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사회적 아노미, 개인의 자유 - 대학지성 In&Out
능력주의, 사회적 아노미, 개인의 자유
고현석 기자
승인 2023.02.18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37강_ 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의 「능력주의, 사회적 아노미, 개인의 자유」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기획됐다.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자유 개념과 자유주의가 어떤 식으로 수용되고 진화해왔는지 검토해보는 다섯 번째 섹션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제37강 신광영 명예교수(중앙대 사회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능력주의, 사회적 아노미, 개인의 자유
신광영 교수는 “오늘날 분배와 관련하여 한국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서 공유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은 한마디로 ‘분절 능력주의(segmented meritocracy)’라고” 하며 이때 분절 능력주의란 “능력주의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때로 서로 모순적이고 갈등적인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야기한다. 그 결과로는 “사회적으로 분배를 둘러싼 공유된 규범이 없는 사회적 아노미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분절 능력주의가 승자독식 논리와 결합되면서, 극단적인 부의 집중과 불평등이 만들어지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위해 “먼저 능력주의에서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핀 다음 “한국 사회에서 등장한 네 가지 능력주의 담론(성과 능력주의, 시험 능력주의, 가족 능력주의, 신자유주의 능력주의)을 분석”하고 이 같은 “능력주의 담론이 놓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불평등”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이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다양한 제약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다룬다. 유사한 맥락에서 “영유아, 아동과 청소년과 성인은 결코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체들이 아니고, 사회 제도와 가족 배경에 영향을 크게 받는 사회적 인간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결론적으로 현재의 능력주의 담론에서는 “능력 형성의 불평등과 능력에 대한 과도한 보상의 격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능력에 대한 강조가 사회 통합과 사회 정의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과 보상의 균형이 필요함”을 말한다.
지난 1월 28일, 신광영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3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문제 제기
2020년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으로 진입하여, 저개발국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노인 자살율과 노인 빈곤율은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 격차와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최고 수준으로 의아스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분배와 관련하여 한국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서 공유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분절 능력주의(segmented meritocracy)”라고 말할 수 있다. 분절 능력주의는 능력주의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때로 서로 모순적이고 갈등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분배를 둘러싼 공유된 규범이 없는 사회적 아노미가 형성되었다. 더 나아가 분절 능력주의가 승자독식 논리와 결합되면서, 극단적인 부의 집중과 불평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분절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정당화/비판과 사회정치적 지지/반대의 동원의 기제로 활용되면서 사회정치적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능력을 중심으로 사회 조직과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집합적 심성이자 제도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능력주의와 제도로서의 능력주의가 맞물리게 될 때, 능력주의는 견고한 사회 조직 원리로 작동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다양한 계기로 부각되었고, 그에 따라 능력주의의 내용도 변화하면서 제도도 변화하고 있다.
2. 능력이란 무엇인가?
능력주의에서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능력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능력이다. 시장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은 시장 가치가 있거나 혹은 시장 가치와 연관된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돈과 관계가 되는 능력이다. 시장 가치는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다. 수요가 많지만, 공급이 적은 능력은 시장 가치가 높은 능력이 된다. 시장 가치 자체가 시장화의 정도에 따라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은 또한 역사적으로 크게 변해왔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인정하는 능력은 대체로 교육과 관련이 있다. 19세기 이후에 발전된 근대 교육 제도는 자본주의 시장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화해왔다. 교육이 시장에서 가치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증진시키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임금이 주어졌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교육을 받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여, 다시 높은 임금으로 회수되는 것이다.
능력의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는 학점이나 시험 성적이다. 그렇다면, 능력을 평가하는 데 핵심 요소로 간주되는 학점이나 시험 성적은 무엇에 영향을 받는가? 능력이 개인이 지니고 있는 인지 능력이나 사회성이라면, 이는 주로 업무 수행과 관련된 역량이나 능력으로 인식된다. meritocracy 용어를 가장 처음으로 사용한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 1958)은 능력을 두 가지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하나는 IQ이다.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노력이라고 보았다.
능력이 보상의 기준이 되고, 불평등의 원인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인정되는 능력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존재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인정되는 능력은 두 가지이다. 하나가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시험이다.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작동하지만, 서로 다른 독립적인 차원을 구성한다.
3. 능력주의 담론의 다양성
능력주의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사회시스템과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그 의미와 기능이 변화해왔다. 능력의 의미와 능력에 따른 보상 체계가 사회 체제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주로 경제적 차원의 이슈로 출신 배경과 무관하게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노력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사회 제도가 운영되어야 하고, 희소한 경제적 자원이 배분되는 것이 공정하다는 규범적인 가치관을 동반한다.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등장한 능력과 능력주의에 관한 사회정치적 담론에 의해서 보다 능력에 관한 구체적인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누가 어떠한 상황에서 능력주의를 언급하고, 능력주의 담론을 만들어냈느냐에 따라서 능력주의의 의미와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한국에서 등장한 능력주의 담론은 한국의 2010년대 한국의 정치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것은 성과 능력주의, 시험 능력주의,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로 구분된다.
성과 능력주의
성과 능력주의는 업무의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하고 보상이 이루어지는 능력주의이다. 그러므로 성과 능력주의는 나이가 많거나 학력이 높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능력이 많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성과나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부를 축적했거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이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부는 남들과 다른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성과 능력주의는 개인들의 심성에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불평등 체제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경제 엘리트가 자신들의 성공을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경제 엘리트의 성공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과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과 능력주의에서 능력은 주로 경쟁을 통해서 우월한 지위에 오른 승자와 동시에 그러한 지위에 오르지 못한 패자가 동시에 인정하는 분배의 원리로 받아들일 때, 대단히 강력한 분배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성과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바로 낙오자가 실패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회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나타나지 않고, 투기적인 금융 시장이 다수의 실패자를 양산하면서도 지속된다.
시험 능력주의
한국 사회에서 시험 능력주의는 시험이 능력을 평가하는 공정한 수단이고, 시험 점수가 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라고 믿는 심성이다. 시험이 “필요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가 여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고, 시험이 절차적 공정성과 객관성을 보장하는 절대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에서는 어린 나이부터 시험을 통해서 능력을 평가받고, 생애 과정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시험을 치르면서 시험 능력주의가 한국인의 심성으로 내면화되었다. 여기에서 능력 평가는 일과 관련된 업무 수행 능력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학교나 학원에서 학습을 통해서 습득된 지식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이다. 시험이 절차적 하자가 없이 치러지면, 그 시험 결과로 입학, 취업, 승진 등이 결정되고, 그에 따른 지위와 보상의 차이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시험 능력주의는 그 자체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많은 한국인의 심리와 정서의 심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족 능력주의
가족 능력주의는 능력주의의 단위를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간주하는 경우이다. 가족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부모의 능력이 상속을 통해서 자녀의 능력으로 이전된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오래된 대재벌들의 경우, 창업자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일구어놓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하여, 창업자 2세들은 자신의 개인 능력과 관계없이 경제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된다. 아버지 능력의 산물이 상속을 통해서 자녀들의 산물로 세대를 넘어서 공유하게 되는 것은 암묵적으로 능력주의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것은 상속을 통해서 부모의 재산과 특권이 자녀에게로 이전되는 상속제도 근저에 놓인 원리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는 능력에 대한 보상과 관련하여 능력 경쟁을 통해서 승리한 사람에게 보상을 집중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승자독식의 보상 체계를 들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긴 승자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는 것이 경쟁을 강화시켜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인센티브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는 프로 스포츠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유럽 최상위 프로 축구 리그에 소속되어 있는 소수의 축구 스타들은 보통 월급쟁이가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다. 소득이 소수의 축구 선수들에게 집중되며, 하위 리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선수들은 생계비 마련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프로 축구 시장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요소들은 다른 스포츠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미식축구, 골프, 승마 등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시장화가 이루어지면서, 프로 축구에서 나타난 시장 규범들이 모방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이제 스포츠를 넘어서 엔터테인먼트, 경제계, 학계와 문화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회적 아노미
자본가라고 불리는 최상층 부유층은 능력주의에서 비껴 있다. 능력 경쟁은 고용된 축구 선수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구단주들은 전혀 다른 세계 사람들이다. 다른 세계에서는 가족 능력주의가 작동한다. 특정한 능력이나 재능이 없어도 소유주의 가족이라는 근거로 배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누린다. 창업주는 기업가 정신이나 혁신을 통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자녀 세대는 부모를 잘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부와 권력을 누린다. 자산이나 자본은 다른 모든 능력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초능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능력주의가 기회와 보상의 차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능력 자체가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능력은 개인의 노력과 관계없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의 영향으로 IQ가 높거나,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상속을 많이 받은 자녀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노력과 관계없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 보상이 능력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상속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한다.
4. 보이지 않는 불평등 - 사회적 제약, 제도와 개인의 자유
능력주의는 능력이 개인의 능력이고, 개인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전제한다. 이때 개인의 선택은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고, 이러한 선택의 결과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개인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모든 개인은 전체 생애 과정에 걸쳐서 가족의 영향을 받고, 사회와 시대의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환경은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요소로 기능하는 동시에, 어려움과 제약을 가한다. 개인은 가족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가족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사회 구조 속에서 가족과 개인의 위치가 틀 지워진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서 중산층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최근 많은 연구들은 영유아 발달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가정환경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학교 이전의 가정환경 요소가 부모와 자녀의 정서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건강과 인지 발달에도 영향을 미쳐서 학업 성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성인기 건강과 사회경제적 지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동의 자아 정체성과 미래 희망이 부모의 학력, 부모와 자녀의 정서적인 친밀성, 부모의 관심 정도, 가족 문화 등에서 영향을 받아서, 부모의 사회 계층에 따라 아동의 장래 희망에서 격차가 나타난다.
영유아와 청소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가족 배경과 불평등 체제 내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생애 과정에서 계속 여러 가지 가능성과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자녀의 보육과 교육 환경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는 자녀의 생애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영유아 시기의 이점이나 불이익이 시간이 흐를수록 누적되어 커지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사회경제적인 격차와 문화적인 이질성은 더욱 확대된다. 상대적인 유리함과 불리함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며, 초기의 유리함이나 불리함이 다음 단계에서 유리함이나 불리함으로 이어지면서, 전 생애 과정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누적된 유리함이 공고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것으로 적어도 4반세기 이상의 불평등 체제 변화의 결과물이다.
신생아는 불평등 체제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 본인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바꿀 수도 없다. 특권을 누리는 가정에서 태어나거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기의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 아기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질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부모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지불 능력이 중요한 사교육 중심의 교육 제도와 환경 속에서 영유아와 청소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영유아 시기부터 대졸 청년에 이르기까지 가족 배경이 생활 기회의 격차를 체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피케티가 밝혀낸 세습 자본주의가 서구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한국에서도 뚜렷하게 자리를 잡았음을 보여준다.
5. 맺음말
능력에 따른 보상의 원칙을 능력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면, 능력주의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크고 작은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과실을 독차지하는 승자독식의 현실을 옹호한다. 기회의 평등과 관련하여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보상의 불평등과 관련하여 능력주의를 성찰하지 않으면, 능력주의는 쉽게 기존의 불평등과 위계적인 질서를 옹호하는 담론이 된다.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는 엘리트들에게 우월감과 오만을 낳는 동시에, 경쟁에서 뒤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심성을 낳는다. 그리고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열등감과 패배감을 갖는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연대 의식을 만들어 사회를 통합시키기보다는 집단을 나누고, 균열과 대립을 낳는다는 점에서 마이클 영이 우려했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로서의 능력주의”라는 명제는 오히려 오늘날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능력이 강조가 되고, 능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회 발전에 있어서 중요하다.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강화시키거나 지속시키지 않고, 희소한 자원의 정의로운 분배원리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이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영유아와 아동은 부모를 택할 자유가 없다. 자유로운 개인을 강조하지만, 현실의 아동은 다양한 제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선택할 자유가 없다. 생애 초기 단계인 영유아 시기에 인생의 길이 결정되는 사회라면, 개인의 자유에 바탕을 둔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부모의 배경이 영유아 자녀에게 세습되는 세습 자본주의 사회이다. 진정으로 개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기회의 평등과 적절한 보상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태어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살아 있는 사람은 자살로 줄어드는 그로테스크한 사회이다. 이러한 현실의 근저에 한국식 능력주의가 있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능력주의, 사회적 아노미, 개인의 자유 (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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