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방배동에 살때 경비일 하시던 어른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이야기도 종종 나누곤 했는데 혼자 알기에는 귀한 내용들이 많아 그분께 동의를 구하고 정리하여 올려봅니다.
1942년에 충남 조치원에서 태어나셨는데 지금 세종시처럼 도시가 아니라 아주 깊은 농촌 시골이었다고 합니다. 1944년 아버님이 갑자기 일본에 전시근로자로 징용되셔서 떠나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누나들이 스스로 생계를 돌봐야 했습니다. 여자들끼리 힘든 농사일을 할 수도 없고 돌봐주는 친척도 없어서 황소를 팔아야했는데 도박을 하시던 친척어른이 빌려달라며 가져가시는 바람에 더욱 곤란해 지셨다고 합니다.
논에 추수를 못해서 다 익은 벼에 눈싸리가 내리는 상황이었는데 근처에 한학을 배우시고 서당일을 좀 하셨던 어른이 보다못해 도와주셔서 겨우 추수를 하고 다음해 모내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돌아오신 아버지가 이웃집어른께 은혜를 갚는다고 몇해동안 산에서 나무를 해와 땔감을 드렸습니다. 본인 이름까지 지어주셨던 고마운 분이셨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전시근로자로 일하셨던 아버지는 노동일이 고되기는 했지만 당시 일본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근대화된 모습에 크게 놀라셨다고 합니다. 농촌마을의 논들도 구획정리가 아주 잘되어 있었고 생산성도 좋았으며 일본인들의 시민의식에 깊은 인상을 받으시고 한국에 돌아와 자녀교육을 꼭 챙기시기로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글도 제대로 모르시는 분이 시내 서점까지 나가서 학년수련장 같은 참고서를 직접 사서 아들에게 주기도 하고 10리가 떨어진 국민학교에 누나들이 엎어서 등교시켜 주었습니다.
나름 공부도 잘하셔서 지역 명문학교인 조치원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셨다고 하는데 당시 농촌에서 이 정도 공부한 사람이 드물었다고 합니다. 상고를 졸업했지만 취직자리가 워낙 없던 시절이라서 군입대 전까지 고향에서 농사일을 도우셨습니다.
1964년 2월에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하여 기본훈련을 다 받을 때쯤에 KATUSA로 선발이 되셨는데 학력이 높은 병사들 위주로 선발하다보니 어르신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천 부평에 위치한 ASCOM으로 가셨는데 당시 모든 주한미군들은 이곳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거나 출국하였습니다. 거기서 신체검사을 받고 최종 선발이 된 병사들은 신체사이즈와 신발 사이즈 측정을 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미군 군복으로 갈아입았습니다. 커다란 의류대 (Duffel Bag)을 받고 거대한 피복창고로 가서 전투복과 정복, 전투화 같은 것들을 지급 받았습니다. 하나 같이 품질이 너무 좋아 놀라셨다고 합니다.
한참 걸린 피복 보급이 끝나고 마지막에 초콜릿과 과자가 든 커다란 레이션 박스 하나와 담배 한보루를 받았습니다. 이것들을 전부 고향집에 보내주셨는데 조카들이 처음보는 미제 초콜릿에 아주 신이 나서 잘 먹었다고 합니다. 애연가인 아버지도 미국담배 맛있게 잘 피우셨다고 회상하셨습니다.
거기서 처음 미국식 식사를 해보았는데 고향에서는 먹기 어려운 여러 종류의 고기를 넉넉히 먹을 수 있었고 14oz 커피통으로 만들어진 진짜 커피도 그때 처음 드셔보았습니다. 당시 한국은 미군에게 있어서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급식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일부 이런 미국식 식사를 못하는 병사들도 있었는데 이런 병사들은 한국군 부대로 다시 보내졌습니다. 그것에서 전국 각지에 있는 미군부대로 병사들을 보냈는데 거리가 먼 지역으로 가는 병사들부터 식사를 하고 출발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ASCOM을 떠나 도착하여 보니 동두천에 있는 행정중대(Administration Company)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무섭게 생기고 덩치가 큰 흑인 부사관이 교관으로써 KATUSA병사들을 교육하였습니다. 미군 제식 훈련, 군대 규율, 내무생활들을 교육하였습니다. 대부분 교육생들이 침대생활을 처음 해봤기 때문에 침구와 침대 정리를 매우 꼼꼼히 교육시켰다고 합니다. 그 부사관은 무서운 외모와는 달리 한국병사들에게 매우 친철하게 교육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KATUSA 병사들이 영어를 거의 못했기 때문에 한국군 육군본부 소속의 부사관들이 파견나와서 함께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 부사관들은 장기간 미군부대에서 근무해서 대부분 영어를 매우 잘하였습니다. 한국병사들도 각종 규정집이나 General Order List (보초일반수칙) 같은 것은 무조건 암기했습니다. 그 어르신은 거의 60년전에 암기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2주간의 행정중대 교육을 마치고 다시 교육생들이 각 소속부대로 이동했는데 일부는 DMZ로 가기도 하였고 어르신은 Bayonet Division이라고 불리던 7사단 사령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동두천은 하천을 중심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산속 깊은 곳에 7사단 사령부가 있었는데 정말 거대한 시설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사령부 막사에 들어가보니 60년대 이미 중앙냉난방이 가능한 곳이었고 상당히 쾌적한 환경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미군 야전부대들은 컨센트 막사(Quonset Hut)를 짓고 생활하던 것에 비하면 호텔과 같았다고 합니다.
미7사단 사령부 근처 소요산에는 당시에 미군 미사일 기지가 있었고 경비병들과 함께 기지를 지키던 커다란 군견 세파트를 처음 구경하셨습니다
7사단 사령부에서 주로 국기 계양식과 하강식, 경비 업무를 하셨습니다. 의장대 (Honor Guard)에서도 근무하시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처음 M14 소총을 지급 받았는데 크게 만족하신 것 같습니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M1소총으로 훈련 받았는데 이미 2차대전과 한국전에도 쓰여서 굉장히 노후화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M14는 거의 신품이었고 8발 클립이 아닌 20발 탄창을 사용하고 연발로도 나가는데다가 어께에 견착도 잘되어서 잘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의장대에서 그 크고 무거운 M14 소총으로 의장대 시범도 하고 총도 돌리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본부중대장님은 상당히 신사적인 분이셨고 미군 GI들과 KATUSA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당직사관으로 근무할 때도 전 경계지역을 규정대로 순찰하셨고 영어를 잘못하는 KATUSA들을 위해 힘든 훈련 동작들은 부사관들에게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병사들 모두 중대장님이 훗날 장군이 되실 것으로 믿어의심치 않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바로 소령으로 진급하셨습니다.
봄과 가을에 한번씩 PT test를 했는데 거기서 2000m 달리기에서 1등을 하여 의장대 중대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있으신데 그 중대장님은 키도 크고 헐리우드 영화에서 나오는 영화배우 같이 정말 잘 생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미군도 의장대는 외모를 엄격히 심사하는 것 같습니다.
부대 경비 임무에 투입되기 전에 대대장과 중대장이 직접 병사들의 복장상태나 General Order List에 대해 점검하였는데 준비상태가 우수한 병사들은 근무에서 면제해 주셨다고 합니다. 합리적이면서도 엄격하였던 미육군의 메뉴얼과 군대 문화에 대해 큰 인상을 받으셨는지 저에게 오랫동안 설명해주셨습니다.
당시 동두천에는 미군부대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경로를 통해 나오는 물자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고 합니다. 미7사단 사령부도 주민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여 어느 정도 묵인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만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될 때는 KATUSA 들을 통하여 단속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헌병대로 파견되셔서 45구경 권총을 지급받고 부대 근처에서 물자를 밀반출하는 것을 단속하였습니다. 좋은 품질에 맛도 좋았던 미국제 버터팩이 근처 시장이나 술집에서 화폐와 같이 통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군부대 주변에 가정이나 국가기관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젊은 여성들이 많았고 미군부대에서도 고민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부대안에 큰 극장이 있었는데 미군병사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았지만 KATUSA 들은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Sean Connery 출연한 007 Gold finger를 정말 재미있게 보셨는데 군에서 제대하고 난 이후에 한국에서 개봉한 것을 보고 놀라셨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시절 한국에서 가장 풍부하게 대중문화를 즐기신 분이셨습니다.
7사단 사령부 근무는 정말 좋은 환경이었고 한국인 병사들을 위해 1주일에 한번씩 쌀밥 같은 한국음식도 나왔습니다. 취사병으로 일했던 KATUSA 동기가 있어서 가끔 치킨 같은 것도 튀겨와서 같이 먹고 조촐히 파티를 했습니다. 그곳 생활에 적응을 하다보니 조금 지루해지셨는데 미국에서 새로온 GI 신병들이 의장대가 발사하는 105mm 예포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소소한 생활의 즐거움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1년 좀 넘게 근무하고 문산역 근처 굵은 밭이라는 곳에 있던 79포병대대로 전출을 가셨습니다 거기서 포탄을 운반하는 일을 하셨고 , M1911A1 권총 사격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한겨울이면 얼어붙은 강에 포격을 해서 얼음을 깨기도 했다는데 북한군이 얼음위로 걸어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 부대의 부사관들은 인근 지역주민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곳 콘센트막사에서 미군병사들과 제법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아주 더운 여름날 포탄 운송작업을 마치면 미군동료가 NCO 클럽에서 얼음잔을 힘들게 구해와서 시원하고 맛있는 콜라를 따라주었던 기억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당시 기준으로 한국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한국인이셨습니다 미군 버스를 타고 서울로 외출 나갈때 거기에 탄 대학생들이 미군병사에게 길을 물었는데 뒤에 있던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거지?' 다시 물어보는 것을 보고 대학생들이 저런 간단한 영어조차 못하는 것을 보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서울에 영어회화학원이라곤 '로버트 박의 컴컴 CCB 잉글리시'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18개월 간의 미군부대 생활을 마치시고 남은 군복무 기간에는 한국군 여군훈련소로 가셔서 근무하셨습니다 남자 기간병 26명에 여군 300명이 있었던 부대인데 다들 젊었기 때문에 정말 즐겁게 근무하시고 제대하셨다고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시기에도 가난한 시절에 근무했던 본인의 군대생활은 정말 운이 좋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군을 제대하고 1967년 서울 신림동의 양복제조회사에 취직을 하였고 그것에서 33년간 근무하시고 정년퇴직하셨습니다. 지금은 외손녀들을 가끔 만나는 즐거움으로 사십니다. 가끔 60년전에 함께 근무했던 분들이 생각나고 만나고 싶으실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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