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adimir Tikhonov
5 d
·
["북한 모델", 세계로 간다]
저는 그 느낌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 1980년대 초반에 런던이나 파리에 대한 사진첩들을 펼쳐봤을 때에 저는 꼭 다른 행성을 보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냉전 양진영 사이의 "장벽" 밖의 세계는 종종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었으나 역시 "딴 세계", 거의 "다른 지구별"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약 1987-88년까지만 해도 서구라파에 평생 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서방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을 때에 "다른 문명의 연구"라고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출국이 가능한 유대인 출신인 만큼 굳이 마음을 먹었다면 그 "장벽" 넘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었지만, 이와 같은 경우에는 평생 귀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저에 대한 제가 태어난 곳에서의 모든 기억들도 말소돼야 할 점도 잘 알고 있어서 쉽게 마음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서방이란 그 때 제게 사실 거의 "미지의 세계"이기도 했습니다. 서방 대도회지 건출물의 사진이나 고전 문학 작품들을 구해 볼 수 있었으나, 1980년대말의 구미권에서 이미 "고서"가 다 된 한나 아렌드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책도 "이념적" 이유로 한 번 구해 읽을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동시대의 서방 학술에 대해 아예 캄캄 무소식이었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북한 학계에서의 사정은 그것보다 좀 더 심한 것이죠. 서방의 고전은 접근이 가능하나 동시대의 서방에 대한 앎이 극히 제한돼 있고, "장벽" 넘어의 출국이 평생 한 번 주어질 수 있는 "딴 세계로의 여행의 기회"라는 차원에서는 대략 비슷하지만, 숫적으로 극소수 (약 5천 명)의 화교 이외에는 북한에는 상대적인 "출국의 가능성"을 누리는 종족적 마이너리티도 그다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거의 "밀폐"에 가까운 고립 내지 자기 고립은, 아마도 1990년대의 정보 혁명 이후의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북한만 해도, 북한 학자들에게는 다른 데는 몰라도 적어도 중국으로의 간헐적인 출장은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북한의 일부 특권층 자녀들은 아예 유튜버로 등장하는 것을 요즘 허가 받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 러시아에서도, 일부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차단 요구에도 불구하고 유튜브는 아직 미차단입니다. 폐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은 다 차단 당했지만 말이죠. 그러니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는 "서방으로부터의 고립"을 당했다고 하지만, 이게 사실 "반쪽 고립"에 불과합니다. 서방으로 전자우편을 여전히 보낼 수 있고, 런던으로 출장을 못가더라도 한국에 가서 구미권 학술지들을 한국 대학의 도서관을 통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냉전 시대와 비교하기가 어려운 "소프트한 고립"이죠.
한데, 과거에 비해서 훨씬 소프트하지만, 세계화가 마감되고 탈세계화가 시작된 이 세계에서는 요즘 국제적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고립적 경향들이 현저히 강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1년 전에 아시아학의 최고 학회인 AAS에서 참여했을 때에 놀랐던 것은, 학회 개최지인 하와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소속의 동료들이 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줌"을 통한 참여조차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학회" 참여를 하려면 특별한 허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중국의 사정인 모양입니다. 세계적인 안보, 경제 위기 속에서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같은 특권적 비서구 선진국 이외의) 대부분의 비서구 사회 구성원들의 구미권행은 비자 획득, 경비 마련, 정치-안보적 문제상 훨씬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반면 특정 열강 중심의 지정학적 "권역"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구소련권 등등) 안에서의 월경 이동은 여전히 비교적 활발한 편입니다. 이와 동시에, 주요 열강들의 군비는 큰 폭으로 증액되고, 군사화가 강화되고, 평균 실질 임금은 동결되거나 저하됩니다.
핵과 장거리 미사일로 상징되는 강군빈민 정책, 서방에 대한 고립성의 강화와 군사/군산복합체에의 초점, 그리고 강력하 권위주의적 동원 체제....북한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국지적인 국가 주도의 자본 축적의 이 모델은 이제 세계에서 예상 이상의 인기를 얻는 판입니다. 러시아도 앞으로 - 비록 훨씬 더 "소프트한" 버전으로 - 대체로 이와 비슷한 모델을 실행할 전망이고, 러시아만도 아닐 겁니다. 미국의 패권이 쇠락되지만, "미국 이후의 세계"는 우리 기대와 달리 민주적이지도 평화롭지도 않습니다. 세계의 좌파가 1970년대 이후 장기적 약세를 보이면서 민중 친회적, 대안적 글러발리티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이 상황의 핵심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북한 모델", 세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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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모델", 세계로 간다
저는 그 느낌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 1980년대 초반에 런던이나 파리에 대한 사진첩들을 펼쳐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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