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20

광주항쟁은 정말 '특이한' 사건인가? by 혁명읽는사람 - 얼룩소 alookso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광주항쟁은 정말 '특이한' 사건인가? by 혁명읽는사람 - 얼룩소 alookso



혁명읽는사람·독서가
2023/01/29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광주항쟁은 정말 '특이한' 사건인가?
한국정치+3노동/인권/사회+14사상/철학/역사+9
"5.18의 특수성에 대한 논평"아래의 링크글 캡처본
https://alook.so/posts/PvtB3Ze

이렇게 빨리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2부를 쓸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최정운에 대한 저의 논평글에 대한 반론이라 보기도 어렵고, 누군가가 5.18을 '특이한 사건'으로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굳이 논평을 가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얼룩소를 시작하고 사실상 처음으로 "받은글"이라 그래도 제 의견 몇가지 제기하는 것으로 예의를 다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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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수성"과 "특이성"은 다른 개념이다.

김영빈씨는 5.18 광주항쟁을 "절대적 공동체론"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제 글에 대한 반론으로 5.18은 "한국사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민주주의운동사에서도 특이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에 대한 근거로 1)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진압하는 것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지만 시민들이 신군부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절대공동체"로서 시민군을 결성한 경우는 '드물다'는 것과 2) 군부의 만행과 거기에 맞선 저항의 이미지가 "유독" 무수히 재생산된다는 것을 삼고 있습니다.

일단 1)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할 부분은 '특수성'과 '특이성'은 다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특수성은 보편성과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일정한 정도의 '비교'를 전제로 합니다. 그렇기에 김영빈씨 또한 1)의 근거로 다른 민주화 항쟁(예컨대 부마항쟁)과의 비교를 하거나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다루거나 한국 '특유의' 자유주의를 문지영을 인용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특수성이 곧 "특이성"이 되는가? 사실 특수성이 보편성을 전제로 하고, 특이성은 그렇지 않다는 맥락을 강조하여 후자를 선호하는 들뢰즈나 가타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특수성과 특이성은 일상어의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어떠한 사건의 특수성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건의 "특이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적 언어사용에서 둘다 모두 일정한 비교를 전제로 하지만 특수성은 보편성과 대비되는 일정한 특질을 의미한다면 특이성은 하나의 대상이 지니고 있는 특이한 성질, 혹은 일반적이지 않은 특질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특수성을 곧바로 특이성과 등치시켜버린다면 오히려 "절대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지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맥락이 살아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특수성과 특이성의 차이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두고 김영빈씨뿐만 아니라 몇몇 분들도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두 개념을 구별해야 광주항쟁이 지닌 특수성에 대한 지적이 곧바로 그것의 '특이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점이 확실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김영빈씨의 지적대로 광주항쟁이 특이한 사건이 이유가 "시민들이 신군부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절대공동체로서 시민군을 결성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 때문이라면 제가 보기에는 논거들이 다소 잘못 제시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한마디로 광주항쟁의 특이성은 그것이 "절대공동체"를 형성했다는 데서 도출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논증이 되어야 할 부분은 최정운이 말하는 "절대공동체"가 왜 특이한 현상인가? 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1)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김영빈씨가 제시한 논거들은 a) 광주항쟁은 부마항쟁과 달리 저항했다, b) 한국의 징병제와 지역민병대의 전통이 광주항쟁의 군사화를 가능하게 했다, c) 한국 특유의 민중주의와 민중적 자유주의의 맥락이 존재한다. 이렇게 3가지입니다. 여기서 "절대공동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것은 c) 한국 '특유'의 민중주의적 맥락밖에 없습니다. b) 광주항쟁의 군사화 조건은 같은 조건을 지녔던 부마항쟁이 무력봉기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다시 a) 광주항쟁과 부마항쟁 간의 차이를 통해 엿보는 광주항쟁의 '특수성', 즉 "왜 광주만 계엄군에 계속 저항했는가?"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실상 a) 왜 광주만 저항했는가?와 c) 한국 특유의 민중주의적 맥락이 논거로 남습니다.

당대의 한국 상황에서 왜 광주만이 저항했는가? 에 대한 해답은 이미 노영기의 <그들이 5.18>이 제시하고자 시도했으며, 그 이전에 조갑제가 광주항쟁의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들을 인터뷰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조갑제닷컴, 2007)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 문제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광주항쟁이 부마항쟁과 달리 저항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계엄군의 폭력의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심각했는가? 김영빈씨가 지적하고 있듯이 부마항쟁에서도 광주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공수부대가 출격하여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폭력적으로 진압하였고 그것이 신군부에 의해 일종의 시위대응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마항쟁의 경험에 기초하여 광주항쟁 당시에도 무자비하고 폭력적으로 시민들을 제압하였는데 웬걸? 시민들이 무지막지한 폭력에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조갑제의 증언록에 인용되는 한 공수부대원의 말에 따르면 다른 지역은 공수부대원이라고 하면 혼비백산하여 "감히"(감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게 제게는 상당히 인상깊었습니다. 이 표현이 사용되는 문장 전후를 꼼꼼하게 읽어보면 공수부대원들은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수부대원한테 항의를 하고 심지어 덤비더라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소위 말해 "화가 난" 공수부대원들이 "감히" 공수부대원에게 대항한다니 시위대는 반反국가분자, 혹은 '빨갱이'라는 식으로 대응하며 더 폭력적인 대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폭력이 격화되며 사실상 공수부대원들도 일정한 지점이 넘어버리자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폭력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고 조갑제는 지적합니다. 현장에 있었던 그는 공수부대원들 중에 전라도 출신 군인들이 많았다며 경상도 출신 군인들로 전라도에서 학살을 벌이려 했던 것은 거짓이라 주장하지요. 조갑제가 보기에 '광주사태'는 폭력의 악무한 속에서 서로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학살하고자 했던 "비극"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공권력을 자임하는 국가의 폭력과 시민의 폭력을 등치시킨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부마항쟁과 대비되는 광주항쟁의 "특수성"을 두 가지 지점에서 해명해야 합니다. 부마 지역의 시민들이 광주 지역의 시민들에 비해 더 "비겁"했다고 하든지, 아니면 광주 지역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폭력의 강도가 부마 지역에 비해 더 강했다고 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반대로 부마지역에서 자행된 폭력의 강도가 너무 심해서 부마 지역의 시민들은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못했던데 반해 적어도 초기의 경우에는 광주 지역의 폭력의 강도가 약해서 점차 폭력사태가 격화되어 갈 수 있었다고 하든지 등등 이러한 여러 경우의 수를 놓고 실제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실증적 연구를 통해 검증해봐야 하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아는 수준의 현재 광주항쟁 연구사에서는 이 부분을 해명할 수 있는 자료나 논리적 근거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탄압의 주체 측인 신군부 측의 인식과 대응을 뒷받침할 자료들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노영기의 <그들의 5.18>은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지만 끝내 왜 광주인가? 에 대해 답을 내지 못합니다. 그는 단순히 계엄군, 공수부대 등의 반응이 광주와 그 이외의 지역에서 달랐다 정도만 지적하고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현재의 자료 수준에서는 말할 수가 없어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런 연구사를 고려한다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비교하며 그 연속성과 차이점을 드러내어 광주항쟁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는 어느정도 납득가능하지만 왜 그런가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그것이 "특이성"의 근거가 되기도 어렵습니다.

당장 b) 징병제와 지역민병대의 전통만 하더라도 프랑스 혁명사에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일반 시민들이 무장하여 투쟁하는 사건은 1789년 이래 1871년 파리코뮌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주로 혁명을 담지하였던 상퀼로트 등의 파리 시민들이 무장하여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저항하였는데 이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이 '국민방위군' 등의 민병대적인 집단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방위군을 통해서 정부군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들이 흘러나와 파리 시민들을 무장시키는데 활용되었고 그것으로 그들은 항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노명식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은 한국 프랑스 혁명사의 고전적인 저작인데 이 저작에서 노명식은 1871년의 혁명전통이 끝나는 이유로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맑스와 엥겔스가 1871년 무렵에 국제사회주의의 혁명의 주도권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갔다고 주장할 때 근거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혁명 전통에서 군대 내부로부터의 무기 유출과 그로 인한 인민의 자발적인 무장은 상당히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도 우리는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붕괴한 뒤에 이라크 군인 출신들이 대규모로 신흥 종교집단과 결탁하여 IS라는 무자비한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세력의 무력적 기반으로 기능하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혁명'이라 부르기는 어렵겠으나 혁명적 상황이라는 정치적 혼란기에 군대로부터 인적, 물적인 유출이 이뤄지며 저항세력이 폭력적 기반이 되는 경우는 흔합니다. 한국사의 전통에서 특수성이라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특이성이라 부르기에는 과도한 측면이 있지요.

왜 그런가요? 이미 박현채라는 '빨치산' 출신의 사상가가 광주항쟁에 대한 386 운동권 세력의 신성화를 비판하면서 과연 1980년의 광주가 1945년 이후의 빨치산에 비해 "저항의식"이 더 했는가? 하는 통렬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지닌 분들은 불편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으나 박현채가 보기에 광주항쟁은 단순히 살기 위해 무장한, "자연발생적"인 성격을 넘어서지 못하는 운동이었지만 해방 이후의 빨치산 활동은 자발적이고 의식적으로 군입대를 한 사회주의자들의 무장봉기였기에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었습니다. 전자에서는 계급의식조차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광주항쟁의 의의를 축소시키는데, 최정운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절대공동체'를 주장하지요. 박현채의 주장이 모두 옳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장하여 국가권력에 대항하고자 했던 전통이 유달리 특이한 것도 아니거니와 모두 징병제와 지역민병대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왜 광주인가? 에 대한 해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의 혁명사나 운동사 전통에서 무장봉기가 드물지 않다는 점에서 김영빈씨의 논거는 광주항쟁의 '특수성'을 어느정도 설명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특이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2. 민중이란 무엇인가?

1) 민중 개념은 이질적인 개념일까?

그렇다면 남은 논거는 단 하나, c) 한국 특유의 민중주의적 맥락정도가 있습니다. "한국 운동권과 진보좌파 진영의 '민중(minjung)' 개념은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한국 고유의 개념"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민중은 'people'을 의미합니다. 일본에서도 민중사관과 민중사 연구의 전통이 있습니다. '민중'이라는 표현과 의미를 한국에서만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의 오해가 있는 듯해서 정정하려고 이 말을 먼저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김영빈씨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한국에서 사용되는 "민중"이라는 개념어에는 타국의 people, 民衆 등의 용어가 담지 못하는 '한국적인 맥락'이 존재합니다. 김영빈씨가 주장하듯이 '한국적인 맥락'이 존재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만약 민중이라는 단어가 외국어로 번역되기 어려울 정도의 '특수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어쩌면 광주항쟁의 특이성으로서의 절대공동체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김영빈씨의 주장은 민중이라는 표현이 지칭하는 어떤 특정한, 한국적인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중은 정말로 외국어로 번역될 수 없을만큼 특수한 현상, 혹은 존재였을까요? 왜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 중 태반이 민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부터가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엄밀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에 대응하는 번역어를 찾을 수도 없거니와 과거에도 어느정도 민중을 '신비화'하는 경향이 존재했고 그에 대한 비판들도 이미 1990년대 이래로 무수히 이뤄졌습니다. 민중주의에 대한 역사적, 사상적 접근은 이미 무수히 많이 이뤄졌던 것이지요. 그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러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김영빈씨께서 주장하신다면 아마도 다르게 생각하시는 무언가가 있으려니 합니다. 좋은 연구를 기대합니다만 일단은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 접근들이 이뤄졌으며, 왜 개념규정이 어려웠는지 적어보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민중이라는 개념은 서경식 선생이 김상봉 선생과의 대담에서 말했듯이 "제가 민중일까요?"라는 도덕적 의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엄혹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과연 내가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인가? 민중이란 무엇인가? 이런 의문들에서 시작하여 1970~1980년대에 민중 개념은 "발견"된 "해방주체"에 가깝습니다. 누가 구체적으로 민중인지는 그때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며 사실상 지배계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민중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개념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그것이 포괄하는 범주가 지나칠 정도로 넓어진 것입니다.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듯 무수히 많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민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지배권력을 비판해왔지만 정작 그들은 민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1980년대 후반 체계화되기 시작한 "민중사관"의 맥이 얼마 지나지 않아 끊어지게 된 것도 민중이 무엇인지에 대한 엄밀한 개념적 규정을 행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지탱해주던 정치적 조건들이 한국의 민주화, 소련 등의 공산권의 패망 등으로 인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참 시간이 지나 2010년대 초에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민중사반을 따로 만들어 민중 개념을 재규정하고 그에 따라 민중사를 새롭게 서술해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고(<민중사를 다시 말한다>,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 역사비평사, 2013) 지금도 민중사 입장에서의 연구들이 계속해서 나오기는 합니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1980년대의 민중 개념과는 차이가 있는, 프란츠 파농부터 서발턴에 이르는 상당히 복잡한 이론적 계보를 지닌 일본의 야스마루 요시오의 민중사 연구나 조경달의 민중사 연구 등과 맥을 같이 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민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활동을 해왔고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이 민중 개념에 대한 정의를 알고 있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거든요. 사실 여기서 제가 '민중'이란 이런 의미이다, 라고 말하려고 한다면 그 무수한 시도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겠습니다만 대체로 한국의 민중 개념은 1980년대 후반의 '진보적' 민족주의의 흐름과 연결됩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박현채이고 그와 함께 했던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한국 민족주의의 발전 과정을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단계화 한 책이 바로 <한국민족주의론 1, 2, 3>(창작과비평사)입니다. <한국민족주의론 1>에서는 한국사의 전개를 민족주의의 형성과 전개로 파악하고, <한국민족주의론 2>에서는 분단시대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당대의 한국 민족주의의 과제를 짚어보았다면, 마지막의 <한국민족주의론 3>에서는 새롭게 나설 민족주의의 계급적 성격을 밝혀내고 그 역사적 주체로서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민중적 민족주의"라는 개념규정을 시도합니다.

지금은 민주당쪽으로 그 흐름들이 수렴되어버렸지만 1980~90년대의 진보적 민족주의의 흐름은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며 자신을 정당화하고 시대적 과제를 제시하였는데 그 중심에 박현채가 있었습니다. 박현채는 <한국사회의 계급연구 1>(한울, 1986)에 실린 글에서 민중의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민중이란 노동자 계급을 기본으로 하여 농민, 소상공업자, 도시빈민, 진보적 지식인 등으로 구성되는 집단을 지칭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의 맥락에서 '통일전선론'의 한국적 변용입니다.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어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극우 파시즘 등의 일부 정치적 반동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진보적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제세력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전선을 형성하며 사회를 진보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중 개념이 정말 이질적인가요? 아니면 맑스레닌주의적인 전통에 의거하고 있나요? 민중 개념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맑스레닌주의적인 전통, 다시 말해서 "계급이론"으로 "민족주의"를 해명하고자 시도하는데서 오는 이질성 때문입니다. 맑스주의는 애석하게도 민족주의를 설명하는데 실패했거든요. 그 둘을 억지로 결합시키려 하는 와중에 나온 게 바로 '민중'이었기에 민중은 대단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개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시기에 안병무, 한완상, 한상진 등의 신학, 사회학 등의 다른 인문사회과학 계열도 민중 개념을 규정하려고 노력합니다. 한완상은 민중 개념을 계급론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에 반대하며 "총체적 피지배계층"으로 규정합니다. 안병무 등의 민중신학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 한완상은 민중은 좁은 의미에서의 계급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계급은 생산수단의 유무에 따라, 다시 말해서 경제적인 불평등의 시각에서 파악되지만 민중은 정치적 결정수단과 사회문화적 차별수단의 점유 여부로 규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계급이 사회구성체의 경제적 하부구조에서 도출된다면, 민중은 문화라든지 정치적 상황 등의 상부구조로부터 도출되는 집단입니다. 그렇기에 한완상에게 있어 민중을 규정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는 "스스로 역사와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민중이 스스로를 변혁의 주체로 상정하고 사회변혁을 위해 활동하겠다는 의식을 지닌 '자각적' 존재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민중을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으로 나눕니다..만.. 여기까지 오면 갑자기 그만 알고 싶어집니다.

한상진은 민중 개념에 중산층 개념을 더해 그 자신의 특유한 사회학 이론인 '중민이론'을 전개합니다. 중산층으로 성장했지만 민중에 대한 귀속의식을 지니고 있는 중산층, 다시 말해서 "진보적인" 중산층이 사회변혁에 있어 가장 충실하고 든든한 주체이자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대체로 지금까지의 서술만 보아도 박현채를 제외한다면 민중의 내용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지배계층에 저항하는 피지배계층이라는 광범위하고 느슨한 개념규정을 전제로 그들의 의식적 자각, 저항주체로서의 자각을 강조해왔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 현실 속에서 권위주의 체제에의 저항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조건 속에서 쉽게 정당화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과 의식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레닌주의적인 '전위당' 개념과 거의 유사합니다. 맑스레닌주의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민중의 '지향점'이 "근대주의적"이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80~90년대의 민중 개념과 현대 역사학의 민중 개념 간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대체로 역사학에서 이뤄지는 민중사 연구는 앞서 지적하였듯이 일본의 야스마루 요시오의 민중사상사 연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야스마루는 민중을 지배이데올로기가 표방하는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인 제조건들 하에서 일정부분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끝없이 왜곡되어가는 사회 체제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저항하여 스스로의 미래를 그려내고 쟁취하려 노력하는 집단으로 봅니다. 이 민중의 범주에는 농민, 도시빈민, 일용직 노동자와 같은 하급노동력, 이들의 삶에 공감한 지식인 계층 등의 무수히 다채로운 계층들이 포함됩니다. 그렇게 다채로운 계층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의식, 사상적으로 일체화한 결합체가 바로 민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스마루는 민중사상을 민중의 일상생활체계로부터 다양하게 끄집어내어 읽어내고 체계화하려 노력합니다. 그의 민중사 연구는 크게 보자면 지배 - 저항(운동) - 생활이라는 '3층구조'로 구성되어 각각의 것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가를 놓고 그 속에서 민중의 저항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이렇게만 설명한다면 약간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한국의 민중사 연구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계급성을 강조하거나 지배계층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고 저항주체로서의 의식적 자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 아닌가? 일본의 민중사 연구의 흐름에서 보자면 그러한 연구들은 '인민투쟁사' 연구의 계보에 속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박현채처럼 계급성을 강조하고 그에 따라 변혁주체의 물적인 토대, 예컨대 자본주의와 같은, 에 의해 해명이 가능해지는 명확한 '주체'를 설정하고자 노력해왔던 흐름입니다. 하지만 야스마루는 이러한 개념들이 사실상 근대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해명해야 될 문제, 다시 말해서 저항의 주체로서의 민중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민중을 포섭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민중은 어느 정도로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는 것일까? 그 정도의 차이를 어떻게 읽어내고 이론화 할 것인가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며 민중사상사를 연구합니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일반생활'의 영역을 탐구해야만 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영역이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 얼마만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는가 등을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주요한 개념이 바로 '통속도덕'입니다. 통속도덕이란 민중의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 효행 등의 체계를 의미하는데 그에 따르면 그것의 실천이 오히려 지배계급의 안정적인 질서에 균열을 내고.. 등등 아무튼 복잡한 저항과정으로 나타납니다. 통속도덕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민중신앙과 종교, 무속, 미신 등에 대한 연구로까지 이어집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동학농민운동을 통속종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민중사를 그려내는 연구를 배항섭, 조경달 등의 여러 연구자들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구구절절하게 풀었습니다만 이런 맥락에서 민중 개념은 분명히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의 저항이라는 한국적인 맥락 및 상황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벗어난 보편적인 이론적 계보 안에 자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인민투쟁사가 민중사로 바뀌면서 연구방법론에서뿐만 아니라 민중의 변혁주체로서의 위상 또한 크게 변모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2) 민중은 왜 위계적인 저항을 하는가?

그런데 김영빈씨에 따르면 민중은 "불의하고 탐학한 국가에 저항하여 정의로운 민의가 우선되고 민초가 중심되는 나라를 만들자는 사고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국가로서 제 역할을 못하는 '국가'에 저항하는 인민들"이라는 이미지는 그에 따르면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이어진 '농민 반란' 정서"나 "유교 특유 민본주의 정신의 연장선"에서부터 "2008년의 촛불시위나 2016년의 박근혜 탄핵 시위"까지 이어집니다. 이미 유교의 연장선이라 하면 한국적 특이성을 주장하기 어렵겠습니다만 일단은 계속 진행해봅시다. 그는 이러한 한국 민중주의의 특질을 문지영 교수의 연구를 참고로 하여 한국적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의 성격과도 연결된다고 보는 듯합니다. 그러면 한국은 왜 이럴까요?

이미 오래 전에 안병태라는 재일조선인 경제사학자가 출간한 <한국근대경제와 일본제국주의>(백산서당, 1982)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와도 또 연결됩니다. 이놈은 무슨 말만 하면 다 마르크스하고 연결된다고 주장하나, 하고 불쾌하게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태초에 말씀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있었습니다. 농담입니다. 안병태에 따르면 조선인들의 저항운동을 분석해보면 양반 및 지주 계급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대부분 국가의 조세수탈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연결되는 주장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아시아적 사회에서는 유럽의 경우와 같이 '사회적' 계급관계가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고 '전제국가와 소농' 간의 관계가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소농의 재생산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에 대한 항의는 전제국가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집니다.

한국과 같은 전제국가 체제였던 중국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합니다만 중국의 소농경영은 이미 10세기 무렵에 소농사회에 도달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 '중간적 지주제', '기생적 지주제', '지주전호제' 등으로 부르는 다양한 지주제가 크게 발달하여 있었습니다. 김용섭 등의 자본주의 맹아론 계열은 이를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에 적용하여 분석하려 하였지만 자본주의 맹아론은 2008년 이후 사실상 학술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미야지마 히로시를 필두로 하는 소농사회론이 그를 대체하는 역사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더라도 조선왕조는 소농의 자립화 과정이 한중일 중에서 가장 늦었으며, 이영훈을 필두로 하는 한국의 경제사학계는 사실상 식민지기를 소농자립화의 기점으로 본다는 점에서 17~18세기로 보는 미야지마와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찌됐든 조선후기조차도 중국과 같은 규모의 대규모 농민봉기가 일어날 정도로 지주계급과 소작농 간의 대립구도가 뚜렷하지 않았던 역사적 특질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지방관헌들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까웠고 그것은 국가적 토지소유를 전제로 한 한국 사회의 특질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이영훈의 <조선후기 사회경제사>(한길사, 1985)나 여러 경제사학 연구들이 이 부분을 지적합니다. 딱히 특이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의 한계이자 특질이었던 것입니다. 중앙을 향해 돌진하는 강력한 '소용돌이의 정치', "나선사회"의 형성도 그런 17세기 이래의 소농사회의 형성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문지영은 강정인 교수와 함께 이런저런 작업들을 하는데 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겠다는 강정인 교수의 작업들을 고려한다면 자유주의의 한국적 특질을 주장하는 문지영의 주장도 걸러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문지영은 한국 자유주의가 개인이 아닌 민중, 단체 단위의 자유주의를 주창한다고 말하는데 이건 엄밀한 의미의 자유주의에서 이탈합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을 빼놓으면 성립할 수가 없는 사상입니다. 제가 정말 싫어하는 쪽입니다만 윤소영, 백승욱 등은 이것을 '인민주의'로 규정하는데 앞서 다루었던 민중주의와 겹칩니다. 사실 영어로 하면 둘다 포퓰리즘으로 번역됩니다. 사실상 그냥 포퓰리즘으로 한국적 특질이라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3) 포퓰리즘이란?

김영빈씨는 유럽과 남미의 수평적 포퓰리즘과 다른 수직적 포퓰리즘이라는 이숙종의 페이퍼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시는데 포퓰리즘 연구 자체는 결국 남미 계통에서 나온 라클라우-무페의 테제를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라클라우가 포퓰리즘을 긍정적으로 인식한 사람이니까요. 제 개인 SNS에 이에 대해 한번 길게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옮기기에는 양이 좀 많아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기본적으로 남미 포퓰리즘은 남미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남미는 맑스주의적으로 말하자면 무수히 많은 우클라드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클라드가 무슨 말이지? 쉽게 얘기하자면 서로 다른 이질적인 생산관계들이 겹쳐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각각의 생산관계에 속한 이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다릅니다. 지주제에 속한 소작농, 농민의 자급자족에 속한 이들, 자동차 산업에 속한 노동자 등이 모두 다르거니와 민족적/인종적 차이마저도 존재해서 사실상 이들을 하나로 묶을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는 게 남미의 상황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화"가 미진해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들이 얽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이 모든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정치적 운동과 변혁 주체가 필요합니다. 라클라우는 그 가능성을 '포퓰리즘'에서 찾는 것이고 그리하여 무페에 이르면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남미에서 좌파 포퓰리즘이 강하게 나타나는 건 이런 맥락입니다.

다음의 유럽에서의 포퓰리즘은 크게 지역적으로 북서유럽의 우파 포퓰리즘과 남유럽의 좌파 포퓰리즘으로 나눠집니다. 스웨덴 민주당, 핀란드의 진짜핀란드인민당, 독일의 독일을위한대안, 프랑스 국민전선, 오스트리아 자유당, 네덜란드 자유당 등의 급진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북서유럽의 주를 차지하고 있다면, 남부유럽에서는 오성운동, 포데모스, 시리자 등의 좌파 포퓰리즘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 들어 계속해서 지적해온 유럽에서의 근대국가의 중앙집중화 경향의 와해라는 역사적 조건과 결부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후쿠야마는 사회적 구심점을 형성하는 강한 국가가 여러 개의 정체성을 지닌 공동체들로 와해되는 현상이 세계화 속에서 가속화된 게 크다고 보는데 저는 이 분석에 동의합니다. 남미 지역의 다多우클라드와 유럽공동체 내부의 난민문제, 유로경제권 내부에서의 지역적 편차의 증대로 인한 국가공동체의 와해 등의 현상이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어서 좌파포퓰리즘 같은 개념이 적용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것도 유럽에서의 좌우 포퓰리즘은 개혁을 지향하는 남미의 좌파 포퓰리즘과도 세계화에 대한 대응양식에서 좀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남부유럽의 좌파 포퓰리즘은 임유진 선생이 지적하듯이 온라인 여론과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좀 다른 양상 같다고 생각합니다. 임유진의 <남부 유럽의 테크노 포퓰리스트 정당과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참고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에서 나타나는 포퓰리즘은 자본주의화가 거의 완전하게 진행되었으며, 내부에 사실상 유럽이나 미국의 이민자 공동체와 같이 국가를 부정할 정도의 강한 '정체성의 공동체'가 존재하지도, 그렇다고 남미처럼 복합한 다多우클라드 상황에 놓이지도 않아 국가에 대항할 집단이 많지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광범위한 대중동원에 기초한 정치적 투쟁의 격화가 주요한 갈등축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제시하였던 전근대부터 국가권력에 대항하던 아시아적 특질과 자본주의의 완성 속에서 하나로 잘 통합되어 광범위한 대중동원이 가능한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촛불시위는 적어도 제게는 긍정적인 변혁운동 혹은 현상이라기보다는 '쁘띠부르주아'적인 계급성격을 지닌 운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 용역보고서인 시민참여형 정치의 확산과 정당정치 개혁과제라는 연구에 따르면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 당시 참여자들 중 정규직, 자영업이 39.8%로 상당수를 차지했고, 그 뒤를 학생과 주부(36.8%)가 뒤따랐습니다. 그외의 비정규직, 계약직은 10%밖에 되지 않았고 실업자는 4.4%, 일용직, 아르바이트는 2.8%로 확연한 양극화가 나타났습니다. 월평균 가구소득도 201~600만원에 해당하는 이들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데 반해서 200만원 이하는 11.1%, 600만원 이상도 12.6% 등으로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연구는 이를 두고 시위의 주도층이 직업적으로 참여가 용이한 중위 소득집단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앞서의 민중 개념과 연결해서 파악해본다면 그 계급적 기반 자체가 상이하게 다릅니다. 적어도 박현채 등이 상정했던 민중 개념은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그것은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2016년 촛불시위는 그 시위주체 자체가 쁘띠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이들로 노동자 등은 사실상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둘을 같은 민중주의적인 전통 속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할까요? 적어도 "역사적, 사상적 접근"을 한다면 둘을 상이한 운동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3. 결론을 대신하여 : 저항정신 이미지가 타국의 민주화 운동들에 비해서 유독 무수히 재생산된다는 사실?

1)에 대해서만 답변하는데도 이렇듯 상당히 긴 글을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성격이 본래 좀 모난 사람이라 글을 읽다가 불쾌하게 느끼셨을 부분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2)에 대해서는 사실 다 동의하기 어려운데 첫 번째 근거인 "광주라는 지역성" 자체부터 저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박정희에 의해 지역차별주의가 시작되었다는 게 통설입니다만 그로 인해서 광주항쟁 이후 신군부에 의해 전라도 차별이 본격화되고 심화된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묻히는 것 같습니다. 전인권 선생의 <김대중을 계산하자>, <편견없는 김대중> 등의 저작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전라도 차별에 있어서 광주항쟁이 지닌 의미는 상당합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나는 게 전인권 선생께서 술자리에서 경상도 출신의 남성 분이 전라도 출신의 사람에게 빨갱이 새끼가 어쩌고 저쩌고 하자 전라도 분께서 술자리에서 반박도 못하고 홀로 광주항쟁에 나섰던 시민군이 얼마나 순수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 웅얼거리는 모습을 목격한 걸 위의 책에 기록해두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계엄군에게 진압된 민중항쟁이 여순사태 당시의 항쟁도 있고 빨치산 투쟁도 있고 뭐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것저것 참 많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유독 무수히 재생산되지도 않거니와 광주항쟁이 저항의 이미지로 발굴된 건 6공화국 출현 이후가 아니라 5공화국 치하에서의 '학생운동권' 집단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들이 그 이미지를 밀고 나갔던 것이고 그들은 제6공화국의 쟁취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제5공화국 역사 청산 과정도 성공했다고 판단했다면 노무현이 스타가 되었을리가요.

이런 건 인식의 차이라 할 수 있을테니 굳이 자세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타국의 민주화 운동들에 비해 유독 무수히 재생산"된다는 표현을 입증하려면 경제학도답게 수량화를 해서 가져오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마 유독이라는 표현을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혁명 전통을 이미지화 하려는 시도야말로 "무수히" 많이 이뤄졌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이미지화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와 횟수를 자랑합니다. 70년 넘게 했으니까요. 프레더릭 코니의 <10월 혁명>(박원용, 책세상, 2008)이 혁명의 기억화, 내러티브화를 잘 다루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무튼 제 결론은 광주항쟁은 나름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세계 민주주의사에서 유달리 특이한 현상 자체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인문사회과학적으로 해명이 가능하고 비교사적인 접근도 가능하며, 그로부터 유의미한 교훈들을 끄집어낼 수도, 활용할 수도 있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상 이 글에서는 광주항쟁의 의미를 새롭게 추출해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이 글이 기초가 되었으면 합니다.

너무 길게 말을 한 듯합니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셨더라도, 혹은 제가 다소 과격하거나 공격적으로 반응한 것처럼 느껴지셨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의견이 다를 수 있겠고, 그래서 저 또한 의견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혁명읽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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