 한국문학사에서 똥이나 오물이 적대적 대상을 의미하 는 노골적인 기호로 사용된 사례는 아마도 이 소설이 최초일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이 소설은 “이방인들이 흘린 오줌과 똥물만을 주식으로 하여 [...] 오물처럼 살아온”, “홍길동의 제10대손이며 단군의 후손인” 주인공 홍만수가 미군 상사의 부인을 강간 하고 향미산(向美山)이란 산중에 숨어 “무려 일만여를 헤아리는 각종 포문과 미사일 [...] 그리 고 미 엑스 사단”에 포위된 채 죽음을 앞두고 토하는 장광설의 연설을 내용으로 한다. 그의 어머니는 해방과 함께 남한에 주둔한 미군에게 강간을 당해 실성하여 죽었고, 누이동생은 미 군의 “첩”이 되었으며 그는 그 누이동생의 덕으로 살아간다. 누이를 학대하는 미군 상사에 대 한 복수로 그는 그 상사의 부인을 강간한다. “신이 잘못하여 이 세상에 흘린 오물”, “악마가 토해낸 오물”로 호명된 홍만수는 향미산 일대 주민들이 “지층 깊은 곳에 몸을 처박고는 부들 부들 떨고 있”는 가운데 미군에 포위된 채, “민중을 위해서 투쟁한 별다른 경험이나 경륜이 없어도 ‘반공’과 ‘친미’만을 열심히 부르짖다 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이 런 세상”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최후의 말을 남긴다.

앞으로 단 십초. 그렇군요. 이제 곧 저는 태극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러닝셔츠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새 깃발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을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야지요. 그리하여 제가 맛본 그 위대한 대륙에 누워있는 우윳빛 피부의 그 윤이 자르르 흐르는 여인들의 배꼽 위에 제가 만든 이 한 폭의 황홀한 깃발을 성심껏 꽂아놓을 결심인 것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어머 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218쪽)

작가가 ‘반공법’으로 기소되고 법정에 선 핵심적인 이유는 이 소설이 분출하는 강렬한 반미 (反美) 의식 때문이었지만, 실상 이 우화적 판타지가 숱한 반공선전극의 양극화된 이분법과 진 부한 멜로드라마적 플롯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분지 사건’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 의 우화이기도 하다. 특히 작가에게 유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결문이 “이 작품은 민족주체성을 확립하려는 작가의 진지한 열망의 표현”14)이라고 선언하는 장면에 이르면, 소설 「분지」를 둘 러싸고 벌어진 1960년대 반공 국가 권력과 민족 담론 및 문학장(場) 안에서의 이념적 착종과 자기분열은 결코 간단치 않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분지」의 내용이 아니라 「분지」를 읽는 독법을 분석함으로써 60년대 한국 지

13) 「분지」의 텍스트는 『남정현 대표소설선집』, 실천문학, 2004, 187-218쪽을 사용한다. (작품을 따로 인 용할 때에만 페이지를 표기한다. 이하 다른 작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14) 「필화, 분지 사건 자료 모음」, 『분지』, 한겨레, 1987,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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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도를 재구성한 김건우의 글은 그러한 착종 상태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실마리를 제공한다.15) 이 메타비평적 방법을 통해 그는 소설 「분지」를 “반공 국가 권 력에 대항하는 논리 구도가 어떻게 펼쳐지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와 같은 텍스트”로 규정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분지」를 해석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1960년대 중반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첫째, 안수길, 이어령 등 법정에서 남정현을 옹호했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박한 민족주의”, 둘째, 백낙청 및 『청맥』, 『한양』지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공명하는 ‘신민족주의’, 그리고 셋째, 이들과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분지」 사 건을 바라보았던, 김수영 같은 시인으로 대표되는 ‘비판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대별된다.

김건우가 이 글에서 가장 공들여 논증하는 것은 두 번째 이데올로기, 즉 “1960년대에 접어 들면서 세계적인 탈식민주의 운동으로 본격화되고 있었던 제3세계 신민족주의”의 입장이다. 소설 「분지」는 이 두 번째 이데올로기의 담지자인 『청맥』 및 『한양』의 필진들에 의해 “반제 (반미) 민족주의”의 전범으로 수용되었는데, “당대 진보 민족주의 진영이 남정현 소설에 주목하 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태극기를 아메리카 대륙 여인들의 배꼽에 꽂겠다고 다짐하는 결말은 가장 날것 그대로의 ‘미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으로서 “당 시 미국을 신식민주의로 보았던 반제민족주의 담론의 배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건우의 분석은 「분지」의 내용을 현실재현적 층위에서만 논하는 기존의 상투적 비평담론으 로부터 시야를 당대의 정치사상사적 맥락으로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이런 분류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도식화는 그렇다치더라도, ‘소박한 민족주의/진보적 민족주의/반제 민족주의/신민족주의/비판적 자유주의’ 등등의 단호한 (그러나 실은 매우 모호한) 구분을 바탕으 로, 이 소설이 “반제민족주의 담론의 배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결론짓는 것은 일방적으

로 에 될

15)

16)

독법의 획일화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떤 작품이 특정 담론 의해 전유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그러므로 그 작품의 의미는 그 담론의 배경에서‘만’ 이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16) 그는 「분지」를 가리켜 “반공 국가

김건우, 「분지」를 읽는 몇 가지 독법 ―남정현의 소설 「분지」와 1960년대 중반의 이데올로기들에 대 하여, 『상허학보』, 31집, 2011.

김건우는 『청맥』, 『한양』의 필진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진보적 민족 담론’이 “1955년 반둥회의로 시 작하여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적인 탈식민주의 운동으로 본격화되고 있었던 제3세계 신민족주의 사조에 연결”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결론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을 다소 일반화한 것으로 보이 는데, 「분지」가 “반제민족주의 담론의 배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단호한 주장도 거기에서 기인한 듯하다. 반둥회의로부터 시작된 비동맹운동 자체는 이 글의 논점이 아니다. 다만 칸트의 ‘영구평화론’ 에 기반한 도덕적 이상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에이메 세제르, 프란츠 파농 등의 탈식민주의 이론을 동 력으로 하는 비동맹주의의 정치적 이상―비록 실패로 끝났지만―과 「분지」의 서사가 정면으로 어긋난 다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미소 냉전의 세계질서에 도전하는 비동맹주의의 정치적 이상을 기 준으로 1960년대의 한국문학을 읽는다면, 거기에 가장 가까이 간 작가는 최인훈과 (남정현의 형사 기 소를 안타까워하면서 그러나 「분지」의 이데올로기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김수영이라고 나는 생각한 다. 알다시피, 그들 모두 가장 비(非)-민족주의적, 혹은 반(反)-반공주의적인 작가들이었다. (비동맹운 동에 대한 한국 문학계의 반응을 “탈식민주의 레토릭과 반공주의의 위태로운 공동스텝”으로 묘사하는 장세진의 저술은 이 문제에 관한 폭넓고도 섬세한 지도를 제공한다. 장세진, 『슬픈 아시아』, 푸른역사, 2012. 특히 제4장 「중립은 없다」, 참조. 한편 반둥체제 이후 냉전 종식까지 탈식민주의와 비동맹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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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대한 대항 논리가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했지만, ‘외세 배격’과 ‘민족자주’의 관점에서 「분지」를 극찬하는 ‘반제민족주의 담론’과 이 작품을 “민족주체성을 확 립하려는 작가의 열망의 표현”으로 읽는 ‘반공 국가 권력’은 정말 서로 대립했던 것일까? 오 히려 ‘반공 국가 권력과 그에 대한 대항 논리가 서로 긴밀히 협력하고 담합했음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이 소설을 읽을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이제 그것을 살펴보자.

이진경은 「분지」를 읽을 때 느끼는 딜레마는 “한편으로 미제국주의와 한반도 군사주의를 격 렬하게 비판하는 정치적 알레고리의 성공과, 다른 한편으로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똑같이 잔인한 알레고리화―한국인과 미국 백인 여성 모두에 대해 가해진 상징적 폭력―, 그 양자 사 이의 극단적인 갈등과 모순”에 있다고 지적한다.17) 그녀는 김건우가 “날것 그대로의 미제국주 의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으로 읽었던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어떤 정교한 플롯이나 심리묘 사, 역사적 디테일의 제시도 없는 문학적 의장(意匠)이 제거된 날것의 소설”18)이 지닌 “잔인한 알레고리화”로 읽는다.

미군의 원자폭탄 공격 앞에 선 주인공 홍만수가 “저의 육체는 먼지가 되어 바람 속에 흩날 릴 테지요. 하지만 겁나지 않는다”면서 장렬한 죽음을 예비하는 장면에서, 이진경은 태평양 전 쟁 말기 미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 것을 “보석처럼 흩어지는 아름답고 성스러운 죽음”(=옥 쇄)이라는 식으로 세뇌당했던 제국 신민(臣民)의 모습을 본다.19)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면서 동 시에, 어머니를 강간하고 누이동생을 학대하는 미군에 대한 “복수”로 미국 여성을 강간하는 주인공의 “날것 그대로의 적개심”에서 전시기 일본 제국 프로파갠더의 목소리(“귀축미영”)를 듣 는다. (남정현은 일제 식민지기 국민학교를 졸업한 세대에 속한다).

「분지」의 서사에서 식민지 말기 초국가주의의 반복을 읽는 것은 이진경만이 아니다. 랑시에 르의 ‘감성의 분할’ 및 푸코와 아감벤의 ‘생체권력’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근현대문학과 영화 의 내부에 작동하는 시각적 정치학을 분석한 테오도르 휴즈(T. Hughes)에 따르면, 남정현 소설 은 박정희 정권의 진화론적 개발주의에 끼여 뒤틀리고 무력화한 남성 신체들을 보여줌으로써 “근대화에 부합하는 건강한 민족 신체”를 요구하는 국가주의적 담론에 저항을 시도한다.20) 그 러나 동시에 그의 소설은 (국가와 분리된/국가에 대항하는) ‘민족 신체’에 대한 집요한 알레고리 화와 (거세된 남성의) 남성중심적 주체 회복에의 열망을 통해 실제로는 그가 반대하는 국가주의 적 개발기획의 충실한 동반자가 된다. 미군 상사의 부인을 강간하는 「분지」 결말의 판타지는,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남자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화하는지를

 17)

18) 19) 20)

의 상호 중첩 및 일종의 상상공동체로서의 제3세계론의 형성에 관한 정교한 국제정치적 분석은 김태 균·이일청, 「반둥 이후: 제3세계론의 쇠퇴와 남남협력의 정치세력화」, 『국제정치논총』, 58(3), 국제정치 학회, 2018, 49~99. 참조).

Lee,Jin-kyung, Service economies: militarism, sex work, and migrant labor in South Korea,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0. (나병철 역, 『서비스 이코노미―한국의 군사주의·성 노동·이주노동』, 소명, 2015, 245쪽. 한국어 번역판을 사용한다. 번역문은 필자가 일부 수정. 이하도 모두 같다).

위의 책, 같은 곳.

위의 책, 248쪽.

Theodore Hughes, Literature and film in Cold War South Korea: freedom's frontier,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나병철 역,『냉전 시대 한국의 문학과 영화: 자유의 경계』소명, 2013,.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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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준다. 즉, “미국과 남한 정부에 대항하는 이 소설의 남성주의적 태도, 바로 그것이 ‘민족 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냉전기 ‘개발’을 강화하는 버팀목으로서의 폭력을 수행”한다는 것이

다.21)

위의 두 논자들이 공통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분지」의 표면에 드러난 이른바 “진보적 민 족주의”의 저변에 깔린 ‘남성주의/국가주의/식민주의/인종주의’이다. 당연히 그것은 남정현만의 혹은 「분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1945년 이전의 모방이며 반복이다.22) 해방 이후의 분 단과 전쟁, 그리고 이어진 전후 냉전의 신식민지적 현실은 한국어와 한국문학 속에서 흔히 ‘찢기고 갈라진 민족의 몸’으로 비유되었다.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이 비유와 더불어 본래의 통합된 몸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에 기반한 새로운 “민족 이야기”가 출현하는 것 역시 자연 스런 일이었고 그것은 분단 시대 남북한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23)

주목해야 할 것은 끝없이 고통받고 침탈당하는 민족 이야기, 즉 ‘민족 수난사’의 전형적인 플롯이 자주 ‘여성 수난사’, 즉 ‘찢기고 갈라진 여성 신체의 이야기’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훼 손된 여성’은 ‘훼손된 민족’을 상징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24) 요컨대, 여성의 신체는 민족 수 난의 증거 보관소이며, “민족(남성)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공간”이 된다. 이때의 여성은 말 그대 로 남성의 “영토”다. 「분지」가 보여주는 것은 ‘영토’를 빼앗긴, 즉 거세된 남성의 왜곡된 보상 심리와 억압된 복수심이 낳은 착란의 기록이다.25)

이진경이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잔인한 알레고리화”로 지칭했던 「분지」의 강간 모티브는 그 묘사의 그로테스크함에서도 유례가 없다. 미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실성 상태로 집에 돌아 온 주인공의 어머니는 옷을 벗어 던진 채 알몸으로 “가랑이 사이의 그것을 마구 쥐어뜯으시더 니, 고만 벽이 흔들리게 고함을” 지른다.

 21) 22) 23) 24)

25)

“아이고, 이 천하에 때려죽일 놈들앗, 내가 뭐 너희들을 위해서 밑구멍을 지킨 줄 아냐! [...]

위의 책, 270쪽.

위의 책, 262쪽.

신형기, 앞의 책, 참조.

예컨대, 일본군 종군 위안부를 “만족의 딸”, “참된 민족사의 주인공”으로 호명하던 초기 위안부 운동 의 인식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종군 위안부 여성은 왜 ‘또다시’ 민족 혹은 국가의 이름 으로 소환되어야 하는가? 30여 년에 걸친 위안부 (연구가 아닌) 대중 운동의 역사 속에서 이 질문은 위안부 여성을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전유하는 단성적(單聲的) 담론에 의해 줄곧 억압되었다. 오 늘날 위안부 운동이 처한 딜레마의 근원은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국주의자에게 식민지는 흔히 ‘여성’으로 표상된다. 다시 말해, 식민지 획득은 강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정복으로 은유된다. 동시에 피식민자 남성에게도 그것은 자신의 여자 즉, 아내나 딸, 누이 등을 빼앗긴 것으로 감각된다. 그는 더 이상 ‘남성’일 수 없고 ‘아비’일 수 없고 ‘오 빠’일 수 없다. 피식민자 남성에게 주어지는 이 ‘거세’의 감각이야말로 식민주의의 모방의 결과이며 계속해서 그를 식민주의의 모방자로 만드는 심리적 동력이다. 피식민자 남성이 ‘정복자의 여자’를 ‘정 복’하고 싶은 욕망을 품을 때 그는 비로소 식민주의를 충실하게 학습한 영원한 노예가 된다. 외부로 부터의 침략을 여성 신체에 대한 훼손으로 표상하고, 그렇게 훼손된 여성을 처단하거나 축출하는 방 식으로 상처의 회복을 기도하는 난폭한 가부장적 민족주의 역시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복 서사를 내면 화한 결과이다. (상세한 서술은 김철, 「민족-멜로드라마의 악역들-『토지』의 일본(인)」, 『우리를 지키 는 더러운 것들』, 뿌리와 이파리, 20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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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남편만 불쌍하지. 아 글쎄, 나도 사위스러워서 제대로 만져보지 않은 밑구멍을, 아 어떤 놈이 맘대로 찔러! 이 더러운 놈들앗, 아이고, 더럽다, 더러웟.” (203쪽)

이 소설가의 인식 속에서 강간당한 여자의 고통은 남편의 ‘소유물’인 “밑구멍”을 남한테 “찔 렸다”는 데에 있다. 이것보다 더 분명하게 남성(남근)중심적 민족 담론의 정체를 보여주는 것 은 없다. 실성한 어머니는 주인공의 머리를 낚아채어 자기의 “음부”에 갖다 댄다

“자, 보란 말이다. 이놈의 새끼야. 아, 내 밑구멍을 좀 똑똑히 보란 말이야. 아이고 분해, 이놈 의 새끼야. 좀 얼마나 더러워졌나를 눈을 비비고 좀 자세히 보란 말이엿.” (203쪽)

이 장면에서 그는 부재하는 아버지(구식민지 지배하에서 거세된 민족 주체)와 ‘몸을 더럽힌’ 어 머니의 트라우마를 이어받은 “신식민지적 주체로 재탄생한다.”26) 이 트라우마와 함께 어머니 의 “커다랗게 확대된 음부”에서 “황홀함”을 느끼는 주인공은 ‘더럽혀진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움켜쥐고 그녀의 신체를 재영토화하려 시도하는”27) 남성주의적 민족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발광하여 숨을 거두는 어머니는 ‘더럽혀진 여자’를 규율하고 처단하는 오래된 가부장제의 폭 력을 연상시킨다 (앞의 각주 25).

이제 그의 “복수”를 살펴볼 차례다. 여성 강간을 ‘남편의 소유물인 여성의 성기가 다른 남자 에게 탈취당한 것’으로 인식하는 작가가 어떤 방식의 ‘복수’를 상상할 것인지 추측하기는 어렵 지 않다. 그는 강간자의 여자의 성기를 탈취한다. 미군 스피드 상사가 주인공의 누이동생 ‘분 이’를 학대하는 이유는 그녀의 “하반신”이 “본국에 있는 제 마누라의 것”보다 못하다는 것 때 문이다. “심지어는 국부의 면적이 좁으니 넓으니 하며” 그녀를 구타하는 날도 있다. 어머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누이동생 역시 ‘성기’를 침탈당하고 있다. 향미산 안내의 구실로 스피 드 부인을 꼬여낸 주인공은 “여사의 하반신 때문에 밤마다 곤욕을 당하는 분이의 딱한 형편을 밝히고” “여사의 지닌 국부의 비밀스러운 구조를 확인”하겠노라고 말하며 그녀를 강간한다.

남정현 소설에서 신식민지적 상황의 알레고리화는 주로 여성의 성기, 둔부, 유방 등의 묘사 로 집중된다.28) 그리고 이는, 위에서 보았듯, 누가 그것을 ‘소유’했는가의 문제로 직결된다. 즉, 그의 소설에는 “민족적 신체 자체의 존재에 관한 논쟁이 없으며 그 신체를 소유할 주체의 위 치와 진정성에 관한 논의만 있다. 그것은 소유권의 문제다. 이 소유적인 민족주의의 방식은 남정현의 반국가주의가 자신이 반대하는 국가주의와 겹쳐지는 곳을 드러내는 지점이다.”29)

 26) 27) 28)

29)

이진경, 앞의 책, 246쪽.

위의 책, 같은 곳.

소설 내적 필연성을 전혀 지니지 않은 여성 성기의 길고도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자주 반복되는 것은 남정현 개인의 특성이며 동시에 그의 작가적 기본능력의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분지」와 함께 그 의 대표작으로 말해지는 「부주전상서」(1964) 역시 극도의 폭력적인 여성 혐오와 남근중심주의를 드러 낸다.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사회현상에 대한 개탄과 분노를 중심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피임기구를 설치한 아내의 성기 속에 손을 넣어 그것을 끄집어내는 역겨운 장면이 길고 잔인하게 묘 사된다. 여성 혐오에 관한 한 남정현의 소설은 첫손에 꼽을 만하다.

테오도르 휴즈, 앞의 책, 261쪽. 손창섭 소설에 관한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지적도 기억해 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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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소유적 민족주의가 어떻게 제국주의의 폭력을 모방하고 반복하는지를 살펴보자. 주 인공은 “분이가 지시하는 대로” “향기를 자아내는 우유와 버터와 초콜릿과 껌 등의” “세칭 그 소위 양키 물건 장사에 종사”하고 있다. 분이뿐 아니라 “옥이도 순이도” “이방인들의 호적에 파고 들어갈 기회를 찾지 못하여” 안달이고, “대학을 둘씩이나 나왔다는 어떤 친구도 양키를 매부로 삼은” 주인공을 “볼 때마다 사뭇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미국으로 통하는 길을 좀 열어 달라고 호소하는 형편”이다. 이런 “어이없는” 현실에 대해 주인공은 “무엇인가 통쾌한 그러면 서도 형언할 수 없는 울분”을 느끼며, 무능하고 부패한 국회와 정부를 성토하는 열변을 토한 다. 비굴한 동족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통쾌함’과 ‘울분’.

따라서, 여동생에 대한 복수로 스피드 부인을 강간하는 주인공이 한껏 자기도취에 들떠 다 음과 같이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울분’이 실은 ‘통쾌함’을 얻기 위한 것임을, 복수란 ‘이방인 의 호적에 들어갈 기회를’, ‘미국으로 통하는 길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동족의 무리 가운데 자신이 가장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한 것임을, 더 나아가, “부드러운 피부며 아기 자기한 둔부의 곡선, 그리하여 보기만 해도 절로 황홀한 쾌감을 자아내는 분이의 아름다운 육 체”를 찬탄하는 그의 근친상간적 욕망이 실은 식민 지배자인 백인 여성의 육체에 대한 선망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백인 여성을 강간하고 난 뒤의 황홀한 느낌을 이렇게 토로한다.

버터와 잼과 초콜릿 등이 풍기는 그 갖가지 방향(芳香)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여사의 유방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의식이 흐려지도록 취해 있었거든요.

“원더풀!”

얼마 만에야 무슨 위대한 결론이라도 내리듯 이마의 땀을 씻으며 겨우 한마디 하고 여사의 몸 에서내려온저는세상이온통제것같아서견딜수가없더군요. (215쪽)

남정현 소설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민족-신체’의 은유가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의 표현이 며 그것은 빈번히 성적 환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30) 스피드 상사가 분이 를 학대하는 장면에 주목하자.

국부의 면적이 좁으니 넓으니 하며 가증스럽게도 분일 마구 구타하는 [...] 스피드 상사의 그 스피디한 발길질을 견디며 간간 ‘아야, 아야’하고 울기만 하는 분이의 그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저는 [...] 병신처럼 울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의문에 싸이어 안절 부절 못했었지요. 그것은 스피드 상사가 항시 본국에 있다고 자랑하는 미세스 스피드의 하반신

“남한/미국의 관계를 민족적 강간(신체의 알레고리적 민족화)으로 서사화하는 것은 남한 문화계의 경 계 내부에 안전하게 안착하며 국내적인 “내부적” 긴장을 해소시킨다. 나아가, 그런 알레고리화는 어떤 개별 주체를 한꺼번에 반공주의자이며 국가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적인 존재로 불러냄으로써, 공 동체적 삶의 대안적 가능성을 삭제해 버리는 사고방식을 낳는다. 이후 기지촌 문학에서 수십 년 동안 그 같은 레토릭이 반복되어 온 것은 사실상 그에 대한 국가의 승인을 나타낸다.” 203쪽.

30) ‘민족-신체’의 알레고리화를 통해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드러내는 또 다른 사례로는 천승세의 소설 「황구의 비명」(1974)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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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여인의 육체는, 아니 밑구멍의 구조며 그 형태는 어 떨까, 좁을까 넓을까, 그리고 그 빛깔이며 위치는, 좌우간 한번 속 시원하게 떠들어보고 의문을 풀어야만 미치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212-213쪽)

주인공은 옆방에서 들리는 스피드 상사의 “발길질”과 누이의 “아야, 아야” 하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폭행의 소리라기보다는 다분히 남녀간 성행위 중의 소리를 연상시킨다). 바로 다음 문 장에서 주인공은 “미세스 스피드의 하반신”에 대한 상상을 펼친다. 누이동생이 폭행당하는 소 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는 동시에 가해자의 여자에 대한 성적 환상에 빠지는 이 주인공은, 동족 의 여자들을 겁탈하는 침입자의 막강한 힘, 특히 그들의 거대한 ‘성기’에 대한 상상 및 공포와 함께 그 힘에 대한 무한한 선망과 환상을 품는 피식민자의 전형이다.31) 말할 것도 없이 이것 은 흑인의 무시무시한 정력과 엄청난 성기를 상상하며 공포와 선망을 느끼는 백인 식민자들의 인종주의를 거울에 비추듯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32) 백인 여성을 강간하고 희열에 떠는, “홍 길동의 피”가 몸속에 흐르는 “단군의 후손” 홍만수야말로 사실상 서구 제국주의의 충실한 학 도였던 것이다.

소원대로 백인 여성의 ‘성기’를 탈취함으로써 거세된 주인공의 남성성은 회복되는 듯하다.

31) 그전형적인사례를일본에서발견할수있다.패전과함께미군이일본에진주하자일본사회는공 포에 휩싸였다. “적”(미군)이 상륙하자마자 일본 처녀들을 강간하고 폭행할 것이라는 루머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도시에서는 딸들을 시골로 피신시키거나 여자들은 통바지 같은 ‘몸뻬’를 입도록 경고받았 다. 전쟁 중 자신들의 부대가 한 행위를 잘 알고 있는 귀환 장병들로부터 루머는 들불처럼 번져나갔 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적”도 역시 ‘성적 만족’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천황의 항복 방송으로부 터 불과 3일 후인 8월 18일, 내무성은 미점령군을 위한 “위안소”의 설치를 서둘렀다. 8월 28일, “서양 야만인들”로부터 “양가집 처녀들”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1,360멍의 직업적 매춘여성 및 일반여성 들을 모집하여 구성한 「특수위안부시설협회」가 황거(皇居) 광장에서 발족식을 열고 “우리는 [...] 거친 파도를 막는 방파제를 쌓아 민족의 순결을 지킨다”는 ‘선서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정부의 예상과는 달리, 여성들은 이 ‘위안부협회’의 모집에 응하기를 꺼렸다. 그 이유는 “미국인은 성기가 거대하기 때 문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John Dower, 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W.W. Norton & Company, Inc. 1999, pp. 124-127.

32) “흑인과 관련된 것은 모두 생식기 층위에서 발생한다. 흑인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이 지닌 엄청난 성적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나 교접하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자식들을 낳는다. 강 간이라면 누구나 검둥이를 떠올린다. 검둥이의 정력은 환상적이다. 공포와 매혹, 이 둘이 흑인을 둘러 싼 백인의 감정이다. 백인 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환상을 실현해 줄 대상으로 흑인을 떠올린다. 딸과 검둥이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는 그 검둥이가, 자신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신비스런 성의 세계로 자기 딸을 인도할 것이라는 (근친상간적)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야말로 프로스페로(Prospero) 콤플렉 스, 즉 무인도의 괴물(칼리반)이 자기 딸을 강간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떠는 백인 식민자(프로스페로) 의 가슴속 깊이 간직된 인종주의 그 자체다. 동시에 그는 원시화된 검둥이를 보면서 문명의 구속을 벗어던진, ‘생명본능’이 분출되는 세계를 동경한다.” Frantz Fanon, Peau Noire, Masques Blancs, Paris, 1952. (나는 다음 여섯 권의 번역서에 의지했다. ⓵ Charles L. Markmann, tr. Black skin, white masks, Grove Press, 1967 ⓶ Richard Philcox, tr. Grove Press, 2008 ⓷ 김남주 역,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者들』, 靑史, 1977 ⓸⓹ 이석호 역,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아프리카, 2014 ⓺ 노서경 역,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문학동네, 2014. 이 번역서들은 그 문체와 뉘앙스에서 저마다 상당한 편 차를 보인다. 인용은 이 번역서들을 비교 대조하면서 적절히 다듬었다. 이하도 마찬가지다. 페이지의 표기는 편의상 ⓵을 따른다. 위의 인용은 ⓵의 pp. 157-166의 이곳저곳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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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정상을 정복한 등산가의 감격에 겨운 절규라도 되는 양, “태극의 무늬로 아롱 진 이 러닝셔츠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새 깃발을 만들 것”이며, “이 황홀한 깃발을” “그 위 대한 대륙에 누워있는 우윳빛 피부의 그 윤이 자르르 흐르는 여인들의 배꼽 위에” “꽂아놓을 결심”이라고 외쳐대는 이 유아적(幼兒的) 쇼비니스트의 터무니없이 비장한 멜로드라마적 포즈 에서 피식민자 한국 남성의 오랜 서구 및 제국 콤플렉스는 그 비루한 얼굴을 드러낸다.

서양 여자와 동침하는 것을 “양년의 배꼽 위에 태극기를 꽂는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역겹 고도 상스러운 한국어의 관용구는 (내 기억으로는) 적어도 1970년대 말까지 한국인 남성들의 일 상적인 담화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남정현의 소설은 그런 점에서 당대 한국 남성의 콤플렉스 및 쇼 비니즘의 일단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이 짧은 어구 속에 축약된 신식민지 체제하 한국 남 성의 뒤틀린 정신적 도착은, 앞서 말했듯, 「분지」만의 문제도 60년대만의 문제도 아니다.33)

“우윳빛 윤이 자르르 흐르는 여인들의 배꼽 위에” “태극기를 꽂아 놓겠다”는 「분지」 주인공 의 절규는, 자나깨나 백인 여성과 동침할 생각에만 사로잡혀 프랑스 땅에 도착하자마자 허겁 지겁 사창가로 달려가 “식욕을 채우고 나서야” 파리행 기차에 올라타는 숱한 흑인들의34) 아시 아적 버전이다. 이른바 ‘반제민족주의’의 문학적 표현은 이런 방식으로 세계와 접속하고 있었 다. 주인공은 스피드 부인의 “밑구멍의 구조며 그 형태는 어떨까, 좁을까 넓을까, 그리고 그 빛깔이며 위치는, 좌우간 한번 속 시원하게 떠들어보고 의문을 풀어야만 미치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단순히 이국 여성에 대한 호기심 섞인 성적 도착으로만 읽어서 는 안 된다. 이 편집증이야말로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의 핵심적인 기제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이래 서구 제국의 과학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기준으로 인종을 분류하고 인종들 사이의 우열을 판별하는 인종학(=인류학/체질인류학)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체질인류학’ 안에서 인간의 몸은 낱낱의 요소로 분해되어 식물이나 광물의 표본처럼 실험과 관찰의 재료가 되었 다. 해부학과 인류학은 인간 신체의 피부 조각, 장기(臟器), 도려진 채 포르말린 액 속에 담긴 여성 성기, 두개골, 음모(陰毛), 머리털, 뇌 등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정교하게 측정하고 분류하 기 위한 온갖 도구와 이론을 개발했다. 결과는 방대한 통계와 자료로 축적되어 특정한 인간 집단의 정신적·육체적 우열을 판별하는 과학적 근거로 제시되었다. 서구 및 일본 제국의 의학 과 인류학은 이 학지(學知)의 완성을 위해 편집증적 열정을 쏟아부었다.35)

2차대전 이후 체질인류학은 학계에서 퇴출당했지만, 인종차별의 근거를 신체적 특징에서 찾 는 사이비 과학의 광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신체적 징표를 사회문화적 특징으로 대체하는 문화본질 주의로부터 ‘한국인의 DNA’ 따위를 찾겠다고 애쓰는 유전공학까지). 백인 여성의 “밑구멍의 구조며

33) ‘배꼽 위에 태극기를 꽂는다’는 따위의 관용구는 사라졌지만, 제국 여성의 강간이나 살해 같은 상상 적 폭력을 통해 열등감과 선망을 해소하고자 하는 인종적 민족주의의 병리적 증상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예컨대,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 남성은 “미국에 테러를” 하고 (연쇄살인범) “유영 철을 풀어가지고 부시, 럼즈펠드”를 살해하고, (여성 국무장관) “라이스는 아예 강간해서 죽이는 거예 요”라는 발언으로 큰 물의를 빚었다. 홍만수는 살아있다!

34) Fanon, op. cit., pp. 69/72.

35) 이 주제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김철, 「비천한 육체들은 어떻게 응수하는가 -산란(散亂)하는 제국의

인종학」, 앞의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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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빛깔, 위치”를 “한번 속시원하게 떠들어보아야만” “미치지 않을 것 같다”는 「분지」의 주 인공은, 이미 식민 지배자가 던져놓은 담론과 과학의 프레임에 갇혀버린 미친 인간이다. 모든 광인이 그렇듯, 그는 자신의 광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자신이 이미 미친 줄도 모르면서 미칠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이 광기야말로 식민 지배자에 대한 증오와 선망이 뒤엉킨 피식민자의 찢긴 내면의 표현이 다. 그것은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흑인과 백인을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흑인” 모두를 “가련하 게” 여긴 의사 파농이 전력을 다해 치료하고자 했던 신경증의 전형적인 사례다. 요컨대, 소설 「분지」는 피식민자의 신경증에 관한 하나의 임상 기록인 것이다.

소설 「분지」에 열광했던 자들과 작가를 법정에 세웠던 자들 모두가 앓고 있었던 이 신경증 은 21세기의 시점에서도 완화되지 않은 듯하다.36) 피식민자로서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하면 서 탈식민주의적 이론과 실천의 씨앗을 심었던 파농의 다음과 같은 빛나는 문장도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진실로 의식이 초월의 과정이라면 이 초월성은 사랑과 이해의 문제에 전념하는 것임도 알아야 한다 [...] 검둥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혐오하는 사람이나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반대로 백인 이 되고 싶어하는 흑인이나 백인을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흑인 모두 가련하다. [...] 진실은 사람 얼굴에 냅다 팽개치듯 하지 않고도 말해질 수 있다. 열광을 불러일으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열광을 믿지 않는다. 열광은 어디선가 늘 불타올랐고, 그때마다 그것은 전쟁과 기아와 빈 곤을 초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멸시를.... 열광은 무능한 자들의 탁월한 무기다.37)

4. 「똥바다」: 그로테스크 민족―위생학 4.1. 「똥바다」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똥으로 뒤덮인 한반도’의 이미지로 민족-신체를 형상화하면서 그 신체를 유린하고 오염시 킨 근원으로서의 적(=미국)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적개심과 증오를 거침없이 드러낸「분지」 이후 10년, 동일한 정치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으나 묘사의 기법이나 수사학에서 「분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문제적 작품인 김지하의 담시(譚詩) 「분씨물어(糞氏物語)」가 출현한다. (그것을 ‘출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뿐만 아니라 그 출판에 얽힌 다소 복잡한 사정 때문이 기도 하다).38)

 36)

37)

김건우는 “「분지」를 가장 ‘정확하게’ 읽은 쪽은 역설적으로 말해 반공 국가 권력의 장치였던 검찰과 그리고 ‘북’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기대어, 「분지」에 열광하는 『청맥』 및 『한양』지의 ‘반제 민족주의자’들, 「분지」를 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에 전재(轉載)함으로써 작가를 구속-기소할 빌미를 제공한 북한 국가 권력, 그에 따라 작가를 기소한 남한 검찰, 그리고 “이 작품은 민족주체성을 확립 하려는 열망의 표현”이라고 선언하는 동시에 작가에게 유죄를 선고한 남한 법원 모두가, “역설적으로 말해”, 「분지」를 가운데 놓고 서로 은밀하게 손을 잡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라캉(J. Lacan)을 따 라 말하면, 그들 모두 동일한 환상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Fanon, op. cit., pp.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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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의 ‘똥’이 일종의 표지임에 비해 「똥바다」의 ‘똥’은 글자 그대로의 ‘똥’이다. 한반도 남반부는 똥으로 뒤덮였고 모든 한국인은 똥 속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똥은 공중에서 쏟아지 고 사방에 흘러넘치고 대명천지 거리를 활보한다. 기나긴 세월 똥을 참고 배설의 쾌감을 억눌 러온 주인공 분삼촌대(糞三寸待)가 마침내 이순신 동상의 머리를 밟고 서서 똥을 내갈기는 결 말부의 다음 장면을 보자.

똥이로다! 똥, 또똥똥똥똥!/ 뿌지직! ―/ 뿌지지지직! ―/ 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직직직지지지지 직 ―/ 홍똥, 청똥, 검은똥, 흰똥/ 단똥, 쓴똥, 신똥, 떫은 똥, 짠똥, 싱거운 똥/ 다된똥, 덜된똥, 반된똥, 반의반된똥, 너무 된똥, 너무 안된똥, 물똥, 술똥, 묽은 똥, 성긴똥, 구린똥/ 고린 똥, 설 사 똥, 변비똥, 피똥, 똥 같지 않은 똥, 똥 같지 않지만 똥임이 분명한 똥/ 지렁이 섞인 똥, 회 충 촌충 십이지장충 섞인 똥, 똑똑 끊어지는 똥, 줄줄 이어지는 똥, 꼬불꼬불 말리는 똥, 확확 퍼져나가는 똥 (137쪽)

냄새나고 불결한 똥의 이미지는 갖가지 형태의 똥을 나열하는 판소리 자진모리 가락의 흥겨 움을 타고 익살과 재치 가득한 웃음의 소재로 변형된다. 흥겨움이 차츰 가라앉으면서 서사의 어조는 점차 현실을 환기시키는 심각한 분위기로 바뀐다. “三島由紀夫 대가리 같이 똥글똥글 하게 생긴 똥/ 三菱 마아크처럼 세 갈래 난 똥/ 게다짝 같이 두 다리 달린 똥” 등, 세 페이지 에 걸친 온갖 똥의 형상은 청자/독자의 눈앞에 일제 말기의 처참한 현실을, 그리고 그것이 재 현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펼쳐 보인다.

여기저기서 와크르르르/ 똥이야!/ 이 거리 저 거리에서 우르르르르/ 똥이야! 똥 봐라 저 똥 봐 라!/ [...] / 이 똥 저 똥 왼갖 똥 모든 똥더미 속에서 짜악짝/ 東拓보다 몇百倍 强의/ 東拓이 입을 벌리고 공출보다 더한 공출이/ 마지막 풀뿌리마저 긁어가고 송장까지도 鬼神까지도 모조

38) 「김지하 연보」(『김지하 전집』, 실천문학사, 2002)에 따르면, 「분씨물어(糞氏物語)」는 1973년 9월에 쓰 여졌다. 김지하는 1974년 4월 25일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이듬해 2월 15일 형집행정 지로 출옥했다가 3월에 재수감된다. (솔 출판사가 1993년에 간행한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 3』의 ‘편집 자 일러두기’는 “김지하가 감옥 속에서 벽지를 찢어 그 뒷면에 「분씨물어」를 창작”하고 “어느 교도관 에 의해 밖으로 전달되어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되었다”라고 서술하는데, 이것은 전혀 개연성이 없는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출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일본 이와나미서점(岩波 書店)이 발행하는 월간지『世界』1974년 10월호에 일본어 번역(塚本勳 역)을 통해 처음으로 활자화된 다. 한국어로 처음 출판된 것 역시 도쿄에 주소를 둔 한양사(漢陽社)가 1975년 12월 25일에 「金芝河 全集刊行委員會」의 이름으로 펴낸 『金芝河全集』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 내에서 합법적으 로 유통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이 작품의 공식 출판은, 현재까지 내가 확인한 바로는, 1984년 동광출 판사가 펴낸 김지하 시집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에 「糞氏物語」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것이 처음 이다. (이 책의 편집자 주석에서 「분씨물어(糞氏物語)」가 “日本『世界』誌 1974년 8월호에 연재”되었 다고 밝힌 것은 오류다. 8월호에는 김지하의 이름으로 「民の叫び(민중의 소리)」라는 4·4조 민요풍의 시가 실렸는데, 이 시의 작자는 김지하가 아니라 당시 학생운동권의 리더였던 장기표로 밝혀졌다). 이 듬해인 1985년에 「糞氏物語」는 「똥바다」라는 제목으로 임진택에 의해 판소리로 공연되었고 이후 대 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글에서도 「똥바다」로 표기하고 텍스트는 동광출판사에서 1991년 출간한 『말뚝이 이빨은 팔만사천개』, 112~152쪽에 실린 것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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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징용가고/ [...] / 한국말은 개들의 軍號로 되고, 모든 공장은 毒을 뿜고 [...] 모든 조선놈은 노예로 끌려다니고 모든 조선년은 매춘부로 떨어져가고/ 대포 주둥이가 똥에서 기어나오고/ 탱 크가 똥에서 굴러 나오고/ 총알, 확성기, 깃발, 기관총, 비행기, [...] 폭탄, 유도탄, 원자 수소 네 이팜탄들이 모조리 똥에서 불쑥불쑥 기어 나오고/ 나와 불을 뿜고 소리지르고 구르고 나르고 악쓰고 무너뜨리고 불지르고 연기를 날리고 산이 무너지고 집이 무너지고 (138-140쪽)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고 마침내 창자(唱者)의 비통한 탄식을 동반한 긴 진양조의 엘 레지(elegy)가 흐른다.

어디에 있나/ 우리의 고향/ 아아 어디에 있나/ 우리들의 육신은 어디에 있나/ 하늘은 회색비/ 비 뿐이네/ 비뿐이네/ 겨울비뿐이네/ 울며 천년을 헤매어도/ 찾을 길 없네/ 반도여/ 아아 반도여/ 사랑하는 우리 조국아 (140-141쪽)

이 느린 가락의 비가(悲歌)는 일찍이 한국문학에서 보지 못한 다음과 같은 미증유의 묵시록 적 묘사로 이어진다.

피가/ 고름이/ 유령들이/ 악몽과 부러진 칼날들이, 온갖 藥品들이, 신음소리들이/ 性病이, 정신 병이, 빈 벌판, 어두운 골목에서 아우성치고, 남녀노소 모두 벌거벗고 어두운 굴속을 사슬소리 울리며 기어다니고/ 회초리에 채찍에 구둣발에 개머리판에 전기의자에/ 화학약품에 의해 찢기 고 짤리고 걷어차이고 해부되어 토막난 고깃덩이로 굴러다니고/ [...] / 똥으로부터, 저 똥더미, 똥바다로부터/ 怪物이/ 털과 시뻘건 살덩이와 비닐과 프라스틱과 [...] 원자병과 아편중독이 더 덕더덕 달라붙은 인간도 곤충도 아닌 巨大한 怪物이 똥으로부터 태어나고 기어나오고, 뭐라고 부르짖으며/ 거리를 천천히 배회하고 (141-142쪽)

똥으로 뒤덮인 지옥도(地獄圖)의 끔찍한 형상은 아래와 같이, 달리(Salvador Dali)를 연상시키 는 초현실적 풍경으로 전환되면서, 바흐찐(Mikhail Bakhtin)이 말한 “비하와 전복을 통해 경계를 허무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현대적 재현을 펼쳐 보이는 듯하다.

강철의 산, 프라스틱 나무 위에/ 불붙는 얼음, 합성섬유의 풀잎 위에/ 비날론의 꽃, 알미늄의 반 짝이는 나비들, 새들, 다람쥐들, 실뱀들/ [...] / 죽은 당나귀 위에/ 저 혼자 소리내는 피아노, 벽 에 달라붙어 혀를 내민 군화, 물방울 묻은 비닐製의 성기들 유방들/ [...] 고름 흐르는 모터/ 눈 을 흡뜨고 뒤집혀 죽은 구축함의 흰 배때기, 파리떼에 덮인 정액이 부패하는 삘딩의 철근들, [...] 하늘로 곧추선 피투성이 아스팔트, 노래 부르는 해골의 철교 [...] 핀 뽑힌 수류탄으로 무 장한 가와바다 야스나리 영감의 박제된 가슴 위에 [...] / 시체 시체 시체들을 연결하는 소음의 코일, 파리들의 침묵 (142-143쪽)

「오적(五賊)」(1970), 「비어(蜚語)」(1972), 「앵적가(櫻賊歌)」(1972), 「오행(五行)」(1974)을 비롯해 「똥 바다」에 이르기까지, 판소리 미학의 현대적 활용에서 김지하의 담시를 능가하는 작품은 없다 고 해도 좋다. 작가 특유의 입담과 종횡무진의 잡학적 지식은 긴장과 이완, 상승과 하강,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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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비약, 고아(古雅)와 비속(卑俗), 비애(悲哀)와 익살, 미(美)와 추(醜)가 뒤엉키고 넘나드는 판소 리적 특질에 힘입어 그 내용과 형식에서 탈장르적·탈경계적 혼성모방의 유례없는 미적 성취를 이룬다.

한편으로, 김지하 담시의 이러한 예술적 특성은 앞서 말한 바흐찐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을 상기시킨다.39) 주지하듯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바흐찐이 유럽 중세 및 르네상스 문화의 유산인 민중 축제와 카니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던 세계관적 특성을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의 소설 『팡타그뤼엘 연작』40)의 해석에 적용하면서 제시한 미 학적 원리이자 개념이다. 바흐찐은 라블레 소설에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육체 자체, 즉 먹고 마 시고 배설하기, 성생활의 이미지 같은 “삶의 물질-육체적 원리”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명명하면서, 라블레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계승자이자 완성자”로 규정한다.41)

「똥바다」의 미적 특성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원리를 부분적으로 구현하는 동시에 그것과 본질적으로 상충하는 양상을 보인다. 시-공간적으로 보나 역사-문화적 배경으로 보나 현격한 이질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라블레적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읽어보 고자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일본 군국주의의 재등장에 대한 비판’이 라는 등의 「똥바다」에 대한 기존의 상투적인 비평을 넘어 작품의 미학적 원리를 새롭게 규명 하고 동시에 그 한계를 짚어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42)

39)「똥바다」집필 당시 김지하가 바흐찐을 읽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인다. (아래 각주 41, 42 참 조). 그가 학부 미학과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이 당시 그로테스크 미학 이론에 관한 그의 견해는 칸 트 이래의 관념론 철학 특히 헤르더(J. Herder)나 쉴레겔(F. Schlegel) 형제 등을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 미학 및 민속학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최초의 담시 「오적」과 함께 1970년에 발표된 그의 에세이 「풍자냐 자살이냐」에서 그 점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 김지하는 (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19세기 독일 미학자 로젠크란츠(K. Rosenkranz)의 『추(醜)의 미학』을 빌어, “비애와 풍자, 공 포와 괴기의 결합”을 통한 시적 폭력과 우상파괴적 전복성에 관한 미학 이론을 개진한다. 이 시론은 그의 담시 전체를 일관하는 창작방법론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지하, 「풍자냐 자살이냐」, 『詩 人』 1970. 6/7월호, 참조).

 40)

41)

42)

발표 연대순으로 하면 『팡타그뤼엘 Pantagruel』(1532), 『가르강튀아 Gargantua』(1534), 『팡타그뤼엘 제 3권』(1546), 『팡타그뤼엘 제4권』(1552)이다. 이야기의 순서로 하면, 팡타그뤼엘은 가르강튀아의 아들이 니까 『가르강튀아』가 처음이다.

미하일 바흐찐, 이덕형/최건영 역,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2001. 444쪽. 1940년 「리얼리즘의 역사 속에서의 라블레」라는 제목으로 고리키 세계문학 연구소에 박 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되었으나, 2차대전으로 연기되었다가 1952년 후보박사 학위의 조건으로 심사를 통과했다. 이 논문은 그의 나이 70세인 1965년에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 중문화』라는 제목으로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었다. 1968년 『라블레와 그의 세계 Rabelais and his worl d』라는 제목으로 영역본이 출판되고 1970년에 불역본이 나왔으나, 서구 학계에서 그의 이름은 줄리앙 크리스테바나 츠베탕 토도로프에 의해 간간이 소개되었을 뿐이었다. 바흐찐의 이론이 활발하게 논의 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후인 1980년대 들어서의 일이며, 국내에서도 80년대 후반에야 그의 저서가 번역·출판되기 시작했다. (김욱동, 『대화적 상상력』, 문학과 지성사, 1988. 참조).

2002년에 쓰여진 김지하의 회고록에 따르면, 마당극 운동을 벌이던 1973년 가을―「똥바다」를 쓴 시기 와 일치한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를 하나 제작했다. 그는 이 영화를 가리켜 “그야 말로 바흐찐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극치”라고 말한다. (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2, 학고재, 2003, 279쪽). 이 진술은 물론 회고록 집필 당시(2002년)의 인식을 과거의 작품(1973년)에 투사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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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찐은 단테, 복카치오, 라블레, 세르반테스, 세익스피어 등의 작품에서 만개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17~18세기의 계몽주의 및 낭만주의 그로테스크, 그리고 19세기 이래의 모더니즘 그로테스크와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그 질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는 우선 라블레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똥, 오줌 등의 배설물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육 체적 이미지들과 김지하의 「똥바다」에 나타나는 다양한 그로테스크적 모티브들을 비교·검토해 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라블레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먹기, 마시기, 배설, 코풀기, 재채기, 성교, 임신, 출 산, 성장, 노화, 질환, 죽음, 찢기기, 조각조각 나뉘기” 같은, “그로테스크한 몸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드라마의 행위들이다.”43) 똥, 오줌 등의 배설과 관련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은 다 섯 살의 가르강튀아가 부왕(父王)인 그랑구지에에게 ‘밑 닦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그랑구 지에는 어떻게 밑 닦는 법의 발명에서 가르강튀아의 놀라운 지적 능력을 알게 되었는가」라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모자, 목도리, 고양이 등 온갖 종류의 기상천외한 밑닦개를 열거하면서 그 느낌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가르강튀아의 장광설은 이렇게 끝난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머리를 다리 사이에 붙들고 있기만 하면, 솜털이 많이 난 거위만한 밑닦개가 없다고 단언하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솜털의 부드러움만큼이나 거위의 적당 한 체온으로 엉덩이 구멍에 놀라운 쾌감을 느낄 수 있고, 그 쾌감은 직장과 다른 내장으로 전 해져서 심장과 뇌가 있는 곳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지요. [...] 제 의견으로는 천상의 행복은 거위로 밑을 닦는 데 있고, 이것이 스코틀랜드의 존 선생의 의견이기도 합니다.44)

이것은 아주 작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파리를 방문한 가르강튀아는 귀찮게 따라다 니는 사람들을 피해 노트르담 사원의 탑 위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모여든 군중을 향해 “물건을 꺼내어 공중에 쳐들고 신나게 오줌을 싸서 여인네와 아이들을 빼고 26만 4백 18명을 익사시켰 다.”45) 가르강튀아의 아들인 팡타그뤼엘 역시 “적의 진영에서 오줌을 누었는데 그 양이 얼마 나 많았는지 적을 모두 익사시켰고 사방 1백리에 걸쳐서 홍수가 났다.”46) 심지어 가르강튀아 의 암말이 눈 오줌이 대홍수를 일으켜 적을 전멸시키기도 한다.47)

바흐찐은 라블레 소설에 끝없이 흘러넘치는 이러한 방뇨(放尿)-방분(放糞)의 모티브를 특별히 ‘분변학적(糞便學的 scatological) 이미지’라고 명명하는데48), 이런 이미지를 라블레 못지않게 활

 43) 44) 45)

46)

47)

48)

지만, 한편으로 그의 작품들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개념으로 비추어보는 일이 충분히 타당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흐찐, 위의 책, 493쪽.

프랑수아 라블레, 유석호 역,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문학과 지성사, 2004, 82쪽.

「가르강튀아는 어떻게 파리 시민들의 환영에 응대했는가, 그리고 노트르담 사원의 커다란 종을 어떻 게 가져갔는가」, 위의 책, 92쪽.

「팡타그뤼엘은 어떻게 아주 기이한 방식으로 딥소디인들과 거인들에게서 승리를 거두었는가」, 위의 책, 442쪽.

「가르강튀아는 어떻게 베드 여울의 성을 무너뜨렸는가, 그리고 어떻게 여울을 건넜는가」, 위의 책, 175쪽.

분변학(糞便學 scatology)은 사람의 분뇨를 가지고 병을 진단하는 학문이다. 고대의 희극, 무언극,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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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한 한국문학 작품은「똥바다」외에 달리 없을 것이다. 「똥바다」의 주인공 ‘분삼촌대’가 광화 문 이순신 동상 위에 올라가 참고 참았던 똥을 쏟아내는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오줌으로 수십만명을 익사시키고 대홍수를 일으키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배설을 방불케 한다. 한편, 방분(放糞)의 모티브는 전 4권에 걸친 『팡타그뤼엘 연작』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이 장면은 특별히 「똥바다」와의 높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팡타그뤼엘의 친구이자 심복인 파뉘르 즈는 공포에 질려 바지에 똥을 싸고 동료들의 웃음을 산다. 결국 공포를 이겨낸 파뉘르즈는 유쾌한 기분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 하, 하! 어! 이것은 대체 뭐지? 이걸 뭐라고 부르죠? 설사똥, 동글동글한 말똥, 오줌,배설 물,응가,대변,시뇨(屎尿 오줌똥), 영(瀛 분변),르페르(이리똥),레스(곰똥),에뫼(멧새똥), 퓌메(사슴똥),에트롱(짜낸 똥), 스키발(개똥),혹은 스피라트(산양똥)라고 부르나요? 단언하지 만,이것은 에스파냐의 사프란이지요. 호,호,히! 이것은 에스파냐의 사프란이라고요! 셀라 (Selah)! 자, 마십시다! 여러분!49)

보다시피 속어로부터 학술용어에 이르기까지 똥을 가리키는 용어 15개가 이 대서사의 대미 를 장식한다. 이와 비슷하게, 아니 훨씬 심하게, 「똥바다」에는 분삼촌대가 갈겨대는 “홍똥, 청 똥, 검은똥, 흰똥”부터 시작해, “미국놈 빠다기름이 도는 똥, 월남놈 까칠까칠한 살갗 쪼가리가 섞인 똥, 씹히면서 악쓰는 조선놈 목소리를 내며 삐죽삐죽 힘들게 빠져나오는 똥”을 거쳐, “체 게바라 초상화를 들고 있는 자본가의 똥, 모택동 어록을 들고 있는 자위대 간부의 똥”을 지나, “먼 도시로 떠나가는 離農民 밤 열차 변소 속의 꼬불꼬불한 똥, 달아난 에미를 부르며 우는 아이의 쌩똥, 피 팔아먹고 사는 놈 핏기없는 똥”에 이르기까지, 무려 세 페이지에 걸친 기나긴 똥의 행렬이 이어진다.

바흐찐은 라블레 작품의 몸과 음식 이미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신랄한 과장법, 침소봉 대, 과도함, 풍요로움”을 그로테스크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든다. 한편, 바흐찐이 비판적으로 인용하는 독일 학자 슈네간스(G. Schneegans)에 따르면, “그로테스크는 항상 풍자적 이다. 풍자적인 성향이 없는 것은 그로테스크가 아니다.” 그로테스크에 대한 이러한 정의로부 터 슈네간스는 라블레 작품의 이미지들이 지닌 희극성과 풍자성 및 그 언어 구사의 모든 특성 을 “과장과 풍요, 모든 경계를 넘어서려는 성향,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열거와 동의어 뭉치들” 같은 것들에서 찾아낸다.50) 바흐찐은 슈네간스의 이해가 정확하고 일관성이 있긴 하지만, 동시

 49)

세의 익살문학 등에는 ‘똥을 게걸스럽게 먹는 의사’(분변 의사)가 나온다. “병자의 육체 속에서 일어나 는 삶과 죽음의 투쟁에 관여하는 참가자이자 목격자인 의사는 특수한 방법으로 배설물, 특히 오줌과 연관을 맺는다. 옛날의 의술에서 오줌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의사는 오줌을 가지고 환 자의 운명을 판단했으며, 오줌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결정했던 것이다.” 바흐찐, 위의 책, 280쪽. 「파뉘르즈는 어떻게 극심한 공포 때문에 똥을 쌌고, 로딜라르뒤스라는 큰 고양이를 새끼 악마라고 생 각했는가」, 바흐찐, 위의 책, 273쪽에서 재인용. (번역문은 유석호 역, 『팡타그뤼엘 제4서』, 한길사, 2006, 323쪽 및 M. Screech tr. Gargantua and Pantagruel, Penguin Classics, 2006. p. 871을 함께 참고 함). ‘셀라’(Selah)는 단순한 간투사(이덕형/최건영), 또는 히브리어로 ‘확실히’라는 뜻을 지닌 말(유석 호) 혹은 찬송가의 “끝”이라는 표기(Screech) 등으로 뜻이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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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설명하는 데에는 대단히 협소하고 제한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바흐 찐의 이러한 지적은 「똥바다」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데 이 문제는 후술한다). 여기서는 우선 위의 정의에 입각해서 「똥바다」에 나타나는 그로테스크의 기본적 특성들을 좀더 검토해 보기 로 하자.

“길게 이어지는 열거”는 앞서 살펴본 갖가지 똥의 형상들에서 보듯 「똥바다」의 중요한 문체 적 특성을 이룬다. 분삼촌대가 한국을 방문해서 금오야(金烏也), 무오야(武烏也), 권오야(權烏也) 의 안내로 “배정자(裵貞子)네 집”에서 한바탕 질펀한 향응을 대접받는 장면은, 말할 것도 없이 당대 한국의 친일 권력, 즉 재벌과 군(軍) 그리고 정치권력의 매판적 성격과 부패를 비꼬고 조 롱하는 의도임이 분명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배정자네 집’ 방안의 기물집기(器物什器)와 온갖 희귀한 음식들을 길게 열거하는 장면은 정치적 풍자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무구(無垢)한 웃 음을 유발하기도 하면서, “비하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51) 성격에 부합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호사스런 접대가 벌어지는 방은 그로테스크라는 말에 걸맞게 이종적(異種的)인 것들, 즉 일 본과 한국의 ‘경계를 넘어서는’ 결합이며 혼성이다.52) 예컨대, 이곳은 “다다미 온돌”이라는 불 가능한 결합이 벌어지는 장소다. “화류문갑에 正宗 日本刀가 비스듬히 서 있고”, 책상에는 “美 空히바리와 裵湖가 合唱한 잘 있거라 東京/ 후랑크 永井과 李美子가 合唱한 사요나라 京城” 의 카세트가 놓여 있고, 서가에는 “大望, 大忘, 大慾, 大心, 大滅, 大恥, 大辱, 大亡 [...] 그 곁 엔 ‘春의 雪’ 곁엔 썬데이서울”53)이 꽂혀있는 가운데, “齋藤實의 文化政治業績圖를 아로새긴 알록달록 자개상에 음식이 들어오는” 장면을 보자.

 50) 51) 52)

53)

九州에서 말린 南海 대구, 東京서 만든 齊州 돼지고기 통조림, 高麗 名産 딱지 붙은 고노와다, 神戶에서 양념한 束草 魚卵, 조선계자 原料의 靑와사비 바른 齊州 名産 바닷가재 사시미, 잡자 마자 冷凍船에 실어 大阪冷凍會社에서 얼렸다가 飛行機로 직접 오늘 가져온 忠武産 붉은 도미 사시미, 똑 그런 盈德 대게, 똑 그런 麗水 농어, [...] 廣州 무 다꾸앙, 왕십리 나라스께 / 黑山 島에서 잡아 對馬島에서 검사한 뒤 한국 햇볕에 말려 東京에서 빻아 그 가루를 한국에서 東海 물에 섞어 통에 넣은 뒤 日本에서 製品한 三菱製 紅蔘젓을 곁들인 날배추에다 正宗을 따끈하 게 걸쳐가며 아리랑 쪼이나 아라리요 도꼬샤 (131~132쪽)

“三味線과 伽倻琴”, “浪花節과 판소리”가 어우러지는 “홍살문 지나 도리이”, “中門 안문 지

바흐찐, 위의 책, 473-478쪽.

위의 책, 572쪽.

그로테스크(grotesque)는 15세기 로마 지역의 ‘동굴(grotta)’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의 기이한 장식물, 예 컨대 인간과 동물 같은 서로 다른 종들이 결합한 그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위의 책, 65쪽.

「똥바다」, 130-131쪽. 『大望』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엄청난 판매부수를 올린 일본의 대중 역사 소설이다. ‘大望’에 이어 大자로 시작되는 단어들이 무작위로 나열되다가 마지막으로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의 소설 ‘春의 雪’(春の雪), 그리고 “그 곁엔 썬데이서울”이 나온다. 이것은 ‘春의 雪’이라 는 한국어 발음의 ‘설’과 ‘썬데이서울’의 ‘서울’이라는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즉흥적인 말장난일 수 도 있지만, 「썬데이서울」을 비롯한 통속 주간지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부정적 사고가 반영된 것으 로 볼 수도 있다. 당시 대학생들은 주간지를 불태우는 의식을 치르고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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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뺑끼칠한 造山”을 거쳐 “다다미 온돌방”으로 이르는 “배정자네 집”의 그로테스크한 ‘한일 합작’의 상상은 한국과 일본의 도시들과 음식들이 엉키고 뒤섞이는 자개상의 묘사를 넘어, “아 리랑 쪼이나 아라리요 도꼬샤”54) 같은 기발하고 우스꽝스러운 말장난(pun)으로 이어진다.

또 한편으로, 권력자나 기존 질서에 대한 비하와 격하를 시도하는 말장난, 쌍소리, 욕설, 저 주, 외설, 무례한 언사 등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기본 요소인데, 그 점에서 「똥바다」는 나 무랄 데 없이 풍부한 사례를 보여준다. 서사는 ‘분삼촌대’의 조상들이 어떻게 조선과 불구대천 의 원수가 되었는지, 어떻게 국법으로 배설을 금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기상천외의 내력담(來歷譚)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임진왜란 이래 한일간의 오랜 원한 관계를 패 러디한 이 장면에서 분삼촌대는 그 이름 자체, 즉 ‘똥’으로 비하된다. ‘분(=똥)’을 그의 가문의 성(姓)으로 읽는다면, 그의 조부인 ‘분일촌대(糞一村待)’의 이름은 “똥, 잠깐 참아!(ちょっと待っ て)”라는 뜻이 되면서 동시에 ‘좃도맛데’라는, 한국어 발음으로는 매우 외설적인 뉘앙스의 비 속어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분삼촌대의 어미의 이름인 “아까 뀌고 또 뀌고”는 그보다 더 익살스럽고 동시에 덜 현학적이다. 복수의 일념으로 마침내 친선방한단의 일원이 되어 한 국에 건너온 분삼촌대를 굽신거리며 영접하는 금오야(金烏也), 무오야(武烏也), 권오야(權烏也)가 일본어 ‘오야붕’(おやぶん, 두목)을 이용한 말장난임은 분명하고, 이 모든 것들이 1970년대 한 국의 신식민지적 상황을 희화화하고 풍자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일 것임도 틀림없다.

4.2. “절멸 없는 삶의 기쁨”과 「똥바다」의 분노

이상에서 보듯, 「똥바다」가 한국문학사상 그로테스크적 모티브를 최대한 활용한 보기 드문 작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사례를 더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여 기서부터다. 「똥바다」는 과연 작가 자신이 (비록 「똥바다」를 가리킨 것은 아니었지만) 자부하듯, “바흐찐이 말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극치”(각주 42)라고 할 만한 것인가?

바흐찐이 말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핵심적인 미적 자질은 ‘웃음’(laughter)과 ‘양면가치 성’(ambivalence)이다. 바흐찐의 방대한 저서에서 이 둘은 끊임없이 강조되고 쉴새 없이 반복된 다. 앞서 보았듯, 웃음으로 말하면 「똥바다」에도 시종일관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부패하고 뻔 뻔한 권력의 위선을 마음껏 풍자하고 비하함으로써 신식민지적 구조 아래 억눌린 민중의 울분 을 통쾌하게 분출하는 「똥바다」와, 장터의 축제나 카니발을 통해 교회와 봉건국가의 억압을 벗어나 “제2의 삶”을55) 구가했던 유럽 중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세계는 일견 상통하는 듯

54)

55)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쪼이나(チョイナ)”, “도꼬이쇼(ドッコイショ)”는 함께 일을 하거나 노래를 부를 때 흥을 돋구기 위한 일종의 추임새로서, “자, 나가자! 할 수 있어!”(쪼이나), “주여, 무사히 마치도록 도와주소서”(도꼬이 쇼) 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http://extraordinary.cloud). 식민지 시기 한국 유행가나 민요에 이 후렴구가 유입된 흔적이 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는 “쪼이나 쪼이나 도까이쇼”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경북 지방의 민요가 채록되어 있다. 채록자는 이 노래의 제목을 「쪼이나 쪼이나 도까이쇼」로 기록하고 있다.

바흐찐, 앞의 책,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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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슈네간스의 그로테스크론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슈네간스에 따르면, 그로테스 크는 “부정적인 현상, 즉 ‘있어서는 안 될 무엇’을 캐리커쳐와 같이 과장하는 것”이며 라블레 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흐찐은 이러한 슈네간스의 관점은 “그로테스크 를 오로지 협소한 풍자적 목적의 부정적인 과장”으로만 보는 옳지 않은 태도이며, “그로테스 크의 가장 본질적인 면, 즉 양면가치성을 무시하는 것”56)이라고 비판한다.

바흐찐에 따르면, 그로테스크적 풍자의 목적은 (19세기 이래 근대문학이 그렇듯이), “사회적-문 화적인 [...] 악덕에 대한 분개 혹은 악에 대한 분노”가 아니며 “독자를 분노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57)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한마디로 바흐찐은 중세 및 르네상스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 낭만주의 및 모더니즘 그로테스크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장벽을 가리킨 것이라고 해도 좋다. 바흐찐은 라블레 소설에서의 모든 과장되고 터무니없는 사건들은 “다만 웃으려는 par rys 의도에서”58)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라블레 소설에서의 풍자적 웃음은 개 별적인 부정적 현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우스꽝스러움”을 가리키는 것이다.59) 웃음이란 ‘삶 그 자체의 움직임’, 즉 생성되고 교체되고 다시 존재하는 삶의 “유쾌한 상대성” 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의 덧없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심오하고 절 멸 없는 삶의 기쁨 joie de vivire”의 표현이다. 라블레 소설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세계를 집약해 보여주는, 지혜로 빛나는 이 구절은 특별히 기억해 둘 가치가 있다.

팡타그뤼엘리즘은 모든 일시적인(incidental) 것들의 헛됨(powerless) 앞에서 느끼는 정신적 즐거 움[이다]. 라블레의 작품에서 우스꽝스러움의 원천은 삶의 움직임을 늦추지 못하는 일시적인 것 들의 무력함(impotence)―왜냐하면 ‘신성한 술병’(Holly Bottle) 신탁소에 쓰인 것처럼, ‘만물은 돌이킬 수 없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시간의 흐름, 사 회적·역사적 움직임, 왕국이나 제국의 흥망성쇠의 법칙 따위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원천은, 일시적인 것을 넘어 그것의 덧없음(transient)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인 간 본성의 심오하고 절멸 없는(indestructible) 삶의 기쁨(joie de vivire)에 있다.60)

라블레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이러한 삶의 ‘유쾌한 상대성’이 웃음의 원천이며 인간 본성의 하나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예컨대 그들은 조로아스터(Zoroaster)가 신적인 지혜를 지닌 인물인 까닭은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태어날 때부터 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61)

라블레의『팡타그뤼엘 연작』전 4권은 이 존재론적 웃음이 지배하는 세계의 전모를 그린 작 품이다. 제1권 『가르강튀아』는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해 쓰는 편이 훨씬 나은 법이라오/ 웃음

56) 위의 책, 474-478쪽.

57) 위의 책, 221쪽. 이 구절은 바흐찐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라블레학의 현황을 설명하면서 핀스끼(L.

E. Pinskii)의 논문을 인용한 부분이다. 그러나 바흐찐 자신의 주장으로 보아도 좋을 만큼 바흐찐은 핀

스끼의 해석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58) 위의 책, 300쪽.

59) 위의 책, 223쪽.

60) 위의 책, 224쪽. (번역문은 Hélène Iswolsky tr. Rablelais and his world, MIT, 1968 및 라블레, 『팡타그

뤼엘 제4서』의 해당 부분을 참고하여 일부 수정). 61) 위의 책,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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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의 본성일지니”라는 선언으로 끝맺는 짤막한 서시(序詩)로 문을 연다. 바로 이어서, “고 명한 술꾼, 그리고 고귀한 매독 환자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작가 서문’은 소크라테스, 히포크 라테스, 호메로스 등을 들어 웃음에 관한 고대 그리스 철학을 논하면서 자신의 책을 “하찮은 농담이나 익살” 등으로 받아들이는 “경박한” 독자들을 향해, “너희들, 당나귀 좆같은 놈들아, 다리에 종양이 생겨 절름발이나 되어버려라!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나를 위하여 건배하는 것 을 잊지 말라. 나도 즉석에서 축배를 들어 답례하겠다”라는62) 웃음 섞인 장쾌한 욕설로 끝난 다. 이렇게 ‘웃음’과 ‘축배’(향연)로 문을 연 대서사는 제4권의 마지막 에피소드(각주 49), 즉 바 지에 똥을 싸고 능청스럽게 똥의 동의어들을 나열하는 파뉘르즈의 “자, 마십시다, 여러분!”이 라는 유쾌한 건배사로 문을 닫는다. 이처럼 ‘웃음’과 ‘축배’를 고리로 기나긴 소설의 머리와 꼬리가 연결된다. ‘다만 웃으려는 의도’,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웃음과 향연으로 수미일관한 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유쾌하며, 양가적 이다. 탄생/죽음, 젊음/노쇠, 선/악, 슬픔/기쁨, 공포/평안, 증오/사랑, 이성/광기, 영혼/육체, 인간/ 자연, 위/아래 등등, 모든 대립적인 것들은 중세 및 르네상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세계 감 각 속에서는 경계가 모호하고, 다의적(多義的)이고, 자유롭게 넘나들고, 뒤섞이고, 마침내 “유쾌 한 시간 속으로 침잠한다.”63) 따라서, 예컨대 똥이나 오줌 같은 배설물들은 라블레적 그로테스 크 리얼리즘에서는 앞서 보았듯 “유쾌한 물질”이 된다.

오줌(똥과 마찬가지로)은 비하하면서 동시에 편안하게 하고, 공포를 웃음으로 바꾸는 유쾌한 물 질임을 잊지 말자. 똥이 몸과 땅 사이에 있는 무엇이라면(이는 땅과 몸을 연결하는 웃음의 고 리이다) 오줌은 몸과 바다 사이에 있는 무엇이다. [...] 똥과 오줌은 물질과 세계, 우주의 자연 력을 육화하며, 이들을 더 가깝고 친밀한 것, 즉 몸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만든다(사실, 이러한 물질과 자연력은 몸이 낳고 배출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줌과 똥은 우주의 공포를 유쾌한 카 니발의 괴물로 변형시킨다.64)

“공포를 웃음으로 바꾸는”, “하나의 이미지 속에 긍정적 극점과 부정적 극점이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65), 이 양면가치성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본질이다. (이 야누스적이고 키메라 같 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양가성을 18세기 이후의 계몽주의나 낭만주의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 바 흐찐의 주장이다). 라블레 소설에 흘러넘치는 똥과 오줌, 욕설, 쌍소리, 외설과 음탕함, 갈가리 찢기고 흩어진 몸들, 기괴한 괴물들, 이 모든 형상에 부정적인 것이나 “조야한 냉소”66)는 전혀 없다. 혐오와 공포를 유발하는 똥이나 오줌은 가르강튀아의 밑닦개 자랑이나 오줌 홍수 장면 에서 보듯 우주적 규모의 과장, 그 반면에 극히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 어느새 즐겁 고 유쾌한 물질로 바뀌고 웃음을 낳는다.67) 그것이 그로테스크의 진정한 힘이다.

62)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14-20쪽. 63) 바흐찐, 앞의 책, 329쪽.

64) 위의 책, 519쪽.

65) 위의 책, 480쪽.

66) 위의 책, 272쪽.

67) 피리 시민에 대한 방뇨의 에피소드는 “모여든 군중을 다섯 개의 빵으로 배불리 먹였다는 복음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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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나 괴물, 잔혹한 살육의 장면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지옥을 다녀온 인물이 “악마는 멋진 녀석들이었어. 훌륭한 술동무들이었다구”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처럼, 공포의 근 원인 지옥과 악마는 라블레 소설에서 “유쾌한 괴물들”의 이미지로 바뀐다. 무섭고, 음울한 모 습은 어디에도 없다.68) 수도사 장이 수도원의 포도밭에서 “1만 3천 622명을 때려죽였다”는 유 명한 에피소드의 그로테스크한 격전 장면을 보자.

어떤 놈들은 두개골을 박살내고, 어떤 놈들은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고, 또 다른 놈들은 목뼈를 탈구시키거나, 허리뼈를 꺾어놓고, 코를 주저앉히고, 눈을 멍들게 하고, 턱뼈를 쪼개고, 이를 아 가리에 쳐박고, 견갑골을 부수고, 다리에 타박상을 입히고, 대퇴골이 빠지게 만들고, 사지의 뼈 를 조각내버렸다. [...] 어떤 놈이 나무 위는 안전할 것으로 믿고 나무에 기어오르면, 항문에 지 팡이를 쑤셔박았다. [...] 다른 놈들은 갈비뼈 사이를 공격해 위가 뒤집혀 즉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놈들은 무자비하게 배꼽 있는 곳을 가격해 내장이 튀어나오도록 했다. 그리고 다 른 놈들은 불알 사이로 직장을 꿰뚫어버렸다.69)

이 장면에서 바흐찐은 “절단된 육체의 이미지 안에서 주방(廚房)과 전투가 서로 조우하고 교 차하는”70) 세계, 즉 광장적 카니발의 활기찬 생명력을 읽어낸다. 육체의 절단, 불태우기, 죽음, 구타, 몰매, 저주, 욕설 등 라블레 소설의 전형적 모티브인 “해부학적 묘사”71)는 요리나 주방 기구 등과 결합하면서 잔치나 카니발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적을 불태운 장작이 짐승고기를 굽는 화덕으로, 피가 포도주로, 잔혹한 격전이 유쾌한 축연으로 바뀌는 것은 라블레 소설에서 변함없는 원칙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육체적 수확(收獲)의 이미지를 본다 [...] 이 피비 린내 나는 에피소드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것은 유쾌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환호작약하는 어 조”72)라고 바흐찐이 말할 때, 그것은 라블레 소설에 충만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세계 감각, 즉 생성되고 교체되고 다시 존재하는 ‘삶 그 자체의 움직임’, 그리고 그로부터 일어나는 “절멸 없는 삶의 기쁨”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흐찐이 라블레의 소설을 가리켜 “세계문학에서 제일 무섭지 않은 작품”73)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68) 69)

70) 71) 72) 73)

기적에 대한 풍자적 개작이자 암시”이기도 하다. (위의 책, 299쪽). 밑닦개에 대한 가르강튀아의 장광 설은 “스코틀랜드의 존 선생의 의견”이라는 말로 끝나는데, 이것은 쓸데없는 문제들에만 집착하는 중 세 신학자들을 조롱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한다(각주 44). 그러나 여기서 초점은 무엇을 풍자했느냐 가 아니라, 똥과 오줌이 ‘유쾌한 물질’로 전환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본질에 있다.

위의 책, 78-9쪽.

라블레, 앞의 책, 143-144쪽. 작품 안에서 ‘피크로콜 전쟁’이라고 명명된 이 전투는 신성로마황제인

카를 5세와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실제 전쟁을 희화화한 것이다. 라블레는 여기서 카를 5세를 ‘피크로콜’(쓸개즙이라는 뜻으로 성급하고 화를 잘내는 사람을 가리킨다)이라는 이름으로 조롱 하면서 그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풍자하는 한편, 프랑수아 1세의 어질고 평화주의적인 측면을 드러내 고 있지만, 주목할 것은 이 전쟁 묘사 전반에 걸쳐있는 웃음과 카니발의 이미지이다.

바흐찐, 앞의 책, 308쪽. 위의 책, 303쪽.

위의 책, 325쪽.

위의 책,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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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똥바다」로 돌아가자. 「똥바다」의 똥이 작품 내적 기능과 효과에서 라블레 소설과 본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이상의 논의에서 쉽사리 드러난다. 풍자적 웃음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똥바다」의 웃음은 부정적 대상을 향한 조롱과 야유일 뿐, ‘절멸 없는 삶의 기쁨’을 통찰하는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똥바다」의 똥은 ‘유쾌한 물질’의 이미지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웃으려 는 의도’를 지닌 것도 아니다. 똥은 오로지 혐오와 공포를 유발하는 물질이며, 똥으로 표상된 ‘왜놈’ 분삼촌대 역시 ‘유쾌한 괴물’이기는커녕 끔찍한 재앙을 초래하는 ‘악마’다. 「똥바다」의 서사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 및 인물은 야누스적 양면가치를 지닌 채 ‘유쾌한 상대성’ 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가치, 절대적 필연의 세계를 향해 움직인다. 음 울하고, 무섭고, 종말론적인 암시로 가득 찬 세계를 향해.

무엇보다 「똥바다」의 세계는 축제나 카니발의 이미지와 연결될 수 없다. 한반도를 자신의 욕망을 배설할 “변소”로 여기고 온갖 난장판을 벌이는 괴물 분삼촌대 및 그와 영합하는 부패 군상들의 모습에서 ‘유쾌한 괴물’이나 ‘민중 축제’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배정자네 집’에서 벌어지는 향연 장면의 그로테스크한 외설과 음탕함이 독자를 웃을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똥바다」 전체에 일관된 “근원을 알 수 없는 광기 어린 여성 혐오”다.74) 70년대 한국 사회에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이른바 ‘기생관광’은 박정희 정권 의 대일(對日) 종속을 풍자·비판하는 「똥바다」에서 서사의 핵심 모티브를 이룬다. 금오야, 무오 야, 권오야가 분삼촌대를 접대할 요정을 찾아 헤매는 다음 장면을 보자.

“아니야! 거긴 너무 더워. 요정 熱海로 몰아랏!”/ “아니야! 거긴 너무 추워. 빠 箱根으로 몰아 랏!”/ 아니야! 거긴 너무 꼭 끼어 좁아서 안 좋아, 카바레 後樂園으로 몰아랏!“/ 아니야! 거긴 너무 헐렁헐렁해 힘들어 안 좋아, 淺草屋으로 몰아랏!”/ “아니야!, 거긴 너무 풀이 많아 징그러 워 틀렸어, 銀座亭으로 몰아랏!”/ “아니야! 거긴 너무 깊고 컴컴해서 길 못 찾아 틀렸어, [...] /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 韓日親善 도모하는 뜻으로 裵貞子네 집으로 가잣! 裵貞子네 집으로 몰 아랏!” (129쪽)

이 대목에서 작가의 의도는 매우 노골적이다. 熱海(아타미), 箱根(하코네), 後樂園(고라쿠엔), 淺草(아사쿠사), 銀座(긴자)는 일본의 유명한 유흥지인데, 여기서는 서울 곳곳에 있는 기생 관광 을 위한 요정의 이름으로 차용되어 그 환락의 ‘한일합작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여성 성기를 품평하는 외설적 표현의 일부를 이룬다. 이 대목을 남성 권력 자들의 성적 타락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읽어서는 안 된다. 분삼촌대 일행을 “씻겨주고 닦아 주고”, “비벼주고 주물러주고 핥아주고 빨아주는” “계집들”을 “女大生 같은 妓生년, 妓生 같은 女大生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시의 화자 자신이기 때문이다.75) 이런 표현을 통해 시의 화 자는 70년대 기생관광 시스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을 가장 상층의 착취자와 동일시할

74) 박은선, 「김지하 담시의 젠더 연구」, 『비평문학』 78, 한국비평문학회, 2020, 150쪽.

75) 분삼촌대가 갈겨대는 똥으로 재앙에 빠진 세상에서 “女大生 같은 妓生년”은 “어머나 정말 너무 너무 맛있어요, 오 花代나 좀더 주셔요, 예!”, “妓生 같은 女大生년”은 “어머머머나! 얼마나 멋진 黃金빛이

에요? 저 日本 꼭 데려가 주셔요, 예!”하며 아첨을 떠는 것으로 묘사된다. (「똥바다」,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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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 아니라, 이 사업을 주도하고 이익을 편취하는 “포주”로서의 남성-국가 권력의76) 존재를 독 자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다. 남는 것은 남성 화자와 독자의 관음증뿐이다.

게다가 억압적 질서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창녀, 바보, 장애인, 여성 등을 위로 올리고 왕, 귀족, 사제 같은 최상층의 인물들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중세 카니발의 전복적 상상력이나 고귀함을 표상하는 육체의 상부(머리)를 천박함과 불결함의 상징인 하부(엉덩이, 성기)로 덮어버 리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김지하 시에 충만한 여성 혐오적 표현은77) 권위 의 탈관(脫冠, uncrowning)이 아니라 억압적 규범을 강화하고 그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한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목표는 “사회-문화적인 악덕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아 니”라는 바흐찐의 언급(각주 57)은 「똥바다」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 키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긴요한 지적이다. 보다시피 「똥바다」의 풍자, 골계, 기 괴, 공포, 웃음, 비애 등의 모든 개별적 미적 자질은 ‘분노의 극대화’를 향해 조직되고 통합된 다. 서사의 진행에 따라 웃음과 비애, 공포와 슬픔이 적당한 간격으로 교체되면서 “왜놈”에 대 한 분노의 정념도 서서히 증강된다. 분삼촌대가 똥을 쏟아내는 장소가 (일본의 원수이자 한국의 영웅인) 이순신 동상의 머리 위라는 설정이 독자의 분노를 끌어올리기 위한 의도임은 말할 것 도 없거니와, 똥바다로부터 태어난 “괴물”이 “金九 동상, 안중근 동상” 위에 “펄럭이는 일장기 위에” “천천히 배회”하는 가운데, “한국 년놈은 모조리 똥바다에 묻혀 죽고, 휩쓸려 죽고, 파 묻혀 죽고”, “죽어 썩어가고, 썩어 문들어져 가고, 문들어져 없어져 가는” 장면에 이르러 독자 의 분노와 비애는 절정에 이른다. 이 그로테스크한 아수라장의 길고 긴 묘사에서 간간이 돌출 하는 우스꽝스러운 표현, 예컨대 “일본놈들 끌어들일 때부터 내 이리될 줄 알고 每日 똥을 조 금씩 먹어 면역을 길러 놓았지, 헤헤헤! 웃는 얌체”라든가, “以熱治熱이라고 피아노만 똥똥똥 디립다 두들겨대며 똥 없어지길 바라는 놈” 같은 장면들에서의 ‘협소한 풍자의 부정적 과장’ 은 최종적인 분노와 비애를 향해 치밀하게 구축된 서사 전략에 따라 분노의 파토스를 더욱 강 화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4.3. ‘친일’의 발견: 초자아의 탄생

이제 「똥바다」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세계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시키는 마지막 장면에 대해 말하자. 공포, 음울함, 분노로 가득 찬 초현실적이며 묵시록적인 「똥바다」의 세계는 결말 에 이르러, 갑자기 아무 맥락 없이 (혹은 마치 몰래 준비라도 해놓은 것처럼) 엄숙한 도덕-계몽극 으로 돌변한다. 다음 장면에 주목하자.

한군데를 얼핏 내려다보니/ 웬 학생놈들이, 공돌이, 공순이, 농사꾼, 날품팔이 등과 함께 잔뜩

76) “한국의 남성 지배 세력은 언제나 포주였다.” (박은선, 앞의 글에서 재인용). 70년대 기생관광을 둘러 싼 ‘애국 대 윤락’ 담론의 모순에 대해서는 권창규, 「외화와 ‘윤락’」, 현대문학의 연구 65, 한국문학 연구학회, 2018, 참조.

77) 「똥바다」뿐 아니라 「오적」, 「비어」 등 다른 담시들에서도 여성비하적 표현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박은선, 위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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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를 지어 소리 소리 질러 ‘청소糞’을 웨치며 三寸待에게 돌을 던지면서 욕질을 해쌌고 삽, 작 대기, 책, 가래, 판장, 닥치는대로 들고 모두 함께 열심히 똥을 치우고 있것다/ 三寸待놈이 물어 가로되/ “야 이놈들 거기서 뭣하냐?”/ 공순이 공돌이 답해 가로되/ “淸掃糞!”/ 농사꾼 날품팔이 답해 가로되/ “淸掃糞!”/ 학생놈들 답해 가로되/ “淸掃糞!” (147~148쪽)

서사 무대에 전혀 등장하지 않던 “학생놈들, 공돌이, 공순이 농사꾼, 날품팔이” 등이 “淸掃 糞!”을 외치며 나타나 똥을 치우는 이 장면은 매우 작위적인데 이 작위성은 꼼꼼히 분석할 필 요가 있다. ‘공돌이’ ‘공순이’ ‘학생놈들’ 등의 비하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 재난을 극복할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긍정적 의미가 그들에게 부여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런데 서사 내 에서 그들은 분삼촌대, 금오야, 무오아, 권오야 등의 친일 권력자들과 무관한 것은 물론, 똥바 다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일본놈한테” 아첨하기 바쁜 온갖 군상들, 예컨대 “기생 같은 여대 생년” “여대생 같은 기생년”들과도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다. 이들은 마치 이 서사의 바깥에서 갑자기 나타난 듯하다. 요컨대, 이들은 분삼촌대가 갈겨댄 똥이 묻지 않은, 똥과 전혀 무관한 세상에서 온 존재처럼 보인다. 이들은 누구인가?

순결한 ‘민중’을 표상하는 ‘공돌이’ ‘공순이’ 등의 돌발적인 출현도 그렇거니와, 특히 ‘淸掃 糞!’이라는 말은 「똥바다」 전체의 익살맞고 재기발랄한 구어체의 흐름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작위적인 기이한 표현이다. “똥 치우자”라는 말을 “청소분”이라고 말할 한국인은 없다. (실제로 임진택의 판소리 공연에서 이 부분은 “똥 치운닷!”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국어의 통사론적 파괴를 아랑곳하지 않고 작가는 ‘민중’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淸掃糞!”을 외치게 한다. 이것은 무엇 일까?

열쇠는 ‘똥’이 아니라 ‘糞’에 있다. 이 시의 독자에게 ‘糞’은 그냥 ‘똥’이 아니라 ‘糞三寸待’ 이고 ‘왜놈’이다. 그러나 ‘糞→糞三寸待→왜놈→똥’이라는 기표의 연쇄, ‘淸掃糞→똥청소→왜놈 청소’라는 의미의 연결은 “똥 치우자”라는 구어체의 발성(發聲)으로는 전달되지 않고, 눈으로 문자를 따라가는 묵독(默讀)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요컨대, 독자의 머릿속에서 “淸掃糞!”이 “왜놈/친일파 청소!”라는 의미로 번역되게 하는 것, “淸掃糞!”이라는 기이한 구호의 의도는 바 로 그것이었다.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이른바 ‘기층민중’이 힘을 합해 분삼촌대가 싸놓은 똥을 청소하는 이 결말의 모티브에 대해서는 1960~70년대 한국의 사회·정치적 배경과 관련해서 검토할 몇 가지 이슈가 더 남아있다. 「똥바다」가 어째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세계와 크게 어긋나는 것인지 는 이 문제의 해명을 통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 하나는 ‘계몽’이고, 다른 하나는 ‘친일청산’이라는 명제 혹은 이데올 로기이다. 우선 첫 번째 키워드와 관련해서 김지하 회고록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나는 평생 그 어떤 조직에도 직접 가담한 적이 없지만, 분명 혁명의 한 날개였던 ‘새생활계몽 대’에는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새생활계몽대는 전국 각 대학생들로 조직되어 양담배와 양 주를 비롯한 외제 상품을 쓰지 말자는 계몽운동으로, 경제·문화적인 민족 자주성을 드높이는 운동이었다. 학생들은 완장을 차고 술집이나 가게, 행인들에게서 양키 물건을 압수해 모아다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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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네거리 한복판 같은 곳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웠다. 이 운동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정치 사상 및 문화와 예술에서의 민족주체·민족주의의 열풍을 불러오게 된 다. 계몽운동은 선전연극을 기획했다. [...] 양담배, 양주 등 외래 물품을 쓰지 말자는 각오를 새 롭게 하는 부자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 나는 잠깐 무대에 들어오는 젊은 대학생 역이 었다.78)

김지하가 “깊숙이 관여했다”고 회고하는 에피소드인 ‘새생활계몽대’에서의 연극 활동은 4·19 직후의 일이며, 이 회고가 이루어지는 시점은 40여 년이 지난 2002년이다. 그런데 40년 이상 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이 에피소드의 회고에는, 다른 경우들과는 달리, ‘회고하는 현재의 주 체’와 ‘회고되는 과거의 주체’ 사이의 간극이 전혀 없다. 다시 말해, ‘행인들에게서 양키 물건 을 압수해다 종로 네거리에서 불태운’ 대학생 계몽대의 활동을 “혁명의 한 날개”로 보는 시선, 그리고 그 계몽의 주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1960년의 신념은 2002년에도 여전히 유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새생활계몽대’의 활동이 지닌 폭력성79)이나 그 운동의 반복성80)은 마땅 히 지적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지금 이 글의 논점과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점은 김지하 자신 의 그 변치 않는 계몽의 시선과 신념이다.

신형기는 4·19 당시에 쓰여진 수기, 르포르타쥬, 기사, 문학 작품들을 통해 4·19가 ‘청년학생 들의 의거’로 수렴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시위에 앞장 섰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구두닦이, 거지, 똘마니 같은 “숨은 주인공들”의 존재에 주목하면서 4·19가 내포한 “계급적 균열의 깊이”81)를 읽어낸다. 이것은 단지 사회적 약자들이 받아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신형기에 따르면, 한 사회 집단에서 구성원의 정체성 은 “세계상을 주조하는 심각한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회자되어 그 내용에 대한 해석과 도덕적 설명이 부연, 확대”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이야기가 의미하는 관계 안에서 어떤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시위 현장의 열기가 가라앉고 난

78)

79)

80)

81)

‘그날’이 이야기되기 시작하면서, ‘이름 없는 시민(거지, 슈샤인보이)들은 상처를 안고 신음하

김지하, 『흰 그늘의 길』 1, 366쪽. 회고록에 따르면 김지하는 4·19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새생활계 몽대’는 그가 참여한 최초의 사회운동이었다. 이 최초의 경험에서 형성된 ‘계몽의 문법’은 이후 그가 ‘깊숙이 관여한’ 반독재투쟁과 생명운동의 중요한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지나가는 고급차를 세우고 여성들이 입은 양단 치마에 먹물을 뿌렸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양담배와 커피를 쌓아놓고 불을 지른 그들은 다방을 성토하고 카바레와 빠를 급습하 기도 했다. 또 유원지 등을 찾아 ‘놀이’에 사용된 관용차의 번호를 적어 공개했다. 이런 활동은 4. 19 의 연장으로 여겨졌다.” 신형기, 『시대의 이야기, 이야기의 시대』, 삼인, 2015. 248쪽.

새생활운동은 ‘생활개선’과 ‘위생청결’을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에서도 벌어졌고, 일제 식민지 치하나 북한의 천리마 운동, 중국의 대약진운동을 통해서도 진행되었으며, 무엇보다 5·16 군사정권의 ‘국민재 건운동’을 통해 법적 토대를 갖춘 국가적 규모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위의 책). 박정희 정권의 붕괴 이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가 시행한 대대적인 ‘사회정화운동’ 역시 이러한 ‘새생활운동’의 반복이다. 교통법규 위반 같은 일상생활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깊숙한 통제로부터 ‘삼청교육대’ 같은 참혹한 국가폭력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을 지배한 것은 사회 구성원의 육체와 정신을 청결하게 ‘개 조’하고자 하는 근대국민국가의 집요한 편집증적 ‘계몽’ 이데올로기였다.

위의 책,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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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데 영광은 학생들의 것이 되고 말았다’는 목소리는 차츰 희미해져 갔다. 대신에 4·19는 “지식인에 의한 혁명”(장준하)으로 규정되고 혁명의 “완성”을 위해 “청년학생의 열정”과 “계몽 적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에 따르면, 4·19 이야기의 해석과 설명이 부연, 확대됨에 따라 그 이야기 안에서의 ‘학생’과 ‘이름 없는 시민’의 위치가 분명하게 갈라 진 것이다. 신형기가 인용한 권보드래의 보다 직접적인 표현에 따르면, “대학생이 4·19를 만들 어냈다기보다 4.19가 대학생이라는 사회·문화적 주체를 탄생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4·19의 주역으로 여겨진 ‘순수한’ 청년학생이 곧 지식인은 아니었고 설령 그들의 일부분이 지식층으로 불릴 만하다 하더라도, 이 지식층이 어떻게 ‘위에’ 설 수 있는지는 막연할 따름”이 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4·19 이야기를 통해서 학생 집단은 ‘혁 명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함과 함께 미완의 혁명을 지속하고 완성하기 위한 대중 ‘계몽자’ 로서의 배타적인 역할을 위임받았다. 둘째, 지도 조직의 부재나 미숙함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4·19 이후의 상황에서 ‘혁명적 예외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보편화 되었고 이것은 강력한 ‘지도자’를 고대하는 열망과 결합했다.82)

김지하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새생활계몽대’는 4·19 이후 정착된 이러한 논리를 구 체화한 것으로, 사치품의 압수나 외래 물품의 소비 억제 같은 생활 혁신을 위해서는 “마땅한 강제”가 필요하고, 따라서 ‘혁명적 예외상태’의 지속이 요구된다는 주장 위에 서 있는 것이었 다. 한편 계몽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계몽의 문법은 계몽자와 피계몽자 사이의 엄격한 위 계, 계몽의 모델로서의 ‘위인’이나 ‘지도자’에 대한 추앙, 피계몽자의 전면적 개조를 위한 규율 과 훈육, 비(非)추종자나 이단자에 대한 도덕적 낙인찍기와 사회적 배제 같은 것들로 구성된다. ‘새생활계몽대’의 경우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83)

“학생놈들, 공돌이, 공순이” 등이 분삼촌대가 갈겨놓은 똥으로 재앙에 빠진 거리를 청소하는 「똥바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10여 년 전 ‘새생활계몽대’의 대원 김지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담시 「똥바다」는 익살과 웃음, 기괴와 공포로 가득 찬 그로테 스크의 세계로부터, 거리 청소에 나선 시민들의 활기찬 모습을 전하는 선전영화의 한 장면 같

82)

83)

것으로 돌변한다. 놀랍게도 이 장면에서 김지하는 무대에 직접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관점에서 5·16을 4·19의 ‘단절’로 보는 기존의 시각과는 달리, 4·19와 5·16의 사회·문화적 연속성 을 논증하는 괄목할 만한 연구들이 최근 10여 년간 축적되었다. 『상허학보』 30집의 특집으로 실린 오 창은의 「4·19 공간 경험과 거리의 모더니티」, 오문석의 「전통이 된 혁명, 혁명이 된 전통」, 권보드래 의 「4·19와 5·16, 자유와 빵의 토포스」, 서은주의 「소환되는 역사와 혁명의 기억」 등과 우찬제, 이광 호 편, 『4·19와 모더니티』, 문학과 지성사 2010. (이상 목록은 신형기, 위의 책, 202쪽에서 재인용). 특 히 “4·19는 5·16에 의해 억압된 것이 아니라, 5·16 이후의 체제를 변할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수락하 고 4·19의 지속 가능성을 봉쇄하고 지워간 4·19세대의 삶/문학의 논리가 억압한 것”으로 분석하는 김 영찬의 논문 「혁명, 언어, 젊음: 4·19의 불가능성과 4·19세대 문학」 (『한국학 논집』, 2013)은 4·19와 5·16의 연관에 관한 오래된 통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

1960년 7월 3일 ‘새생활계몽대’의 결성과 함께 서울대 학생 수백명이 프랭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 며 뿌린 삐라의 내용을 보자. “새나라 새터에 새살림 이룩하자!/ 망국 사치품! 통일 국산품!/ 한 가치 양담배에 불타는 우리 조국!/ 커피 밀수액 5백30억 커피 한 잔 피 한잔!/ 일본 노래 속에 일본 칼이 들어있다/ 푹 썩은 분들은 땐스홀 캬바레 요정으로 (일선은 피땀인데 후방은 이게 뭐냐!)/ 휘발유 없 는 나라 자전차 애용하자/ 호화로운 결혼식 빚지고 일생 산다!”, 『새가정』, 1960, 8월.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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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에 한 거지같이 초라한 녀석이 [...]/ “꺼져라 씨팔, 꺼져라 쪽발이는 씨팔 꺼져라!”/ 하도 흉측해서/ “넌 또 뭐냐?”/ 三寸待가 물어보니/ 녀석이 껄껄 웃으며/ “임마, 지금 네 얘기를 한참 신나게 구라 풀고 있는 金지하라는 놈이 바로 나다 임마!/ 빨리 좀 꺼져다오 임마/ 술꾼들이 기 다린다 임마!/ 임마 임마 임마!” (148-149쪽)

‘새생활계몽대’의 선전연극에 “잠깐 들어오는 젊은 대학생 역”으로 출연했었다는 회고록의 서술과 이 장면을 오버랩해보면, 「똥바다」의 마지막 장면에 ‘잠깐 들어오는’ “거지같이 초라 한” “金지하”라는 인물의 출현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 장소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성웅 이순신’의 동상 아래라는 점을 염 두에 두면 사태는 간단치 않다.

‘이순신 장군’은 김지하의 정치·역사적 상상력에서, 적어도 초기에는 매우 중요한 모티브를 이룬다. 희곡 「구리 이순신」(1971)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84) 사회적 부패와 타락을 구리 갑옷 속에 갇힌 ‘이순신 동상’을 통해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매우 소박한 습작 수준의 이 계몽극의 결말에도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술 취한 ‘거지 시인’이 등장한다. 시인은 민중의 고통을 외 면하는 이순신 ‘동상’을 “가짜”라고 질타하면서 “진짜 이순신 장군”의 도래를 열망하고, ‘이순 신 동상’ 역시 갑옷 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는 것이 이 희곡의 내용 이다. (김지하는 이 연극에도 직접 출연했다고 한다.)85)

‘분삼촌대’와 친일 부패분자들에 의해 오염된 ‘똥바다’ 한가운데 “淸掃糞!”을 외치며 나타난 “학생놈들”은, 10여 년 전 “광화문 네거리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양담배와 커피를 쌓아놓고 불 을 지”르며 “여성들이 입은 양단 치마에 먹물을 뿌”리던 ‘새생활계몽대’의 재탄생이다.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위에서 새똥을 밟아 미끄러져 떨어져 죽는 분삼촌대를 향해 “쪽발이는 꺼 져라!” 외치는 시인 ‘김지하’, 밤이면 이순신 동상 앞에 나타나 울분을 토하다 잠이 드는 ‘거 지 시인’(김지하)의 이미지는 계몽의 필연과 혁신의 가치를 가르치고 이끄는 민중의 향도(向導) 이자 지도자의 형상 그 자체다. 게다가 ‘성웅 이순신’의 아우라를 배경으로 한.

남정현의 「분지」가 ‘민족-신체’의 알레고리화를 통해 신식민지적 질서에 대한 저항을 시도 했다면, 김지하의 「똥바다」는 ‘민족-정신’의 알레고리화를 통해 대중계몽의 선두에 선다. 사 회·문화적 악덕에 대한 분노의 극대화와 그 도덕적·계몽적 결말에서 분명해지듯이, 「똥바다」의

 84)

85)

이순신의 성웅화(聖雄化) 작업을 통해 군사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의 지배 이 데올로기 전략에 이 작품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역사적 인물의 ‘성인화’를 통해 집 단적 일체감을 조성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파시스트 권력의 기획에 무지하거나 혹은 공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계몽적 한계를 드러낸다. 70년대 이후 김지하는 이러한 ‘지도자 대망론’의 허구나 위험을 깨달았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부패하지 않는” “초계급적 영성적 혁명가의 지배” 를 향한 열망으로 이끌린다. (상세한 논의는 김철, 「민족–민중문학과 파시즘: 김지하의 경우」, 『‘국문 학’을 넘어서』, 국학자료원, 2000. 참조).

「김지하 연보」에 따르면 「구리 이순신」은 당국의 방해로 공연되지 못했다. 한편, 김지하 회고록에는 김지하가 직접 출연한 「구리 이순신」 연습 장면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 사진 설명대로라면 김지하 는 단역인 ‘거지 시인’이 아니라 주연인 ‘엿장수’ 역으로 출연한 것이다. (『흰 그늘의 길』 2,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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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라블레적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하는 작품이다. 「똥바다」의 똥은 인간의 육체와 대지 사이에 놓인 ‘웃음의 고리’로서의 ‘유쾌한 물질’이 아니라, 타락과 부패로 물든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물질이자 재앙의 근원이며, 청소의 대상이자 ‘적’의 표상으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김지하의 「똥바다」야말로 남정현의 「분지」가 첫발을 뗀, “적=똥”이라는 한국적 표상 방법의 계승이자 완성이다.

민족-신체와 정신의 보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불결한 오염원, 특히 외국(인) 타자와의 접촉에서 생긴 감염과 타락을 제거하고 예방해야 한다는, 앤 스톨러가 “문화적·민족적 위생 학”86)이라고 부른 신식민지하 남성-민족주의의 관념은 앞서 살펴본 ‘새생활계몽대’의 활동, 그 리고 그것의 문학적 재현인 「분지」와 「똥바다」에서 이렇듯 분명하게 드러난다. ‘계몽+민족적 위생학’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두 작품에서의 차이는 전자가 감염의 근원을 ‘미국(인)’으로 보았다면 후자는 그것을 ‘일본(인)’으로 보았다는 점인데, 이 차이의 근저에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맥락이 놓여 있다. 이것이 두 번째 키워드인 ‘친일’을 통해 풀어볼 문제이다.

권보드래에 따르면, “친일”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재발견” 되었다.87) 해방 직후 반민특위 의 활동이 유야무야되고 난 뒤 1960년대 중후반까지 ‘친일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표면화되지 않았다. 친일 논란을 “妖童 浮女의 억설”이라고 질타하면서 “인재를 자기 눈동자같이 아끼”는 자세로 대일협력 논란을 종결할 것을 설득하는 1950년대 후반 『사상계』의 논설이나,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친일’ 전력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혐의가 시비거리였던 사 실, 또는 1967년 8.15해방 기념 좌담회에 참석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친일파 청산에 대한 문 제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 그 외 여러 사례를 통해 권보드래는 “이미-아직 친일이 오 점이 아닌” 1960년대 후반까지 “친일은 용납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지배적 인식”이었음을 밝힌다.

60년대 후반까지 ‘친일’은 중요한 정치·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음을 논증하기 위해 그녀가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이른바 ‘해방세대’ 작가들의 작품이다. 해방 당시 10대 중후반의 나 이로 충실한 ‘황국소년/소녀’의 정체성을 지녔던 이들이 해방의 충격 앞에서 느꼈을 당혹감과 혼란, 그리고 그 기억을 재현하면서 부딪치는 분열적 자의식과 애증병존에 대해서는 이미 다 각도로 깊이 있는 분석들이 제출된 바 있다. 권보드래의 논의의 중요성은, 식민지 시기에 대한 문학적 재현이 시작되는 60년대 중반 이들의 작품 속에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던 ‘노스탤지어 와 민족주의’가 70년대 이후 점차 분리되면서 민족주의적 서사로 편향되어 가는 현상―나르시 즘적 추억으로 감싸인 식민지 기억이 ‘민족수난사’라는 역사적/사후적(hindsight) 의미화의 갑옷 을 입게 되는―을 섬세하게 포착한 데에 있다. 더 나아가, 그녀는 이 현상을 70년대 ‘친일’ 담 론의 전면적 등장이라는 맥락과 연결지음으로써 한국 현대의 정치사상사 및 사회운동사의 이 해에 의미깊은 디딤돌을 놓았다.

그녀가 특히 주목하는 사건은 1973년 12월 26일 서울 명동에서 개최된 ‘항일문학의 밤’이라 는 행사다. 이미 2년여 전인 1971년에 출간된 『항일민족시집』의 출판 기념회라는 명분으로 개

86) Ann Stoler, “Carnal knowledge and imperial power: race and the intimate in colonial rule”, Roger N. Lancaster, ed., The Gender/Sexttality Reader, Routledge, 1997, p.15. (이진경, 앞의 책, 243쪽. 재인용).

87) 권보드래, 「내 안의 일본―해방세대 작가의 식민지 기억과 ‘친일’ 문제」, 『상허학보』 60, 2020.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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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된 이 행사에는 1천 명을 헤아리는 청중이 집결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그에 저 항하는 시민세력이 ‘개헌청원 운동본부’를 결성한 지 이틀 만에 열린 이 행사에서는 김지하를 비롯한 17명의 문인들이 시를 낭송하고, (해방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백기완이 ‘우리에 게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그리고 (4·19 세대를 대표하는 문인 중 하나인) 염무웅이 ‘근 대문학과 항일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88)

권보드래가 이 강연회를 특별히 조명하는 이유는, 이 행사를 통해서 “식민지 시대=유신 시 대/ 일제=박정희 정권이라는 유비의 상상력”이 확산되고 “항일과 반독재투쟁이 중첩돼 호명되 는 양상이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1966년 발간된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의 수요가 급증한 것 은 1975년이라는 사실에서 보듯, 1950~60년대 내내 ‘반일’에 집중되어 있던 식민지 기억이 70 년대 들어 “방향전환”을 하면서 ‘친일’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서술을 보자.

유신체제의 폭압을 식민지기 통치성의 폭력성에 유비시키고, 박정희 독재에 맞서려는 결의를 항일정 신과의 동형성 속에서 의식하기 시작한 것도 명백해 보인다. [...] 식민말기는 이로써 재발견의 대상 이 되었다. [...] 이때 재발견된 ‘친일’은 단순한 반민족의 문제가 아니다. ‘친일’은 반민족-반민주- 반민중이라는 부정적 가치의 연쇄 중 하나의 사슬로서, 대타적 긍정항인 민족-민주-민중과의 대립 과 투쟁의 구조를 형성한다. 유신 직후 그 기초적 인식틀을 마련한 친일청산론은 1970년대 말이면 이 론적 집대성의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해방전후사의 인식』(1979)이 그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433쪽)

위의 서술에서 보듯, ‘항일문학의 밤’은 유신 정권의 취약한 고리를 타격하는 효과적인 수단 으로서 ‘친일’을 부각하는 한 계기, 그람씨(A. Gramsci) 식으로 말하면, ‘반(反)정부=빨갱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선 헤게모니 투쟁의 일환으로서 ‘친일=유신=반민족=반민주=반민중/ 항일 =반유신=민족=민주=민중’이라는 도식을 정초하고 공표하는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김지하의 「똥바다」가 놓여있는 역사-정치적 맥락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다시 말해, 「똥바 다」는 한국 현대사의 해묵은 숙제, 즉 ‘친일청산’이라는 명제를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과 등치 시킴으로써 대중의 폭넓은 동의를 확보하려던 70년대 초 민주화 운동의 전략적·문학적 성과로 읽을 수 있다. 정치적 억압과 부패를 풍자·고발하는 「오적」, 「비어」, 「앵적가」 등 「똥바다」 이 전에 쓰여진 담시들에는 일본이나 친일파 문제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똥바다」 의 창작 시기가 ‘개헌청원 운동본부’의 발족 및 ‘항일문학의 밤’ 개최 시기와 겹친다는 점, ‘항 일문학의 밤’의 개최 명분이었던 『항일민족시집』은 백기완이 설립한 「민족학교」가 출간한 것 이었고 김지하는 그 「민족학교」의 구성원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친일청산’을 반유신투 쟁의 지렛대로 삼은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방향전환’이 「똥바다」 창작의 역사-정치적 배경이 되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89)

88) 이행사가열리는날국무총리명의의경고담화가발표되고,행사가끝난뒤열흘만에유신헌법의 무효를 주장하는 ‘개헌청원 운동’에 30만 명이 서명하고, 이어서 나흘 뒤인 1974년 1월 8일 또다시 초헌법적인 ‘대통령 긴급조치’ 1·2호가 연달아 선포되고, 장준하·백기완 등이 체포되었다. (위의 글, 430쪽). 김지하는 급히 피신했으나 3개월 뒤 체포되어 이후 6년 가까운 투옥 생활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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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을 유신정권 타도의 주요한 타격 고리로 삼았던 당대 민주화 운동의 진정성을 의 심할 수는 없다. 4·19의 영광을 업고 사회의 중추로 갓 진입한 ‘한글세대’가 혁신의 주요 과제 로 ‘친일’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게 된 것도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친일청산’이 라는 대항 이데올로기가 이후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신성불가침의 도그마, 즉 모든 “정치적 사안을 친일이라는 소실점 속에서 조망하는”90)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친일청산’이라는 율법은 현대 한국인의 집단적 자아를 지배하는 초자아가 되었다. 「똥바다」는 그 새로운 초자아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5. 유보된 결론: “우리는 아직 왕의 목을 베지 못했다.”

지젝의 설명에 따르면,91) 이데올로기는 사물의 실상을 은폐하는 환영(허위의식)의 차원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물의 실상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모 르는 척 행동한다.92)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무지나 망각, 즉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다. 예컨대, 나는 내가 투표하는 정치가가 나를 대표한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가 나를 대표하는 게 가능한 것처럼 행동한다. 나는 시장에서의 이른바 ‘등가교환’이라는 형식의 진짜 내용은 ‘착취’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교환의 순간에는 언 제나 순수한 등가교환이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민주주의’나 ‘등가교 환’이 이데올로기적 허구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알면서도 실제 현실에서는 모르는 척 (또 는 가능한 듯이) 행동하게끔 하는 구조적 환영인 것이다.

 89)

90) 91)

92)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상 없이 ‘현실’은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

권보드래는 김용섭, 강만길, 백기완 같은 해방세대 지식인들을 자기 세대의 보편적인 식민지 기억과 는 다른 성장 배경을 지닌 ‘예외적’ 인물들로 설명한다. 여기에 기대어, 나는 70년대 ‘친일의 재발견’ 은 이 ‘예외적’ 해방세대와 한글세대의 연대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세대의 ‘식민사관/타율사관’ 과 단절하고 새로운 ‘민족 주체의 역사’를 요구하는 신세대(한글세대)의 갈망이 (구세대의 예외적 지 식인인) 김용섭의 ‘자본주의 맹아론’, 강만길의 독립운동 연구, 백기완의 ‘민족정신’과 서로 호응하여 이른바 ‘식민지 수탈론’으로 불리는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에피스테메 혹은 실천강령을 낳았다 고 보인다. (‘항일문학의 밤’의 강연자가 백기완과 염무웅인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수 탈론’에 대립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과 더불어 이들의 사고는 모두 앞서 말한 ‘소유적 민족주 의’(각주 29)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위의 글. 434쪽.

이하의 논의는 따로 표시하지 않는 한,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제

1장 「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을 고안했는가」, 새물결, 2013; 김소연, 유재희 역, 『삐딱하게 보기』의 제9장 「형식적 민주주의와 그에 대한 불복」, 시각과 언어, 1995; 박정수 역, 『How to read 라캉』의 제 3장 「진짜와 가짜」, 웅진 지식하우스, 2007의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가 첨삭·재구성한 것이다.

‘잘 알지만 그래도...’라는 물신적 부인(否認)의 예들은 이런 것이다. “엄마가 남근을 갖고 있지 않다 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가 그걸 갖고 있다고 믿어)", “나는 유대인이 우리 같은 사람들 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무엇인가가 있지)”, “돈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것이 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것은 (시간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떤 특수한 실체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 지젝(2013),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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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이 무대는 참 여자들의 무지나 능동적 망각을 통해 지탱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상품의 교환형식 속에 숨겨진 가치의 추상화 과정이나 잉여가치의 전유, 또는 순수한 물질로서의 화폐의 실질적 가 치 등을 항상 주시하고 있다면 ‘시장 질서라는 현실’은 붕괴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민주주의 는 근원적 불평등이나 부자유 및 억압 등의 오점으로 얼룩진 형식일 뿐이며 민주주의의 ‘주 체’ 역시 ‘폭력적 추상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투표장에 갈 때마다 되새긴다면 민주주의 역시 작동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의 운명적 결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민주주의의 힘의 원천이다.”93)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지닌 이러한 추상성, 비일관성, 내 적 적대성을 ‘잘 알지만 모르는 척 행동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의해 유지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순수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 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그 고유한 불가능성을 기초로 해서만 가능하다”.94)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푸코가 “은밀한 폭력”95)이라고 불렀던)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의 ‘전이(轉 移)’, 즉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타자’를 상정하는 것과 같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든 종교 적 신앙이든, 그것은 주체의 ‘믿음’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 대신 다른 사물 혹 은 타자가 그를 ‘대신해서’ 믿음으로써 유지된다. 이것은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며 우리의 일상 과 문화를 이루는 기본적 구조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듯, 나의 믿음은 ‘그것을 믿는/아는 타자’를 가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그 타자에게로 나의 믿음을 전가 한다. 그때의 타자는 실제로 존재하기보다는 흔히 신화적이거나 비인칭적인 형태(‘사람들’이 ~ 라고 믿는다)를 띤다.96)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문화’의 모습이다. 즉, “문화란 실제로 믿지 않 고,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행하는 모든 것들에 붙인 이름”이다.97) 이데올로기적 환 상 없이 사회현실이 유지될 수 없듯이, ‘전이’ 없이는 문화나 관습도 유지되지 않는다.

‘법’도 마찬가지다. 나는 법이 ‘진리’나 ‘정의’의 속성을 본래 지니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법의 판단이 바뀌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법의 진리성을 믿지 않지만, 나 대신 에 ‘잘 안다고 생각되는’ 타자나 다른 사물(예컨대 법 전문가, 경찰, 판사, 법복, 법원 등등)에 나의 믿음을 전이시킨다. “사람들로 하여금 법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도록 하는 필연 적이고 구조적인 환영은 정확히 전이의 메커니즘을 나타낸다.”98) 즉, 법이 ‘정의’를 실현한다 는 ‘믿음’, 나를 ‘대신해서’ 악을 응징한다는 ‘믿음’은 법이 지닌 어떤 내재적 속성에서가 아니 라 나를 대신한 타자나 사물에 믿음을 전가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법질서’는 그렇게 유지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적이며 전적으로 ‘몰상식한’ 초자아적 명령이다. 주체는 법의

93) 지젝(1995), 331쪽.

94) 위의 책, 327쪽.

95) 푸코, 앞의 책, 429쪽.

96) 한예로물리학자닐스보어의일화를보자:보어의연구실문위에행운을가져온다는말편자가걸

려 있는 것을 본 방문자가 “나는 그런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자 보어는 “나도 믿지 않는다. 그래

도 그게 행운을 가져온다고들 한다”고 답했다. 『How to read 라캉』, 50쪽.

97) 위의 책, 51쪽.

98) 지젝(2013), 76~77쪽. 또 다른 설명을 덧붙이자면, “전이는 어떤 요소의 의미가 처음부터 내재적인 본

질로 그 요소 안에 현존한다는 환영에서 비롯된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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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를 통해 사적 쾌락을 박탈당하고 공적 영역의 법은 바로 그 쾌락으로부터 억압의 에너지 를 얻는다. 초자아는 “외설적인 법”의 다른 이름이다.99)

전체주의, 근본주의, 유토피아니즘 등은 믿음의 이러한 ‘불안정한 위치’를 받아들이지 못하 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진심으로’ ‘문자 그대로’ ‘직접적으로’ 믿는 자들이다. 근본주의자 가 모르는 것은, ‘앎’과 ‘믿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사실, 전이는 이 단절을 메우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이다. 근본주의자는 이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하는 믿음’을 용납하지 않는, ‘직접 알기 전에는 결코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다. 이 불신의 결과, 그들은 일반적인 물신숭배(“잘 알지만 그래도...”)를 거부하는 동시에 더욱 강력한 물신화로 나아간다. 예컨대, 기독교의 오랜 종교적 상징물을 물신숭배로 낙인찍고 파괴하는 밴 달리즘(vandalism), 죽은 예수의 몸을 덮었다는 튜린(Turin)의 수의에 묻은 핏자국의 DNA 검사를 통해 예수의 가계도(家系圖)를 증명하겠다고 나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평양의 한 무덤에서 발굴한 인골을 최신 과학의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오천년 전에 실존한 단군의 뼈임이 입증되 었다고 선전하는 북한 주체주의자들은 언제나 호환 가능한 근본주의-전체주의-기계들이다.

근대 역사를 민주주의의 역사라고 말하려면 동시에 전체주의의 역사라고도 말해야 한다. 전 체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사회 자체의 내적 부정성이나 분열의 기원을 특정한 ‘적’으로 환원 함으로써 사회적 동질성과 통합을 꾀한다는 것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거론한 퍼셀의 논의, 즉 ‘공산주의자’, ‘자본가’, ‘프로레타리아’, ‘유대인’ 등등의 ‘적/아’로 구성된 “역겨운 이분법”의 세계를 상기 하자). 20세기 한국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음은 지금까지 이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거칠 게 말하면,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전체주의라는 물신화가 교차, 반복, 그 리고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만들어낸 ‘적’을 통해 사회적 주체를 형성하는 전체주의적 메커니즘 안에서 초자아(법, 국가, 민족 등)는 주체에게 금지하는 것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즉 ‘예외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권 력이다. 주체는 초자아의 명령 앞에서 자신의 순결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주체가 순결하 면 순결할수록, 복종하면 복종할수록 초자아의 쾌락은 커지고 억압은 더욱 강화된다. 거대한 관료-기계 또는 신성불가침의 율법 아래 주체는 끝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는 순치되고 규율화한 주체가 된다. ‘귀축미영’ ‘빨갱이’ ‘미제국주의’ ‘왜놈’ ‘친일파’ ‘커피’ ‘양담배’ ... 기타 등등의 병균과 오물, 즉 ‘적’을 쉴 새 없이 생산해내는 세계, 그 안에서 오염되지 않은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입증해야 하는 주체에게서 사회 자체의 근원적 분열과 내적 적대성, 이데올로기적 환 상을 인식할 능력은 기대할 수 없다.

4·19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일보 전진을 촉발한 사건이다. 동시에 전체주의 로의 통로가 넓게 열린 순간이기도 하다. ‘친일’ 문제가 사회적 부정성의 절대적 기원으로 정 착되고, ‘~만 없으면’ 당장이라도 이상 사회가 도래할 것만 같은 종말론적 환상이 뿌리박힌 사 회 ―근본주의적 전체주의 말고 이런 사회를 달리 설명할 수는 없다. 2000년대 들어 친일 문 제가 급격히 사법화하는 경향 역시 근본주의적 편집증의 전 사회적 보편화를 반영한다. 그것 은 ‘친일’이라는 정의(定義) 불가능한, 부유하는 기표의 의미를 (‘정의’와 ‘진리’가 그 안에 현존한

99) 지젝(1995),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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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믿음의 전이인) 법의 폭력을 통해 ‘실물’로 고정(固定)시키고, 그에 따라 정의와 진리가 실 제로 현현함을 입증하고자 하는 법 물신주의자들의 광기를 드러낸다. 1970년대 유신독재의 전 체주의에 맞선 이른바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민족 주체’는 한편으로 이것이었다.

40년 가까이 진행된 식민 통치와 그 속에서의 온갖 경험들이 ‘친일/항일(=적/아)’로 선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혹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외설적 율법’의 지배 아래, “해방의 소식을 듣고 ‘니혼 가 마켓타요(일본이 졌다)’고 울음을 터뜨”렸던 해방 세대의 곤혹과 혼란이 반추(反芻)될 공간은 없었다. 굴종과 치욕으로 얼룩진 잡종의 흔적을 지우고 그 자리에 강인하고 순결한 집단 주체 의 자화상―허구적일 수밖에 없는―을 그려 넣기를 요구하는 ‘도덕’의 명령 아래, “해방을 ‘빛’ 이 아니라 ‘어둠’으로 경험”100)한 ‘황국소년/소녀’의 난민화(難民化)가 사유될 여지는 더욱 없었 다. 4·19의 실패, 아니 지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푸코를 따라 말하면, “우리는 아직 왕의 목을 베지 못했다.”101) 그러는 동안 ‘우리’가 얻은 것은 거대한 나르시즘적 환상, 잃은 것은 실재(the Real)에 대한 감각이었다.

[부기]

이어지는 제2부에서 나는 방영웅의 『분례기』(1967)를 ‘자본주의적 수탈과 착취로 기형화한 한국 농촌의 실상을 그린 농촌소설’로 읽는 기존의 해석을 부정하고, 이 소설을 푸코의 『감시 와 처벌』 및 『광기의 역사』의 한 레퍼런스로 독해하는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이 논문의 머리말 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작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분례기』는 푸코가 『감시 와 처벌』에서 묘사한 팬옵티콘 시스템이 20세기 한반도의 한 농촌 마을에서 생생하게 작동하 는 현실을 그린다. ‘호롱골’이라는 팬옵티콘적 ‘동물원’에 작동하는 미세권력과 보이지 않는 대 타자의 시선에 대한 모사(模寫)로 읽기 가능한 『분례기』는, 서구 근대 이성이 인간 경험의 영 역으로부터 배제하고 은폐했던 ‘광기의 역사’를 재현하면서 ‘인간’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이기 도 하다. (상세한 내용은 「한국문학이 그린 똥의 얼굴(2): ‘분례기’ 재론」, 『사이間SAI』 33호, 국제한국문 학문화학회, 2022. 참조)

100) 권보드래, 앞의 글, 405/406쪽.

101) M. Foucault, Robert Hurley, tr. The History of Sexuality: An Introduction, Penguin Books, 1978. p.89.

이 말은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한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기만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푸코 에 따르면, 17세기 이래 근대 유럽 세계에서 성이 “억압”되었다는 가설―따라서 ‘성 해방’이 정치적 혁명과 연결된다는 따위의―은 하나의 픽션일 뿐이다. ‘성의 억압’이란 실제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 의 성적 과오와 내밀한 욕망을 낱낱이 “고백”할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성 담론의 폭발적인 증가 및 광 범위한 성적 쾌락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또한 성과 과학의 결합을 통해 성적인 모든 것이 촘촘히 파 악·관리되는 19세기 이래, 인간은 개인의 신체와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든 권력의 그물에 포획·순치된 계몽적 ‘주체, 즉 ‘근대인’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결국 왕의 목은 베어지지 않았다. 푸코에 이어 가라 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주체임을 포기하고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주체성을 획득하는” 기독교적 근대 주체, 즉 “전도된 주체”의 ‘고백이라는 제도’가 근대소설의 형식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밝힌다.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1997). 나는 「분지」, 「똥바다」, 그리고 『분례기』의 주체들이 드러내는 ‘순결 강박’에도 역시 전체주의적·도덕적 규율권력을 향한 고백의 장치 가 놓여있고, 그것은 근대 한국 국민국가의 주체 형성 과정에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용했다고 생각한 다. 이 주제는 이 논문에서 다루지 못했다. 다른 기회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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