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24

Park Yuha 정희진 사태

정희진 사태
정희진씨의 어제날짜 칼럼을 읽고 거의 경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 많은 글이지만
특히 윤석열/김건희의 “부부가 된 사연”에 대해 언급한 부분.
두사람을 이재명/김혜경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두 후보의 가장 큰 차이이자 이번 대선의 중대한 쟁점은 이들이 법적 부부가 된 사연이지만, 의외로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소개팅과 검찰 문화 비호 아래 검사와 피의자의 신분으로 만난 경우,
이것이 같은 ‘부부의 연’인가”라고.
얼마 전에 우연히 보게 된 방송에서 윤후보는
미술이 인연이 됐다고 말했다.
바쁜 검사 생활 속에서 잠깐 시간이 날 경우 싱글이라 영화관 같은 데 가기는 좀 그래서 미술관을 자주 다녔다는 이야기. 미술책도 많이 봤고 김건희씨와 만났을 때 미술관도 다니면서 가까워졌다는 이야기.
두 사람을 어떤 스님이 소개했다는 얘긴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친구가 해야만 “소개팅”인가.

만났을 당시 장모가 이미 “피의자”였는지 까지는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두사람이
“검사와 피의자 신분”으로 만났다는 말엔
‘봐주기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하지 못한 만남’이라는 전제가 있다.
‘소개팅’이면 다 순수할 거라는 전제도 그야말로 순진하지만,
‘검사’니까 결혼했을 거라는, 자신을 팔아 넘겼을 거라는 추측은
심각한 명예훼손일 뿐 아니라 ‘여성의 창녀화’라는, 오래 전에 지적된 여성차별적 시선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비슷한 상황을 비교하는
“기준을 살펴보는 지성과 윤리”를 발동해 “.차이의 기준을 유권자 스스로 만들고 판단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래야 “뭣이 중헌디”를 알 수 있다. “고.
심지어 “이번 선거에서 핵심적 이유, 중요한 차이는 윤 후보가 검사라는 사실과 그들이 부부가 된 사연이다. 이것은 흠이 아니라 결정적 결격 사유이자 범죄 행위도 될 수 있다.”라며 
수고롭게도 ‘핵심’이고 ‘중요’하다고 반복하면서 ’범죄행위’ 운운한다.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의 문제를 지적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글 만큼 절망적으로 실망한 적이 없다.
심지어 정희진씨가 내 책을 비판한 글을 읽었을 때조차 이토록 절망적인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이 칼럼은, 여성학 관계자라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사건’이자 ‘사태’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이재명·윤석열 후보의 같음과 다름 - 경향신문 AMP

이재명·윤석열 후보의 같음과 다름
2022.02.23 
정희진 여성학자 

양비론과 진영 논리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다른 사고방식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사회변화는 기존과 다른 글쓰기, 말하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정희진 여성학자

지난달 나는 이 지면에 현대 사회의 팬덤 문화에 대해 썼다. 문재인 대통령의 팬덤은 확장성이 없고 BTS의 팬덤은 ‘바람직하고’, 윤석열 후보는 독특하게도 지지자를 모욕한다고 말했다. 나의 주장은 정치인 팬덤이 대중 예술인의 팬덤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윤석열 후보의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 관련 발언은 그 자체보다, 그런 생각을 공적으로 발화하는 그의 반사회성이 놀라웠다. 어쨌든 나는 세 가지 팬덤의 다름, 즉 지극히 당파적인 글을 썼는데 몇몇 독자로부터 양비론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글은 윤석열 후보 비판이 초점이었고, 이를 위해 문 대통령과 BTS를 비교했다. 윤 후보에 대한 일방적 비판을 피하려다 보니,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문 대통령 팬덤은 긍정적으로 쓰지 않은 데다 분량이 많다보니, 양비론으로 읽힌 것 같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글쓰기가 양비론인데, 그런 지적을 받으니 내 글이 읽히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양비론만큼이나 오해가 많은 개념도 없을 것이다. 양비론과 양시론(兩是論)은 ‘론’이 아니라 불가능한 관념이다. “둘 다 틀렸다, 둘 다 옳다”는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문제는 양비론이 아니라 양비론의 기준이다.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같고, 어떤 경우에는 다르다.

캐롤 타브리스의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은 이유>(또하나의문화, 2010)는 같음과 다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이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를 보여준다. 책의 원제 ‘The Mismeasure of Woman’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의 개념을 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모든 언어는 대상과의 차이와 거리에 의해 정해진다. 허공에서 만들어진 말은 없다.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반대말, 비슷한 말 공부가 중요한 이유다. 민주주의는 차이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를 둘러싼 끊임없는 갈등 과정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차이는 존중하되 차별은 안 된다”는 통념이 너무 강력하다 보니 논의의 진전이 어렵다. 차별은 권력이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인지 아닌지를 규정한 결과다. 삼라만상에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차이가 모두 다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특정한 다름을 차이로 만드는 권력의 임의성이다.

양비론 기준 유권자가 만들어야

그러므로 근본적인 문제는 개념을 만드는 세력(권력)이 정하는 다름의 필요성이다. 한족이 절대 다수이지만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전쟁을 뜻하는 단어가 달랐다. 중화의 사고방식에서는 모든 무력 분쟁이 ‘같은 급’일 수 없다. 정(征), 토(討), 침(侵), 습(襲), 벌(伐), 전(戰) 등 다른 문자로 표기했다. ‘전(戰)’ ‘적국(敵國)’은 동등한 정치 집단에만 사용했다. 철저히 힘의 원칙에 따른 표현이지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우리도 성인과 어린이가 싸우는 것을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로남불도 양비론과 관련된 언설이다. 이는 위선이라기보다 자기 위주의 부분적이고 한시적 경험이다. 정확히 말하면, 비유로서는 성립 불가능한 말이다. 로맨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맨스는 선남선녀 이성애자를 향한 로망이고, 윤리적이지 않은 사랑(‘불륜’)은 제도 밖의 관계가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거나 상대가 미성년자이거나 헤어질 때 비열한 행위 등을 말한다. 내로남불의 진짜 현실은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행동이다. 그들은 자국이 하면 전쟁, 다른 나라가 하면 테러라고 주장한다. 전쟁과 테러의 차이는 미국이 정한 것이다. 그러니 ‘테러와의 전쟁’처럼 도착적인 단어도 없다. 전쟁과 테러가 같은 의미인데, 테러와의 전쟁이라니.

이번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후보는 14명. 모두 다른 인물이지만, 여야 후보에 대해서는 ‘사상 최악’이라는 여론이 유난하다. 공통점은 1960년대 출생 남성, 사법시험 합격자, 기득권 거대 양당 소속, 자신이 극우 마초(male chauvinist)인지 모르는 지극히 한국적인 남성, ‘아무 말 대잔치’…. 녹색당, 정의당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제도권 정치문화의 산물이다. 부디 건설(파괴) 공약이 실현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다른 점도 많다. 부모의 배경, 군대 면제 이유, 가족 논란, 경력, 가치관, 소속당 국회의원들의 선거운동 참여도까지…. 각기 장점이든, 단점이든 차이가 크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이질적인 대통령 후보들이다. 두 사람이 같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같음과 다름의 기준 그리고 그 기준이 상식에 부합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차이와 큰 차이도 여기에서 정해진다.

양비론 논란은 무엇이 기준이냐에 따라 달려 있다. 김혜경씨는 도지사 부인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고, 김건희씨 모녀는 주가조작을 비롯해 온갖 소송에 연루되어 있다. 무엇보다 ‘김건희 박사’는 학력과 경력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이것을 같은 수준의 흠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 전자가 더 잘못인가? 이는 정해진 원칙에 따른 약점이 아니다. 유권자의 의식, 즉 어떤 문제에 더 분노하고 더 관대한가에 따라 달라진다.

여성 검사가 남성 피의자와 결혼?

두 후보의 가장 큰 차이이자 이번 대선의 중대한 쟁점은 이들이 법적 부부가 된 사연이지만, 의외로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소개팅과 검찰 문화 비호 아래 검사와 피의자의 신분으로 만난 경우, 이것이 같은 ‘부부의 연’인가. 나는 ‘여성 검사’가 ‘남성 피의자’와 결혼했다는 사례는 알지 못한다. 병역 면제도 마찬가지다. 윤 후보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시력 차가 0.7이 넘어 면제받았지만, 검사 임용 당시 시력 차는 0.2였다. 윤 후보의 면제 사유와 10대 소년이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프레스 기계에 왼팔이 끼여 6급 장애 판정을 받은 경우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3D 프린터를 “삼디”라고 발음한 사실과 윤석열 후보가 ‘RE100’을 아예 모르는 것은 같은 차원이 아니다.

대선의 쟁점인 ‘젠더 갈등’도 차이의 기준을 교묘히 이용한 사례다.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킨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개인의 무지인지 아니면 한국 사회의 무지를 활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전략은 성공한 듯 보인다. 그는 여성들 간의 차이, 남성들 간의 차이를 남녀 차이로 환원했다. 과잉 재현된 극히 일부 중상층 20대 여성과 징병 대상 흙수저 20대 남성을, 남녀 차이 일반으로 대립시켜 착시 현상을 만들었다. 계급 문제를 성별 갈등으로 조작한 것이다. 왜 50대 가난한 여성과 50대 중산층 남성은 비교하지 않는가.

양비론의 반대 상황은 편들기가 아니라 같음과 다름의 기준을 살펴보는 지성과 윤리다. 차이의 기준을 유권자 스스로 만들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뭣이 중헌디”를 알 수 있다. 흠 없는 사람도, 정치인도 없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핵심적 이유, 중요한 차이는 윤 후보가 검사라는 사실과 그들이 부부가 된 사연이다. 이것은 흠이 아니라 결정적 결격 사유이자 범죄 행위도 될 수 있다.

무엇이 큰 차이고 작은 차이인가도 중요하지만, 특히 정치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작은 차이가 더욱 중요하다.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의 선택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재명 후보는 ‘흠결’이 많고, 윤석열 후보는 ‘무능’하다고 한다. 해석하기에 따라 이는 큰 차이다. 흠결이 자수성가한 이의 불가피한 상처라면? 무능이 무개념, 반사회성이라면? 윤 후보는 실력을 논하기 전에 경력이 없다.


역대 대통령 중 유능한 리더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피해자에 가까웠다. 우리는 해방 후에도 한참 동안 대통령이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세월을 살아왔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지만 무능을 넘어 분별력이 없었다. 윤 후보의 현수막은 “국민이 키운 윤석열”인데, 국민이 그를 키울 시간이 있었던가? 이재명 후보는 “위기에 강한 유능한 경제대통령”이다. 유권자 스스로 어떤 지점에서 가치(차이)를 찾을 것인가가 양비론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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