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신영복 申榮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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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2007년) | |
작가 정보 | |
출생 | 1941년 8월 23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의령 |
사망 | 2016년 1월 15일(7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작가, 교수 |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
경력 |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대표 |
종교 | 무종교 |
활동기간 | 1964년 ~ 2016년 |
장르 | 경제교육학 저술 |
웹사이트 | 신영복 교수 개인 홈페이지 |
신영복(申榮福, 1941년 8월 23일 ~ 2016년 1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사상가. 작가, 대학교수 등으로 활동했다.[1][2][3]
생애[편집]
대학교 경제학과 강사로서 활동[편집]
1941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경상남도 밀양에서 성장하였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1959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4.19항쟁과 5.16군사 쿠데타를 겪으며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숙명여자대학교 강사를 거쳐 육사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재직하던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64년 3월 15일에 남한에서 비밀리에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주요 참가자들은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이었다. 이들은 지하신문 <혁명전선>과 합법 대중잡지 <청맥>(주간 : 김질락) 등을 발간했으며, 대학가에서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통일혁명당은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노동계급의 전위당임을 자처했다.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최고의 목적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 두고 있다. 당강령은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로 규정되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간 복역[편집]
1968년 8월 20일, 군·경·정 합동작전을 통해 대한민국 측은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이로부터 4일이 지난 1968년 8월 2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한의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한 뒤 합법화하여 반정부 및 반미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라고 발표했다. 이때 중정은 김종태 등 3명을 포함해 관련자 158명을 검거하여 73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2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통혁당 사건으로 북한에 가서 로동당에 입당한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에 처해졌다.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박성준은 15년형, 김종태의 아내 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전향서를 쓴 뒤 20년 20일을 복역한 후 가석방되었다.
출소 후[편집]
감옥을 인간학, 사회학 교실로 여기며 사람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한 '관계론'을 일구었다.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이 평화신문에 연재되었고, 출소 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했다. 경제학원론, 한국사상사, 정치경제학, 중국고전강독, 교육사회학 등을 강의하였다. 어릴적 할아버지 슬하에서 붓글씨를 시작했고, 대전교도소 시절 교도소 당국에서 초빙했던 만당 성주표(晩堂 成周杓)선생, 정향 조병호(靜香 趙炳鎬)선생으로부터 붓글씨를 옥중사사 받았다. 한학자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선생과 같은 방에서 지내며 동양고전을 익혔다. 민중의 정서를 담은 글씨체를 모색하던 중 어머님의 모필에서 영향을 받아 연대체, 민체, 어깨동무체라고 불리는 신영복체가 탄생했다. 독창적이고 민중적인 [1][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신영복서화 서화 작품과 신영복 강연듣기 강연, 저서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 노력하였다. 피부암으로 투병하다 2016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의 자택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주요전과[편집]
국가보안법 위반, 무기징역
저서[편집]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8)
- 《엽서》 (1993)
-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996)
- 《더불어 숲 1권》 (1998)
- 《더불어 숲 2권》 (1998)
- 《더불어숲》, (2003)
- 《신영복의 엽서》 (2003)
-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돌베개,2004)
- 《처음처럼》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청구회 추억》 (돌베개, 2008)
- 《For the First Time: 처음처럼(영문판)》 (2008)
- 《느티아래강의실》 (한울, 2009)
- 《신영복-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 《변방을 찾아서》 (2012)
-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돌베개, 2015)
-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신영복 유고》 (돌베개, 2017)
- 《손잡고 더불어, 신영복 유고》 (돌베개, 2017)
학력[편집]
경력[편집]
- 1965년 9월: 숙명여자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
- 1966년 6월: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관
- 1989년 3월: 성공회신학대학 경제학과 강사
- 1998년 5월 ~ 2006년 6월: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 1999년 12월: 성공회대학교 교육대학원 원장
- 2002년 2월: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대표
- 2003년 3월: 성공회대학교 민주사회교육원 원장
- 2004년 3월: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원장
- 2006년 ~ 2014년: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상훈[편집]
각주[편집]
- ↑ 박정환. 우리 시대의 지성 신영복 교수가 걸어 온 길. 뉴스1. 2016년 1월 16일.
- ↑ 한혜원. "우리는 한 그루 나무일 뿐"…故신영복이 남긴 위안과 지혜(종합2보). 연합뉴스. 2016년 1월 16일.
- ↑ 차은호. 신영복 교수 '희귀 피부암' 75세 타계 '우리시대 대표 진보 지식인'. 헤럴드경제. 2016년 1월 16일.
- 윤무한, [건국 600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⑥] 현대사의 감옥에서 발신한 ‘더불어삶’의 메시지 신영복신동아.2009.01.05
외부 링크[편집]
신영복
신영복 교수 누구? 삶 자체가 드라마…“서로 위로하는 ‘작은 숲’ 되라”
등록 :2016-01-16 02:55수정 :2016-01-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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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2년에 암투병 끝에 15일 신영복 선생 별세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 전달한 지식인
깊은 성찰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큰 반향
‘우리시대의 스승’ 찬사… 삶 자체가 드라마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즐겁게 만들어라”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를 단 그의 마지막 저서 <담론>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신영복 교수가 2년여의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며 삶의 좌표를 가다듬었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또한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진 글씨와 그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박한 일상 속에서 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서화작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만해문예대상을 받은 그를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그렇게 기렸다.
하지만 그의 삶은 기구했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던 1968년 27살 나이에 그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수가 됐고 20여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됐다.
2008년 7월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통일혁명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통혁당은 정식으로 결성되지도 않았다. 서울시당 준비모임이 꾸려져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나는 학생운동 차원에서 대학선배가 주도한 모임에 적극 참여했는데, 그 선배 삼촌이 북한에도 갔다 온 모양이었다. 당시 <청맥>이란 잡지에 진보적 소장학자들이 글을 많이 썼는데,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운동 차원이었다.”
재판 때 검사는 초등학교 꼬마 6명을 위해 지어준 노래가사 속의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의 ‘주먹 쥐고’조차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몰아세웠다고 그는 말했다.
20여년의 기나긴 감옥생활이 그에겐 사회학과 역사학, 인간학을 제대로 배우게 해 준 진짜 대학이 됐다.
무기수로 감형된 뒤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그가 평범할 수 없었던 체험과 깊은 성찰을 특유의 문장에 담아내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또 다른 신영복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 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번 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렇게 해서 좁은 엽서 한 장에 빽빽이 적힌 글들로 채워졌다. 우리 사회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한 차원 높였다는 평을 받으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심도 있는 담론들의 등장은 이른바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세상변화를 실감하게 만든 하나의 징표였다.
사면복권을 거쳐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지난해까지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 <담론> 출간하기까지 25년간 그의 삶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 10여권 저서와 명강의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우리시대의 스승’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다. 2008년 50만부가 넘게 팔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돌 기념판을 냈을 때 그는 이렇게 자평했다.
“가끔 독자들을 만나 들은 얘긴데, 힘든 상황을 겪은 분들이 내 글에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일부에선 신영복의 이력에 비해 사색의 전투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했고 또 한켠에선 엄청난 전투성이 있다고도 했다. 여러 층위의 반응들이다. 대체로 인문학적 가치, 인간적 고뇌, 인간적인 삶과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그런 호응을 불렀다는 평이 많다.”
2015년 펴낸 <담론>에서는 사형수가 됐을 때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썼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그것이 그가 ‘죽지 않은 이유’였다면,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깨달음과 공부였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형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성찰이며, 그것을 토대로 현실을 바꾸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실천이라고 했다. 세계인식은 왜 필요한가?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실천적 주체가 사람이다.” 그에게 공부의 궁극적 목적은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인 중심부”가 아니라 “변방(변방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공부의 시작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이며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끝은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이라고 신 교수는 강조했다. “우리 강의는 가슴의 공존과 관용(톨레랑스)을 넘어 변화와 탈주로 이어질 것이다.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이 ‘관계’야말로 신 교수의 인문학 특강 주제요 <담론>의 핵심주제였고 만년의 화두였다.
그는 “관계 없이 인식 없다”며 관계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이다.”
<논어>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를 흔히 알려진대로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하다”로 읽지 않고 이렇게 고쳐 읽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이 공자의 화동(和同) 담론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한반도 통일론에도 적용됐다. 신 교수는 정치적 통일(統一)이 아니라 평화 정착과 교류협력을 통해 남과 북이 폭넓게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화화(和化)로서의 통일(通一)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이것은 한민족만의 과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라고 했다.
이런 화동 개념과 연관시켜 톨레랑스(관용)의 한계도 지적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하자”는 톨레랑스는 근대사회 최고 수준의 가치지만, 그것이 자기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은폐된 패권논리’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이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니다.”
가을에 나뭇가지 끝에 하나 남겨 둔 ‘씨 과일’을 가리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에서 그는 최고의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냈다.
“씨 과일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준다.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지혜이며 교훈이다.”
나무가 뼈대를 드러내며 잎을 떨어뜨려 뿌리를 따뜻하게 덮는 이 석과불식의 요체를 그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이 곧 뿌리라는 것인데, 바로 신 교수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87년 체제’가 무너지고 ‘보수반동’의 시대가 다시 시작된 2008년 인터뷰 때 그는 말했다. “20년 전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가 불완전하고 불철저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사회변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운동의 구심, 지도부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 진보적 정당들까지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를 키워 온 민주, 변혁 역량을 아우를 수 있는 탄탄한 구심체를 꾸리는 일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불철저한 민주화’ ‘뿌리 깊고 완고한 보수적 구조’ ‘국제금융자본의 진입과 수탈’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정치적 지배그룹의 교체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언론과 자본, 법조, 사회문화적 토대 등을 장악한 강력한 보수 권력집단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고 소외당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가 절대적으로 미국 의존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미국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패권질서에 우리 사회가 올인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이진순 교수와의 인터뷰(▶‘담론’ 펴낸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에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말했다.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관련 기사]
▶고 신영복(申榮福) 교수 연보
▶신영복의 그림 사색 보기
▶생명·평화·공존의 참의미 전달한 교육자이자 저술가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2015.05.09)
▶“모두에게 큰 스승이자 등대” 신영복 교수 별세 소식에 SNS 추모 물결
▶딴따라 출신 탁현민씨와 그의 10년지기 스승 신영복 교수와 젊은 대화(2007.10.03)
▶한홍구 교수,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하다(200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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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칼럼] 신영복이 누구길래…그의 정체는?
북한의 간첩조직 통혁당 핵심 인물…20년 복역후 거짓 전향공산주의자가 경세가(經世家)-철학자로 둔갑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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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전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 안보대책연구관)
입력 2022-10-16 16:32 | 수정 2022-10-16 16:32
▲ 통혁당 사건 재판을 보도한 당신 신문. 검찰은 신영복에게 사형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뉴데일리
김문수 위원장의 발언은 사실
지난 10월 1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국감장.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한다)면 김일성주의자다."
이 발언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김문수 위원장의 이 발언은 사실(fact)에 근거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는데,
이를 가지고 정치적 공세를 펼치는 일부 정치인과 언론 등은
‘정답’을 애써 외면하며 진실을 호도하려는 파렴치한(破廉恥漢)에 다름 아니다.
신영복의 진면목을 안다면,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김문수 위원장의 발언이 정답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검거된 통일혁명당의 조직도ⓒ뉴데일리
신영복의 정체
신영복의 정체를 알기 위해선,
먼저 1968년 적발된 <통일혁명당> 간첩사건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 사건은 검거자만 해도 149명에 이르는 대규모 지하당 사건이었다.
1961년 북한조선노동당(북노당) 제4차 당대회.
김일성은 이렇게 지적했다.
"남한의 4.19사태를 공산혁명으로 유도하지 못한 것은 남한 내 혁명을 지도할 ‘혁명적 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곤 "남한 내에 혁명당(지하당)을 구축하라"고 지시하는 이른바 '남조선 지하당 구축 교시'를 내놓았다.
이에 따라 북한의 대남공작 지도부(북노당 대남총국)는
1963년 4월 간첩 김수영, 김송무를 남파시켰다.
이들이 받은 지령은 이런 것.
이른바 연고선(緣故線) 공작을 통해 포섭한 최영도를 통해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을 포섭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남한 내에 새로운 형태의 독자적인 혁명당 조직으로서 <통일혁명당>을 결성하라는 것이었다.
김종태 일당은 1964년 3월 15일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1968년 당국에 검거되어 조직이 와해될 때까지 4회에 걸쳐 북한에 드나들며 밀봉교육을 받았다.
밀입북중엔 대남총국장 이효순, 부국장 임춘추, 연락부장 유장식 등으로부터
<통혁당> 창당 교육훈련을 받았다.
거액의 공작자금도 수령했다.
이들은 국내에 지하당 조직의 공개 외곽 조직이자 이른바 인전대(引佺帶, 당과 대중을 연결) 조직으로 합법적인 대중서클 조직을 결성했다.
‘1960년대 학사회’, ‘민족해방전선’, ‘조국해방전선’ , ‘새문화연구회’(월간 청맥 발간) 등의 단체다.
이들 단체는 주로 서울대 문리대 출신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이른바 통일전선체 성격의 활동을 하다 모두 검거되어 그 정체가 들어났다.
▲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이 야당의원들의 질문에 당당하게 "신영복을 존경한다면, 공산주의자다"고 소신을 밝히고 있다.ⓒ뉴데일리
1941년생인 신영복은,
서울대와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군 복무 중
대학 선배인 김질락(통혁당 2인자)에게 포섭되어 통일혁명당에 가담, 반국가이적활동을 했다.
그는 검거되고 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신영복은 20년을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1988년 8.15 특사 때 사상 전향서를 쓰고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거짓 전향 후 석방된 뒤 바로 부인
그러나 신영복은 석방 직후 월간지 <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통혁당 가담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다.
난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사실상 전향 사실을 부인한 것이다.
이는 사상전향서가 가석방을 위해 거짓으로 작성되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때 신영복은 사면 복권되어 성공회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2016년 암으로 사망했다.
다음 사례는 북한이 신영복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지를 보여준다.
1975년 한국 정부는
베트남 패망 직전 억류된 한국 외교관 3명과
국내에 수감된 간첩 21명을 교환하기 위한 교섭을 벌였다.
당시 북한이 요청한 교환 대상자에 신영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왜 북한이 수감 중이던 신영복을 북송시켜 달라고 요구했을까?
우리는 이런 초보적인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신영복을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유 대한민국을 배반하고 북한에 빌붙어
김일성 노선을 충실히 추종한 공산주의자일뿐이다.
편집자 주 :
감옥에서 서예와 독서하다 나온 신영복을 운동권 사회에선 '시대의 양심수'라며 추앙했다.
출옥후 그가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중앙일보 등 미디어들은 그를 '양심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포장에 나섰다.
2000년을 전후에 중앙일보는 신영복의 글을 장기연재헀다.
2015년엔 조선일보가 신영복에게 만해문예대상을 수여했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과 고교동창인 손혜원은,
두산주류가 출시한 소주 이름에 신영복의 책 <처음처럼>의 이미지를 차용,
신영복 글씨로 된 레이블을 제작해주었다.
소주 <처음처럼>은 신영복의 이미지에 힘 입어 마케팅에 성공했다.
신영복에게 있어 '처음처럼'은,
'통혁당 가담은 양심에 따른 행동이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으며, 지금에도 처음처럼 생각한다'는 중의적 의미로 해석된다는게 중론.
전향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며, 북한에 편향적 애정을 표출하는 공산주의자의 고집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로 변질되어, 소주 판촉에 활용 되고 있는게 대한민국의 현실.
그의 글씨는 소주에만 사용된 게 아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 표지, 교보문고 신용호 회장의 어록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도 그의 글씨체.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도 대표적인 그의 서체.
성공회대 제자인 가수 윤도현의 앨범에도 '共存' '나는 나비'라는 글씨를 써줬다.
개그맨 김제동도 그가 성공회대에서 키워낸 제자.
이렇게 그는 정-관-문화-언론계를 넘나들며 사상대부 노릇을 헀다.
<뉴데일리>는 그의 사망 직후 그의 실체를 밝히는 연재 기획기사를 잇달아 냈다.
다음을 참고하길 바란다.
"맞다, 신영복은 본디 붉은 사람이다"
한겨레신문의 대담한 도발 "신영복, 그는 본디 붉은 경제학자였다"에 대해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6/01/26/2016012600029.html
"신영복은 학자가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
"입과 손으로 온갖 세련된 것들 쏟아냈지만 대동강 하구 바닷물 들이킨 탓"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6/01/26/2016012600047.html
'복면지성' 신영복의 두 얼굴 실체! 해부해보니?
전향 부정·북한 옹호·혁명투쟁 선동…포장된 가면속 진면목은 무엇?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6/01/20/2016012000119.html
▲ 청와대를 방문한 김영남-김여정과 기념사진을 찍는 문재인. 배경서화 '통'에 보이는 글의 글씨체가 바로 신영복체다.ⓒ뉴데일리
신영복을 제일 존경한다는 문재인
2018년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 올림픽 개회식 사전 리셉션.
문재인 대통령은 환영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가 신영복 선생이다.”
이 자리에는 북한에서 대표단으로 온
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김정은 여동생, 북노당 부부장)도 참석하고 있었다.
바로 다음 날(2월 10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를 방문한 북한 김영남, 김여정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배경 서화 ‘通’(통)이 바로 신영복체다.
문 대통령이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신영복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그의 글씨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지적한 신영복의 실체를 파악하면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 간첩 잡는 국정원 원훈석에 간첩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20년 복역한 신영복의 글씨체가 등장했다. 그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박지원 국정원장. 통혁당 사건은 워낙 증거와 증언이 차고 넘쳐, 운동권에서조차 이른바 '용공조작'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대표적 간첩단 사건이다.ⓒ뉴데일리
우리 사회에 신영복의 글씨체를 공개적으로 확산시킨 사람은
바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평소에 신영복을 제일 존경한다고 밝혔던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슬로건으로 '사람이 먼저다'라는 신영복 글씨체를 내걸었다.
취임 직후엔 청와대 각 부서에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는 신영복체 액자를 돌렸다.
‘춘풍추상’은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글.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줄임말이다.
남에겐 춘풍처럼 관대하고 자기에겐 추상같이 엄격해야 한다는 의미다.
문대통령 집무실에 걸려있는 족자도 신영복 친필이다.
이른바 문 대통령 선물시계에도 신영복체가 각인되어 있다.
또 당시 청와대 경내 안내표지판도 신영복체로 교체했다고 한다.
관가를 점령한 신영복 글씨체
작년 6월 4일.
국가정보원은 창립 60주년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원훈석(院訓石) 제막식을 거행했다.
문제는 국정원의 혼(魂)을 상징하는 원훈석.
이 곳에 '간첩글씨체'인 신영복체를 새긴 것이다.
1968년 간첩 신영복을 검거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이 국정원이다.
그런 국정원 앞마당에 간첩글씨체로 원훈석을 제막한 이유가 무엇일까?
명백히 국가정보수사기관인 국정원의 정체성을 모욕하고 능멸하려는 상징성을 내포한 행위가 아닐까?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이,
국제외교무대인 동계올림픽 리셉션 공개석상에서
이런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더나가 신영복 글씨체를 도처에 도배질했다.
이런 그의 말과 행동은 '문재인의 사상적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준다.
대한민국 헌법 가치에 반하는 것이다.
▲ 국정원 원훈석 제막식을 하고 기념촬영하는 당시 집권층 모습. 신영복체로 국정원 원훈을 새겨놓게 한 그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뉴데일리
대한민국에 발호하는 적색(赤色) 바이러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헌법 정신 즉 헌법적 가치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로 집약된다.
그런데 이를 훼손하고 능멸하는 일이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퍼지고 있다.
그런데도 다들 무관심하다.
심지어 알고 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것이 현실이다.
신영복같은 골수 북한 김일성주의자를 존경하고 그의 글씨체를 범람시키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국민들의 건전한 사상세계를 좀 먹는 악성 바이러스를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민주인사로 둔갑한 ‘김일성 보이(boy)’들이 설쳐대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부정이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진영은,
김문수 위원장의 사실에 입각한 용기있는 발언을 국회 모욕과 위증이라며 설쳐대는 작자들의 명단과 활동을 낱낱이 밝혀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이는 왜곡된 자유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출발이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전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 안보대책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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