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 4편 '파시즘'을 욕으로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당신에게 by 혁명읽는사람 -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 4편 '파시즘'을 욕으로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당신에게
한국정치+3노동/인권/사회+14사상/철학/역사+9
혁명읽는사람·독서가
2023/02/05
앞서 우리는 1, 2편을 통해 근대국가에 있어 주권자와 법치 간의 관계, 그리고 주권 적용의 한계로서의 외국과의 관계를 보았다. 그를 통해 윤석열 정부가 얼마나 근대적 정치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3편에서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이 한국 정치에 있어 주권 행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4편에서는 행정부의 수반이 주권자로서 행동하는 것을 어떻게 대중운동이 뒷받침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쓰인 글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명시하고자 한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민주당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출처 : https://m.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301291434001?utm_source=facebook&fbclid=IwAR1SZU9mKVFP0cclOaTofe4nWJ-WLU30MlG81kBWvoqAmQ4KWWMDLmkh_PQ#c2b한국 사회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욕설'로 사용되었다고 단언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흐름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과거 1970~80년대 권위주의 체제나 그 직후의 상황에서 한국의 국가성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상부구조로서의 '신新식민지 파시즘'이라는 개념이 통용되면서 '학술적인 외피'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학술적 외피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때부터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보수우파를 비난하는데 활용되는 '욕설'에 가까웠다. 김대중 정부를 전후로 한 강준만과 임지현의 '부드러운 파시즘', '일상적 파시즘' 등의 파시즘 논쟁이나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파시즘' 등의 여러 파시즘 논쟁이 존재했지만 대체로 민주당 계열의 정권을 '파시즘'이라 규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대신 사용되었던 용어가 '홍위병'이었다. 2000년에 있었던 이문열의 홍위병 발언이나 그에 대한 진중권의 비판이 너무나도 아득한 옛시절의 에피소드 같이 느껴지지만 적어도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한국의 민주당 계열을 파시즘이라 부르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즉, 일반적으로 홍위병이 진보좌파를 비판하는 용어였다면 파시즘은 보수우파를 비판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시기부터 파시즘은 민주당 계열을 비판하는 용어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부터 그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를 비판하는 흐름들은 존재했지만 대체로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어를 활용하여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으며(대표적인 예로 김용태, <문재인의 포퓰리즘>, 다이얼, 2017를 참고하시오.) 이조차도 노무현 정부를 포퓰리즘으로 비판하던 것의 연장에 가까웠다.(노무현 정부를 포퓰리즘으로 해석하는 보수우파의 입장으로는 박효종 외, <노무현과 포퓰리즘 시대>, 기파랑, 2010을 참고)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곧 바뀌어 진중권을 필두로 하는 ‘조국흑서(黑書)’ 팀 외에도 윤평중 등의 여러 논자들이 각각 '연성독재', '빠시즘', '연성파시즘' 등의 조어를 사용하여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파시즘'이라 규정하였다.
이제는 위의 기사에서 보이듯이 민주당측에 속했던 김부겸 전 총리도 제3의 정치세력의 등장을 촉구하며 한국 사회가 "정서적 내전" 상태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곧바로 나치와 파시스트들이 등장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을까? 먼저 배경이 되는 이론사와 개념사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1. 민주화의 제3의 물결과 비교정치학의 발전
대체로 2016년 트럼프 정부의 등장 이래 '포퓰리즘'의 세계화를 두고 많은 논의들이 존재했다. 여기에는 푸틴주의, 중국의 시진핑,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등의 신新권위주의의 등장이라는 세계사적인 맥락이 자리하고 있다. 독재체제와 민주주의 체제 간의 개념적 차이를 정치학이 어떻게 다루며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에 대응했는지를 내가 이해하는 연구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겠다.
1945년 이후의 전후 정치학은, 제1, 2차 세계대전의 사이에 대두한 파시즘을 타도하면서 전후가 성립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정치체제를 영미형의 자유민주주의와 파시즘적 독재를 양축으로 하여 비교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여기서 후자를 '전체주의'로 개념화하는 유구한 전통이 존재했고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의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본인이 끝내 소련을 전체주의에서 제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브레진스키 등의 입장에서 소련을 독일 파시즘과 마찬가지의 전체주의의 한 유형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대 전체주의라는 이분법적이고 양극대립적인 분석틀로 비교정치학이 출발하였다. 냉전적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지향하는 이론적 입장들이 '근대화론' 등과 결합하며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비교정치학의 발달 속에서 영미형, 특히 미국형 양당제적 정치구조가 아닌 다당제적이면서 동시에 안정적인 내각제형 정치구조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독재체제 또한 전체주의 외에도 억압적이지만 전체주의적이지는 않은 형태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전체주의도, 그렇다고 민주주의 체제도 아닌 중간적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체제들을,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체제를 사례로 후안 린츠가 유형화 한 개념이 바로 '권위주의(權威主義, authoritarianism)'였다. 스페인 프랑코 독재 체제에 적용되었던 권위주의 개념은 곧이어 라틴 아메리카 정치체제 일반을 설명하는 분석틀로 확장되며 오도넬, 슈미터, 화이트헤드 등의 비교정치학 연구자들에 의해 '관료적 권위주의' 등의 다양한 개념으로 분화되었다.
이외에도 앞서 언급한 슈미터가 남아프리카, 브라질 등의 사례를 갖고 개념화한 '코포라티즘(corporatism, 組合主義)'도 있다. 이 개념은 본래 후진 저개발 지역의 정치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었는데 '네오 코포라티즘' 등으로 개념분화가 이뤄지며 영미형 자유민주주의 및 유럽형 복지국가 또한 코로라티즘의 한 유형으로 다뤄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비교정치학의 발전 속에서 각 지역의 정치체제에 대한 다양한 이론화가 시도되었다. 이들 중간적 정치체제로서의 권위주의, 코포라티즘 등이 곧바로 영미형의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중심축은 역시나 영미형 자유민주주의 체제였으며, 다양한 정치체제들이 개념화되고 이론화되었음에도 궁극적으로는 민주화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수렴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논의가 이뤄졌다. 이러한 전망은 1991년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절정에 다달았는데 그 대표적인 입장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상훈 역, 한마음사, 1992)였다. 그는 전체주의 체제의 종말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선언하였고 세계의 대세는 민주화라는 점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흐름들을 종합해서 이론화한 것이 바로 새뮤얼 헌팅턴의 <제3의 물결>(강문구 외 역, 인간사랑, 2011)이다. 이 책에 따르면 대체로 19세기 이래의 전 지구적인 민주화 흐름은 크게 3번의 물결을 맞이하였다. 헌팅턴은 논의의 편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정치체제의 가장 강력한 예비 정책결정자 집단이 자유롭게 득표경쟁을 벌이며, 실제로 모든 성인이 투표권을 가지는 정당하며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정치체제라 규정한다.(헌팅턴, 2011 : 28)
이런 의미의 민주주의 체제는 크게 3번에 걸쳐 대규모로 출현했는데 첫 번째 물결은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시발점으로 하는 1828~1926년의 제1의 민주화 물결이었으며, 이때 최대 33개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지속되지 못했으며 곧 1922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파시즘 세력의 '로마 진군'을 시발점으로 하는 역물결을 맞이하게 되었다. 1922~1942년의 제1의 역물결동안 민주주의 체제는 22개나 전복되며 대규모로 몰락하여 최소 11개로까지 줄어들었다.
제2의 민주화 물결은 연합국에 의한 해방과 식민체제의 종언 속에서 나타났으며 1943~1962년까지 새롭게 41개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며 최대 52개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1958년 파키스탄 군부의 쿠데타와 1962년 페루 군부의 쿠데타를 시발점으로 제2의 역물결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1958~1975년 사이에 다시금 22개국을 비(非)민주주의 체제로 이행시키며 민주주의 체제를 30개국으로 축소시켰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62년에 전세계 13개의 정부가 쿠데타의 산물이었으며, 1975년에는 38개로 급증하였다.(헌팅턴, 2011 : 44)
하지만 1974년 포르투갈 군부 쿠데타의 성공으로 포르투갈 독재체제가 종식되는 것을 시발점으로 1990년까지 거듭해서 권위주의 체제가 전복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헌팅턴의 연구서의 제목인 제3의 물결이다. 민주국가는 1990년을 기점으로 59개국으로 증가하였으며 인구 100만명 이하의 국가를 제외한 전체 국가 130개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5.4%가 민주국가에 속했다.(헌팅턴, 2011 : 50) 이후 헌팅턴은 이러한 제3의 물결이 1991년 소련 패망 이후의 상황에서 확장되고 있는지 아니면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 중국공산당의 세력강화 등에 힘입어 3번째 역물결을 맞이하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색깔 혁명들을 고려한다면 민주화의 흐름은 2011년까지는 대체로 확장되어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거의 30년간 확장일로에 있던 세계화는 무역 대비 제조업의 확장이 멈추며 2011년을 기점으로 정체하게 된다.(출처 : https://thedailyshot.com/2021/07/29/the-fomc-begins-to-focus-on-taper/)사실상 2007~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2010년대 이후부터는 러시아의 푸틴주의, 중국의 시진핑주의,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주의 등의 신新권위주의 체제와 2016년 트럼프 정부의 등장 속에서 민주화의 기세가 꺾였다고 보아야 한다. 세계화의 흐름이 멈추는 2011년을 기점으로 2021년까지 10여년 동안 신권위주의 체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며 그를 설명하는 비교정치학의 이론 또한 정교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예시로 '관리 민주주의', '신권위주의' 등의 다양한 개념화가 시도되었으며 과거의 권위주의 체제와 달리 시장경제와 주기적인 선거를 기반으로 하는 유형의 독재체제들을 '비(非)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이들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와 주기적인 선거에 따른 민주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권위주의와 다르다. 오히려 대중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기제들을 적절하게 활용할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업그레이드 된 권위주의 체제라는 의미에서 신新권위주의 체제라 명명될 수 있다. 이들은 푸틴이나 중국공산당이 보여주듯이 대중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그러한 방향에서 벗어나는 개인 혹은 집단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신권위주의 혹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비단 선진자본주의 바깥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트럼프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민주주의 내부로부터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권위주의화와 자유주의의 쇠퇴는 세계사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지난 한국의 제20대 대선에서 '자유주의'가 화두가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런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세계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는 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교정치학은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간의 날카로운 개념적 대립에서 출발했지만 [지록위마] 시리즈 1~3편에서 다루었듯이 오늘날 독재와 민주 간의 경계는 애매해지고 있다. 이렇듯 경계가 애매해지고 정체성이 확고해지지 않기에 '자유주의'라는 정체성에 집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자 "파시즘"이었을까?
2. 분점(分占)정부(divided government)와 단점정부(unified government)의 변증법
민주화 이후의 한국 진보정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저작은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한길사, 1993)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가체제의 문제를 중심에 두는 '민주 대 반反민주'적 구도가 현상을 설명하는 틀로써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고, 그러한 지지가 1987년 민주화의 동력으로 작동하였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상황이다. 이제는 더 이상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로 현실을 분석하고 파악하기 어려워졌기에 다양한 갈등축들을 통합적으로 포괄하여 다룰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장집은 맑스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틀을 가져와서 경제생활을 의미하는 시민사회와 국가 사이에 정당, 시민단체, 정치인 등의 활동영역인 '정치사회'가 출현했음을 알리고 그것을 개념화하여 사회운동과 정당정치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지향하였다.
하지만 이후의 현실의 전개는 최장집이 한탄하듯이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고 정착된 것에 비해 그 내용이 협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치가 '실질적'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지경에 이르렀다.(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0) 이렇게 된 데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존재한다. 바로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의 출현이다.
분점정부란 일반적으로 대통령제 하에서 행정부를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 양원제 혹은 단원제 입법부 가운데 적어도 하나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누리지 못해 서로 다른 정당들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나눠 점하고 있는 상황을 뜻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여소야대(與小野大)’적인 상황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드시 대통령제 하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정당이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분점정부적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같이 집권 여당이 입법부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대립적 관계에 빠져 있는 상황도 넓은 의미에서 분점정부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분점정부가 발생하는 원인은 유권자의 선택, 인식에서부터 비례대표제 등의 제도적 요인까지 대단히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그 원인보다 그것의 효과이다. 일반적으로 분점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대립관계로 인해 상대적으로 단점정부에 비해 비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물론 고전적인 연구라 할 수 있는 메이휴(Mayhew)의 연구를 참고해보면 분점정부가 비효율적일 것이라는 일반의 생각과 달리 단점정부와 분점정부 간의 법안산출 능력의 차이는 미미하다. 그렇지만 이 연구는 통과된 법안의 개수만 분석했을 뿐이지, 그것의 실제적인 과정이나 통과된 법안의 중요성 등은 생략했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정치학자 김용호의 연구(김용호, <한국 정당정치의 이해>, 나남출판, 2003)에 따르면 한국 정당정치는 민주화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을 단점정부(unified government)로, 그 이후를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로 규정할 수 있다. 권위주의 체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 국회의석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여 안정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하였던데 반해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대체로 대통령의 소속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분점정부, 즉 여소야대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김용호의 저작이 2003년에 나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그 시점에서 분점정부적 현상을 필연적인 것으로 고찰하고 이후에도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리라 예측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아래의 표는 문재인 정부까지의 한국 정부의 상태를 표로 작성한 것이다.집권여당을 중심으로 했기에 정의당 등의 제3정당들은 포함되지 않았다.위의 표는 각각의 상태에 대한 기한을 명시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와 같이 집권 초기 2개월 정도의 아주 짧은 기간동안만 분점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까지도 모두 분점정부로 표시하였다. 사실상의 단점정부였다고 인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렇게 본다면 김용호가 책을 낸 2003년 무렵, 즉 노무현 정부를 기점으로 추세가 바뀌는 모습이 나타난다. 권위주의 체제의 단점정부에서 민주화 이후의 분점정부로 이행하던 추세가 다시금 단점정부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상 박근혜 정부의 말기의 정권 붕괴 과정 속에서 나타난 다당제적 상황을 제외한다면 거의 예외 없이 노무현 정부 이래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이 다 '사실상' 단점정부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한국 정당정치의 전개는 "단점정부→분점정부→단점정부"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 자체는 무수히 많을테지만 이 글은 그 주요한 동력으로 '지역주의'의 변화에 대해 논하려 한다. 권위주의 체제의 해체 이후에 치뤄진 4번의 총선(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에서 예외없이 모두 집권여당이 의석수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던 이유는 민주화 이후의 갈등구조가 지역주의를 축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지역주의에 따라 각 지역을 대표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출현할 수밖에 없고 이들 정당 간의 이합집산 속에서 정국운영이 결정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분점정부의 출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분점정부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주의 정당들 간의 '협력'과 '연대'가 필수적이다. 집권여당으로서는 정계의 '인위적인 재편'을 통한 여소야대적 상황을 돌파하려는 유인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3당 합당'이다. 노태우는 제13대 총선 이후 125석(41.8%)의 여소야대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합당을 통해 216석(72.7%)의 민주자유당을 만들어냈다. 이를 통해 김대중의 호남을 포위하는 지역연대가 이뤄졌으며 단점정부의 상태를 구성하여 안정적인 정국운영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협력과 연대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 속에서 언제든지 해소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김영삼 정부 또한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139석(43.5%)밖에 확보하지 못해 여소야대적 상황이 나타나자 곧바로 무소속 의원들을 영입해 157석(52.5%)의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이러한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김용호가 지적하듯이 정당 간의 극한의 대립만을 낳았을뿐 유권자의 광범위한 지지 위에 서있다 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김영삼이 당의 외연확장을 위해 김문수, 이재오 등의 재야세력 및 시민사회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하며 '포퓰리즘'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낳았다.
대체로 지역주의 정당에 기초해 대통령에 의한 인위적인 정계개편과 제세력 간의 이합집산 과정을 거쳐 분점정부 상태를 극복하고 단점정부적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이 노무현 정부 이전까지의 상황이었다면 노무현 정부 집권 이후부터는 이러한 상황이 크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의회 "내부"에서의 이합집산과 연대를 통한 분점정부적 상황의 극복을 시도했던 것이 3김시대였다면, 노무현부터는 노사모를 비롯한 광범위한 '디지털 포퓰리즘'에 기초하여 의회 "외부"에서 대통령과 강하게 결속된 대중집단이 정당의 의원들을 압박하여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하는 한편 선거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출처 : https://www.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301251743001구체적인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현상적으로 보았을 때 노무현 정부 이래 한국 정당정치는 좌우를 막론한 광범위한 대중동원과 그에 기초한 정당의 대통령의 사조직화 현상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분점정부적인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1987~2002년까지는 의회 내부에서 지역주의 정당에 기초한 연대와 협력이 주를 이루었다면, 2002~2023년 현재까지는 의회 외부의 광범위한 대중동원에 기초해 대통령(혹은 정치적 지도자)의 정당의 사당화(私黨化)가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유권자들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불일치 상태를 거부하며 단점정부적 상황을 선호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에게 더 많은 힘을 모아주기 위해 중앙집중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출처 : https://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3/02/03/4G2XH6XXQZCGXDHFMRQMTWOFO4/이러한 단점정부 경향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의 정당 사당화(私黨化) 및 광범위한 대중동원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 간의 정치적 대립은 보다 광범위한 대중동원을 위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단점정부의 구성을 위해서라도 정당은 정치적 지도자에 보다 강하게 충성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 내부의 이견이 나타날 수 있는 여지를 줄이기 위해 보다 강하게 '적(敵)'과 '아군'을 구별해야 했다. 그러한 경향은 당연하게도 정치적 대립을 극단화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만큼 정치적 지도자를 향한 권력의 집중화 경향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앞서 김부겸을 비롯한 진중권, 윤평중 등이 '파시즘화' 경향을 우려하였던 것은 이러한 정치적 대립이 극단화되는 추세를 고려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출처 : https://v.daum.net/v/jNEjmysP7i이러한 추세의 절정이 지난 문재인 정부기의 검찰, 사법부 등의 관료제를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었나 한다. 검찰 및 사법부의 판결이 지닌 어떠한 '편향성'을 문제시하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유시민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했다는 것을 이유로 반발하였던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관료제의 합리성에 대한 공격의 여지를 지닌 것이었다. 또한 문재인과의 경선 과정에서 '혜경궁 김씨 의혹' 등의 다양한 문제를 드러내며 친문 세력의 비토를 받았던 이재명이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확고한 대선후보이자 지도자로 별다른 반발 없이 안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정치적 대립의 조성과 그에 따른 정치지도자로의 권력 집중 현상이 얼마나 순조롭게 이뤄지는지를 알 수 있다.
3.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현상을 '파시즘'이라 해야 하는가? 대체로 이런 주장들을 하는 이들은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과도한 충성경쟁 및 광범위한 대중동원이라는 현상에 주목하여 대중운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리에 기초해 있다. 대체로 논리적 기반들은 허약하기 그지없는데 대표적으로 진중권을 보자면 그의 민주당에 대한 비판을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대단히 단순하다.출처 : https://www.asiae.co.kr/article/2020112217202063633과거 진중권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파시즘 미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북조선의 주체사상과 조갑제, 일본 천황제 파시즘 등의 전체주의이 동일한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중권의 민주당 비판은 NL 주체사상파(운동권)=조갑제=일본 천황제 파시즘=파시즘=전체주의 등의 논리적 연쇄에 기초해 있다. 그가 주장하듯이 문재인의 민주당이 노무현의 민주당과 달리 자유주의적 정당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파시즘 정당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NL 주사파의 문화에 잠식되어 있어야 한다. 민주당=NL운동권=조갑제=일본 천황제 파시즘=파시즘=전체주의... 등의 논리적 등가가 성립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정말로 NL 운동권의 문화에 잠식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대중동원의 의미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다. 본인이 참여했던 광우병 촛불집회는 새로운 놀이문화에 기초한 대중참여의 형태이지만, 민주당이 주도한 서초동 촛불집회는 NL 운동권 문화의 잔재이자 파시즘이다.출처 : https://mnews.imaeil.com/page/view/2021111209514109188마찬가지로 진중권과 함께 '조국흑서' 팀에 참여한 권경애 또한 문재인 정부의 광범위한 대중동원을 파시즘으로 규정한다. <무법의 시간>이라는 저작에서 그녀는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손명희 외 역, 교양인, 2005)을 인용하여 문재인 정부가 파시즘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어떤 "파시즘" 정권이 선거에서 패했다고 순순히 정권을 내놓고 물러나서 정권교체한 정부로부터 각종 수사를 당하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럼 파시즘은 대체 무엇이며 앞서 우리가 다룬 내용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앞서 우리가 헌팅턴의 민주화 물결론을 인용하여 살펴보았듯이 파시즘 현상은 제1차 민주화 역물결에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파시즘은 제1차 민주화 물결 이후에 그것에 기초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광범위한 대중동원과 그것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 정치에 의거하고 있다. 하지만 광범위한 대중동원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경쟁 자체가 파시즘일 수는 없다. 대중운동 자체로부터 파시즘을 이끌어내는 관점이 문제적인 이유는 그러한 관점이 결국에는 대중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급진좌파에서 시작한 진중권이 점차로 사회민주주의로, 자유주의로, 보수로 이동하게 된 것은 대중과 지식인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그의 인식 때문이 아닐까.
팩스턴이 자신의 저작 <파시즘>에서 파시즘의 '특질'로 꼽았던 것은 '표준국가' 대 '특권국가' 간의 대립으로, 마르틴 브로샤트에게는 "다중多重"지배(Polykratie)라 불렀던 것이다. 여기서의 다중지배란 국가와 사회 간의 엄격한 구별을 전제로 성립하는 근대사회의 원칙을 깨고 당, 국가, 사회가 일치되는 당=국가=사회적 관계의 형성과정 속에서 사회를 국가 "내부"로 흡수하는 바람(그리고 그 국가는 당에게 흡수된다)에 사회적 갈등이 국가 내부에서 재현되며 국가의 통일성이 무너져 나타나는 지배 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현은 '표준국가'와 '특권국가' 간의 대립 속에서 나타난다.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 및 기존의 관료조직으로 구성된 '표준국가'와 당의 ‘동형 기구(Parallel Structures)’로 구성된 '특권 국가'라는 이중적 구조가 파시즘의 특질인 것이다.
팩스턴이 말하는 특권국가는 에른스트 프랭켈의 입론으로부터 빌려온 것이지만, 그 실질적 내용은 마르틴 브로샤트의 <히틀러국가>(김학이 역, 문학과지성사, 2011)로부터 가져온 것 같다. 파시즘 연구사를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이들이 이중국가, 다중지배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현상은 당 내부의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기반을 갖게 된 나치당 지도자들이 국가 내부로까지 그 권력을 확장시키면서 공권력을 일종의 사유화한 사례들이었다. 이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자력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이었기에 히틀러조차도 이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고, 나치당 중앙당의 명령조차도 곧잘 무시되었다. 봉건영주들과도 같은 이들 나치 영수들은 단순히 지방에 독자적 기반을 가진 것에서 끝난 게 아니라 히믈러, 괴링 등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예 새로운 국가기구를 만들어 기존의 국가기구들의 기능을 강탈해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여기에 더해 기존의, 나치즘 집권 이전에 자율적인 기반을 가진 노동조합 등의 다양한 사회적 단체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 나치당의 명령이 먹히지 않는 사회의 자율적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토록 복잡하고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영역들이 사회 내에 다양하게 있었기에 이들을 묶어줄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히틀러의 카리스마가 국가를 유지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고 그래서 브로샤트가 굳이 나치 국가를 "히틀러국가"라 명명했던 것이다. 소련국가사회주의를 '스탈린 국가'라 부르지 않는 것과 달리 말이다.
브로샤트가 지적하듯이 바로 여기에 파시즘 국가가 지니는 놀라울 정도의 역동성의 비밀이 있다. 자신의 자율적 영역에 대한 인정을 총통, 두체 등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로부터 받을 수만 있다면 그 내부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그런 무제한적인 허용이 기존의 표준국가 하에서 이뤄지지 못했던 온갖 규제, 제한 등의 철폐로 이어지면서 놀라울 정도의 효율성과 성과를 보여주게 된다. 항시적 대중동원과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 속에서 누구나 그것이 허용만 된다면, 자신이 꿈꿔왔던 모든 것을 무제한적인 자원활용을 통해 이뤄낼 수 있는 꿈의 나라가 바로 파시즘 국가였다. 이것이 파시즘 국가의 매력으로 작용해 다시금 더 큰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로 이어지며 표준국가의 해체, 근대국가의 완전한 해체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이 국가의 해체를 추동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파시즘이란 사실상 국가의 해체 과정을 "대중이 추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파시즘 연구사는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해서 특정한 한 연구의 입장만이 배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팩스턴과 브로샤트는 대중운동과 국가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편에 속하지만, 반대로 홀로코스트 현상을 다룬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 2>(김학이 역, 개마고원, 2008)은 '표준국가'의 관료제 자체가 어떻게 급진화하여 대규모 학살을 실행하게 되었는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파시즘 현상을 표준국가의 '해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더 체계화되고, 더 중앙집권화된 '파괴기계'로서의 근대국가는 근대적 시민 개개인을 그것의 부품으로 활용하며 급진화하였다. 유대인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가 없었다보니 우리와 상극인 '타자'로서의 유대인이 제시되자 유대인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모든 독일 시민들이 파괴기계의 부품이 되어 급진화하는, 자가동력의 학살기계로 변모되었다는 것이다. 이 파괴기계를 지휘하는 곳이 바로 '표준국가'의 '관료제'였다. 언뜻 카오스처럼 보이는 히틀러 국가는 힐베르크에 의하면 사실 관료제에 의해 '체계화된 카오스'였으며, 독일의 공무원들은 누가 유대인인이 규정하고 분류해 수용소로 보내어 학살했다. 이런 점에서 파시즘을 근대국가의 해체로, 관료제의 붕괴로 보는 팩스턴의 입장에는 반론의 여지가 많지만 힐베르크 또한 히틀러 국가가 '무無정부적'이라 보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팩스턴의 이해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이러한 브로샤트와 팩스턴의 파시즘 이해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일본의 서양사 연구자 시바타 미치오(柴田三千雄)의 연구(시바따 미치오, <근대세계와 민중운동>, 이광주 외 역, 한벗, 1984)에 따르면 근대국가의 성립 과정에 있어 그 시초가 되는 국가형태는 '사단국가(社團國家)'이기 때문이다. 파시즘 국가는 그 자체로 '사단국가'로의 복귀처럼 보이기에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시바타에 따르면 '사단社團'이란 일종의 사회편제(編制)의 원리이다. 행정, 사법, 조세상의 '특권'을 국왕으로부터 인가받고 그 범위 내에서 '특권=자유'를 보장받는 '법인격'을 의미한다. 절대주의 왕정의 국왕은 이런 사단을 매개로 하여 인민들을 편제하고 그에 따라 지배하였다. 사실 이미 봉건제 하에서 형성된 특권적 공동체들, 예컨대 길드공동체, 에 자유=특권을 보증해주는 대신 국왕과 국가의 권위를 인정시키는 방식으로 국민경제권 형성과 국가가 포괄하는 영역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편제 방식은 그 내부에 일원적인 질서만을 지니지 않고 대단히 복잡한 형태로 조직된다. 이러한 복수의 특권적 집단인 사단들을 대(大)영주로서의 국왕이 묶어내어 일정한 질서를 부여한 게 '절대주의 왕정'이다.
사단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와중에 점차로 좀더 강한 결속의 필요를 느끼게 되며 점차로 사단의 원리로는 투쟁에 드는 비용 등을 감당하지 못해 사회를 통합할 수 없게 된다. 보다 강력한 관료제를 형성하여 사단이라는 특권집단을 해소하고 개개인을 동원하고 통제함으로써 국가적 역량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국가체제가 변모하기 시작한다. 시바타에 따르면 사단국가에서 출발한 근대국가는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지닌 '명망가 국가'를 거쳐 '국민국가'로 귀결되게 된다. 근대적 국민국가는 사단국가를 전제로 하여 복수의 특권집단들을 내파하며 중앙집권적 관료제로 힘을 집중시키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팩스턴, 브로샤트 등의 연구에 따르면 대중이 국가 해체 과정을 추동하는 '파시즘'은 점차로 근대국가의 관료제적 통일성을 해체시키고 팩스턴이 "작은 총통과 두체들을 수없이 양산"한다고 표현한 파시즘의 다중지배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는 근대국가를 다시금 복수의 특권적 '사단(社團)'의 연합으로 바꿔놓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다시 말해서 근대국가란 사단국가에서 출발하여 파시즘화 하여 다시금 사단국가의 형태로 '해소'되는 것이다.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단국가가, 그것의 해체 과정에서 다시금 출현한다는 점에서 "역사가 두 번 반복된다"는 헤겔의 말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미 파시즘을 '대중이 국가 해체를 추동'하는 방식으로 규정한 시점에서 노무현 이래 윤석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행정부 수반 및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광범위한 대중동원은 파시즘이라 보기 어렵다. 기본적인 방향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국가적 통일성이 대중동원 속에서 해체되는 방향이라면 한국의 단점정부 형성을 위한 대중동원은 권력의 집중이라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반대의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대중운동을 단지 대중운동이라는 이유로 동일하다 할 수 있는가? 그러기는 어렵다. 더 문제는 팩스턴의 파시즘론 자체에 있다.
근대국가를 해체시키는 대중운동으로서의 파시즘화 과정을 팩스턴은 5단계로 나눠서 제시하지만 실상 그의 논지에서는 2단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팩스턴에 따르면 "분노를 자양분으로 좌파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공격"하는 파시즘의 1단계는 사실 어느 민주주의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카를 슈미트를 굳이 끌고 오지 않더라도 정치에서 적과 아군을 상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그러한 적대의 설정에 따라 분노 등의 여러 감정적 반응들이 나타나고 결집하게 되는 건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흔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1단계 탄생에서 출발해 2단계 뿌리내리기, 3단계 권력의 장악, 4단계 권력의 행사, 그리고 마지막 5단계 급진화 혹은 정상화 단계를 거친다. 장황하게 1~5단게로 나눠 설명했지만 사실 1단계에서 4단계까지는 여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권과정과 집권 이후의 정책 실행 과정이다.
문제는 5단계이다. 팩스턴의 입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이기도 한데, 팩스턴은 기본적으로 파시즘을 국가해체를 대중이 추동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근대국가 자체가 '표준국가'와 '특권국가'라는 이중국가적 상황에 놓이게 되며,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뒷받침하는 당 조직들이 특권국가의 표준국가에 대한 침해를 정당화하고 추동함으로써 점차 이중국가적 상황이 극단을 향해 치닫게 된다. 나치즘은 이런 파시즘적 상황의 극단에까지 다다른, 그러니까 5단계에서 급진화를 택해 그 너머의 '자멸'에 이르는 과정에까지 도달한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사례이다. 나치즘조차도 그 너머, 그 다음 단계인 파시즘 체제 하에서의 후계자의 권력 승계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만약 5단계에서 급진화가 아니라 정상화를 택한다면, 다시 말해서 지도자가 혹은 집단적 정치세력이 이중국가적 상황에서 특권국가적 요소들을 제압해 점차로 표준국가가 제기능을 행할 수 있게 한다면 파시즘은 소멸하게 된다. 팩스턴은 스페인 프랑코 권위주의 체제를 그 한 사례로 든다. 프랑코는 권력의 집권 이후에 정권의 안정을 바랐기 때문에 파시즘화 할 수 있는 당 내부의 인사들을 숙청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봉쇄하여 권위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정상화' 하였다. 이런 이유로 팩스턴은 프랑코 권위주의 체제는 파시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든다. 1~4단계가 일반적으로 정권을 장악해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면 5단계 급진화로의 이행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정권이 파시즘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 것일까? 팩스턴은 파시즘의 1단계 자체가 어느 민주주의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가 보기에 정말로 핵심이 되는 것은 5단계에서 급진화를 택해 표준국가가 완전히 후퇴해 특권국가가 표준국가를 압도하는 것을 넘어 아예 대체해 통제불능의 폭주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팩스턴이 조잡하게 1~5단계로 나눈 단계론은 사실상 5단계 이전과 이후라는 두 단계로 나눠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파시즘"이라는 "규정"은 4단계의 상황에서 급진화를 택해서 통제불능의 국가해체 상황, 자멸(나치즘의 경우에는 민족공동체의 소멸을 택할 정도의 자멸)에 이를 정도가 되어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쉽게 말해서 무엇이 파시즘인지 우리는 언제나 '사후적'으로밖에 알 수가 없다.
'사후적'으로밖에 알 수 없기에 팩스턴의 파시즘론에 따른다면 우리는 지금의 정치적 대립이 아무리 심해지더라도 그것을 파시즘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오직 5단계에서 급진화를 택한 다음에야 그것이 파시즘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지식인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대중들을 향해 '욕설'하는 용도로만 사용되게 된다. '문빠', '개딸' 등의 강성 지지층들은 오히려 우리가 앞서 보았던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고 볼 여지가 있지, 그것을 '파시즘'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김어준 등의 '스피커'들이 대중들을 선동하여 특정한 방향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노력하고 이에 반대하는 집단들에게 사적인 린치(과연 이것이 '린치'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히틀러 등의 파시즘 집단이 했던 '테러'와 '개딸'들의 문자폭탄이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될 수 있는가? 하다못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을 동원한 행태는 '국가폭력'의 범주에라도 속한다)를 유도하는 것은 분명 '비자유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한국의 근대정치를 설명하는 전제주의(專制主義)?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 정부를 비롯한 한국의 '대중동원형 민주주의'가 푸틴주의나 시진핑주의와 같이 국가 폭력을 특정한 권력자의 이해를 위해 동원하는 방식의 신新권위주의 체제와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서 노무현 이후의 한국의 정치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도, 신新권위주의와도, 파시즘과도 모두 결을 달리한다. 오히려 이러한 현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행정부 수반을 지지하며 그의 권력행사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국가 권력의 무제한적인 확장을 의미한다. 정치적 반대파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를 비롯한 행정부 수반의 권력행사를 견제하고 통제할 여러 사회적 기제, 여기에는 관료제의 합리성도 포함되는데, 가 존재하는 상황을 대중들이 용인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야말로 민주화 이후의 한국 정치의 특질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적극적인 사회 개입을 대중이 추동하여 시민사회의 자율적이고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영역을 줄여나간다는 점에서 분명 부정적인 현상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이러한 한국 정치의 특질을 국가와 개인 사이의 중간적 영역을 축소시키려 한다는 의미에서 전제주의(專制主義)라 명명하고자 한다.
일찍이 헤겔이 <역사철학강의>(김종호 역, 삼성출판사, 1992)에서 아시아 사회에서는 오로지 전제군주만 자유롭다고 했을 때 아시아의 여러 학자들은 하나같이 아시아적 전제군주는 유교적 윤리든 뭐든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견제받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헤겔이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헤겔의 말처럼 전제군주는 "혼자"만 자유롭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전제군주에 의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사, 한국사 등의 연구자들은 전제군주에 대한 견제가 근대의회 못지 않게 강력했다, 권력남용이 어려웠다, 전제적인 지배가 이뤄지지 않았다 등의 주장을 하지만 헤겔은 그것 자체가 부자유의 상태, 노예의 평등, 노예의 자유라고 보았다. 헤겔을 비판하며 아시아 연구자들이 말한 전제군주에 대한 규제는 유럽에서 나타난 근대사회처럼 국가와 개인의 자유가 일치되지를 못하기 때문에 온갖 도덕적, 제도적 규제를 통해 국가(=전제군주)를 제한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군주 아래 노예들의 평등을 누리면서 저 전제군주만 견제하면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반대로 전제군주 하나만 자유로운, 만인이 노예적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대정치에서의 전제주의 또한 행정부의 수반에게 매여 있다는 점에서 비판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째서 행정부 수반 하나만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는가? 왜 그 행정부 수반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정치에 열광적으로 달려들 수밖에 없는가? 매일매일 대통령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헤겔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할지도 모른다.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묘사하는 가지타니 가이와 다카구치 고타의 "행복한 감시국가"라는 형용모순의 표현이 지닌 특질은 한국의 전제주의에도 해당되지 않을까.(가지타니 가이, 다카구치 고타, <행복한 감시국가 중국>, 박성민 역, 눌와, 2021) "개딸"과 "尹心 감별"이 횡행하는 "행복한 전제주의" 사회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노무현 이래 좌우 진영의 광범위한 대중동원과 그에 기초한 정치적 지도자로의 권력집중 및 정당의 사당화 현상은 입법부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시민사회를 대중동원의 장으로만 활용하며 행정부로의 권력 집중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분명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파시즘 혹은 독재체제라 부르기 어렵다는데에 한국 정치의 특질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제3의 정치세력이 출현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우리는 지금 파시즘을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니다. 대중운동이 국가해체를 추동하는 방식의 파시즘은 한국 사회에서는 나타난 적도 없거니와 현재로서는 나타날 가능성도 낮다. 극한의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직접적인 폭력으로 분출될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정말로 문제적인 지점은 우리가 행정부의 수반을 점차 '전제군주'로 바꿔가고 있으며, 대중운동이 자발적으로 그것을 용인하고 오히려 더 강하게 추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에 국가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이 다수 분포해야 한다. 정당조직 또한 그러한 시민사회의 한 유형이다. 대통령이 정당의 지도자로서 정당을 사당화하는 경향부터 끊어내지 못한다면 한국 정치는 점점 더 전제군주의 지배로 변질되어 갈 것이다. 파시즘을 욕설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정치적 구조 속에서, 마치 유대인이 학살될 때 그들과 운명을 공유하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던 파블로 피카소나 극복을 썼던 장 폴 사르트르처럼 '자아 몰두'에 탐닉하며 파괴기계에 협력하는 '부역자'가 될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파시즘'이라는 말을 욕설로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당신께 이 글을 바친다.
"나는 말했노라. 그리하여 내 영혼을 구했노라 Dixi et salvavi animam meam."(카를 마르크스, <프롤레타리아당 강령>, 편집부 역, 소나무, 1989)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