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7

조선족 - 위키백과 나무위키

조선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Picto infobox character.png
조선족
朝鲜族
조선족 주거 형태 실내.png
총인구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2,489,076
언어
한국어중국어
종교
대승불교기독교
민족계통
한민족

조선족(朝鮮族)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한민족이다. 중국에서 법적으로 소수민족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의 인구는 한족을 제외한 소수 민족 가운데 13번째로 많으며, 주로 옛 만주 지역인 중국 둥베이(東北, 동북) 3성(省)에 살고 있다. 다만, 서서히 그 인구가 중국 내의 각지로 분산되고 있는데 이는 조선족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 발전에 따라 취업 등을 이유로 베이징과 상하이칭다오 등과 같은 대도시로 이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0년대부터 조선족들은 중국인들과 혼혈이 되기 시작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증조부 부계나 모계 한쪽이 한족(漢族)이여도 호적에 조선인으로 등록할 수 있어 조선족들은 중국인 혼혈 또한 적지 않다.

역사

만주에 대량 이주

병자호란 때 조선 북부의 조선인들이 만주족들에 의해 강제로 싸잡혀 끌려가 만주(간도, 심양, 연변, 조선 북부 국경 근처)에 살게 됐는데 가난한 노비들로서 자유인이 될 납입금을 내지 못해 수 많은 자들이 그 곳에 남겨졌다. 1869년에는 한반도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자 굶주림을 피해 조선 북부 하층민 출신의 조선인들이 간도로 건너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자주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북간도라고 불렀으며 압록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서간도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으로 유입하는 현상은 1885년 청나라 정부가 만주 이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크게 증가하게 된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26만 명으로 추정된다. 1910년부터는 일제에 의해 수 많은 가난한 조선인들이 위안부,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가 동북3성에 강제로 거주하게 되면서 현재까지 조선족으로 남겨졌다. 그래서 현재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중에는 동북3성의 연변,창바이가 고향인 조선족 출신자들이 많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간도를 포함한 중국 동북부 지역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1932년에는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자 일본은 만주와 조선 북부에 사는 가난한 조선족들을 강제징용을 시켰다. 일본이 청나라를 침략해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개척운동’이라는 정책으로 조선인 출신 군인과 사업가, 지주, 학교 교장, 교사 등을 만주로 이주시켰는데 이들은 조선의 평양과 경성 등에 자본과 가족들이 존재하였고 자주 이동을 하였으며 전쟁이 끝나고 돌아갔기 때문에 조선족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이후에 만주(동북3성)에 살던 조선인의 수는 1945년에 216만 명까지 급증하였다. 이 시기에는 간도 지역 뿐 아니라 만주 전역에 다양한 직업의 조선인이 흩어졌으며 만주국 내에 거주하던 조선인 인구가 3백만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한국 독립 이후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하자 만주에 살던 조선인 216만 명 중 약 절반인 100만 여명이 조선으로 귀국하였지만 귀국할 방법이 없던 116만명은 중국에 남겨져 조선족이 되었다. 귀국한 이들은 대부분이 지원세력이 있던 독립운동가와 31년 만주 개척으로 파견된 조선인들로 한반도로의 귀국이 가능하였다. 69년부터 가난을 피해 이주한 조선족들과 1910년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으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족들은 먼 조선에 귀국할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선택하였다. 중국은 중국에 남은 조선죽들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규정하고, ‘조선족’(朝鮮族)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일본 패망으로 중국이 해방되고 나서 벌어진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 출신자들은 중국 국민당을 배격하고, 토지개혁을 지지하는 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을 도와서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조선의용대 출신자들로 인해 조선족들은 중국인민해방군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서, 초기에는 중국 인민으로서 대우를 받는 소수민족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 대혁명 당시 현재도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은 연변에 건너와 살면서 민족 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수많은 조선족 희생자들을 만들었다. 특히 마오위안신은 홍색조반혁명위원회와 8·27 홍색반란단, 홍기전투연군, 노동자혁명위원회라는 홍위병 단체들을 조직하여 조선족을 탄압하였고, 당시 강간당하거나 살해된 조선족 인명피해자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1] 몇몇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1910년부터 만주(동북3성)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지원세력과 영향력이 있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귀국하거나 6.25 발생 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귀국하였다. 하지만 중국에 남겨져버린 조선족들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둘다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해 귀국이 불가능하였다. 또한 조선족들은 굶주림을 피하거나 노비 제도의 고통에 의해 동북3성으로 이주했다가 귀국하지 못해 중국 국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며 이들은 독립운동가 유족 우대에 해당되지 않는 일반인들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에 이주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조선족들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 둘다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가 1997년 한중수교부터 F4 재외동포비자로 대한민국으로 건너와 3D 직종에 종사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조선족들의 흉악 범죄들이 존재한다. 여성을 살해한 오원춘 사건, 원곡동 편의점 여직원 폭행 등 여러 강력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국내 거주 외국인 중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 중에 절반이 넘는 59.3%가 중국인(조선족)이다. 또한 2010년부터 2016년까지 폭력을 포함한 각종 범죄에 입권된 외국인이 8만5608명인데 이 중에 절반이 3만9097명이 중국인(조선족)으로 밝혀졌다.[2]

조선족이 대거 F4 비자를 받는데는 요구사항이 엄격해 왔다. 최근들어 대한민국이 조선족들한테 F4비자 발급을 느슨하게 하여 많은 조선족들이 건너오게 되면서 조선족 여성들의 매춘 문제가 대한민국의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보도해왔다. 조선족이 조선족을 고용한 변태 성매매가 행해지고 매춘부 인구수가 세계 1위인 중국 여성과 마찬가지로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에 대거 몰리면서 한국의 성매매 업계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3] [4] [5] [6] [7]

분포

길림성 동부에 연변 조선민족 자치구가 생겨났고, 53년 종전과 함께 1955년에는 연변 조선민족 자치구에서 자치주로 격하되었다. 이 때부터 조선족 출신 인사가 자치주 주장(州長)으로 취임한다. 2010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조선족을 창지투 지구 개방 선도구 개발 사업의 핵심 역할로 주목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 조선족과 귀화 조선족은 80만명이 넘는다.[8]재학생 절반 이상이 조선족인 초등학교는 서울대동초등학교와 서울 영일초등학교가 존재한다.[9]「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2017년 기준 254만 명으로 이는 재미한국인의 수에 필적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족 인구 분포는 동북 지방(만주)에 집중되어 있는데, 지린 성에는 약 120만 명, 지린성 동부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약 80만 명이 집중되어 있다. 그 외에 헤이룽장 성(하얼빈 시(哈爾濱) 등 포함)에는 약 45만 명, 랴오닝 성(선양 시(瀋陽) 등 포함)에는 약 25만 명, 내몽골 자치구에는 약 2천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 상하이(上海)와 칭다오(靑島), 광저우(廣州), 선전(深圳) 등의 대도시에도 거주한다. 각지의 조선족 거주지에는 행정적으로 조선족 자치현과 여러 조선족 마을(향, 진)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동북 삼성의 중심 도시에는 조선족의 학교와 방송국, 신문사, 출판사 등이 있으며, 이들 기관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한국어를 보급하고 있다.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국의 국교 수립 이후 조선족 동포와 한국인의 접촉 횟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조선족의 대한민국 이민이 늘고 있다. 조선족 신입생 비중이 가장 높은 학교는 대동초등학교(서울 영등포구), 80%가 조선족 학생들로 구성된 학교는 신대림초등학교(서울 영등포구), 영서초등학교(서울 구로구), 50%가 조선족 학생들로 구성된 학교는 영림초등학교(영등포구), 영일초등학교(구로구), 심곡초등학교(경기 부천시), 부천남초등학교(경기 부천시), 원미초등학교(경기 부천시), 부천중앙초등학교(경기 부천시)가 있다.


문화

종교

종교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불교와 토속신앙이 결합된 신앙도 믿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과 미국과의 접촉을 통해 개신교로마 가톨릭교회 등 기독교 신앙을 믿는 사람도 등장하고 있다.

언어

조선족의 언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문화어를 기준으로 삼는다. 출신지는 한반도 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경상도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이 지역 방언들인 동북방언서북방언동남방언이 사용되며, 중국 동북3성 각지에 이루어진 집성촌에서 이런 지역 방언이 사용되고 있다.

  • 동북방언(함경도)지역: 길림성 연변지구, 흑룡강성 동북부, 동남부, 두만강연안지구, 동북6진방언
  • 서북방언(평안도)지역: 요녕성 다수지역(심양-안산-무순-본계), 요녕성과 접한 길림성 남부지역
  • 동남방언(경상도)지역: 요녕성 중부(심양), 연변지구를 포함한 길림성 일부, 흑룡강성 서북부, 서남부
  • 서남방언(전라도)지역: 요녕성 중부(심양-안산) 교차적분포, 연변 왕청현
  • 중부방언(경기도, 충청도 등)지역: 길림성 유하현, 연변 도문시, 기타 지역 교차적 분포

같이 보기

각주

===


조선족

최근 수정 시각: 
Semi protect  로그인 후 편집 가능한 문서입니다. 
다른 뜻 아이콘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과 그 후손 중 일부가 갖고 있으며 행정상으로만 존재하는 일본의 국적 분류에 대한 내용은 조선적 문서
 참고하십시오.
하위 문서 아이콘  하위 문서: 조선족/분포 지역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국기
북한 국기

중국 원형 국기
중국 원형 국기





조선족
朝鲜族 | Korean Chinese
조선족
[ 상세 이미지 ]
조선족
조선족 한복
명칭
Cháoxiǎn (중국어)[1]
한국계 중국인 (韓國系中國人)
조선족 (朝鮮族) (한국어)
Korean Chinese[2]
Chaoxianzu[3] (영어)
인구
1,702,479명 (2021년)[4]
주 거주 지역[5]

1. 개요2. 명칭3. 역사4중국 내의 위상5. 지역과 혈통6. 교육
6.1. 초중등 교육6.2. 고등 교육
7. 문화
7.1. 생활상7.2언어
8. 정체성
8.1귀속8.2. 정체성의 혼란8.3. 동화
9. 중국 조선족 현황
9.1. 범죄 현황
10. 한국 조선족 현황
10.1. 법적 지위10.2. 범죄율10.3. 외국인 노동자로서10.4. 한국인의 정서10.5. 한국 사회로의 동화
11. 창작물12조선족의 분포 지역13. 인물
13.1. 대한민국
13.1.1. 가족이 조선족이거나 조선족 출신인 인물13.1.2. 조선족이었다가 한국으로 귀화한 인물
13.2. 중국·그 외 국가13.3. 기타 개별문서가 없는 유명 인물
13.3.1. 여담
14. 관련 자료와 문서15. 같이 보기

external/dimg.do...
조선족의 2010년대 초반 분포지역. 다만 2022년의 인구와는 차이가 크다.[6][7]

1. 개요[편집]

조선족(朝鮮族, 간체 : 朝鲜族, 차오셴쭈)[8][9]은 한민족계 사람이 여러가지 요인으로 한민족계 국가들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지역으로 이주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획득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며, 보통 한국의 구한말시기부터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 사이까지 중국인이 된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연변 조선족들이 일반적인 조선민족 구성원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문화대혁명시기이기 때문이고, 문화대혁명을 기점으로 북한의 본토 조선인과의 교류가 대폭 감소하여 정신적으로 큰 차이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공인한, 중화의 56개의 민족들 가운데 하나이며, 중국 내에서 표기하는 조선족은 보통 중국국적자만을 의미한다.[10] 이들 조선족의 상당수가 대한민국의 특별 대우로 대한민국에 거주중이며, 이들 상당수는 한국에 동화되지 않고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본래 구한말 당시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만주와 간도로 넘어간 조선인들 중 상당수가 지금의 남한인에 해당하는 기호 지방과 호남 지방출신이었지만, 일제의 패망이후 귀국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부분 한반도 남부출신이었던 사람들이었던 탓에 광복이후에는 현재의 조선족들은 북한인에 포함되는 함경도지역이나 평안도지역의 후예들이 많다. 따라서 다수의 조선족들은 함경도 사투리나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대부분 연변 사람들이고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주로 랴오닝성 심양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지위를 갖는다.중국민족문화리소스 - 당대 조선족 인구 발전현황에 의하면, 조선족의 인구는 약 14억명의 전국 총 인구의 0.14%, 전국 소수민족 인구의 1.61%, 13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중국내 조선족의 인구는 2010년 기준 1,830,929명이고, 2021년 기준 1,702,479명으로 감소 추세에 있다. [11] 조선족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 자치구[12]로서 특별한 의의가 있고, 그 외에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따로 있으며 기타 중국 각지에 좀 더 낮은 밀도로 퍼져있다.

이들의 정신구조는 문화대혁명 이후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과는 확연하게 달라져서, 남북한 국민간들의 차이보다 더 심각하게 차이가 나지만, 어쨌거나 같은 구한국이나 조선에서 갈라져나온 사람들이라 한국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많으므로 대한민국에 왕래하는 사람이 많고, 이들 중에서는 장기거주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국 국적을 얻어서 한국인이 되는 것은 상당수 인원들이 원하지 않아하는데[13], 이는 북한 사람들이 탈북을 하면 당연하게 한국인으로서 살고 싶어 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한중 수교 이후에 계속 증가하여 2020년 기준 약 71만 명에 달한다.

조선족 총 인구 약 180만명 중 약 100만명은 중국 국내에 체류중이고, 70만명이 대한민국에 있는 셈이다. 일본에는 10만명이 넘게 체류중이라한다. 한국 내 외국인 약 240만 명 중 약 3분의 1이 조선족이다. 연변에 있는 조선족보다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더 많다. BBC

기본적으로는 중국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화자이나, 이주한 소수민족들이 그러하듯이 2가지 언어 중 한 가지만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화자들도 제법 있다. 성장환경에 따라서 중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다수인 곳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다.

2. 명칭[편집]

중국 외교부 대사관 - 조선족: Korean ethnic minority group
중국공산당신문망 - 당의 각항 공작 - 소수민족 - 조선족

대한제국이 존재했던 시절, 청 제국은 대한제국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에, 자국 내의 조선인들을 한민(韓民)이라고 불렀다. 이후에 중화민국에 국민당이 성립하고 이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함에 따라 조선인들을 한교(韓僑)라고 불렀다. 하지만 1949년에 중화민국이 국부천대로 대만섬으로 쫓겨나고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자 한교(韓僑)라는 명칭은 다시 조선인(朝鮮人)으로 환원되었다.

현재와 같은 조선족(朝鲜族)이란 명칭으로 바뀐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을 전부 통제하기로 결정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들을 민족(民族)단위로 관리하기로 구분 관리했기 때문이다. 1950년에 시작된 민족식별공작(民族识别工作) 제1단계부터 중국 내 조선인들을 조선족(朝鲜族)으로 묶어버렸다. 이후에 중국계 조선인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민족(朝鲜民族)이라고 따로 표시하였고, 조선족(朝鲜族)으로 표시한 경우는 보통 중국의 조선족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한중수교 이후로는 한민족이라는 표현도 증가 추세에 있다.

바이두의 "한민족 우월주의(항일 관련)" 페이지

중국 본토 최대의 위키위키 사이트인 바이두 백과에 '조선족'이라고 검색 하면 아래와 같이 사용자들이 달아놓은 설명이 나온다. 바이두 백과는 중국에서조차 지식인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참고 자료로 사용하지 않지만 이 문서에서는 보편적 명칭을 알아보기 위해서 볼 가치가 있다.
조선족(차오셴쭈)
朝鲜族人口为1830929人(2010年),主要分布在吉林、黑龙江、辽宁东北三省
조선족의 인구는 183만 929명(2010년)이고 주요 분포 지역은 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의 동북 3성이다.

그렇다면 중국, 그리고 한국의 표준 언어 사전에서는 이 '조선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다음은 중국의 <현대한어규범사전>의 설명이다.
1. 중국 내 소수민족의 하나. 2. 조선반도[14]의 주체민족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이다.
중국에 사는 우리 겨레

한중수교 이전에는 한반도 내에 한 국가만 인정한다는 법칙이 있었기에 중국은 한국인과 한(韓)인이라는 단어를 한반도의 조선민족(朝鲜民族)계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조선인을 썼기 때문에 조선족(朝鲜族)이란 단어와 조선민족(朝鲜民族)이란 단어를 한국인과 북한인을 포함한 민족전체를 의미하는 뜻으로 동일시되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한중수교 이후에는 중국인들에게 한국인과 한국이라는 단어가 정착하면서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중국'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중국계 조선족을 표현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중국이 북한사람은 조선인이라고 표기하고 남한사람은 한국인으로 표기하기 때문인데. 한국인은 자신들을 한민족(韓民族)으로 표기하고 북한은 자신들을 조선민족(朝鲜民族)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중국계 조선족을 조선족으로만 표기해도 구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현재 중국 대학교의 대부분 논문은 한민족 관련 내용을 적을때 조선민족(朝鲜民族•차오셴민쭈)이나 한민족(韩民族•한민쭈)으로 표기한다.

한국 정부나 언론에서 '재중교포', '재중동포'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동포(同胞)'는 외국에 사는 한민족 전체, '교포(僑胞)'는 그중 한국 국적자를 뜻하기 때문에 둘은 좀 다르다. 그러므로 동포이되 외국국적자인 중국 조선족은 재중교포가 아닌 재중동포에 속한다.

'조선민족이 아닌 조선족은 비하'라는 얘기가 있다. 그렇지만 중국어에서는 절대다수인 한민족(漢民族)도 한족(漢族)이라 부르며 만족, 장족 등에서 보듯이 모든 민족이 다 민족명 뒤에 족(族)자만 붙인다. 조선족들은 그들의 명칭을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고 중국인이나 한국사람으로 칭해주길 원하거나 조선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5천만 한국인이던 2백만 조선족이던 국적에 따라서 호칭을 명확히 해야할 것이다. 중국국적이면 중국인, 한국국적이면 한국인. 한편 한국인을 중국국적 한국/조선계 중국인을 특정하는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부르는건 확실히 문제가 있고, 중립적으로 보면 한국인, 조선족을 통틀어 한국의 민족을 뜻하는 한민족(韓民族)이나 한족(韓族) 대신 조선민족(朝鮮民族)이라고 부르는 건 가능하다.

1948년 8월 중국 연변 지구당위원회에서 "연변 등 동북 3개성에 거주하는 조선민족 중 호적을 가진 자는 모두 중국 공민이고, 호적 없이 잠시 거주하는 자는 모두 조선교민"이라고 규정하여, 조선족과 조선 교민의 차이를 구분하였다.

조선족들 스스로도 '조선족'과 '조선민족'을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다만 이들 스스로 조선족이자 조선민족이기도 한 만큼, '조선민족'이라는 표현으로 자신들을 정체화하는 경우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네이버 사전에서 제공되고 있는 중국어 사전의 일부를 출판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가 있다.

3. 역사[편집]

오늘날의 조선족은 만주에 잔류한 고대 고구려인, 부여인 후손 및 발해 유민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중세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 발해부흥운동이 계속 실패하면서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귀화하거나 아니면 거란족, 여진족, 한족, 몽골등에 동화되어 소멸하였으며, 이들은 조선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고려쪽에서 요동으로 많이정착하기도했었으나 오늘날 조선족의 직계 기원은 조선 후기 19세기 후반 간도로 이주한 주민들을 그 기원으로 잡을 수 있다.

만주는 대개 몽골-튀르크계 민족들이 거주하던 내몽골 동부 고원 지대 그리고 과거 고구려 영토로 대표되는, 그리고 오늘날 한민족이 거주하였던 농경에 유리한[15] 비옥한 요동 등 남부 지역 그리고 퉁구스계 삼림 수렵채집민들이 사는 동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구려 영역 관련 지도와 만주 지도를 비교대조해보면 알겠지만, 한민족은 오늘날 만주라 불리는 지역 전체를 다 장악하고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에서 알짜배기 땅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조선족과 고대-중세 만주사를 같이 엮는 것은 오늘날 기준으로 다소 과한 민족주의 관점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오늘날 조선족 중 가장 정착 역사가 오래된 집단으로는 랴오닝성 번시시의 번시 박씨가 있는데,연합뉴스 기사KBS 뉴스기사 팔기군에 합류한 조선 출신 박씨 형제들의 후손으로 청나라 때 만주족으로 분류되었다가 1958년에는 한족으로 분류되었고 다시 1982년에야 조선족으로 재분류되었다. 번시 박씨가 만주족으로 분류되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청나라 때 편찬된 <팔기 만주 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돼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의 성씨도 43개나 포함돼 있다. 다시 말해서 만주 지역에 잔류 혹은 이주했던 한민족 상당수가 만주족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16] 상술한 번시 박씨의 경우도 집성촌을 중심으로 모여살면서 외부인들과의 통혼을 최대한 제한하면서 혈통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한국어는 잊어버린 상태였고 조선족으로 인정받고 나서야 다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즉 번시 박씨 집성촌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전근대 만주 지역의 한민족 이주민들은 대부분 만주족이나 한족 등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근세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고 이윽고 청나라를 성립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이후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될 것을 두려워한 청나라 황실은 만주지역을 봉금지역으로 만들어 한족이 들어가는 것도 막았다. 만주 봉금령은 1881년까지 유지되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쇠락하기 시작하자 러시아 제국이 만주 일대를 노리기 시작하는데 청나라 조정은 이에 맞서서 1870년대부터 만주 봉금을 단계적으로 해제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족 외에도 조선 사람들도 은근슬쩍 간도를 중심으로 이민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조선족들의 사실상의 직계 기원이 된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은 조선의 식습관 그대로 쌀밥을 좋아하였고 비옥한 간도 평야지대에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오늘날 중국 동북3성 지역은 중국의 주요 자포니카 품종 벼 재배지역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조선은 점차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대한제국의 성립이후에 노골화되기 시작했는데, 대한제국은 이 지역에 서변계관리사(西邊界管理使)를 파견하는 등, 해당 지역 조선인을 통치하려는 노력을 했다. 되려 청나라가 행정력유지를 할 수가 없어서 1889년부터 조선인을 대상으로 변발령을 내리는 등, 강행조치를 했는데, 오히려 이 정책이 해당지역 조선인들의 적개심을 샀고 훗날, 대한제국의 간도병합 욕망에 불을 지폈다. 이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은 조선인이란 정채성이 강했고,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간도병합에 소극적일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조선으로의 편입을 원했다.[17] 대한제국은 이에 호응하여 1903년 말에는 선양시 부근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으나, 1905년에 을사늑약, 1907년에 군대해산을 당함으로서 1897년부터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간도편입은 추진력을 상실했다.

1909년의 간도협약이 체결됨으로서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우리 대한민국에 포함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고 이후 조선족의 역사는 한국사와 완전히 분리되어 진행된다. 구한말부터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조선을 떠난 사람들이 간도지역에 많이 정착했다. 경술국치이후, 생업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가난한 조선인들이 삶을 위해 조선을 탈출하여 정착하기 위하여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한족과 만주족 지주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후에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는 단초가 된다. 만주에 삶을 찾으러 나간 조선인들도 만주의 동포들에게 미쳤던 야욕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20년에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공세를 막았지만 연해주 4월 참변과 간도참변으로 만주일대로 나간 조선인에게 흉수를 저질렀다. 이렇듯이 계속해서 만주일대에 대한 침략야욕을 바탕으로 결국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다. 오보사건부터 만주사변의 사건까지 중국인들에게 계속된 눈총을 받던 동북 3성의 조선인들은 윤봉길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이후로 입지가 나아진다.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만주국 신민으로서 살게 되었다. 만주의 개척을 위하여 오족협화의 구호아래 만주에 조선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는데, 조선인을 만주로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만주로 조선인을 보낸다는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다. 1945년 만주국이 해체되면서, 만주는 중화민국의 치하로 들어갔다. 이후에 조선인들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다.만주의 조선인들은 만주에 남거나 조국 땅로 돌아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했는데, 중국이 공산화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나 독립운동을 위해서 만주로 왔던 사람들, 그리고 만주로 쫓기듯이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은 조국 땅으로 돌아갔지만, 자의로 만주에 이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만주에 남았다. 또한 중국공산당에 협력하여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은 북한으로 가서 연안파가 되었고 훗날 김일성에게 숙청되었다.

만주에 남았던 사람들이 조선족의 직계조상 혹은 당사자가 된다. 한편 만주와 중국에 남아서 조선족이 되었던 또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팔로군과 함께 국공내전에서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건에 근간이 되었고, 6.25 전쟁의 주축이 되어 산화했지만,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연변에 정착해 조선족이 되었다. 이렇듯이 본래 친공산당세력들이 꽤 되었기 때문에 연변의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에 꽤나 협조적이었고, 덕분에 수가 적음에도 중국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6.25 전쟁시기까지 한반도로 넘어가지 않은 조선인들을 중국공산당은 중국인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1952년까지 중국에 정착한 모든 조선인들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는데, 이들을 한데 묶어서 조선족이란 이름의 소수민족으로 구성하고, 연변에 조선족 자치구를 신설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 소수 민족 정책은 레닌주의에서 제시되었던 소수민족 정책을 기반으로 하였는데[18][19] 레닌주의 교리에 따르면 민족 영토가 결여된 채 오직 문화에 토대를 둔 민족은 인정받을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내 조선족 인구는 유대인처럼 중국 각지에 소수자로 분산되어 흩어져 있던 것이 아닌 이른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족끼리 마을을 이루어 모여살던 상황이었고, 중국은 이러한 지역들을 묶어서 연변 조선족 자치구라는 행정 구역을 설정하였다.

하지만 조선인 인구는 계속 유출[20]되었기에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고, 1955년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격하되었다. 연변에 살던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넘어간 이유는 순전히 애국심/민족주의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은근한 차별까지 각양각색이었지만, 사실 대약진운동으로 중국/경제가 점점 나락으로 가는 것에 비해서 북한은 소련과 동유럽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전후재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성장가도를 계속 달렸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 내에서 조선족들의 북한 귀국을 막지 않았다면 조선족 자치구도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3.1. 문화대혁명 이후[편집]

셋째, 1958~1978년 시기에 조선족의 정체성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구별되는 중국인으로 규정되도록 강요받게 되었으며, 중국의 조선족과 한반도의 한인과 구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모국은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심지어는 고국이라는 표현도 쓰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문화혁명(1966~1976)의 초기에 더욱 심하였고 일체의 민족적 특색이 나타나는 표현은 쓰지 못했다. 특히 계급 대오 정리운동기간(1968~1969)에는 많은 조선족이 민족 문제로 희생한다. 또 민족문화도 큰 수난을 당했는데 연변일보는 신화사전신으로 개명되어 한자로 출간하였고 연변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에서는 조선어 대신 중국어로 강의했다.
"국내 거주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 형성과 변화 연구," 김영술 (동북아연구, 2019))#

그러나 문화혁명을 기준으로 모든게 달라졌다.

조선인의 인구유출은 뜻밖에도 한족의 국가인 중국에서 막는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이를 피하려는 사람을 반혁명으로 몰았는데 조선인이 문화대혁명을 피해서 북한으로 도피하려 하자[21] 중국에서 북한으로 도피하는 사람을 조선간첩으로 몰아서 감옥에 넣고 제재를 가했다. 때문에 조선인의 북한귀국행렬은 멈춘다. 결국 중국당국의 눈을 피해서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중국에 눌러 앉게 되었는데, 이들이 현재의 조선족이다.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한반도의 한민족과 동북 3성의 중국조선족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조선족의 정신구조 자체를 바꿔버렸는데 문화대혁명은 조선족의 출신성분에 대한 기록, 가령 족보같은 것을 모두 소각하거나 폐기했으며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들의 정신을 개조한다. 예로 문화대혁명이 벌어지기 전의 조선족은 자신이 유래한 지역을 알고 있고 자신을 소개할 때도 "내 고향은 남쪽 ㅁㅁ지역이오"라는 식으로 답변했는데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인은 자신을 중국의 항일전쟁에 피흘려 싸운 급부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강렬하고 뚜렷한 민족관과 조국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개조 이후에는 "우리는 중국 내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중국조선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북한과도 결별하여 "우리의 조국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조는 4인방의 한 명이었던 장칭의 주도로 시행되었다. 장칭이 파견한 마오위안신(毛遠新)[22]은 장칭의 뜻을 받잡아 조선족을 족치기 시작했다. 연변에 온 마오위안신은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 "조선어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 내지 15년이다", "연변 문화대혁명에 외국(북한)이 손을 뻗쳤다", "연변의 조선족에 다시 한번 대동란과 대분화가 일어나야 한다", "조국의 동북변방 연길에 몸서리치는 반혁명 반란사건이 일어났다"면서 민족의식이 있는 조선인들을 반혁명분자, 조선(북한)의 간첩 등으로 몰아 집중적으로 박해했는데, 이는 계급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이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주더하이)가 있고, 그 외의 조선인 주장과 서기들은 분리주의지로 몰아가 실각시키고 죽였으며, 조선의 역사와 말과 글을 가르치던 조선인 교사들을 홍위병으로 끌어내 조림돌림하며 자아비판을 시켰다. 이러한 조선족에 대한 박해행위는 단순하게 현장의 조선인 관리들을 욕보인 것 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를 격하하고 그들의 유물을 파괴했다. 사람을 짓이긴 후에는 조선인의 문화 또한 파괴하려 들었는데, 평양냉면함흥냉면, '인천백반'같이 조선땅의 지명이 붙은 음식점을 파괴했고, 조선인들의 사진[23]과 족보[24]는 물론 조선어로 쓴 책이나 편지를 검열하여 전부 불태워버렸다. 이 때에 항일 독립운동에 관련한 자료가 상당수 유실되어 독립운동사와 관련한 수많은 기록이 사라졌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기록조차 4인방과 마오위안신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조선족에 대한 박해 및 정신개조사업이 잊혀질 뻔했다. 하지만 황영림이라는 조선족 사진사가 목숨을 걸고 사진을 찍어 관련된 사진자료를 남겼고, 이를 한국인 류은규가 엮어서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이란 이름의 책으로 2010년에 출간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다.[25] 조선족들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겪었던 고초나 당시의 상황을 사진으로 보고싶은 사람은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을 보길 권장한다. ## 단 2022년 기준으로 절판되어 구할수 없으므로 도서관을 이용할 것.

이러한 조선족들의 고초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와 함께 끝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화대혁명 이후에 조선족이 한족에게 원하든 원치 않든 도전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고 조선족은 항일전쟁에 함께한 민족으로서 꽤나 대접받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의 북한인과 처지가 180도 바뀌어서 이제는 북한사람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 방향으로 탈북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운명이란 알 수 없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북한으로 탈출했던 친척을 중국에 남은 사람(조선족)이 도와주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이후 개혁개방이 이루어지자 조선족의 교류대상은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문화대혁명이전에 많은 조선족이 북한에 넘어갔듯이, 현재는 많은 조선족이 한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다만 그 시절과 다르게 현재의 조선족은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한국에 영구정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외화(원화달러)를 벌어서 본국으로 송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앞잡이나 범죄자집단이란 편견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 조선족의 해외 진출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1980년대 후반 이주하기 시작한 국내 조선족은 2022년 현재 70만 명이다.

1980년대 중·후반 조선족은 한국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한국정부의 간단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약재를 가지고 입국하여 큰돈을 벌면서 중국 조선족 사회에 ‘코리안 드림’의 불을 지폈다. 1990년대 초반 불법체류자들이 늘어나면서 사증을 발급받아야 한국 입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합법적 입국통로가 좁아지면서 새로운 입국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조선족 여성의 한국남성과의 혼인을 통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족 남성들은 대부분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여성은 식당, 가사도우미와 같은 서비스직 노동자로 일한다.

그들이 한국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요인은 우선, 한국 노동시장의 저임금 노동력 수요와 중국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한국의 임금 수준이다. 또 중국의 개혁, 개방 이래로 조선족의 지위상승 열망과 중국 내 중앙 진출의 기회 제약의 상황이다. 또한 같은 언어를 쓰는 한민족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은 재외동포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여 불법체류자를 양산했다. 조선족노동자들의 집단행동과 시민사회단체의 주장에 따라 최근에는 방문취업을 5년간 복수로 허용하고, 재일동포 비자는 3년의 체류기간을 주고 있고, 2010년에는 육아도우미, 가사도우미, 간병인, 복지시설보조원 등의 서비스직 종사자에 대해 영주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2022년 현재는 2020년에 중국의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하여 조선족은 한국과도 북한과도 교류가 줄고 있는 실정이다.

4. 중국 내의 위상[편집]

우리나라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와 지식인들이 만주 및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좌익계열, 항일성향[26]이었다. 때문에 여러 항일단체들이 중국 항일단체들과 어울렸으며, 이는 국공내전에서도 조선족들이 크게 관여하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중국공산당 내부에도 조선인 출신 간부들이 꽤 있었으며, 만주 내의 민간 조선인들도 국공내전 당시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는 만주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국공내전 승리로 이끄는 원인 중 하나가 되게 된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조선족은 중국 내부에서 대우가 나은 편에 속하는 소수민족이 되었으며, 조선족자치주도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자치주[27]이며,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민족대학 설립까지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중국공산당이 대약진운동 이후 막나가게 되면서 내부 권력 다툼으로 조선족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으며, 조선족 자치구 주장이 숙청되기도 하였다. 중국이 1970년대 이후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연길을 비롯한 조선족자치주는 고도발전에서 소외되었다. 애당초 개혁개방의 모토가 "일부가 먼저 잘 살고 일부가 나머지를 잘 살게끔 이끈다(선부론)"이다. 물론 그 일부는 바다에 인접한 동남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조선족들이 사는 동북 지역은 "나머지"에 속한다. 북한과 인접해 있어서 북한의 경제상황이 그런대로 괜찮았다면 연변의 공업도 발전될 여지가 있지만, 북한의 경제가 너무 안 좋은데다가 라진항이나 청진항을 쓰기에는 제한이 너무 많고, 러시아의 극동지역 인구도 그리 많지 않기에, 공업이 발달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변에 민족국가가 모국으로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소수민족인지라, 인구 수에 비하면 그 위상은 여전히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국 중 한 곳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기에 조선족들의 경제적 위상은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나은 편으로, 실제 한국으로 건너가 경제활동 하는 사람들도 제법된다.

소득이 높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중국으로 다시 간 조선족들은 상류층이며 중국에서도 떵떵거리며 살지만, 일부 조선족들은 대도시의 한족들의 가정부를 하기도 하는 모습이 티비에 비치기도 한다. 중국에서 조선족은 한국어를 조선어문이라는 이름으로 교육과정에서 배우고, 대학입시인 가오카오도 한국어로 번역해서 보며[28], 입시과정에 5점의 가산점도 있다. 연변대학은 중국의 유일한 소수민족 중 조선족을 대표하는 연길시의 종합대학교이다. 중국에서 조선족 소수민족 우대 정책에 따라 소수민족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자기 민족 언어로 대학 입시인 ‘가오카오(高考)’를 치르는데, 이에 따라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은 중국어를 제외한 수학, 역사 등 다른 과목을 한국어로 본다. 19세기 말부터 이주하여 살았기 때문에 중국인 배우자를 둔 사람들도 많으며, 친척에 중국인 한족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는 지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는 연길의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으며, 조선족의 혼란상을 부추기고 있다. 그래도 외국에서 돈을 벌어온 노동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소득수준은 여전히 상위권이긴 하다. 빈부격차가 워낙에 심하다보니 문제긴 하지만.

중국조선족(재중동포) 중에서도 티베트나 위구르홍콩처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중국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워낙 소수인데다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재중동포)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바닥을 치다 보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감독 장률이 대표적(6.4 항쟁 참여). #

5. 지역과 혈통[편집]

주로 조선족 자치지역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장백 조선족 자치현을 중심으로 그 외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의 도시화 건설에 맞춰 경제가 발달한 북경상해 및 중국 동해안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대한민국에도 많이 유입되었다.

한국, 북한과 대체로 동일한 문화뿌리와 혈통을 공유하지만, 한국의 서구화와 북한의 쇄국화, 그리고 조선족의 중국화 이렇게 완전히 다른 발전분기 때문에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중국 중앙정부의 동북공정[29]과 남북한의 조선족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다.

한편 같은 조선족이라도 중국 내 거주 지역에 따라 한국어(조선어)의 방언 차이가 있고, 자기들끼리 지역감정[30]도 존재한다. 연변 지역 출신자거나 북한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북도치, 연변 외 지역 출신자들은 남한 지역 나아가 한국에서 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남도치라고 부른다고.

6. 교육[편집]

6.1. 초중등 교육[편집]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족 학교들이 운영되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1천여 개를 상회하는 수의 조선족 학교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300개가 채 안 되는 조선족 학교들만이 남아 있다. 중국의 표기에 따라, 초등학교는 소학교(小学), 중학교는 초급중학교(初中), 고등학교는 고급중학교(高中)라고 한다. 거의 모든 조선족 학교들은 동북 3성에 위치하고 있으나, 내몽골 자치구에도 조선족 학교가 존재한다. 그 외에 하북성 진황도시에 조선족 소학교가 한 곳 있고, 칭다오시에는 사립 조선족 학교가 있다.

요녕성을 중심으로 일관제 학교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범위도 다양하여, 소학교-초급중학교 9년제 일관제 학교도 있고, 초급중학교-고급중학교 과정이 합쳐진 학교[31]도 있으며 소학교부터 고급중학교까지의 과정이 모두 합쳐진 12년제 일관제 학교도 있다. 소학교 과정을 포함하는 일관제 학교 중에는 유치원부도 설치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그야말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학교를 다니는 것.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학교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교명에 숫자가 붙으며, 요녕성흑룡강성, 연변을 제외한 길림성 등에 위치한 학교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교명에 '조선족'이 붙는다. 단, 한 시(市)에 조선족 학교가 여럿 있을 경우 숫자와 '조선족'이 모두 붙기도 한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연변 지역: 연변제1중학교(延边第一中学, 연변1중), 훈춘시제2고급중학교(珲春市第二高级中学, 훈춘2중)
다른 지역: 녕안시조선족중학교(宁安市朝鲜族中学), 상지시조선족중학교(尚志市朝鲜族中学)
대도시: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沈阳市朝鲜族第一中学), 할빈시조선족제1중학교(哈尔滨市朝鲜族第一中学)

단, 예외도 있다:
연변 지역: 도문시조선족중학교
다른 지역: 반석시[32] 홍광중학교[33]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학교들은 대체로 한어를 제외한 교과목을 조선어로 가르친다. 그에 비해 흑룡강성 등 연변 이외의 지역에 위치한 학교들은 일부 과목은 한어, 일부 과목은 조선어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으며 아예 조선 어문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한어로 가르치기도 한다. 특히 입시 문제 때문에 중학교 이후 과정의 경우 한어로 가르치는 비중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34] 2010년대 이후의 논문이나 방송 등을 보면 장춘시조선족중학교, 대련시조선족학교 등의 사례에서 학생들의 조선어 실력이 저하되거나 중국어만을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며, 조선어(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거나 구사하기 힘든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점은 조선족 사회 내에서도 비판적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들은 가오카오를 응시할 때 중국어로 된 시험지와 함께 조선어(한국어)로 된 시험지를 배부받을 수 있으며, 어문(语文) 과목 대신 조선어문 및 한어 과목을 응시할 수 있다. 현재 길림성 기준 소수민족 가산점 5점이 인정된다.[35] 그러나 소수민족 가산점은 폐지 수순을 밟고 있으며, 조선족 학교 및 학생들이 주로 분포하는 곳 중 한 곳인 요녕성에서도 2026년부터 소수민족 가산점이 폐지된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동북 지방 일부 조선족 소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2020년 9월 신학기부터 조선어(한국어) 설명이 덧붙여진 연변교육출판사의 교과서 대신 중국어로만 기술되어 있는 인민교육출판사의 '어문(語文)'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강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 교육과 문화 수준이 높은 편으로, 소수민족이라서 중국 대학 입시에 가산점이 있어왔기 때문에 대학 진학률이 비교적 높다...고 하지만 옛말이다. 이과의 경우 특히 조선족 학생들의 성취도가 한족 학생들에 비해 뒤처진다고 한다. 현대 조선족 교육에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점은 학생들의 결손가정 비율이 과도하게 높다는 점인데, 일반적으로 조선족학교의 결손가정 학생 비율은 50%를 넘으며 70~90%에 달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부모가 대한민국에 가 있다든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서 일부 조선족학교의 경우 지속적인 조선족 학생 감소에 버틸 수가 없어 한족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중에는 그 도가 지나쳐 이름만 조선족학교인 곳들도 있다. 가장 심한 곳은 요녕성 모 학교로, 2022년 기준 학생의 80%가 한족이다.

6.2. 고등 교육[편집]

조선족의 민족 대학으로 연변대학이 있다. 심양에 있는 요녕발해학원(辽宁渤海学院)은 사립 전문대학으로 조선족 사회단체 등의 연합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과거 요녕성 조선족 사범학교와 하얼빈시 조선족 사범학교가 존재하였으나, 현재 요녕성 민족 사범 고등전과학교[36], 흑룡강 민족직업학원 등으로 통합되었다.

북경에 위치한 중앙민족대학 등에도 조선어문 전공이 설치되어 있어, 조선족 학생들이 입학하여 공부하기도 한다.[37] 북경상해청도 같은 대도시 지역의 경우 조선족 대학생 연합회가 결성되어 있다.

7. 문화[편집]

7.1. 생활상[편집]

조선족은 집성지구, 집성촌을 이루면서 조선족끼리 오랜 시간을 생활해 왔기 때문에 한민족의 전통과 민족성을 중요시해왔다. 타 민족과의 결혼, 특히 한족과의 통혼은 원래 기본적으로 금물이었다. 과학소년 1997년 3월호에 소개된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와 관련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툭하면 부부싸움을 밥 먹듯이 하는 조선족 부부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럴 거면 도대체 왜 결혼한 거냐"고 묻자 "100km 이내에 조선족 남녀가 우리 둘밖에 없어서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나마 조선족 남자가 한족 여자와 결혼하면 그나마 탐탁치는 않지만 그대로 봐주는 반면, 조선족 여자가 한족 남자와 결혼한다면 집안망신이라고 부모님이 속을 썩이고, 주변에서 비웃기도 했다. 이런 혈통의식은 고려인 사회도 마찬가지인 듯. 하지만 1990년대 말을 거쳐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이 취업 등 문제로 뿔뿔이 전국으로 흩어졌기에 마음에 맞는 동족과 결혼하는 건 하늘에 별따기. 그래서 이젠 쉬쉬하며 한족과의 결혼도 용인하는 분위기지만, 기성세대에서는 가급적이면 동족 결혼을 바라고 있다.

또한 조선족들은 조상의 출신지에 따라 나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지역감정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서로 크게 싸우는 일은 별로 없으며 서로 어디 출신이냐 물어보며 중국어를 쓰기도 하며 인사한다. 보통 출신지별로 어울리는 편이다.

사실 흑룡강성의 조선족들은 학창 시절 한족 학생들과 많이 싸우면서 큰다고 한다. 아무래도 연변의 경우 조선족들이 수적(數的)으로 많고 조선족 자치주인 만큼 조선족들이 상대적으로 주도권을 어느 정도 갖기도 하지만, 흑룡강성은 한족들이 훨씬 많고 그에 비해 조선족들은 훨씬 적기 때문에 그만큼 갈등이 많이 생기는 모양이다.

현재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나마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흑룡강성이나 중국 대도시에 사는 조선족들은 한족과 통혼하거나 다른 중국 대도시들이나 한국으로 떠나는 사람들[38]이 많아서 흑룡강성 조선족들의 언어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중국어와 많이 섞였으나 연변 조선족들은 자기들의 말을 지키고 있는 편이다.

연변의 수부 연길은 조선족이 군집한 지역이기에, 중국의 타 지방과 문화가 완전히 다르다. 도시의 산업은 매우 기형적인데, 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 조선족의 적성에 맞춰서 음식점과 노래방사우나, 바 등이 주된 경제산업이다. 집집마다 위성방송[39]으로 한국방송을 시청하고, 한국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국 문화에 친숙하다. 나이 많은 조선족 중엔 맨날 한국TV로 드라마와 뉴스만 보느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새로 당선된 건 알아도 중국 주석이 바뀐 줄은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옥수수 등의 작물이 주를 이루는 만주지역에서 농사를 고집하고 있다. 만주지역의 도로에서 몇 시간 동안 옥수수밭만 보다가 이 나오면, 십중팔구는 조선족 농가가 그 주변에 있다[40].

참고로 중국 내 조선족 이미지는 상당히 좋지 않다고 한다. 1989년 안재형과 국제결혼으로 화제가 되었던 자오즈민이 인터뷰에서 여러차례 언급한 것을 보면, 중국에선 조선족, 한국 남성이라고 하면 '직업도 없고 집안일도 하지 않으며 아내를 구타하고 종처럼 부려먹는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자오즈민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결혼을 허락한 뒤에도 주변 사람들이 '그 남자 재혼 아니냐'며 '뒷조사를 해보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7.2. 언어[편집]

관련 문서 아이콘  관련 문서: 중국 조선어
조선족들은 지명 및 인명을 중국어 발음이 아닌 한국어의 한자 독음으로 읽는다. 이 때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원래 발음을 고수하므로 얼핏 보면 북한말처럼 보인다. 단, 소수민족 언어를 한자로 음차한 지명은 한자 독음보다는 해당 민족 언어 발음에 가까운 표기를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중국어
옌볜
옌지
랴오닝
하얼빈
조선족
연변
연길
료녕
할빈
한국어의 한자 발음
연변
연길
요녕
합이빈[41]

이외에도 평소 쓰는 어휘도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조선족들은 전화를 건다는 표현을 전화를 친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어의 打电话에서 나온 표현. 打는 때리다=치다. 그리고 외래어는 편의상 중국어의 음차를 차용한 것이 많다. 예를 들면 TV는 뎬스(电视), 이런 식으로. 다만 이런 호칭은 정식용어가 아니며, TV는 텔레비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당황해하는 것 중 하나가 자신들이 조선말로 부르는 지명을 한국에서 보통화 표기를 한다는 것. 자신들은 북경이라고 하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표준중국어 발음인 베이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들은 평소에 쓰는 표현일 뿐 학교에서는 이런 표현을 가르치지 않으며, 서적에서도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조선족의 한국어 방언은 지역마다 하술한 방언에 기반한다.

조선족들은 대개 함경도평안도경상도 출신들이 많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평안도, 함경도 출신들은 구한말 때부터 간도로 많이 이주했다.[42] 상술했던 것처럼 동남 방언을 쓰는 조선족들도 꽤 분포되어 있기도 하고. 물론 호남, 중부 지방 출신 조선족들도 있다. 영화 등지에서 가장 많이 묘사되는 사투리는 함경도 사투리다. 경상도 사람도 이주해서 조선족의 말투는 경상도 사투리와 비슷한게 아닌가 하는 인식이 있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말투가 경상도와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 함경도 말투도 성조가 있어 경상도 말투와 비슷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43]

대체적으로 함경도 사투리(육진 방언 포함)는 연길이 있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나 길림성과 흑룡강성 동부에서 많이 쓰이고, 평안도 사투리는 요령성이나 길림성 서남부에서 쓰이고, 경상도 사투리는 요령성 일부[44]와 길림성 서북부, 흑룡강성 서부에서 쓰인다. 그 외의 사투리들은 마을 단위로 쓰인다.

연변 조선족의 조선말이 중국어와 섞일 경우는 대부분 명사만 악센트를 순화하여 사용하기에 기본적인 조선말과 중국어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45]흑룡강성이나 요령성의 조선족은 한족과 접촉이 잦아서 중국어가 섞이는 빈도가 상당히 높다. 특히 흑룡강성은 위치상 러시아어나 몽골어 어휘가 사용되는 일도 많아서 일반적인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물론 한국어와 중국어 양쪽에 능한 사람도 이 동네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 쉽지 않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조선말은 우리가 아는 한국어 문법과는 뭔가 많이 달라서, 분명 같은 언어인데 토종 한국인은 잘 알아들을 수 없다. 문어는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쓰고, 구어로 갈수록 중국어와 생소한 방언이 섞여 알아듣기 어렵다. 한국어보다 중국어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이 나온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는 연변 말투를 듣기가 힘든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개그 콘서트나 댄서의 순정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조선족들을 흉내낸답시고 이상한 말투를 사용하는데, 이게 진짜 조선말인줄 알고 조선족과 대화할 때 썼다가 상대방이 당황하곤 한다. 외국인이 미국 드라마 같은 데서 나오는 어설픈 한국어를 보고 우리한테 진짜 한국어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함경북도와 인접해서 대체적으로 동북 방언육진 방언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 "~ㅂ니다"를 "~ㅂ꾸마"[46]라고 말하고 "~ㅂ니까"를 "~ㅁ둥"[47]이라고 말한다. "~ㅂ시다"를 "~깁:소", "~겝소"[48]라고 말한다.

그런데 젊은 세대 이하에서는 ~슴다체를 많이 사용한다. "~ㅂ니까"를 "~ㅁ까"라고 말하며 "~시오"를 "~쇼", "ㅂ시다"를 "~기쇼"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 특히 대학을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타지에 나와 있거나 하여 한국인(과 한국 문화, 미디어 매체)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경우에는 서울말을 따로 할 줄 안다. 자신들도 사용하는 말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연습하기도 한다고. 또한 한국어의 영향으로 연변지역 TV나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들이 상당히 '서울말화'된 한국어를 쓰며, 연변TV에서 방영하는 오락 프로그램들을 보면 아예 한국 인터넷 상에서 사용하는 유행어 등이 나오기도 한다.

화자 수도 200만여 명으로 적지 않지만 조선어를 꾸준히 써온 배경에는, 중국 조선족 사회가 농촌 공동체를 위주로 지속되어 온 이유도 있다. 물론 연길 등 도시에서도 거주해 왔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조선사람들은 농업이 기본이었고, 조선 땅에서 하던 벼농사를 마을/친족 단위 그대로 만주 땅에 옮겨 가는 식이었다. 즉 국가는 이국 중국이되 지역은 여전히 조선사람 마을인 이중적인 형태가 수십년간 지속되어 왔다. 전통적인 중국 조선족 사회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농사를 짓는 수많은 조선족 마을의 연합이라고 봐도 될 정도. 그런데 9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젊은이들이 몽골인과 한족이 많은 만주 쪽 대도시나 중국 내륙도시로 혹은 싱가포르나 호주 등 외국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농촌의 조선족 공동체가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그 빈자리를 압도적 다수인 한족 혹은 다른 민족으로 채우는 경우도 흔하게 되었다.

(2002년 동아일보 기사. 중국 조선족의 이촌향도를 잘 보여준다.)

조선족 사회 붕괴나 조선족 화자가 줄어드는 것은 중국 정부의 한족 위주 정책의 영향이기도 하다. 상술하듯 개혁개방이후 조선족 사회의 기반인 조선족 마을 공동체는 한족 사회로의 이촌향도와 외부 한족의 유입으로 인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2020년 9월의 일부 한글 교과서 퇴출과 가오카오 소수민족 가산점 폐지 수순 등 한족화 정책을 펼치는 바, 앞으로 조선어 화자가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과거 농촌 공동체 위주의 생활을 할 때는 화자 간 중국어와 중국조선어 구사 수준이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90년대 이후 조선족 개개인의 중국조선어 및 한국어 구사 능력 편차가 심해졌다. 젊은 층의 경우 대도시에서 사는 부모는 중국조선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나 본인은 조선족 정체성만 갖고 중국어만 할 줄 아는 경우부터, 중국에서 쭉 성장했으나 가정의 관심과 본인의 노력에 의해 중국조선어 뿐만 아니라 서울말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 성장하여 한국으로 유학 와서 공부해 중국조선어보다 서울말이 더 편한 사람도 있는 등 중국조선어 화자들의 언어 구사능력은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중국조선어를 제1언어로 쓰더라도, 경제적으로는 서울말 구사자가 좀 더 우대받는 현실 때문에 서울말을 따로 공부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족들이 쓰는 한국어는 엄연한 피진 겸 한국어의 한 거대한 방언군이다. 미국식 영어영국식 영어의 차이,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와 포르투갈식 포르투갈어의 차이처럼 한 개의 상이한 방언군을 형성하는 것. 차이가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 브라질 포어와 유럽 포어 혹은 스페인 스페인어와 중남미 스페인어의 차이보단 좀 적은 정도다. 조선족들이 쓰는 연변식 한국어도 한국식 한국어와 어느 정도 상이한 게 사실이다.

조선족이 쓰는 중국어는 동북 지방의 사투리인 경우가 많은데, 보통화 화자가 보거나 듣기에는 시골 사투리로 인식된다.[49] 드라마나 웹툰 등 한국 매체가 중국어로 번역될 경우 가끔씩 조선족이 번역을 수주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중국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어색함을 주거나 놀림거리가 되기도 한다. 조선족들은 다른 지방 사투리(광동화, 상해어, 민남어, 객가어 등)에 비하면 자신이 하는 말이 보통화에 가깝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지만, 보통화와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8. 정체성[편집]

8.1. 귀속[편집]

조선족은 국적상으로 중국인이고, 스스로도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한국인과 국적 의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전체주의적인 중국의 교육하에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교육받으며 자란다. 한국어를 한다고 해서 이들에게 한국과 똑같은 국적 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게다가 중국은 다민족국가이지만 미국처럼 소수민족이 스스로 동화되기를 바라는 것[50]이 아니고, 소수민족의 독립을 허용하는 순간 국가가 분열되는 전체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민족을 말하는 게 자유롭지 않다. 중국에서는 미국에서 하듯이 "나는 모국 한국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면 당장 정부기관의 요주의 인물이 되는 것이 현실이며, 공무원이나 국영기업에 근무하고 있다면 당장 실업자가 될 것이다.신비로워 질 수도 있다[51] 게다가 현재 독립의식이 강해 강도높은 탄압을 받고 있는 티베트족이나 위구르족이 뻔히 존재하기도 하고. 이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의 오해는 대부분 풀린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민족의식과 국적의식을 동일시하는데,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 공유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민족(ethnicity) 의식이지 국적(nationality) 의식이 아니다. 한국계 미국인 2, 3세들이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말하며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알면,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말하는 조선족의 사고방식은 자연스레 이해가 될 것이다. 물론 한국인 앞에서 조선족이 중국인임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매우 부자연스럽고 한심하게 보이기 마련이지만[52], 대부분의 재미동포들 2, 3세도 마찬가지 행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다민족국가의 소수민족들의 행태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메수트 외질 같은 터키계 독일인 축구선수들이 이중국적을 허용함에도 대부분 독일 국가대표를 택하고 있다.[53][54] 즉, 조선족이 특별히 줏대없고 민족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국가귀속의식과 민족귀속의식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도 한국인들은 민족과 국가가 하나인 '본토에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 반면 해외동포들은 자신이 속한 민족과 국가가 당연히 다르며 거기서 몇 대를 살면 그 국가가 자신의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해외동포들은 이러한 존재의 이중성을 갖고 태어나 자란다. 다만 한국 여권을 갖고 외국에 잠시 머무는 한국국적자는 물론 다르다.

서울 금천구 현대시장 팻말
[55]

소수지만 한국인 못지않은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조선족들도 있으며, 스스로 중국인을 자처하는 조선족이라도 한국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중국 한족들은 "조선족은 한류나 한국을 자랑하니 아니꼽다"고 불평하기도 하니, 모든 조선족이 민족의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성급한 일반화다. 지명광 씨처럼 아예 중공에 대항하다가 입국금지를 당한 사례가 그나마 한국에 알려져 있는데, 이런 사람은 조선족을 싫어하던 한국인도 호의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 그 외에 일부 조선족들은 스스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한국인보다 더 강한 순혈 의식을 보여주기도 하며, 노총각/노처녀로 남는 한이 있어도 한족과는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 1970년대까지 조선족 내에서도 남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천시를 받는 분위기였고, 대체로 북부 지역 출신들이 더 우대받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뭐, 중국에서 정책적으로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을 갈라놓았다니 지역감정을 조장한 정책을 편 건 아니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남한은 중국의 적대국이었던 데 반해 북한은 중국의 우방국이면서도 가까웠기도 했고, 교류도 상당히 활발히 이루어졌으니까.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북한이 급속히 빈곤해지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남부 지역 출신자들은 남한에 친척이 있는 경우가 많아 도움을 받을 수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자리를 상당히 수월하게 구해서 기회를 잡을 수 있던 데 반해, 북부 지역 출신자들은 상대적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에 있는 친척들에게 먹을 걸 부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불리했다고. 그래서 당시에[56] "남조선에 친척이 있으면 부자가 되고, 북조선에 친척이 있으면 거지가 된다"는 말이 나왔다나.

8.2. 정체성의 혼란[편집]

많은 조선족은 성장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이러한 혼란은 사실 재미동포든, 재일동포든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고, 타국에서 사는 이민자 2세대~3세대에게는 공통적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국계라고 다른 사람과 같게 보지 않고,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왔다고 다르게 보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 있을 때는 친한국적으로 보이고, 한국에서는 친중적으로 보인다. 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필요에 따라 한국인과 중국인의 정체성을 오가는 기회주의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57]이나 중공군 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조선족들 중 6.25 전쟁 참전자는 고령층의 소수에 불과하므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뒷 세대의 조선족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몇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아무리 당대 조선족의 정체성이 모호했다 해도 6.25 전쟁 자체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독일 국방군 참전자들이 나치에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진 않지만 과거를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과오로써 반성하며 살아가듯, 국가의 잘못된 명령을 당시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치더라도 침략전쟁에 동조한 과오를 과오로 여기지 않는 조선족 참전자들 다수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58]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 중국·북한을 아무리 옹호하려고 해도, 군공을 더 많이 세우고 중국에 친밀한 연안파 같은 세력을 숙청시키고 자신과 같은 조선족이 된 독립운동가의 공적마저 도둑질한 김일성의 북한 정권을 옹호하거나, 극도의 경제 교류 기피로 동북3성을 가난하게 만든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자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들이 현재 중국에 소속되어 있는 관계로, 조선족들의 6.25 전쟁 회고담은 상당히 편향된 점이 많다는 점이다. 세균전 증언이나 남한의 북침 같은 것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가 출신 포함 남한의 고위인사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같은 건 걸러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 한때 이들의 증언들이 사실처럼 기술되는 바람에, 조선족들을 도매금으로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자식을 한족 학교에 보내는 일이 많아져서, 젊은 세대의 조선족 중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한족 학교에서도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사실상 기초적 단계에서 멈춘다. 한족 학교에서 교육시키는 이유는 부분적으론 기성세대가 중국어를 잘 할 줄 몰라서 다른 중국인들과 교류할 때 많은 애로사항을 겪은 트라우마에서부터 출발, 한족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음으로 중국사회에 더 잘 융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신분증상으로만 조선족일 뿐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과 언어 등이 완전하게 한족이 되어버린 자식을 보며 후회하기도 한다. 이는 사실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부분은 재미교포들이 오히려 더 심했는데, 이는 미국이 한국보다 더 선진국이기도 하고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가르치면 앞으로 미국에 정착하여 쭉 살아갈 자식이 언어 혼란이 올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1980년대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아이들이 한국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혼냈다는 이야기도 있다.[59] 외국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게 되는 문제다.

또한 조선족은 1870년대부터 중국에 살면서 한족 친척이 있는 경우도 많으며, 모계가 한족 혼혈인 경우도 매우 많다. 중국은 신분증에 민족명을 기재하고 있어서 신분증에는 한족, 조선족, 만주족 등이 쓰여져 있다. 조선족 여자가 한족과 결혼하는 경우는 한족으로 변경할 수 있지만 조선족 남자가 한족 여자랑 결혼하는 경우에는 신분증상으로 조선족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다수여서, 일부 조선족은 신분증상으로 조선족이지만 한족의 혼혈일 수도 있다. 부모의 민족이 다른 경우에는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여 등록한다. 조선족은 대학을 갈 때 특별전형으로 유리하고 한족과 달리 자식을 여러명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조선족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이 중국에서 태어나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 초, 중, 고등학교를 중국 학교에서 한족들과 공부하였으며 이 중국의 교육 과정으로 인해 한국인과 매우 다른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조선족의 경우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반중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들어서 아는 경우도 있기만 실제 재외동포 비자를 받고 대한민국에서 거주하는 조선족들은 대한민국의 의외로 매우 심한 반중 성향에 놀라면서 불안과 분노를 느끼게 되고 이것은 조선족들이 대한민국에서 중국인의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악순환 사이클이 반복되며 이는 꽤 큰 사회문제이고 조선족 사회에서도 우려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국적으로 중국인 정체성이 매우 강한 경우에도 조선족과 한족을 굳이 구별하고 민족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평소에는 이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어느 정도 친해지면 서슴없이 한족을 까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중장년 층의 경우 조선족은 중국정부나 지도자가 인정하는 민족이었다는 말을 하고, 청년층은 다른 중국 내 민족들의 문화나 생활습관이 미개하다며 민족적 자부심을 표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또한 어릴 적 조선족 마을에서 자라 옆 마을 한족 애들과 싸웠던 무용담을 펼치는 조선족도 있는데, 이럴 때 '중국 애들과 싸웠다'고도 표현한다. 자신들도 중국공민에 속하지만 사회의 주류인 한족과 구분할 때는 한족 중국인 vs 우리 조선족이란 구분의식이 있는 것. 한족을 비롯한 타 민족과 비교해서 조선족의 우월감을 표현할 때 '중국인들은 조선족보다 문명하지 못해 ㅉㅉㅉ'[60]라고 말할 때도 있다. 중국인이면서 한민족인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대국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백청강이 한국에서 출세하자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조선족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왜 자신들이 소속된 국가인 중국의 주석이 아니고 한국 대통령일까? 이건 중국 조선족의 의식 속에 역사, 민족, 국가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비유가 부적절하다. 조선족에서 한국 대통령이 나오는 것에 맞는 비유는, 버락 오바마가 케냐 대통령이 되는 것. 아니면 리셴룽이 중국 주석이 되는 것. 이는 조선족들 또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연평도 포격 사태 직후 한국을 무시하는 조선족이 발견되는 반면에, 한국식 민족주의로 무장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외치는 젊은 조선족도 발견할 수 있다. 서버가 중국밖에 없는 듯한 어느 조선족 커뮤니티에서는 이들끼리 역사, 민족, 국가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국 한족 애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 있냐', '아니 그럼 한국인들은 우리한테 잘해주냐?' 등. 특히 거주 지역이 지역이니 만큼 한국 어디선가 퍼온 듯한 고구려와 발해에 관한 게시물이 종종 올라오는데, 한국의 환빠의 영향을 받은 주장을 올리기도 한다.

즉, 태어날 때부터 민족과 국가가 같아서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한국인과, 태어날 때부터 민족과 국가가 다른 채로[61] 중국의 조선족으로 자라다가 이후 고국의 존재를 체감하게 되는 조선족의 민족의식 및 국가의식은 다를수밖에 없다. 위협적인 이민족이 없는 한국인은 국내에서 타 민족으로부터 차별당하거나 구분될 수가 없다. 하지만 조선족은 자신들과 엮인 국가가 중국이며 변경의 소수민족이라, 그 정체성에서 당연히 한국인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민족의식이란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주변 '국가'에 비교하고 대항하는 사실상의 국민의식이다. 그러나 조선족에게 민족의식이란, 절대다수킹왕짱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경계하는 소수민족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이다. 애초에 '민족의식'이란 단어조차 한국인, 조선족에겐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른 국가 교민들은 그 국가가 정체성을 강요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중국은 국가가 정체성을 강요하는 상황이라 조선족이 특히나 이런 혼란이 심해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이 자국 국민들에게 정체성을 강요했다면 재미교포도 한국인의 미국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땅에서 살면서 굳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스스로 완전 중국인이라 자칭한다면 중국어만 배우면 될 걸 왜 어렵게 하나의 언어를 더 배워 머리를 싸쥐겠는가? 자신들은 조선민족이고 그 아이덴티티를 잊혀 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소위 한국인이 한민족으로 승인하든 부인하든 조선족은 조선민족으로 살아 왔고 살아 갈 것이다.

이른바 친한/친중이라는 것도 사실은 한국을 싫어하는 중국인/중국을 싫어하는 한국인만큼 반한/반중 정서를 보이지 않는 상대적인 것에 가깝다.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이나, 다른 나라 국민들을 알아갈 때 실제 접촉보다 인터넷을 통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인데, 인터넷 정보는 언론사 뉴스를 포함해서 왜곡되었거나 편향적인 시각이 많고, 팩트체크도 자신의 확증편향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 한중양국의 이런저런 갈등으로 진영논리까지 개입되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되기가 십상이다. 가령 중국에서 무슨 흉악범죄가 벌어졌다고 하면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이 무슨 사람이 살지 못할 인외마경이고 중국인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인 것처럼 반응하지만, 한국에서 같은 타입의 범죄가 일어나면 그러지 않는다. 한국이란 땅에서 살아가며 그러한 모습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며, 한국의 멀쩡한 모습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들 역시 중국에서 살아가며 실제로 겪어보았기 때문에 흉악범죄 뉴스가 떴다고 해서 중국과 중국인을 무작정 악마화하지는 않는 것이다.

반대로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자국의 위인들과 문화를 도둑질하려는 줄 알지만, 조선족들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교제한 한국인이나 TV 등에서 보이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모든 한국인들이 환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조선족들 사이에는 이런 말도 있다고 한다. 조선족들이 한국을 욕하다가도 한족들이 한국을 욕하는 걸 들으면 괜히 기분나빠지고, 한족을 욕하다가도 한국인들이 중국을 욕하는 걸 들으면 괜히 기분나빠진다고. 많진 않으나 조선족들 중에서도 역시 현재 중국의 정치적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눈치를 챈 사람들은 중국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며, 심지어 드물게 한국으로 망명하는 조선족들도 있다.

이 또한 재일동포나 재미동포들의 한국인/조선인으로 자신을 자칭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중국이란 정치통제가 강한 독재국가에서 외국국적으로 살아 가긴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대혁명과 같은 험란한 시기에는 외국에 연고가 있다고 간첩으로나 반역자로 몰리는 사건이 부지기수고[62], 중국 국적을 가져야만 한족과 똑같이 땅을 분배받고 농사를 할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현지 국적을 택하는 것처럼, 중국에 기반을 둔 사람이 생활을 위해 중국 국적을 선택했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63] 또한 중국 국적을 택했다면 당연히 자신이 속한 국가인 중국에 애국심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국민을 외국인보다 먼저 챙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현지 국가의 정책에 맞춰 살아남는 방안을 찾았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한국과 중국 간의 정치적 긴장이나, 자국민들의 건전한 애국심을 침략전쟁이나 각종 범죄,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왜곡시킨 중국 지도부에 그 책임을 물어야지, 개개인을 비난해서 될 일은 아닌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처럼 2개 이상의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영어권에서는 TCK(제 3문화 아이)로 분류한다.

8.3. 동화[편집]

예전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해갈 때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끼리 집단으로 이주해 마을을 이루고 살아와서 언어, 풍습에서 민족성을 보호하기 쉬웠다. 마을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는 노인들은, 미국 LA 코리아타운에서만 사는 한인 노인들처럼 평생 중국 땅에 살면서도 중국어는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국의 적극적인 개혁개방 이후로, 조선족은 조선족 자치주와 동북3성을 벗어나 중국 내륙지역과 해안지역으로 이주해가면서 조선족 자체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한족에 동화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특히 자치주가 아닌 중국 내지의 도시지역에 사는 조선족 청소년은 조선어(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족 부모들은 중국어를 못해서 자기들이 주류사회에 편입 못하고 한국 회사나 다닌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64]

앞으로도 이런 경향은 크게 변할 가능성이 없으며, 더욱 많은 조선족들이 중국 내륙지역으로 이주해가고 있는 상황이기에, 조선족은 일부 한국과의 관계가 극히 긴밀한 개인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중국사회에 동화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 정부 역시 조선족을 비롯한 중국 내 여러 소수민족을 중화민족이라는 미명 하에 한족에 강제로 동화시키려 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재미교포의 예를 들어봐도 그렇지만, 이민자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해당 사회에 동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인구학적으로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절대적인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은 물론, 조선족 여성의 1인당 합계출산율은 0.98명(2010)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중국 정부의 2010년 인구 센서스는 0.622명을 합계 출산율로, 2000년 센서스에서도 0.699로 합계출산율을 계산하고 있다. 중국어 자료 그래서 그런지 자치주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있다. 중국에서 자치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법률상 인구 기준이 있는데 조선족 같은 경우는 동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을 조선족이라 생각하지 않는 조선족들이 증가하여 현재 35% 정도인 인구 비율이 30% 이하로 떨어질 확률이 꽤 높다.

중국 내 조선족 인구가 20년간 22만여명 감소해 170만명대로 떨어졌다.#

9. 중국 조선족 현황[편집]

한중수교 초기, 한국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사기가 아직도 연변 사회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고 한다. 도문시의 도시 재개발 사기사건에 시민의 반 가량이 연루되었다.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해서 상당히 익숙한 지명인 산둥성 칭다오시의 경우 한국인의 상습적인 임금체납, 사업장 부도와 그에 따른 경영진의 잠적 때문에 한족이 조선족에게 한국인 조심하라고 일러줄 정도로 분위기가 나쁘다.

조선족들 사이에 한국인을 '동족을 대우할 줄 모르는 야박한 사람'이라고 인식한다는 말이 있다. 캐나다, 미국, 독일 출신 한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이라서 받는 특혜와 재외동포라는 보호를 동시에 누리지만[65] 자신들은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 의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 대한민국에서 재외동포들의 법적인 지위에는 국적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없으며[66], 오히려 방문취업 비자[67] 등에서 특혜를 받는 면도 있다. 단지 대한민국 입장에서 조선족의 모국인 중국은 잠재적 적성국인데다 그 흔한 무비자협정조차 없는 개발도상국이지만, 미국 및 기타 서방국가들은 동맹국 내지는 우호국인데다 선진국의 일원으로써 민간 교류를 위한 각종 협약들이 체결되어 있다는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68]

9.1. 범죄 현황[편집]

10. 한국 조선족 현황[편집]

한국 내의 조선족 인구는 2022년 6월 기준 약 70만 명 정도로 집계된다.[69] 중국(조선족 포함) 귀화자는 2013년 5,380명, 2014년 6,650명, 2015년 6,477명, 2016년 5,126명, 2017년 4,781명, 2018년 4,838명이다.

10.1. 법적 지위[편집]

재외동포법에 의해 특정 조건을 만족한 한국 조선족에게는 재외동포 자격이 부여된다. "재외동포"의 법적 지위는 대한민국 국민에 준하는 것으로, 선거권·피선거권 및 일부업종 취업제한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리며, 무제한 체류가 가능하고,[70] "외국인 등록증"이 아닌 "외국국적동포 국내거소증"을 부여받는다.

원래 재외동포(F-4) 비자는 재미동포에 한정되었었으나[71],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고 재일동포, 재중동포 등, 부모나 (외)조부모가 한국국적자 혹은 한국국적을 소지한 적이 있었다면 신청이 가능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고려인에게까지 범위를 넓혀 적용하고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본인이 한국 국적자였어도 조건에 해당된다.

방문취업(H-2)비자는 구체적으로 조선족을 위해 만들어진 비자체제다. 방문취업 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인 2007년 비자 문제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가족 해체 등 고통을 겪는 조선족들을 구제하는 차원에서 5년 기한으로 언제나 왕래할 수 있게했다. 조선족을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달리 동포로서 포용한 정책이었다.# "방문취업제도"란 중국 및 CIS 지역(독립국가연합: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등에 거주하는 일정한 요건을 갖춘 만 18세 이상의 외국국적동포들에 대해 자유로운 출입국과 취업활동이 가능한 비자를 발급하는 것이다. 최초 입국 시 체류기간은 3년 범위 내이고, 고용노동부에서 취업활동 기간 연장 확인서를 받은 경우에는 입국일로부터 최장 4년 10개월 범위 내에서 체류가 가능하다.#

또한 귀화 자격을 심사할 때도 특혜가 부여되는데, 재외동포로서 2년동안 국민평균소득의 2배(약 5,000만원)에 달하는 연봉 기준으로 근로소득세를 납부하면 바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일용직노동자들은 5,000만원 연봉이라는 조건을 갖추기 힘들기에[72] 귀화자들은 대부분 조선족 중 상위 1%에 해당하는 유학와서 한국에 정착하고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들이다. 병역은 연령에 상관없이 현역에 가지 않고 바로 민방위로 편입된다. 단, 이는 조선족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모든 귀화자들에 대한 특혜이다.

과거 재외동포의 기준이 "한국인의 3세대 이내의 직계비속"인데 조선족과 고려인의 경우 대한민국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에 한국을 떠났기에 이들은 재외동포로 인정을 받기 위해 특별한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조선족의 경우 처음에는 중국 신분증에 조선족으로 표기가 되어 있어야 하고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중국 4년제 대학을 졸업해야 받을수 있었다. 그러다 점차 1948년 (정부수립) 이전에 태어난 고령동포까지 확대되었고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건설분야를 제외한 기능사 이상의 국가기술자격을 따면 받을 수 있게 크게 완화되었다. 4년제 대학 졸업자로서 재외동포 자격을 취득했다면 단순노동직(3D, 알바, 식당 종업원 등)에 종사할 수 없으며 전문기술직 소지자는 해당 자격증에 관련된 업무내용 이외에는 취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사판에서 일당을 뛰는 조선족들은 재외동포신분이 아닌 취업비자 H-3비자를 받은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H-3비자가 절대다수였지만, 요즘엔 자격증을 따고 전문기술직으로서 재외동포 자격으로 신분을 변경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한다.

과거에는 조선족 4세부터는 재외동포법상 동포가 아닌 외국인으로 분류되며 이에 한국 장기 체류가 어려웠다. 그러나 2019년] 7월에 기존의 동포 3세대까지만 재외동포로 인정하던 법률이 개정되어 전체비속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조선족 4세, 5세, 6세도 법적으로 재외동포로 인정되어 한국거주가 가능해졌다. 해당 뉴스

한편, 2005년 8월 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공직선거법 제15조 및 출입국관리법 제10조에 의거하여 영주권을 취득한 후 3년이 경과한 외국인 주민에게 지방자치단체장, 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시도교육감, 시도의원, 시군구의원 선거권이 부여됐다. 물론 이는 조선족이나 여타 특정 인구집단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며,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영주권자에게 부여되는 권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국적동포 현황#에서 조선족의 인구비율이 타 국가 출신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며, 때문에 과거 중공군 출신으로 한국을 겨냥한 침략전쟁에 가담하고 오늘날까지도 그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73]에게 한국 정치의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논란도 존재한다.

2020년대 대한민국은 체류 비자를 완화하는 등 조선족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2019년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대한민국 인구의 4.9%로, 2020년에는 통상 학계에서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보는 5%를 확실하게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개중 대다수가 조선족일 정도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중국인 정체성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인식이 나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의 여론이 있다.

10.2. 범죄율[편집]

수원 토막 살인 사건수원 토막 시체 유기 사건시화호 토막 살인 사건용인 토막 살인 사건 등 강력 범죄로 인해 한국 사회 내에서 조선족들을 잠재적 범죄자 집단으로 바라보는 부정적 인식이 생겨났다.

이를 해소하고자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언론의 인권보도준칙을 신설하고 이주민과 외국인 인권에 대한 보도준칙을 제작하였다. 인권보도준칙에 따르면, 한국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이 활동하는 신문사 및 잡지사, 방송사에서는 조선족이 범죄자라는 이미지에 연관될 수 있는 어떠한 표현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인권위는 주기적으로 실태 조사를 통해 조선족들에 대한 인권보도준칙 위반 사례를 공표함으로서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74]

attachment/조선족/국...

2012년 데이터에선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 범죄자가 63,889명으로 전체 외국인 범죄자의 58.5%를 차지하였으며 베트남인이 9,085명으로 8.3%, 미국인이 6,526명으로 6.0%, 몽골인 6,370명으로 5.8% 순으로 나타났다. # 2013년 데이터에서도 중국인이 6,354명으로 전체 외국인 범죄자의 59.3%를 차지해 가장 많았고, 베트남인 775명으로 7.2%, 미국인 642명으로 6.0% 순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는 앞서 인용했듯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중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번외의 이야기지만, 해당 통계에서는 인구 대비로 보면 의외로 미국인의 강력범죄율이 낮지 않은 편인데, 형사정책원 자료에 따르면 주한미군, 군무원 및 그 가족들은 외국인 등록을 하지 않으므로 분모가 실제보다 작게 선정되어 있어 좀 더 높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

인구 요인을 배제하려면, 국적별 국내 체류 외국인 수 대비 범죄자 수를 비교해야 한다. 경찰청이 펴낸 '외국인 밀집 지역의 범죄와 치안 실태 연구'를 보면, 2016년 기준 외국인 등록자 기준 10만 명 당 외국인 범죄자 국적별 검거 인원은 다음과 같다.#
국적
인구
러시아
4,837
몽골
4,678
우즈베키스탄
3,221
태국
3,184
파키스탄
2,904
방글라데시
2,429
중국[75]
2,220
스리랑카
2,022
베트남
1,576
미국
1,341
필리핀
1,181

구체적으로 보면, 살인의 경우 중국인 범죄자 비율이 다소 높았다. 지난해 국내에서 검거된 살인범(미수 포함) 995명 가운데 외국인은 108명으로 11%였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외국인 인구 비율(4.9%)의 2배가 넘는다. 이 가운데 중국인은 65%로 전체 외국인에서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52.8%)보다 높았다. 그러나 살인과 강도를 제외한 강간·강제추행·절도·폭력·사기 등 다른 중범죄 유형에서 중국인 비율은 총인구 대비 중국인 비율(2%)보다 낮았다. 또한 중국인 집단과 조선족 집단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동일 조사에서 내국인의 10만명당 범죄자 수는 3,495명으로 나타났으나, '예비군 소집 불이행'처럼 외국인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죄목도 많이 존재하니 천편일률적인 비교는 어렵다.

2020년에 중국 국적 불법체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서는, 10만명 당 범죄자 검거 인원은 1,217명으로, 외국인 평균(833명)보다 다소 높게 나타났다.[76]

10.3. 외국인 노동자로서[편집]

이 조선족들이 많이 진출한 분야는 건축, 토목으로, 흔히 3D 직종으로 불리는 업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높다. 여성들은 요식업 쪽 일이나 가사도우미가 많은 편이다.

일자리와 임금에 관련하여, 이 부분은 대한민국의 이민정책에 대한 찬반논란과 연결될 수 있기도 하다.

10.4. 한국인의 정서[편집]

2000년대에는 조용한 중국의 모습에 그냥 한민족이라는 인식 정도였고, 2010년대 후반 이후 같은 혐오 정서는 없었다. 그 전은 더해서 1980년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이전 KBS가 조선족의 가족을 찾아줄 정도였으며, 아예 만주에서 태어난 유명 인사인 문익환 같은 사람들이 1945년에 귀국하여 한국에서 큰 영향을 미치며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도 했다. 윤동주송몽규도 북간도 출신 한국인으로 인식되었다. 이순재 같은 유명 인사도, 자신이 조선족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2010년대 초반까지 이런 정서가 한국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2001년 강성범이 실제와 차이가 크지만 '연변총각'을 연기하기도 하였고, 2005년에는 댄서의 순정이라는 영화에서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던 문근영이 주연으로 조선족을 연기하기도 하였다. 2011년까지는 백청강이 MBC 위대한 탄생이라는 오디션에서 우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청강은 연변 사투리에서 유래한 '앙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낼 정도였는데, 2010년대 중반 이후의 관점에서는 생경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그러나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는데 이들이 중국인 정체성을 가진다고 하여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한민족이 사는 다른 나라들은 그 나라를 옹호해도[77] 그런 나라들이 한국을 위협하지 않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불편하지 않지만, 중국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한국을 배척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아예 혐중 수준으로 눈이 뒤집히지 않은 이상 지명광 씨같이 중공에 대항하는 사람, 나는 귀화를 했으니 한국사람이라는 일부 조선족은 인식이 좋다.[78] 중국은 복수국적이 허용되지 않기에 귀화는 중국 국적을 버렸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조선족이 연루된 범죄가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주요 요소였다. 일부 조선족에 의한 보이스 피싱몸캠 피싱,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등의 원격 범죄가 사회 문제가 되면서 대중의 인식을 나쁘게 하는데 일조하였고, 오원춘 사건과 박춘풍 사건 등 조선족이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조선족 관련 뉴스 기사나 영상의 댓글은 조선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어찌나 인식이 안 좋아졌는지, 범죄 피해자가 되어도 오히려 피해자가, 오직 조선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받고 조롱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피해자가 조선족, 가해자가 한국인이고 토막살인이라는 끔찍한 흉악범죄 사건에서도. 매체에서도 이러한 영향으로 황해범죄도시청년경찰과 같이 조선족이 등장하면 범죄와 유관한 경우가 많다. 황해나 범죄도시는 그나마 조선족이 피해를 받는 모습도 섞여 있는 영화지만 청년경찰은 대림동의 한국인도 불편함을 드러낸 경우가 있었다.

특히 2012년 시진핑의 집권 후, 특히 한한령 이후 중국의 패권주의가 심화되고 한중관계의 정치적 대립이 빈발하면서, 한중의 경계선상에 놓인 조선족들의 상당수가 중국편을 들게 되었고 이에 한국인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생겼다.[79][80] 오히려 경제성장해야 한다면서 한국의 눈치를 보고 항미원조 같은 소재를 다룬 작품은 다 만들고도 방영하지 않은 장쩌민후진타오 시대까지는 지금보다는 정치적 여건이 나았다. # 동북공정 같은 것은 2000년대 중후반에 정치의제화된 사건이지만 당시에는 조선족의 반응이 생각보다 미지근한 것이 논란이었다. # 중국이 드러내놓고 한국을 위협하는 수준이 아니라 비교적 은밀하게 소수민족 문제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조선족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는 갑론을박이 있는 주제이지만, 조선족의 문화나 특성, 하다못해 현실을 잘 파악하지도 못한 채 막연한 불신과 혐오감만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말하자면 딱히 조선족 말투나 문화라고 입증할 근거는 없지만 어색하니까 조선족이라는 식인데, 개중에는 조선족 사회에서도 사용하지 않거나 어색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조선족에 대한 정치적 문제도 한국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어 누구를 옹호하고 비판해야 하는가하는 혼란도 생긴다.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다정한부부 논란에서도 미역국에 파, 당면을 넣는다거나 말투, 억양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조선족 몰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억양은 강원도 영동 남부의 사투리라고 하며, 주민등록등본 공개와 SBS 궁금한 이야기 Y 출연 등으로 순수 한국인임이 밝혀졌다. 이외에도 태백산맥 동쪽 중 부산, 더 나아가 대구광역시 인근 사투리가 아닌 대중적이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나 영동 방언을 쓰는 사람들은 조선족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생겼다. 컨디션에 따라서는 영남 전역, 충청북도의 방언을 쓰는 사람까지 이에 관한 경험이 있다. #
  • 베이징 동계 올림픽 당시 개막식의 조선족을 묘사한 식전행사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묘사 자체는 그냥 남북한 문화를 따라해도 쉽게 틀리지 않으니 틀린 건 아니다.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문화의 정체는 함경도 문화라고 보면 된다. 북한 취재로 유명한 함경도 출신 주성하 기자는 아예 "중국 쪽이 옛 함경도 사투리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 중국은 자신이 소수민족의 문화를 보존한다는 주장을 위해 1980년대에도 화폐에 한복을 등장시켰고, 대신 이들에게 중국인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 식전행사에 등장한 강원도[81]북한 일부 지역 일대에서 먹는 '과즐'이라는 한과를 두고 "어디가서 저렇게 한과 만들었다가는 뺨맞는다."라고 주장한다든가, 한국에서도 쓰는 유기 막걸리잔을 두고 중국식이냐고 비아냥거린 일이 있었다. 중국 유튜버 전서소가의 쌈 논란과 결합하여 중국이 묘사하는 한민족 문화는 어색할 것이라는 반감이 생긴 것이지만#삼척 일대에서는 친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는 한과이기에 이를 접한 사람은 난감할 수도 있다.
  • 심하게 보면 함경도 문화를 북한과 교류가 더 쉬운 중국이 잘 아는 듯한 모습도 있다. 가령 함경도 사투리가 남아있는 탈북민 같은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을 싫어해도 조선족이냐며 비난을 받는 사례가 종종 있다. '니 내 누군지 아니' 같은 말투로 이미지가 나빠진 함경도 사투리도 중국이 아니라 북한이 가장 많이 쓰고 고려인이나 시인 윤동주 같은 사람도 썼으나 '중국말'로 여겨지는 양상이다. 탈북민 방송인 박유성 씨는 연극영화과 대학 입시에서 북한말로 고향인 함경도 북부의 사투리를 써보니 조선족 말투를 쓴다며 탈락하기도 했다. # 영채김치나 추어탕을 '세치네탕'이라고 부르는 함경도 풍습도 조선족만의 풍습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예 한국어를 잊고 중국어를 하는 경우가 많은 연변 이외 지역 출신보다 연변 출신처럼 오히려 함경도 말투를 주로 쓰지만 한국어를 하며 중국인 정체성을 갖는 것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오히려 크다. 사실 중국공산당에 더 동조하는 쪽은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한국 매체를 접하기 힘들어 더 세뇌되기 쉬운 중국어를 즐겨쓰는 조선족이다. 일부는 중공이 한국어를 탄압하는 것 같으면 저항하기도 한다. 함경도는 중국이 아니라 법적으로는 헌법 제3조 등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일부이며, 문화적으로도 풍산개명태 등으로 유명한 한국 문화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며, 다른 정치적 관점에 따라서도 북한의 지방일 뿐이지 중국과 엄연히 다르다.
  • 일부는 자신이 모르는 한국식 한자어를 두고 어휘력의 부족을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조선족 말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 조선구마사 논란에서도 박계옥이 조선족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인 남성의 이름으로는 어색하다는 것. 그러나 박계옥은 한중수교 이전인 1989년에 동국대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여러 자료에서 군대를 다녀왔다고 언급되어 있다. 드라마 제작사 측에서는 "조선족은 물론 중국계도 아니며, 중국에 살지도 않고 그 곳에 친척도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 인터넷에서 말귀를 못알아먹고 어그로만 끄는 이들을 조선족 취급한다. 인신공격할 때 '너 조선족이지?'[82]라고 찔러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 한 조선족은 니가 중국인인 줄 모르고 너희 음식을 시켰다며 화내는 사람에 대해 자신을 민족 정체성을 없애려는 중국 정부에 반항하며 시위하다가 입국 금지된 조선족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윤동주와 같은 민족이라며 중국에서 들은 대로 '조선족'이라고 하는 바람에 화를 돋구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부의 주장으로는 '중국 정부에 비판적이고 단지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교육받지 못했을 뿐인 사람은 고려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장도 나온다. ##

10.5. 한국 사회로의 동화[편집]

이 문단은
 토론을 통해 내용을 다문화주의/중도(=온건 다문화주의)/동화주의 3개 단락으로 분류하며, 문화와 정치관이 상관있느냐에 대한 언급을 배제한다. 조선족의 정치관 관련해서는 제도권 언론(7순위)이상의 근거를 본문에 제시할 경우에 한해 서술을 허용하고, 해당 근거를 바탕으로 추가적인 사견은 작성을 금지한다.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21세기 들어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부상하고 한중교류가 확장되면서, 대한민국의 조선족 이민자들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2019년 통계에 따르면, 국내 거주 외국인 252만여 명 가운데 조선족은 70만 1,098명으로 가장 큰 인구 집단에 해당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들은 주류 한국인 집단과 유리된 채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 인접한 한국인들과의 갈등도 빈번한 형국이다. # 또한 조선족 가운데는 중국 본토에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어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본토의 중국어 내지는 중국식으로 변용된 조선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 때문에 이처럼 다종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는 조선족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는 한국사회 내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조선족에 대한 여러 시선들은 결국 다문화주의 대 동화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급진 다문화주의자들은 조선족 커뮤니티가 대한민국의 다른 외국인 집단보다 특별히 위험하다는 근거는 없으며#,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편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대해 온건 다문화주의자들은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조선족들이 한국 사회가 각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어 나가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원칙에 동의할 필요는 있다고 주장하고, 반대로 동화론자들은 마땅히 중국적인 정체성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받아들여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한다. # 단, 다문화주의든 동화주의든 모두 사회의 기존 구성원들 간 민주적 합의를 거쳐 이루어져야 하며, 국제적인 보편인권의 기준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음은 유의해야 한다.[83]

들어가기에 앞서, 대한민국 내 조선족 집단의 정치·사회적 인식에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연관성이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에서 대체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국가인 중국에서의 교육으로 인해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족의 정치적 인식을 통계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에서의 정치 환경에 노출된 조선족들은 낮은 정치적 효능감[84]을 갖게 되어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적 경험을 보다 빨리 습득하기도 한다.[85] 실제로 설문조사에 참여한 조선족 중 절반 가까이가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다만, 이러한 연구 결과들이 조선족 집단이 가진 이질적인 정치관이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동일 논문에서는 선거 과정의 투명성이나 다원성 존중 측면에서 한국이 9.17점을 받은 반면 중국은 북한과 동일하게 0점을 받았음을 지적하며, 조선족들은 양극단에 있는 정치체제를 경험하며 독특한 정치적 태도를 형성할 것이라고도 지적한다. 또한 중국에서의 사회적 계층이 높을수록, 한국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한국 거주 기간이 길수록[86], 한국사회에 대한 신뢰도가 높을수록, 한국에서의 월 평균 소득이 높을수록 대체로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으로 나타났다. 즉, 조선족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한국에서의 경험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는 경향이 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급진 다문화주의자들은 조선족이 민주주의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집중한다. 즉, 기존에 조선족 문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졌던 비민주적 인식이 유의미하지 않다고 판명난 이상,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함양하는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어떠한 걸림돌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선족들은 다른 이민자나 재한 외국인 집단과는 달리, 중국에서 중국 조선어로 된 방송을 하거나 시청할 수 있고, 교육도 조선어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재한 외국인 중에서는 한국어 구사율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요약하자면,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를 향유할지는 개인의 자유이므로, 조선족 집단이 특정 문화를 향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체주의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된 논지이다.

반면, 온건 다문화주의자들은 조선족들의 한국에서의 경험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좌우한다는 결론에 집중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와 조선족 집단 사이의 문화적 동질성에 관한 급진 다문화주의자들의 지적에는 공감하지만, 소위 정치적 효능감의 문제에는 여전히 미온적이다. 거칠게 말해 한국인이라면 한국이나 다른 서방진영에 속한 국가들에서 나쁜 경험을 했다고 그걸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짓지는 않는다. 반면, 조선족에게 민주주의란 한국이라는 타국의 제도(='이주국에서의 경험')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나쁜 경험이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조선족 집단의 문화적 다원성은 한국 사회에 기여할 여지가 충분하며, 중국어 화자인 조선족일지라도 중화사상에는 비판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유창한 한국어로 중국의 잘못된 이념을 옹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정치·사회적인 관점에서는 주류 한국인들에 비해 여전히 잠재적인 위험 요소이며, 따라서 한국 사회가 이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대우[87]·교화[88]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동화주의자들은 가치관의 형성 과정에서 정치·사회·문화적 요인들은 실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역설한다. 비단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만이 문제가 아니라, 중국에서 교육받으며 중국의 생활환경에 노출되다 보면 중국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은 여전히 한국전쟁을 부끄럽기보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인식#하며, 국가적으로 그러한 프로파간다를 담은 "미디어"를 제작#한다. 조선족들은 당시에도 인민지원군의 주력이었을 뿐 아니라# 일부는 아직까지도 그런 인식을 가진다#. 이러한 것들과 '중국어를 쓰는 것, 중국 음식을 먹는 것'들을 뒤섞어놓고 "여기까지는 정치·사회적, 여기서부터는 문화적"이라고 칼로 자르듯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89] 또한 동화주의자들은 온건 다문화주의의 관점을 일부 공유하지만, 정치적 효능감의 문제에 대해 "조선족들이 한국인과 '여전히 다르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반응 역시 한국인과 다른 것"이라고 해석하며, 따라서 동화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90] 즉, 중국 지린성 출신 박우 교수의 시사인 인터뷰에서 지적하듯, 분리수거·고성방가·흡연 등 공공 질서에서부터 교통정리같은 사회 내의 암묵적인 합의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충돌'은 결국 '살아온 체제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때문에 동화주의자들은 조선족을 박우 교수의 표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사회와 모든 면에서 동화하여)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한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11. 창작물[편집]

2010년대 전에는 재미교포나 재일교포 등과 더불어 교포출신 인물의 배경으로 나오는 정도의 수준이었으나[91] 2010년대 들어서 조선족들의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진 여파인지 창작물에서는 범죄자 등의 폭력적인 성격을 띄는 포지션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주로 대림동 등지의 마구잡이 조폭 세력으로 등장하는 경우와 신세계나 베테랑에서처럼 히트맨으로 나오는 경우 등이 있다. 3d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 밀입국한 불법체류자, 범죄조직을 이루고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는 것이 미국 영화에서 묘사되는 멕시칸들, 90~00년대 일본 영화에서 묘사되는 재일한국인들의 위상과 동일하다.

2010년 영화 황해, 2017년 청년경찰범죄도시 같이 조선족 범죄 세력들이 주적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제법 나오고 있다. 다만 <범죄도시>의 경우 혐오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감안한 모양인지 조선족이 한국 경찰과 협력하는 모습도 섞여 있기도 하다. 애초에 '조선족 범죄 조직'이 주적인 것일 뿐이지 조선족 자체가 결코 나쁘게 나오지는 않으며 경찰에 협조하는 조선족 상인들이나, 개그캐로 나오는 조선족 깡패들, 주인공 마형사가 첩보원으로 부리는 조선족 형제, 단골 식당 주인 할아버지와 손자 등 조력자, 선역, 중립 포지션의 조선족들도 많다.

12. 조선족의 분포 지역[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조선족/분포 지역 문서
 참고하십시오.

13. 인물[편집]

13.1. 대한민국[편집]

13.1.1. 가족이 조선족이거나 조선족 출신인 인물[편집]

13.1.2. 조선족이었다가 한국으로 귀화한 인물[편집]

13.2. 중국·그 외 국가[편집]

13.3. 기타 개별문서가 없는 유명 인물[편집]

  • 강경산: 중국공정원 아카데미회원, 중국의 달 탐사 프로젝트 담당 수석 설계자, 863 항공 우주 전문가 자문위원회
  • 김인섭: 중국 인민해방군 중장, 전 중국인민해방군 무경총부참모장, 성도군구참모장, 제9차 전국인대대표, 제10차 전국정협위원
  • 김일광: 북경화공대학 교수, 첫 번째 통계역학 그룹이론 설립자
  • 김저일: 중국공정원 아카데미회원, 973프로그램 선임연구위원, 863프로그램 주제전문가
  • 김현댁: 중국 종양의학의 아버지
  • 이상송: Long March 4B[99] 로켓설계 총지휘자
  • 한대원: 중국인민대학 법학원 원장, 교수, 중국법학원 헌법학연구회 회장
  • 한경청: 전문가 시스템 및 제어 이론과 응용의 초기 개척자
  • 임현욱: 전 중국 국가통계국 부국장, 수석 통계학자, 제11차 중국정협의원
  • 이영태: 중국 인민해방군 중장, 전 공군 부사령관
  • 정순주: 중공 제13차 대표대회대표, 제8차 전국인민대대표, 제9/10차 전국정협위원
  • 전철수: 중앙통전부 부부장, 전국공상련당조서기, 상무부주석, 중국민간상회부회장, 중공 제15/16/17차 중앙후보위원, 18차 중앙위원, 제8차 전국인대대표, 제11차전국정협상
  • 라치환: 중국 최초의 세계 스피드 스케이팅 챔피언
  • 박문요: 중국 장기 프로바둑 9단
  • 송용혜: 중국 장기 프로바둑 9단
  • 고종훈: 전 중국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 고준익: 축구선수, 현재 광저우 헝다 소속, 고종훈의 아들
  • 박성: 축구선수, 현재 베이징 궈안 소속
  • 백악봉: 축구선수, 미드 필더, 현재 톈진 터다 소속
  • 고만국: 축구선수, 현재 선양 둥진 소속
  • 장천일: 작곡가, 총정치부가무단단장, 국가일급작곡가, 정협위원, 중국음악가협회리사, 중국음악가협회 청년음악가분회 부회장
  • 금봉호: 작곡가, 국가일급작곡가
  • 황서: 코미디언, 화학공학자
  • 석산린: 창닝그룹 회장, 제 7/8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 중화전국공상업연합회 상무위원
  • 라영호: Bullog과 Smartisan의 창시자 겸 회장
  • 문일환: 교수,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언어문학학원원장, 중국 소수민족언어연구소 소장
  • 정준화: 배우. 레전드히어로 삼국전의 사마의로 출연
  • 변영화: 가수.
  • 정소제: 음악가. 작곡가 정율성의 딸
  • 김미아: 가수.
  • TheRealPEKKA: Geometry Dash 유저. 인게임에서 몇 안 되는 조선족 유저이다.

13.3.1. 여담[편집]

  • 김일성이 조선족으로 인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5살 때 처음 만주로 이주하고, 평양에 2년 머무른 것을 빼고 1945년까지 만주와 소련을 떠돌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친 선생도 중국인인 인민대학 교수가 된 상웨인데, 그를 '조선족'으로 묘사했다. 1990년에 중국 드라마 <커왕>(渴望·갈망)이 수령님이 좋아하신다면서 평양에 유행이 된 것을 두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김일성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20여년을 산 조선족 출신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김일성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진지첸'이라는 중국식으로 읽어 소련의 문서에도 이 표기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 안도는 현재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고 당시에도 조선의 영역은 아니었다. 심지어 북한에서는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람(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들의 지시로 외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것밖에 더 있느냐."라고 박헌영을 더 옹호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 그 후에 소련군 눈에 들기 위해 조선인이라는 주장을 강조하고#, 그는 안도현장 따위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한반도 적화통일을 꿈꾸는 지배자로 탈바꿈한다. 절대 권력을 추구한 그는 중국의 간섭도 용납하지 못해 주북한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14. 관련 자료와 문서[편집]

15. 같이 보기[편집]

[1] 중국조선족(中国朝鲜族)으로 불릴 때도 있지만 정식 명칭은 조선족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부 - 민족소개 - 조선족[2] (ethnic) Koreans in China라고 하면 중국에 있는 모든 한민족(조선민족) 인구를 말하는 것이고, Korean Chinese라고 하면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조선족을 의미하는 것이다.중국대학 당위통전부 - 조선족 소개 영어 문법 혼동 혹은 한국인과 중국인의 차이를 숙지하지 않은 경우에 Chinese Korean이라고 논문 등에서도 오기(誤記) 해버리고는 하는데, Chinese Korean은 중국계 한국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 혈통의 대한민국 국적자를 뜻하는 것이라, 조선족을 영어로 기재하려면 Korean Chinese (with Chinese citizenship)라고 표현하는 게 타당하다.[3] 중국 한정[4] 중국내 조선족인구[5] 무단장시 같이 연변 밖에서도 많이 살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 정착하는 조선족도 늘어나서 현재는 이미 연변의 조선족 수가 한국 거주 조선족 수보다 적어졌다. #[6] 자세히 보면 지도 중간에 있는 후베이성이 허베이성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허베이성은 베이징시톈진시 등을 둘러싼 트브,경기도 정도의 지위이고, 후베이성은 중국의 예카테린부르크이라 할 수 있는 우한시를 끼고 있는 성이다.[7] 2022년 기준 한국 거주 조선족은 70만 안팎이고 지린성이 94만명, 헤이룽장성이 27만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8] 대한민국이나 북한에서는 연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특히 북한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자신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연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9] 중국 보통화와 한국 표준어의 공식명칭은 모두 조선족(朝鲜族)으로, 세계의 조선민족(朝鲜民族) 혹은 한민족(韓民族)과 분리해서 표현할 때, 중국의 소수민족임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중국조선족(中国朝鲜族)으로 붙여 적는다. 본래, 한자문화권에서 표기하는 조선족(朝鲜族)이라는 명칭은 중국조선족의 약칭이 아니라 조선(朝鲜)계의 모든 중국인민들을 통칭하는 민족명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민족계를 표현할 때, 한국인 혹은 조선인 등 타국 국민을 표기하듯이 하는 것이 보통이고 중국의 조선족만을 조선족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해외조선족(海外朝鲜族)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남한이나 북한의 조선민족 인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땅에서 해외로 나간 중국조선족만을 의마한다. 중국 정부 당위통전부 중국어 자료에서 알 수 있듯, 조선족이라는 명칭 자체가 중국 소수민족 조선족만을 의미하고(朝鲜族的称呼特指中国少数民族)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진 중국인이라는 뜻이지만 굳이 중국이라는 단어를 간혹 앞에 붙이는 이유는, 중국이라는 국가 소속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형성과 정체성신화망대한민국 정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10] 한국인과 북한인은 족(族)을 붙이는 대신에 인(人)을 붙여서 한국인과 조선인으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이다.[11]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 중화 각 민족 - 조선족 문서 참조.[12] 현재는 자치주이다. 자치구는 성급(省级) 행정단위고 자치주는 지급(地级) 행정단위인데, 성급 행정단위 아래에 지급 행정단위가 있다.[13] 주로 병역의무가 없는 조선족 여성들은 한국 국적을 더 많이 취득하는 편이다.[14] 중국베트남일본 등을 포함한 한자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한다. 대한민국이 외교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후에 한반도라고 적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15] 조선족들이 벼농사를 짓는 지역이기도 하다.[16] 청나라 시대 만주족은 엄연히 귀족이었고, 만주족이 아닌 이상 만주에 체류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팔기군에 소속된 한국인들이 만주족에 편입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청나라 치세 당시에는 한족 중 청나라 황실의 총애를 받은 경우나 벼슬을 받은 사람들이 종족을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바꾸는 경우에서 보듯, 청나라 당시 만주족은 민족 집단이라는 개념만 있던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지배 계급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17] 청나라가 변발을 강요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18] 마르크스주의에서는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로 한정지었다면, 블라디미르 레닌은 당시 빈농과 소수민족이 많았던 러시아 상황에 맞추어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 외에도 농민과 소수민족으로 확장하였는데, 이러한 레닌의 소수민족 정책은 민족자치구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19]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으로 이어지는 시대 중국국민당의 장제스는 소수민족들을 한족으로 완전히 동화한다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부쳤으나, 당시 군벌들이 활개치던 상황에서 중국의 행정력이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 잘 닫을 턱이 없었고 이런저런 문제만 발생시켰다. 이를 목격한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 전후로 "민족 자치 구역을 설정하고 구역 내 소수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한다"는 식으로 한 발 양보하는 척하는데, 그 결과물이 중국 내 여러 소수민족 자치구이다.[20] 북한으로 넘어가는 인구가 있었다.[21]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중국에 비해 오히려 정상적인 나라였다. 경제적으로도 북한이 중국을 앞섰는데, 중국이 북한의 GDP를 1994년 앞선다.[22] 마오쩌둥의 조카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신강 위구르인한테 살해당했고,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동북의 태상황’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마오위안신이 연변에 왔던 사실은 중국 정부의 기록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고, 후술할 연변의 조선족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통해 공개되었다.[23] 한복을 입은 사진이 나오면 처벌했다.[24] 족보의 경우, 이것을 발견하는 즉시 반혁명분자 내지 지주/유학자계급으로 분류하여 극형을 내리기도 했다.[25] 제목에 '10년의 약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에는 사연이 있는데, 저자인 한국인 류은규가 조선족 사료를 수집하면서 문화대혁명 때의 공백을 백방으로 찾던 중 1999년 용정시(룽징)의 조선족 사진가로 문화대혁명 당시 연길현문화관에서 근무하면서 연변에서 벌어졌던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사진으로 찍었던 황영림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류은규는 그를 찾아가 몇 차례나 설득한 끝에 그가 당시 촬영한 사진을 얻어 <잊혀진 흔적-사진으로 보는 조선족 100년사>(2000년)를 엮을 수 있었다. 황영림이 류은규에게 사진을 줄 때, “사진을 당신에게 주겠으나, 바로 공개하면 절대로 안 된다. 꼭 내가 사망 후 공개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찍은 사진 6천 장을 모두 류은규한테 넘겼고, 황영림이 2006년에 타계한 뒤에 류은규는 그와의 약속대로 그 사진을 공개했던 것이다. 이것이 부제 ‘10년의 약속’이 붙은 연유다.[26] 홍범도 등[27] 설립 당시에는 자치구였다.[28] 이 때문에 까오카오 외국어 과목에 한국어가 없다.[29] 중국에서 말하는 공정이란 단순히 알려진 것처럼 역사만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모든 인문, 환경, 경제를 조작하는 것이다.[30] 식당에서 연변 조선족들이 식사를 하는 도중 흑룡강성 조선족의 억양이 들리면 식사도중 나가면서 흑룡강성 조선족 방향으로 침을 뱉고 나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31] 이를 '완전중학교'라고 한다.[32] 길림성에 있다.[33] 독립운동가 이홍광을 기념하여 이름을 바꾸었다.[34] 김해영, 2018에 따르면 길림성(연변 제외) 학교 22개 중 10개가 한어를 제외한 과목을 조선어로 수업, 2개가 조선어문을 제외한 과목을 한어로 수업, 12개가 일부는 조선어 일부는 한어로 수업한다고 하며 한어를 제외한 과목을 조선어로 수업하는 학교는 10개 중 8개가 소학교였다.[35] 과거에는 10점이었다.[36] 요녕성 조선족 사범학교와 요녕성 몽골족 사범학교가 통합하여 세워짐.[37] 참고로 중국 소수민족 언어/문학 전공으로서의 조선어문 전공과,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전공은 동일하지 않다.[38] 특히 남한 출신 조선족들[39] 물론 중국에서는 외국인들이 투숙하는 호텔같은데가 아니면 자국 위성방송만 시청할 수 있으며, 셋톱박스의 펌웨어도 chinasat만 수신되도록 구현되어있다.[40] 구한말 초기에 만주나 연해주 등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경우, 쌀농사(농사이면서 논농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매우 강해 집착으로까지 받아들여질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열대~아열대 지방에서 널리 재배하는 작물로써 춥고 겨울이 긴 만주나 연해주에서는 재배하기 불리한 작물인데도 굳이 벼를 재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며, 이 때문에 소련령 연해주에서는 조선인들이 중심이 된 집단농장이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밀어올리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할 정도.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기 전 이야기다.)[41] 만주어 "하르빈"의 중국식 음차다. 한국 독음으로 적어봤자 무의미하니 참고용으로만 보면 된다.[42] 특히 을축년 대홍수 이후에 터전을 잃은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이 많이 이주했다.[43] 여담으로 조선족이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창작물 중 하나인 범죄도시에서 장첸 일당은 경상도 어휘나 억양이 섞였다는 반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함경도 사투리다. 함경북도 출신 탈북민인 김필주 씨가 연변의 조선족을 대상으로 익힌 말투라고 한다. # 굳이 따지자면 함경도 말투가 경상도 말투와 공유하는 점이 있다. '너'를 '니'라고 한다든지, 성조가 규칙적으로 대응한다. 함경도 말투를 쓰는 고령층 고려인의 말투도 이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44] 심양, 철령 등[45] 한국 국적의 젊은 화교들도 한국어 문장에 단어나 관용구는 중국어를 쓴다거나 하는 식으로 양쪽 나라 말을 같이 쓰는 케이스가 있다. 이런 경우는 집에서 중국어를 쓰고 학교는 한국 원주민과 같이 다녀 양쪽이 섞인 경우다.[46] 예를 들면 "밥을 먹습니다"를 "밥으 먹습꾸마"[47] 예를 들면 "~입니까"를 "~임둥", "합니까"를 "~함둥"[48] 예를 들면 "일을 합시다"를 "일으 하기입소", "빨리 합시다"를 "날래 하겝소"[49] 예를 들어 喜歡(시환)을 稀罕(시한)이라고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50] 그마저도 화교나 히스패닉 같은 예외도 존재한다.[51]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 한인 축제가 열렸는데, 현지에서 태어난 교포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걸어놓은 장면을 보고 중국 조선족이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지만 중국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행동을 하는 즉시 요주의 인물이 되고 끌려갈 것이라고 한다.[52] 특히 재중교포들과 재일교포들의 경우 중국과 일본이 6.25 전쟁, 일제강점기로 한국에 개입한 역사가 있고, 현대에도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보니 똑같은 가치관을 가져도 재미교포들보다 취급이 좋지 못한 경향이 심하다.[53] 다만 외질은 독일 국가대표로는 활동할지언정 터키계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편에 속하며, 이런 외질의 행태에 독일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특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터키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논란이 되는 정치 행보들마저 옹호하는 태도가, 에르도안의 반민주적 행태를 비판하는 독일 정부 및 국민정서와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대체로 이중국적 선수들이나 이민자 출신 국가대표 선수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이유만으로 강하게 비판받지는 않으며, 그런 행동은 극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일례로 폴란드계 독일인인 루카스 포돌스키 역시 국적이 독일이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어 있으니 최선을 다한다 말할 뿐 폴란드계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편이지만, 이 이유로 비판 대상이 되진 않는다.[54] 사실 외질의 사례는 터키계 독일인이 독일에서 생활하며 생긴 문제이므로, 조선족(=한국계 중국인)이 한국에서 받는 비판보단 중국에서 받는 비판, 혹은 화교(=중국계 한국인)들의 대한민국 내 처우에 비교해야 한다. 단지 조선족이 부분적으로 중국인 - '한족'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자' - 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딱히 이상한 건 아니라는 정도 얘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55] 유연한 필체로 "금천구"를 간체로 적은 점(한국 표준 표기로는 衿川로 표기하지만, 중국의 간체자 표기로는 衿川로 쓴다. 다만 우리도 필기시에는 区로 쓰는 경우도 많으니 区로 쓴다고 중국인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区 표기는 일본어에서도 사용되기에 더더욱 그렇다.(ex, 도쿄도 치요다구(東(东)京都 千代田区)중국에서 간체자 만들때 기존에 쓰던 약자나, 속자로 만든경우도 많다.) 현대 한국어의 격식체인 해요체와 어미를 혼동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문구를 적은 사람은 조선족일 가능성이 높다.[56] 정확하게는 1990년대 초반부터 나온 말이기는 하다. 남한이 북한을 완전히 찍어누른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북한의 경제는 1970년대부터 둔화 기미가 보이다 80년대 삽질을 거쳐 완전히 무너졌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 오면서 역전을 확정지었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6-7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보다 가난했으나 한강의 기적이후인 80년대부터 고도성장으로 다가갔다. 90년대 후반에 IMF가 오긴 했으나 이미 극복하고 경제강국으로 올라섰다.[57] 6.25 전쟁 직전에 중국에서 귀국한 조선족으로 편성된 인민군. 6.25전쟁 당시 상당한 전투력을 자랑했다.[58] 다만,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들의 한국 전쟁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은, 북한이 먼저 침략한 것은 인정하더라도 남한도 미군을 등에 업고 북한 영토까지 들어가 통일을 시도했으니, 미군 포지션으로 중국이 개입하여 북한이 망하지 않게 도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점을(항미원조)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 물론 아예 북한군으로 참전해서 침략전쟁의 선봉을 맡았던 이들은 이런 허울뿐인 변명도 안먹힌다.[59] 현재에는 한국의 경제수준이 많이 올라왔고 한류의 유행이나 이중언어 교육의 장점 등이 강조되면서, 재미교포들이 자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비율이 과거보다 높아졌다.[60] 여기서 문명(文明)이란 현대적인 시민의식, 개화 정도를 의미.[61] 게다가 고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이 바로 옆에 붙어 있다.[62] 현재 북한과 별다름이 없을 것이다.[63] 현대 사회에서 국적은 개인의 선택이다. 어떤 나라에 태어났다고 그 나라에서 평생 살아야 할 이유는 없고, 내가 몸을 의탁하고 보호받으며 그 대가로 충성을 바칠 나라를 정하는 건 내 마음이다.[64] 이는 재일조선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전세계 모든 국가의 모든 민족 이민자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사고라고 해도 무방하다.[65] 더군다나 혈통만 한국인이고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미국 시민권자가 꾸준히 한국으로부터 지원 받는 일도 있다.[66] 1998년 처음으로 재외동포법이 생겼을 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국 국적을 명시적으로 확인받은 자와 그 직계비속에 한하여 재외동포로 인정한다는 부속조항을 두었으며, 사실상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 등을 겨냥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이후 2003년에 대한민국 헌법 제11조의 평등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67] 외국인이지만 동포임을 배려하여서 일단 한국내에 들어와서 알아서 취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인 H-2(방문취업)비자는 오직 고려인과 조선족을 위한 비자이다. 이 비자는 중국인(한족), 동남아시아인을 위한 취업비자인 E-9 비자와 달리 농업, 제조업, 건설업, 식당, 가사보조인 등 노동부에서 외국인고용이 허가되는 모든 업종에 취업이 가능하다. E-9비자와 가장 큰 차이는 취업을 하든 안 하든 정해진 비자기간 동안은 한국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이다.[68] 쉽게 말해 한국에서 조선족과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대우의 차이는 중국인과 미국인에 대한 대우의 차이, 나아가 한중관계와 한미관계의 차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국민에 대한 대우는 국가가 책임지는 영역이다. 조선족 입장에서 그게 싫으면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화하여 한국인으로서 대우받든가, 중국인으로서 중국의 정치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여 한중관계를 더 우호적으로 만들든가 할 문제이지, (같은 민족이 좀 많이 모여살 뿐) 그네들 입장에서 남의 나라인 한국이 중국을 판단하는 방식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는 셈이다.[69] 모두 장기체류자는 아니고, 단기체류자도 포함한 값이다.[70] 정확히는 체류기간이 존재하지만, 무직니트여도 연장이 가능할 정도로 널널하다. 체류기간 만료 4개월 전부터 hikorea 홈페이지나 출입국 외국인청에 방문해서 수수료 5만 6천원만 지불하고 절차만 밟으면 땡.[71] 그래서 소위 높으신 분 자녀들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도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든 편법이 아니냐는 논란이 많았다.[72] 이들은 애당초 일반적으로 재외동포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73] 항일투쟁 함께 했으니 6.25 때 총부리 겨눴어도 동지라고? 한국전쟁 시기 중국인민지원군·연변 조선인 사회의 후방지원 활동과 북중 혈맹관계의 강화[74]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주요 언론의 인권보도준칙 준수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pp.142, 2013.[75] 조선족 포함. 조선족 비율은 70%정도.[76] 다만 조사가 쉽지 않은 불법체류자들이 대상이라, 통계가 과대평가되었을 가능성과 과소평가되었을 가능성을 모두 감안해야 한다.[77] 프랑스 장관을 지낸 플뢰르 펠르랭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자신은 한국인임이 아니라 프랑스인임을 강조했고, 여론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78] 탈북민이 꽤 정치적으로 인식이 나쁜 곳 출신인데도 2010년대 중반 이후 조선족보다는 인식이 좋은 이유가 이들은 한국인임을 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외국인 취급을 싫어한다. 애시당초에 북한이 좋아도 탈출하기가 어렵기도 하다.[79] 극한대립 중인 국가들에서 양국에 모두 귀속된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탄압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알자스-로렌 주민들이나 독일·러시아계 혹은 폴란드·러시아계, 중국계 국제커플을 부모로 둔 사람들은 말도 못할 고초를 겪었다.[80] 같은 혈통이라도 서로 대립하는 사례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 본토출신 한족과 싱가포르의 한족 이주민 후손인 중국계 싱가포르인의 갈등. 그리고 같은 중국 영토라도 홍콩인들은 중국인과 사이가 매우 나빠 '아찬' 즉 촌뜨기라고 부르며 '영어도 못 하고 위생관념도 질서의식도 없는 미개인'이라고 욕하고 대륙인은 홍콩인을 '미국의 개, 돼지'라며 욕한다. 같은 한문을 쓰는 한족임에도 사이가 아주 안 좋은 게 현재 한국인과 조선족의 갈등과 양상이 같고, 일부 홍콩인의 증오 발언도 한국인의 대 조선족 증오 발언과 비슷하다.[81] 제주도에서 '감귤 과즐'을 팔기도 한다. 다만 찹쌀 반죽의 모양이 약간 다르다.[82] 해당 짤방의 인물은 한강 몸통시신 사건의 범인 장대호다. 주소를 보면 알수 있듯 장대호를 옹호하는 측에 있는 일베 혹은 그와 비슷한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가 만든것으로 보인다.[83] 이외에 이민자들을 3D 등 일부 업종의 노동자로만 받아들이고 국가 구성원의 하나로는 간주하지 않는 "차별배제모형"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차별배제모형은 한국 사회와 무관하고 어떠한 문화적 동질성도 없는 머나먼 나라들에서 소규모로 오는 이주자들이면 모를까, 역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접점이 깊고 인구 규모도 큰 조선족에게 적용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건 그냥 "우리는 노예를 원해요."를 좀 고상하게 말한거나 다름없는 극단정 주장이다.[84] 자신이 효과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신념#.[85] 쉽게 표현하자면 특정 방향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표출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재국가에선 독재를 지지하고 민주국가에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86] 일부 조사에서는 한국 거주 1년 미만 집단이 민주주의에 제일 호의적이고, 1년 이상 5년 미만 집단이 제일 민주주의에 비호의적으로 나타났음을 명시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스스로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으며, "회귀분석을 통한 모집단 추정 단계에서 여러 변수들을 통제한 후 명확히 확인될 필요가 있다"고 시인한다.[87] 문화적인 다원성에 대한 존중 자체도 중요하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차별로 인해 발생한 조선족 집단의 부정적 인식이 조선족의 정치적 특수성으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까지도 이어질 수 있으므로[88] 중국인으로서 살아오며 만들어진 낮은 정치적 효능감을 한국인들과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므로[89] 동화주의자들 중 친서방적인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비슷한 역사적 궤도를 함께하며 대부분의 정치·사회·역사인식을 공유하는 미국인과 영국인, 기타 서방국가의 이주민들이 오히려 조선족들보다 충돌의 여지가 적다고 생각한다.[90] 단순히 "민주주의가 좋다"고 말하는 것과 민주주의적인 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한국인이 북한이 싫다고 한글을 안 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선족이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한국이라는 국가를 분리해서 인식한 뒤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가 있어야 진정으로 민주주의에 우호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과 유사한 수준까지 정치적 효능감을 높이기 위한 동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논지이다.[91] 오히려 이때는 미디어에서 "연변에서 온 착한 어린 아내" 이미지가 많이 소비되었었다. 대표적으로 영화 파이란. 영화 퀄리티는 좀 심하게 차이나지만 주글래 살래같은 작품에서도 비슷한 캐릭터가 나온다.[92] 모티브가 된 인물은 범죄도시의 위성락이다. 배우 선규 + 위성락[93] 주 무대가 대림동인지라 주연들과 그 주변인물을 제외하면 전부 조선족이다.[94] 조선족인지 탈북한 인민군인지 확실치 않다. 그렇지만 일단 관객들은 조선족으로 받아들이므로 여기에 서술.[95] 조선족 출신의 중국계 탄자니아인으로 등장한다.[96] 이들은 한국 거주 중국인으로 중국에서 흔한 성씨로 설정했기 때문에 화교에 가깝다.[97] 1934~1963년까지는 중국 국적을 가졌고, 1963년~2000년까지는 북한 국적을 가졌다. 이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98] 국적 규정이 느슨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중국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뛴다.[99] 중국어명: 长征四号乙运载火箭.



===

조선족(朝鮮族)

사회구조개념용어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3성과 그 밖의 중국 땅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 혈통을 지닌 중국 국적의 주민.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조선족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분야
사회구조
유형
개념용어
시대
현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3성과 그 밖의 중국 땅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 혈통을 지닌 중국 국적의 주민.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중국 조선족 공동체의 출발은 이견은 존재하지만 대개 1860년대로 보고 있다. 1870년 만주 거주 조선족은 77,000명에 달하였고, 1900년에는 220,000명으로 늘었다. 일제 강점기 1,700,000여명에 달하였다. 해방 후 79만 명의 조선인은 귀국하였고, 1953년 센서스 보고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의 수는 1,120,000명으로 보고되었다. 그 후 조선족 인구는 지속적인 성장하여 2007년 현재 2,762,160명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들은 연변주와 길림성을 비롯한 동북3성에 주로 거주하였다.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조선족의 민족자치권을 인정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추진 이래로 산해관내(山海關內) 지역이나 한국, 일본, 미국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82년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선족의 한국 친척 방문을 허용하면서,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이래로 고향방문, 노동이주, 유학 등의 목적으로 한국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체류 조선족은 급증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2000년대 들어 중국 조선족의 해외 진출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2007년 현재 국내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은 377,560명(일본의 경우 2005년 현재 53,000여명, 미국의 경우 2007년 현재 5만여 명, 러시아의 경우 2006년 현재 3∼5만여 명 등)이다. 1980년대 후반 이주하기 시작한 국내 조선족은 2000년대 후반 38만여 명에 달한다.
1980년대 중·후반 조선족은 한국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한국정부의 간단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약재를 가지고 입국하여 큰돈을 벌면서 중국 조선족 사회에 ‘코리안 드림’의 불을 지폈다. 1990년대 초반 불법체류자들이 늘어나면서 사증을 발급받아야 한국 입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합법적 입국통로가 좁아지면서 새로운 입국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조선족 여성의 한국남성과의 혼인을 통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족 남성들은 대부분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여성은 식당, 가사도우미와 같은 서비스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들이 한국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요인은 우선, 한국 노동시장의 저임금 노동력 수요와 중국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한국의 임금 수준이다. 또한 중국의 개혁, 개방 이래로 조선족의 지위상승 열망과 중국 내 중앙 진출의 기회 제약의 상황이다. 또한 같은 언어를 쓰는 한민족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은 재외동포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여 불법체류자를 양산했다. 조선족노동자들의 집단행동과 시민사회단체의 주장에 따라 최근에는 방문취업을 5년간 복수로 허용하고, 재일동포 비자는 3년의 체류기간을 주고 있고, 2010년에는 육아도우미, 가사도우미, 간병인, 복지시설보조원 등의 서비스직 종사자에 대해 영주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현황
2009년 현재 한국 내 전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조선족은 377,560명으로서 32.3%를 차지하고 있다.
「표」조선족의 국내 체류자 현황(2009년)
전체(명)합법체류자(명)불법체류자(명)
전체1,168,477(100.0%)990,522(100.0%)177,955(100.0%)
중국555,082(47.5%)472,598(47.7%)82,484(46.4%)
한국계 중국인377,560(32.3%)352,404(30.2%)25,156(14.1%)
출처: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2009년도 출입국·외국인정책통계연보』, 2009: 262쪽 재구성.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중국 조선족의 한국사회 등장은 세계적 탈냉전과 함께 한민족의 탈냉전과 다문화 사회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또한 1990년대 들어 재외국민에 대한 정부 측 관심은 제고되었으나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던 점을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 조선족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의 국내 진출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관용성 부족이나 차별의식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아가 한국의 혈통주의에 기반으로 한 국적제도의 문제를 제기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세계화시대 중국조선족의 초국적 이동과 사회변화』(박광성,한국학술정보,2009)

  • 『2009년도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연보』(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2009)

  • 『동북아시아 시대의 연변과 조선족』(곽승지,아이필드,2008)

  • 『중국 조선족사회의 변화』(권태환,서울대학교출판부,2005)

  • 『중국 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황유복,료녕민족출판부,2002)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10년)
김귀옥(한성대학교 사회학과)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족(朝鮮族))]
===

국적과 민족의 경계선에서 조선족이라 불리는 사람들

한자國籍과 民族의 境界線에서 朝鮮族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문在国籍和民族的境界线被叫朝鲜族的人们
분야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지리/인문 지리
유형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현대/현대
개괄

중국 조선족이라는 이름에는 ‘중국’과 ‘조선’이 함께 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조선’은 조선 민족이다. 국가의 코드로 보면 조선족은 중국 사람[중국 공민]이다. 민족적으로 따지면 ‘조선 민족[한민족]’이고, 대한민국의 재외 동포이다.

조선족은 중국 공민으로서의 국민 정체성과 한민족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중국의 산업화, 도시화, 지구화로 인한 인구 이동으로 조선족은 더 이상 ‘중국 조선족’ 또는 ‘한국의 재외 동포’가 아니다. ‘동아시아 조선족’ 또는 ‘세계의 조선족’이 논의되는 이유이다.

중국 조선족의 기원

조선족의 기원은 19세기 중엽 자연재해로 인해 한반도 북부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 쪽에 자리 잡은 조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어떤 국가 또는 민족 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그들 스스로 ‘조선 사람[조선인]’이라고 생각하였음은 여러 문헌이 증명하고 있다.

경제적 이유로,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또는 일제의 수탈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 만주로 가서 살아야했던 사람들이 오늘날 중국 조선족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다. 그들은 ‘만주의 조선 사람’들이었다.

시간적으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공간적으로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경쟁하는 만주라는 지역에서, 그들은 ‘조선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을 만들어왔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중국 통일을 위한 각축 속에서 만주의 조선인들은 농민 해방이라는 대의명분으로, 항미 원조(抗美援朝) 시기에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참여하여 만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역으로 남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주어진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이다. 중국 정부는 1950년대 변방에 있는 소수 집단들에 대한 조사 식별 사업을 진행하고 50여 개의 소수 민족을 지정하였다. 중국 동북 지방의 조선족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와 개혁·개방 시기 온건한 소수 민족 정책의 혜택을 보았다.

민족 학교를 운영하고 조선어로 교육을 받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에서는 조선어가 공식 언어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립되었고, 이곳에서는 조선족이 정치와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조선족의 많은 인사들은 1950~1960년대 반우파 투쟁,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 등 현대 중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조선족의 집거 지역을 형성하여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자치를 행하였던 것은 조선족이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등 56개 민족 집단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통일 국가이다. 대부분의 소수 민족들이 국가를 이룰만한 능력은 갖추지 못하였고, 역사적 사회적 발전 단계도 여러 가지였다. 중국 정부가 1950~1960년대 민족 식별 과정에서 조선족을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였다.

조선족은 55개 소수 민족 집단 중 사회 경제적 발전이 가장 빠르고 교육 수준도 가장 높은 우수한 집단으로 인정받아왔다. 중국 정부는 공산당 민족 정책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항상 조선족의 예를 들어왔다. 조선족은 국경을 넘어 동일한 혈통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과계(跨界) 또는 과경(跨境) 민족이라는 점에서 다른 소수 민족과 다르다. 한국과 북한의 존재는 중국 공산당이 조선족의 위상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염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과의 만남

중국 조선족 사회가 한국과 직접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전후이다. 그동안 중국 조선족 공동체는 큰 변화를 겪어왔다. 조선족 사회의 변동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 전체의 변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개혁·개방으로 인한 중국 사회의 변화가 급격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 사회의 변화는 ‘한국의 존재’로 인해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된 경향이 있다.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민족 문화의 기반인 조선족 마을과 조선족 교육이 흔들리고 있다. 조선족의 이동으로 생기는 민족 집거 지역의 공간이 한족들에 의해 메워지고 있다. 이홍우는 『조선족의 전망』이라는 책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인구 점유율이 현재 약 40%에서 21세기 초 20%, 21세기 말 10% 이하로 떨어지리라고 예상하였다.

조선족은 중국 동북 지방의 외래적 환경에서 ‘주변인’으로 살아오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늘 심각한 고민을 하였다. 조선족은 한국과 직접 관계를 맺은 이후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심각하게 제기하고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이 물음은 그 동안 정을 붙이고 살아온 중국과 한중수교 이후 고국으로 다가온 한국 사이에서 “우리 마음의 귀숙(歸宿)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흑룡강 신문』1995년 4월∼9월 지상 문화 토론).

소설가 허련순은 『바람꽃』이라는 작품에서 조선족을 '바람이 불어왔던 곳과 바람이 자는 그 곳, 두 세계 중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바람꽃'에 비유하였다. 이 소설은 조선족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귀추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꽃. 바람이 불어왔던 곳과 바람이 자는 그 곳, 두 세계 중의 어느 한 곳에 머무르거나 또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도 못한 채 두 곳을 끊임없이 우왕좌왕하였다. 언제나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한 곳에 대한 끊임없는 추억과 망각, 그리움과 원망의 갈등을 수없이 겪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수없이 날아갔었다. 언제나 두 세계에서 함께 공존했던 셈이고 두 세계에서 함께 탈출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나는 누구일까?”

조선족의 정체성

두 세계의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첫 번째 시도는 ‘낳아준 정’과 ‘키워준 정’에 대한 논의이다. 이에 대해 김재국은 『한국은 없다』라는 저서에서 "한국의 아들이자 중국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결국 키워준 부모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족이 처한 현실이다.”라고 언급했다.

두 번째 시도는 ‘며느리론’이다. 조선족은 ‘중국에 시집온 며느리’이다. 중국에 시집온 이상, 중국 남편과 시부모를 잘 모셔야 하고 친정집과는 좀 거리를 두어야 하며 우선 시집의 가법을 잘 지켜야 한다. 이에 대해 정판룡은 『세계 속의 우리 민족』이라는 저술에서 “조선족은 중국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여기며 자기 민족의 운명을 중국의 운명과 함께 생각하게 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이중 문화 또는 이중 심리[이중 정체성]을 가진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고 설파했다. 조선족의 이중 정체성은 ‘중국은 조국, 조선은 모국 또는 고국’이라는 논의와도 연결된다.

흑룡강 신문은 1995년 수 개월간의 지상 토론을 통해 조선족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조선족은 중국 사람이다. 우리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우리는 중국 사람이라는 운명을 선택하였다. (중략) 중국만이 우리를 품어줄 수 있다. 우리의 미래와 희망은 중국에 의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의 뿌리를 이 땅에 옮겼으며,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현명한 소수 민족이며, 이 땅의 주인으로서 조선족은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다.”(『흑룡강 신문』1995. 4. 1.) 조선족 정체성에 관한 논의의 귀결은 ‘중국 조선족은 한민족의 핏줄을 타고난 중국의 국민’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조선족 자신들의 현주소 인식이다.

조선족의 정체성을 구명하려는 세 번째 시도는 김강일의 변연 문화론(邊緣文化論)이다. 이 논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문화와 정체성은 중국과 조선의 문화와 정체성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이다. 조선족은 중국 내에서 평등하면서도 구별되는 특수한 문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과 혈연적인 유대가 있으면서도 또 구별되기도 하는 특수한 문화 공동체이다. 조선족은 이런 사실을 확실히 해야 중국에서 국민으로서의 평등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고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동등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김강일은 “중국 조선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족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라고 역설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조선족은 '중국 내에서 평등하면서 구별되는 특수한 문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과도 혈연적인 유대가 있으면서 구별되는 특수한 문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족은 이같이 분명한 자기 규정을 통해서만 “한국과의 관계에서 야기된 굴종적인 문화 성격을 극복하고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동등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의는 중국 조선족이 스스로의 긍정적인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성일의 ‘조선족 문화 이중성 이론’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신조선족, 동아시아 조선족

최근 지구화, 시장화,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신조선족’의 논의가 등장하였다. 김문학의 ‘신조선족론’ 또는 ‘조선족 문화 개조론’이 대표적이다. 이 논의는 경계를 넘어 유목민[호모 노마드]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의 위상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족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을 떠나 한국으로 그리고 세계 각지로 이동하고 있으므로, 문화적 동일성이나 순혈주의적 단일 민족이라는 틀 속에 조선족을 가두어 두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융되어 있다.

이 논의는 지구촌의 글로벌한 가치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다문화 시대를 맞아 조선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조선족‘이란 새로운 생활 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 시각을 갖춘 새로운 조선족의 탄생을 의미한다.

조선족의 정체성을 논하는 중국 조선족 학자들은 "조선족들은 중국으로의 이주, 정착, 그리고 삶의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인정한다.

만주 지역에서 벼농사 지대를 개척하고 마을을 이루고 살며,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시기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당과 함께 신중국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이것이 조선인이 ‘중국의 조선족’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조선족은 신중국에서 ‘모범적 소수 민족’으로서 민족 단결, 민족 평등, 민족 자치를 모토로 하는 중국의 민족 정책의 혜택을 받았다. 반우파 투쟁, 대약진, 문화 대혁명 등 ‘대한족주의’의 시기에는 ‘지방 민족주의’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국내의 정치적 격변기를 극복한 조선족은 개방 개혁의 격랑을 맞아 시장화, 도시화, 세계화의 변화를 겪게 된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중 수교는 조선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국과의 만남’을 통하여 ‘중국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가 하면, 국외 이주 및 체류를 통하여 ‘재한 조선족’, ‘재일 조선족’ 나아가 ‘동아시아 조선족’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조선족은 150년의 기간을 거치면서,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중국 공민이자 재중 동포로, 그리고 동아시아인으로 중첩적인 정체성을 가지며 생활하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인으로서의 국민 정체성, 한국인의 재외 동포로서의 종족 정체성, 인구 확산으로 생성되고 있는 글로벌 또는 동아시아적인 정체성으로서의 조선족이라는 세 차원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즉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족, 한민족으로서의 조선족, 글로벌 이슈로서의 조선족의 이동 등과 관련하여 각기 다르면서도 중첩되는 면이 없지 않은 세 가지의 측면을 공히 염두에 둘 때 조선족 사회의 변화 양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보통 사람의 이동은 조선족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와 국경을 넘어서는 조선족의 움직임은 타 집단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족의 이런 움직임을 ‘동아시아에서의 초국가·탈국경적[트랜스내셔널] 활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거주지인 중국의 동북지방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은 동아시아 한민족의 ‘트랜스내셔널’한 교류의 교차점이다. 중국의 조선족은 한중(韓中), 중조(中朝), 중러, 한중조(韓中朝)의 각각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조선족은 이제 단순히 ‘중국의 조선족’이라거나 한반도 재외 동포의 일원으로 규정할 수 없다. 조선족은 지구화 시대, 새로운 동아시아 시대의 교량 역할을 할 존재이다. 새로운 공간이 짜여지는 시대, ‘가깝지만 먼 이웃’들인 중국, 일본, 한반도를 누가 이어줄 것인가. ‘동아시아의 조선족’이 상호 이해와 소통의 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관련항목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