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고 말해보자면] '아베' 하면 '극우파'만 생각나는 당신에게 드리는 말씀!
한국정치+3국제정치/국제사회+5사상/철학/역사+9
혁명읽는사람·독서가
2023/02/14
이 글은 김항의 일본 비평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으로 한국인 학자의 일본관의 어떤 전형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어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았습니다. 한일관계의 파탄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윤석열 정부가 거의 무조건적으로 대일관계 개선에 서두르는 상황은 설사 잠깐 한일관계의 회복을 가져오더라도 다시금 파탄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낳고 있습니다. 이런 불안한 관계는 상호간의 이해의 미진함과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이 글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 학자의 일본 인식을 하나의 사례로 검토해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가하는 와중에 보다 유의미한 인식틀이 무엇일지에 대해 사고해보고자 적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댓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1. 김항과 마루야마 마사오 그리고 천황제
개인적으로 현재의 한일관계의 파탄과 대립의 근원에는 한국의 국력 신장과 그에 따른 한일관계의 변화요구가 있고, 특히나 이 근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한국인의 강렬한 내셔널리즘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민족해방을 자력으로 성취하지 못하고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온 상황에서 기존의 친일협력자의 존재와 기억을 손쉽게 지워버리고 '승전국' 지위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하고자 하는 욕망이 실현되지 못한 것이 한일관계의 근원적인 한계이자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일본 또한 제국 붕괴 이후의 상황에서 피식민지였던 조선이나 피침략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했지만 제국의 기억을 서둘러 지워버리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본'이라는 전후 민주주의 체제 속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식민지와 제국주의적 전쟁의 기억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반복되며 동아시아의 지역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있다. 예컨대 1965년 이래 한국 정부는 반복해서 일본과의 관계 변화를 꾀했고 냉전구조가 주는 압력 속에서 일본은 어느정도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거나 용인했지만, 1991년 냉전 해체 이래 일본의 국력이 쇠퇴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의 국력이 신장함에 따라 이제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고 본다.
김항은 '제국 일본'이 만들어낸 '기억의 지층'이 비록 전후 체제 속에서 담론적으로 계속해서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가 꺼내질 때마다, 그리고 전후 민주주의 체제가 한계를 보이며 '정상국가화' 시도가 이뤄질 때마다 잊혀졌던 제국의 기억이 끊임없이 소환되었다고 본다. 그는 '제국 일본'이라는 기억을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며 <제국 일본의 사상>(창비, 2015)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일본에서 펴낸 학위논문인 <제국 일본의 문턱>(帝国日本の閾)(2010)의 후속작이다. 김항의 입장은 그의 책이 보여주는 현란하기 그지없는 이론구성에 비해 다소 소박(?)하다.
- 일본의 국민국가 건설이 실패하였다는 것이고, 그 한계가 바로 식민지 조선이라는 '타자(他者)'이기에 '정상국가화'로 대표되는 국민국가의 건설, 달리 표현하자면 국가라는 구성물의 '동일성'의 재생산 시도는 끝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을뿐더러 '타자'였던 피식민 국가들의 반발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 일본제국의 한계 개념으로서의 식민지 조선 및 중국 등의 '지워진' 존재들은 국민국가의 동일성의 재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전후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이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아베 등의 일본 '극우파'들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는 다소 소박하게 그러한 시도를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들여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구성하자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했지만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론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계보들이 얽혀 있고 김항의 탁월한 이론적 재능이 이것들을 잘 엮어 하나의 계보적 구성물로 우리 앞에 내놓고 있기 때문에 그의 지식체계를 따라잡지 못하는 나같은 천학비재(淺學菲才)는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현기증이 나서 그만 정신을 잃고 다른 책으로 도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를 살펴보고 나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김항의 연구 역량과 이론적 축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본 리버럴에 대한 비판이 통념적인 한국인의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실망감' 때문이다. 와다 하루키 등의 일본 리버럴의 '자기 배반'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그의 입장은 재일조선인인 서경식 등의 비판과 많이 겹치는 지점이 있다. 아베 신조의 정상국가화 등의 다양한 맥락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러한 시도들을 모두 '제국 일본의 기억'을 되살리며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로 보는 것이나 그리고 그것을 격하게 비판하는 와다 하루키 등의 일본 리버럴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일본 내셔널리즘에 동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모두 한계점이 크다고 본다.
김항의 주장의 핵심을 보기 위해서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적어도 김항이 이해하는 마루야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에 간략하게나마 요약해 제시하고자 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김석근 역, 통나무, 1998)라는 대작으로 일본 근대성을 파훼하며 그 뿌리를 드러낸 학자로, 일본 사상계의 '천황'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의 대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천황제 파시즘'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사상사적 차원에서 해명하였으며, 그가 말년에 이르러 일본의 천황제가 '개인'의 형성을 저해하는 요소였다는 것에 확신하게 되었다는데서 알 수 있듯이 천황제라는 한계가 일본 근대사의 전개 속에서 '주체적 개인'의 형성을 어떻게 가로막았는지를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학술 작업을 이어갔다.
개인적으로 마루야마의 입장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 한참 공부할 때 다케우치 요시미, 마루야마 마사오, 후지타 쇼조 등을 읽으면서 격하게 반발했던 부분은 이들이 일본의 근대를 비판하면서도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출병에 앞서 식민지 조선의 평양에 잠시 머물렀던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째서 그의 인식체계 속에 '식민지 조선'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는 천황제가 일본인의 자유로운 인격 형성에 치명적인 장애물이라는 자신의 지적인 결론을 내면서 중학생 때부터 갖고 있던 천황에 대한 믿음을 끝낼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 천황의 이름으로 행해진 식민지배를 반성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에 많은 불만이 있었다.
일례로 마루야마 마사오가 조선에 대해 회고한 부분이 있다. 그에게는 조선보다도 "군대"에서의 폭력적인 황민화 경험이 엄청나게 강하게 인식되었던 듯한데 조선인 상관들한테 맞았던 기억을 말한 부분이 있다. 군대에서는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상관없었다며 사실상 민족차별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오직 군의 계급뿐이고 그 계급은 천황에 대한 충성, 황민화에 따라 형성된 위계질서였다. 천황제에 충성한다면 조선인조차도 그 속에서 평등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조선인 군인들을 면회 온 가족들에 대해 회고하는데 조선인 가족들이 "평등하게 기뻐"했다고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상당히 인상깊었던 표현이라 기억하는데 그는 그 부분이 바로 황민화 정책의 "죄"라고 말한다. 이민족인 조선인조차도 그토록 강렬하게 흡입할 정도로 천황제의 독을 강렬했다. 요컨대 그는 일본 근대를 천황제를 축으로 살펴보면서 그 연장에서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식민지배 자체를 특별한 '죄'로 다루기보다는 천황제에의 포섭력이 이민족에까지 미칠 정도로 강렬했던, 그리하여 그것이 일본인의 자유로운 인격 형성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요소였다는 점을 그는 더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이처럼 그의 사상체계에 "제국주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인의 후예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어려웠고 사실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천황제 국가의 '죄'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마루야마는 기본적으로 칼 만하임의 이론으로부터 인식론을 빌려온다.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은 개인을 사회구조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로 보며, 동시에 사회구조 또한 그 개인의 '시각' 속에서 구성된다. 개인과 사회구조 간의 이러한 상호관계 혹은 상호 '독자성'은 사회구조 그 자체가 "만들어진다"는 '상상'을 통해 구성되고 유지된다. 중요한 것은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관점이다. 마루야마는 앞서 언급한 저작에서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사상을 분석하여 근세 일본의 주자학적 사유양식의 해체 속에서 어떻게 근대적 사유양식이 나타나게 되는지를, 다시 말해서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의 작위(作爲) 개념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밝혀낸다. 그 과정에서 마루야마는 일체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공적인 영역에서 홉스적인 의미의 주권자로 등장하며 그에게 주어진 것들을 정치화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마루야마에게 있어 정치란 개인이 사회구조를 새로운 입장에서 보며 "바꿀 수 있다", "만들어낼 수 있다" 등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위기" 속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즉, 마루야마는 개인이 이미 자연화되어 존재하는 공동체적 질서를 새롭게 바라보며 결단을 통해 그것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며 이러한 '정치'는 "위기" 속에서 내려지는 "결단"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마루야마에게 있어 이 "위기"가 "민족공동체"의 위기였다는 점이다. 개인을 구성하는 '결단'은 천황이라는 이름의 "국체"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일본인이라는 '개인적' 존재는 이전의 막부체제 속의 관습적이고 '주자학적'인 인륜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계를 구성하고자 했는데 이 '개인'은 "국체"를 전제로, 달리 표현하자면 "천황"을 전제로 하고 있었을 뿐이며 개개인의 존재 자체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공동체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개인은 민족 전체의 위기 속에서, 그리고 그를 엄습하는 공포 속에서 온갖 관계성을 박탈당해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는 하나의 주체적 존재가 되지 못하고, 타율적인 "육체적인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부분을 대단히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그의 이론이 "위기"적 상황이 민족공동체의 위기, 국체의 위기, 천황의 위기를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자라는 범주는 개인의 결단을 통해 구성되지 못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대단히 복잡하게 느껴지는데 단순하게 말하자면 마루야마에게 있어 근세 일본의 근대로의 이행은 막부와 그 신하들 간의 위계질서를 '평등'한 관계로 바꾸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천황 앞에서"의 평등이었을뿐 천황과 모든 인민 개개인 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황제는 개인의 구성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 '국체'의 위기를 전제로 일본이라는 정치적 공동체가 '상상'되고 구성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끝내 국가주의의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을 구출해내고자 했던 마루야마조차도 "위기" 속의 결단이라는 관념 속에서 이미 국체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게 김항의 비판의 요지로 보인다.
이런 입장에서 김항은 일본이 국민국가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동일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위안부 문제 등의 과거사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고 '화해'를 하려는 여러 시도들은 식민지 조선 등의 타자의 문제를 신속히 소급하여 국민적 동일성을 확보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천황의 전쟁책임 등과 같은 일본 내부의 문제를 마주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시도에 일본의 리버럴들이 동조하고 있다는 점을 김항은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그를 비판하고자 하는데 그 대표격이 바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이다.
2. 김항의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 리버럴 비판
김항은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김항,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동방학지 제179집,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7)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와다 하루키를 비판한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 논문은 한 학자가 다른 학자에 대해 이정도로 과하게 비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자아낼 정도로 엄중한 비판의 잣대를 와다에게 들이대고 있다. 김항의 와다 하루키 비판은 아래의 와다 하루키의 글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한다.
“군대가 다른 나라로 나가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자기 나라가 공습을 받아 초토화되었다. 그럼에도 요격하는 항공기도 없고 고사포의 응사도 없었다. 군대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감각을 결국에 갖지못했던 전시의 본토 일본인으로서는 군대 부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그것은 누군가 타인으로부터 강요된 것도 아니고 패전의 과정에서 스스로 납득하여 획득한 입장이다. 확실히 여기에는 일본국가가 조선인을 ‘황국신민’화시키고, 만주국을 건국하고,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고, ‘ 대동아공영권’ 건립을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공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 의식, 가해 의식은 없다. 그런 한계를 포함하면서도 이 자연스러운 군대부정의 감정이 전후 일본인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김항은 “여기서 되풀이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감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질문은 ‘한국인으로서’ 충분히 던질만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와다는 군대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가 공습을 겪은 ‘일본인’으로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라 하는데,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면 “조선, 중국, 동남아에 대한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은 그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평화주의 내에 일본제국의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이 ‘자연스럽게’ 내장해 있지 않다면,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없이도 성립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김항은 이러한 와다의 인식을 “자기배반”이라고까지 한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앞의 논의와 연결하자면 '자연화된 질서'로서의 천황제랄까, 제국 일본의 기억이랄까 이런 것들을 문제시하지 않고도 '평화로운 민주주의 국가 일본'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개인의 결단은 그저 개별화되어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부터 김항의 와다 비판은 의문을 자아낸다. 과연 “자연스럽다”는 말이 김항이 말하는 그런 의미를 지닌 것인가? 와다가 말하는 ‘자연스럽다’의 수식대상은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형성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형성이라 한다면 김항의 비판은 의문의 여지 없이 타당한 것이지만 김항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의 수식대상은 “군대부정”의 감각이다. “군대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감각을 결국에 갖지 못했던 전시의 본토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군대의 효용성에 회의를 느끼고 군대를 부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것은 일본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일반의 합리성을 지닌 모든 인간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김항이 인용을 잘못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김항이 직접 인용한 저 문단 속에서의 자연스럽다는 말의 의미는 군대 부정의 감정을 수식하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이 자연스럽다는 말에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와다가 정당화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는 “지배나 침략에 대한 반성”을 망각한 “자기배반”을 범하고 있다는 김항의 주장은 과도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논리적인 비약에서 시작한 글은 와다의 사상에서의 어떠한 “단절”이 존재한다는 또다른 비약으로 연결된다.
김항은 와다 하루키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 및 극복에서부터 그의 사상적 여정을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와다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적 개입은 단순히 한국을 돕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을 청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자기 개혁을 위한 실천이란 관점이었던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와다의 지적 여정은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식민주의 문제에 대한 보다 역사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김항의 분석에 따르면 와다는 북조선의 변화를 위해 한국전쟁과 북조선 연구를 행했으며 여기서 일본의 역할이란 “20세기의 역사를 정리하여 남겨진 전후-식민지 후 문제의 처리를 이번 세기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일본국가 및 일본국민의 의무”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일본인의 의무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편에서 군대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와 다른 한 편에서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무감한 고립주의가 동시에 자리 잡”은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시 말해 일본 자신의 개혁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와다 하루키의 ‘동북아 공동의 집’이라는 “유토피아”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김항에 따르면 이 새로운 유토피아는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지역 내 이웃들의 고통에 눈감아야 했던 것이 전후 일본의 조건이었다면, 냉전의 종식으로 이제 평화는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역 내 주체들과 주체적으로 협력하여 미래지향적으로 구축해나가는 과제가 되었기 때문”에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런 맥락 속에서 김항은 와다가 위안부 문제에 실천적으로 개입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내 추측이지만 김항은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는 와다의 실천 속에서 그의 사상의 “단절”의 계기를 포착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과 극복보다는, 미래를 향한 지역 내 주체들의 대화가 과제가 되는 역사 단계로 이행했다는 인식이었던 셈”이라고 김항은 말하고 있는데 마치 와다가 이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과 극복”을 방기했다는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방기를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에 있어 난항을 겪자 와다는 점차 사상적 초점을 '동아시아'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로 옮겨갔다고 김항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와다는 동아시아의 역사 주체 상호 간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데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지렛대로 삼아 동아시아 및 전 세계 차원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데로 초점을 이동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하는 문장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김항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에 대한 와다의 이러한 입장이 식민주의와의 사상적 유착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항에 따르면 <‘평화국가’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와다는 “전후 일본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및 국제 정세 속에서 주체적으로 평화국가를 지키려 노력해온 것이지, 미점령군으로부터 강요된 헌법 아래 무장해제 당해 굴욕을 경험해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패전 직후의 평화국가 구상을 천황과 주변 인물들의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이념”이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김항에 따르면 이러한 와다의 인식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국주의자가 잘못 이끈 전쟁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련한 천황과 국민이라는 서사는 이미 1942년 시점에서 미국에 의해 고안된 심리전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감안할 때 천황과 주변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국가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떤 구상을 가졌더라도 미점령군의 승인 없이는 전후 일본의 기본 노선으로 채택”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와다의 이러한 주장은 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주의”가 내장되어 있는 서사이며 “미국과 일본 보수파의 서사”이기도 하다. 여기서 와다는 미국과 일본 보수파와 사상적으로 ‘내통’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김항은 더 나아가 “침략전쟁은 결국이 질서를 어지럽힌 일탈 행위”였다는 이 서사를 와다가 받아들인 “이 지점에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피식민지(인)와 피침략 지역(인민)으로 향하기보다는 인류의 정의라는 보편주의적 규범을 향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인류의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 책임을 져야 할 과오로 인식되는 것”이다. 김항은 와다의 이러한 평화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식민주의가 착종된 난바라 시게라의 평화주의 평가에서 오류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 보고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의 과격한 비난이다.
잠깐 옆으로 새자면 김항의 비판 자체는 일본 전후역사학의 난점을 잘 꼬집고 있다. 전후 체제를 떠받치는 기본적인 서사는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역, 민음사, 2009)가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미국인들의 '오만한' 시각, 일본의 전후 재건의 기초를 미국이 제공해주었다는 입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대체로 그것에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미군정이 애당초 설정했던 일본 군국주의의 철폐와 민주화는 이상적인 목표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간접 통치 속에 강력한 관료제 중심의 '(상징)천황제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여러 개혁 요구 등이 반영되어 기존의 군국주의적 질서와 다른 새로운 변화의 흐름이 정착되어 평화일본이라는 전후 질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책의 제목처럼 "패배를 껴안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나아갔던 것이다.
대체로 이런 서사는 미국의 점령이 "성공적인 점령"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점령과 개혁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든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든 전후의 일본은 피지배계층까지도 지지하며 형성된 '성공적인 점령'이었다는 입장 자체는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점령" 그 자체는 일본의 전후질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계기일 뿐만 아니라 전후질서의 동요가 나타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다시금 되짚어봐야 하는 중요한 논점이 된다. 이에 대해 일본의 역사학자들, 예컨대 아메미야 쇼이치 같은 학자는 <점령과 개혁>(유지아 역, 어문학사, 2012)에서 점령이 없었어도 일본 사회는 변모했을 것이라는 식으로 반론을 펼치고 "총력전체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식으로 주장을 한다. 점령이라는 계기가 없었더라도 아래로부터의 흐름이 반영되어 지금과 같은 변화를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건데 사실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한 흐름들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미국에 의한 '점령'이라는 계기가 없이 그것들이 폭발적으로 분출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다시 돌아가서 김항에 따르면 난바라 시게루는 비록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해 언급했지만, 아니 그의 천황 전쟁책임론은 대만인, 조선인 등과 같은 피식민지민의 추방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다 “순수한” 일본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서 제기된 것이었다. 난바라는 피히테의 관점을 받아들여 개인 - 국민 - 인류라는 세계사적 관점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국민은 단순히 개인과 인류를 매개하는 중간적 존재가 아니라 국민이 존재함으로써만 비로소 개인과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천황은 이 국민 공동체의 형성을, 그것도 순수한 형태로의 분열과 대립이 없는 김항의 표현에 따르자면 ‘매끈한’ 공동체의 창출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이런 난바라의 입장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친일파와 같은 역사적 대립이 존재하고 있는 조선과 대만은 국민을 형성하지 못한 곳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인류에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은 천황을 매개로 국민을 창출하여 인류 보편에 기여하는 문명국가이지만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배제되어 자신들만의 국민을 창출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그런 비문명 지역이 되는 것이다.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이 난바라 사상의 중심축이라는 것이 김항의 분석이고, 그런 난바라의 주장에 동의하며 높게 평가하고 있는 와다의 사상도 난바라와 마찬가지로 식민주의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 김항의 핵심 주장이다.
다소 난폭한 논리전개와 단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기존의 다른 논자들과 다를 바 없이 일본국의 평화헌법은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며 일본인의 주체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일본인들의 그 평화 인식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몰인식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 않으나, 그렇다면 한국의 헌법은 그렇다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내적으로 달성한 것인가? 비록 평화헌법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어찌됐든 지킨 것은 일본인들 스스로의 결단이고 당연하게도 일본인들의 그 결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해명을 이뤄져야만 한다. 일본인은 일본 역사의 전개에 있어 일본인 자신의 주체성을 세울 필요성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김항은 이런 지점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가라타니 고진도 <헌법의 무의식>(조영일 역, 도서출판b, 2017)에서 일본인들이 어찌됐든 전후 체제를 70년 넘게 유지하려 한 것 자체가 헌법을 단순히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내면화하는 기제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 또한 김항에게는 비판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김항은 다른 연구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맑스 해석이 지니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품 교환, 즉 확장된 가치형태를 가라타니의 방법으로 탈구축하면 남는 것은 '묶여 있는' 이들이다. 이방인이 될 수 없는, 즉 이동할 수 없는 이들이 눈앞에 덩그러니 서게 되는 셈이다. 아마도 가라타니는 이 원천적 인간의 형상을 사념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것은 현대 일본, 특히 전후 일본이 끊임없이 상승의 계기만을 국가 제도뿐만 아니라 온갖 영역에서 내면화 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동을 통한 비평을 하나의 탈출구로 삼았던 가라타니의 비평세계에는 신체적, 역사적, 젠더적, 정치적 이유로 묶인 이들의 자리가 없다. 하나의 강력한 징후이다. 현대 일본을 급진적으로 되묻는 비평의 계보 속에서 이렇듯 하나의 전도가 자리한다는 사실은 말이다."(김항, "현대 일본의 비평과 그 임계점", 동방학지 제198집,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2, pp.369-393)
김항은 거듭해서 일본 내셔널리즘(그것의 가장 비판적인 논자조차도 벗어날 수 없는)의 범주를 설정하고 그에 포섭되지 못하는 이들의 존재를 드러내며 일본 리버럴 및 좌파 이론가들에게 따져묻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다소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일정한 정도의 배제가 없는 정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비지배' 등의 다양한 정치철학 논의들이 존재하지만 허망하기 그지없는 담론이라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런 유형의 비판들이 다소 '피곤'하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다. 그것보다는 가라타니가 되었든 마루야마가 되었든 와다가 되었든 이들이 지향하는 어떤 '정치적 프로젝트'가 실제적으로 현실에서 어떻게 기능하며 다양한 실천적 모순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개입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다시 논의로 돌아가자면 김항의 논지는 결국 와다의 사상이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그 이전부터 사상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단절을 경험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우선 한 가지 사실부터 지적하자. 김항 자신도 와다 하루키가 모를 리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지만 와다 하루키는 이미 전후의 상징적 천황제가 미국의 정책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미국의 정책으로 쇼오와 천황의 전쟁책임은 추궁하지 않고 책임을 오로지 군부에게만 지운다는 방침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일본인에게는 일억총참회에서 출발하여 군부에게만 전책임을 지우는 것이 홀가분했다.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느끼고 자신들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맡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너무 먼 상태”였다고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와다가 설마 김항의 지적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게 “군국주의자가 잘못 이끈 전쟁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련한 천황과 국민이라는 서사는 이미 1942년 시점에서 미국에 의해 고안된 심리전 전략”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와다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어째서 일본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일까. 이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와다의 현대사 인식 전체를 살펴보아야 한다.
3. 와다 하루키의 세계사 인식으로서의 시대구분론
와다 하루키는 <역사로서의 사회주의>(고세현 역, 창비, 1994)에서 1914년 이후의 세계사를 두 단계로 나누어 인식한다. 하나는 ‘세계전쟁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전쟁시대’의 해체의 결과로 나타난 ‘세계경제시대’이다. 와다 하루키는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에서 기원한 현실사회주의 체제는 세계전쟁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나타난 전시체제라고 주장한다. 이 전시체제와 그에 대항하는 미국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충돌한 역사가 바로 동아시아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미국은 세계전쟁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지만 소련은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소련판 베트남전쟁이라 할 수 있는 아프간 전쟁에 뛰어들어 체제의 동력을 소진한다. 결국 이 전쟁에서 패배한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세계전쟁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탄생한 전시체제가 변혁을 견딜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소련은 해체되고 미국도 세계전쟁시대의 후유증으로 점차 패권이 약해지기에 이른다. 와다는 이런 세계전쟁시대가 종말된 시대를 경제력에 기반한 세계경제시대라고 파악한다. 보다 효율적인 경제를 운영하며 비군사주의적 체제를 운영해온 독일과 일본이 이 시대의 주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와다는 독일과 달리 일본이 철저한 자기반성과 그에 기반한 정치철학에 따라 세계사에 있어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후방기지’로 편입되어 미국의 보호 속에서 모든 역량을 경제에 쏟아부어 세계적인 경제를 이루었을 뿐 스스로 어떠한 정치적 철학과 비전을 지니고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지역에서의 일본의 지위 또한 갖추지 못했다. 와다의 말을 옮기자면 “일본은 제2의 전후에 이루어야 할 것을 방치한 채로 있다가 제3의 전후에 마주친 것이다. 제3의 전후에 걸맞은 새로운 정신으로 제2의 전후에서부터 가지고 넘어온 문제를 해결해야만 새로운 시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전쟁책임과 피식민책임을 회피한 일본국은 세계경제시대의 모순인, 세계에서의 불균등 발전에 대항할 사상적•정치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세계경제시대의 모순으로 환경, 각국의 경제적 격차 등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인류사 자체의 존망이 위태롭게 된다.
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바로 “우선 첫째로,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을 국민적으로 확립하고 그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시하려는 노력, 전후 보상의 노력을 시작”해야만 한다. 둘째는 영토 문제의 해결이고 셋째는 “헌법과 자위대의 관계에 대해 합의를 만들어낼 필요”이다. 셋째가 중요한데 와다에 따르면 “이 헌법말고는 일본국가의 바탕이 될 만한 것이 주어져 있지 않”다. “이 헌법은 역시 15년 전쟁을 통해서 일본국민이 획득한 것”이며 “그 헌법과 자위대의 관계를 조정”함으로써 “세계전쟁시대가 끝나고 앞으로는 군축이 기본적인 과제”가 된 이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 그는 “미국군대에 더하여 러시아•중국•한국•북조선의 군대와 교류를 추진하여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가운데 본격적 군축”을 행해야 “진정한 의미의 세계전쟁시대의 밖으로 나갈 수 있”고 “일본은 새로운 시대의 과제와 맞서나갈 수 있”다고 인식한다. 이런 와다의 인식 속에서 북조선이 차지하는 위치가 명확해진다. 와다는 일본과 북조선의 화해,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평화 체제의 성립이야말로 세계대전쟁 시대의 완전한 탈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그렇기에 와다는 동북아 공동의 집 구상에서 세계사의 주체로 한민족을 설정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실현의 주체로서의 한민족의 역할이 와다의 사상에서 중요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민족에 의한 세계전쟁시대의 완전한 마감과 세계전쟁시대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세계경제시대의 마감이야말로 새로운 유토피아, 동북아 공동의 집을 건설하여 세계사의 모순인 환경, 경제적 격차 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이 1992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한국어판은 1994년)은 와다의 사상적 연속성을 부정하는 김항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 김항은 1995년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고 좌절하면서 그의 사상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로서의 사회주의>를 분석해보면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 나온다. 실상 김항이 1995년 이후의 사상적 변화라고 할 계기들은 1992년의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와다의 사상적 연속성을 담보한다. 다시 말해 와다 하루키는 ‘세계대전쟁시대 - 세계경제시대 - 동북아 공동의 집’이라는 세 단계의 현대사를 구상하고 있었고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평화헌법 문제는 이미 그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와다가 평화헌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주의와 식민주의가 착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세계사의 2기인 세계경제시대조차 거스르고 1기인 세계대전쟁시대로 회귀하는 조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수주의로의 회귀”라 인식하는 김항의 주장은 와다 사상의 연속성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와다는 일본의 개헌이 군축이라는 기본적인 시대적 대세를 거스르고 있다고 인식하기에 평화국가를 강조하는 것이지 자신의 사상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문제를 세계전쟁시대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비판했으며 그것의 잔재를 처리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로 나아가려 했다. 그에게 있어 위안부 문제와 북조선 문제는 역시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처리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김항은 이런 연속성을 경시했다.
덧붙이자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김항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지렛대로 삼아 동아시아 및 전 세계 차원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데로 초점을 이동”시켰다고 비판하는데 이 문제는 보다 복잡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의 결과로 치유화해재단이 탄생했는데 김항과 서경식 등의 한일 지식인들은 이 위안부 합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김항은 이 글에서 박유하에 대해 비판하며 박유하가 말하는 보편적 인류 규범이 식민주의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김항의 주장이 옳다면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그토록 비판했던 그 피해자 분들이 치유화해 재단의 지원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피해자 분들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인가? 일본의 사과와 그에 따른 배상을 받아들인 피해자들은 잘못된 것일까? 그걸 재단할 권리는 대체 누가 갖고 있는가? 화해치유재단의 보고에 따르면 2017년 7월 현재 생존피해자 47명 중 보상금과 사과를 수용한 36명 중 34명에게는 배상금 1억이 지급되었으며 사망피해자 유족들 199명 중 보상금과 사과를 수용한 65명 중 48명에게는 2천만원이 지급되었다. 물론 돈을 받았다고 해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100%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 분들 중에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금을 수용한 분들도 계시며 그 분들의 의사 또한 중시되어야 한다. 합의에 대한 부정은 피해자의 의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김항과 같은 지식인들이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생각을 해봤을지 의문이 든다.
혹여나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재단이 할머니 분들에게 배상금을 받도록 강요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동의할 수가 없다. 우선 재단이 할머니 분들의 계좌를 알 수가 없다. 먼저 알려주고 신청해주셔야 비로소 그 계좌를 통해 입금하는 것이지 일부의 주장처럼 현금을 강제로 줄 수가 없다. 본인의 주체성이 전제되지 않은 보상금 지급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아시아기금 때도 배상금을 받니마니 하는 문제로 피해자 분들 간에 다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다 조심스러워 해야 한다고 본다. 타인에 대한 비판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한 비판이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자국, 한국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4. 일본의 '극우화'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1945년 이래로 세계질서는 크게 변모하였다. 나는 여러 곳에서 "20세기형 세계시장"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고자 시도해왔다. 이러한 시도들을 https://contents.premium.naver.com/historia9110/historia91 에서 길게 연재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자본주의의 제3기인 "21세기형 세계시장"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게 나의 기본적인 세계사 인식이다. 일본을 아직도 세계자본주의의 제1기인 "19세기형 세계시장"에 속한 '제국주의형 국가'로 인식하며 어떠한 변화 시도도 모두 '극우화', 군사대국화 등의 부정적인 틀로만 파악하려는 시도들은 어느정도 지양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이러한 시도들을 뒷받침하는 인식체계의 근간에는 "재일조선인", "오키나와" 등등의 몇몇 강력한 키워드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키워들들이 축적한 광범위하고 실증적인 연구들을 모두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자 등의 억압받고 배제받는 '호모 사케르'들을 다시금 '주체화'하려는 시도들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의미있고 역사적으로로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일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계속해서 재생산하며 한국과 연대할 수 있는 일본 내부의 리버럴, 좌파 세력들에 대한 비판으로만 기능한다면 이제는 되짚어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한다.
김항 선생의 뛰어난 연구 업적을 즐겁게 따라 읽고 많이 배우면서도 이렇듯 과할 정도로 길고 자세하게 그를 비판한 것은 그의 지적 업적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끝으로 언급해두고자 한다. 극우화라는 인식만으로 일본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천황제 폐지를 통한 일본의 민주적 공화정으로의 이행'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목표를 내걸고 한국의 공화주의 전통과 흐름이 일본 내부로 어떻게 '수출'될 수 있는지를 좀더 넓고 크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동아시아 공화주의 혁명의 '전위국가'로 한국이 나서기 위해서는 상대를 극우화 등으로 규정하여 배척하기보다는 공동의 목표를 제시하고 좀더 크게 품을 수 있는 인식틀을 만들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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