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촌 강상호 - 형평운동의 선도자 | 진주의 빛 4
조규태 (지은이)펄북스20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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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판 확인일 : 2022-03-04
204쪽
진주의 빛 (총 4권 모두보기)
책소개
진주의 빛 4권. 독립지사이자 시대를 앞선 사회운동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백촌 강상호의 삶을 다시 살려 쓴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
백촌 강상호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다. 1887년 경남 진주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백촌 강상호는 신식 학문을 익히고 젊은 시절부터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스물한 살의 젊은이였던 강상호는 '국채보상운동 경남회'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은 이후 그의 삶이 어떤 길로 나아가려는지 알 수 있는 지표와 같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역에서 기개를 잃지 않고 독립과 평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사료 부족과 좌익으로 오해받고 불우하고 궁핍하게 삶을 마감한 탓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와 조명을 받지 못한 강상호의 삶을 제대로 다시 살려냈다.
목차
추천사
서문
1장 인격의 형성
1. 출생과 성장, 혼인 / 2. 교육 / 3. 빈민 구휼 활동
2장 사회 운동
1. 육영 사업 / 2. 국채보상운동 / 3. 항일 독립운동 / 4. 《동아일보》 진주지국장
5. 형평운동을 시작한 이후의 사회운동
3장 형평운동에 매진함
1. 백정이란 누구인가 / 2. 형평운동이 일어나게 된 진주 사회의 배경
3. 형평사 창립을 주도하다 / 4. 형평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다
5. 반형평운동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다
6. 형평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 7. 형평사의 변질로 형평운동과 멀어지다
4장 형평운동을 그만둔 뒤의 삶
1. 일제강점기 후반 / 2. 광복 직후와 한국전쟁 전후 / 3. 만년의 삶
4. 투병과 임종, 그리고 장례
후기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형평운동을 주도한 단체의 이름을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社)라는 형평사로 정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형평운동은 모든 인간들의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평등 운동이다. 이 고귀한 운동의 중심인물이 백촌 강상호 선생이다. 백촌 강상호 선생은 백정 출신도 아니었다. 양반 지주의 아들로서 기득권을 버리... 더보기
P. 50백촌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9년 4월 18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 그리고 1919년 4월 22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진주감옥소에 있다가 항소해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으나, 11월 3일 출소명령에 따라 11월 5일 대구형무소에서 가출옥했다. 접기
P. 58백촌은 도청 이전 반대 운동이 일제의 간계로 무산되었으나, 39세 되던 1925년부터 41세 되던 1927년까지도 각종 사회 운동 단체에 가담해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39세 되던 1925년 1월 19일에는 진주 사회운동자 신년 간친회 경과보고 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41세 되던 1927년 4월 7일에는 진주사회운동협의회 창립에 관여했다. 접기
P. 86백촌은 시대가 변해가고 있음에도 주위에 사는 백정들이 여전히 차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백정들에 대한 신분 차별을 없애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옆집에 사는 백정 신분인 정찬조, 같은 동네에 사는 백정 출신 이학찬이 겪고 있는 신분 차별로 인한 부당한 대우와 그 부당에 대한 불평 등이 백촌의 마음을 부추겼다. 그리고 후배 신현수의 조언도 한몫했다. 그리하여 백촌은 양반 후손임에도 백정들의 신분 차별로 인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앞장서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접기
P. 109백촌은 신식학교를 운영해 본 경험이 있어 신식 교육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백촌만이 아니라 이학찬도 야학 개설에 적극 참여했다. 이학찬은 자녀가 백정이란 이유로 일반 학교에 입학을 거절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형평사를 창립한 그 해 8월에 진주의 본사 건물 에 야학을 개설했다. 교과목은 한글 읽기와 쓰기, 일반상식, 윤리, 기초적인 한자 등이었는데, 개설하자마자 일시에 100여 명이나 호응하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조규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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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학사, 석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등학교 교사를 거쳐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일했으며, 경상대학교 교수회장, 국어사학회 회장, 배달말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번역하고 풀이한 훈민정음》,《용비어천가(국문 가사 주해)》, 《국어교육 지역화의 실천방안》등의 책을 지었으며, 국어사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지금은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한글학회 평의원,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창녕 조씨 대종회 학술위원으로 사소한 일은 지낸다.
최근작 : <백촌 강상호>,<번역하고 풀이한 훈민정음>,<작문> … 총 6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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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이자 시대를 앞선 사회운동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백촌 강상호의 삶을
다시 살려 쓴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
백촌 강상호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다. 1887년 경남 진주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백촌 강상호는 신식 학문을 익히고 젊은 시절부터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스물한 살의 젊은이였던 강상호는 ‘국채보상운동 경남회’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은 이후 그의 삶이 어떤 길로 나아가려는지 알 수 있는 지표와 같다.
부친 강재순이 세운 민족 사학 사립 봉양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이어받아 20대 후반이었던 1915년부터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주 지역 젊은이들을 규합해 독립을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남짓 복역한 후 가출옥했다. 복역 후에도 그는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경남도청 이전 반대운동, 진주사회운동가 간친회 사건으로 수차례 체포되고 석방되었으며, 진주신간회 창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일제의 탄압에도 꿋꿋하게 뜻을 굽히지 않고 진주 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강상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백정의 신분을 철폐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1923년 형평사를 조직하고 형평운동에 매진한 것이다. 양반, 상놈의 법적인 차별은 사라졌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살아있었고, 특히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에 대한 멸시와 억압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양반 집안 청년들의 폭력에 백정 청년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만나 강상호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양심”이라 소리 높여 외치고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온갖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평사를 설립해 차별 철폐에 온 힘을 쏟았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역에서 기개를 잃지 않고 독립과 평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사료 부족과 좌익으로 오해받고 불우하고 궁핍하게 삶을 마감한 탓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와 조명을 받지 못한 강상호의 삶을 제대로 다시 살려냈다.
독립운동으로 투옥 후 형평운동 매진
형평사 설립 후 전국 조직으로 키워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양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본사를 만든 취지이라.”
형평사의 창립 취지를 밝힌 주지(主旨)의 일부이다. 1923년 4월 25일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최초의 인권운동이 일어난 날로 기록되어야 한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였던 당시까지 여전히 차별받고 무시당했던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형평사를 조직한 사람은 바로 독립지사 백촌 강상호였다. 형평사를 세우고 형평운동에 매진하기 전까지 그는 사회운동가이자 독립지사로 일제의 탄압을 견디며 활동했다.
1984년 갑오개혁으로 제도적인 신분차별은 없어졌으나 관습은 여전해 일제강점기에도 백정은 호적조차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백정들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떨쳐버리지도 못하고 옥살이가 끝나자마자 신분제의 폐단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해) 진주에 도착하니 그때 마침 백정이 양반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은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나라 잃은 설움과 함께 큰 충격을 받았다.”
강상호가 생전에 자신을 찾아온 박종한(대아고등학교 설립자)에게 남긴 증언이다.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했는데, 그 백정이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자 청년들이 매질로 백정을 죽인 사건이었다. 강상호는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방법을 찾고자 신현수, 장지필 등 진주 지역의 인재들과 함께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社), ‘형평사’를 조직했다. 양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형평운동에 매진하는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새 백정’이라고 비난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평사는 백정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연대 속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형평사가 세워진 지 4개월 만에 경남뿐만 아니라 경북, 충남, 충북 등 지사가 설립되고 ‘도부’, ‘백정’등으로 호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없애달라는 ‘호적 정정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등 실질적인 백정 차별 철폐 운동의 성과를 내었다. 이전까지 뭉치지 못했던 백정들이 형평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은 결과였다.
좌익으로 오해받은 불우한 말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업적과 삶
강상호가 온 힘을 쏟았던 형평사는 1935년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고 친일 이익단체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형평사는 백정 해방,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한 본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횔동하는 단체로 변질되어 갔다. 자연스레 강상호도 핵심 역할을 맡지 못하고 결국 1936년 이후 형평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이후 강상호는 더는 사회활동에 나서지 않고 생업을 잇기 위해 농부로 살아갔다.
양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나 부친의 뜻을 이어 신식학교를 일으키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치고 형평운동에 온 재산을 쏟아부었지만 말년은 불우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어서도 그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좌우로 나뉜 혼란스런 해방정국에서 그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꿈꿨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지나는 기간 동안 강상호는 좌와 우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처 입은 호랑이였다. 조국의 독립과 신분 해방 운동을 위해 평생을 보낸 그에게 일제가 아닌 동족에게 체포되고 풀려난 경험은 통탄할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진주시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오해는 그에게 두고두고 큰 상처를 안겼다. 그 때문에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도, 지역 발전과 신분제 철폐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의 업적은 무시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인 평가는 2005년 대통령 표창이 전부다. 그의 공적을 감안하면 적어도 건국훈장을 받아야할 터이지만 이후 그를 기리거나 제대로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거의 없었다.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는 지금까지 제대로 기록하고 조명 받지 못한 그의 일생을 오랜 조사 작업을 통해 꼼꼼하게 완성시켰다. 일제 강점기 당시 신문기사와 지금까지 형평운동과 형평사에 관련한 문헌들, 유족이 기록하고 소장한 자료들을 망라해 그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업적에 대한 기록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유품이 소실되어 더 자세한 묘사와 추적이 어려웠던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후 그를 연구하는 이들의 몫이리라.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는 신분제에 맞서 싸운 깨어 있는 선도자이자 독립을 염원했던 지사였던 백촌 강상호는 그냥 잊혀선 안 될 표상이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형평운동은 만인이 평등하지 않던 시대를 이기기 위한 힘찬 몸부림이었고 그 성과는 분명했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단지 신분제 철폐만이 아니었고 만인이 더불어 잘 사는 사회였다. 그는 부조리에 온몸으로 맞섰으며 끝까지 기개를 지킨 진주의 큰 인물이었다. 접기
조규태 (지은이)펄북스2020-05-15
절판
보관함 +
- 절판 확인일 : 2022-03-04
204쪽
진주의 빛 (총 4권 모두보기)
책소개
진주의 빛 4권. 독립지사이자 시대를 앞선 사회운동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백촌 강상호의 삶을 다시 살려 쓴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
백촌 강상호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다. 1887년 경남 진주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백촌 강상호는 신식 학문을 익히고 젊은 시절부터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스물한 살의 젊은이였던 강상호는 '국채보상운동 경남회'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은 이후 그의 삶이 어떤 길로 나아가려는지 알 수 있는 지표와 같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역에서 기개를 잃지 않고 독립과 평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사료 부족과 좌익으로 오해받고 불우하고 궁핍하게 삶을 마감한 탓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와 조명을 받지 못한 강상호의 삶을 제대로 다시 살려냈다.
목차
추천사
서문
1장 인격의 형성
1. 출생과 성장, 혼인 / 2. 교육 / 3. 빈민 구휼 활동
2장 사회 운동
1. 육영 사업 / 2. 국채보상운동 / 3. 항일 독립운동 / 4. 《동아일보》 진주지국장
5. 형평운동을 시작한 이후의 사회운동
3장 형평운동에 매진함
1. 백정이란 누구인가 / 2. 형평운동이 일어나게 된 진주 사회의 배경
3. 형평사 창립을 주도하다 / 4. 형평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다
5. 반형평운동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다
6. 형평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 7. 형평사의 변질로 형평운동과 멀어지다
4장 형평운동을 그만둔 뒤의 삶
1. 일제강점기 후반 / 2. 광복 직후와 한국전쟁 전후 / 3. 만년의 삶
4. 투병과 임종, 그리고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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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을 주도한 단체의 이름을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社)라는 형평사로 정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형평운동은 모든 인간들의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평등 운동이다. 이 고귀한 운동의 중심인물이 백촌 강상호 선생이다. 백촌 강상호 선생은 백정 출신도 아니었다. 양반 지주의 아들로서 기득권을 버리... 더보기
P. 50백촌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9년 4월 18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 그리고 1919년 4월 22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진주감옥소에 있다가 항소해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으나, 11월 3일 출소명령에 따라 11월 5일 대구형무소에서 가출옥했다. 접기
P. 58백촌은 도청 이전 반대 운동이 일제의 간계로 무산되었으나, 39세 되던 1925년부터 41세 되던 1927년까지도 각종 사회 운동 단체에 가담해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39세 되던 1925년 1월 19일에는 진주 사회운동자 신년 간친회 경과보고 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41세 되던 1927년 4월 7일에는 진주사회운동협의회 창립에 관여했다. 접기
P. 86백촌은 시대가 변해가고 있음에도 주위에 사는 백정들이 여전히 차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백정들에 대한 신분 차별을 없애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옆집에 사는 백정 신분인 정찬조, 같은 동네에 사는 백정 출신 이학찬이 겪고 있는 신분 차별로 인한 부당한 대우와 그 부당에 대한 불평 등이 백촌의 마음을 부추겼다. 그리고 후배 신현수의 조언도 한몫했다. 그리하여 백촌은 양반 후손임에도 백정들의 신분 차별로 인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앞장서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접기
P. 109백촌은 신식학교를 운영해 본 경험이 있어 신식 교육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백촌만이 아니라 이학찬도 야학 개설에 적극 참여했다. 이학찬은 자녀가 백정이란 이유로 일반 학교에 입학을 거절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형평사를 창립한 그 해 8월에 진주의 본사 건물 에 야학을 개설했다. 교과목은 한글 읽기와 쓰기, 일반상식, 윤리, 기초적인 한자 등이었는데, 개설하자마자 일시에 100여 명이나 호응하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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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학사, 석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등학교 교사를 거쳐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일했으며, 경상대학교 교수회장, 국어사학회 회장, 배달말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번역하고 풀이한 훈민정음》,《용비어천가(국문 가사 주해)》, 《국어교육 지역화의 실천방안》등의 책을 지었으며, 국어사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지금은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한글학회 평의원,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창녕 조씨 대종회 학술위원으로 사소한 일은 지낸다.
최근작 : <백촌 강상호>,<번역하고 풀이한 훈민정음>,<작문> … 총 6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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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이자 시대를 앞선 사회운동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백촌 강상호의 삶을
다시 살려 쓴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
백촌 강상호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다. 1887년 경남 진주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백촌 강상호는 신식 학문을 익히고 젊은 시절부터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스물한 살의 젊은이였던 강상호는 ‘국채보상운동 경남회’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은 이후 그의 삶이 어떤 길로 나아가려는지 알 수 있는 지표와 같다.
부친 강재순이 세운 민족 사학 사립 봉양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이어받아 20대 후반이었던 1915년부터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주 지역 젊은이들을 규합해 독립을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남짓 복역한 후 가출옥했다. 복역 후에도 그는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경남도청 이전 반대운동, 진주사회운동가 간친회 사건으로 수차례 체포되고 석방되었으며, 진주신간회 창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일제의 탄압에도 꿋꿋하게 뜻을 굽히지 않고 진주 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강상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백정의 신분을 철폐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1923년 형평사를 조직하고 형평운동에 매진한 것이다. 양반, 상놈의 법적인 차별은 사라졌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살아있었고, 특히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에 대한 멸시와 억압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양반 집안 청년들의 폭력에 백정 청년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만나 강상호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양심”이라 소리 높여 외치고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온갖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평사를 설립해 차별 철폐에 온 힘을 쏟았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역에서 기개를 잃지 않고 독립과 평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사료 부족과 좌익으로 오해받고 불우하고 궁핍하게 삶을 마감한 탓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와 조명을 받지 못한 강상호의 삶을 제대로 다시 살려냈다.
독립운동으로 투옥 후 형평운동 매진
형평사 설립 후 전국 조직으로 키워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양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본사를 만든 취지이라.”
형평사의 창립 취지를 밝힌 주지(主旨)의 일부이다. 1923년 4월 25일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최초의 인권운동이 일어난 날로 기록되어야 한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였던 당시까지 여전히 차별받고 무시당했던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형평사를 조직한 사람은 바로 독립지사 백촌 강상호였다. 형평사를 세우고 형평운동에 매진하기 전까지 그는 사회운동가이자 독립지사로 일제의 탄압을 견디며 활동했다.
1984년 갑오개혁으로 제도적인 신분차별은 없어졌으나 관습은 여전해 일제강점기에도 백정은 호적조차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백정들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떨쳐버리지도 못하고 옥살이가 끝나자마자 신분제의 폐단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해) 진주에 도착하니 그때 마침 백정이 양반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은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나라 잃은 설움과 함께 큰 충격을 받았다.”
강상호가 생전에 자신을 찾아온 박종한(대아고등학교 설립자)에게 남긴 증언이다.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했는데, 그 백정이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자 청년들이 매질로 백정을 죽인 사건이었다. 강상호는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방법을 찾고자 신현수, 장지필 등 진주 지역의 인재들과 함께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社), ‘형평사’를 조직했다. 양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형평운동에 매진하는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새 백정’이라고 비난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평사는 백정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연대 속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형평사가 세워진 지 4개월 만에 경남뿐만 아니라 경북, 충남, 충북 등 지사가 설립되고 ‘도부’, ‘백정’등으로 호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없애달라는 ‘호적 정정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등 실질적인 백정 차별 철폐 운동의 성과를 내었다. 이전까지 뭉치지 못했던 백정들이 형평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은 결과였다.
좌익으로 오해받은 불우한 말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업적과 삶
강상호가 온 힘을 쏟았던 형평사는 1935년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고 친일 이익단체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형평사는 백정 해방,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한 본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횔동하는 단체로 변질되어 갔다. 자연스레 강상호도 핵심 역할을 맡지 못하고 결국 1936년 이후 형평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이후 강상호는 더는 사회활동에 나서지 않고 생업을 잇기 위해 농부로 살아갔다.
양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나 부친의 뜻을 이어 신식학교를 일으키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치고 형평운동에 온 재산을 쏟아부었지만 말년은 불우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어서도 그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좌우로 나뉜 혼란스런 해방정국에서 그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꿈꿨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지나는 기간 동안 강상호는 좌와 우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처 입은 호랑이였다. 조국의 독립과 신분 해방 운동을 위해 평생을 보낸 그에게 일제가 아닌 동족에게 체포되고 풀려난 경험은 통탄할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진주시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오해는 그에게 두고두고 큰 상처를 안겼다. 그 때문에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도, 지역 발전과 신분제 철폐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의 업적은 무시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인 평가는 2005년 대통령 표창이 전부다. 그의 공적을 감안하면 적어도 건국훈장을 받아야할 터이지만 이후 그를 기리거나 제대로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거의 없었다.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는 지금까지 제대로 기록하고 조명 받지 못한 그의 일생을 오랜 조사 작업을 통해 꼼꼼하게 완성시켰다. 일제 강점기 당시 신문기사와 지금까지 형평운동과 형평사에 관련한 문헌들, 유족이 기록하고 소장한 자료들을 망라해 그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업적에 대한 기록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유품이 소실되어 더 자세한 묘사와 추적이 어려웠던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후 그를 연구하는 이들의 몫이리라.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는 신분제에 맞서 싸운 깨어 있는 선도자이자 독립을 염원했던 지사였던 백촌 강상호는 그냥 잊혀선 안 될 표상이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형평운동은 만인이 평등하지 않던 시대를 이기기 위한 힘찬 몸부림이었고 그 성과는 분명했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단지 신분제 철폐만이 아니었고 만인이 더불어 잘 사는 사회였다. 그는 부조리에 온몸으로 맞섰으며 끝까지 기개를 지킨 진주의 큰 인물이었다. 접기
“백정이여 단결하라” 목 놓아 외친 양반 - 시사IN
“백정이여 단결하라” 목 놓아 외친 양반
[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백정 해방 운동을 이끈 ‘형평사’의 초대 사장은 양반 출신 강상호였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비난, 양반의 따돌림, 일제 관헌의 방관과 경멸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기자명김형민(SBS Biz PD)
입력 2022.08.07
776호
강상호는 해방 후 좌익 연루 혐의를 받았다.ⓒ독립기념관 제공
백정(白丁)이라는 사회적 신분의 기원은 좀 복잡하다. 고려시대만 해도 일반적으로 농사짓는 백성들이라는 뜻으로 쓰인 이 단어는 조선시대 이후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포함해 특수한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사회적 신분의 뜻을 지니게 돼. 이를테면 유명한 백정 출신 도적 임꺽정은 버드나무로 생활 도구를 만들어 바치던 ‘고리백정’이었다지.
백정 남자들은 장가를 들어도 상투를 틀지 못했고 부녀자는 결혼해도 비녀를 꽂지 못했다. 양반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농민들도 백정이라면 흰 눈부터 떴다. 성인이 된 백정도 상민(常民)의 자제들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고 “너도 말을 해봐!” 할 때까지 입을 닫고 기다려야 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어 백정에 대한 법적 차별은 공식적으로 종식됐지만 나랏법이 바뀌었답시고 백정이 큰 갓 쓰고 길을 나섰다가는 뉘 집 멍석말이를 당해 세상을 하직할지 모르는 형편이었지.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다. 일본은 지금도 ‘부락민’이라 하여 사회적 천민 계층이 남아 있다고 하니, 백정 차별을 오히려 더 잘 이해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일제강점기 민적(民籍)상 백정들에게는 도한(屠漢), 즉 ‘도살업 하는 자’라는 뜻의 굵은 글씨가 항상 박혀 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백정은 계속 백정이었어.
3·1 항쟁의 폭풍이 온 조선을 휩쓸고 간 뒤의 어느 날, 경상도 진주 어느 동네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젊은이들 몇이 백정을 끌고 와 개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백정은 고개를 저었다. “못 잡겠소.” 이 버릇없는(?) 백정에게 분노한 혈기 방장한 젊은이들은 주먹질과 발길질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어떻노? 인자 개 잡을 거제?” 그래도 개 잡기를 거부한 백정은 잔인한 구타 끝에 목숨을 잃고 말았어. 눈에 핏발이 선 백정의 이웃들이 일본 경찰서에 달려가 범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호소했으나 일본 경찰은 백정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백정을 죽인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
참혹한 백정 청년의 죽음을 기화로 뜻있는 이들이 손을 잡고 일어선다. 백정 출신인 장지필·이학찬 등과 더불어 양반 출신 강상호가 백정 해방 운동을 주창하고 나선 거야. 마침내 1923년 4월 ‘형평사(衡平社)’의 깃발이 경상도 진주 하늘에 처음으로 휘날린다. ‘저울처럼 평등한 모임’이라는 뜻이었지. “우리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이다. …전국의 형평 계급아 단결하라.” 강상호는 백정 출신이 아니면서도 초대 형평사 사장을 맡는다.
강상호는 도무지 백정 해방 운동에 뛰어들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어. 강상호의 아버지 강재순은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사람으로 천석꾼 부자였고, 강상호는 장남이었다. 아무리 일제강점기라 해도 한평생 여유롭게 보내고도 남을 사람이었어. 하지만 강상호는 그 어떤 폭군의 군대보다도 강력한 인습의 장벽, 그 앞에 선 사람의 기가 질리게 만드는 완강한 차별의식의 성벽을 온몸으로 들이받는 용사로 탈바꿈했지.
가죽을 말리는 건피장에서 일하는 백정 가족의 모습.ⓒ독립기념관 제공
고달픈 노년 살다 쓸쓸하게 잊혀
백정들의 가장 큰 한(恨) 중의 하나는 자식 교육이었다. 백정의 자식이 학교에 오기만 하면 다른 아이들이 동맹휴업에 들어가는 지경이었으니 백정 아이들의 취학이란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런데 강상호는 이 문제를 매우 창조적으로 돌파한다. 어느 날 그는 백정의 아이 두 명의 손을 잡고 학교에 나타났어. 벌써 그 얼굴들을 알아본 학생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그는 난처한 얼굴의 교사들과 마주앉았다.
“허허 이거 잘 아시면서… 이 아이들은 백정의 아이들 아닙니까. 저희가 받을 수가….”
이때 강상호는 품 안에서 호적 서류를 꺼내 교사들의 코앞에 들이민다. 백정의 아이 둘은 놀랍게도 강상호의 호적에 올라 있었어. “이 아이들은 내 양자들이오. 내가 백정이 아니라는 건 아실 테고, 달리 안 되는 이유가 있소?” 그만 교사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지.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한다.
강상호는 백정이 인간임을 인정할 수 없던 사람들의 눈에 가시가 됐고 ‘때려죽일 결심’의 표적이 됐다. 1923년 5월25일, 그러니까 형평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백정들과 주민들 간 패싸움이 일어났고 분노한 주민들은 형평사를 찾아갔어. “그들은 형평사에 찾아와 그 사장 되는 강상호씨를 불러내어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였으며 의복을 찢는 등 봉욕을 주었다(〈동아일보〉 1923년 5월30일).”
이런 사건이 빈발하면서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형평사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백정으로 치부하겠노라 선언하고 형평사 소속 백정들에게는 고기를 사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들은 ‘신백정(新白丁)’ 즉 원래 백정이 아니었으나 백정에 동조한 강상호 등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휘두르며 시위를 벌였고, 강상호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의 집이나 가게에 찾아가 행패 부리기를 일삼았다. 일본 경찰 또한 형평사의 적이었다. 진주경찰서장이 “형평사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내가 직접 형평사를 해산하겠다”라고 기염을 토할 정도였어. 보통 사람들의 비난과 반발, 양반 일문의 외면과 따돌림, 일제 관헌의 방관과 경멸,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강상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일어서서 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원도 아니면서, 설움받는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과 어깨를 겯고 앞장까지 서고 그 때문에 받아야 할 불명예와 불이익을 기꺼이 감당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간성의 정수일 거야. 뭇 동료와 이웃의 지지 속에 강적과 싸우는 것은 힘겨운 일이지만 자랑찬 추억이 되고, 후일의 무용담이 된다. 하지만 편견과 인습에 사로잡힌 이웃들의 표적이 되고, 미쳤다는 손가락질 받아가면서 억눌린 채 지워진 이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거니와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헛심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지. 강상호는 그런 사람이었어.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고, 천석꾼 부자에서 빈털터리로 전락했으며, 해방 후에도 좌익 연루 혐의를 받아 고달픈 노년을 겪다가 1957년 쓸쓸하게 죽었다. 그 어떤 외부의 적보다도 강력하고 거대한 내부의 완고함에 돌팔매를 던지고 온몸으로 부딪친 다윗이었으나 결코 다윗처럼 영광스러운 존재로 기억되지 못했던, 되레 오랫동안 잊혀버린 영웅이었다. 그래도 강상호의 최후를 지킨 사람들은 백정들이었어.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이제는 어엿한 공화국의 시민이 된 사람들은 목메어 울며 강상호를 기렸다. 그들의 만사(輓詞)를 들었다면 강상호 또한 어깨를 폈을 것 같구나. 아울러 그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큰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나서서 오직 자유·인권·평등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들의 치학의 개방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만이 당해오던 50만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776호
강상호는 해방 후 좌익 연루 혐의를 받았다.ⓒ독립기념관 제공
백정(白丁)이라는 사회적 신분의 기원은 좀 복잡하다. 고려시대만 해도 일반적으로 농사짓는 백성들이라는 뜻으로 쓰인 이 단어는 조선시대 이후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포함해 특수한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사회적 신분의 뜻을 지니게 돼. 이를테면 유명한 백정 출신 도적 임꺽정은 버드나무로 생활 도구를 만들어 바치던 ‘고리백정’이었다지.
백정 남자들은 장가를 들어도 상투를 틀지 못했고 부녀자는 결혼해도 비녀를 꽂지 못했다. 양반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농민들도 백정이라면 흰 눈부터 떴다. 성인이 된 백정도 상민(常民)의 자제들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고 “너도 말을 해봐!” 할 때까지 입을 닫고 기다려야 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어 백정에 대한 법적 차별은 공식적으로 종식됐지만 나랏법이 바뀌었답시고 백정이 큰 갓 쓰고 길을 나섰다가는 뉘 집 멍석말이를 당해 세상을 하직할지 모르는 형편이었지.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다. 일본은 지금도 ‘부락민’이라 하여 사회적 천민 계층이 남아 있다고 하니, 백정 차별을 오히려 더 잘 이해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일제강점기 민적(民籍)상 백정들에게는 도한(屠漢), 즉 ‘도살업 하는 자’라는 뜻의 굵은 글씨가 항상 박혀 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백정은 계속 백정이었어.
3·1 항쟁의 폭풍이 온 조선을 휩쓸고 간 뒤의 어느 날, 경상도 진주 어느 동네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젊은이들 몇이 백정을 끌고 와 개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백정은 고개를 저었다. “못 잡겠소.” 이 버릇없는(?) 백정에게 분노한 혈기 방장한 젊은이들은 주먹질과 발길질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어떻노? 인자 개 잡을 거제?” 그래도 개 잡기를 거부한 백정은 잔인한 구타 끝에 목숨을 잃고 말았어. 눈에 핏발이 선 백정의 이웃들이 일본 경찰서에 달려가 범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호소했으나 일본 경찰은 백정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백정을 죽인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
참혹한 백정 청년의 죽음을 기화로 뜻있는 이들이 손을 잡고 일어선다. 백정 출신인 장지필·이학찬 등과 더불어 양반 출신 강상호가 백정 해방 운동을 주창하고 나선 거야. 마침내 1923년 4월 ‘형평사(衡平社)’의 깃발이 경상도 진주 하늘에 처음으로 휘날린다. ‘저울처럼 평등한 모임’이라는 뜻이었지. “우리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이다. …전국의 형평 계급아 단결하라.” 강상호는 백정 출신이 아니면서도 초대 형평사 사장을 맡는다.
강상호는 도무지 백정 해방 운동에 뛰어들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어. 강상호의 아버지 강재순은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사람으로 천석꾼 부자였고, 강상호는 장남이었다. 아무리 일제강점기라 해도 한평생 여유롭게 보내고도 남을 사람이었어. 하지만 강상호는 그 어떤 폭군의 군대보다도 강력한 인습의 장벽, 그 앞에 선 사람의 기가 질리게 만드는 완강한 차별의식의 성벽을 온몸으로 들이받는 용사로 탈바꿈했지.
가죽을 말리는 건피장에서 일하는 백정 가족의 모습.ⓒ독립기념관 제공
고달픈 노년 살다 쓸쓸하게 잊혀
백정들의 가장 큰 한(恨) 중의 하나는 자식 교육이었다. 백정의 자식이 학교에 오기만 하면 다른 아이들이 동맹휴업에 들어가는 지경이었으니 백정 아이들의 취학이란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런데 강상호는 이 문제를 매우 창조적으로 돌파한다. 어느 날 그는 백정의 아이 두 명의 손을 잡고 학교에 나타났어. 벌써 그 얼굴들을 알아본 학생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그는 난처한 얼굴의 교사들과 마주앉았다.
“허허 이거 잘 아시면서… 이 아이들은 백정의 아이들 아닙니까. 저희가 받을 수가….”
이때 강상호는 품 안에서 호적 서류를 꺼내 교사들의 코앞에 들이민다. 백정의 아이 둘은 놀랍게도 강상호의 호적에 올라 있었어. “이 아이들은 내 양자들이오. 내가 백정이 아니라는 건 아실 테고, 달리 안 되는 이유가 있소?” 그만 교사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지.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한다.
강상호는 백정이 인간임을 인정할 수 없던 사람들의 눈에 가시가 됐고 ‘때려죽일 결심’의 표적이 됐다. 1923년 5월25일, 그러니까 형평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백정들과 주민들 간 패싸움이 일어났고 분노한 주민들은 형평사를 찾아갔어. “그들은 형평사에 찾아와 그 사장 되는 강상호씨를 불러내어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였으며 의복을 찢는 등 봉욕을 주었다(〈동아일보〉 1923년 5월30일).”
이런 사건이 빈발하면서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형평사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백정으로 치부하겠노라 선언하고 형평사 소속 백정들에게는 고기를 사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들은 ‘신백정(新白丁)’ 즉 원래 백정이 아니었으나 백정에 동조한 강상호 등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휘두르며 시위를 벌였고, 강상호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의 집이나 가게에 찾아가 행패 부리기를 일삼았다. 일본 경찰 또한 형평사의 적이었다. 진주경찰서장이 “형평사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내가 직접 형평사를 해산하겠다”라고 기염을 토할 정도였어. 보통 사람들의 비난과 반발, 양반 일문의 외면과 따돌림, 일제 관헌의 방관과 경멸,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강상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일어서서 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원도 아니면서, 설움받는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과 어깨를 겯고 앞장까지 서고 그 때문에 받아야 할 불명예와 불이익을 기꺼이 감당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간성의 정수일 거야. 뭇 동료와 이웃의 지지 속에 강적과 싸우는 것은 힘겨운 일이지만 자랑찬 추억이 되고, 후일의 무용담이 된다. 하지만 편견과 인습에 사로잡힌 이웃들의 표적이 되고, 미쳤다는 손가락질 받아가면서 억눌린 채 지워진 이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거니와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헛심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지. 강상호는 그런 사람이었어.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고, 천석꾼 부자에서 빈털터리로 전락했으며, 해방 후에도 좌익 연루 혐의를 받아 고달픈 노년을 겪다가 1957년 쓸쓸하게 죽었다. 그 어떤 외부의 적보다도 강력하고 거대한 내부의 완고함에 돌팔매를 던지고 온몸으로 부딪친 다윗이었으나 결코 다윗처럼 영광스러운 존재로 기억되지 못했던, 되레 오랫동안 잊혀버린 영웅이었다. 그래도 강상호의 최후를 지킨 사람들은 백정들이었어.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이제는 어엿한 공화국의 시민이 된 사람들은 목메어 울며 강상호를 기렸다. 그들의 만사(輓詞)를 들었다면 강상호 또한 어깨를 폈을 것 같구나. 아울러 그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큰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나서서 오직 자유·인권·평등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들의 치학의 개방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만이 당해오던 50만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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