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조선족 朝鲜族 | |
총인구 | |
중화인민공화국 2,489,076 | |
언어 | |
한국어, 중국어 | |
종교 | |
대승불교, 기독교 | |
민족계통 | |
한민족 |
조선족(朝鮮族)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한민족이다. 중국에서 법적으로 소수민족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의 인구는 한족을 제외한 소수 민족 가운데 13번째로 많으며, 주로 옛 만주 지역인 중국 둥베이(東北, 동북) 3성(省)에 살고 있다. 다만, 서서히 그 인구가 중국 내의 각지로 분산되고 있는데 이는 조선족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 발전에 따라 취업 등을 이유로 베이징과 상하이, 칭다오 등과 같은 대도시로 이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0년대부터 조선족들은 중국인들과 혼혈이 되기 시작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증조부 부계나 모계 한쪽이 한족(漢族)이여도 호적에 조선인으로 등록할 수 있어 조선족들은 중국인 혼혈 또한 적지 않다.
역사
만주에 대량 이주
병자호란 때 조선 북부의 조선인들이 만주족들에 의해 강제로 싸잡혀 끌려가 만주(간도, 심양, 연변, 조선 북부 국경 근처)에 살게 됐는데 가난한 노비들로서 자유인이 될 납입금을 내지 못해 수 많은 자들이 그 곳에 남겨졌다. 1869년에는 한반도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자 굶주림을 피해 조선 북부 하층민 출신의 조선인들이 간도로 건너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자주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북간도라고 불렀으며 압록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서간도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으로 유입하는 현상은 1885년 청나라 정부가 만주 이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크게 증가하게 된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26만 명으로 추정된다. 1910년부터는 일제에 의해 수 많은 가난한 조선인들이 위안부,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가 동북3성에 강제로 거주하게 되면서 현재까지 조선족으로 남겨졌다. 그래서 현재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중에는 동북3성의 연변,창바이가 고향인 조선족 출신자들이 많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간도를 포함한 중국 동북부 지역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1932년에는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자 일본은 만주와 조선 북부에 사는 가난한 조선족들을 강제징용을 시켰다. 일본이 청나라를 침략해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개척운동’이라는 정책으로 조선인 출신 군인과 사업가, 지주, 학교 교장, 교사 등을 만주로 이주시켰는데 이들은 조선의 평양과 경성 등에 자본과 가족들이 존재하였고 자주 이동을 하였으며 전쟁이 끝나고 돌아갔기 때문에 조선족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이후에 만주(동북3성)에 살던 조선인의 수는 1945년에 216만 명까지 급증하였다. 이 시기에는 간도 지역 뿐 아니라 만주 전역에 다양한 직업의 조선인이 흩어졌으며 만주국 내에 거주하던 조선인 인구가 3백만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한국 독립 이후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하자 만주에 살던 조선인 216만 명 중 약 절반인 100만 여명이 조선으로 귀국하였지만 귀국할 방법이 없던 116만명은 중국에 남겨져 조선족이 되었다. 귀국한 이들은 대부분이 지원세력이 있던 독립운동가와 31년 만주 개척으로 파견된 조선인들로 한반도로의 귀국이 가능하였다. 69년부터 가난을 피해 이주한 조선족들과 1910년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으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족들은 먼 조선에 귀국할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선택하였다. 중국은 중국에 남은 조선죽들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규정하고, ‘조선족’(朝鮮族)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일본 패망으로 중국이 해방되고 나서 벌어진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 출신자들은 중국 국민당을 배격하고, 토지개혁을 지지하는 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을 도와서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조선의용대 출신자들로 인해 조선족들은 중국인민해방군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서, 초기에는 중국 인민으로서 대우를 받는 소수민족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 대혁명 당시 현재도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은 연변에 건너와 살면서 민족 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수많은 조선족 희생자들을 만들었다. 특히 마오위안신은 홍색조반혁명위원회와 8·27 홍색반란단, 홍기전투연군, 노동자혁명위원회라는 홍위병 단체들을 조직하여 조선족을 탄압하였고, 당시 강간당하거나 살해된 조선족 인명피해자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1] 몇몇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1910년부터 만주(동북3성)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지원세력과 영향력이 있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귀국하거나 6.25 발생 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귀국하였다. 하지만 중국에 남겨져버린 조선족들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둘다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해 귀국이 불가능하였다. 또한 조선족들은 굶주림을 피하거나 노비 제도의 고통에 의해 동북3성으로 이주했다가 귀국하지 못해 중국 국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며 이들은 독립운동가 유족 우대에 해당되지 않는 일반인들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에 이주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조선족들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 둘다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가 1997년 한중수교부터 F4 재외동포비자로 대한민국으로 건너와 3D 직종에 종사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조선족들의 흉악 범죄들이 존재한다. 여성을 살해한 오원춘 사건, 원곡동 편의점 여직원 폭행 등 여러 강력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국내 거주 외국인 중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 중에 절반이 넘는 59.3%가 중국인(조선족)이다. 또한 2010년부터 2016년까지 폭력을 포함한 각종 범죄에 입권된 외국인이 8만5608명인데 이 중에 절반이 3만9097명이 중국인(조선족)으로 밝혀졌다.[2]
조선족이 대거 F4 비자를 받는데는 요구사항이 엄격해 왔다. 최근들어 대한민국이 조선족들한테 F4비자 발급을 느슨하게 하여 많은 조선족들이 건너오게 되면서 조선족 여성들의 매춘 문제가 대한민국의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보도해왔다. 조선족이 조선족을 고용한 변태 성매매가 행해지고 매춘부 인구수가 세계 1위인 중국 여성과 마찬가지로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에 대거 몰리면서 한국의 성매매 업계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3] [4] [5] [6] [7]
분포
길림성 동부에 연변 조선민족 자치구가 생겨났고, 53년 종전과 함께 1955년에는 연변 조선민족 자치구에서 자치주로 격하되었다. 이 때부터 조선족 출신 인사가 자치주 주장(州長)으로 취임한다. 2010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조선족을 창지투 지구 개방 선도구 개발 사업의 핵심 역할로 주목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 조선족과 귀화 조선족은 80만명이 넘는다.[8]재학생 절반 이상이 조선족인 초등학교는 서울대동초등학교와 서울 영일초등학교가 존재한다.[9]「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2017년 기준 254만 명으로 이는 재미한국인의 수에 필적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족 인구 분포는 동북 지방(만주)에 집중되어 있는데, 지린 성에는 약 120만 명, 지린성 동부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약 80만 명이 집중되어 있다. 그 외에 헤이룽장 성(하얼빈 시(哈爾濱) 등 포함)에는 약 45만 명, 랴오닝 성(선양 시(瀋陽) 등 포함)에는 약 25만 명, 내몽골 자치구에는 약 2천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 상하이(上海)와 칭다오(靑島), 광저우(廣州), 선전(深圳) 등의 대도시에도 거주한다. 각지의 조선족 거주지에는 행정적으로 조선족 자치현과 여러 조선족 마을(향, 진)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동북 삼성의 중심 도시에는 조선족의 학교와 방송국, 신문사, 출판사 등이 있으며, 이들 기관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한국어를 보급하고 있다.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국의 국교 수립 이후 조선족 동포와 한국인의 접촉 횟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조선족의 대한민국 이민이 늘고 있다. 조선족 신입생 비중이 가장 높은 학교는 대동초등학교(서울 영등포구), 80%가 조선족 학생들로 구성된 학교는 신대림초등학교(서울 영등포구), 영서초등학교(서울 구로구), 50%가 조선족 학생들로 구성된 학교는 영림초등학교(영등포구), 영일초등학교(구로구), 심곡초등학교(경기 부천시), 부천남초등학교(경기 부천시), 원미초등학교(경기 부천시), 부천중앙초등학교(경기 부천시)가 있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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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종교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불교와 토속신앙이 결합된 신앙도 믿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과 미국과의 접촉을 통해 개신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 기독교 신앙을 믿는 사람도 등장하고 있다.
언어
조선족의 언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문화어를 기준으로 삼는다. 출신지는 한반도 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 경상도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이 지역 방언들인 동북방언, 서북방언, 동남방언이 사용되며, 중국 동북3성 각지에 이루어진 집성촌에서 이런 지역 방언이 사용되고 있다.
- 동북방언(함경도)지역: 길림성 연변지구, 흑룡강성 동북부, 동남부, 두만강연안지구, 동북6진방언
- 서북방언(평안도)지역: 요녕성 다수지역(심양-안산-무순-본계), 요녕성과 접한 길림성 남부지역
- 동남방언(경상도)지역: 요녕성 중부(심양), 연변지구를 포함한 길림성 일부, 흑룡강성 서북부, 서남부
- 서남방언(전라도)지역: 요녕성 중부(심양-안산) 교차적분포, 연변 왕청현
- 중부방언(경기도, 충청도 등)지역: 길림성 유하현, 연변 도문시, 기타 지역 교차적 분포
같이 보기
각주
- ↑ 황희경, 문화대혁명 시기 조선족에게는 무슨 일이 Archived 2014년 2월 3일 - 웨이백 머신, 연합뉴스
-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sahunter&logNo=130177582670&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 ↑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205
- ↑ http://t591.ndsoftnews.com/bbs/list.html?table=bbs_1&idxno=31368&page=70&total=4251&sc_area=&sc_word=
- ↑ https://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0462
- ↑ http://www.banwol.net/news/articleView.html?idxno=52646
- ↑ https://www.ilyosisa.co.kr/mobile/article.html?no=6210
-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512190423165911
- ↑ “보관된 사본”. 2019년 8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8월 10일에 확인함.
조선족(朝鮮族)
사회구조개념용어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3성과 그 밖의 중국 땅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 혈통을 지닌 중국 국적의 주민.
- 분야
- 사회구조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현대
전체(명) | 합법체류자(명) | 불법체류자(명) | |
전체 | 1,168,477(100.0%) | 990,522(100.0%) | 177,955(100.0%) |
중국 | 555,082(47.5%) | 472,598(47.7%) | 82,484(46.4%) |
한국계 중국인 | 377,560(32.3%) | 352,404(30.2%) | 25,156(14.1%) |
『세계화시대 중국조선족의 초국적 이동과 사회변화』(박광성,한국학술정보,2009)
『2009년도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연보』(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2009)
『동북아시아 시대의 연변과 조선족』(곽승지,아이필드,2008)
『중국 조선족사회의 변화』(권태환,서울대학교출판부,2005)
『중국 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황유복,료녕민족출판부,2002)
- 집필 (2010년)
- 김귀옥(한성대학교 사회학과)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족(朝鮮族))]
국적과 민족의 경계선에서 조선족이라 불리는 사람들
한자 | 國籍과 民族의 境界線에서 朝鮮族이라 불리는 사람들 |
---|---|
중문 | 在国籍和民族的境界线被叫朝鲜族的人们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시대 | 현대/현대 |
중국 조선족이라는 이름에는 ‘중국’과 ‘조선’이 함께 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조선’은 조선 민족이다. 국가의 코드로 보면 조선족은 중국 사람[중국 공민]이다. 민족적으로 따지면 ‘조선 민족[한민족]’이고, 대한민국의 재외 동포이다.
조선족은 중국 공민으로서의 국민 정체성과 한민족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중국의 산업화, 도시화, 지구화로 인한 인구 이동으로 조선족은 더 이상 ‘중국 조선족’ 또는 ‘한국의 재외 동포’가 아니다. ‘동아시아 조선족’ 또는 ‘세계의 조선족’이 논의되는 이유이다.
조선족의 기원은 19세기 중엽 자연재해로 인해 한반도 북부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 쪽에 자리 잡은 조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어떤 국가 또는 민족 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그들 스스로 ‘조선 사람[조선인]’이라고 생각하였음은 여러 문헌이 증명하고 있다.
경제적 이유로,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또는 일제의 수탈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 만주로 가서 살아야했던 사람들이 오늘날 중국 조선족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다. 그들은 ‘만주의 조선 사람’들이었다.
시간적으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공간적으로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경쟁하는 만주라는 지역에서, 그들은 ‘조선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을 만들어왔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중국 통일을 위한 각축 속에서 만주의 조선인들은 농민 해방이라는 대의명분으로, 항미 원조(抗美援朝) 시기에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참여하여 만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역으로 남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주어진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이다. 중국 정부는 1950년대 변방에 있는 소수 집단들에 대한 조사 식별 사업을 진행하고 50여 개의 소수 민족을 지정하였다. 중국 동북 지방의 조선족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와 개혁·개방 시기 온건한 소수 민족 정책의 혜택을 보았다.
민족 학교를 운영하고 조선어로 교육을 받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에서는 조선어가 공식 언어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립되었고, 이곳에서는 조선족이 정치와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조선족의 많은 인사들은 1950~1960년대 반우파 투쟁,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 등 현대 중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조선족의 집거 지역을 형성하여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자치를 행하였던 것은 조선족이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등 56개 민족 집단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통일 국가이다. 대부분의 소수 민족들이 국가를 이룰만한 능력은 갖추지 못하였고, 역사적 사회적 발전 단계도 여러 가지였다. 중국 정부가 1950~1960년대 민족 식별 과정에서 조선족을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였다.
조선족은 55개 소수 민족 집단 중 사회 경제적 발전이 가장 빠르고 교육 수준도 가장 높은 우수한 집단으로 인정받아왔다. 중국 정부는 공산당 민족 정책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항상 조선족의 예를 들어왔다. 조선족은 국경을 넘어 동일한 혈통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과계(跨界) 또는 과경(跨境) 민족이라는 점에서 다른 소수 민족과 다르다. 한국과 북한의 존재는 중국 공산당이 조선족의 위상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염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 조선족 사회가 한국과 직접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전후이다. 그동안 중국 조선족 공동체는 큰 변화를 겪어왔다. 조선족 사회의 변동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 전체의 변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개혁·개방으로 인한 중국 사회의 변화가 급격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 사회의 변화는 ‘한국의 존재’로 인해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된 경향이 있다.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민족 문화의 기반인 조선족 마을과 조선족 교육이 흔들리고 있다. 조선족의 이동으로 생기는 민족 집거 지역의 공간이 한족들에 의해 메워지고 있다. 이홍우는 『조선족의 전망』이라는 책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인구 점유율이 현재 약 40%에서 21세기 초 20%, 21세기 말 10% 이하로 떨어지리라고 예상하였다.
조선족은 중국 동북 지방의 외래적 환경에서 ‘주변인’으로 살아오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늘 심각한 고민을 하였다. 조선족은 한국과 직접 관계를 맺은 이후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심각하게 제기하고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이 물음은 그 동안 정을 붙이고 살아온 중국과 한중수교 이후 고국으로 다가온 한국 사이에서 “우리 마음의 귀숙(歸宿)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흑룡강 신문』1995년 4월∼9월 지상 문화 토론).
소설가 허련순은 『바람꽃』이라는 작품에서 조선족을 '바람이 불어왔던 곳과 바람이 자는 그 곳, 두 세계 중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바람꽃'에 비유하였다. 이 소설은 조선족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귀추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꽃. 바람이 불어왔던 곳과 바람이 자는 그 곳, 두 세계 중의 어느 한 곳에 머무르거나 또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도 못한 채 두 곳을 끊임없이 우왕좌왕하였다. 언제나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한 곳에 대한 끊임없는 추억과 망각, 그리움과 원망의 갈등을 수없이 겪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수없이 날아갔었다. 언제나 두 세계에서 함께 공존했던 셈이고 두 세계에서 함께 탈출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나는 누구일까?”
두 세계의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첫 번째 시도는 ‘낳아준 정’과 ‘키워준 정’에 대한 논의이다. 이에 대해 김재국은 『한국은 없다』라는 저서에서 "한국의 아들이자 중국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결국 키워준 부모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족이 처한 현실이다.”라고 언급했다.
두 번째 시도는 ‘며느리론’이다. 조선족은 ‘중국에 시집온 며느리’이다. 중국에 시집온 이상, 중국 남편과 시부모를 잘 모셔야 하고 친정집과는 좀 거리를 두어야 하며 우선 시집의 가법을 잘 지켜야 한다. 이에 대해 정판룡은 『세계 속의 우리 민족』이라는 저술에서 “조선족은 중국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여기며 자기 민족의 운명을 중국의 운명과 함께 생각하게 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이중 문화 또는 이중 심리[이중 정체성]을 가진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고 설파했다. 조선족의 이중 정체성은 ‘중국은 조국, 조선은 모국 또는 고국’이라는 논의와도 연결된다.
흑룡강 신문은 1995년 수 개월간의 지상 토론을 통해 조선족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조선족은 중국 사람이다. 우리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우리는 중국 사람이라는 운명을 선택하였다. (중략) 중국만이 우리를 품어줄 수 있다. 우리의 미래와 희망은 중국에 의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의 뿌리를 이 땅에 옮겼으며,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현명한 소수 민족이며, 이 땅의 주인으로서 조선족은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다.”(『흑룡강 신문』1995. 4. 1.) 조선족 정체성에 관한 논의의 귀결은 ‘중국 조선족은 한민족의 핏줄을 타고난 중국의 국민’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조선족 자신들의 현주소 인식이다.
조선족의 정체성을 구명하려는 세 번째 시도는 김강일의 변연 문화론(邊緣文化論)이다. 이 논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문화와 정체성은 중국과 조선의 문화와 정체성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이다. 조선족은 중국 내에서 평등하면서도 구별되는 특수한 문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과 혈연적인 유대가 있으면서도 또 구별되기도 하는 특수한 문화 공동체이다. 조선족은 이런 사실을 확실히 해야 중국에서 국민으로서의 평등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고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동등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김강일은 “중국 조선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족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라고 역설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조선족은 '중국 내에서 평등하면서 구별되는 특수한 문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과도 혈연적인 유대가 있으면서 구별되는 특수한 문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족은 이같이 분명한 자기 규정을 통해서만 “한국과의 관계에서 야기된 굴종적인 문화 성격을 극복하고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동등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의는 중국 조선족이 스스로의 긍정적인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성일의 ‘조선족 문화 이중성 이론’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지구화, 시장화,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신조선족’의 논의가 등장하였다. 김문학의 ‘신조선족론’ 또는 ‘조선족 문화 개조론’이 대표적이다. 이 논의는 경계를 넘어 유목민[호모 노마드]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의 위상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족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을 떠나 한국으로 그리고 세계 각지로 이동하고 있으므로, 문화적 동일성이나 순혈주의적 단일 민족이라는 틀 속에 조선족을 가두어 두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융되어 있다.
이 논의는 지구촌의 글로벌한 가치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다문화 시대를 맞아 조선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조선족‘이란 새로운 생활 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 시각을 갖춘 새로운 조선족의 탄생을 의미한다.
조선족의 정체성을 논하는 중국 조선족 학자들은 "조선족들은 중국으로의 이주, 정착, 그리고 삶의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인정한다.
만주 지역에서 벼농사 지대를 개척하고 마을을 이루고 살며,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시기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당과 함께 신중국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이것이 조선인이 ‘중국의 조선족’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조선족은 신중국에서 ‘모범적 소수 민족’으로서 민족 단결, 민족 평등, 민족 자치를 모토로 하는 중국의 민족 정책의 혜택을 받았다. 반우파 투쟁, 대약진, 문화 대혁명 등 ‘대한족주의’의 시기에는 ‘지방 민족주의’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국내의 정치적 격변기를 극복한 조선족은 개방 개혁의 격랑을 맞아 시장화, 도시화, 세계화의 변화를 겪게 된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중 수교는 조선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국과의 만남’을 통하여 ‘중국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가 하면, 국외 이주 및 체류를 통하여 ‘재한 조선족’, ‘재일 조선족’ 나아가 ‘동아시아 조선족’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조선족은 150년의 기간을 거치면서,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중국 공민이자 재중 동포로, 그리고 동아시아인으로 중첩적인 정체성을 가지며 생활하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인으로서의 국민 정체성, 한국인의 재외 동포로서의 종족 정체성, 인구 확산으로 생성되고 있는 글로벌 또는 동아시아적인 정체성으로서의 조선족이라는 세 차원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즉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족, 한민족으로서의 조선족, 글로벌 이슈로서의 조선족의 이동 등과 관련하여 각기 다르면서도 중첩되는 면이 없지 않은 세 가지의 측면을 공히 염두에 둘 때 조선족 사회의 변화 양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보통 사람의 이동은 조선족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와 국경을 넘어서는 조선족의 움직임은 타 집단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족의 이런 움직임을 ‘동아시아에서의 초국가·탈국경적[트랜스내셔널] 활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거주지인 중국의 동북지방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은 동아시아 한민족의 ‘트랜스내셔널’한 교류의 교차점이다. 중국의 조선족은 한중(韓中), 중조(中朝), 중러, 한중조(韓中朝)의 각각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조선족은 이제 단순히 ‘중국의 조선족’이라거나 한반도 재외 동포의 일원으로 규정할 수 없다. 조선족은 지구화 시대, 새로운 동아시아 시대의 교량 역할을 할 존재이다. 새로운 공간이 짜여지는 시대, ‘가깝지만 먼 이웃’들인 중국, 일본, 한반도를 누가 이어줄 것인가. ‘동아시아의 조선족’이 상호 이해와 소통의 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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